제159차 역사문화기행 -충북 보은 11월10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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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차 역사문화기행 -충북 보은 11월10일(토)

관리자 0 113
제159차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역사문화기행
국화향 가득한 가을날에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에서는 아래와 같이 역사문화기행 떠납니다.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문화원 053-257-5657로 연락바랍니다.

▶주제 : 국화, 속세를 떠난 군자

▶날자 : 2018년 11월 10일(土)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보은군
        -청남대(국화), 피반령괴목공원, 보은 오장환문학관, 풍림정사
▶집결 : 남문시장 부근 대한내과앞
▶참가비 : 30,000원

▶일정
08:00 출발
08:10 두류네거리 국민은행 앞 경유
08:20 성서 홈플러스 횡단보도 앞 경유

10:30 청남대(국화축제)
11:40 이동

12:10 점심식사
13:10 이동

13:30 피반령 괴목공원
13:50 이동

14:20 오장환문학관 & 회인향교
      (오장환문학관에서 회인향교까지는 도보이동800m)
16:00 이동

16:10 풍림정사
16:40 출발 및 이동

19:00 대구 도착

●국화

국(菊)·구화라고도 한다. 국화는 관상용으로 널리 재배하며, 많은 원예 품종이 있다. 높이 1m 정도로 줄기 밑부분이 목질화하며, 잎은 어긋나고 깃꼴로 갈라진다. 꽃은 두상화로 줄기 끝에 피는데 가운데는 관상화, 주변부는 설상화이다. 설상화는 암술만 가진 단성화이고 관상화는 암·수술을 모두 가진 양성화이다.

꽃은 노란색·흰색·빨간색·보라색 등 품종에 따라 다양하고 크기나 모양도 품종에 따라 다르다. 꽃의 지름에 따라 18cm 이상인 것을 대륜, 9cm 이상인 것을 중륜, 그 이하인 것을 소륜이라 하며 꽃잎의 형태에 따라 품종을 분류하기도 한다.

국화는 동양에서 재배하는 관상식물 중 가장 역사가 오랜 꽃이며, 사군자의 하나로 귀히 여겨왔다. 중국 원산이라고 하나, 그 조상은 현재 한국에서도 자생하는 감국이라는 설, 산국과 뇌향국화와의 교잡설, 감국과 산구절초와의 교잡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재배를 시작한 시기는 당대(唐代) 이전으로 추정된다.


●청남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청남대길 646

1983년 6월 착공을 시작하여 12월 완공된 청남대는 지난 20년간 다섯 명의 대통령들이 휴식과 함께 국정을 구상하던 곳이다. 5공화국 시절부터 사용되다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4월 18일 개방한 뒤 800만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대통령 테마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위치상 대청호를 끼고 있기에 제법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으며, 본관, 오각정, 골프장, 양어장, 초가정과 대통령역사문화관, 대통령광장, 하늘정원, 음악분수, 대통령길[1] 등 많은 시설이 있으며, 본관을 제외하면 재량껏 관람할 수 있다. 각 시설물들에는 대통령이 실제로 이용하던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별장으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대통령경호실의 지휘를 받는 제338경비대가 청남대를 경비했으며 민간에 개방되면서 해체되었다.


●피반령(괴목공원)

-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계산리 산32-2

괴목공원이란 죽은 나무나 뿌리를 이용해 공예품을 만들어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곳은 피반령 고개 앞 400m 전 도로 옆에 있어 찾기에도 부담이 없다. 규모는 작지만, 이색적인 공원으로 독수리이며 토끼, 용 등 괴목공예 품이 약 1천여 점이 넘는다고 한다. 입구에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글귀도 보인다. 이곳을 가꾼 박흥운 할아버지는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박 할아버지는 전기도 수도도 연결되지 않은 이곳에서 25여년 생활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찍이 사업이 어려워지고 건강이 나빠졌을 때 우연히 이곳에 들려 만들기 시작한 것이 삶의 버팀목이 돼 지금은 공원까지 만들어졌다.둘러보면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여러 동물을 나타내는 공예품들이 보인다. 물개며 새, 공룡 등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작품들이 할아버지의 정성과 세월을 담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가볍게 보이질 않았다. 공원 중간에는 잠시 쉴 수 있는 자리도 있다.그러고 보니 이곳은 구불구불한 피반령 고개 바로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피반령 고개의 유래를 살펴보면 옛 조선 시대 이원익이 경주 목사로 부임할 때 가마를 타고 이 고개를 넘다가 가마꾼들이 힘이 들어 걸어서 고개를 넘자고 하자 이원익은 가마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가마꾼들은 기어서 오라고 명령을 했다고 한다. 이에 가마꾼들이 손발에 피가 터진 채로 고개를 넘게 돼 '피발령'이라 불리다가 이후 피반령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바뀌게 됐다고 한다.


●오장환문학관

-충북 보은군 회인면 회인로5길 12

보은군 출신의 시인으로 알려진 오장환(吳章煥, 1918~1951)의 문학관으로 2006년 10월에 개관하였다. 월북시인 문학관으로는 처음으로 개관하였으며, 문학관 맞은 편에는 오장환이 태어난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문학관 내에는 전시실, 문학사랑방, 영상실, 홀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전시실에는 동시 액자 11점, 사진자료 20점, 시인 기증시 9점, 도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10월에는 이곳에서 오장환 문학제가 열린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월요일, 신정, 설, 추석 등은 휴관한다.

▶오장환
1918년 5월 15일 충북 보은 태생.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하여 1930년 안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휘문고보를 중퇴한 후 일본에 잠시 유학차 다녀왔다.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낭만』,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이듬해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48년 2월경 월북하였으나, 남로당계로 분류되어 숙청되었다.
그의 초기시는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과 도시에서의 타향살이, 그에 따른 감상적인 정서와 관념성이 시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1936년 『조선일보』, 『낭만』 등에 발표한 「성씨보」, 「향수」, 『성벽』, 「수부」 등이 이런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37년에 시집 『성벽』, 1939년에 『헌사』를 간행하였다.
1940년 『인문평론』에 「신생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초기시의 경향을 극복하고, 당대 현실을 직시하는 시편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에는 일제 말까지 썼던 시를 모은 『나 사는 곳』(1947)과 해방된 조국의 현실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시들을 묶어 『병든 서울』(1946)을 간행하였다.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오장환전집』을 간행하였다.
오장환의 시 세계는 연대순으로 묶인 시집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시들은 경향상, 1936~1939년의 『성벽』과 『헌사』, 1939~1945년의 『나 사는 곳』, 그리고 광복 이후의 『병든 서울』로 대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편의를 위한 것일 뿐 그의 시 이해에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작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오장환에게 있어 그리움은, 때로 유교적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면서도 도시와 항구의 신문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비판 정신으로 변주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향과 육친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그 자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광복 정국의 격동기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조국 건설에 대한 지향으로 변모되기도 한다. 먼저 「성씨보」에서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고 하여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유교적 관습과 전통을 부정한다. 이런 부정을 바탕으로 「해항도」, 「선부의 노래」, 「온천지」와 같은 시에서는, 신문물이 들어오는 항구나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나, 그곳도 역시 ‘병든 시인 오장환’(「불길한 노래」)이 ‘병든 비애의 역사’(「The Last Train」)를 만나는, 고향 아닌 장소일 뿐이었다.
일제 말의 시들은 초기시의 경향과는 다른 시 세계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어머니나 애인, 또는 고향에 대한 직접적인 그리움의 노래로 나타난다. 그러나 「향수」, 「나 사는 곳」 등에서 나타난 바처럼, 강이 가까운 산골의 고향 마을과 그 고향에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은 “고향 가차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고향 앞에서」)라고 하는 미완의 귀향 노래에 머물러 있거니와, 이는 그 자신이 바라는 고향에 아직 가 닿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귀향은 육체적 고향으로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광복까지를 염두에 둔 그것임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오장환의 그리움은, 현실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예찬과 부패한 무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나타났다가, 「병든 서울」이나 「승리의 날」과 같은 시들에서는 새로운 조국 건설이라는 민중의 간절한 열망으로 구체화되는 모습을 나타낸다. 광복된 조국의 현실적 과제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행사시와 이념시를 통하여 또 다른 고향 찾기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회인향교

- 충북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이 향교는 조선 세종(1418~1450, 재위)때 창건되었으며 선조 때 임진왜란의 재화로 불타자 보은향교에 합하였다가 광해군 3년(1611)에 재건하고 그뒤 여러번의 중수가 있었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로 문묘에는 대성전만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곧자를 비롯하여 4성과 22현을 봉안하고 매년 춘추로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목조인데 누문 형식으로 1층은 모두 개방된 것을 뒤에 벽을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풍림정사

- 충북 보은군 회인면 눌곡리

1978년 12월 1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인 호산 박문호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72년(고종 9)에 세운 것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목조기와집이다.
오른쪽 1칸은 부엌이고 2칸은 온돌방으로 앞에 툇마루를 놓고, 2칸은 강당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풍림정사(楓林精舍)’란 편액은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글씨이고, ‘풍림정사기(楓林精舍記)’ ‘풍림강업서(楓林講業序)’‘여담간명서(麗潭間銘序)’ 등의 현판과 회암(晦庵)의 ‘연비어약(鳶飛魚躍)’의 글씨 현판이 있으며, 박문호의 문집인 《호산집》의 판본과 목활자 일부가 남아 있다.
정사 뒤쪽에는 1906년(광무 10)에 세운 후성영당(後聖影堂)이 있는데 주자(朱子),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한원진(韓元震)의 모사본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던 곳으로 1921년 박문호의 영정을 추가 봉안하였다.

▶보은 풍림정사 은행나무 (출처:서울신문)
충북 보은 회인면 눌곡리. 너른 들녘을 거느리고 순리를 따라 살아가는 농촌 마을에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봄기운이 담겼다. 봄의 소리를 가슴에 안고 분주히 오갈 농부들의 발걸음을 맞이할 들녘은 그러나 아직 고요하다. 언 땅이 풀려 축축해진 흙길이 정겹기만 하다. 평안한 마을길을 걷다 보면 길옆으로 이어진 낮은 비탈에 기대어 세워진 한 채의 고택과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발길을 붙잡는다. 보은 풍림정사와 그 집의 솟을삼문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봄을 앞두고 달콤한 정적이 감도는 마을 들녘에 사람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지나는 사람은 물론이고 번듯한 신작로를 지나는 자동차도 고작해야 한두 대 정도다. 모두가 다가오는 새 봄의 농사일 채비로 한창 웅크리고 있는 중이다. 마음으로만 봄을 재촉하는 참 평화로운 정적이다.
발길을 붙잡는 풍림정사 대문 앞의 은행나무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평범한 나무다. 큰 나무도 아니다. 키가 18m쯤 되고, 가슴 높이 줄기 둘레는 4m가 채 안 된다. 지금의 생육 상태로 보아서 나이는 대략 150살 정도로 짐작된다.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은 물론 아니고, 산림청 보호수 목록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그저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다. 그러나 나무 앞으로 펼쳐진 들판을 거느리고 서 있는 풍림정사 은행나무의 자태는 여느 문화재급 은행나무 못지않게 아름답다. 낮은 기와 돌담과 고택의 기와지붕 위로 널찍이 드리운 나뭇가지가 이뤄낸 유장한 곡선은 옛 선비의 기품까지 느끼게 할 만큼 듬직하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 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이지 싶다.

자연의 곡선을 닮은 우리 옛 건축물이 큰 나무와 잘 어울리는 건 당연한 일이건만, 풍림정사 은행나무는 이런 점에서 유난하다. 아예 처음부터 이 자리에 꼭 이만한 크기로 서 있었던 것처럼 나무와 풍림정사의 조화는 완벽하다. 기와 돌담이 바닥에 이룬 수평선을 디딤돌 삼아 수직으로 일어선 은행나무의 곧은 줄기는 사람의 눈을 가장 즐겁게 하는 황금분할의 비례를 이뤘다. 또 사방으로 고르게 펼치며 기와지붕 위로 살포시 올라선 나뭇가지가 드리우는 그늘의 풍성함은 고택의 빈 마당을 빈틈없이 채운다. 그야말로 나무와 사람살이가 이룬 아름다운 조화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들여 관리하는 나무임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나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나무의 위치나 주변 환경을 바탕으로 해서 그저 풍림정사와 관계 있는 나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풍림정사의 연륜이 그리 길지 않아 나무의 연륜도 쉽게 짚어볼 수 있다. 풍림정사는 이 마을 출신의 선비 박문호(1846~1918)가 개화파와 수구파의 정쟁으로 혼란스럽던 조선 후기에 손수 지은 서당이다. 정통 성리학의 명맥을 잇고자 한 그는 당장에 자신이 벼슬을 얻는 것보다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72년의 일이다. 나무의 나이도 풍림정사를 세운 때와 일치한다. 결국 나무를 심은 것도 박문호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풍림정사를 짓고 대문 앞에 나무를 심었다. 정통 유학자답게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기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아마도 앞으로 오랫동안 잘 자랄 수 있는 건강한 묘목을 구해 심었을 것이다. 이 땅의 정신세계를 지켜온 유학의 가치, 혹은 공자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떠올리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선비 박문호는 특히 남녀 차별 극복을 매우 강조했으며 최초의 본격 근대 여성 교육서인 ‘여소학’(女小學)을 펴내기도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하늘이 주어진 본성대로 혹은 순리대로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억압된 여성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남녀 모두 순리에 따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바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전히 박문호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눌곡리 마을에서는 풍림정사와 그의 은행나무를 정성껏 지키고 있다. 한때 마을 사람들은 풍림정사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을 거두어 판매한 이익금으로 풍림정사와 은행나무를 관리했다고도 한다. 고작 200년도 채 안 된 나무이지만 후손들에게는 천년을 더 살아온 여느 큰 나무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은행나무다. 그건 바로 우리 삶과 자연의 순리를 그르치는 온갖 억압과 장애를 물리치고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는 옛 사람에 대한 자랑이다. 눌곡리 들녘을 한 바퀴 돌아 풍림정사 은행나무로 스며드는 상큼한 바람에는 옛 선비와 그를 따르는 농촌 사람들이 지켜온 인간 사랑의 큰 뜻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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