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차 역사문화기행 제주 / 2020년 05월 9일(土)~5월 10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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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차 역사문화기행 제주 / 2020년 05월 9일(土)~5월 10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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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차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역사문화기행

▶날짜 : 2020년 5월 9일(土)~10일(日)
▶지역 : 제주도
▶집결 : 대구공항(오전 7시30분, 대구공항 1번 출입문 앞)

▶일정
▷첫째날
07:30 집결(대구공항 1번 출입문 앞)
08:00 수속
08:30 대구공항 출발 제주공항으로
10:00 제주공항 도착
10:20 제주 45인승 버스 탑승
10:30 출발
10:50 용두암, 용연, 서자복,
11:30 이동
11:50 삼성혈
12:20 점심식사(만세국수삼성혈점 064-727-7056 제주고기국수)
13:10 이동
13:40 절물자연휴양림
14:40 이동
15:00 송당본향당
15:20 이동
15:40 비자림
17:00 이동
※해안도로 이동 월정리해변, 김녕해변, 동복환해장성, 북촌포구, 함덕해변, 신흥리방사탑
17:30 조천 연북정
17:50 이동
18:10 원당사지오층석탑
18:30 이동
19:00 저녁식사(오현불백 064-724-2861,한치돼지불백 등)
20:00 도보로 숙소 이동(오현단, 제주읍성, 동문시장)

▷둘째날
08:00 이동
08:10 아침식사(모이세해장국 064-746-5128, 해장국)
09:10 이동
09:20 관덕정 및 제주목관아
10:20 이동
10:50 구엄리 돌염전
11:00 이동
11:20 월령리 선인장군락
11:50 이동
12:00 점심식사(고향흑돼지.064-796-6426.흑돼지불고기)
13:00 이동
13:30 새별오름
14:30 이동
15:00 제주향파두리 항몽유적
16:10 이동
16:50 제주공항
17:45 제주공항 출발
18:50 대구 공항 도착


●용연·용두암(기념물 제57호)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용연과 그 주변 해안가에 있는 용암이다. 용연은 작은 연못과 같은 소(沼)를 말하는데, 취병담 또는 용추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지방관리와 유배된 사람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특히 밤 경취가 매우 아름다워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용두암은 약 50∼60만년 전의 용암류로 구성된 층으로 추정되는데, 밖으로 드러난 암석이 모두 붉은색의 현무암질로 되어 있다. 이 용두암은 용암이 위로 뿜어 올라가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관찰되고 있어 지질학적으로 연구 가치가 있는 귀중한 자연 유산이다.

◈서자복(민속문화재 제1-2호)
용화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으로, 옛날 제주성의 서쪽에서 성 안을 수호하는 기능을 하였다 한다. ‘자복신(재물과 복의 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 어른’이라 불리워지며, 신장 273㎝, 얼굴길이 135㎝, 아랫몸 둘레 315㎝의 크기인데, 높이 66㎝의 받침돌 위에 서 있다. 돌하루방과 같은 형태의 돌모자를 쓰고 있으며, 인자하게 내려다보는 눈, 우뚝한 코, 지그시 다문 입, 커다란 귀 등에서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곁에는 높이 75㎝, 둘레 100㎝가 되는 남근을 상징하는 동자상이 서 있는데, 여기에 걸터앉아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15일과 11월 15일이면 미륵을 위한 불공이 법당 안에서 행하여진다. 정확한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로 추정하며, 고을을 수호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민간신앙과 불교의 결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제주삼성혈(사적 제134호)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절물자연휴양림

1995년 7월 23일에 개장했으며, 구역면적은 300만㎡, 1일 최대 수용인원은 1,000명이다. 제주시청에서 관리한다. 봉개동 화산 분화구 아래 산림청이 관리하는 국유림에 조성했으며, 울창한 수림의 대부분이 수령 30년 이상의 삼나무이다. 삼나무 외에 소나무, 산뽕나무가 분포하고 있고, 까마귀와 노루도 서식한다. 휴양림 가운데 자리잡은 절물오름은 해발 650m의 기생화산으로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말발굽형 분화구가 형성되어 있다. 분화구의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시와 한라산이 보인다.


●송당본향당(민속문화재 제9-1호)

제주도 섬이라는 자연적 한계, 곧 거센 파도와 싸우며 살아야하는 특수성 때문에 신에게 의존하는 바가 컸다. 본향당, 포제단, 처녀당, 미륵당, 해신당 등 제주도에 다양한 민간 신앙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은 이와 같은 모진 삶 때문이다. 제주도에는 마을마다 마을의 토지와 그 마을 사람들의 출생, 사망 등의 일을 맡아보는 신을 모셨다. 이 신이 본향신이며 본향신을 모신 곳이 본향당이다. 특히 구좌읍 송당리에는 송당 마을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것은 물론, 제주도 본향신의 원조라고 전해지는 송당본향당이 있다. 송당본향당에 모신 신의 내력을 말하는 '송당본향 본풀이'에 송당본향신이 제주도 본향신의 원조가 된 내력이 나와있는데,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금백주라는 여신이 서울 남산에서 태어나 혼기가 되자 제주도 송당마을의 소천국이라는 남자를 찾아와 결혼을 하였다. 자식을 많이 낳고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친 뒤 각각 윗송당과 아랫송당에서 죽자 부부는 각 마을의 당신이 되었고, 자식들도 각자 자기가 차지할 마을을 찾아가서 제주도 내 여러 마을의 당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당 가운데 으뜸인 송당본향당은 삼나무 숲이 울울한 당오름(306m)의 북쪽 기슭에 있다. 어른키 만한 돌담을 네모지게 두르고 안쪽에 계단식 제단을 마련한 뒤 제단 위에 단칸짜리 기와지붕 석실을 지어 안에 '금백조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 송당본향당에서는 해마다 음력 삼월 열사흗날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제를 지낸다. 본향당은 여성들이 주관하는 무속적 성향의 당굿이 벌어지는 곳이다.


●제주평대리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374호)

비자나무는 주목과에 속하며,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넓게 피며 열매는 가을에 길고 둥글게 맺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이 비자림지대는 평대리에서 서남쪽으로 6㎞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총 2,570그루의 비자나무가 심어져 있다. 나무들의 나이는 300∼600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자나무 숲은 옛날에 마을에서 제사 지낼 때 쓰던 비자씨앗이 제사가 끝난 후 사방으로 흩어져 뿌리를 내려 오늘날의 비자숲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비자가 예로부터 약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잘 보존되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비자림지대는 비자나무 숲으로는 그 규모가 세계적으로 크고 학술적인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연북정(유형문화재 제3호)

바닷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로 조선 선조 23년(1590)에 조천관 건물을 새로 지은 후 쌍벽정이라 하였다가 선조 32년(1599)에 건물을 보수하고 이름을 연북정으로 고쳤다. ‘연북’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충정의 뜻을 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게 축대를 쌓고 다진 기단 위에 세웠다. 축대의 북쪽으로 둘러싼 타원형 성곽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망을 보기 위한 망대의 용도로 지은 것이라 추측한다. 기둥의 배열과 건축재료의 배열방법은 모두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다.

◈조천비석거리(기념물 제31호) : 제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제주도에는 역사가 오래된 마을마다 비석거리가 존재하는데, 이 비석거리는 조천 포구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조천지방은 교통수단을 바닷길로만 의존할 당시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포구로, 많은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러한 제주목사나 판관 등 지방관리들의 부임 또는 이임시 이들의 공적과 석별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곳에 비를 세워놓았다 한다. 모두 7기의 비석이 남아 있는데, 모두 양 기둥을 세운 채 그 안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주인공은 제주목사를 지낸 채동건·백희수·김수익·이의식·이원달,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 등으로 그들 각각의 추모와 선정을 기리고 있다. 이런 비는 ‘불망비’, ‘선정비’라고도 부르는데,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아 조선 후기에 더욱 성행하였다. 이 7기의 비들은 건립된 시기가 각기 다른데, 비석 뒷면이 많이 깎여 있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조천연대(기념물 제23-5호) : 제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980
조천 연대는 동쪽으로 왜포연대, 서쪽으로 별도 연대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조천진 소속의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배치되어 지켰으며, 현재 연대의 모습은 1975년에 수리한 것이다.

◈조천진성(기념물 제68호) : 제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
제주도내 9개 진성 가운데 하나로서 조천포구에 위치하고 있다. 성곽의 원형이 상당부분 잘 남아 있어 진성 등의 성곽분야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연북정과 함께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뛰어나므로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한다.


●제주불탑사오층석탑(보물 제1187호)

원당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원당사는 조선 중기에 폐지되었고, 1950년대 이후 절터에 새로이 지어진 불탑사가 대신 자리잡고 있다. 탑은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두고,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탑 주변에는 돌담이 둘려져 있다. 기단은 뒷면을 뺀 세 면에 안상을 얕게 새겼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하였다. 탑신의 1층 몸돌 남쪽면에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그리 크지 않지만,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머리장식은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인 탑의 모양이 조형성이 적고 무거워 보이는 점으로 보아 지방색이 강했던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주관덕정(보물 제322호)

제주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제주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다.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안무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 개씩 짜 놓았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 의해 밝혀졌으며, 지붕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처마 부분을 많이 잘라냈다. 제주 관덕정은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건물 안쪽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제주목관아(사적 제380호)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제주 관덕정(보물 제322호)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 주요 관아시설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제주시에서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주요시설이었던 동헌·내아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攬)』 등 당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지난 2002년 12월 복원공사를 완료하여 제주 고유의 역사적 숨결을 전해주고 있는 장소이다.


●구엄리 돌염전

구엄리~중엄리~신엄리 일대 해안은 제4기 초기에 분출된 신엄리현무암으로 덮여있다. 신엄리현무암은 암회색이고 암석 표면에서 4~5cm 크기의 장석 결정이 관찰되거나 장석 결정과 함께 어두운 색깔의 휘석 결정이 세립 반정으로 나타난다. 구엄리 포구 동측 방파제 부근에서는 결정 크기가 약 2~7mm 정도의 장석 반정이 표면에서 다량으로 관찰되는 현무암이 분포하기도 한다. 신엄리현무암이 분포하는 이 지역 중 구엄포구 가까운 지역처럼 클링커층이 거의 삭박되고 평활한 표면을 이루는 곳이 있다. 현무암 표면이 비교적 치밀하여 바닷물을 가두어 둘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예전에 염전을 만들어서 소금을 제조하였다고 한다. 즉 점토질 흙으로 현무암의 수직절리 부분을 덮어 언덕처럼 만들고 그 칸칸마다 바닷물을 채우고 햇볕으로 말려서 천일염을 제조하였다. 제주지방에서는 이런 평편한 돌염전 현무암을 “소금빌레”라고 하였다.


●제주월령리 선인장군락(천연기념물 제429호)

선인장이라고 하면 뜨거운 사막을 연상하게 되는데, 사막에 자생하는 것 외에도 종류가 다양하다. 대부분의 선인장은 잎 대신에 가시가 나 있으며, 줄기는 둥근모양, 원통모양 등 보통 식물에서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조직 내에 많은 수분을 오랫동안 보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오랜 가뭄도 잘 견딜 수 있다. 선인장 가시는 사막에서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 퇴화되어 생긴 것으로,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선인장 군락은 제주시 월령리의 해안 바위틈과 마을 안에 있는 울타리 형태의 잡석이 쌓여 있는 곳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멕시코가 원산지인 선인장이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열대지방으로부터 밀려와 야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주민들은 그 형태가 손바닥과 같다하여 “손바닥선인장”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이 쥐나 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돌담에 옮겨 심어 월령리 마을 전체에 퍼져 있다. 월령리 선인장 군락은 선인장의 자생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국내 유일의 야생군락으로 분포상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민간약으로 쓰이거나 해로운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심어 놓는 등 주민들의 유용식물로 민속적 가치가 있다.


●새별오름

해발 519.3m, 높이 119m 인 기생화산으로 분화구의 형태는 복합형이다. 오름을 오르는 입구에서 약 30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가축을 방목하였으며 겨울이면 들불을 놓았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서는 들불축제가 열렸다. 오름엔 들불을 놓은 후 자란 풀이 고운 풀밭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의 5개의 봉우리는 서로 이어지면서 근처의 오름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름의 서쪽 등성이는 매우 가파르다. 고려말 새별오름에서 '목호의 난' 이 일어났으며 최영장군의 토벌대가 난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항파두리 항몽유적(사적 제396호)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은 고려 원종 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맞서 고려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최후까지 항쟁하다 원종 14년(1273) 전원 순의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였던 곳으로, 1997년 4월 18일에 사적 제396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해발 약 190∼215m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고성천이 있고 서쪽으로는 소왕천이 있다. 지형은 남고북저를 하고 있는데, 북쪽인 경우 토성부근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완만하나 서쪽은 단애를 이루는 하천을 두고 있어 성을 쌓기에는 천연적으로 적합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토질은 자갈이 약간 함유된 황갈색 토양으로 이뤄졌고, 찰기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토성을 쌓기에는 적합한 성질을 띤 토양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 기와, 자기, 연못터, 장수물, 구시물, 옹성물, 살 맞은 돌 등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고, 주요 시설로는 관리사무소, 휴게소, 전시관, 순의문, 순의비를 두고 있다. 1977년부터 현재까지 토지매입을 비롯한 토성복원사업, (시)발굴조사 등의 연차적인 정비사업을 추진해 나가고 있으며, 특히 2011년도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시굴조사 결과 항파두성의 중심부인 내성의 규모 및 내성 내 주요시설물(건물지)의 존재 및 다양한 유물을 확인함으로써 제주도에서의 삼별초 대몽 항쟁 본거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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