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차 역사문화기행 (충북 제천-월악산) -2023년 6월 10일(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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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차 역사문화기행 (충북 제천-월악산) -2023년 6월 10일(土)

179차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역사문화기행

 

날자 : 2023610()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월악산)

- 옥순봉출렁다리, 덕주사, 사자빈신사지

집결 : 남문시장 부근 대한내과 앞

차량 : 45인승 버스

참가비 : 4만원(대구은행 096-05-002769-1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일정

08:00 출발

08:15 성서 홈플러스 횡단보도 앞 경유

 

10:40 옥순봉 출렁다리

11:30 이동

 

12:00 점심식사

13:00 이동

 

13:20 덕주사 및 덕주산성

-제천덕주사마애여래입상(보물), 제천덕주사석조약사여래입상 등

-덕주산성 동문, 덕주사, 덕주산성 남문까지 걷기

14:40 이동

 

15:00 사자빈신사지 및 계곡 족욕

- 제천사자빈신사지사사자구층석탑(보물)

 

16:30 출발 및 이동

19:00 대구 도착

 

 

옥순봉 출렁다리

 

청풍호반 수면 위에서 제천10경 중 하나인 옥순봉을 가장 가까이에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옥순봉 출렁다리는 20211022일 개장하였으며, 길이 222m, 너비 1.5m의 연결다리 및 408m 길이의 생태탐방 데크로드와 야자매트로 이루어진 트래킹길까지 더하여 호반과 옥순봉을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명승 제48호이자, 제천10경 중 제8경 옥순봉의 수려하고 힘찬 봉우리의 자태를 옥순봉 출렁다리에서 온몸으로 느끼며 만나보세요.(제천시청 홈페이지)

 

 

덕주사(德周寺)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587(진평왕 9)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세우고,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의 덕주사는 1964년 보물로 지정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앞에 있었는데, 1951년 군의 작전상 이유로 소각하였다. 창건 당시의 절을 상덕주사, 지금의 절을 하덕주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지점에 있었는데, 1951년 무렵 까지만 해도 고색창연한 기도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상덕주사는 1622(광해군 15)에 중수되었음이 옛 극락전 자리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지금의 덕주사에서는 1206(희종 2)에 조성된 금구(禁口)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덕주사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63년에 중창되었고, 1970년과 1985년에 각각 중건하였다. 덕주사에는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으며,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 절의 승려들이 건물이 협소하여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할 때 어디선가 소가 나타나서 재목을 실어 날랐다. 소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마애불 밑에 서므로 그곳에다 부속건물을 지었고, 소는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죽은 자리에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 부도에는 환적당(幻寂堂부유당(浮遊堂용곡당(龍谷堂홍파당(洪波堂)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1985년 중창 당시에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 약사여래 입상을 덕주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제천송계리대불정주범자비(유형문화재 제231) : 충북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 산1

19882월초에 제천시(당시 제원군) 한수면 송계리에서 덕주골까지 도로확장공사 중 월광사지 입구인 송계리 논 147번지 논둑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월악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장 이상철씨에 의해 관리사무소로 옮겨졌다. 현재는 하덕주사 경내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첫줄에만 한자로 대불정주라 각자(刻字)하고, 다음 줄부터는 범자문으로 전각(鐫刻)하였는데 모두 11이다. 각 행의 자수도 고르지 않고 범자로 새긴 부분은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4행까지는 8, 56행은 7, 711행은 1213자로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글자 수는 모두 105자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월광사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광사는 원낭선사탑비(보물 제360)가 있었던 곳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질이 떨어지는 화강암 자연석으로 세로 161cm, 가로 163cm의 방형을 이루는 자연석으로 모두 둥글다. 두께는 상단부는 3040cm로 불규칙하며, 하단부는 28cm이다. 특히 하단부 바닥면은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여 비의 좌대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범자문비는 조선금석총람에 4개가 소개되고 있다. 이는 모두 대불정다라니당(大佛頂多羅尼幢)이라는 동일 제호들로 모두 현재 휴전선 북방에 있다. 광주의 십신사지 범자비(광주시 유형문화재 제3, 광주민속박물관 앞뜰 소재)가 이름대로 동국여지승람에도 범자라고 하였으나 비신 상단부에만 범자의 옴(Om)자를 도안화하고 있을 뿐 비문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엄밀히 보아 범자비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한에는 이 송계리의 대불정주비가 사실상 유일한 범자문비라고 할 수 있다.

 

제천덕주사마애여래입상(보물) : 상덕주사에 위치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전해지는 월악산 덕주사의 동쪽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거대한 화강암벽의 남쪽면에 조각한 불상은 전체 높이가 13m나 되는데, 얼굴부분은 도드라지게 튀어나오게 조각하였고 신체는 선으로만 새겼다. 민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솟아 있으며, 살찐 얼굴에는 눈··턱 등이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얼굴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거대한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는 가슴 위에 선으로 조각하였다. 선으로 조각한 살찐 신체는 인체의 조형적 특징이 무시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축 늘어져 힘이 없으며 선으로 된 옷주름 역시 생동감이 떨어진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게 표현되었으며 양 발 아래에는 연꽃잎을 새겨 대좌로 삼았다. 고려 초기의 거대한 불상 조성 추세에 힘입어 만든 것으로, 살찐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해진 조형수법과 입체감이 거의 없는 평면적인 신체 등이 특징이다.

 

 

제천 덕주산성(기념물)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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