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차 역사문화기행 경북 의성군.구미시 12월8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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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차 역사문화기행 경북 의성군.구미시 12월8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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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차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역사문화기행


▶주제 : 꽃보다 아름다운...

▶날자 : 2018년 12월 8일(土)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구미시
        -의성 대곡사, 관수루, 전모례가정, 도리사
▶집결 : 남문시장 부근 대한내과앞
▶참가비 : 30,000원

※추천 식당 :

▶일정
08:00 출발
08:10 두류네거리 국민은행 앞 경유
08:20 성서 홈플러스 횡단보도 앞 경유

10:00 대곡사
11:10 이동

11:50 관수루 및 생송리마애보살좌상
12:20 이동

12:40 점심식사
13:40 이동

14:00 전모례가정과 신라불교초전지(기념관)
15:30 이동

16:00 도리사
17:00 일몰(17:12) 감상

17:30 출발
19:00 대구 도착

●대곡사

- 경북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894

의성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 지공이 원나라와 고려를 다니면서 불법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 전한다. 처음 세운 목적에 따라 대국사라 명명했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1605년(선조 38) 탄우가 중창하면서 대곡사로 바꾸었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1960년 앞 텃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후기 조성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과 고려 초기의 다층석탑 그리고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시구(探訪詩句)’ 등의 자료로 미루어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고 유구 등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의성대곡사대웅전(보물 제1831호)
의성 대곡사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양식 으로 1687년(숙종 13)에 태전선사가가 다시 중건하였다. 내부의 불단이 후열 평주선보다 뒤쪽에 위치했는데 이런 불단의 위치는 평면구성이 같은 다포계 팔작 불전에서는 18세기 이후 점차 줄어드는 모습으로 중건(17세기 후반) 당시의 건축사적 경향을 읽게 한다. 또한 후면 서측 협칸에는 영쌍창구조(창호 중간에 기둥을 두어 창문이 두 개처럼 보이게 한 창)가 있고 좌․우측면과 배면의 벽체에 중인방 없이 세로 벽선을 세웠으며 정면과 양측면의 기둥뿌리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큰 구멍이 있는데, 불전 정면에 마루를 둔 예나 영쌍창과 세로벽선은 18세기 이전 건물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고식이다. 다포계 형식의 포작은 내외 3출목이며 건물의 전후 좌우면 기둥간격을 동일하게 하고, 주간에 두구씩의 공포를 배치하여 지붕하중을 안정되게 받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건축공간계획과 구조계획이 함께 설계된 세심하고 능숙한 기법을 볼 수 있다. 기둥이나 보 등의 구조부재는 섬세한 가공이나 미적 의장성은 최소화하고, 가구의 구조형식은 간결하면서 명확하게 결구되어 있다. 대곡사 대웅전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공포의 동일한 내외출목수, 배면 개구부의 창호구성(영쌍창), 불단의 배치, 건물 정면의 외부 마루 흔적 등은 중건 당시의 시기적 경향을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의성 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시대의 양식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대곡사범종각(유형문화재 제161호)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 인도승 지공선사가 세웠다고 한다. 그 뒤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다시 세운 절로 1978년 보수하였다. 범종각은 종을 봉안했던 곳인데 지금은 종이 없다. 앞면, 옆면 모두 3칸 규모를 가진 2층 누각이며,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앙서의 윗몸에 연꽃을 조각하여 조선 후기의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또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하나씩 놓은 반면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0호)의 조각수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대웅전보다 시대가 약간 떨어지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하고 있다.

◈의성대곡사다층석탑(문화재자료 제405호)
대곡사의 대웅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으로, 탑몸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이다.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가 절을 지었으며 처음에는 대국사라 이름하였다가 다시 대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173㎝로서,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로 남아 있다. 땅에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은 사각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는 하대석이나 중대석, 연화대좌, 상대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다. 탑신부는 현재 12층이 남아 있는데 각층은 몸돌은 없고 지붕돌(옥개석)만 쌓여 있는 상태이다. 각층의 지붕돌은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는데 6층과 7층은 체감비율이 급격히 줄어들어 그 사이 한층의 지붕돌이 없어진 것 같아 원래는 13층을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대곡사 다층석탑은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물 제518호)보다는 조금 늦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적어도 그 시기가 11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층의 몸돌이 남아 있지 않고 지붕돌도 약간의 손상을 입었지만 12층까지의 지붕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고려 초기의 청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의성대곡사삼화당조사진영(유형문화재 제427호)
삼화상 진영과 청허당 휴정 진영, 사명당 유정 진영, 포허당 담수 진영 등 4폭의 진영은 현재 의성 대곡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삼화상 진영, 청허당 진영, 사명당 진영 등은 1782년에 같은 화원에 의해 동 시기에 제작 되었고 특징적인 도상의 화풍이 비슷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나옹·무학·지공의 삼화상은 한 폭에 그린 도상으로는 현존 진영 중 가장 이른 예에 속한다.

◈의성대곡사적조암구포루(문화재자료 제626호)
의성 대곡사 적조암 구포루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평면은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뒤쪽에 대규모 온돌방인 대방을 설치하고, 앞쪽에 누마루를 돌출하여 설치하였다. ‘대곡루’라는 명칭은 이 누마루에 걸려 있는 현판에서 따온 것이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설치하고 팔작지붕을 이었다. 의성 대곡사 적조암 구포루는 적조암의 중심 건축물로 요사와 법당 기능이 결합된 인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 후기 암자 건축의 특성인 누마루와 대형 온돌방, 법당이 결합된 사례로 암자 건축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의성대곡사지장보살도(유형문화재 제426호)
의성 대곡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장보살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배치하고 육광보살과 시왕, 제석·범천, 동자, 사천왕 등 여러 권속을 좌우에 배치한 형식이다. 화면의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하단 부분이 일부 손상되어 있다. 육광보살, 사천왕 등의 도상이 추가되어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후기 지장보살도에 사천왕이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로서 의미가 크다.


●관수루

- 경북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낙단교와 낙정양수장 사이에 있던 누각이다. 고려시대에 세워져 1734년(영조 10)에 상주 목사 김태연(金泰衍)이 다시 세워 현판하고 1843년(현종 9)에 다시 수리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넘어져 유실되었으나 1889년 양도학(梁道鶴)의 특지로 복원되었다. 고여조(高麗朝)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대표로,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이황(李滉, 1501~1570) 등이 지은 15편의 시가와 권상일(權相一, 1679~1760), 유주목(柳疇睦, 1813∼1872) 등의 중수기문이 있었다. 후에 신현택(申鉉澤) 군수의 중건기문, 신사 하서룡(進士河瑞龍)의 상량문, 강재기(康在璣)의 중건상량문이 추가되었다.


●의성 생송리 마애보살좌상

-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산175-13

이 마애보살좌상은 좌우로 약간 벌어진 삼산형(三山形)의 보관을 쓰고 한 손에는 연꽃가지를 쥐고 있다. 평면적으로 선각된 불신 위의 착의 상태는 알 수 없으나, 등 뒤쪽에는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얕게 새겨져 있고, 대좌(臺座)도 이중선으로 새겨진 복엽(複葉)의 연화대좌이다. 이 보살상의 제작기법은 신체를 선각에 가깝게 평면적으로 새긴 반면에 얼굴부분은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저부조(低浮彫)하였다. 이와 같은 조각기법은 고려 전기에 널리 일반화되었던 마애불 제작기법으로 판단된다. 의성 생송리 마애보살좌상은 상호(相好)가 원만하고 자비로운 보살의 이미지가 잘 표현된 고려 전기의 마애상으로서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수운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상이라 판단되므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모례가정

-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978

모례는 신라 최초의 불교신도로 모록(毛祿)이라고도 한다. 모례는 신라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라로 왔을 때 집안에 굴을 파서 3년 동안 묵호자를 숨겨주었다 한다. 소지왕(479~500) 때에도 승려 아도가 시자 3인을 데리고 신라로 왔을 때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불교신자가 되었다. 모례와 아도화상에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 권4와  ‘삼국유사’ 권3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아도화상은 일선군 도개 부곡의 모례집에 왔다고 했는데 이는 현지명인 도개면 도개리의 동명과 일치한다. 또한 모례장자샘이라는 유적이 있는데 이는 모례가와 일치한다. 그리고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도리사는 가까운 곳에 있다. 주위에는 신라 사찰지가 많이 있다. 민가로 초옥이 있는데 이 집을 동리에서는 모례장자터라고만 말할 뿐 집주인의 성명을 부르지 않는다.


●도리사

-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

중국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한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눌지왕 때 신라에 와서 그때까지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서 포교하기를 요청하여, 처음에는 많은 미움도 샀으나 후에 소지왕의 신임을 얻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무렵 왕궁에서 돌아오던 아도가 이 곳 산 밑에 이르자 때가 한창 겨울인데도, 산허리에 복숭아꽃 ·배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거기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고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본당 ·조사전(祖師殿)·칠성각(七星閣) 등의 법당과 요사(寮舍)가 있으며, 불상·탱화(幀畵)·석탑·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아도화상 사적비 등이 있다.

◈구미도리사석탑(보물 제470호)
이 탑은 높이 4.5m로 화엄석탑이라 부르는 석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이채로운 양식을 지니고 있다. 얕은 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었으며, 판석으로 갑석을 덮고 갑석 위에 방형의 작은 석재를 3 층으로 쌓아 탑신을 만들었다. 맨위층 정상에는 노반이 있고 연꽃이 조각된 보주가 있다.

◈구미도리사극락전(문화재자료 제318호)
극락전은 도리사의 부속 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벽면에는 벽화를 그려 놓았다.

◈아도화상사적비및도리사불량답시주질비(유형문화재 제291호)
도리사 남쪽의 비탈진 소나무숲 속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비이다. ‘아도화상사적비’는 아도화상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로,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그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앞면에 이무기를, 뒷면에 네 마리의 용을 조각하고 그 사이마다 구름, 용을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 앞면에는 위쪽에 가로로 전서체로 된 비의 이름을 새겨두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뒷면에는 ‘자운비’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그 끝에 건립연대를 밝혀두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논과 밭을 시주한 이의 이름과, 논밭의 규모를 적어놓은 비이다.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꽂아두고, 머릿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머릿돌은 앞뒷면에 굵은 선으로 연꽃봉오리와 줄기를 조각하였고, 두 옆면에는 2중으로 된 원모양의 띠를 새겨 장식하였다. 꼭대기에는 꽃봉오리모양을 한 머리장식이 우뚝 솟아있다. 앞뒷면에 세로로 새긴 비문은 앞면 첫줄에 비의 이름을 적은 후, 그 아래에 논밭을 시주한 자와 그 규모를 밝혀두었다. 비문 끝에 남긴 기록을 통하여 숙종 38년(1712)에 비를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17세기 중엽∼18세기 초에 세운 작품들로, 비문이 갖는 역사적 의미나 조각의 솜씨 등은 충분히 활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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