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환 문학박사 -문학작품을향유한다는 것은 231218
2023.12.18.(월)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인)문학 특강 / 김상환 (시인․문학박사)
문학작품을 향유한다는 것
문학과 아포리아
하나. 문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 사회의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을 감동 속에 사색하게 하는 것이다.(백석,「아동문학에 발표된 신인 및 써클 작품들에 대하여―운문」)
두울. 문학을 향유하는 것은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향유frui는 어떤 대상을 사랑함에 있어서 더 이상 상위의 목표가 없는 마음의 즐거움과 최종 가치를 말한다. 이 경우 절대적 향유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상대적 향유의 대상은 인간이며, 사용uti의 대상은 자연 세계다. 세계 내면 공간Weltinnenraum으로서 시와 예술은 존재의 생기Ereignis에서 발현되는 순수한 연관의 장이며, 순수한 앎과 느낌의 방법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은 현존과 몰입으로 가능하다. 현존 없는 향유의 삶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고유한 취미 생활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며 삶을 향유할 수가 있다.
세엣.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킨다. 문학은 문학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인간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무지와의 싸움을, 의미론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김현,『한국문학의 위상』)
네엣.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만큼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예술은 감정과 감흥의 표현이다. 삶을 사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 같다. 올바른 삶에는 훌륭한 문장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바람이 물위를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파문을 만들어내듯이, 문장의 묘미와 인생의 묘미가 그러하다. 예술은 창작 속에 감상이 있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도덕적 행위가 예술이라면, 인생의 예술화란 엄격하고 신중한 자세로 삶에 임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삶에 진지하게 임할 뿐 아니라 얽매이지 않는다. 예술의 능력은 취하는 것보다 버릴 줄 아는 데 있다. (주광첸朱光潛,『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다섯. 문학의 특징은 우리가 인간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 한, 이해될 수 없는 데 있다. 자아는 하나의‘것’이 아니라‘과정’이다. 시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 보다는 그것에 내재해 있는 인간과 삶의 과정이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인간을 묻는다-과학과 예술을 통해 본 인간의 정체성』)
여섯. 이 세상은 시인에 의해 말해지고 읽혀져야 의미를 갖는다. 사물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인간은 한 편의 완전한 시를 들은 다음 憂愁를 느낀다. 이는 심연으로부터 함께 울리며 솟구쳐오른 전체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막스 피카르트,『인간과 말』)
작품 감상 및 나의 애송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소릉조小陵調 /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봄편지 외 1편 / 김상환
어머니, 당신의 손을 놓은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습니다 꿈같은 세월이 흘러 이 자식도 이제 이순의 나이가 다 되었습니다 하지만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세상 이치는 멀고 여전히 아득하기만 합니다 며칠간 고뿔이 심해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내심은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음양이 서로 반半인 춘분 지나 오늘은 조심스레 문밖을 나섰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엔 잔디가 웃자라고 먼산을 에돌아 강물이 흐릅니다 저 하늘 두우가 되고 싶어 그 빛의 소리마저 듣고 싶어 지상의 별자리를 돌고 돌아 돌에 새겨진 천부경 81자를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그러다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쉼을 얻고 보면 등허리가 저리도 따사롭습니다 낮과 밤인 어머니, 당신의 나라에도 꽃이 피고 봄이 왔는지요 다음 주말에는 좀더 멀리 집을 나설 요량입니다
산정호수
산정에는 호수가 있다
깊고 푸른 호수가 고요의 빛이라면 그 빛은 물과 산을 바라보는 고요, 아니 잎이 오므라든 채 겨울을 나는 가침박달의 흰 꿈이다 사향노루가 곤히 잠든 호숫가, 누군가의 한 생이 저물어간다
밤이 깊으면
십일월에 눈이 온다
빨간 자전거에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