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강좌 2강 창조와 신화 만들기 - 2013.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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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좌 <이야기를 통한 치유> 2강 창조와 신화 만들기 - 2013.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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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신화 만들기

강사 : 김기호(영남대)

1. 신화의 창조

■ 신화는 다음의 세 가지 각도로 규정될 수 있다.

(1) 神에 관한 이야기
(2) 自然現象이나 社會現象의 기원과 질서를 설명하는 이야기
(3) 神聖視되는 이야기

■ 신화는 그 신화를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의 것임
■ 신화는 신화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의 산물임
■ 신화의 기능

(1) 사회통제의 기능임(주몽신화가 행위의 모범이고 가치 기준이며 국가가 위엄을 상징하는 구실을 함)
(2) 신화는 그것을 가지는 집단으로 하여금 긍지를 느끼게 함(이규보는 「동명왕편」을 통해 “우리 나라는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천하가 알게 하고자 한다.”고 함)
(3) 신화는 완전(신성)성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신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최초의 신성(의례에 포함된)을 회복한다는 의미임.

2. 창조신화의 분류

신화는 신성성이 인정되는 집단의 규범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1) 건국신화: 국가적인 범위에서 신성성이 인정되는, 국가창건의 군주에 관한 신화
(2) 시조신화: 성씨의 범위에서 신성성이 인정되는, 시조에 관한 신화
(3) 부락신화: 자연부락의 범위에서 신성성이 인정되는 시조에 관한 신화
(4) 무속신화: 신성성을 인정하는 범위가 일정하지 않은 일반적인 신화


■ 건국신화

(1) 단군신화(조선)
(2) 주몽신화(고구려)
(3) 혁거세신화(신라 박씨)
(4) 탈해신화(신라 석씨)
(5) 알지신화(신라 김씨)
(6) 수로신화(가야)
(7) 삼성신화(탐라, 제주도) : 지신족설(地神族說)에 속하는 제주도의 개벽신화로, 3성은 제주를 본관으로 하는 고(高)ㆍ양(良)ㆍ부(夫)이다. 특히 이 삼신인(三神人)은 땅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전 세계의 어떤 신화나 전설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성이 있다. 제주도민들에게 구전으로 이어져온 신화로, 《고려사》, 《영주지(瀛洲志)》 등에 그 기록이 전한다. 삼신인의 출현과 세 공주의 내도(內道), 거주 지역의 설정, 탐라국의 건국 등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태초에 탐라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약 4300여 년 전 한라산 북쪽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삼성혈)에서 삼신인이 솟아났다. 이들을 을나(乙那)라 이름하여 첫째는 양을나(良乙那), 둘째는 고을나(高乙那),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로, 3성씨의 시조가 된다. 그들은 수렵과 육식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다가 어느날 동해에서 떠내려온 자주색 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를 발견하였다.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알처럼 된 둥근 옥함(玉函)과 함께 자주색 옷에 관대를 한 사자(使者)가 나왔다. 옥함 속에는 아름다운 세 처녀와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씨앗이 있었다. 사자는 자신을 벽랑국(碧浪國) 사람이라 소개하고 세 처녀는 자기 나라의 공주로서 삼신인의 배필이 되고자 모시고 왔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삼신인은 하늘에 고하고 나이 순서대로 세 공주와 혼례를 올리고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도를 삼등분하였다. 양을나는 지금의 제1도(제국), 고을나는 제2도(대정), 부을나는 제3도(정의)에 터를 잡아 오곡을 심고, 송아지와 망아지를 기르며, 촌락을 이루고, 자손을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쌓았다는 내용이다.

(8) 고려국조신화
(9) 조선국조신화

■ 시조신화

(1) 남평문씨족서: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신라 말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설화(說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 진다. 서기 472년 (신라 자비왕 15년)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지금의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장자산(사자산이라고도 함) 아래 장자지(長者池)라는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그 고을 군주(郡主)가 그 바위 아래서 봄놀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郡主)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玉雪) 같이 맑고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한 군주(郡主)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聰明)하여 사물(事物)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姓)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후 사마대장군(司馬大將軍)을 거쳐 삼중대광보국 상주국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輔國 上柱國平章事 三韓璧上功臣/삼한통일 공신 )에 오르시고 태사태부(太師太傅/태자의 스승)가 되셨으며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 지셨는데 98세에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무성(武成)이라 받으셨다. 그래서 무성공(武成公)이라 하며 공(公)을 시조로 하여 태어나신 남평(南平)을 관향(本)으로 삼게 되었다.

(2) 창녕조씨족서: 경남 창녕군 창녕읍의 화왕산(火旺山) 정상에 세 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샘이 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529 - 632) 때의 일이다. 경주이씨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집안에 예향(禮香)이라는 딸이 있었다. 미모가 아름답고 범절이 특출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이 있어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의 명의를 찾아 병을 고치려고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온 집안이 근심과 절망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선인이 찾아와 말하기를 "창녕에는 화왕산이 있고 화왕산에는 신령스런 연못이 있는데 옛부터 영험이 있기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성심으로 기도하면 병이 완쾌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이광옥의 집안에는 그의 말을 쫓아 길일을 택하여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예향이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성심으로 기도를 하는데, 별안간 못 주위로부터 앞을 가릴 수 없이 안개가 자욱하여 오고갈 길을 잃었다. 얼마 후 안개가 거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예향이 연못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화왕산에서 돌아온 예향은 병이 씻은 듯이 완쾌되었는데, 태기가 있어 남자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는 미모가 수려하고 총명하였으며, 겨드랑 밑에 조(曺)자가 뚜렷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화왕산 연못의 용의 아들로 이름을 옥결(玉訣)이며 그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후에 공후(公候: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제후)가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 하여도 경상(卿相 : 조선시대 판서, 지금의 장관)은 될 것이며, 자손이 만세토록 번성할 것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예향은 너무나 특이한지라 이 사실을 그의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한림학사 이광옥이 이 사실을 진평왕에게 아뢰니 임금이 겨드랑 밑에 있는 조(曺)자로 성을 하사하고, 용의 아들이라 계룡(繼龍)이라 이름하니 이분이 창녕조씨의 시조이다.

(3) 신라육부촌성씨: 지금부터 2천 년 전 보다 더 오랜 옛날, 밝음을 신으로 섬기던 우리 조상들은 기후가 따뜻하고 밝음이 먼저 오는 동쪽에 삶의 터전을 찾아 정착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한반도의 남동쪽 진한 땅이었다. 진한에는 여섯 부족이 있어 각각 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시대에는 석기에서 철기시대로 생활양식이 바뀌는 우리 민족문화의 새벽과 같은 때였다. 이 새로운 때를 맞이하여 여섯촌에는 각각 하늘에서 신인들이 내려와서 촌장이 되었으니, 이를 진한 '육부촌장'이라 부른다. 여섯 촌 중 알천 양산촌은 지금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서 남산, 선도산, 금강산, 명활산 등이 둘러 쌓인 넓은 벌판이다. 이곳으로 몰개내, 알내, 서내 등 여러 강물이 들을 가르며 흘러 양산촌은 기름지고 아늑한 살기 좋은 곳으로 후에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된 촌이다. 어느 날 금강산 표암봉에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있었으니, 이분이 알천 양산촌을 다스린 이 알평공이다. 하늘에서 내려올 때 큰 박 하나를 안고 왔는데, 그 박에서 싹이 나서 덩굴이 바위를 덮었다하여 그곳을 '표암'이라 불러온다. 현재 소금강산내의 석탈해왕릉을 바라보고 왼쪽 산중턱에 표암이 자리 잡고 있다. 고허촌은 지금 탑동 나정 부근에서부터 내남면 일대와 울주군 두동 두서면을 포함한 지역이었는데 여섯 촌 중 가장 넓은 마을이었다. 이 촌의 촌장은 소벌도리공이었는데 하늘에서 형산에 내려와서 고허촌장이 되었다고 한다. 소벌도리공은 신라의 첫 임금이신 박 혁거세 거서간의 양아바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성을 정씨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최씨라 하여 서로 같지 않은데 사기에 따라 최 소벌도리로 부르는 것이다. 무산 대수촌은 지금 경주군 서면과 현곡면을 포함한 지역으로서 중앙에 이산(지금의 구미산)이 솟아 있다. 이산의 동쪽 벌에는 현곡천이 흐르고 서쪽 벌로는 모량천이 흘러 기름진 땅이 있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대수촌장은 손 구례마공인데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이산(또는 개비산)에 내려와서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 또 취산 진지촌은 토함산 새등이에서 흐르는 몰개내와 가내고개에서 흐르는 알내의 상류유역과 외동면 일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지금의 낭산 일부와 인왕동 일부까지도 이 촌에 속해 있었다 한다. 지백호는 하늘에서 화산으로 내려와서 진지촌의 촌장이 되었는데 성은 정씨라 한다. 금산 가리촌은 지금의 양북, 양남면, 감포읍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서 바다에 닿아있는 유일한 촌이었다. 배 지타공은 하늘에서 명활산에 내려와서 금산 가리촌장이 되신 분이다. 그리고 명활산 고야촌은 지금의 천북면과 안강읍 동남 일부를 포함한 지역으로서 촌장은 설 호진공이었다. 호진공은 하늘에서 금강산에 내려와서 고야촌장이 되신 분이다.

■ 부락신화

(1) 죽령산신 다자구 할머니: 경상북도 영주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경계에는 죽령이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습니다. 이 산마루에 죽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옛날 어느 도력 높은 스님 한 분이 대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꽂고 간 것에서 비롯합니다. 이 고개는 오랜 옛날부터 지방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중요한 고개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선비들을 노리는 무서운 산적들이 많았습니다. 관가에서는 산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곳 자리에 밝은 산적들은 관군이 나타나면 사라지고, 관군이 안 보이면 사람들을 약탈하는 아주 야비한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관군의대장을 찾아왔습니다. "내가 산적들을 잡을 수 있게 도와 주겠소." "할머니가 어떻게?" 대장은 수많은 관군도 잡지 못하는 산적들을 할머니가 잡겠다고 나서는 것이 믿기지 않아 멀뚱멀뚱 할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이미 늙었소. 마지막으로 나라에 좋은 일 한 번 하고 죽으려는 것이오." 할머니의 말은 너무도 침착하고 단호해서 대장은 혹시라도 할머니가 무슨 좋은 계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소?" "내가 산적의 소굴로 들어가서 산적들이 엄한 경비를 서면 '덜자구야' 하고, 경비를 서지 않고 잠을 자면 '다자구야' 하고 소리를 지를 테니, 그때 와서 산적들을 잡도록 하시우." 산적들을 잡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던 대장은 할머니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덜자구야! 다자구야!" 할머니는 산적들이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소리를 듣고 산적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웬 할망구가 이 소란이야, 소란이!" "나는 자식이 둘이 있는데 이 불효 막심한 놈들이 늙은 어미를 혼자 남겨 놓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지 뭐요. 큰 아들은 다자구라고 하고 작은 아들은 덜자구라고 합죠. 그 놈들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이 산 저 산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산적들은 그 말을 믿고 할머니를 자신들이 사는 산채로 데리고 가서 밥 짓는 일을 시켰습니다. 흉악한 산적들도 애타게 자식을 찾는 할머니가 가여웠겠죠. 할머니는 가끔 마을을 향해 '덜자구야, 덜자구야' 하는 외침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산적들의 산채에서 커다란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모두들 배가 터져라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 산채에는 관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경비를 서는 산적들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취해서 잠에 곯아 떨어진 거죠. "다자구야! 다자구야!" 할머니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마을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마을에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기다리던 관둔들은 물밀 듯이 몰려와서 죽령의 그 무서운 산적 떼를 남김없이 소탕했습니다. 관군의 대장이 나중에 백방으로 할머니를 찾았으나 할머니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 할머니가 죽령을 지키며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산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매년 할머니가 산적들을 물리치게 해 준 날을 택해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훗일 사람들은 그 할머니 산신을 다자구 할머니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2) 일월산 황씨부인: 오랜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성을 가진 처녀는 동네 총각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워낙 아름다운 규수라 두 젊은이가 서로 탐내어 다투었었는데, 그  중 한 총각이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혼 첫날밤이었다. 원앙금침에 들기 전, 뒷간에 갔다가  신방(新房) 문 앞에 선 신랑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신방 문 창호지에 칼날 그림자가  얼씬거린 것이다. 그 그림자가 분명 연적(戀敵- 다른 총각)의 것이라  여긴 신랑은 그 길로  아무 말없이 달아나버렸다. 칼날 그림자란 실은 문 앞에 있던 대마무잎의 그림자에 대한 착각이었지만, 신랑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그 길로  영영 달아나버린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는 조바심을 내며  신랑을 기다리다가 몇 날, 몇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침식을 전폐하고 오직 기다림에 몸을 바치던 신부는 마침내 한을 품고 구천(九天)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난 그의 시신은 삭을 줄을 몰랐다. 살아  생전 꽂꽂했던  몸가짐도, 앉음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돌부처인 양 시신은 언제나  신방을 지키는 듯 보였다. 한편,  도망간 신랑은 외지에서 다른 색시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아이까지 낳았으나 아이는 낳는 대로 이내 죽곤  하는 것이었다. 점장이에게 알아보았더니  바로 황씨  규수의 원한 맺힌  원혼(寃魂)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괴로움에 빠진 신랑은 그를 일월 산정에 묻어주고, 그리고 그를 섬기도록 하여 보라는 어떤 승려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신랑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지금의 부인당 자리에 시신을 옮기고  작으나마 사당(祠堂)을 지어바쳤다. 그 때야 시신은 홀연히 삭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3) 연평도 임경업 장군: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한다. 썰물 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다. 이것을 계기로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장군은 황해바다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에는 신당까지 생겼다

■ 창세신화

미륵님, 구리기둥으로 하늘과 땅을 갈라놓다

한국에는 창세신화가 있는가? 지난 몇 년 동안 적지 않게 들었던 질문이다. 희랍 신화의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 한국의 창세신화는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오롯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창세신화는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동해안, 제주도 등지에서 무가(巫歌)의 형태로 전승된다. 천지개벽과 인간 창조, 인간세상을 차지하기 위한 신들의 경쟁 등 다채로운 내용이 그 속에 전한다. 적지 않은 창세신화의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했다고 평가받는 함흥지역 무녀(巫女) 김쌍돌이(金雙石伊)의 노래(巫歌)를 통해 창세의 시절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하늘과 땅이 생길 적에
미륵님이 탄생한 즉
하늘과 땅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여
하늘은 북개꼭지처럼 도드라지고
땅은 네 귀퉁이에 구리 기동을 세우고···

창세신화는 천지의 개벽에서 비롯한다. 하늘과 땅이 생겨날 적에 '미륵님'1)이 태어났다고 했다. 그러니 미륵님은 천지의 생성과 더불어 존재했던 창세의 주역신이 되는 셈이다. 그 시절 하늘과 땅이 들어붙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하늘이 점점 가마솥 뚜껑의 손잡이처럼 볼록해졌다고 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비로소 틈이 생긴 것이다. 가마솥 뚜껑 손잡이처럼 볼록해졌으니 네 귀퉁이 부분에 틈새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 때 미륵님이 구리 기둥 넷을 가지고 땅의 네 귀퉁이마다 받쳐 세워 놓으니 하늘과 땅이 완전하게 분리되었다고 했다. 구리 기둥 넷으로 땅과 하늘을 나누었으니 흔히 말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 곧 하늘은 둥근 형상을, 땅은 네모난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
하늘과 땅이 분리되었으니 그 다음 순서는 무엇인가? 그렇다. 당연히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어찌 어찌 되었다고 하는 내력이 등장해야 자연스럽다.

그때는 해도 둘이요, 달도 둘이요
달 하나 떼어서 북두칠성(北斗七星), 남두칠성(南斗七星) 마련하고
해 하나 떼어서 큰 별을 마련하고
잔 별은 백성의 직성(直星)별을 마련하고
큰 별은 임금과 대신(大臣)별로 마련하고

그 시절에는 해도 둘이요 달도 둘이었다. 해와 달을 하나씩 조정해야 오늘날 인간세상의 이치와 같아지는 까닭에 달 하나를 떼어내어 칠성별을 만들고 해 하나를 떼어내어 임금과 대신, 그리고 백성의 별을 만들었다고 했으니, 뭇 별들은 해와 달에서 비롯했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해와 달을 하나씩 조정해야 하는 연유가 있다. 제주도 심방 - 즉, 무당 - 박봉춘의 노래에서는 "해가 둘이어서 사람들이 뜨거워 살 수 없고 달이 둘이어서 추워 죽으니" 해와 달의 수를 조정해야 한단다.2) 낮에 해가 둘이면 사람이 뜨거워서 못 살고, 밤에 달이 둘이면 추워 살 수 없다는 것이니 응당 해와 달을 하나씩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해와 달이 여럿이어서 하나로 만들어야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민족의 창세신화에서 전승되지만, 해와 달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그것으로 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그 해와 달을 제석궁3)이나 명도궁4) 같은 곳에 걸어두기도 하고5) 동해 용궁에 두었다는 경우6)도 있으니 특별한 발상을 엿보게 된다.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일월성신이 생겨난 내력을 알아보니 불현듯 무당들이 지니고 있는 무구(巫具) 가운데 신경(神鏡)이라 부르는 청동거울이 떠오른다. 이것을 다른 말로 '곤을' 또는 '명도(明圖)' - 대부분 일월도(日月圖)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 즉 일(日)과 월(月)의 합자인 '명(明)'이 붙었다고 할 수 있다 - 라 하기도 하는데, 그 뒷면에는 해와 달, 칠성(七星) 따위의 소박한 문양이나 '일월대명두(日月大明斗)'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명도의 뒷면은 일월천(日月天)의 문양을 새겨 놓아 천체(天體)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의 특징은 주로 천궁경(天穹鏡)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볼록 거울의 형상을 하는 것은 그 표면으로 일월을 나타내고 그 뒷면으로 하늘의 궁륭(穹㝫)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자생적 인식인지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것이지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한다. 다만 무당들이 사용하는 곤을 혹은 명도가 이러한 천체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하늘이 가마솥 뚜껑처럼 볼록하게 도드라졌다고 하고, 그 둥근 하늘에 일월성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발상은 곤을의 형상과도 흡사하니 무속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인식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창조한 주역신인 미륵님은 대단한 과업을 이루었으니, 그에 걸 맞는 특별한 형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미륵님이 입을 옷을 짓는데 그 시절에는 옷감이 없어서 이 산 저 산으로 뻗어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칡을 캐어 껍질을 벗겨내고 삶아낸 후 하늘 아래에 베틀을 걸고 구름에 잉앗대를 걸어 장삼(長衫)을 만들어 내니 그 크기가 대단하다. 등만 덮을 만하게 걸쳐 입는 홑옷이 전필(全匹)이나 되고, 소매만 해도 반 필이며, 섶의 크기만 다섯 자요, 옷깃만 해도 세 자나 된다. 또한 머리에 쓰는 고깔은 석 자하고도 세 치를 더 해야 턱 아래에 겨우 내려올 만하다고 했으니 미륵님의 거인신적 면모가 완연하다.

불과 물을 찾아 나서다

미륵님이 인간세상을 그럭저럭 만들어 놓고 옷도 해 입었지만 할 일은 여전히 많다. 미륵님 시절에는 불(火)이 없어 음식을 날 것으로 먹었기에 불의 근본, 물의 근본을 찾아야 했다. 풀메뚜기를 잡아다가 형틀에 올려놓고 무릎 뼈를 세 차례 때리며 불의 근본, 물의 근본을 탐문하니 풀메뚜기가 풀개구리에게 가보란다. 풀개구리 잡아다가 똑같이 치니 생쥐에게 가보란다. 생쥐를 잡아다가 똑같이 치니 대가를 달란다. 미륵님이 천하의 뒤주를 차지하라 하니 그제야 금덩산7)에 들어가 한 손에 차돌 들고 한 손에 쇠붙이 들고 툭툭 치니 불이 생기더라 하고, 소하산8)에 들어가면 샘물이 솔솔 나오는데 물의 근본이라 했다.
쥐가 불의 근원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부단하고도 무분별한 움직임의 속성과 여기에서 파생된 훔쳐오기의 속성이 결부되어 나타난 현상이겠다. 개구리는 달의 동물로 물을 의미하니 오행사상(五行思想)에 비추어도 음(陰)에 해당하여 여성을 뜻하고, 쥐는 불을 의미하니 오행 중에 양(陽)에 해당하여 남성을 뜻한다. 여기서 물과 불의 근본이 각각 개구리와 쥐로 인지되지 않고, 쥐가 물과 불의 근본을 미륵님에게 알려주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생식에서 화식으로 전환하는 음식의 발전과정은 그에 상응하는 문화적 발전의 단계를 의미한다. 개구리와 쥐가 각각 물과 불의 근본을 양분하는 대립항(對立項)으로 구분되지 않는 현상은 기후와 관련하여 우기(雨期)와 건기(乾期)의 대립이 불필요한 상황임을 암시한다. 우기와 건기가 대립적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것은 이 서사시에서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 기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할 터이다. 채집과 수렵 혹은 농경의 경제적 기반이 모호한 상태에서 자연의 변화에 절대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는 삶의 양태를 감지할 수 있을 듯하다.

금벌레·은벌레에서 인류가 시작되다

인간세상을 이렇게 갖추었으나 인간이 없으면 인간세상이 아닐 터, 인간이 생겨난 내력을 노래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미륵님이 한 손에 금쟁반을, 다른 한 손에 은쟁반을 들고 하늘에 기원하자, 금쟁반에 금벌레 다섯이 떨어지고 은쟁반에 은벌레 다섯이 떨어졌다. 금벌레는 점점 자라서 남자가 되고 은벌레는 점점 자라서 여자가 되어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 그 다섯은 각기 짝을 맺어 부부가 되었으니 우리 민족은 벌레에서 비롯된 셈이다. 그 많고도 많은 신성한 동물은 다 어디가고 하필이면 벌레란 말인가. 어찌 보면 벌레가 점점 자라서 인간이 되었으니 무슨 진화론의 한 부분을 보는 듯도 하다. 여기서 미륵님이 불과 물의 근본을 알아내는 과정을 노래한 대목, 곧 메뚜기에서 개구리로, 다시 생쥐로 이어지는 꼴이 마치 곤충에서 양서류를 거쳐 포유류로 가는 형국인데, 벌레가 자라서 인간이 되었다고 한 설정과 아울러 생각해보면, 저 김쌍돌이 무녀가 혹시 다윈의 진화론 같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금벌레·은벌레가 자연적으로 인간이 된 게 아니라, 미륵님의 양손에 들린 금쟁반·은쟁반에 떨어져서 남녀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미륵에 의해 벌레가 인간으로 바뀌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진화론적 사고와 창조론적 사고가 겹쳐진 양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륵이 전지전능한 인간의 창조주는 아니다. 하늘에 기원하여 금벌레와 은벌레를 얻었다고 했기 때문에, 미륵의 상위에 천신이 있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미륵이 벌레를 인간으로 화생시켰다면 인간 창조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벌레가 자연적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고 미륵의 기원에 의해 금벌레·은벌레가 인간으로 화생하였기에, 벌레가 자라는 과정에 미륵이 인간 창조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진화론적 사고란 창조주의 개입 없이 자연적으로 벌레가 인간으로 진화한 경우를 지칭하므로 이 신화의 내용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등한 벌레가 자라서 고등한 인간이 되었으니 둘 사이에는 무분별한 상황에서 차별적인 상황이 되었다고 하는, 구별 짓기의 과정이 일단 개입되어 있다고 하겠다. 인간으로 화생하여 다시 분별이 생겨나 남녀가 되고 다시 분별이 생겨 부부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근원적인 동질성을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금쟁반·은쟁반은 해와 달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보면, 금벌레·은벌레는 곧 해벌레·달벌레가 된다. 벌레가 이미 해와 달의 정기를 받아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인간세상의 하찮은 벌레가 아니라 신이(神異)한 성격을 가진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벌레와 같은 형상을 지닌 신이한 존재가 하강하여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설정인 셈이다. 그렇다면 해와 달에 관련이 있으면서 인간세상의 벌레와 상통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 벌레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 거듭 추론하는 데에 동북아시아의 고대 민족의 관념이 활용될 수 있을 듯하다.
서기 6~8세기에 남러시아와 유럽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유목민족인 아바스(Avars)는 유연(柔然)의 후예로 인정되는 민족이다. 그런데 돌궐이나 페르시아는 아바스를 케름(Kerm), 곧 벌레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특히 하우시히(H.W.Haussig)라는 학자는 '벌레'라는 말을 늑대의 은어로 간주하여 '연연(蠕蠕)'이 늑대토템을 지닌 유연을 빗대는 말이라고 해석한다. 서기 576년 사산(Sasan)조 페르시아의 견제를 위해 동로마에서 서돌궐로 파견된 왈렌티노스(Oualentinos)의 보고서에는, 늑대의 토템을 가지고 있는 서돌궐의 달두가한(達頭可汗) - 타르두스 카간(Tardus Khagan) - 의 아우가 유연을 벌레라고 호칭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점을 미루어보면 그 '벌레'는 늑대가 아닌 다른 동물, 곧 뱀을 상징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9)
이 점에 있어서 쉐더(Schaeder)는 오늘날 동몽골 지역의 샤머니즘과 연관시켜 볼 때 매우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몽골인들은 뱀을 '아브르가'라 부르며 지방신이나 용왕을 대표하는 성물로 간주하여 죽이지 않는 습속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금벌레·은벌레가 어떤 성스러운 동물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동물의 원래적 의미가 전승의 과정에서 잊혀짐으로써 오늘날 누구나 생각하는 그런 벌레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우리네 창세신화에 등장하는 금벌레와 은벌레가 사신류(蛇神類) 혹은 용사류(龍蛇類) 같은 신비스러운 동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다시 신화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다섯 쌍의 부부가 있어 인간이 태어났으니 이 땅의 사람들은 다섯 조상 혹은 다섯 개의 족원(族源)에게서 나온 셈이 된다. 그런데 고대 한반도의 삼국 가운데 다섯이라는 숫자를 특별하게 인식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건국시조인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가 지상에 강림할 때 타고 왔던 수레를 오룡거(五龍車)라 칭했던 것과, 고구려의 연맹체가 오부(五部)였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다섯 쌍의 금벌레·은벌레가 다섯 쌍의 용, 즉 오룡거와 의미상으로 통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다. 이렇게 보면 김쌍돌이본 「창세가」는 고구려의 신화의식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늘에서 내려온 한 쌍의 벌레가 부부가 되어 인류를 퍼뜨렸다고 하지 않고 다섯 쌍의 부부에게서 다시 인류가 비롯했다고 하는 설정은, 이 땅의 사람들이 하늘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다섯 시조를 가졌다고 하는, 동질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천신의 후예인 주몽이 세운 나라여서 그 백성들은 천신(天神)의 후손들이다. 그러면서 각기 다른 다섯 연맹이 있었으므로 서로 다른 시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김쌍돌이가 구연한 「창세신화」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함흥지역에서 전승되는 노래라고 하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이기만 한 것일까.
이리하여 미륵님이 다스리던 세월은 태평하였는데, 석가(釋迦)님이 내려와서 미륵님의 인간 세상을 빼앗고자 했다.

(미륵님이 다스리던)인간 세월에는 태평하고, 그랬는데, 석가(釋迦)님이 내려오셔서,
이 세월을 앗아 뺏고자 마련하여(작정하여), 미륵님의 말씀이,
아직은 내 세월이지, 너 세월은 못된다.
석가님의 말씀이, 미륵님 세월은 다 갔다, 이제는 내 세월을 만들겠다.
미륵님의 말씀이, 너 내 세월을 앗겠거든, 너와 나와 내기 시행하자.

미륵님과 석가님이 대결을 벌인다.

미륵님의 말씀이, 너와 나와 내기 시행하자,
더럽고 축축한 석가야,
그러거든, 동해 중에 금병에 금줄 달고, 석가님은 은병에 은줄 달고,
석가님의 말씀이 내 병에 줄이 끊어지면 너 세월이 되고,
너 병에 줄이 끊어지면 너 세월 아직 아니라.
동해 중에 석가 줄이 끊어졌다.

첫 번째 시합은 동해 한 가운데에 미륵님이 금병에, 석가님이 은병에 각각 줄을 매달아 넣고서는 끊어지지 않는 쪽이 승리하는 것이었다. 미륵과 석가의 대결이 함축하는 신화적 의미는 동해의 이상향을 둘 가운데서 누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동해 한 가운데에 줄을 매단 병을 넣어 줄이 끊어지지 않는 대결을 펼치는 것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적인 능력의 대결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수망(水亡)굿에서 보이는 일종의 넋건지기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교통하는 행위인 점과 견주어 보면 두 행위 간의 유사성이 인정된다.10) 줄을 매단 병을 물 속에 넣어 끊어지지 않음을 과시하는 행위는 이승과 저승을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의 시험은 아닐까. 『열자(列子)』에 보면 동해에는 5개의 이상향을 상징하는 섬이 있는데, 그 가운데 병을 뜻하는 호(壺)가 있다고 한 점과 여기의 신화적 인식이 겹쳐지기도 한다.
한편으로, 신화에서 병(甁)은 일반적으로 자궁(子宮)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의 태(胎)가 들어 있는 자궁으로 상징된다. 더욱이 물과 관련하여서는 여성적 원리의 함축적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를 문화적으로 해석하여 어로단계의 표현으로 보아도 해석은 자연스럽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11)에 의하면, 물고기가 그려진 원시적 물병은 뱀을 표상하는데, 여기에는 물고기를 다량으로 포획하려는 제의적 의미가 내재해 있다. 많은 물고기가 들어 있는 물병은 곧 여성의 상징으로서 자궁의 의미와 연결되어 어로 생산력의 증대를 기원하는 제의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륵님은 수렵이나 채집, 어로 따위와 같은 농경 이전의 시대를 상징하고 석가님은 농경시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석가님이 내밀어서(승복하지 않아서),
또 내기 시행 한번 더하자.
성천강 여름에 강을 붙이겠느냐.
미륵님은 동지채를 올리고, 석가님은 입춘채를 올려서,
미륵님은 강이 맞붙고, 석가님이 져서.

두 번째는 미륵님과 석가님이 여름철에 성천강이라는 강에서 강물을 얼어붙게 하는 능력을 겨루는 시합이다. 미륵님은 동지채를 올리고 석가님은 입춘채를 올렸다. 동지채니 입춘채니 하는 것은 아마도 동지의 기운과 입춘의 기운을 담은 일종의 문서를 말하는 듯하다. 어떤 의미를 지닌 시합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몽골의 창세신화에서 유사한 내용이 전승되고 있어서 그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강을 얼게 하고 녹게 하는 과정은 사계절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다. 석가님은 입춘채를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지만 입춘채는 언 강을 녹이는 데에 소용되는 것이지 얼게 하는 데에 소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입춘채는 언 강을 녹여 농사일을 시작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므로 석가님은 농경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능력을 가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 미륵님과 석가님은 분명하게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신으로 등장한다. 석가님의 농경적 면모는 마지막 대결인 모란꽃 피우기 시합에서도 확인된다. 여하튼 두 번의 대결에서 미륵님이 이겼다. 그러나 석가님은 승복하지 않고 마지막 시합을 제안했다.

석가님이, 또 한 번 더하지.
너와 나와 한 방에서 누워서,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내 무릎에 올라오면 내 세월이오, 너 무릎에 올라오면 너 세월이라.
석가는 도적심사를 먹고 반잠 자고, 미륵님은 찬 잠을 잤다.12)
미륵님 무릎위에, 모란꽃이 피어올라서,
석가가 중등사리로 꺾어다가, 자기 무릎에 꽂았다.
일어나서, 축축하고 더러운 이 석가야,
내 무릎에 꽃이 피었음을, 너 무릎에 꺾어 꽂았으니,
꽃이 피어 열흘이 못가고, 심어 십년이 못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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