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강좌 3강 순수와 동화 만들기 - 2013.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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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좌 <이야기를 통한 치유> 3강 순수와 동화 만들기 - 2013.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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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과 동화 만들기

강사 : 김기호(영남대)

1. 유형과 화소

▣ 유형 type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전승적인 이야기라고 규정된다. 이야기가 아무리 단순하거나 복잡해도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독립성을 가지면 類型으로 인정된다.

▣ 화소 motif

話素는 이야기를 이루는 독립적인 요소들이며, 한 유형에는 하나 이상의 화소가 들어 있다. 화소는 특이하고 인상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쉽사리 파괴되지 않고 용이하게 기억되며, 독립적인 생명을 지닌다. 같은 화소가 서로 다른 유형에 나타날 수 있다. 화소가 되는 경우는 첫째, 물건(부자방망이)일 수도 있고, 둘째 행위자(잔인한 계모)일 수도 있고, 셋째 행위(보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다)일 수도 있고,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용궁)일 수도 있다.

【연습문제】<뱀서방>

“어떤 노부부가 아들을 낳았는데 뱀이었다. 뱀아들은 나이가 차니 김정승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싶다고 했다. 김정승이 딸에게 의사를 물어보니, 첫째딸과 둘째딸은 거절했으나, 셋째딸은 아버지의 뜻이면 따르겠다고 했다. 혼인하던 날 뱀서방은 허물을 벗고 잘 생긴 선비가 되었는데, 이를 알고 신부의 두 언니는 질투를 했다. 남편은 뱀 허물을 아내에게 주면서 잘 보관할 것이며, 만약 없애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집을 떠났다. 이 비밀을 안 두 언니는 뱀 허물을 훔쳐다 몰래 태웠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떠나 바위 속의 세계로 찾아 들어갔다. 남편과 아내는 노래를 주고 받다가 만났다. 만나보니 남편에게는 딴 부인이 있었다. 남편은 몇 가지 시험을 해서 무난히 통과하는 사람을 진짜 아내로 삼겠다고 했는데, 찾아간 아내만 시험에 통과했다.

☞ <유형 type>는 <아르네 톰슨에 따르면 유형425 “잃어버린 남편을 찾아서”임
☞ <화소 motif>는 <뱀아들><사람과 뱀의 혼인><아버지가 뱀과 혼인하게 한다><세째가 결혼하고, 언니들은 시기하게 되었다><뱀 허물을 벗었다><뱀 허물을 보존하지 못했다><언니들이 비밀을 알았다><뱀허물을 잃어 남편을 잃었다><바위 속의 세계로 들어가다><잃은 아내와 만나다><남편에게는 딴 아내가 있었다><시험에서 이기면 진짜 아내로 삼겠다>

2. 민담의 분류

(1) 동물담 animal tale

① 동물유래담 : 동물의 생김새, 동물의 습성, 동물의 명칭 등 (예) <견묘쟁주>
② 본격동물담 : 동물에게 모든 인간적 속성을 부여하여 의인화한 것. 꾀장이 토끼, 미련한 곰, 교활한 여우, 어리석은 호랑이와 같은 유형
③ 동물우화: 직관적 관찰에 의해 동물에게 일정한 유형을 부여하고, 인간 행동을 동물 행동으로 바꾸어 그 속에 도덕적·교훈적 내용을 담음

(2) 본격담

① 현실담: 현실계에 현실적 인물이 등장하여 지혜와 용기에 의하여 사건을 처리함
② 공상담: 초현실계에 초자연적 인물이 등장, 초자연력을 사용하여 난관을 극복하고 행복한 결말로 이끔

(3) 소화

① 과장담 : 엉터리 이야기(방귀를 뀌어 뒷동산의 밤을 딴 며느리, 밤껍질과 함께 쓸려 간 꼬마 신랑, 기름강아지로 수백 마리의 호랑이를 잡은 게으름뱅이, 죽을 틈이 없어 1년 동안이나 호랑이 꼬리를 잡고 있었다는 스님 등, 게으른 사람, 구두쇠, 겁쟁이, 성미 급한 사람, 정신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② 모방담 : 정직자의 성공을 흉내내다가 실패하고 마는 부정직자의 이야기(<흥부와 놀부>)
③ 치우담 : 바보들의 이야기, 저능아, 바보사위, 어리석은 시어머니, 무식한 사람, 실언하는 사람, 불구들의 이야기 등
④ 사기담 : 거짓말이나 지혜로 상대방을 속이고 의도했던 바를 성취하는 이야기. 김선달, 정수동, 방학중, 정만서 등의 일화 등
⑤ 경쟁담 : 어떤 내기[시합]에서 지혜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


3. 민담의 기능과 의미(막스 뤼티의 『유럽의 민담』 참조)

인간의 삶에서 민담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여러 학문 분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다. 문예학자들의 연구와 더불어 민속학, 심리학, 종교학, 심화학, 사회학 그리고 예술사 분야에서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민담의 기능, 생성방식, 생성시기에 대한 질문에 포괄적으로 답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민담의 형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만을 말하려 한다.

그것은 민담의 형식에서 민담의 기능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폭넓게 분포된 예술형상체인 민담의 형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규정 된다. 민담의 형식은 민담을 만든 사람과 그것을 발전시킨 사람의 기질과 관련 있고, 동시에 듣는 사람의 욕구와 연관 된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형식만이 민담처럼 인기를 누릴 수 있고 광범위하게 분포된다. 민담의 형식은 그 기능에 알맞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어쨌든 형식에서 기능을 대략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민담의 본질적 특징에 의해 충족되는 인간의 요구는 어떤 것인가? 민담은 민담을 듣는 살마에게 무엇을 주는가?

오랫동안 민담을 연구해서 얻어낸 대답은 ‘오로지 즐겁게 하기’였다. 이것은 민담이 전설과는 반대로 순수하고 경향성을 띠지 않는 문학이라는 올바른 인식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은 즐겁게 하기 그 이상을 원한다. ‘즐겁게 하기’라는 표현은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 해도 협의의 의미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벤파이이 시대 이래 민담은 ‘단지 즐겁게 하기’만을 원한다는 것이 끈질기게 되풀이해 강조되어 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한 언어 사용은, 민담을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이야기들’로 간주하고 이 이야기들에 ‘태곳적 인류의 세계관’의 파편이 보존된다는 데서 그나마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견해와 일치한다. “첫눈에 우스꽝스러운 날조로 보였던 것은 그러한 관찰 아래서 진지한 역사 자료가 된다.”

민담은 역사 자료로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서 문예학자의 관심을 끈다. 문예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 형식의 본질과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다.

민담은 여러 요소를 모아서 승화시키는 양식 형태를 지닌 모험 이야기로서 세계를 함유한다. 그리고 비현실적이라고 할 정도로 쉽게 자신의 형상들을 고립시키고 결합시킨다. 뚜렷한 선, 명확한 형태와 색채를 사용하는 민담에서는 인간의 삶에 작용하는 연관들이 결코 독단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명확성과 신비가 하나가 되어 민담에 가득 차 있다. 그러한 특성을 지닌 형상체는 인간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가?

민중의 언어로 된 서사문학은 몇 가지 이야기 유형으로 나뉜다. 단순한 회상 이야기, 험담과 풍자, 사가(가족 이야기, 궁정 이야기, 상속 이야기), 전설, 성자전설, 신화, 민담이 줄곧 공존해 왔다. 모든 현실, 눈에 띄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현실조차 언어로 표현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나 피상적으로 관찰된 인간의 사건이 그 자체를 위해, 또는 어떤 윤리적 기준에 맞춰 평가되기 위해 보고될 때 험담이 생겨난다. 그에 반해 풍자는 통용되는 규정을 깨거나 기준을 뒤집거나 기괴한 관계를 만들기를 좋아한다. 가족 숭배가 주 내용인 사가는 가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해석하고 판단하다. 전설은 비정상적인 것, 기이한 것, 전례 없는 것을 보고하며, 사건 하나하나에 감동하고 이 사건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해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 전설은 사물들 간의 연관성을 보이려고 시도하지만 성자 전설처럼 최종적인 대답을 주지는 않는다. 성자전설은 각각의 사건을 독단적인 연관에 명백하게 편입시킨다. 신화는 비유적으로 현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행 과정을 유일한 근본적 사건 즉, 운명으로 소급시킨다. 그러나 민담은 이러한 단순한 이야기 형식들에서 부각된 모티프들을 받아들여 승화시킨다. 민담은 이 모티프들을 여러 에피소드 속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부분이 되게 만든다.

다른 모든 이야기 형식은 인간 영혼의 기본 욕구 즉, 앙드레 욜레스가 말하는 ‘정신집중’으로 쉽사리 소급될 수 있다. 민담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성장하는 것으로, 민담의 기능에 대해서는 즉시 인식할 수가 없다.

민담이 언제나 전설이나 성자전설과 비교되어 온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세 형식은 분포와 다양성, 중요성에서 다른 형식들을 능가한다. 저녁 시간에 공동체 내에서 전설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이야기와는 달리 특별한 것으로 돋보인다. 그리고 민담과 민담 연구자는 특별히 존경을 받는다. 성자전설에서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 대해서는 신성하다고 말한다. 이 세 장르는 거의 서로 뒤섞이지 않고 수백 년 동안 줄곧 공존해 왔으며, 가끔 생겨났던 잡종 형식이나 혼합 형식을 제외하면 이 양식들은 순수하게 유지되어 있다. 각각의 세 형식은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형식을 보완한다.

전설은 중요한 사건과 중요한 인물에 대해 말한다. 전설은 자극적인 체험에서 생겨나며 원초적으로 이야기의 실재성을 믿는다. 전설은 문학인 동시에 학문이다. 다시 말해 전설은 순수하게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前문학적-前학문적 형상체로 복합적이고 원시적이다. 전설은 민중 속에서 생기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전설이 만들어질 수 있다. 각각의 인물, 각각의 현상들이 전설의 대상으로, 전설에서의 묘사는 개별적이고 사실적이다. 전설은 특히 완전히 다른 세계의 접근을 즐겨 보고하며 감동적으로 또는 즐겁게 이야기한다. 전설은 해석 없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접근을 보여 주거나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그 묘사는 구체적이며 경험에 근거하며 변화가 많다. 전설은 특히 인간 및 피안의 존재들을 희생된 자, 학대받는 자, 또한 학대하는 자, 범죄자 또는 기만당한 자로 간주한다. 완전히 다른 존재가 이해되지 못한 채 불확실하게 묘사되어 우리의 세계로 다가온다. 모든 것을 내면 깊숙이에서 체험할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극복되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성자전설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성자전설은 모든 것을 동일한 중심 즉, 神에 연관시킨다. 전설은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고 즐겁게 만들며 불안에 떨게 하고 자극하지만, 성자전설은 해명하고 안정시킨다. 전설은 질문을 하고 성자전설은 대답을 한다. 그러나 성자전설의 대답은 독단적이다. 성자전설은 피안의 현상과 영향들을 체계화하고 이것들에게 내용상 제한된 의미를 부여한다. 성자전설은 민중 속에서 생길 수도 있는데 직접적이지는 않고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 발생한다. 성자전설을 수집하고 발전시키고 전파하는 것도 교회다.

민담은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롭다. 미담은 실재성의 속박이나 독단의 속박에서 자유롭다. 민담은 또한 개별적인 사건이나 체험에도 얽매여 있지 않으며 모든 것 하나하나가 민담에서는 구성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민담은 교회의 지지가 필요하지 않으며 교회의 적대적인 태도에 맞선다. 그리고 민담도 자신의 방식으로 대답한다. 인간 존재의 아주 중요한 문제를 매우 즐겁게 만드는 대답을 말이다.

민담에서 처음으로 세계가 문학적으로 극복된다. 현실에서는 무겁고 다층적이며 불명료한 관계로 맺어진 것들이, 민담에서는 가벼워지고 명료해지며 자유로운 유희를 하듯이 맞춰진다. 우리가 현실에서 부분적인 진행과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본다면 민담은 그 자체로 행복한, 모든 요소가 정확히 규정된 위치에 있는 세계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또한 우리는 민담에서 사물의 배후를 보지 않으며 단지 행동하는 형상들만을 관찰할 뿐이어서, 이 형상들의 과거와 미래, 이 형상들이 나타난 이유와 목적을 관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형상들이 줄거리 진행상 적절한 시점에 언제나 정확히 나타나며,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일이 없어지면 즉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것의 이유를 제시하는 전체적인 맥락은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조명되지 않는 것으로, 배후에 있는 것에는 조명이 비춰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명이 비춰진 전면에서 진행되는 것은 너무나 명확히 서술되어 있어서, 이 서술을 통해 민담을 듣는 사람은 확실히 즐거워진다. 자신을 위협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자신이 던져져 있다고 보는 사람, 전설에서 이 음산한 세계의 유령들을 서정적인 감동으로 묘사한 사람은 민담의 평온한 서사적 관찰에서 바로 이러한 세계의 변용을 체험한다. 그리고 괴로워하면서 불안스럽게 물어 보는 사람에게 민담이 던져 주는 대답은 성자전설의 대답보다 더 설득력 있고 영원하다. 왜냐하면 설명하고 믿음을 강화하려는 성자전설의 의도를 사람들은 감지하기 때문이다. 성자전설은 성자전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이고 그에 대한 해석은 적합하다고 반드시 믿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민담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민담은 해석도 설명도 하지 않는다. 오직 관찰하고 서술할 뿐이다. 믿음이나 신앙고백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이러한 꿈 같은 세계 관찰은 그 자체로 당연하며, 필연적으로 말로 표현되어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민담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성자전설은 이야기하는 사람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든 듣는 사람의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성자전설은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자전설에 대한 회의가 드는 반면, 민담은 특정 의도 없이 순수하기 때문에 기꺼이 우리를 맡길 수 있다. 성자전설은 피안의 힘들( 및 현세의 사건)의 본질과 의미를 의무감을 느끼면서 궁극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민담은 이 힘들을 설명하지 않지만 이들의 명확하고 의미 있는 작용을 보여준다. 그런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민담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민담의 주인공이 이름 모를 사물과 형상들의 본질과 기원을 묻지도 않고 이들이 자신을 움직이고 이끌게 놔두는 것처럼, 우리는 민담이 우리의 삶에 선사하는 도움에 감사하며 이 도움을 반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민담은 혼란스럽고 불명확하고 위협적인 현실과는 달리 발전하는 세계를 관찰하고 서술한다. 다양한 현실이 항상 해체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현실에서 여러 형태들이 활짝 피고 시들 때, 그리고 사실적인 전설이 끊임없이 이러한 생성과 소멸을 서술할 때, 민담은 형태들을 결정체로 만들어 뚜렷한 선과 견고하고 고정된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형상은 정지해 있지 않고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민담 속의 인간과 사물들은 시들지 않는다. 이것들은 다른 인간과 사물들로 바뀔 수 있지만, 사라지지 않으며 해체되지 않는다. 민담의 줄거리는 중단 되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며, 순수하고 확실하게 정해진 목표에 이른다. 생성되었다가 시드는 무상한 현실의 형태들 뒤에, 고정되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순수한 형상이 변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다.

민담은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만 ‘소원문학’이다. 하지만 원초적인 소원을 쉽게 이루는 것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전설은 인간이 얻는, 줄지 않는 빵과 치즈, 끊임없이 실이 나오는 실꾸리, 보물과 일을 돕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민담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밤새도록 수공업자나 주부의 일손을 덜어 주는 난쟁이들, 알프스 낙농가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유령, 아궁이와 외양간, 밭에 행복과 축복을 내려 주는 가정의 수호신들, 이들은 물론 소박한 사람들의 소원에서 생긴다. 전설 속의 민중은 매일 어렵고 힘들게 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을 피안의 존재들한테 선사받는다. 그러나 민담은 일상이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다. 민담은 주인공에게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도록 하며 먼 곳에서 위험을 겪게 한다. 민담의 관심은 원래 끝에 가서 손에 넣는 보물이나 왕국, 아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험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조역들, 즉 형들만이 금이나 은으로 가득 찬 산을 발견하고 만족하며, 주인공은 이러한 상황에서 모험을 계속한다. 민담의 주인공은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물을 받는 것이지, 계속 편하게 사용하려고 받지는 않는다. 민담이 등장인물에게 정말로 선사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민담은 등장인물들을 어떤 일을 수행해야 하는 곳으로 보내고 그러한 과제를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이에게 도움도 준다. 그 사람에게만 말이다. 주이공과 과제가 마주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선물은 나타나며, 그 전이나 후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선물은 경제적 궁핍을 덜어 주는 데 이용되지 않고 주인공이 모험을 찾아 나서도록 해 그 속에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선물은 주인공이 본질적인 운명을 발견해 실현하도록 한다. 사람들이 민담에 대해 말해 왔던 것, 즉 민담은 “행동으로 세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가련한 억압받는 자들”의 꿈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민담의 주인공은 활동적이며 진취적이다. 멈춰서 골똘히 생각하는 전설의 인간들과는 달리 그는 방랑하는 인간이며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민담은 활동적 행위를 위해서는 은총, 즉 動因과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무도 자기 행복을 스스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마켄젠과 베렌트존이 주장하듯이 민담을 그 속에 나오는 ‘소원하는 사물’ 때문에 ‘가련한 자들의 문학’으로 간주하고 최하층 민중 계급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민담은 전체적인 특성으로 보아 ‘소박한 인간의 憧憬을 운반하는 자’가 아니라 훨씬 포괄적인 의의를 지닌 관찰인 것이다.

민담은 또한 단순히 당위의 문학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민담의 의도는 세상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일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민담은 단순히 가능한 세계, 즉 우리가 바라고 요구하는 어떤 세계를 보여 주고자 하지 않는다. 민담은 어떤 모범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산의 눈앞에 드러난 세계를 실제로 믿으면서 서술한다. 민담의 관찰에서 모든 것이 가벼워지고 경쾌해지며 투명해지며, 외적 현실의 가식적인 베일이 벗겨진다. 민담에서는 외적 현실에서 다층적으로 뒤얽혀 있고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 본래의 고립과 광범위한 결합 가능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민담에는 반민담이 내포되어 있다. 주인공과 더불어 조역들과 실패자들이 있고 주인공 자신도 각각의 줄거리 지점에서는 자신의 궤도와 어울리지 않게 행동할 수 있다. 심지어 주인공의 실패나 파멸을 보여주는 민담의 前형식과 破片형식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死神 의 代子 또는 어부 프루의 대자처럼 계속 잘못을 저질러 마침내 은총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도, 피안의 힘들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민담은 이 행복한 접촉이 존재하는 것으로 서술하기 위해 완전한 형식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다. 민담은 고립에 의해 만들어진 광범위한 결합 가능성이 실현될 때에만 완성된다. 그 때문에 피안의 힘들과 접촉하기에 적절한 주인공이 민담의 완전한 형식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리고 주인공의 파트너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인공과의 관련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그를 늘 단순히 주인공과 대비되는 인물이나 조력자 또는 적대자로 생각해 온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 조역들은 너무 경시되고 주인공은 과대평가 되어 왔다. 주인공도 하나의 형상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주인공도 그 자체로서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조역들과 마찬가지로 줄거리 담당자로서만 관심을 끈다. 조역들은 줄거리 안에서 주인공과 맺는 필연적인 관계를 넘어서 어떤 독립성을 유지한다. 그밖에 조역들은 주인공이 저지른 잘못 만큼이나 과오처럼 중요한 존재 가능성, 즉 세계를 함유하는 민담에서 관계 의미 또는 대비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가능성을 대표한다. 주인공, 조역, 조력자, 적대자들은 민담이 보여주는 세계 관찰의 불가결한 부분들인 것이다.

민담은 세계를 미화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민담을 위해 스스로 변화한다. 민담은 세계를 자신이 그리는 그대로 본다. 무서운 것이라고 해서 민담 구조에서 제외되어 있지는 않지만, 무서운 것에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위치가 지정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다. 이러한 의미, 단지 이러한 의미에서만 민담을 ‘소원문학’이라고 불러도 된다. 민담은 질서 정연한 세계를 서술함으로써 인간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소원을 충족시킨다. 민담은 이 소원을 대신 충족시키려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충족시키고자 한다. 민담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꾸며대려고 하지 않고 현실이 투명해지고 명확해지는 것을 관찰한다. 민담은 우리가 잠시 동안 다른 것을 잊고 활기를 북돋아 주는 아름다운 세계를 믿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담은 세계란 자신이 관찰하고 서술한 그대로라고 믿는다.

이러한 관찰과 서술이 필연적으로, 다시 말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민담을 경향성이 있는 문학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민담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아무런 의도 없이 이야기한다.

민담을 당위의 문학이라고 부른다면, 현실세계와 다르게 존재해야 하는 세계를 민담이 제시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민담은 질서 정연한 어떤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질서 정연한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질서 정연한 그 세계를 보여준다. 민담은 세계가 존재해야만 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민담은 존재의 문학이며 당위의 문학이기도 한 것이다.

앙드레 욜레스가 민담에서 행동 윤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 것은 타당하다. 민담의 주인공을 규정하는 특성은 미덕이 아니다. 욜레스는 행동의 윤리(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사건의 윤리로 대체한다. 즉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하는 윤리로 말이다. ‘본래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야 할 것이냐는 예상에(......) 미담은 온 정신을 쏟는다.’ ‘민담에는 하나의 형식이 존재하는 데 “이 형식에서 사건과 일의 진행 과정은 정리되어 있어 이것들은 소박한 도덕적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고 그래서 우리의 절대적인 감정 판단으로는 ’좋은 것‘이며 ’정의로운‘ 것이다.” 좋은‘이란 표현을 ’정의로운‘ 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의어로 쓰는, 욜레스의 이러한 민담 규정은 너무 편협하다. 민담에서는 소박한 정의감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것이 중요하다. 모험, 과제, 위험과 도움, 좌절과 극복, 능력과 무능력, 이 모든 것은 민담에서 단지 정의의 지배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민담 자체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별과 광물에서 꽃, 동물,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민담이 선사하는 형상들의 세계는 그 풍부함 자체가 하나의 가치이고 이것들을 결속하는 것은 ’사건의 정의‘가 아니라 사건의 적합성이다. ’사건의 정의‘를  보여 주기 위해 민담이 온갖 규칙성을 이곳저곳에서 그렇게 면밀하게 실현시킨다면 쓸데없는 낭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정의‘는 더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더 단순한 수단, 즉 사실로 꾸며진 이야기를 가지고 민담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게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로 꾸며진 이야기는 순진한 사람을 속여서 이야기를 진짜로 여기게 한다.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이 순진한 사람의, 향유하려는 욕구와 정의를 추구하려는 욕구는 행복한 결말에서 대신 충족된다. 그러나 민담은 처음부터 부분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다. 민담은 속이려 하지 않는다. 민담의 추상적인 서술에서 민담은 현실이 아니라 본질을 서술하려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민담을 읽은 후에 겪는 놀라움은 욜레스에게는 ‘부도덕한 현실이 끝났다는 하나의 확신’일 따름이다. 여기서 그의 견해를 재고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행복한 결말로 끝나면서 사실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는 모든 피안의 것을 포기할 수 있고 ‘사건의 정의’를 설득력 있게 어렵지 않게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민담의 기적이 단순히 소박한 도덕을 보증하는 것으로 전락한다면 이 기적은 모든 매력을 잃는다. 이 기적이 고립과 광범위한 결합의 형상화로서 파악될 때 민담의 전체 매력이 빛나는 것이다. 민담은 기적을 기적으로서 사랑한다. 민담은 기적이 ‘사건의 정의’를 서술하기 위해 필요하거나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만 기적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고 곳곳에서 되풀이해 기적을 동원한다. 왜냐하면 기적은 민담에서 모든 것을 관통하는 고립과 광범위한 결합이 가장 환히 빛나는 가장 명백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정의’는 단지 민담의 부분적인 관심사일 뿐이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민담에서는 모험이나 과제에 던져진 주인공이 본질적인 힘과 접촉하는 것을 명백히 밝히는 게 중요하다. 수많은 반복과 여러 가지 변형들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접촉을 말이다. ‘정의’와 행복한 결말은 바로 이러한 접촉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민담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민담에서 장소와 시간이 표시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욜레스의 설명은 편파적이고 옹색하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장소나 시간, 인물이 ‘부도덕한 현실’에 접근하기 때문에, 민담은 장소 표시와 시간 표시를 포기하고, 역사적인 人名들을 명명하는 것도 포기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모두의 不在는 바로 추상적, 고립적 유형을 이루는 필수적인 구성 요소다. 추상적, 고립적 유형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민담의 생존 형식이다. 이 형식은 성장해 왔고 민담을 듣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예술적 영향을 끼친다. 이 형식이나 이 형식의 각각의 부분들을 소박한 도덕을 충족시키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민담의 의미는 더없이 보잘것없어질 것이다.  

앙드레 욜레스는 민담을 현실세계의 본질이미지가 아닌 대비이미지로 파악한다. 민담에서 작용하는 ‘정신집중’은 ‘사건윤리에 일치하지 않는 현실로서의 세계’를 거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집중은 모든 소박한 도덕적 요구가 충족되는 다른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한 방식으로 욜레스는 민담을 대리환상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듯이 민담은 현실세계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민담은 현실세계가 투명해지는 것을 보고, 세계의 본질을 인지한다고 믿으며, 우리가 본질을 관찰하도록 해 준다. 민담 자신도 믿는 본질을 말이다. 욜레스는 민담의 이러한 믿음 자체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담을 단순한 소원문학으로 간주한다. 그에 반해 로버트 페취의 다음 진술은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민중은 민담에서 세계가 서술된다는 사실, 즉 세계가 본래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민담에서 표현되는 낙관적인)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분명하게 지각한다.” 민담은, 단지 무한한 정신을 위한 연극을 유한한 정신들을 위한 연극으로 만든다. 페취의 생각으로는 민담은 현실과 상응하는 이미지이지만 그것은 외적인 현실의 대비이미지일 뿐, 본래 현실의 대비이미지가 아니다. 민담은 오히려 본래의 현실을 관찰하고 서술한다고 믿는다. 현실의 본질을 관찰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지금껏 앙드레 욜레스의 견해를 상세히 설명한 것은 민담 연구는 바로 이 학자의 업적에 크게 힘입었기 때문이다. 민담에서 작용하는 ‘정신집중’을 소박한 도덕적 욕구의 실현으로 규정하는 것은 내용상 너무 편협한 생각이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욜레스는 방법론상 두 가지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가 정말로 진지하게 민담에서 작용하는 ‘정신집중’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민담을 특정한 정신집중의 표현으로 간주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욜레스는 ‘단순히 즐겁게 만들기’라는 문구에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욜레스는 정신집중을 규정하려고 노력했는데, 민담을 모티프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체적 측면에서 파악했다. 이와 함께 그는 민담 형식 그 자체를 분석하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각각의 모티프의 출처, 역사와 내용을 통해서는 민담 형식의 원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민담의 모든 개별 요소, 예를 들어 민담에 나타나는 기적은 단지 태곳적 관습이나 체험 방식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민담의 본질로 이해할 수 있다.

민담은 이야기로서 즐겁게 만들 뿐만 아니라 존재를 해명한다. 민담은 서술된 것의 외적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금지한다. 우리는 추상적 양식과 많은 반어적 결말 문장 및 도입 문장에서, 민담의 세계와 외적 실재성이 근본적으로 구별되며 결코 서로 뒤섞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민담은 또한 세계를 의식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민담은 전설이나 성자전설과는 달리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으며, 결코 체계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민담은 단지 서술할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으로서 민담은 서술된 것의 내적 진실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민담은 빈둥거리는 유희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체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서사 문학의 본질을 “모험적인 것과 의미심장한 것의 연관”으로 파악하는 로버트 페취는 민담을 “인간의 이야기 기법의 원형”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민담은 순수한 서사적 관찰로서 입증된다. 전설이 내적 움직임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민담은 내적 靜止에서 생긴다. 민담의 창작자 자신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을 순수하고 확실하게 관찰하고 서술할 수 있다. 민담은 서사적 빛과 서사적 유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서사적 움직임과 서사적 명확성이 뚜렷이 표현되어 민담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상대적으로 독립된 에피소드,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결말은 서사적 현상이다. 많은 모티프들이 흐릿해졌지만 우리는 그 본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모티프들은 세계의 어떤 부분의 대표들로서 존재한다. 민담의 세계함유성은 세계를 관찰하고 세계를 서술하려는 서사적 노력의 성취를 의미한다. 모티프의 본래 내용을 박탈하는 승화를 통해 민담은 서사적 객관성을 만든다. 그러나 서사적 특징이 아닌 서사적 가능성만을 형성하는 서사적 폭 대신에 민담에서는 서사적 간결함이 나타난다.

사건과 형상을 추상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민담은 명확해지고 확실해진다. 가벼운 움직임, 줄거리의 신속한 진행, 주인공의 방랑을 통해서 민담은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나. 얽매여 있음과 자유로움, 확실성과 움직임, 확고한 형식과 가볍게 진행되는 줄거리가 민담에서 결합되어 예술적 통일체를 이루고, 듣는 사람에게 마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민담은 형식과 내용상 ‘魔性에 대한 대답’이다. 형상과 사건들을 체계화하지 않음, 개관하지 않음, 뚜렷한 선과 명확한 형태를 가짐, 바로 이러한 것들이 민담의 특징이다. 고립적 양식이 완전히 독특한 것을 낳은 것이다. 즉 민담에서는 연관성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전혀 표현되지는 않지만 어떤 연관 속에 있다는 확신이 분명히 드러난다. 槪觀하지 않는다고 본질적 힘과의 접촉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민담은 다음과 같은 것을 확신시키려는 것 같다. 즉 우리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어떤 힘이 우리에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고 어떤 연관에 파묻혀 있는지 몰라도, 우리가 의미심장한 연관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고 말이다. 이러한 통지가 민담에서 얼마나 강하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되고 있는지, 민담의 표현 수단이 이 통지를 얼마나 훌륭히 지탱할 수 있는지는, 순수한 민담과 아풀레유의 <아모르와 프시케>같은 창작민담을 비교해 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창작민담 속 사건들은 동물신랑 민담의 사건들과 일치하지만, 좋고 나쁜 피안의 존재들은 정확히 신원이 확인되어 어떤 체계에 편입된다. 이렇게 하여 아풀레유의 민담에서 신뢰성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야기는 작가에게 유희적 작업이 되고, 선물을 주거나 방해하는 힘은 작가 자신도 믿지 않으면서 억지로 꾸며낸 어떤 체계에 속하는 신이 된다. 그에 반해 민담에서는 체계화되지 않음으로써 민담의 심오한 진지함이 드러난다. 민담은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은 말하지 않으며 자기가 관찰하는 것만을 안다. 민담은 아무것도 억지로 꾸며내지 않는다. 민담은 변덕스러운 상상력의 놀이터가 아니다. 민담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관찰한 세계와 인간을 믿음을 갖고 서술한다.

민담을 상징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문학이 상징이 되는 넓은 의미에서만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민담이 이야기하는 특수한 것은 자기 자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것이 특수한 것에 숨어 있다가 드러난다. 민담은 돼지치기 소년과 공주를 통해 돼지치기 소년과 공주뿐 아니라 동시에 일반적인 인간을 말한다. 병은 병일 뿐 아니라 일반적인 고통을 가리킨다. 용이 죽일 뻔했던 처녀를 구원하는 순간을 선입견 없이 듣는 사람은 틀림없이, 처음에는 바로 외적 진행 과정을 체험하지만 동시에 이 외적 이미지에서 정신적인 진행 과정을 볼 수 있다. 인간 영혼의 위기와 구제, 거대한 충동적 힘의 영향과 무기력이 그러한 이미지들에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이미지들에는 제물을 바치는 잔혹한 의식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살아 있다. 동시에 마적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표현된다. 또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함께 표현된다. 민담을 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의 내적 상황에 따라서 이러한 것들 가운데 하나 또는 이 모두를 느끼게 된다. 관찰된 이미지는 무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 속에서 민담을 듣는 사람에게 관찰 이미지일 뿐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어떤 것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미지가 완전히 의식적으로 해석될 때 문학은 파괴되는 것이다.  

민담은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해석 하나하나는 零落을 의미하며 본질적인 것을 비껴 간다. 승화를 통해 민담의 모든 요소는 개별적인 것을 빼앗기고, 자신들이 원래 자라났던 영역에서 순수한 상태 그대로 들어 올려져 이제 다른 영역들도 상징화할 수 있다. 언젠가 관능적인 상징이었던 것이 이제 완전히 다른 것을 위한 표시가 될 수 있다. 뱀이나 꽃가지를 얻고자 하는 상인의 딸의 소원은 민담에서 특히, 본질적인 것과 마주쳐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은밀한 연관을 만드는 여주인공의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구체화한다. 동시에 이 소원은 우아, 겸손, 고집, 변덕, 새침떨기, 순종 등을 의미한다. 관능성이 이미지에 섞여 있다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열쇠에 대한 물음은 근원적으로 性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며 공주들의 병은 사랑의 번민으로 생긴 병이다. 그러나 민담에서 이것들은 성과 연관지어 이해할 필요도 없고 무의식적으로 성과 관련된 상징이나 사랑의 상징으로 체험할 필요도 없다. 아름답고 순수한 공주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 순수함, 善 그리고 구원이 필요한 것을 위한 상징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식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주는 상징이지, 알레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주는 정신적인 것과 합일되기를 그리워하는 인간 영혼으로서 체험될 수 있다. 그러나 반면 공주는 단순히, 남자에게 정복당해 구원되기를 바라는 숫처녀로서 설명될 수 있다. 사람들은 왕자에게서 활동적이고 정신적인 힘의 상징을 감지할지도 모른다. 민담에 나오는 별, 돌, 꽃, 동물, 옷, 반지, 지팡이, 상자, 알, 내부 공간 등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이것들은 우주의 인간 외부세계의 대표자다. 그러나 이것들은 또한 인간의 무의식적인 내면세계를 상징화할 수 있는 것으로, 무의식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이것들에서 형상화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들은 은폐하는 상징이 아니라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러나 이는 성과 관련된 상징으로서는 은폐하는 상징일 수도 있다.

편파적인 민담 해석은 모두 자의적이다. 그렇더라도 민담을 학문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민담 형식이 고립, 추상화, 승화를 통해 모든 요소 하나하나를 형상으로 만든다는 사실은 앞에서 서술했던 민담 형식의 본질에 속한다. 다시 말해 민담 형식은 각각의 모든 요소를 구체적인 固着, 개별적인 확정성과 一意性에서 풀어내어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는 이미지로 만든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은 눈, 즉 감각에 대해 불명확하며 애매하다. 왜냐하면 그 윤곽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 내적인 무한성은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이고 線적인 것은 감각에 대해 명확하고 명백하다. 구체적이고 일회적인 것은 정신적으로 영원히 일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구체적이고 일회적인 것의 본질적 특징은, 인간 인식능력의 한계로 인해 결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개별적인 것 그 자체는 상세히 규정되어 있고 분화되어 있고 일회적이다. 그에 반해 추상적 형상은 정신적으로 다양하게 규정 될 수 있다. 개별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에 추상적 형상은 다양한 의미들을 표현할 수 있다. 무게감이 없는 민담의 형상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즉 민담의 형상들은 특정한 해석에 얽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해석을 금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담의 형상들은 다양한 해석을 허락할 뿐 아니라 바로 그러한 해석을 요구한다. 민담의 형상들은 민담을 듣는 사람에게서 나지막하지만 다양한 음성이 분명히 울려 퍼지게 만든다. 민담의 형상들은 민담을 듣는 사람에게, 의식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현상들을 위한 눈에 보이는 이미지다. 민담의 초개인적인 형상들은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자에 의해 개인적인 내용으로 무의식적으로 즉시 채워진다는 사실, 더욱이 대개는 여러 겹의 겹침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것은 민담을 듣는 사람에게 민담이 허용하는 자유이며, 민담을 듣는 사람이 의식적이며 편파적으로 해석해 자신을 파괴하는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담을 듣는 사람이 당하는 정신적 폭력의 본질은, 민담을 듣는 사람의 체험 내용이 민담의 엄격한 형식에 맞춰져야 하고 그리하여 정신적인 질서를 체험한다는 점에 있다.

모든 민담의 형상들이 지닌 특징인 가벼움은, 민담이 우스개 이야기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결과를 낳는다. 민담이 자신의 요소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내적 자유로 인해 민담 속에서 요소들을 원기 발랄하게 다루는 유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쾌한 진지함에서 익살과 풍자가 나온다. 모티프들을 뛰어난 솜씨로 자유롭게 다루는 유희는 익살맞은 자의적인 유희가 된다. 기적은 쌓이고 쌓여 자격 없는 주인공한테 아낌없이 주어진다. 또는 기적 대신 詐欺가 등장하고 피안의 존재들이 주는 선물은 주인공의 세속적인 영리함으로 대체된다. 민담 성격의 우스개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주인공의 폭넓은 접촉 능력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민담의 독실한 믿음을 비웃는다. 민담 성격의 우스개 이야기에서는 사건의 적합성 대신 사건의 유머가 들어선다. 순수하게 민담적인 기본 구조를 지닌 많은 이야기들이 익살스러운 언어로 표현된다. 진지한 민담에서 이야기 진행이 익살스럽게 바뀌는 경우도 흔하다. 민담은 완전히 완성되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으며 익살스러운 것으로만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민담이 완전히 완성된 형태는 문학의 최종형식으로 간주된다. 전설, 성자전설, 세속적 이야기(베셀스키가 말하는 의미에서)는 각각의 모티프들을 강조하며 그것들에 얽매여 있다. 전설은 현실 체험 하나하나를 형상화하고 전력을 다한다. 전설에서 모든 요소는 긴장 넘치고 생생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 그 결과 전설은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유롭게 발전할 수 없고 짧은 형식에 머물러 있다.(일지성 및 단편으로 변하는 경향). 전설의 문학적 힘은, 전례 없는 체험을 성취하려는 거대한 노력에 국한된다. 그러나 민담은 자신을 형성하는 요소들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얻으며, 이 요소들에서 원래의 체험 내용을 제거하고 이 요소들을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에 따라 절대적이고 뛰어난 솜씨로 다룬다. 이렇게 하여 가벼운 단순성의 인상이 생긴다. 가벼움과 탁월한 단순성은 후기 형식의 특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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