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강좌 <이야기를 통한 치유> 3강 순수와 동화 만들기 - 2013. 7.18 (2)
독일에서 바로 아나크레온풍의 문학 조류(빌란트, 무제우스)가 민담을 새로 찾아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나크레온풍의 문학 조류는 최종형식으로, 공허해진 모티프들을 뛰어난 솜씨로 다루며, 민담처럼 천진난만한 단순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도 이 문학 조류를 원시적이거나 소박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 문학 조류가 발전의 끝에 서 있으며, 결코 소박하지 않으며, 그 단순성은 인위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민담이 생성된 상황과 시기를 학문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담의 내적 형식을 살펴보면 민담도 원시적이거나 소박하지 않으며 고도로 발전된 예술이라는 확신이 든다.
낭만주의 역시 후기 형식으로, 우리는 민담에 대해 낭만주의가 보인 깊은 애정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 분명한 초기 조류인 ‘슈투름 운트 드랑’은 민담이 아니라 전설에 가깝다(<파우스트>, <레노레>). 전설은 문학의 초기 형식이다. 이것은 원시적이며 문학과 학문이 하나로 된 것이거나 前문학적-前학문적 복합 형상체다. 민담은 순수한 문학이고 이미 이러한 이유 때문에 원시적이지 않다. 발전되지 않은 共存은 원시적이다. 그러나 민담은, 각각의 영역들이 순수하게 나뉠 수 있었고 문학이 학문이나 실제와 결부되지 않았던 인류 발전의 한 단계에서 생성되었음이 분명하다. 원시적 형상체로서의 전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중 속에서 날마다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민담도 민중 그 자체에서 생겨나지는 않는다.
형식 분석이 민담의 생성 시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민담이 수준 높은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시기적으로 매우 초기의 문화들에 속할 것이다. 오늘날 독일의 어린이들(네 살에서 아홉 살, 길게 잡아 열둘, 열세살까지)이 본래 민담 애호가라는 사실에서 민담이 초기 문화 시기에 성성되엇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민담을 들으려는 어린이의 뜨거운 욕구와 언젠가 들었던 원문을 그대로 따르려는 철저함 때문에 오늘날 어린이가 민담을 듣기에 가장 적합한 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담이 원래 어린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져 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으며, 기껏해야 계통학상의 원칙에 의거해 민담은 인류 발전의 아주 초기 단계에 생겼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지금은 쥐도와 포이케르트의 연구로 그러한 초기의 생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심리학적 민담 연구, 정신분석학적 민담 연구, 직관적 민담 연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같은 결론에 이른다. 쥐도는 민담을 인도게르만어의 유산으로 간주하고, 포이케르트는 민담이 인도게르만어 시기 이전에 생겼다고 추정한다. 포이케르트는 민담이 동지중해-근동아시아의 농촌문화와 도시문화, 즉 모계제도의 문화구조를 지닌 토테미즘 이후 시기에 생성되었다고 보며, 이전의 토테미즘 시기에는 절대적인 마법이 등장하는 “신화적 성격의 민담”이 전성했다고 파악한다. 헤르만 바우징어는 “소원과 현실이 사라지는 곳, 마법의 세계(포이케르트)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좋았던 옛시기로 생각되어 이야기 속에 보관할 수 있는 곳에서 민담이 생긴다고 믿는다. 오토 랑크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토테미즘 신화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지는 민담이 가부장 제도의 조직이 사회적 조직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생겼다고 생각한다. 오토 후트는 민담의 기원을 초기 석기시대에서 찾아, 민담이 거석문화 시대의 신비한 성자전설에서 유래한다고 추정한다. 이와 반대로 민담에서 귀족적 생활 태도의 표현 형식을 확인하는 얀 데 브리스는 신화적 문화가 더 합리적인 문화로 교체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가령 호메르스 시대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민담이 생겼다고 추적한다. 우리의 형식 연구 자체는 민담의 정확한 발생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수긍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포이케르트가, 민담이 여전히 많은 마법적인 모티프들을 다룬다는 사실 때문에, 민담이 ‘마법적’ 세계가 끝나고 ‘이성적’ 세계가 시작될 때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논증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민담은 모든 모티프를 다루기 때문이다. 마법적 모티프뿐 아니라 신성한 모티프, 性과 관련된 모티프, 세속적인 모티프도 포함해서 말이다. 민담은 이 모든 모티프의 힘을 박탈하고 모두를 승화시키므로, 어떠한 개별적인 설명도 필요 없으며 개별적인 결론이 도출되어서도 안 된다. 추상적인 양식은 모티프에서 본래의 내용물을 빼앗고 승화시킨다. 뛰어난 예술가가 만든 추상적 양식은 실제 삶에서 민담에 걸맞은 내용을 찾아냄으로써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민담을 들려준다고 해서 민담이 처음부터 어린이들을 위해 창작되어 왔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되며 여성문학이라고 결론 내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식에게 민담을 들려주는 상황은 민담이 위에서 아래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담은 원시인들에게 적합한 문학일 수 있지만 원시인들의 문학은 아니다. 민담은 순수한 문학으로서 수준 높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추측할 수 있다. 민담은 이 예술가들에게서 민중에게로 내려온다. 민담은 순수한 문학적 관찰을 통해 생성된다. 몽환적인 관찰을 말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민담 작가의 白日夢이지, 밤에 꾸는 일상적인 꿈이 아니다. 민담에서는 각각의 모티프들이 밤에 꾸는 꿈에서 생길 수 있는데, 민담이 이러한 영역에서조차 요소들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것은 민담의 세계함유성에 상응한다. 한편 꿈에서는 꿈꾸는 내용은 명백한데 비해 감정이나 상상력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언제나 유형화된 같은 모티프들이 반복됨). 이러한 감정의 결핍과 상상력 결여는 둘 다 민담의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민담은 잠자면서 꾸는 꿈보다 감정의 결핍(심리적 평면성)이 훨씬 더 심한데, 그 점에서 민담은 오히려 낮의 꿈, 바로 민담이 생겼을지도 모른 민담 작가의 백일몽과 같은 것이다.
민중은 민담의 운반자이며 양육자지만, 민담의 창작자인 경우는 드물다. 민담은 예언 능력을 지닌 작가가 민중에게 보내는 선물이라 할 것이다. 누가 최초의 민담 창작자인지는 알 수 없다. 민담 창작자가 민담을 민중에게 알맞고 구전에 적합한 형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민중에게 건네주었는지, 최초의 민담이 민중 사이에서 구전되면서 어느 정도까지 변형되었는지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다만 민담의 명확한 양식의지를 밝히려고 애썼던 우리의 형식 연구에서 보면, 최초의 민담 창작자의 공로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컸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민담 연구는 개별적인 양식상의 특징을 전적으로 또는 상당히 주로 구전 가능성에서 끌어 오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민담이 문학의 다른 기본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집중’의 표현으로 인식되면서 그러한 예술 유물론적 설명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전설, 사가, 성자전설, 험담도 구전되지만 민담과는 양식이 다르다. 多肢性의 이야기인 민담은 구연자가 기억하도록 확고하고 상투적인 양식이 필요한 반면, 一肢性의 현상체인 전설은 그러한 양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는 이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서로 다른 양식은 서로 다른 양식의지를 표현한 것임이 분명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자기 주위세계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내재적인 법칙에 따라 성장하지만 동시에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차적인 것은 내재적인 법칙이다. 문학의 독자적인 정신과 문학의 외적 상황이 일치할 때에만 문학은 살아갈 수 있다. 민담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외적 가능성에 의지한다. 그러나 일차적인 것은 민담의 독자성이다. 어떤 식물의 형태를 성장 장소, 배양지, 기후로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식물의 독자적인 성장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민담의 양식도 구전 방식에서 끌어올 수 없다. 식물은 외적 상황이 자신의 독자적인 법칙과 일치하는 곳에서만 성장한다. 민담은 자발적으로 생기는 자신을 외부세계가 받아들이고 지탱할 수 있는 준비와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만 번성한다. 민담의 창작자, 양육자, 듣는 사람의 내적 욕구가 일차적이다. 민담이 구전되기에 적합한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민담이 생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내적인 법칙이 정신적으로 먼저다. 민담의 특성을 바로 민담 자체에서 파악할 때만 우리는 민담과 인간 세계에서의 민담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민담의 특성이 동시에 구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삶이 생성되는 곳에서 언제나 나타날 수밖에 없는 요행인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민중이 자신들에게 제공된 작품을 변형해서 작품이 민중의 내적 욕구 및 구전에 적합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작품이 처음부터 민중의 욕구와 민중의 이야기 능력에 맞는 형식으로 민중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민담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둘 중 어떤 것을 채택해야 하는지는 당장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두 번째 가능성은 민담 연구에서 지금까지보다는 더 진지하게 고려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호메로스(물론 그는 오랫동안 진행 발전되어 온 것을 이어받은 상속인이기는 하지만) 같은 최초의 민담 창작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오랜 발전의 결실인 그의 작품들이 변하지 않은 상태로 순수하게 민중 사이에 구전되어 보존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 때문이다.
민담의 생성 방식과 생성 시기를 추론하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었다. 단지 지나는 길에 조심스럽게 그와 같은 결론이 나올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유럽 민담의 본질적 특징을 말하고 그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다. 민담 양식의 표현이 구연자에게 따라,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하다. 민담들이 추구하는 어떤 기본 형식이 있다. 이 기본 형식은 순수하게 실현되기는 어렵지만, 모든 민담 뒤에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한다. 살아 있는 이야기는 기본 형식의 주위에서 움직이며 기본 형식을 휘감는다. 모든 민담에는 기본 형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러 이야기들을 비교해야 원래의 민담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어떤 민담에서 장소와 시간, 역사적인 인명이 언급되더라도 해당 이야기가 민담 구조와 민담 양식을 유지할 경우에는 이 이야기는 민담으로 남는다. 그러나 장소와 시간, 인명은 이질적인 것으로 이것들은 원래의 민담 양식이 아니다. 원래의 민담 양식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세 자매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민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몇 달이 지나 두 언니는 자신들이 증오하는 동생의 하녀가 되었습니다. 동생의 행복은 두 언니의 가슴에서 증오와 질투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왕비님의 겸손과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언니들의 가슴에서 증오의 불꽃은 점점 더 강렬해졌습니다. 왕비님의 두 하녀는 질투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질투 때문에 마음의 평온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질투로 불타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공허하게 윤색 되어 민담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다음 문장들에서 순수한 민담 양식이 곧 다시 복구된다. “세 자매가 결혼한 후 (한 시간이 흘러 간 것처럼) 1년이 흘렀습니다. 왕비님은 왕자님을 낳았습니다.(왕비님의 언니들은 마음을 달랠 행복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질투로 가득 찬 두 언니는 왕자님을 작은 솥에 넣고 왕궁을 지나 흐르는 도랑에다 그 솥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두 언니는 임금님에게 기저귀로 감싼 나무토막 하나를 보여주며 왕비님이 그 나무토막을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전에 내적 감정을 그렇게 많이 발설했던 언니들은 이제 분명히 자극적인 줄거리에서 약간의 흥분도 하지 않는다. 언니들은 완전히 평면적으로 그려지고 극도로 엄격하면서 가볍게 자신들의 일을 완수한다. 언니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냉정함은 계속 되는 동작을 통해 강조된다. 살아 있는 아이의 자리에 언니들은 딱딱한 나무토막을 놓는다. 언니들은 분노하거나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지 않고 이 나무토막을 조용히 왕에게 제시한다. 노르웨이 민담의 결말을 보면 왕이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성으로 돌아온다. “처음에 왕비님은 임금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임금님은 몹시 걱정하면서 멀리 방랑했던 탓에 여위고 창백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금님이 반지를 보였을 때 왕비님은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두 분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온 천지에서 그 결혼식에 대해 들었습니다. 왕이 걱정하면서 방랑했기 때문에 쇠약해지고 여위고 창백해졌다는 것은 민담의 양식에 맞지 않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구연자가 민담의 양식을 오해했기 때문에 이 어구들을 삽입했음을 알게 된다. 구연자는 순수한 고립적 민담 양식에 당연한 것, 즉 ‘다시 알아보지 못하기’를 설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순수한 민담에서 달리 서술될 수 없는 내적 관계의 외면화(투영)인 식별표식의 필연성은 설명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민담의 고립과 평면성을 위반하는 이밖의 예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특히 세르보크로아티아의 민담에서 광범위한 결합을 합리화하는 문장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자네는 운이 좋군. 신께서 그대를 바로 올바른 길로 인도하셨어.“ ”그는 신께 계속 기도했습니다. 신은 이날 밤도 그를 무사히 지켜 주셨습니다.“ 순수한 민담 세계에서는 신이 모든 것을 정리해 주도록 신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정리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기준에 따라 민담에서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않은 것(근원적인 것과 근원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을 구분할 수 있다. 빌헬름 그림도 많은 경우 원래의 민담과 달리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여러 연구자들이 입증해 왔다. 순수한 프랑스 민담의 양식이 루이 14세 시기에 저술 활동을 한 궁녀의 손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러고 나서 야콥 그림에 의해 철저히 정화되어 본래의 민담 양식에 어떻게 다시 가까워지고, 그 후 빌헬름 그림이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첨가함으로써 어떻게 감상적이 되었는지, 이 모든 것을 라푼첼 민담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민담이 민중 사이에서 다시 구전되면서 교정이 이루어지고, 프랑스 민담에서 첨가되었던 요정들이 야콥 그림의 민담에서보다 훨씬 철저히 제거된다.
유럽의 민담은 추상적 양식 형태를 지닌, 세계를 함유한 다지성의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 그리고 세계를 자신 안에 받아들인다. 민담은 세계가 매우 깊숙이 연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지는 않지만 세계의 의미심장한 유희를 보여 준다. 세계의 모든 요소는 민담 안에서 가벼워지고 투명해진다. 마법적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나 신성한 내용, 세속적 내용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민담 특유의 독특한 마법과 민담에서 유래하는 마법적 작용이 나오는 것이다. 민담은 이 세계의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마법을 써서 변신시킨다. 민담은 이 사물과 사건들을 무거움, 고착과 속박에서 구해내어 정신에 가까운 다른 형태로 변화시킨다. 민담은 마법에 관해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몸소 마법을 쓴다. 현실이 정신과 언어에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원을 민담은 성취한다. 민담은 세계를 승화시키고 정신화하는 것이다.
민담은 지나간 시대의 유리알 유희다. 오늘날 민담은 화살, 활, 도끼, 외날 칼처럼 어린이 방에 틀어박혀 있다. 민담은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민담은 아주 단순하며 ‘순진하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를 이 세계의 모든 내용으로 더 이상 채우지 않는다. 민담은 결코 다양하지도 않고 분화되어 있지도 않다. 또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민담의 대답도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민담은 인간을 가능성을 선사받은 은총 받은 자로서 보여 준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기형상화와 세계형상화를 추구한다. 현대인은 단지 받는 자로서만 초월적인 힘을 체험하고 싶어 하지 않고 이 힘을 인식하고 싶어 한다. 그는 아마도 은총받은 자가 되기를 갈망하기보다는 자신을 규정하는 자, 즉 자신의 목적과 길을 의식하고 인식하면서 선택하는 자가 되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 때문에 전설은 민담보다 더 원시적인 형상체이긴 하지만 민담보다 현대인에게 더 잘 어울린다. 민담은 그 자체로 완성된 포괄적인 문학적 관찰이다. 전설은 복합적이고 제한되어 있고 상당히 변형되어 있으며, 자신 외의 것을 의미한다. 민담은 개별적인 잠재력의 본질과 특성을 묻지 않고 세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설은 사물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현세의 존재 및 피안의 존재들에 의해 감동받고 자신의 방식으로 ‘설명하며’ 부분적으로 대답한다. 전설은 사물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는다. 전설은 인식하고 해석을 하며서 어두운 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전설은 부분을 밝게 하거나 또는 밝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민담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 전체적으로 경건하게 관찰한다. 민담은 순수한 문학으로서 순수한 잠재성에 머문다. 그러나 모든 전설은 각각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동시에 훨신 더 현실적으로 존재를 해명하기 위한 원시적이며 까다로운 始作 단계다. 전설은 전체를 관찰하지는 않지만 각각의 현상들을 관찰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것은 전설이 문학적 학문이기 때문으로, 전설에서는 문학과 학문이 아직 발전되지 않은 채 서로 교차되어 있다. 그 때문에 전설은 원시적인 형상체다. 그러나 이전에 원시적으로 통합된 것을 분리했다고 그것이 최종 상태는 아니다.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통일체였던 것은 분화되어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며 더욱 높은 차원의 새로운 통일을 추구한다.
우리는 원시적인 전설을 통해 발전 방향을 알 수 있다. 이전에 발전 되지 않은 통일체였던 것은 독자적인 양식, 독자적인 법칙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통일체가 되기를 원한다. 분화된 전체만이 더욱 차원 높은 통일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문학과 학문의 새로운 합일을 꿈꾼다. 원시적인 전설에서 자유롭지 않고 무의식적인 공존이었던 것이 분화되어 자유롭고 다양한 조화로 나타나야만 한다.
현대에는 단지 부분 영역만이 발전하고 있다. 현대는 전체로서 자신의 양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개별 학문들과 기술은 멀리 앞서 간다. 그러나 도덕, 교양, 예술은 이들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신은 같은 속도로 걷지 않았다.” “신은 교양에서 뒤처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연관을 그리워하고 그 연관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을 그리워한다. 민담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전설처럼 민담 역시 더욱 높은 차원에서 새롭게 자신을 실현하고 싶어 한다. 오래된 민담이 원시적인 전설의 내용들을 승화시켜 자신 속에 받아들였던 것처럼, 새로운 민담은 틀림없이 현대 학문의 내용들을 자신 속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와 학자는 “새로운 정신적 체험을 포착하여 교환하는 것이 가능한 새로운 알파벳, 새로운 기호언어를” 꿈꾼다. 이러한 미래의 유리알 유희를 통해 학문과 예술, 부분 인식과 전체 관찰, 현실성과 잠재성이 하나가 될 것이다. 민담과 전설 사이의 오래된 대립은 이 유리알 유희에서 깨어질 것이다. 유리알 유희는 전설처럼, 학문이자 문학일 것이며, 민담처럼 인간 존재를 유희하듯 전체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민담이 작가의 꿈에 머물러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오래된 민담은 계속 살아남아, 어린이들에게는 생기와 즐거움을 주고, 어른에게는 미래의 가능성을 약속할 것이다.
【연습문제】동화 만들기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 민담이자 순수한 인류의 마음인 동화입니다. 동화 만들기는 인간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무한한 상상을 하는 경험입니다. 인간의 꿈을 실현하는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내적 상처와 소외, 불안을 떨치고 극복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다음의 물음을 기본 스토리로 삼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 호랑이를 한 마리 그리시기 바랍니다.
2. 호랑이의 이름은 무엇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간단히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3, 호랑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언제입니까?
4. 호랑이는 장차 누구를 만납니까?
5. 호랑이와 만난 이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까?
6. 호랑이 앞에 어떠한 난관이 놓여 있습니까?
7. 호랑이는 그 난관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8. 호랑이가 난관을 극복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9. 이 이야기에 대한 가치의 면에서 논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동화 만들기1】경주대학교 황◯◯
옛날, 어느 밀림에 호랑이 한마리가 살았습니다. 그 호랑이의 이름은 돌쇠였습니다. 돌쇠는 호랑이었지만 힘도 약하고 덩치도 작고 마음도 너무 착해 다른 동물을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돌쇠는 호랑이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쇠가 길을 가던 중 물에 빠져 허우적 되는 양을 보았습니다. 양이 말했습니다. "호랑이님, 호랑이님, 제발 살려주세요." 돌쇠는 양을 위해 물에 뛰어들어 힘들게 양을 구해 줬습니다. 하지만 양은 돌쇠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이 관경을 본 다른 호랑이들은 돌쇠가 또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놀렸습니다. 한 호랑이가 말했습니다. "돌쇠, 이 바보 같은 놈아 먹잇감을 구해주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 눈앞에서 놓치질 않나" 호랑이들은 돌쇠를 비웃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돌쇠는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다른 동물을 돕지 않겠다고, 그런 결심을 한 뒤 돌쇠는 사냥을 하로 갔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착한 돌쇠는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날이 하루,, 이틀 ,, 시간이 지나 밀림 동물들 사이에는 돌쇠에 대한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동물들은 호랑이인 돌쇠를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돌쇠를 놀리는 동물까지 생겨났습니다. 많은 동물들이 돌쇠를 무시했지만 돌쇠는 참았습니다. 동물들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밀림에 사냥꾼이 들어와 닥치는 대로 동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랑이, 곰, 늑대, 여우...... 평소에는 가장 용감했던 동물들은 가장먼저 도망가기가 바빴습니다. 동물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그 누구도 사냥꾼을 막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사냥꾼에게 대항해 봤자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사냥꾼을 향해 달려가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돌쇠였습니다. 돌쇠는 사냥꾼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돌쇠는 사냥꾼의 상대가 될 수없었습니다. 돌쇠가 사냥꾼의 총에 맞으려는 순간, 한 마리의 양이 사냥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양은 돌쇠대신 사냥꾼의 총에 맞았습니다. 그 광경을 본 동물들은 사냥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사냥꾼은 기겁을 하고 동물들을 피해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사냥꾼은 도망갔지만 총을 맞은 양은 상처가 너무 커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돌쇠는 자기를 위해 뛰어든 양이 누군지 궁금해 그 양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양은 바로 돌쇠가 물에서 구해준 바로 그 양이었습니다. 양은 말했습니다. "돌쇠님 그때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까봐 고맙다는 인사고 못 하고 갔습니다. 지금 이렇게 그 은혜를 갚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그 관경을 본 돌쇠와 밀림동물들은 일순간 숙연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밀림은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그 누구도 돌쇠,, 아니 모든 밀림동물들은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챙겨주며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끝
【동화 만들기2】경주대학교 초꼬비
호돌이는 배고픔을 못 참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닌다. 그러다 곰을 만나게 된다. 호돌이는 곰돌이를 보고 배가 고프니 같이 사냥을 하자고 한다. 호돌이는 매복해 있고 곰은 주위를 끌고 있던 중에 사슴한마리가 나타났다. 사슴은 곰을 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하다 뒤에서 매복해 있던 호돌이에게 잡히고 말았다. 호돌이와 곰돌이는 멋지게 사냥을 한 후 식사를 하려는데 곰돌이의 먹는 속도가 엄청남을 느꼈다. 호돌이의 식사 속도로는 배부르기도 전에 곰돌이가 다 먹어 해치울 거 같았다. 호돌이는 곰돌이에게 말했다. "우리 이 사슴고기를 풀숲에 숨겨놓고 한마리만 더 사냥하자" 곰돌이는 찬성했다. "좋아 그러자." 둘은 같은 방식의 사냥 법으로 했다. 아까 잡은 사슴을 풀숲에 숨기고 호돌이도 그 풀숲에 숨고 곰돌이는 또 어슬렁거렸다. 호돌이는 이제 숨어서 곰돌이 몰래 사슴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호돌이가 사슴고기를 다 먹을 쯤 곰돌이가 눈치 채고 달려왔지만 재빠른 호돌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다되지."
【동화 만들기3】경주대학교 손◯◯
때는 2006년 호랑이계의 전설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홍식이었다. 홍식이는 나무에 걸려있는 바나나를 따먹다가 목이 말라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러 시냇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 길에 고양이과의 절세미녀 수빈이를 만나게 된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홍식이는 수빈이에게 슬금슬금 다가가서 말하였다."... 같이 물 먹을래?" 하지만, 수빈이는 홍식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홍식이는 쪽팔리기도 하고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내말 안 들리오!?" 홍식이는 수빈이를 앞발로 툭툭쳤다. 수빈이는 깜짝 놀라면서 홍식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것도 못 들었단 듯이,,, 홍식이는 어이가 없었다. 그때 수빈이가 말했다. "저는 소리를 못 듣는 답니다." 홍식이는 당황했다. 그리고 자신을 깔보는 게 아니라 못 들었던 것에 대한 화도 누그러들었다. 그 뒤부터 홍식이는 수화를 배웠고 둘이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 논평-만약 홍식이가 용기 없는 놈이었다면 수빈이를 바라만 봤을 것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