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강좌 <이야기를 통한 치유> 4강 성찰과 자기 이야기 만들기 - 2013. 7.25
제4회 성찰과 자기 이야기 만들기
1. 나의 경험(personal narrative)에 관한 이야기
1. 서사와 설명과 논증의 차이?
2. 개인 서사는 무엇을 다루는가?
(1) 경험(experience) (2) 인생(life) - 의미 혹은 가치
3. 개인 서사는 왜 필요한가?
(1) 독자 - 강한 인상을 통한 공감과 감동 (2) 자신 - 자기 생의 (재)구성: 성찰과 자기완성
4. 개인 서사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평가(논평)
분규를 일으키는 해결
행동
소개 종결
☝요약
* 요약 : 아주 간단히 말해서 이 스토리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 소개 :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 분규를 일으키는 행동 : 그 때 무엇이 발생했나?
* 평가 : 이것은 무엇이, 어떻게 흥미로운가?
* 결과나 해결 :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 종결 : 그것으로 끝났다.
5. 개인 서사는 누가 말하는가?
사건을 ①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나의 사건을 말하는 경우(나는)
② 내가 관찰자가 되어 사건을 말하는 경우(나는)
③ 제3자가 사건의 밖에서 사건을 말하는 경우(그는)
④ 전지자가 사건의 밖에서 사건을 말하는 경우(그는)
“내가 나의 인생을 시간에 따라 구술(口述)/기술(記述) 하는 것”
2. 삶을 창조하는 구조 짜기-대안의 이야기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며, 인간은 이야기를 하면서 성장한다. 이는 이야기와 인간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이야기의 기능에 대한 정의이다. 특히 미래학자 옌센은 미래는 감성의 시대이며, 강조점이 뇌에서 심장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느낌과 공감, 그리고 감성이 강조되는 시대로 진입한다는 말이다.
캐서린 넬슨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2세가 되면, 몇몇의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실험에 따르면 2세 아이인 에밀리는 하루를 연속 사건으로 구성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 에밀리는 그 구조를 통하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에밀리의 예를 통해서 보듯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구성한다. 자신이 겪는 시간 위에 뿌려지는 수많은 경험이 모두 자신의 삶은 아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삶이 되기 위해서는 에밀 리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짠 구조 안에 경험들을 선택하여 배치하여야 한다. 자신이 짠 구조 안에 경험들이 배치될 때 배되 된 경험들은 자신의 삶이 된다. 한편 자신이 짠 구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경험들은 일종의 우주의 미아처럼 우주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에밀리처럼 2세 경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복잡한 구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자신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선택하여 배치한 그 결과물을 삶(life)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창조하기 위한 구조 짜기를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나이와 함께 더욱 복잡하고 풍부한 삶이 자신의 구조에 담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짜인 것을 일러 자신의 삶이라 하며, 이러한 삶을 주류적 삶이라고 명명한다. 행복의 차원에서 주류적 삶이 행복하냐 아니냐는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틀지워진 운명의 존재이지만, 이야기는 이러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주류적 삶으로 틀지워진 운명을 극복하고 행복을 그리는 대안의 삶을 살게 해 준다.
대안의 삶을 위한 시나리오가 대안의 이야기이다. 대안의 이야기는 다음의 단계로 만들어진다.
1단계: 주류적 삶의 문제 확인(main life)
2단계: 문제와 사람의 분리
3단계: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 만들기
4단계: 대안의 이야기로서 문제 해결의 이야기
5단계: 대안의 이야기 살기(alternative life)
위의 과정을 거처 대안의 이야기 살기가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매체로 대안의 이야기를 활용할 수 있다. 운명을 극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자전적 이야기1】 경주대학교 김◌◌
날씨가 쨍쨍했습니다.
5살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세는 세발자전거... 친구들과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내 앞에 파란색 트럭이 다가왔습니다.
" 빵빵 "
엄청나게 큰소리로 클락션을 울려대면서 나에게 이 좁은 골목길을 니가 비켜주지 않으면 나 갈 수가 없으니 얼른 비키라고 트럭이 계속해서 클락션을 울렸습니다.
비킬 수 있는 길은 나의 오른쪽 편에 있던 35도 정도 경사의 오르막길..
다른 친구들은 다들 일어서서 자전거를 끌고 갔지만 나는 어렸을 적부터 왜 그리도 귀찮음이 많았는지 자전거를 타고 응차 응차 끌면서 그 오르막길로 오르려고 애썼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트럭이 내가 지나간 줄 알았나 봅니다. 점점 다가오는 것이....
눈을 떴습니다. 大자로 누워서 고개는 왼쪽을 보고 있었는데 눈을 뜨자 모르는 아저씨가
나에게 괜찮으냐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내가 어디에 누워있나 싶었는데 트럭 밑입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분명히 세발자전거에 앉아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왠지 내 친구들이 우리엄마를 찾으러 뛰어가는 걸 본듯 싶습니다.
(↑지금 제 생각엔 유체이탈을 해서 본 것 같아요;)
그러고 생각이 안 나는 부분이 지나고 나는 그 파란 트럭 앞좌석에서 엄마에게 안겨 병원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라 길래 하는데 손이 이유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그때는 왠지 엄마가 날 혼낼 것 같다는 생각에 일부러 부들거렸던 것도 같습니다.
병원에 가서 이것저것 검사를 많이 하고 다친 곳 없이 괜찮다고 했던 걸로 여태껏 기억하고 있었는데 엄마에게 물어보니 늑골이 부러졌었답니다.;;
(21년 동안 나는 트럭 밑에 깔리고도 멀쩡했다고 자랑하고 다녔건만..;;)
그때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 【자전적 이야기2】 경주대학교 김◌◌
이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 때 겪었던 일이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때는 여름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동생과 나는 놀고 있었다. 매미를 잡으러 나무가 많은 곳으로 갔다. 매미 잡는 데 한참을 집중하다가 재미가 없어진 동생과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산에도 올라갔다가 개울가도 갔다가....
대나무가 무성히 있는 곳에서 동생과 나는 라이터를 발견했다. 한참 호기심이 왕성한 나는 순간 머리 뇌를 스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불장난이었다. 라이터를 켜서 대나무에 불을 붙혔다. 처음엔 작던 불씨가, 점점 불어나 그 많던 대나무를 한순간에 덮쳐버렸다. 갑자기 무서워진 동생과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다. 정말 무서웠다.
집에 도착한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가 없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손엔 땀이 삐질 났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아버지가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대나무에 불 너희가 냈제?" 이러시는 거였다.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대체 아버지가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아닌데...요" 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동생과 내가 도망을 치는 것을 동네 아저씨가 보셨단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너무 무서웠다. 혼날까봐..어린마음에 혼나는 게 너무 무서웠다. 다 들킨 상황에서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어머니는 이건, 엄연한 범죄라면서 경찰에 잡혀간다고 했다. 나는 미성년자니까 부모님이 대신 잡혀간다고 그러셨다. 그게 제일 겁나는 일 이었다. 머리로 오만생각이 다 들고, 부모님이 잡혀 가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났다. 그 날 하루는 최악의 날이었다.
어떻게 그 일이 해결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아무 일도 없었다. 어쨌든 잘 해결된 거 같다.
이 일을 통해서 두 번 다시 불장난은 하지 않게 되었다. 겪어보니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되었고,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고 생각한 나였다.
■ 【자전적 이야기3】 경주대학교 박◌◌
때는 고3 여름 방학 이였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영덕에 있는 장사 해수욕장으로 놀러가기로 했습니다. 제 친구에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고 갔습니다. 한 친구가 권투를 하는데 월급을 받았다면서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날씨도 좋고 시원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민박을 하나 잡았습니다. 피서철이라 대체로 비쌌습니다. 그 중에 싼 곳으로 이틀 묵을 방을 잡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듯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닷가로 가서 여자를 꼬셔서 놀기로 했습니다. 영덕에 사는 고2학년과 게임도 하고 술도 먹고 재밌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걔들이 가고 직장에 다닌다는 누나들과 잠시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더지 게임도 하고 재밌게 놀았습니다. 어느새 밤은 깊어지고 해변가에 나이트 무대가 열렸습니다. 그냥 대충 천막으로 쳐서 음악을 틀어 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춤을 췄습니다. 나는 뒤늦게 만난 대학생 누나 3명과 춤도 추고 사진도 찍고 놀았습니다. 그렇게 첫째 날은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다음날 낮에 해변가로 갔습니다.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우리는 바다로 뛰어 들어 공놀이를 하면서 놀았습니다. 재밌게 놀다가 한 친구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잃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주머니에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주위를 찾아 봤지만 돈은 못 찾았습니다. 돈도 없고 해서 우리는 민박집 주인에게 하루는 민박 안 할 테니 나머지 돈을 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였지만 끝내는 돈을 못 받고 짐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집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억수 같이 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 횟집에 잠깐 있다가 갈려고 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오도 가도 못 하고 꼼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불쌍했던지 아주머니가 담요를 갖다 주었습니다. 담요라도 덮으니까 덜 추웠습니다. 횟집에 사람들은 많고 너무 창피해서 우리는 담요를 푹 덮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어서 깨어 보니 아침이었습니다. 짐을 챙기고 주인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출발 했습니다. 여전히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나는 오토바이 뒤에 탔는데 헬맷 앞가리개가 없었습니다. 달리는 오토바이에 비를 맞으니까 우박처럼 느껴졌습니다. 비가 얼굴에 탁탁 싸는 것이 따갑고 아팠습니다. 그렇게 1시간 30분 정도 되서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얼굴이 얼얼하고 옷은 다 젖고 몸은 덜덜 떨렸습니다. 그래서 바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푹 잤습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비가 그렇게 야속할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전적 이야기4】 경주대학교 김◌◌
제가 군대에 갔을 때 가장 기억에 남은 일 중 하나입니다. 때는 2003년 막 20살이 넘어갔을 때 입영이라는 영장이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갔습니다. 저는 육군 해군 공군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데모들과 그 데모들을 막는 기동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욕설과 구타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렇게 군 생활을 하면서 제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그때 당시에 마음의 안식처였던 여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친구가 있음으로서 욕설과 구타 속에서도 휴가를 기다리며 참고 일하고 또 일하였습니다. 이렇게 휴가를 기다리고 외박을 기다리다 보니깐 시간도 잘지나가고 군 생활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일병 7호봉 때 한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녀가 헤어지자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습니다.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잡기 위해서 편지도 써보고 메일도 보내고 전화도 해보았지만 그녀에게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상으로 그녀와 함께 같이 있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주고받는 사랑의 속삭임들. 저는 군대라는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원망했습니다. 단지 군대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버림을 받아야 하고 잡아보지도 못하는 처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로 68킬로 좋았던 몸을 가진 저는 2달도 채 안 되어서 57킬로로 몸무게가 줄었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담배만 피던 저는 그녀에게 왔었던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렇게 힘이 들고 있던 도중 전라도 부안에 핵폐기물 반대라는 전라도 군민들의 데모로 전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부안에 가서 처음 느낀 것은 민간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안 군민들이 데모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데모를 막기 위해 내려온 전국의 기동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이고 도로고 어딜 가든 핵폐기물 반대라는 문구와 함께 노란색들로 물들여져있어서 무정부상태라고 까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8시 정각에 데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쇠파이프들과 무수히 많은 화염병들 그리고 낫과 도끼 등 우리들은 살기 위해서 봉과 방패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습니다. 그러다가 부안군민들의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중대가 포위 직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피하기 위해서 빠른 걸음과 유일하게 살길인 방패를 휘두르면서 뒷걸음 쳤습니다. 그러다가 앞에서 날라 오는 화염병이 제 투구 정면으로 날라 왔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얼굴을 덮치지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얼굴 8도 화상을 당했습니다. 부안에서 데모를 다 막고 다시 부대에 도착한 저는 얼굴도 아프고 기분도 안 좋고 해서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하였습니다. 근데 누나가 전화를 받았고 누나에게서부터 집에 아버지 사업이 좀 안 좋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나에게 다가와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울기도 해보고 일에도 미쳐보고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얼굴의 상처처럼 마음의 상처도 점점 아물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일이 마음에 남아있고 기억되는 이유는 제 마음 속에 그때의 충격이 컸기 때문 인거 같습니다. 저는 이런 많은 일들을 겪고 몸으로 느끼고 체험해 보면서 20살의 어렸던 아이가 어른으로 태어나고 보다 더 성숙해 지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상 민섭이의 에피소드였습니다.
【자전적 이야기5】 경주대학교 김◌◌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 정말 많았다. 지금까지 내 장래희망의 변천사를 종이에 적어 내려간다면 AF용지 한 장쯤은 족히 채울 것이다. 장래희망의 대부분이 기업회장, 외교관, 한의사 등 엄청난 학문을 갈고 닦아야하고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그러나 고수익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들 이었다. 막연하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에 되고 싶어 했을 뿐 실상 내 적성이나 흥미에 맞는 직업은 없었다. 아니, 그때까지는 내가 어느 분야에 소질이 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고3이 될 때까지도 현실적으로 현 상황에서 이룰 수 없는 대학을 목표로 잡고 노력 따위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호텔경영학과에 가겠다는 것. 그렇게 3학년에 반이 가고 1학기 수시 기간이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난 대학교는 100% 수능으로 가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내신관리는 전혀 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그 시기에 경주대 김만술 교수께서 입시설명을 한다고 관광학부에 관심 있는 사람은 진학실로 올라오라고 방송을 했다. 그런 계기로 해서 경주대에 대해 알게 되었고 원서를 낼까 말까 이틀을 꼬박 고민했다. 인지도가 높은 학교도 아니었으며 집이랑 다른 지역이었고 더군다나 하양지원이었기 때문이다. 많이 살진 않았지만 살면서 무언가를 결정함에 있어 이렇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담임선생님 외 다른 선생님 분들도 관광학부는 괜찮다고 하시고 나 또한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어보자는 생각으로 입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해서 호텔에 취직한 후 밑에서부터 배우고 올라가서 나중에는 내가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것이 지금의 내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호텔에 취직해서 사업밑천을 많이 벌어야한다. 그런데 수시합격 후 입학 전까지 약 6개월 동안 난 무엇을 했을까? 정말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다. 6개월 동안 살을 뺏으면 적어도 6kg은 뺄 수 있었을 것이다. 영어공부를 했다면 기초 영어는 다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돈을 벌었어도 400만원은 족히 벌었을 것이다. 살뺀다 살뺀다 해놓고 먹을 거 다 먹고 놀 거 다 논다고 운동도 못하고 알바 한답시고 시간이 없다고 영어학원도 못 다니고 벌어 놓은 돈은 어디에 썼는지 행방을 알 수도 없다. 이런 내가 어떻게 저런 큰 꿈을 꿀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그렇게 6개월을 허무하게 보내고 입학을 했다. 학교에 입학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마음 둘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대학교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사귄 친구가 진짜 친구지 그땐 너희가 세상물정을 알기 때문에 계산적인 인간관계가 될 것 이다.”라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어른들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친구’라는 것 때문에 고생할 줄은 정말 몰랐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나이기에 쭉 그럴 줄 만 알았다.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는 나이기에 대학교에 원서를 냈을 때 전국구에 친구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나를 아무도 모르는 나 또한 아는 사람이 없는 그런 곳이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면 그 사람이 알던 사람이고 그게 그거 일 테니까 한정된 인간관계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 맞닥들인 대학교의 모습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친구라고 옆에 있긴 하지만 껍데기뿐인 것 같은 그런 느낌. 같이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술을 마시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생활하는데 중․고등학교 때가 너무 그리웠다. 중․고등학교 때는 친한 친구 무리가 있어도 한반에서 수업을 들으면 두루두루 다 친했고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 이렇게 알아나가다 보면 거의 전교생이 다 친구인데... 이곳은 무리가 지어지면 참으로 바뀌기 힘든 곳이다. 수업도 다 다르고 간혹 겹친다 해도 그 시간에 친해지기엔 너무 삭막한 강의실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선생님 눈치 보면서 쑥덕거리다가 걸려서 같이 벌서다 정들고 선생님이랑 수업하다가 한마디 툭 던진 말에 모두 다 함께 웃고 그랬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초기 때보다는 인사하는 사람도 많고 강의실에 들어가도 아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그래도 난 옛날이 너무 그립다. 중1말 때 대구로 이사 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쭉 우정을 이어온 내 친구들. 이친구들과의 추억은 날밤을 꼬박 새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중학교 때 뒷산에 올라가서 술 까먹고 깽판 치다가 밭주인 할머니한테 걸려서 밭 망가졌다고 돈 다 뜯긴 거, 호기심으로 뻐끔뻐끔 피던 담배 학교에 걸려서 교무실에서 하루 종일 반성문 쓰고 학교계단 거품 목욕 다 시킨 거, 쓸때 없이 선생님한테 대들다가 호되게 맞은 거, 집나간 지 이틀만에 엄마 보고 싶다고 울면서 전화한 거, 모 대형 활인마트에서 계산안하고 먹고 갖다 버리다가 걸려서 경찰서 갈 뻔한 거...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엔 남자 5명 여자 4명 정도 뭉쳐 다니던 것이 나중에 남자 10명 여자 8명이 되어 18인이라는 돈 주고도 못살 친구들을 얻었다. 고등학교를 18명이 다 같이 가진 못했기 때문에 맨날 보는 애들도 있고 자주 못 보는 애들도 있었지만 가끔 만나서 술 한잔하며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배꼽이 붙어있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웃어서 목이 쉴 지경이 된다. 10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지만 그래도 그중에 유독 잘 맞고 편한 친구가 나를 포함하여 4명이 있다. 우리들끼리도 추억이 참 많다. 우리끼리 놀러 한번 가야된다고 바락바락 우겨서 겨우겨우 간곳이 동내 뒤 계곡이었다. 겁도 없이 여자 넷이서 텐트치고 하루를 보냈다. 뭐 남자애들이 중간 중간 오토바이타고 올라와서 필요한 거 사다주고 챙겨주고 하긴 했지만... 옛날 생각하면 혼자 피식피식 웃곤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우리가 왜 그랬을까 싶어도 그땐 우리만의 세계에 빠져서 행복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한다. 이 네 명의 친구 중에서도 유독히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가 하나있다. 김지윤. 지윤이는 날 위해 죽으라면 죽어줄 수 있는 친구다. 물론 나도 지윤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한목숨 바칠 수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사이가 되었는지는 둘 다 알지 못 한다. 어느 순간부터 없으면 허전하고 늘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렇게 익숙해지면서 서로 닮아가며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무서운 5년 우정이다. 거짓말 따위는 해도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에 안 하는 게 낫고 비밀은 내가 답답해서 담고 있을 수 없다. 언젠가 지윤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믿었던 사람한테 뒷통수 맞는 거 무섭다고 이제 진짜 사람 안 믿겠다고 그렇지만 나 하나는 믿겠다고... 그때부터일까 내가 지윤이를 정말 지켜주고 싶은 친구로 여긴 것이...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인거 같다. 18명의 친구 외에도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부족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어른과도 모든 걸 터놓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신 멋쟁이 우리 집 피자 아줌마, 내가 정말 노력해서 얻은 소중한 친구 재석이, 맨날 티격태격 대고 때리고 욕하고 하지만 뒤에서 다 챙겨주는 광윤이 오빠, 내가 니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장소 시간 불문하고 달려와 줄 믿음직스런 재훈이, 날 정말 잘 따르고 좋아해주는 이쁜 동생 정일이 이 외에도 내가 행복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해준 인연들은 많지만 다 적기는 힘들듯하다. 이중에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나에게 기대오고 나에게 의지하고 내가 챙겨할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나는 무조건 잘되어 있어야한다.”라고 다짐한다. 혹시라도 저 사람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내가 도와주지 못 해 괴로워하지 않게 반드시 성공된 삶을 살 것이다. 성공은 내가 얼마나 노력하며 사느냐에 달린 일이다. 꼭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손 벌리지 않으며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그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단돈 2만원이 나에게 남는다 해도 20억, 200억의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자전적 이야기6】경주대학교 최〇〇
이 이야기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포항 동지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다. 나는 시골에 살고 있다. 학교와 집이 멀어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다. 1,2학년 때 공부를 거의 안 해서 3학년이 된 나는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다.3학년 초반에도 어김없이 나는 공부를 안 하고 놀기만 한다. 하지만 머리 속에는 '이제 3학년인데 공부해야지'이 생각이 항상 떠올랐다. 학교만 마치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는 하였다. 친구들이 여자들도 데려와서 분위기는 더 좋아진다. 그런 생활을 근 한달 정도 했다. 어느 날,우리 집 앞에 며칠 전에 같이 놀았던 여자아이가 서 있다. 나는 친구가 그녀를 불렀는지 알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한다."오늘 애들 모여서 놀기로 했냐? 여기는 무슨 일이냐?" 그녀는 대답한다."그냥..." 잠시 말이 끊긴 후 다시 말한다. "나, 좀 들어가도 되냐?"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오라고 말한다. 방에 들어가니 어제 술을 먹고 치우지 않아서 난장판이다. 얼른 방을 치우고 난 후 나는 그녀에게 음료수 하나를 주면서 다시 말을 한다. "무슨 일 있냐? 갑자기 왠일이냐?"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내가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애를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내가 !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하게 가만있으니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 나는 이런 말이 생각났다."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 내가 거절을 하면 그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그 날부터 그녀와 교제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가출한 상태였다. 그래서 내 방에서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아도 되냐고 묻는다. 나는 아직 첫키스도 못했는데 여자랑 한방에서 밤을 지새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좋았지만 너무 긴장되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와의 동거는 시작 되었고, 우리는 부부처럼 재미있게 살았다. 토요일이 되었다. 우리는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학교가 너무 가기 싫었다. 그래서 그날 학교를 안 가기로 하고 먹을 것을 사와서 음악을 들으며 재미있게 놀았다. 밖에서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분이 찝찝했다. 방문을 열고 누가 들어온다. 내 친구였다. 그러나 그 뒤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서 있었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따귀를 사정없이 맞은 뒤 선생님 차를 타고 학교로 갔다. 부모님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나는 집에 전화를 해서 부모님에게 학교에 오셔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께서 학교에 오셨다! .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진학지도실에 들어오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말한다. 부모님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 "괜찬아,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점심시간에 나를 데리고 고기 집에 가서 밥을 먹이고 "이제 수능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자취 하지 말고 통학 하면서 공부해라!"이렇게 말씀 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해서 헤어지자고 말을 하고 공부에만 전념을 했다. 수능이 한 달밖에 안 남아서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찾아서 공부했다. 마침내 수능 당일 날 긴장된 마음으로 시험을 치고 나왔다. 솔직히 시험을 망친 것 같았다. 며칠 뒤 결과가 나왔다. 놀랍게도 예전보다 100점이나 올랐던 것이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 달 뒤에 나는 내가 원하는 과를 찾아보니 포항근처에는 경주대학교 관광외국어학부가 딱 좋은 것 같았다. 특차를 넣었는데 바로 합격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만약 그때 늦었다 싶어서 공부를 포기 했더라면 나는 절실히 후회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듯이 무조건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는 데에는 때는 늦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끝>
【자전적 이야기7】경주대학교 서〇〇
군에서 상병 단지 5개월, 이라크 파병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연일 언론매체에서는 이라크 파병이라는 문제로 시끄러웠고, 해병대가 뜨거운 도마에 올랐습니다. 해병대라는 강한 이미지 때문인지 보내야 하느냐, 마느냐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끝내는 1개 전투중대로 간다고 하였고, 유격 . IBS. 공수 . 수색대에서 지원을 하였습니다. 때마침 저에게도 기회가 되어 망설임 없이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1차, 2차, 3차, 체력 . 인성. 면접 등을 통하여 저는 하나하나 합격하며 최종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은 부모님 동의서를 얻는 것이었는데, 한참 위험에 있는 이라크를 자기 자식을 보낸다는 것이 참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만류하셨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도 가지 말라고 적극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택한 길이니 잘 할 것이라며 아무 말 없이 파병 동의안에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전 태어나서 아버지의 등 뒤의 흐느낌을 처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항에서의 3개월간의 사격, 유격, 전술, 언어 등 다양한 훈련과 특전사 교육단에서의 3개월의 하루하루 반복된 생활 속에서의 훈련은 나를 더욱더 단련되고 연단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인내의 시간을 통하여 저는 해병대 1개 중대 98명중에서 1진 중에 선발대인 10명으로 뽑혀 이라크 바그다드 한국 대사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바그다는 50도에 이르는 무더위와 내리쬐는 햇살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무거운 방탄복을 입고 10시간을 넘는 경계근무와 순찰, 그리고 수시로 이어지는 교육 훈련 등을 통하여 몸은 지쳐갔고, 한국에 있는 부모님, 친지들, 친구들이 그리워졌습니다. 때마침 6월에는 김선일 씨 피살 사건이 터져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종군 기자들은 서로 앞 다투어 대사관에 몰려들었고, 경계 근무하는 우리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 힘든 시간을 고도의 참을성과 인내심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안정이 되었을 무렵, 우리들은 4개월간의 경계근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라크 바그다드 임홍재 대사님이 수고와 노고로 주신 표창장은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자부심으로 남아있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본대로 합류하여 2개월간의 전우들과의 아르빌 생활, 총 6개월의 파병생활은 평생 제 삶속에서 잊지 못할 기억들로 남아 있습니다.
【자전적 이야기8】경주대학교 장〇〇
고등학교 2학년 따뜻한 봄날 저녁, 친구들과 모여서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린 배가 고파서 고기집 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기를 구워 먹고 있던 도중, 우리들은 술이 먹고 싶어 졌다. 우린 술을 시켜 고기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점점 우린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을 망각한 채 즐기고 있었다. 취기가 오를 때로 오른 우리는 고기 집에서 나와 슈퍼에서 술을 더 사서 공터에서 마시기로 하고 공터를 향해 걸었다. 공터에 도착한 우리는 술을 사러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공터를 순찰하던 경찰들이 다가와서 머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당황한 우리는 도망쳤지만, 술이 취한 우린 멀리 도망가지 못한 채 붙잡혀 잘못을 빌고 있었다. 그 순간 왜 이렇게 집이 생각이 나는 지 부모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생각하고 다짐했다. 우린 경찰들로 부터 훈계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