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인문학 강좌 3강 진·한 제국과 중국고대의 완성 - 20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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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인문학 강좌 <중국고대 문명과 역사> 3강 진·한 제국과 중국고대의 완성 - 20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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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강좌   중국 고대 문명과 역사      강사 : 허 증 (영남대 교수)

                      제3강  진ㆍ한 제국과 중국 고대의 완성          

                         제1장 진제국의 성립과 시황제의 통치정책

1] 진시황의 출생과 呂不韋의 野望 => 呂不韋 ->可居奇貨=> 『史記』「呂不韋列傳」        
1) 秦始皇 系譜 => 秦의 昭王 -> 孝文王 + 華陽夫人(楚, 南國美人) -> 寵愛                          
                         (安國君) + 夏姬(后妃) => 莊襄王(異人, 子楚) + 趙姬 + 呂不韋 => 嬴政(子政) -> 始皇帝(秦始皇)
2) 呂不韋 : 衛人, 政商輩 -> 韓 陽翟을 本據地로 삼아 鹽, 織物, 鐵製 무기, 농기구 등 판매, 노예장사 -> 華中, 華北 지역 등, 投機商團, 天下周遊, 萬金獲得  -->  趙 邯鄲 : 秦 公子 異人(窮乏) -人質-> 趙 ; 呂曰 -> 可居奇貨-> 秦咸陽 -> 賂物(金品)로 華陽夫人을 설득해, 孝文王이 子楚를 後嗣로 삼도록 奏請함. 子楚 -> 태자책봉, 秦趙戰爭 -> 자초는 피살위험에 직면 -> 여불위의 보호(金品賄賂)로 무사함
3) 子楚 -귀국-> 秦 ; 莊襄王 즉위(B.C.250) -> B.C 247년 莊襄王 死去 -> 13세 子政 -즉위-> 皇帝 => 시황제 ;  여불위 -> 相國
    被任 --封--> 文信候, 10萬戶의 食邑(領地)을 下賜받음, 子政이 22세 성인 될 때 까지, 여불위는 相國으로서 攝政
4) 趙太后 + 노애(嫪毐)宦官 ; 巨大男根 ->大陰人-> 私通 -> 시황제의 이복동생 2子를 몰래 양육, 子政 -> 곳곳에서 기밀탐지
5) B.C. 238년 시황제 22세 때 정식 황제 親政 시작 => 연회, 노애의 반란을 진압 -> 車裂刑, 趙太后 -> 宮에 幽閉, 여불위에게 친서 전달 => “그대는 秦에 무슨 功이 있기에 河南 10萬戶의 食邑(領地)를 받았는가 ? 그대는 秦과 어떤 親함이 있기에 仲父로 행세 하는가 ? 一族과 함께 蜀에 옮겨 살도록 하라 ”-> 여불위는 추방당하여 치욕을 삼키며 自殺함 => 『呂氏春秋』(呂覽)

2] 시황제 暗殺 企圖 => 『史記』「刺客列傳」 => 燕의 荊軻, 高漸離, 韓의 張良
1) 진시황의 친정체제 이후 尉繚와 李斯 등을 客卿으로 등용 => 천하 통일전쟁 추진 -> 韓(230)과 趙(228)를 차례로 멸망시킴
2) 다음 차례인 燕은 멸망의 위기에 처해, 太子 丹은 진왕을 죽일 자객을 찾아 燕을 구할 방도 모색 -> 田光이란 자가 자신의
    친구이며 검술의 달인 荊軻를 적극 추천함 -> 太子 丹은 荊軻에게 진시황을 암살하도록 간곡히 부탁 -> 융숭한 대접, 계획추진
3) 荊軻의 암살 전략 => 진의 투항 장군 번어기의 목을 요구 -> 번어기 자결 => 번어기 목 + 督亢 지도 + 비수(독약) 휴대 -> 진   4) 荊軻는 조수 진무양과 함께 秦으로 떠남;  태자 丹과 荊軻 친구들의 배웅 + 高漸離의 축 연주 -> 비장한 음조 => 荊軻의 告別 詩 => 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不復還  ;“ 바람은 스산하고 易水는 찬데 壯士는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
5) 荊軻의 咸陽 도착 => 성대한 환영; 진왕 -> 번어기 首級 확인, 형가는 지도를 펼치다 匕首로 진왕을 찔렀으나 빗나감 -> 진왕 도망 -> 진왕의 시해를 막기 위해 신하들의 무기소지 금지령 ; 진왕 가까스로 칼을 뽑아 형가를 벰 -> 암살실행 水泡로 돌아감
6) 분노한 진왕 -> 趙를 치고 있던 왕전장군으로 하여금 燕을 先攻토록 하여 燕의 영토 절반 점령 -> 燕은 태자 단을 죽여 속죄함  
8) 高漸離의 시황제 암살 기도 => 그 후 노래의 한 名人이 시황제를 모시게 됨 -> 그를 高漸離로 의심하자, 馬尿로 눈을 멀게 함 -> 어느 날 이 노인이 질그릇 악기 속에 몰래 납(鉛)을 가득 채워 와서 황제의 목소리를 향해 던졌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함  
7) 張良의 시황제 擲殺 기도 => B.C. 217년 東巡 길에 韓人 張良이 祖國 한의 원수를 갚고자 황제의 수례가 博浪沙에 이르렀을 때, 力士를 시켜 철퇴로 황제를 살해하도록 했으나 副車에만 맞고 황제를 난을 피했다.  

3] 秦始皇의 天下統一과 통치정책
  1) B.C 230 韓을 滅한 후, 마지막으로 齊를 멸망시킬 때까지 10여 년간 倂呑戰爭으로 6국을 통일함 => 550여 년간의 제후할거
     시대는 종식됨 => 6國 멸망순서 : 韓(230) -> 趙(228) 燕 (226) -> 魏(225) -> 楚(222) -> 齊(221) => 秦의 통일제국 달성
  2) 秦統一의 3대 요소 => ① 騎馬戰法 -> 戰勝의 효율성 증대 ② 法家制度 -> 통치의 효율성 증대 ③ 鐵器文化 -> 생산성 提高
  3)‘皇帝’칭호의 시작 => 제후 6국 통일의 위상에 맞는 최고 통치자로서의 존칭 필요 => ①德(三皇) + 功(五帝) ②皇 -> 빛나는 태양, 위대한 존재의 의미 ; 帝 -> 삼라만상을 규제하는 上帝의 의미 ; 광휘의 위대한 主宰者 ; 上帝 (天)<--> 皇帝(地) 天子
     ; 始皇帝 => ①一世 皇帝 -> ②二世 -> ③三世 .... 萬世 繼承 => 영원한 제국 염원 ; 二世 胡亥에 멸망 -> 守成失敗
  4) 중왕집권적 군현제의 실시 => 승상 왕관 -> 연, 제, 초 3국에 체후 분봉 건의 --반대--> 정위 李斯는 郡縣制건의 : 周 封建制 (지방분권)실패를 비판함 ; 全國 --행정분할--> 36郡(4郡 증설), 郡 -분할-> 縣 -> 중앙 관리 임명 --파견--> 지방 郡守,
     縣令 -> 향(삼노.색부) -> 정(정장) -> 리(이정) => 관직 세습 불가 ; * cf 봉건제 -> 신분세습  
  5) 중앙 관료기구 개편 => 三公九卿制 실시 => Ⓐ 三公 : ① 승상-> 국정총괄 ② 어사대부 -> 황제직속 전국감찰 ③ 태위 -> 군정 총괄 ; Ⓑ 九卿 -> 三公 아래 각 부서의 사무를 나누어 관리 ; ①정위 -> 실질 군사권, 사법관을 관장, ②치속내사 -> 국가재정, ③ 少府 -> 황실 재정 담당 / 엄격한 지휘체제 확립 ; 최고 군사장관인 태위도  皇帝符節 -> 실재 군대통솔 가능.  
  6) 반란방지책 => 민간 소유의 무기를 몰수>  거대 인상ㆍ악기(종거) 등을 주조하여 함양궁 내 설치. 金人像의 무게 -> 30톤 (24만근) ; / 郡縣巡遊 -> 名山에서 封禪之禮, 天地祭  
  7) 문자통일 =>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원활한 수행(명령전달의 효율)을 위해 시황제의 문자통일정책 => 이사는 전국적인 通行 字體를 大篆(殷周 古文字)에서 小篆으로 표준 글본(字形) 제정 -전환-> 漢代 隸書(필기체) -> 草書, 楷書, 行書     8) 재정정책=> (1) 도량형의 통일(상앙)-양기(됫박=상앙량)경제활동의 기초 (2) 화폐의 통일 -> 반양전(圓形方孔)-> 금화
     (3) 重農抑商(上農制末)策, 병농일치책 >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확보 > 부호(상공업자, 대토지소유자, 고리대업자)의 농민수탈을 방지코자, 12萬戶를 咸陽으로, 일부는 四川으로 이전시킴
  9) 전국 도로망의 확충 => 도로ㆍ수례의 폭 통일: 차동궤 - 6尺(135cm), 치도- 50보(70m) / 수상교통의 정비 회수지역의 수로건설, 조운 등을 통한 50만 군사의 군량을 운반. 관개치수의 효율화
  10) 사상의 통일 => 李斯가 추진 => 焚書坑儒( B.C.213 ) => 醫藥, 卜筮ㆍ農林ㆍ天文 등을 제외한 모든 書冊을 불태우고,  B.C 211년 新政新法, 특히 焚書(四書六經의 燒却)를 비판한 儒生들 460여 명을 구덩이(坑)를 파고 生埋葬 하였다.
  11) 萬里長城과 대외정벌 => 시황제는 北方蠻族인 匈奴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名將 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북벌 감행
      몽념은 B.C. 215년 흉노를 정벌하고 河南에 44縣을 설치 -> 燕, 趙, 魏, 秦에 종전에 쌓았던 長城을 증축 통합하여 ‘萬里長城’을 완성하였다. 東, 襄平(遙陽北方) ~ 西, 臨兆(감숙성 혼현) ; 山海關  ~ 函谷關 ;  北 ‘목축’ <---만리        장성의 경계 --> 南 ‘농경’그외 몽념 장군은 남쪽으로 광동, 광서, 월남 등 남월을 征伐(B.C. 214) 하였다.

4] 진시황의 아방궁 > 70만명의 인부 동원, 2세 황제 대 까지 축조. 3개월 동안 소실 여산의 능묘 (진시황능) > 서안
   동쪽 임동현 여산 근처, 1974년부터 도용갱(여산능 동쪽 1.5Km 지점 지하 坑)이 발굴> 총면적 2만Km2, 병마용 (7천 여점 실물의 1.5배 > 황제의 묘를 지키는 근위군. 묘실 바닥- 황하ㆍ양쯔강처럼 주요하천이 만들어져 물 대신 수은을 사용, 천정은 옥과 돌로 해와 달을 상징적으로 만들어 기계로 움직이게 했다. 全인구 2천만 중, 아방궁이나 여산능 건설에 150만, 남원파견군 50만, 몽념의 흉노 절벌 30만, 장성건설에 징발된 인부 50만, 잡역 등 300만 동원 등 총인구의 15%

5] 진시황의 죽음 : B. C.211년 5번째 순행을 출발> 남쪽 회계산-낭야-지부-산동성 평향현에 이르러 병세가 점차
   악화되자 시황제는 몽념 장군과 장자 부소에게 속히 함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장례를 치르도록 명함 >사구평대에서
   붕어(50세)>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함양으로 회귀 (7월)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 조고는 이사를 위협,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부소와 몽념을 각각 불효와 불충으로 몰아 자살토록 명령함 (위조 서신을 보임) > 조고의 음모는 일시적 성공을 거둠 ( B.C. 210 )> 막내아들 호해 20세 즉위. 이후 趙高가 정치를 독단(전횡),     낭중령 (신변경호실장)에 취임 >조고는 자칭 稱帝를 기도(B.C.207)> 李斯를 무고로 치사케 하고, 호해를 아방궁에 유폐시켜 자결토록 하고, 2世 兄인 공자 영을 즉위 시킴> 이후 황제 즉위기도 (반란군을 부추겨 관중왕으로 삼겠다고 하며 공자 영을 살해기도> 실패. 이에 거꾸로 영이 이를 알고 조고를 유인해  살해> 각지의 반란은 더욱 심화됨

6] 멸망 원인 :  (1) 급진적인 사회개혁과 통일정책 > 구귀족의 불만을 팽배   (2) 징집(遠征)과 요역(장성, 궁전,
   능묘)에 따른 농민들의 피폐와 재정적 부담의 가중 (苛斂誅求) (3) 진승과 오광의 농민반란 (B.C. 209) > 秦將 章邯에 의해 진압 > 진의 압제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전국적 반란의 기폭제 역할 (4) 宦官 趙高의 정치농간 ; 이사와 몽념을 각기 不孝와 不忠의 罪目을 씌어 자살토록 함 ; 指鹿爲馬 -> 황제를 농락하며 권세를 부림 : 阿附, 直言 =>「秦始皇本紀」  
   二世 胡亥 帝位(210) ; 조고 -> 낭중령(황제경호) ; 대리통치 -> 三世 子嬰(扶蘇之子,207) --투항--> 劉邦 咸陽 入宮

7] 진승과 오광의 농민반란 => 만리장성 근처 어양(하북성 조양시)으로 수자리(경비)를 가기 위해 징발되었던 하남 각 현
   출신 900명 수졸의 분대장으로서, 대택향에 당도했을 때, 7월의 장마비로 길이 불통되어 기한 내에 본대(어양)로 귀환이 불가능하게 됨 > 진의 군법에 귀환이 늦을 時는 참수형으로 다스림 > 이에 살길을 찾아 동조자와 함께 반란을 일으킴 진승은 스스로를 稱王하며 국호를‘長楚’ : * 陳涉 曰 => ‘燕雀不知鴻鵠之志’,‘王侯將相 寧有種乎’,‘農民一揆’ =>
   『史記』「陳涉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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