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인문학 강좌 3강 진·한 제국과 중국고대의 완성 - 2013.11.2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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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인문학 강좌 <중국고대 문명과 역사> 3강 진·한 제국과 중국고대의 완성 - 2013.11.2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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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한제국의 성립 중국 고대제국의 완성

                                           제1절 楚漢戰과 劉邦의 천하통일  

1] 項羽 (B.C.232 ~ 202) => 西楚覇王 十八諸侯分封 ; 關中을 버림 -> 楚漢戰 敗背 原因
1) 項羽의 爲人 => 項羽는 楚名將家門出身, 項燕의 孫子. 名籍 字羽, 下相(吳, 江東, 江蘇省 蘇州)人, B.C. 232年 출생, 叔父
    項梁에 의해 길러짐. 소년시절 大志를 품고 성격은 豪放磊落하여 사소한 일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항량이 야단을 치니, 항적은      태연스레 曰, “ 글은 이름을 쓸 정도면 족하고, 劍은 한 사람을 상대할 정도 밖에 안 되니, 萬人의 적을 치는 법을 배우겠습      니다. ”라고 했다. 이후 항량은 사람을 죽이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吳中 지방 피신. 그 지방 청년들은 항량과 항우의 기질이      범상치 않고 무예가 출중한 것을 알고 감복하여 그들을 지도자로 받들었다. 이후 항우는 천재적 명장으로 성장.
2) 항우의 擧兵 => 24세 때 숙부 항량과 함께 會稽(蘇興)의 守將 斬首 -> 8천 군병획득 秦의 지배를 벗어남(208) -> 沛縣의 劉邦      은 부하 100 명을 이끌고 항량에게 투항. 항량이 秦將 章邯과 사우다 죽고, 그 뒤를 이은 上將 宋義를 죽이고 스스로 총지휘관      을 맡아 숙부의 원수를 갚고자 破釜沈船(3일분의 식량만 휴대)의 각오로 決死抗戰하여 狂亂怒濤처럼 敵陣을 突破하니 秦軍은       허물어지고 章邯은 항복하였다.  
3) 이러한 戰功으로 항우는 제후의 上將軍이 되고, 河北을 平定시키며 一轉하여 關中을 향해 서쪽으로 進擊. 그러나 關中은 沛公      에 의해 먼저 先占되었다.
4) 謀臣 范增의 발탁 => 70 고령, 覇氣는 壯士를 능가. 作戰과 機略에 뛰어난 참모장. 천하 情勢를 達觀하여, 항우에게 유방을
    치도록 종용함. 伯父 項纏(항전) -> 온건주의자, 협상주의자로서 유방이 항우에게 屈하도록 설득하며 타협을 통한 충돌 회피
5) 항우의 咸陽入城 =>  항우는 전승의 기세를 몰아 秦王 子嬰을 죽이고 시황제 무덤을 파헤치고 秦 宮室(阿房宮)을 放火 ->
    유방인 봉인 해 두었던 창고의 재물을 약탈하고 금은보화와 미녀를 거두어 함양을 버리고 楚로 돌아갔다. 범증이 이를 말리고,      귀향에 대해 韓生이 “關中이야말로 더 없이 좋은 首都(요충지, 옥토) 이니 떠나 마십시오 -> 장차 得天下의 관건 ”라고 하며      말리니, 항우 왈, “부귀를 이루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 ‘錦衣夜行’
6) 항우 稱王 => 楚  귀향 후, 항우는 스스로 西楚覇王이라 칭하고, 彭城에 都邑을 두었다. 版圖는 山東省 남부와 江蘇省,
    安徽省, 浙江省에 이르는일대 지역이었다. 항우의 橫暴는 갈수록 심해져 초의 義弟를 擲殺(擊殺)한 뒤 齊를 치기 위해 北上
7) 劉邦 義擧 => 이틈을 이용해 劉邦은 韓信을 시켜 關中을 平定하고, 義弟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게 한 후, 四方에 檄文을 띠어
    諸侯들에게 항우 토벌의 義軍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이에 참여한 제후연합군은 56만에 달했으며, 유방은 總帥가 되어 軍士를       東進시켜 楚都  彭城을 점령했다. 齊를 공격하고 있던 항우는 크게 놀라 精兵 3만을 이끌고 질풍처럼 달려와 56만 大軍을 睢水     (휴수) 근처에서 격파했다. 그 후, 范增은 계속 항우에게 一擧에 榮陽 을 습격하여 유방을 죽이라고 역설함.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항우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范增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8) 항우는 초의 회왕에게 의제 존호를 헌상, 제장들에게 왕으로 분봉 18제후국 성립 B.C. 206년 자신도 팽성(강소성)                을 근거지로 서초국(西楚國)의 王이되어 패왕으로 자칭, 약속과 달리, 유방을 漢中(섬서남부와 산천 북부)王으로 봉함.
      關中 지역 을 章邯 등 秦將 3인에게 분봉. 의제는 시골로 추방되었다가 살해됨 => *‘弔義帝文’(金宗直) -> 戊午士禍
  9) 范增의 隱退와 死去 => 유방을 칠 절호의 기회를 몇 번이나 놓치고, 유방의 謀士 진평의 항우 범증 간의 離間策에 따라 항우       가 자신을 의심하게 되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항우를 떠났다. => 居巢로 귀향 도중 등창이 발생 死去했다. 享年 75세
     范增은 항우에게 수차례 유방을 제거할 것(鴻門)을 요구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듣지 않았다(自慢心, 名分) => 楚 敗因의 하나
10) 楚漢의 一時講和와 天下兩分의 실패 => 항우는 유방과 講和하여 西漢東楚(彭城-漢中)로서 鴻溝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휴전     을 성립시킨 후 쓸쓸히 彭城을 향해 歸途에 올랐다. 유방도 漢中으로 돌아가려하자, 策士 張良과 陳平이 피폐한 楚를 이 기회에
   쳐야한다고 주장함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馬首를 돌려 항우를 추격하기에 이른다. => ‘養虎遺患’
11) 漢軍의 進擊 => 항우는 長期轉戰에 지치고 시달린 군사를 이끌고 서서히 행군하는데, 갑자기 漢軍의 추격을 받아, 垓下(安徽省      靈霞縣 南方)로 들어가 守備를 굳쳤다. 漢軍이 작은 都城을 10重 20重 으로 포위하니, 항우는 우리 안에 갇힌 猛虎격이었다.
    이 때, 張良은 말하길, “ 楚軍을 치기는 했으나, 항우는 호랑이다. 섣불리 덤볐다가는 오히려 당하기 쉬우니, 楚歌之策을
    쓰는 것이 上策이다 ”라고 하였다.
12) 四面楚歌 => B.C 201년 3월 초저녘 항우는 寵姬 虞美人과 술잔을 기울이는데,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楚歌였다.
    항우는 문득 고향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楚歌는 四方에서 들려오지 않는가. 그는 술잔을 놓고, “ 틀렸구나! 四面楚歌로다      漢軍에게 포위된 줄 알았더니, 楚兵까지 나를 배반 했구나 ! 나의 운명도 이제 마지막인가 !  ”하며 탄식했다.
    => 「力拔山兮氣蓋世,時不利兮騅不逝。騅不逝兮可柰何,虞兮虞兮柰若何!」=> 覇王別姬
13) 從者二十八騎 => 虞美人은 살아남아 훗날의 영화를 누리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항우의 검을 뽑아 자결하니, 항우는 그 뜻을
    갸륵하게 여겨 시신을 묻고, 愛馬 烏騅馬를 타고 壯士 800餘騎를 이끌고 夜陰을 틈타 漢軍의 重圍를 뚫고 나아갔다. 추격하는      漢軍에 쫓기며 力拔山 氣蓋世의 剛勇으로 血路를 해치고 天馬와 같이 달려 東城(安徽省 定遠縣 東南方)에 당도했을 때, 따르는      자가 겨우 28騎에 불과했다. 항우 曰, “ 내 이제 거병한 지 8년 大小 70 餘回의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건만, 이 꼴이
   되고 말았구나. 이는 하늘이 나를 亡하게 하는 것이지 내가 전쟁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天命이라면 싸우다 죽을 것이다. ”  
14) 項羽의 最後 => 項羽 一行은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강기슭인 烏江(安徽省 和縣 東北方)으로 나왔다. 이 때 烏江의 亭長이      배를 대고 기다렸다가, “ 江東은 협소하지만 大業을 벌일 만한 곳입니다. 大王께서는 강을 건너 後日을 도모 하십시오 ”라고      하니, 항우는 크게 웃으며, “ 나는 일찍이 江東 子弟 8千 을 데리고 강을 건너 西 로 갔다가, 이제 나 홀로 돌아 왔다. 비록
    江東의 父老들이 나를 가엾이 여겨 王으로 받든다 하더라고 내 무슨 낯으로 그들을 대하리요 ?  ”하였다. 비장한 결심을 한       후 몇 안 되는 부하들을 데리고 敵軍 속을 돌진하며 수백 명을 죽이고, 말에서 내려와 스스로 목을 자르고 죽었다. 享年 31歲  

2] 劉邦 (B.C 256 ~ 195) 의 천하통일 => 탁월한 用人術 => 蕭何(行政), 張良(戰略), 韓信(軍事)
1) 劉邦 爲人 => 兒名 劉季, 成人名 劉邦, 沛縣(江蘇省 蘇州) 豊邑人, 貧農家庭, 젊어서 放蕩生活, 無賴漢(乾達), 30歲가 넘어
    泗水의 亭長이 됨. 용모는 콧날이 높고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성격은 豁達大度하고, 큰 도량과 대범함을 가졌음. 일찍이 유방      이 咸陽에서 賦役에 종사하고 있을 때, 始皇帝의 위풍당당한 가마행렬을 보고, “ 丈夫로 태어났으면 저 쭘은 되어야 하는데       ..”라고 탄식했다. => 야심의 우회적 표현. 유명한 관상가 呂公이 유방의 관상을 보고 帝王의 相이라고 탄복하며, 자신의 딸      을 주었다. 이 여인이 바로 呂稚로써 후에 漢 왕조의 呂后가 되었다.  
2) 방탕산의 蹶起 => 沛縣의 亭長으로서 廬山의 始皇帝 陵墓工事에 동원되는 인부들을 인솔하여 여산으로 떠남. 도중에 이탈자와      도망자가 속출함. 목적지에 갈수도 돌아 갈수도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進退維谷의 상황. 방탕산에서 인솔하던 徵集者들을
    해산시키고, 따르는 자들(주발, 번쾌, 하후영 등)과 함께 탈주자들을 糾合擧兵하여, 沛縣 장관을 죽이고 父老들의 추대를 받아      沛公이 됨. 이 때, 秦의 官吏였던 蕭何와 曺參 등이 유방의 揮下에 들어옴, 蕭何 => 행정의 달인 -> 丞相
3) 入關과 秦 멸망 => 張良(子房)이 韓의 병마를 이끌고 排秦抗秦의 깃발을 들고 와서 유방과 합세하여 一路 關中을 향해 진격합
     B.C. 205年 劉邦軍 이 진격해오자, 秦의 3世인 子嬰은 항복하였다. 이에 秦은 3代 15年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4) 韓信의 起用(拔擢) => 유방이 漢中에 도착했을 때, 부하들이 鄕愁病이 깊어 脫走兵이 속출. “ 丞相 蕭何가 도망쳤습니다 ”
    “ 貴公까지 도망치다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 ” “ 도망자를 뒤쫓아 갔습니다 ” “ 누구를 추격 했소 ”
    “ 韓信이란 자입니다. 천하를 얻으려면 반드시 韓信 외는 방법이 없습니다.  ” 유방은 蕭何의 건의로 韓信을 大將軍에 보임
5) 咸陽 入城 => 시골 亭長 출신의 유방은 함양궁의 호화로운 宮室과 財貨, 寶物, 美女 등을 보고 황홀경에 빠짐. 戰利品으로서 모두 가져가려 하였지만, 번쾌와 장량의 만류로 궁중의 모든 財寶들을 잘 封印하여 보존함.  
6) 法三章之約  => 제후들과 관중에 들어 온 유방은 父老와 백성을 모아놓고 法三章을 공포함 : 法三章 -> ① 살인자는 死刑,
    ② 타인을 傷害한 자는 罰을 주고, ③ 도둑질 한자는 罰을 준다. 그 외 모든 법은 폐지한다. 그 동안 秦의 苛法에 고통 받아 온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며 悅服했다.
7) 鴻門之會 => 항우가 40만 군대를 이끌고 渡河하여 函谷關에 이르니, 유방은 정면대결은 어렵다고 보고 장량과 번쾌를 데리고鴻門으로 항우를 찾아가 鞠躬하며 항우를 환영하는 인사를 하고, 法三章 公約을 비밀에 부치고 항우를 추켜세웠다. 이 宴會에      서 유방을 죽이려는 음모(범증)가 있었으나, 번쾌의 기지로 유방은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
8) 항우의 죽음과 유방의 천하통일 => 항우가 垓下戰鬪에서 敗하여 烏江에서 죽자, 유방은 항우를 魯公의 禮로서 후히 장사지내고 항우의 領地를 梁, 楚로 나누어 彭越을 梁王에 韓信을 楚王에 각각 봉했다. 유방 자신은 모든 제후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고
    국호를 漢으로 하며 도읍을 洛陽에 정하니, 이후‘漢高祖’라 칭했다. 이는 B.C. 201년 6월의 일이었다.
9) 郡國制度 => 주의 봉건제와 진의 군현제를 절충한 군국제도를 시행함 => 중앙 -> 군현제 ; 지방 -> 봉건제
    점진적 중앙집권체제 --진압--> 吳楚七國之亂 --> 전국의 군현제 확대
10) 論功行賞 => 高祖는 처음 크게 功臣을 優待해서 각각 諸侯로 봉했다. 가장 功이 많은 創業功臣 三傑에 대해서는, 蕭何를 贊公 (湖北省 光化縣)에 봉하고 相國을 삼았으며, 張良은 留侯로, 韓信은 楚王으로 封했다. 그 외 번쾌는 舜陽侯로, 曺參은 平陽侯 로, 策士인 陳平은 曲逆侯, 高士인 王陵은 安固侯로 각각 봉했다. 그러나 高祖는 장차 異姓 功臣 제후들을 同姓 자제들로 교체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11) 兎死狗烹 => 당시 韓信에게는 한때 항우 麾下의 勇將이었던 種離昧가 몸을 依託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고조는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과거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몹시 분노하며, 韓信에게 종리매를 즉시 압송하라고 명령했으나, 한신은 命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자 한신을 의심하던 고조는 한신을 숙청하기로 결심했다. 고조는 책사 진평의 건의에 따라 모든 제후들을 황제의 雲夢湖 지역 巡幸 隨行을 위해 楚의 땅 陳(초의 서쪽 경계)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한신이 그 곳에 오면  捕獲하든지 誅殺하려는 솜셈이었다. 한신의 수급 요구로 종리매는 한탄 속에 자결하고, 한신은 종리매의 수급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다. 그러나 종리매의 말대로 逆賊의 죄명을 쓰고 포박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한신은 분개하여 말하길,
    “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높이 나는 새를 다 잡고 나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며, 敵國을
      쳐부수고 나면 謀臣은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말 그대로 天下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이제 팽살 당하겠구나 ! ”
     => “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 => 『史記』「淮陰侯列傳」; 『韓非子』「內儲說」; 『資治通鑑』
     그러나 고조는 한신을 창업공신 이란 점을 감안해 바로 죽이지는 않고 淮陰侯로 좌천시켰다가 때를 보아 결국은 謀殺했다.
     => 越의 策士 范蠡가 句踐을 떠나며 文種에게 한 말 => “ 狡免死  走狗烹 ”『史記』「越世家」
12) 漢高祖 즉위와 崩御 => 유방은 B.C.206년 8월 재차 북상 삼진을 멸망시킴. 관대한 법적용의 민심수습과 역적 項羽討伐의
   명분을 내걸고 제후들을 결집. 이후 4년간의 楚漢戰에서 포악한 항우가 연전연승했으나, 청탁을 포용한 넓은 도량의 유방이
   승리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제위에 올라 在位 12年, 황제가 된지 8년 만인 B.C 194년 長安 (陝西省 西安)에서 죽으니 皇太子인     盈이 뒤를 이어 惠帝가 되었다. 享年 56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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