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인문학 강좌 2강 들뢰즈와 리더십 - 2014.4.17 (2)

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 열린마당 > 자료실
자료실

제2기 인문학 강좌 <철학과 경영학> 2강 들뢰즈와 리더십 - 2014.4.17 (2)

관리자 0 158

“한 여인이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서 그녀는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우리와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그녀는 죽은 아들을 위한 49재를 마쳤다. 그리고 절 주지의 안내로 방으로 들어와 우리와 합석을 했다. 그녀의 존재 전체가 슬픔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들은 외국 유학을 마치고 군 입대를 준비하던 중, 어느 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는 돌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그녀가 하는 이야기. 음식을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는 것까지도 울음 그 자체였다. 슬픔이 깊으면 모든 동작이 다 울음이 된다.
밥을 먹다 말고 내가 법정 스님을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쯤 스님이 여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쯤 스님이 여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그 인연만으로 그녀에게 왔다가 간 것이다. 이 우주가 잠시 그녀에게 아들을 맡겼다가 데리고 간 것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스님이 그렇게 여인을 위로하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 그녀 앞으로 반찬을 끌어다 주기도 하고 어서 먹으라고 권할 뿐이었다. 여인은 계속해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스님을 귀를 기울여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연신 다른 반찬을 그녀 앞으로 옮겨다 놓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지 않았지만, 분명 여인의 얼굴 어딘가에 안정과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눈물로 일렁이던 바다에 한 줄기 평화로운 빛이 스며들어 물결이 그 빛을 반사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이 어떤 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법정 스님이 가진 현존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그때 스님은 단 한순간도 그 여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실 그 자리에는, 모처럼 산을 내려온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사람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명한 오라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그는 한순간도 그 여인에게서 눈과 귀를 떼지 않았다. 그 강렬한 집중이 아마도 그녀의 슬픔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것을 삶의 한계에 대한 이해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고통받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 분위기의 신성함이 서서히 그녀를 슬픔 밖으로 인도했을 것이다.“(2006 9-10)
류시화는 한 여인과 법정 스님의 그 사건에서 평화라는 단어로 윤리적 행위가 수행되는 것을 설명한다. 법정 스님이 실재적 가능태로써 강도 깊은 행위가 그  슬픈 여인에게 점차적으로 생명과 평화를 찾아들게 한다. 화이트헤드 역시 평화는 “영혼에 있어 ‘생명과 운동’의 왕관인 긍정적 느낌”(AI 432)이라고 한다. 평화는 “자아가 상실되고 흥미가 인격성보다 넓은 조정으로 전이되었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기 제어”(AI 433)라고 한다. 이것은 ‘인류의 사랑 자체’(AI 433)이다. 우리가 볼 때, 스님은 자기를 무아로 만들고, 그 여인과 하나가 되는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스님이 도주선을 타는 방법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평화는 “비극에 대한 이해인 동시에 그것의 보존”(AI 434)이라고 한다. 법정 스님은 억지로 그 슬픈 여인의 슬픔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그녀의 비극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죽음이 조잡한 악이 되지 않고 비극적 악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아름다움만이 악을 비극적으로 보존하며, 이것은 ‘역작용’으로 새로운 대비로 계승될 수 있다. 따라서 슬픔, 악, 무질서를 조잡한 방식이 아니라 비극을 통해서 아름다움으로 보존하는 것이 바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AI 435). 법정 스님의 행위는 바로 죽음이라는 악을 조잡한 악이 아니라 비극적 악으로 보고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작은 아름다움과 큰 아름다움으로 윤리적 행위가 수행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조화, 강도,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대체가 불가능한 유일한 도덕적 행위이다. 어떤 전망도 느낌이 없는 영역은 없다. 특히 윤리는 미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느낌의 단위”(MG 680) 속에서 선과 악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윤리도 강도량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가장 낮은 것까지 긍정하기, 자기 자신을 너무 설명하지 않기”(MP 520)이다. 가장 낮은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바뀔 잠재력이 있고, 한 개체군 속에는 지난 부정적인 것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긍정적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와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이 플라톤의 각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플라톤의 전복을 자신들의 사유의 핵심적인 과제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을 사랑하지만 플라톤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환상의 공간을 꿈꾼다.  
우리는 법정 스님과 같은 긍정의 태도가 우리 공동체에 핵심적인 요인으로 자리 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태도가 생명을 경외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바탕으로 사유한다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보인다.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