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인문학 강좌 <철학과 경영학> 3강 원효와 리더십 - 2014.4.17
원효와 리더십
김영진(영남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 싸움과 평화가 혼재한다. 나와 너라는 아집이 싸움의 근거가 된다. 나는 옳고 남은 그릇되었다는 생각이 고정화되면, 싸움과 갈등이 생겨난다. 어떻게 하면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가? 여기에 원효의 리더십의 원천이 있다. 우리는 네 가지 측면에서 원효의 사상을 논하고, 그와 같은 논의가 오늘날 지도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검토해볼 것이다.
소유는 실체론적 사유에서 오고, 갈등은 인식론적 사유에서 온다. 이 존재론과 인식론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삶
원효는 막힘없는 무애인으로 살았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그의 발언은 미친 듯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기도 했고,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기고, 여염집에서 유숙하고, 산수에서 좌선하는 등 계기를 따라 마음대로 하여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이규보에 따르면, 머리를 깎으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기르면 소성거사라고 했다. 그가 출세법은 세간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
출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도속이변’의 상에 떨어지지 않기에 변을 떠나는 훌륭한 이익이다.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되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잡보장경)
대승의 삶: 그는 높이 나는 봉황새의 기상을 갖고 있었다.
소승의 삶: 옷을 깁을 때는 짧은 바늘이 필요하고, 긴 창이 있어도 그것은 소용없다. 비를 피할 때는 작은 우산이 필요하고, 온 하늘 덥는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작다고 가별이 볼 것이 아니다. 그 근성을 따라서 크고 작은 것이 다 보배다.
대승적인 삶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영웅적이고 혁명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잘난 것이 아니다. 소승적이고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소중한 것이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일등만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잘난 사람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행복할 수 있는 소승의 인정이 중요하다.
이론:
1. 자각적인 면: 차이와 지연의 인정을 통한 공존(不一不二)
모든 논쟁은 나와 너의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나로부터 너를 분리하면서 아집이 생겨났고, 너로부터 나를 분리하면서 법집이 생겨났다.
오랫동안 나와 너를 경험한 우리들이 너무 쉽게 너와 나를 하나라고 해 버리면 하나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반발하게 된다.
반대로 나와 너를 서로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너와 나를 갈라서 둘이라고 해 버리면 둘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반발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는가?
한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처럼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살아왔고 전혀 다른 시간에서 살아왔던 서로의 차이를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이를 화해시켜야 하는가?
“열매와 씨앗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앗을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앗과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앗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앗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앗은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때는 씨앗이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멸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성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가지 치우친 생각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 가운데 해당하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원효, ‘금강삼매경론’, 1권, 625쪽)
씨앗과 열매의 관계처럼 절대적인 나와 너, 불변하는 우리와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서로 동일하지도 차이나지도 않으려면 서로가 처한 시간의 지연과 공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열매와 씨앗은 동일하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으니 씨앗을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단절되는 것도 아니지만 상존하는 것도 아니다.
나와 너는 서로 내포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배제되어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생성하는 것이 아니지만, 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열매와 씨앗의 차별이 아니라 씨앗과 열매의 차이라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열매와 씨앗처럼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이 서로 자기의 입장만을 고수해서는 아니된다. 모든 것은 절대적인 아니라 상대적이며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황 원효의 사유는 동일하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다는 사유에 있다.
2. 자각 각타적인 면: 진속의 불이를 통한 요익중생
외국인이 100 만명 이상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인과 재한 외래인은 결국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깨끗함과 때묻음이 둘이라는 분별이 없으면서도 어느 하나만을 고수하지도 않으며, 둘이라믄 분별이 없기 때문에 곧 일심인 것이, 다.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몸체를 들어 둘로 삼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一心二門이라고 한다.”(원효, ‘금강삼매경론’, 658쪽)
진과 속의 불이로 해명하고 있다. 나와 너 혹은 진과 속이라는 과도한 분별은 아집과 법집을 만들어 낸다. 외국인과 한국인의 구별은 여러 가지 집착을 만들어 낸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한국어, 외국어, 한국문화, 외국문화를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3. 자각 각타적인 면: 수립과 타파의 무애와 전개와 통합의 자재
무룻 우리의 삶이 머리-몸통과 팔다리로 이루어지듯 모든 문장은 주와 술어를 지닌다. 주부는 술부를 규정하고 술부는 주부에 의해 행위한다. 두 항으로 시작하는 인간의 언어에서 술부의 경우의 수는 두 쌍으로 된 네 항이 전제된다. 이를테면, 있는 것과 없는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인 것, 아닌 것, 부분과 전체 등의 항들이다.
자각적인 면과 각타적인 면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
“‘중관론’과 ‘십이문론’ 등은 두루 집착을 부수고 부숨 또한 부서져 부숴냄와 부숴짐을 사시는 허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은 가고는 두루하지 못하는 논이며, ‘유가론’, ‘섭대승론’ 등은 철저하게 깊음, 얕음을 세우고 법문을 판별하여 자기가 세운 법을 융통스럽게 버릴 길이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은 주고는 빼앗지 못하는 논이다.
이제 이 논은 지혜롭고 어질며 현묘하고 광박하여 세우지 않음이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부수지 않음이 없으면서 다시금 허용한다. 다시 허용한 것은 저 간 자로 하여금 극에 이르러서는 두루 섬을 나타내고,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준 자가 궁극에 이르러서는 빼앗음을 밝혀준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론의 조종이요, 뭇 쟁론의 평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와 문자로 주어진 정보와 인식은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실체화시키는 순간 그것에 붙들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세우지 않음이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부수지 않음이 없으면서 다시 허용하며 수립과 타파에 걸림이 없고, 전개와 통합에 자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분황은 나와 너 또는 우리와 그들 혹은 국내인과 재한외국인 사이를 갈라놓은 어떠한 고정된 관념과 고정된 원리는 모두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분황은 공동이익과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고정된 이념과 고착된 원리라는 허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4. 각타적인 면: 긍정과 부정 및 절대와 상대의 회통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와 행복을 갈망한다. 하지만 평화와 행복은 자기의 소유 인식과 집착 의식에 의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유는 집착을 낳고 집착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갈등은 자신들의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욕망과 집착이 심해지면 부부는 갈라서게 되고 나라는 전쟁을 하게 된다.
평화는 다른 의견과 다른 이해의 회통에 의해 가능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도모하려는 두 사람이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문제가 생겨난다. 다른 의견이 제시될 때 한 쪽이 다른 쪽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한 결론에 이르기 쉽지 않다. 분황은 어떤 사람의 의견을 ‘수순하거나 불순하면서 말하라’고 역설한다. 하나의 입장을 수용하면 나머지 입장을 수용하지 않게 된다. 다른 하나의 입장을 수용하면 또 나머지 입장을 배제하게 된다. 때문에 어떤 의견을 ‘따르거나 따르지 말면서 말하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하거나 따라서 하지 않으며 말한다는 것은, 만일 직접 따라서 설법하면 간사한 집착을 움직일 수 없으며, 또 만일 오직 심진여에 따라서 하지 않고서 설법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바른 믿음을 얻어 본래의 간사한 집착을 버리게 하려면, 혹은 심진여를 따라서 설하고 혹은 따르지 않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또 만일 직접 도리만 따라서 설법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그 사람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리에 따르지 않고 설법한다면 어찌 올바른 이해를 낳으리요.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까닭이다.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낳으려면 혹은 따라서 하고 혹은 따르지 않으면서 설법해야 하는 것이다.”(원효, 금강삼배경론, 638쪽)
만일 자신의 의견에 집착하면 그것에 붙들리게 되어 자유로운 인식이 어려워진다. 반면 타인의 의견에만 집착하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상대의 주장에 따라서 말을 하게 되면 간사한 집착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또 만일 오직 심진여(평화 행복)에 하지 않고서 설법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바른 믿음을 얻어 본래의 간사한 집착을 버리게 하려면, 혹은 심진여를 따라서 설하고 혹은 따르지 않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도리만 따라서 말하게 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그 사람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리에 따르지 않고 설법한다면 올바른 이해를 낳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황 원효는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낳으려면 혹은 따라서 하고 혹은 따르지 않으면서 설법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황은 동조하지도 반대하지도 말고 진여에 상응하는 설법을 하라고 역설한다.
국내인과 외국인, 남한과 북한의 체제를 각기 옹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또는 상대의 체제에 대해 옹호하지도 말고 반대하지도 말고 평화 행복(진여)에 상응하여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황은 ‘있음’에 동의하여 설법하면 ‘공’이라는 견해에 맞서게 되고, ‘공’이라는 집착에 동의하며 설법하면 ‘유’라는 집착에 맞서게 된다고 역설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다툼만 더욱 조장하게 된다. 두 견해에 다 동의하면 안에서 모순을 일으켜 다툴 것이고, 두 견해를 다 반대하면 두 견해와 다투게 될 것이다. 분황은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로 설법하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대로 해석하자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 된다.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뜻을 따라 말한다면 허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평화가 있다.
결론
1. 서로의 시간적 지연과 공간적 차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1) 내가 하지 않는 것을 남이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남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3)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 서로의 시공적 차연의 인정 위에서 ‘배려’해야 한다.
1) 그가 지닌 몸과 마음의 조건에 대해 배려해야 한다.
2) 그가 지닌 현실과 상황에 대해 배려해야 한다.
3. 서로의 배려 위에서 깊은 ‘대화’가 우러나온다.
1) 상대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인식 위에서 대화가 이루어진다.
2)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있다는 인식 위에서 마음이 열려진다.
4. 서로의 깊은 대화 속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
1)서로 간의 깊은 대화 속에서 몸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2) 서로 간의 깊은 대화 속에서 마음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5. 서로의 소통 속에서 ‘행복(건강)’한 삶이 이루어진다.
1) 서로 간의 몸과 마음의 소통을 통해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2) 서로 간의 몸과 마음의 소통을 통해 건강한 삶이 이루어진다.
결국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 다양성과 서로와 어울리는 조화성이다. 인정, 배려, 대화, 소통, 행복한 삶이 평화 실현을 위한 기초적인 초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