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인문학 강좌 1강 문학작품을 통한 학업성취도 - 201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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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인문학 강좌 <인문학적 소양과 학업성취도> 1강 문학작품을 통한 학업성취도 - 201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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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통한 학업성취도 향상 방안

2014. 05. 29

오  월

고 창 환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꾸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 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날까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감꽃

별을 닮은 감꽃
감꽃 실에 꿰어

가슴까지 길게
길게 목걸이 하면

죽어 별이 된 누이야
누이야 누이야

밤이나 낮이나 너는
너는 지지 않는 내 가슴속의 별




  필의 졸작 <감꽃>이란 시의 전문(全文)이다.
  어느 학생이 <진달래>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소월의 시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진달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TV 화면을 통해서만 보았다고 했다. <감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역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감꽃으로 떡을 쪄 먹고, 감꽃으로 목걸이를 해 본 경험도 물론 없었다. 장래 희망은 문학을 전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주말 그 학생을 데리고 감꽃을 보러 갔다. 차창을 스쳐지나가는 오월의 신록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다. 「자연을 보라, 그리고 자연이 가르치는 길을 따라가라. 자연은 쉼없이 아이를 단련시킨다.」는 루소의 말을 귓전에 흘려 주었다. 「자연이 우리를 단련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야간 자율학습이 우리를 단련시켜 주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인내심을 길러 줍니다.」라고 답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대구의 오지(奧地)인 평광동 어느 집 감나무 밑에는 감꽃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감꽃을 주웠다. 깨끗한 것은 먹기도 했다. 가지고 간 실에 감꽃을 하나씩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팔찌도 만들었다. 밤하늘의 별이 대낮에 지상으로 내려와 어린 영혼의 어두운 가슴을 밝혀주고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은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기반이라는 메시지도 전해주었다. 멀리 산 속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늦은 봄날의 대기 속으로 나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레미제라블 효과

지난 겨울 컴퓨터 게임 중독으로 부모 자식 간에 마찰이 극심한 예비 고3 학생과 학부모를 상대로 특강을 했다. 국어, 수학, 영어 학습법을 강의하고 나서, 올해 입시에서 성공하기 위해 지금 당장 실천하면 효과가 탁월한 방법을 제시하겠으니 뜻이 있으면 실행해 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일주일에 4일 정도 매번 한 시간 이상 운동할 계획을 세우십시오. 그 다음에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뭔가 깊이 와 닿는 것이 있으면, 다섯 권으로 번역 되어 나온 원작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와 함께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단 소설 읽기를 끝낼 때까지 컴퓨터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스마트폰을 끄거나 무음으로 해 두도록 노력해 보세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심지어 고3 수험생도 육체적으로는 땀을 흘려야 하고, 주기적으로 정신적인 감동을 받아야 일이나 공부를 지치지 않고 진지하게 계속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훈계에 의한 학습동기 유발은 효력이 삼일이지만, 내적 감동에 의해 스스로 깨닫게 된 동기유발은 그 효과가 한 달 이상 지속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 달 반이 지난 어느 날, 캠프에 참가했던 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선생님,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 선생님께서 추천한 원전 완역본 다섯 권을 보름 동안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공부에 다소 지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 전율에 취하고 나니 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줄거리만 추려 엮은 이백 쪽 분량의 ‘장발장’을 읽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완역본이 주는 감동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습니다. 소설을 통해 특정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의 모습을 실감나게 체험하며, 현재와 미래의 나, 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해 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이런 방식으로 깨우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컴퓨터 게임이 시시해졌습니다. 제가 소설에 빠져있는 있는 것을 보고, 소설 읽기를 권했던 선생님을 원망하던 어머니께서도 지금 레미제라블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변한 이유를 알고 싶어 읽는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너무 행복해 하는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접속되어 있는 ‘와이어드(wired state) 상태’나, 그것들과 연결이 끊어진 ‘언와이어드(unwired state) 상태’ 중 하나로 영위된다. 컴퓨터 게임과 같이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가상 세계에 빠지면 실제 삶을 제대로 살기가 어렵다. 가상 세계에 중독되면,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원본과 모사본의 경계가 어느 순간 모호해지고,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원본이 있다 해도 가상성에 흡수돼 ‘현실의 종말’이 도래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도 가상 세계를 다룬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과 영화는 많은 차이가 있다. 현실적 삶과 긴밀하게 연관된 줄거리가 영상미와 결합하여 내면에 깊은 감동을 주는 명화는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지만, 유해한 컴퓨터 게임은 영혼을 병들게 하고 내면을 황폐하게 한다.

인터넷 강의가 아무리 도움이 되고, 컴퓨터가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제공해 준다 해도 학생은 시험지에 인쇄된 문제를 보고 연필로 직접 풀이를 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학습 과정은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학교와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접속과 비접속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책을 읽고 사색하면서, 산과 들에서 청량한 바람과 맑은 물을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게 해야 한다. 청소년기에 고전작품을 읽은 학생과 안 읽은 학생은 나중에 모든 면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아날로그적 기반이 부실한 디지털 세계는 뿌리가 약한 나무와 같다. 영화 레미제라블 덕택에 원작 번역서가 몇십만 부 팔렸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그게 진정한 예술작품의 힘이다


부모부터 달라져야 한다.

  나의 부모님은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다. 따라서 나는 학창시절 전기간을 통해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부모님께서 공부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께서 자녀 교육에 전혀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훌륭한 교육자로 존경한다.

  고3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밤 늦도록 공부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내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 나와 계셨다. 지친 몸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내리면 어머니께서는 내 가방을 받아 주며 「힘들제!」라고 한 마디만 하시고는 앞서 걸어 가셨다. 「힘들제!」라는 그 한 마디에 하루의 피로가 다 풀렸고,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곤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약 1km 거리를 밤하늘의 별빛을 받으며 나란히 걸어 갈 때,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왔고 모든 것들이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힘들제!」라는 그 말 한마디는 나의 수고를 인정해주고 나를 믿는다는 시적 함축이요 상징이었던 것이다.

  오늘의 청소년들은 불행하다. 부모의 교육 수준과 경제적 수준이 높을수록 자녀들은 괴롭다. 자녀 교육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자연히 극도의 간섭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간접 수사학의 시대이다. 아무리 좋은 말도 직설적으로 내뱉고 지시할 때, 듣는 사람은 거부감을 느끼고, 때로 반항하게 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믿고 맡긴다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을 때, 자녀들은 반항적으로 되거나 매사에 소극적인 소심형으로 변하게 된다.

  유태인 천재 교육의 비법은 칭찬에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은 칭찬을 들을 때,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자신도 모르는 천재성이 빛을 발하게 된다. 우리는 꾸중을 관심과 애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칭찬거리를 찾아서 칭찬해 주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칭찬은 자녀를 천재로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 배운 내용을 복습하라는 말을 자주한다. 이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주입식 교육이 낳은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다. 복습 위주의 학습은 결론부터 말하면 창의력 말살의 지름길이자 비생산적 학습의 극치이다. 시대가 변하고 시험 문제도 달라졌다. 창의력이 없으면 당면한 입시 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살아 남을 수 없다.

  메를로 퐁티는 sense라는 단어 풀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예습의 중요성을 sense를 통해 설명해 보자. 영어 단어 sense는「감각」,「의미」,「방향」이란 뜻을 갖고 있다. 예습은 내일 배울 내용을 미리 읽어 봄으로써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감각적」으로 느껴보는 과정이다. 예습이란 배우지 않는 내용을 다 알도록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 가에 관한 문제제기 과정이다. 그리고 나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발표와 질문을 통하여「의미」를 파악한다. 그 다음에 배울 내용과 심화 학습의「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예습은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미리 고민해 본 문제는 즉 충격을 받아 본 문제는 오래 기억을 하게 된다. 예습의 습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자녀들에겐 먼저 내일 배울 내용을 과목당 5분씩만 읽고 수업에 참여하게 해 보자.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암기하려 할 때, 학습 의욕이 떨어지고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된다. 예습 위주의 학습은 원리와 이해 위주의 학습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청소년이 성장하는 데는 꼭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 육체적으로는「땀」을 흘려야 하며 정신적으로는 주기적으로「감동」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어떻게 사람이 놀이나 휴식없이 책상 앞에만 앉아 있을 수 있는가, 학창시절에 그런대로 열심히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강요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공부와 휴식을 엄격히 구분할 줄 알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공부를 할 때는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고 한 매듭이 지어지고 나면 밖에 나가 땀을 흘리며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고 또한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며 감동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진한 감동을 경험할 때 생의 활력을 되찾고 현재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우리의 자녀들은 기계가 아니다. 그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가변성을 갖고 있는 가장 생명활동이 왕성한 작은 우주이다. 부모의 모범과 여유로운 자세 여하에 따라 우리의 자녀는 찬란한 태양이 될 수도 있고, 차가운 얼음 조각으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정처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떠돌이 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다.


아폴론적인 삶과 디오니소스적인 삶의 조화

  <비극의 탄생>은 니이체가 27세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은 그가 비극의 해석을 통하여 세계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비극의 적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라고 말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에 의해 비극은 살해되었고,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비극의 시대는 끝나고 이성과 이성적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나이체는 또한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가 등장하여 그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터무니없는 세계 상실이 초래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합리주의적인 부분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세계가 문제시 되지 않고 경시되게 되었다는 뜻이다.

  세상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밝은 면만을 문제로 삼고 어두운 면을 문제로 삼지 않음으로써 그리이스인은 그 본능의 강점을 잃었을 뿐 아니라, 생의 근거, 신화적인 깊이마저 잃었다. 니이체는 소크라테스를「본능적 지혜」가 결여된 좌절한 그리스인으로 부르며, 또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 논리적인 것, 합리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자라고 비난한다.

  니이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말하고 있는「아폴론적」인 것과「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아폴론은 첫째 꿈꾸는 정신이다 인간은 꿈을 통해서만이 현실이라고 하는 가상의 저편에 있는 본질을 탐구할 수가 있다. 그 꿈도 역시 가상에 불과하겠지만 그 가상을 거듭 꿈꾸는 과정에서 하나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가상(假像), 즉 꿈을 꾸고 있는 과정에 슬기가 발동하고 총명이 작용한다. 형상을 쫓는 정신이나 의욕은 언제나 완전한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폴론은「미와 빛의 신」이다. 그 은총으로 그리이스인은 명랑하고 조화를 이룬 현세긍정의 조형미술, 또는 장엄한 서사시와 같은 걸작을 생산했다.

  그러나 아폴론신의 대극(對極)에 있는 디오니소스 신의 등장없인 그리이스 정신은 자기표현을 다하지 못한다. 아폴론이 미와 빛의 신이라면 디오니소스 신은 도취와 그늘의 신이다. 밝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지하 어두운 곳에서 영양을 섭취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듯이 아폴론은 디오니소스의 협동없인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니이체는 이러한 협동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의형제를 맺었다는 수사(修辭)로써 표현하고「디오니소스가 아폴론을 대변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폴론이 디오니소스를 대변한다」라고 말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협동으로 비극은 음악이면서 형상, 꿈이면서 도취, 조형적인 것이면서 혼돈, 낮이면서 밤, 현상이면서 본질, 나아가 세계본질의 형상화가 되는 것이다.

  비극이 세계 본질의 형상화라고 파악한 생각은 니이체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니이체 철학의 근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립과 협동, 그 상호반발과 화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이스 비극을 해명함으로써 그는 세계 이해의 단서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아폴론이 깨어있는 정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도취되어 있는 감동이다. 우리의 삶과, 예술은 깨어 있는 이성과 취한 감동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이 땅의 학생들은 너무나도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만을 추구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무엇인가에 도취되어 감동을 경험하지 않으면 합리성의 추구도 생산성이 없다. 만성적인 피로만 쌓일 뿐이다.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독해를 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 그러나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자연의 품속에 안겨 우주와 인생을 사색해야 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 이는 한 인격체의 완전한 발달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긴 안목으로 볼 때, 입시에서도 성공하게 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참을 수 없는 조급함, 얕음, 얇음


영화관에서 마지막 장면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 옆 사람이 서둘러 나가면서 다리를 치자 온 몸으로 느꼈던 감동과 전율이 금방 사그라진다. 연주회에서 관객의 열렬한 환호에 답하여 지휘자가 세 번 째 앵콜곡을 지휘하고 있다. 아무리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쳐도 그게 마지막 곡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 마지막 곡이 숨 가쁘게 피날레를 향해 가고 있는데 옆 사람이 무리하게 내 앞을 지나가며 발을 밟는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도취와 흥이 깨져버린다. 강연을 거의 끝내고 정리의 말을 하려는데 앞자리 몇몇 사람이 일어나 서둘러 강연장을 빠져 나간다. 강연자는 신경이 쓰여 마지막 요약의 말을 감동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불쾌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먼저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남보다 좀더 빨리 엘리베이트를 타기 위해, 주차타워에서 빨리 차를 빼기 위해 그렇게 서두른다. 그 진한 감동의 상태에서 어쩌면 그렇게 재빨리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지가 놀랍다.

‘적과 흙’의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화가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지의 초상’을 감상하고 나오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며 무릎에 힘이 빠져 걷는 동안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황홀경을 느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걸작 예술품을 보거나 읽을 때, 갑자기 흥분된 상태에 빠지거나 호흡곤란, 현기증, 전신마비 등 아름다움의 극치가 주는 충격으로 느끼게 되는 정신 병리학적 이상증세를 ‘스탕달 증후군’이라 한다.

어린 시절 재미있는 동화책이나 전기를 읽을 때 너무 몰입하고 심취하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내 몸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매달 월말고사를 치고 나면 시내 중심가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 명작을 지정하여 학생들이 할인 요금으로 단체로 감상하는 ‘문화교실’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지금 사십대 이상의 사람들은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 ‘러브스토리’ 등 수많은 명화들을 ‘문화교실’ 시간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관람했다. 영화관을 나와서도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몇 시간씩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감흥을 다스리곤 했다. 그 시절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주기적으로 겪게 되는 스탕달 증후군이 우리의 정서를 얼마나 풍부하게 하고, 감성을 예민하게 해 주는지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매사에 왜 그렇게 조급한가?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 6.25 등 질곡의 세월을 거치면서,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남보다 빨리 일어나 남보다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이 조급함과 맹목적인 속도 중시주의 성향은 일상생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녀 교육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선행학습 열풍도 이런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양과 속도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기다림에 대한 지구력이 너무 약하다. 선행학습보다는 지금 배우고 있는 개념과 내용을 천천히 떠올리고 생각해보며, 과정을 즐기다보면 결과는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고 아무리 목청 높여 이야기해도 묘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서두르고 속도를 내는 진정한 이유는 필요한 순간에 느림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느림이 담보되지 않는 속도는 무의미하고 위험하다. 미래는 단순하게 암기한 정보의 양보다는 창의력이 승패를 좌우하며, 감성과 꿈, 상상력이 부가가치 높은 생산력과 직결되는 감성시장의 시대다. 창의력과 감성은 교과서와 교실보다는 그것들의 밖에서 느끼고 맛보는 경험에 의해 더 많이 배양된다. 깊이와 두께. 무거움보다는 가벼움과 재빠른 변신을 현명한 처세술로 생각하는 습성을 돌이켜 보며 좀 느긋하게 몰입하고 진득하게 빠져드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우린 너무 조급하며, 얕고 얇다.


황룡사지를 걸으며


실크로드 일부 구간을 여행하며 거칠고 광활한 고비사막을 지나간 적이 있다. 오아시스와 신기루를 보았고 대낮에도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혹독한 황사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지나며 인간과 자연에 대해 많은 상념과 사색에 잠겨 보았다. 생각이 깊어지고 정신이 단련됨을 느낄 수 있었다. 광활한 황무지나 폐허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딸아이가 중3 때 유난히 시험을 못 친 날이었다. 그날 밤 10시 경에 엄마와 아빠와 함께 경주 황룡사지에 산책을 가자고 하니 순순히 따라 나섰다. 11시 경에 도착했다. 그믐밤이어서 사방이 깜깜했다. 하늘에서는 별이 펑펑 쏟아져 내렸고 청량한 바람은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세 식구는 금당터 금동삼존장륙상 대좌 앞에 한참 서 있었고, 신라 삼보의 하나인 9층목탑터에서는 64개의 초석 위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차례로 밟아 보기도 했다. 조국 백제가 망하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신라의 탑을 지어야 했던 아비지의 고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한참을 같이 돌아다니다가 각자가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서 삼십분씩 혼자 산책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한 자리에 모여 가져간 간식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딸에게 「아빠는 황룡사지를 달밤이나 별밤에 걷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그 넓은 폐허를 걸으며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기거나 머리 속에서 절과 탑을 지었다 허물어 보는 것은 정말 즐겁다. 만약 황룡사나 목탑이 졸속하게 복원된다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 같다. 아빠는 황무지나 폐허를 걸으면 정신의 성장과 성숙을 느끼게 된다.」라고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이는 그냥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마음이 심란할 때는 황룡사지에 가자고 했다. 일 년에 서너 차례씩 함께 찾아갔다. 갈 때마다 우리는 각자 떨어져서 혼자 산책하는 경우가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특별한 말은 없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갈 때보다는 돌아올 때 아이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그 때마다 우리 가까이 고비 사막과 같은 광활한 황무지는 없지만 황룡사지와 같은 폐허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2 어느 가을날 밤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황룡사지를 다녀왔다. 그로부터 이틀 뒤 딸아이가 등교길에 「아빠, 저도 이제 황룡사지를 걸으며 상상으로 절과 탑을 지어보고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 너무 좋아요. 황룡사나 목탑이 졸속하게 복원된다면 저도 아빠처럼 거기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딸이 나의 생각에 진정으로 공감하게 되어서 기쁘고 행복했다. 고3 때도 두 번 갔다.

지난해 수능시험이 끝나고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아이를 태워주며 「아빠는 너를 뒷바라지 하는 3년이 너무 행복했다. 먼 훗날 이 때가 그리워질 수도 있겠지. 이제 너희들을 다 키웠으니 너희들이 아이를 낳으면 도와줄게. 너희들 아이는 어떻게 키워줄까?」 이렇게 물어보았다.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오빠와 저처럼 키워 주세요」라고 답했다. 이 말 역시 나를 기쁘게 했다. 부모의 수고에 감사하고 부모의 교육 방식을 인정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딸아이가 기숙사에 들어가는 길에 전화를 했다. 자기는 잘 지내고 있다며 아빠는 별일 없느냐고 물었다. 요즈음 할 일이 너무 많아 힘이 든다고 했다. 반농담조로 너가 곁에서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빠, 다음 금요일 오후에 내려갈게요. 우리 같이 황룡사지에 가요.」        


위기 다음의 기회 살리려면

‘위기 다음에는 찬스가 온다.’ 프로야구 중계 해설자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위기’ 다음에 국민을 안전하게 하고 상식과 순리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회’는 과연 올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아니 현재로서는 회의적이다. 여야 정치권이 현 사태를 바라보는 입장과 태도, 내놓는 위기 대처 방식을 보면 그렇다.

“전당포 노파는 비천하고 더러운 해충이며, 모두에게 해로운 늙은 고리대금업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붙어먹고 사는 흡혈귀에 불과하다. 나는 모든 행위를 감행할 특권을 가진 나플레옹이 되고 싶다. 내가 그 노파를 죽인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합리화하는 말이다. 작가는 그를 통해 폭력 혁명을 정당화하는 급진사회주의의 악마적 속성을 경고했다.

1869년 11월 네차예프라는 모스코바 대학생이 지하혁명조직의 이바노프라는 동료 학생이  조직을 탈퇴하려고 하자, 조직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해 그를 무참히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의 배후에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이 관여했다는 전모가 드러나면서 그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악령’에서 농과대학생 이바노프는 신학생 사토프로, 잔인한 혁명가 네차예프는 베르호벤스키로 등장시켰다. 작가는 네차예프로 상징되는 혁명적 인텔리겐차들을 악령에 홀린 인간들로 간주했다. 그는 ‘죄와 벌’과 ‘악령’의 주인공을 통해 정의를 독점했다고 확신하는 인간들이 벌이는 대재앙을 고발했다.

우리는 지금 감정 표출의 범람과 논쟁의 과잉 시대를 살고 있다. 과거 권위적인 정권 하에서의 감정 표출 억압과 논쟁의 과소에 비하면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문제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진보든 보수든 정치적인 시선끌기와 반사 이익 챙기기, 인신공격에만 집착할 뿐  주요 쟁점에 대한 생산적 토론은 하지도 않고, 할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엔 합리적인 해결책의 모색과 도출보다는 정치적인 손익 계산만 보인다.

세월호 사건을 두고 벌이는 여야의 논점 이탈적인 설전은 국민을 더욱 피곤하게 하고 절망하게 한다. 여야는 라스콜리니코프 처럼 문제 해결책을 독점할 권리와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은 탁상공론이나 공허한 정치구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민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속에 있다. 여야 정치인은 먼저 국민들의 흐느낌과 통곡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특히 집권 여당은 우리 사회에 아직 만연해 있는 불의와 부정, 부패와 타락, 언론 통제, 민간인 사찰과 같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잘못된 점들을 극복하지 않는 한, 라스콜리니코프와 베르호벤스키 같은 인물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불통과 오만, 독단과 독선의 태도가 극복되지 않을 때, 그 사회적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 개개인의 고통으로 돌아온다.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나를 죽였다”고 뒤늦게 참회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탄식에 우리 모두는 귀 기울여야 한다. 문제 해결을 독점하겠다는 생각은 자신과 주변 모두를 죽이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여야 정치인은 정서적으로 소통하며 힘을 합쳐야 한다. 작은 차이점이라 할지라도 귀를 크게 열고 진지하게 경청할 때, 실효성 있는 해결책은 나올 수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추상적인 금언이나 성경 말씀이 아니라, 헌신적이고 감수성 예민한 소냐라는 한 가냘픈 소녀가 주는 생명의 입김과 사랑, 정열의 힘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국민의 아픔과 슬픔, 불안한 마음을 진실하게 느껴보라. 모두가 노란 리본을 달고, 아무리 분노를 표출해 봐도 지금과 같이 본질보다는 정치적 손익 계산에 집착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에겐 아무 희망이 없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다가 차악을 선택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여야 정치인은 국민에게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절망감을 주지 않도록 정말 진실한 자세로 서로 머리를 맞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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