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인문학 강좌 <인문학적 소양과 학업성취도> 2강 감성교육 학업성취도 - 2014.6.5
감성교육과 학업 성취도
2014년 6월 5일(목)
▣ 감성과 이성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착한 존재가, 사람의 손에서 모든 것이 타락한다.’
루소가 ‘에밀’ 첫 줄에서 기술하고 있는 선언이다. 그는 ‘사회제도와 정치제도, 그리고 교육’이 인간의 본성을 왜곡한다고 지적했다. 루소가 추구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자연인’이다. 그가 말하는 자연인이란 방치된 상태의 인간이 아니라 ‘감성’과 ‘이성’이 순차적인 발달과정에 따라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제대로 교육받은 인간을 말한다. 그는 진정한 자연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단계적으로 조화시키는 과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에 따르면 아동기에는 ‘감성교육’, 그 이후 소년기, 청년기까지는 ‘이성교육’에 중점을 둬야 한다. 감성과 이성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선후의 문제이다. 감성은 이성의 발달에 전제되는 기초이고, 이성은 감성의 성숙단계이기 때문에 둘은 필연적인 협력관계에 있다. 또한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적호기심을 자극하여 진리 추구의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는 틀에 박힌 교육을 거부하고 개인의 잠재력과 개성을 그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광기에 가까운 논술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적이 있었다. 차가운 이성과 논리는 범람하는데 섬세한 감성과 뜨거운 감동, 온몸을 전율하게 하는 도취는 없었다. 독서의 즐거움과 작품 읽기를 통한 감동을 맛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딱딱한 논리와 형식적인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논술지도는 가능성의 총체인 아이들을 정서적인 불구자로 만들 수 있다. 논리의 근저에는 풍부한 감성이 있어야 한다.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우리 아이들은 한 작품을 깊이 있게 읽으며 진한 감동을 체험하기 보다는 요약집을 통하여 여러 작품의 줄거리를 암기하도록 강요받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독서에 무슨 감동이 있고 즐거움이 있겠는가. 논술시험 따위는 염두에 두지 말고 좋은 글을 즐겁게 읽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가슴 뭉클한 감동과 도취를 경험하지 않으면 그 어떤 합리성과 논리의 추구도 결국에는 피로와 권태로 이어진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글을 읽고 몸과 마음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이는 작품 감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감동과 감성은 논리나 이성보다 깊고 긴 여운을 남긴다. 논술 지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루소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감성에 의해 이성은 완성된다.’
▣ 상상력과 국가 경쟁력
아난트 인도공과대학 총장이 지난 2월 서남표 KAIST 총장과의 대담에서 ‘상상력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아시아 인재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다. 서양의 과학은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정리해서 모델을 만들어 실험하고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서양의 방식은 너무 오래 세계를 지배했다. 아시아는 서양에 부족한 직관(intuition)이란 게 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상상력이다. 그런데 아시아에서는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자제시키면서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 여기에 보다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상상력을 강조했다. ‘아시아 사람들은 서양에 의해 이미 증명돼 있는 문제를 쫓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문제를 찾고 그것을 풀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 우리가 발전시키고 싶은 것, 그리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에서 학문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서남표 총장이 덧붙인 말이다.
미래학의 대부로 불리는 짐 데이토 하와이 대학 미래전략센터 소장은 정보화 사회 다음에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가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 드림 소사이어티에서는 이미지(image)와 이야기(story)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이미지의 생산․결합․유통이 경제의 뼈대를 구성하며, 거기에 감성적 스토리가 덧붙여질 때 새로운 부가 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꿈과 이미지에 의해 움직이며, 경제의 주력 엔진이 정보에서 이미지로 넘어가고, 상상력과 창조성이 국가의 핵심 경쟁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포장하여 수출하는 한류(韓流)는 한국이 드림 소사이어티 1호 국가임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안대회 교수의 저서 ‘선비답게 산다는 것’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 보자. 조선시대에는 어린이가 쓴 한시를 동몽시(童蒙詩)라고 불렀다. 광해군이 신임하던 무인(武人) 박엽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어느날 등불을 켜라고 하고는 손자에게 시를 한 번 지어 보라고 했다. 박엽이 즉석에서 시를 지었는데 한 구절만 남아 전해진다. ‘등불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밤은 밖으로 나가네(燈入房中夜出外)’ 안 교수는 소년의 깨끗한 영혼이 빚어낸 자연스러우면서도 재치 있는 표현에 감탄하며 어린이에게는 죽은 것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직관력과 상상력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완성된다. 어린 시절 약한 뿌리는 나중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동심과 시심(詩心)은 그 뿌리를 튼튼하게 살찌우는 최고의 자양분이다. 대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많이 느끼고 다양하게 체험할 때 동심과 시심은 활력을 유지한다. 죽은 것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창조자를 밀실에 가두고 타고난 상상력을 질식시키는 행위는 개인과 국가의 미래를 죽이는 폭거이다. 쉴 새 없이 학원으로 내몰리는 어린 영혼들이 너무 안쓰럽다.
▣ 모국어와 창의력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카이스트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학생과 교수의 자살은 우리 교육 전반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학점이 낮은 학생들에게 수업료 일부를 내게 하는 ‘차등등록금제’는 대학 생활의 낭만과 즐거움을 빼앗아갔고 무한 경쟁만 남겼다. 일부 학생들은 전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영어 강의 수업’이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영어 강의는 교수와 학생의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전달도 안 되는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절규했다.
제18차 세계언어학자대회에서 옥스퍼드대학의 S.로메인 교수는 ‘국제화하는 세계 속에서 언어의 권리, 인간의 발전, 언어의 다양성’이라는 주제 발표를 하면서 “인간은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언어는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 언어의 유지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며, 한 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복리 증진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언어의 다양성은 중시되어야 한다.”고 했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가 인간의 생존 기반 자체를 위협하듯이, 언어 다양성의 감소 또한 인류 전체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빈곤하게 하여 인류 역사를 퇴보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카이스트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중국사도 동양철학도 일본어도 영어로 배운다. 딱 한 번 한국어로 강의를 받아본 적이 있다. 보강수업이어서 가능했다. 너무 잘 알아들을 수 있어서 혁명적이었다.”라고 했다. 게시판에는 “영어 강의를 한 번도 이해해 본 적이 없다.”는 글도 올라와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만큼만 사유한다는 말이 있다. 언어는 한 인간의 세계관, 사고의 깊이와 넓이까지도 규정한다.
과학적 발견이나 창조, 문학적 영감은 서로 같은 정신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이론이나 문학작품은 먼저 직관적으로 느끼고 그 다음 표현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과학이든 문학이든 최초의 직관은 대개의 경우 모국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어떻게 동양철학을 영어로 이해하고 느껴야한단 말인가. 참으로 놀랍다. 인간은 언어행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불렀다. 모국어로 사고하고 느끼는 과정을 박탈당한 카이스트 학생들은 존재의 집을 잃고 방황하다 자살까지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은 모국어를 매개로 할 때 가장 예민한 문화적, 정서적, 심리적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모국어를 잘 하는 것이 고급 영어를 습득하기 위한 필수조건임을 알아야 한다. 젊은 날 모국어를 통해 풍부한 감수성과 표현력을 배양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 경쟁력을 기르려면
고2 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진로 상담을 받으러 왔다. 장래 희망이 의사라고 했다. 현재로서는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 찾아 왔다고 했다. 학교생활과 공부가 즐거운지 등을 물었다. 그런대로 견딜만하다고 했다. 또 질문이 없느냐고 묻자, 자기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의사가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미래에 성공하려면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간혹 가슴이 터질 정도로 답답한 때가 있어 힘이 든다고도 했다.
좋은 의사, 병원 경영에 성공하는 의사가 되려면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의사도 서비스업 종사자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서비스 정신을 기르지 않으면 실력이 뛰어난 의사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예방과 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을 것이다. 치료보다는 의사와 대화하고 상담하며 위로받길 원하는 환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실력은 기본이고 사람을 설득하고 감화시킬 수 있는 섬세한 감성이 최종적인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고객들은 상품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동을 받아야 가까이 다가간다. 사람을 가까이 다가오게 하려면 권위적인 태도를 버리고 친절하고 겸손해야 한다. 가식이 사라지고 알맹이만 남는 시대가 이미 도래 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을 하여야 한다. 젊은 날 전공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식의 폭을 넓혀야 한다. 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는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라고 말했다. 자연 과학도가 인문학적 교양과 예술적 감성을 가질 때, 인문․사회과학도가 자연 과학의 주요 흐름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이 학생은 공부는 잘 하고 있으니 더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F.베이컨의 ‘독서는 완성된 사람을 만들고, 담론은 기지 있는 사람을 만들고, 작문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과 함께 몇 권의 책을 추천해 주었다. 가슴 속의 답답함은 여행으로 치유될 것 같았다. 여행의 진정한 기쁨은 새롭게 접하는 경치가 아니라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즐거운 기분이다. 출발할 때의 가슴 설레는 기대와 밤의 휴식이 주는 평화와 내적 충만함은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긴 대화를 요약하며 운동과 독서, 비록 짧지만 여행을 해 보라는 충고를 했다. 학생의 눈은 반짝거렸지만 어머니는 다소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 청소년기와 여가 선용
‘필연은 문명의 어머니이고, 여가는 문명의 유모’라고 토인비는 말했다. 서구식 의미의 ‘여가(leisure)’는 희랍어 스꼴레(Schole)와 라틴어 리께레(Licere) 등이 그 어원이다. 스꼴레는 ‘여가, 학술토론이 열리는 장’이란 뜻이며, 후에 영어의 학교(school), 학자(scholar)로 바뀌었다. 리께레는 ‘허락되다, 자유스러워지다’란 뜻으로 현대적 여가의 어원이다. 스꼴레는 강제력 없이 자기 교양을 높이려는 진지하고 적극적인 지적․문화적 창조 활동을 의미한다. 두 어원이 말해주듯이 여가란 단순히 남는 시간, 혹은 쉬는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 학습, 자유, 예술 등을 포괄하는 매우 폭넓은 의미를 가진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안정을 유지했지만 제국을 얻자마자 붕괴되고 말았다. 그들은 평화가 가져다주는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들은 전쟁훈련 이외는 다른 것과 더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훈련도 받지 못했다. 전쟁을 목적으로 삼는 국가의 대부분은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만 안전하다. 그들이 제국을 세우자마자 붕괴되고 평화 시에는 사용하지 않는 칼처럼 그들의 예리한 기질을 상실한다. 입법가는 여가를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은 데 대해 비난받아야 한다.’ 신득렬 교수의 최근 저서 ‘행복의 철학’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스파르타의 정치체제와 교육제도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나가고, 학교 수업 마치자마자 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하고, 다시 돌아와 새벽 1시 너머까지 책상 앞에서 버티고, 네다섯 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학교에 가는 우리 아이들. 대부분의 가정은 입시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에만 안전하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던 형식적인 대화와 예리한 긴장은 상실하게 된다. 부모는, 특히 어머니는 심한 허탈감이나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진정한 대화를 경시하고 여가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은데 대해 비난 받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수험생이 있는 가정의 상황으로 바꿔 본 것이다.
스파르타는 비옥한 농토 때문에 다른 도시국가들보다 부유했다. 그러나 여가 선용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 대부분의 가정은 예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체계적인 여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소양과 인문적 교양이 결여된 상태로 대학에 입학한 후, 별 죄의식 없이 방종과 퇴폐에 빠져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시간과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에 의해 공동체의 질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가는 교양의 기초’라고 했다. 5월이 가기 전에 온 가족이 함께 각 가정에 맞는 여가 선용 방법을 찾아 실제로 실행해 보자. 청소년기에 여가 선용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어른이 되고나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버지니아 울프의 학습 방법
영화관에서 슬픈 장면이 계속 이어지자 앞좌석에 앉은 어느 아저씨가 남에게 들릴 정도로 훌쩍인다. 그 뒤엔 젊은 부부가 앉아 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그 아저씨를 가리키며 여자에게 속삭인다. ‘좀 모자라는 바보 아냐? 사내가 영화를 보며 울다니.’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완전히 몰입하여 진정으로 주인공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바보인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 바보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슬픈 장면을 보고 같이 슬퍼할 수 없는 사람은 정서적인 불구자라고 할 수 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는 캐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 당대의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영국인명사전’의 초대 편집장이었으며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했다. 울프의 아버지는 날카롭고 명징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학문적으로 눈부신 성취를 이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터번스타인 부부는 그들의 공저 ‘생각의 탄생(에코의서재)’에서 울프의 아버지는 위대한 문학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남긴 것은 무미건조한 분석적 비평이 전부였다고 지적한다. 울프는 자기 아버지 스티븐을 분석․비평 능력과 창작능력이 일치되지 않는 불행한 지식인으로 평가했다. 울프의 아버지도 자신이 이류 지성인에 불과하다고 딸에게 고백하곤 했다. 울프는 아버지가 받은 캐임브리지의 교육이 두뇌만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하여 정신은 불구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캐임브리지의 가혹한 교육은 음악, 미술, 연극, 여행 같은 여가활동에 심각한 결핍증을 가져왔고, 그 결과는 지적 편중과 좁은 시야였다는 것이다. 주입식 공부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울프의 아버지는 훗날 캐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된 후에도 학생들에게 항상 시험만 생각하고, 책에만 매달리며, 졸업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즐기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분석하고 종합하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창작하고 창조하는 능력에서는 좌절감을 느낄 정도였다.
아버지보다는 훨씬 괄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작가보다도 모험적이고 창의적이었던 울프는 대학에 갈 수 없어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집에서 독학하며 폭넓게 종합적인 방법으로 학습했다. 아버지를 통해 월터 스콧, 제인 오스틴, 윌리암 셰익스피어 등의 고전 작품을 접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자연사 박물관에서 보냈고, 잠들기 전에는 형제들과 함께 지어낸 이야기를 가족신문에 싣기도 했다. 울프는 책을 읽을 때 등장인물에게 완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으며 종종 자신을 잊고 그들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공부하며 편협한 분석능력만을 키운 아버지의 한계와 진부함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학습 경험이 몸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울프 부녀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미래는 예민한 감수성과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사회이다. 단편적인 지식을 맹목적으로 암기하는 것으로는 경쟁력이 없다. 어떤 일에 집중하고 몰입하며 깊게 젖어들어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배양해야 한다. 영화관에서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 정서적 공감대 만들기
자녀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돈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투자에 비례하여 기대하는 바를 성취하고 있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모들이 고개를 흔들고 있다. 많은 부모들은 바친 시간과 돈과 노력에 비례하여 그만큼 허탈감도 커진다고 푸념한다. 심지어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도 위기를 느낄 정도로 힘들다고 고백한다.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가정도 많다. 자식에게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면서도 왜 이런 서글픈 결과를 얻게 되는가? 자녀 교육 전문가들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된다고 말한다. 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지적, 인격적 성장을 위해 정서적 공감은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 부모와 자식이 추억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본다.
▶ 일상을 공유하는 지혜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거의 모든 것을 바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자녀에게 투자하는 돈과 관심은 분명히 예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진정한 정서적 교감은 줄어든 가정이 많다. 각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는 경제적 지원만해주면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부응하여 공부만 열심히 해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모의 수고도 모르고 주변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도 없이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한다. 자녀가 기대만큼 공부를 하지 못할 때 부모는 물질적으로 제공해 준 것만 생각하며 아이에게 온갖 악담과 실망의 말을 퍼붓는다.
영국의 어느 연구소는 부모와 특히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집 자녀가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 놓은 적이 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은 물론이고 정신적, 정서적 성장과 관계되는 일들도 가정 밖에 맡겨 버리는 경향이 있다. 요즈음은 학원이 자녀의 학습은 물론이고 생활지도까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고 모든 것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한 가족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부를 떠나 부모 자식 간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이벤트가 많아야 한다. 다양한 가족 이벤트는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해 준다. 부모와 자녀가 육체적,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특별한 계획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다.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생활 속에 그 모든 해답이 있다.
▶ 사례1-자연속에서
A씨는 범물동에 사는 주부이다. 첫째는 딸인데 의예과 2학년이고 둘째는 아들인데 고1이다. 아버지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첫째가 고3일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 가족은 지금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용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이유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늘 가족과 함께한 산행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둘째와 함께 매주 일요일마다 동네 앞산인 용지봉에 오르면 자신과 아이는 남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며 늘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A씨의 남편은 첫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2 겨울까지 매주 일요일이면 가족과 함께 용지봉 산행을 했다. A씨 가족들은 산을 오르면서 봄부터 겨울까지 용지봉 주변의 야생화를 관찰했다. 노루귀, 깽깽이풀, 현호색, 할미꽃, 양지꽃, 은방울꽃, 뻐꾹채 등등의 야생화들이 언제 어느 비탈에서 피는지를 함께 기록했다. 해마다 은방울꽃이 만개할 때면 친구 가족들을 초대하여 봄꽃 축제를 벌이곤 했다.
물론 시험이 임박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함께 가지 못했지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같이 산행을 하려고 노력했다. ‘동네 앞산을 올라가는 것은 여러 면에서 좋습니다. 우선 돈이 들지 않습니다. 김밥은 집에서 만들어서 가고, 사정이 있어 준비를 못했을 경우 동네 앞 가게에서 사면됩니다. 쉴 때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가파른 곳을 오를 때면 손을 잡고 끌어 줍니다. 그런 스킨쉽을 통해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 대화의 단절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게 어떤 상태인지 궁금합니다.’ A씨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행복한 추억에 잠기는 것 같았다.
병이 악화되어 움직일 수 없을 때도 남편은 아이들에게 산행을 권했다. 남편은 평소 ‘자연을 보라. 그리고 자연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가라.’고 한 루소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A씨는 세상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학교생활이 어렵고, 인간관계가 힘들 때 산행을 하면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많은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A씨는 많은 부모들이 한 치 앞만 바라보고 여유 없이 생활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자녀들과 함께 자연속으로 나가보라고 권한다. ‘남편은 일찍 아이들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렵지만 별로 내색하지 않고 자기 일을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는 가슴 뭉클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산이나 들로 나가면 열리는 마음 문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 사례2 -책과 함께
P씨는 중3 아들과 중1 딸을 가진 전업주부이다. P씨 가족은 남편이 봉급을 받는 그 주 일요일면 어김없이 서점에 간다. 결혼하던 해부터 지금까지 17년간 계속 남편이 봉급을 받는 주일엔 서점에 간다고 한다. 특별한 동기가 있느냐고 묻자 고1 때 국어 선생님 때문이라고 했다. P씨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가르친 교과 내용은 다 잊어버려도 괜찮다. 다만 이것만은 꼭 기억해다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 봉급날 쌍칼 들고 고기 썰며 외식하는 것을 여자의 행복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서점에서 만나 시집 한 권, 문예지 한 권이라도 사서 함께 읽을 수 있는 부부가 되어라. 아내가 현명하고 교양이 있을 때 자녀는 절로 잘 자라게 되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가 품위 있게 발전할 수 있다.’
아이들이 없을 때는 주로 베스트 셀러류를 사서 읽었는데 아이가 생기고 성장하면서 아이 중심으로 책을 사게 되었다고 말한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온 가족이 함께 읽을 책을 샀다고 말한다. 독서 지도사 과정에도 등록하여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이들의 독서지도를 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읽은 책의 독후감을 간단히 적어 기록 한다고 말한다. 전에는 부모가 정한 책을 읽게 했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보자는 책을 많이 읽게 된다고 한다. 그 덕에 아이와 함께 판타지 소설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부모와 아이들이 각각 한 권씩 선정하기로고 타협했다고 한다. P씨는 말한다. ‘아이들과 함께 서가에서 책을 선택하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함께 책을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한 지적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 공동의 책을 선정하기 위해 신문 서평을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 사례3 - 함께 식사하기
N씨는 현직 교사이다. 3년 전에 처제가 같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유는 처조카가 다소 의지가 약하고 공부에 열의가 적어 교사인 N씨의 지도와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N씨는 아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학습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먼저 아이의 성격을 파악해야 했다. 처조카는 자존심이 강하여 남이 충고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지도 않았다. N씨는 아내와 역할을 분담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처조카를 한 달에 두 번 정도 N씨 집에 초대하여 같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모는 조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조카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모에게 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은 이모와 같이 시장에 가기도 했다. 시장을 오가면서 이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때 이모는 조카에게 공부 이야기는 하지 않고 무한한 애정과 관심만 보여 주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식탁에서 N씨도 공부와 관계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친해지고 나자 아이는 자발적으로 공부와 관련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N씨는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충고와 지도를 해 주었다. 처조카는 고3 때도 NL 집에서 주기적으로 식사를 함께했다. 아이에게 이모집은 새로운 에너지와 활력을 얻는 재충전의 원천이었다. 중학교 때 전교 50등정도 하던 아이가 고3 때는 전교 10등 안에 들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바라는 대학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N씨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도법을 ’식사요법‘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요즈음은 각자가 너무 바빠 한 자리에 앉아 같이 식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 부모 자식 간에 대화도 단절되고 서로 의사소통도 되지 않습니다. 같이 음식을 준비하고 즐겁게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면 그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 속 아이를 한번 보세요
“시험도 못 친 주제에 어딜 간단 말이냐? 보충수업 마치고 오후에 학원 한군데 더 다닐 생각이나 해라. 죽도록 공부해도 다른 아이들 따라 잡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녀석이 무슨 헛소리냐? 아예 놀 생각 따윈 하지 말아라.” 기말시험 마치던 날, 방학하면 친구들과 사흘 정도 바다로 캠핑하러 가게 해 달라는 아들의 간청에 아버지가 내뱉은 말이다. 이렇게 윽박지르는 아버지, 당신은 완전한 모범생이었는가?
대부분 아버지들은 학창시절 바닷가 솔밭에서 친구들과 야영한 경험이 있다. 좁은 텐트 속에서 여러 명이 다리를 포개어 잠을 잤다. 해거름 낙조의 풍경에 잠기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어느새 새가 되어 있었다. 갯바위에 앉아 시집을 읽다가 잠시 눈을 들어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 낸 해송을 바라보면 스스로 멋진 소나무가 되는 느낌도 받았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어린왕자가 되어 우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한없이 게으름을 부리면서 별과 바람과 나무와 바다와 일체가 되어 본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으면 책 속에 몰입하는 것이 그 전보다는 훨씬 더 쉬웠다.
감정이입의 본질은 다른 사람, 다른 것이 되어 보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자 칼 포퍼는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공감각적인 직관’,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했다. 또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라고 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쓴 ‘생각의 탄생’에는 감정이입에 탁월했던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예가 많이 나온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는 “작가는 묘사하고 있는 인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작업 중에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물이 될 때까지 계속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나무를 묘사하고 싶으면 스스로 나무가 되어야 한다.
훌륭한 의사는 감정이입을 통해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한다. 의사 스스로 환자가 될 때 환자는 마음의 문을 열고 진단과 치료에 필요한 모든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의사는 자신이 의료기술자가 아니라 환자에게 보살핌과 배려를 해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에모리 의대의 존 스톤 교수는 “문학은 젊은 의사들이 적절한 감수성을 갖도록 해주고,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심지어 자신이 환자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스스로 환자가 되어보는 능력 유무가 뛰어난 임상의와 그렇지 않은 의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사냥에 성공하려면 사냥감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녀를 제대로 지도하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아이가 되어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건강한 어른의 내면에는 건강한 아이가 있다.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아이의 눈높이로 내 아이와 마주할 때 모든 대화에서 수용과 경청은 가능하다.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먼저 아이와 유대감과 신뢰감을 형성한 뒤, 바람직한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준다. 아이의 감정과 욕망을 무시하고 방치하거나 억압하면 그 감정과 욕망은 더욱 격해지고 뒤틀리게 된다.
“그래,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 실컷 놀다 오너라. 가볍게 읽을 책은 한 권 가져가거라. 아빠는 고2때 계곡으로 캠핑 갔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떠내려 갈 뻔 했단다. 그날 어디서 모이니? 아빠가 데려다 줄게.” 아빠가 공감하고 지지해 줄 때 아이는 더 다양하고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자연과 문학은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가동시킬 수 있는 풍부한 자원과 기회를 제공한다. 곧 방학이 시작된다. 잠시나마 아이들에게 방학을 돌려주자. 이게 바로 미래를 위한 투자임을 아버지, 당신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엄마의 방’이 있습니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꿈 많았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갑니다. 당신은 집에서 아이들만 잘 키우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당신은 나의 수고와 절망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 수중엔 돈 한 푼 없고, 내 귀에서는 늘 환청이 들립니다. 나는 힘들 때 친정 어머니 산소 외에는 혼자 마음껏 울 수 있는 장소조차 없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어느 여인이 일기장에 적은 유서의 첫 머리이다. 우연히 유서를 훔쳐본 남편이 아내에게 무심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아내를 입원시켜 놓고 조언을 구하러 필자를 찾아왔다. 필자는 그 유서를 읽으며 불현듯 버지니아 울프와 ‘자기만의 방’을 떠 올렸다.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소설 ‘세월’을 탈고한 후 1941년 3월 어느 날, 주머니 속에 돌을 채우고 오즈 강물에 몸을 던진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유서의 첫 부분이다.
앞의 유서는 남편과 자녀와 자신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고, 뒤의 유서는 유년의 상처를 이해해 준 남편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시작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시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 모두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생각하며 유서를 썼다.
버지니아 울프는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쓴 곳은 그녀만의 공간에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울프는 오스틴이 그 대작을 가족 모두가 함께 기거하는 공동거실에서 집필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억압받는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자기만의 방’에서 만약 여성이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두 가지 열쇠만 찾을 수 있다면 미래에는 여성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열쇠란 ‘고정적인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투표권과 돈을 선택하라고 하면 돈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돈이란 사람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며, 가난으로 인해 생긴 분노를 없애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권 신장이 남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는 21세기에도 한국의 여성은 가사와 자녀교육이 주는 그 모든 부담을 감당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힘겹다. 남자는 남자대로 이 불황에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바깥에서 얼마나 악전고투하는지 처자식은 모른다고 항변할 것이다. 서로의 어려움만을 주장하며 일방적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부와 자녀 모두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같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엄마들은 자신이 자녀와 남편의 몸종이 된다고 그들이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맹목적으로 가족의 몸종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할 때 남편과 자녀는 더 행복해 질 수 있고, 자신의 존재감이 더 강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행복’에서 연인 시절의 사랑은 세월과 더불어 다른 형태로 변한다고 말한다. 연애시절의 낭만적 열정이 평생 유지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남편은 “이제 우리는 조금만 옆으로 비켜서서 각자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거야.”라고 말한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도록 서로에게 자유로운 여지를 주는 것이 부부가 추구해야 할 사랑법이라는 것이다. 부부 사이만 그렇겠는가.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가능하다면 가족 구성원 각자는 자기의 방, 자기만의 여지를 가지는 것이 좋다. 엄마도 엄마의 방을 가져야 한다.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홀로 머물며 자신을 성찰하고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정신적 독립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남편과 자녀는 엄마의 수고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엄마의 방’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온 가족이 함께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