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인문학 강좌 3강 용기: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 - 20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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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인문학 강좌 <희망을 주는 현대명저산책> 3강 용기: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 - 20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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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

들어가며

오늘 소개할 책은 신학자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라는 책입니다. 불안의 문제를 철학적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한 명저로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현대의 고전입니다. 불안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책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이라는 책인데, 틸리히의 책은 『불안의 개념』에는 못 미치지만 『불안의 개념』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영향력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생애

먼저, 저자인 폴 틸리히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폴 틸리히는 1886년 독일 슈타체델(Starzeddel)에서 (나중에는 감독이 된) 루터 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몇몇 대학에서 공부했고, 1911년에 셸링(Schelling)의 긍정철학(Positive Philosophy)에 관한 학위논문을 작성하여 브레슬라우(Breslau)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동안에 군목으로 봉사했다. 종전 이후에 그는 베를린 (Berlin)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마르부르크(Marburg), 드레스덴(Dresden), 그리고 라이프치히(Leipzig)의 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29년에 그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틸리히는 매우 광범위한 철학적, 신학적, 정치적 주제들에 대하여 글을 쓰고 강의를 했습니다. 이 시절 그의 놀라운 생산적 활동의 거의 절반은 종교사회주의 운동(Religious-Socialist movement)에 바쳐졌습니다. 나치(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감을 내포하고 있던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그는 대학에서 해고당했고, 어쩔 수 없이 독일을 떠나야 했습니다.
  
1933년 독일을 떠난 직후 틸리히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초청을 수락했고,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 교수가 되어 1955년까지 그 직위에 남아 있었습니다. 틸리히는 47세에 영어를 배워 마스터 하되, 신학과 철학의 고도의 추상적인 관용어들을 창조적으로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을 정도까지 마스터 했던 것입니다! 이제 미국 시민이 된 틸리히는 여러 가지 글을 쓰고 다양한 대중연설을 하는 것을 통해 미국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종종 강의를 위해 독일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대공로 십자훈장(Grosse Verdienstkreuz)이나 최근의 독일 출판인 평화상(German Publishers Peace Prize)과 같은 최고의 명예로운 상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틸리히는 10개 이상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55년 유니온 신학교 은퇴 이후, 그는 하버드 대학 석좌 교수직(University Professor)이라는 최고의 자리를 얻었고, 1962년에는 시카고 대학에서 그를 위한 특별한 직위가 주어졌습니다.

틸리히는 문자 그대로 수백 편의 논문과 2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물론 이 중 가장 중요한 책은 3권으로 된 『조직신학』입니다. 그의 『프로테스탄트 시대』(Protestant Era)와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는 가장 유명하고 널리 읽힌 책입니다. 그와 더불어 『흔들리는 터전』(The Shaking of the Foundation)이나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와 같은 그의 설교를 담은 소책자 두 권도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책입니다. 이 설교집들이 그의 사상을 대중화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고, 그로 하여금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존재의 용기』는 불안을 깊게 고찰한 책입니다.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병리적 불안과 실존적 불안을 구분합니다. 병리적 불안은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실존적 불안, 달리 말하면 존재론적인 불안은 정신의학의 차원에서 극복될 수 없습니다. 실존적 불안은 존재의 힘을 통해서만 극복됩니다.

틸리히의 불안 이론은 그의 존재론의 핵심 개념들인 존재(being), 비존재(non-being) 그리고 존재 자체(being itself)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때 비로소 이해가능합니다. 먼저 존재와 존재 자체의 구분을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존재라는 것은 존재하는 사물을 가리킵니다. 반면, 존재 자체는 사물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존재 자체는 무한한 존재도 가장 탁월한 존재도 아닙니다. 존재 자체를 존재를 확장한 무한한 존재나 존재 중 최고의 존재로 간주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존재 자체를 존재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는 무한이나 유한을 모두 넘어서 있습니다. 틸리히는 존재 자체를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 존재의 힘, 그리고 신이라고 부릅니다.
  
비존재라는 말은 그 어원에서 암시되듯(non-being) 존재를 전제합니다. 존재는 비존재에 선행합니다. 황민효, 폴 틸리히의 신학 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8), 232.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와 변증법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존재 뿐 아니라 비존재도 존재 자체로부터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는 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포괄합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대립되지만 모두 존재 자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재 자체는 존재와 비존재를 포함하는 포괄자입니다.
  
존재가 비존재와 항상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존재가 비존재에 의해서 제한되는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는 원치 않아도 자신의 유한성 때문에 비존재와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틸리히는 유한성의 자각과 불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서 유한성의 자각은 불안을 의미한다. 유한성처럼 불안은 존재론적인 특질이기 때문에 유추될 수 없다. 불안은 오직 보여 지고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불안은 어떤 계기 속에서 발생하는데 이 계기와 불안 자체는 구별되어야 한다. 불안은 존재론적인 특질로서 유한성처럼 편재하고 있다. 불안은 그것을 생산할 수 있는 어떠한 특별한 대상에 의존하고 있지 않고 오직 비존재의 위협에만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비존재의 위협은 유한성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안의 대상은 무이고 무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옳게 말한 것이었다. 반면에 대상은 두려움을 주고 있다. 위험과 고통과 적은 두려워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은 행동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유한한 존재도 그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은 극복될 수 없다 Tillich, 조직신학Ⅱ, 59-60.


틸리히는 불안은 유한성의 자각이며, 대상이 비존재이며 그래서 비존재의 위협과 유한성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안은 이렇게 존재론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편재적이며 어떠한 유한한 존재도 불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비존재와 필연적으로 마주칠 때 이러한 필연적인 마주침에서 오는 충격을 틸리히는 “비존재의 충격”(shock of nonbeing)이라고 부릅니다. P. Tillich, 조직신학Ⅱ, 51.
불안이란 사실 이러한 비존재의 충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은 일차적으로 존재가 비존재의 충격을 통해서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 비존재의 충격이라는 사실은 불안에는 대상이 없다는 사실과도 맞물립니다. 임경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cih)의 ‘죽음불안개념’에 대한 기독교 상담신학적 통찰,” 246.
공포에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에는 대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안의 대상은 무, 즉 비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비존재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즉 존재론적인 비존재(ontic non-being), 영적인 비존재(spiritual non-being), 도덕적인 비존재(moral non-being)가 있습니다. 정성민,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인천: 도서출판 바울, 2004), 35.
이러한 세 가지 비존재가 인간을 위협하는 유형은 역시 세 가지입니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죽음불안), 공허함과 의미 상실의 불안(무의미의 불안),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정죄의 불안).

비존재의 세 가지 유형과 그 위협으로서의 불안

비존재의 유형
존재론적인 비존재
영적인 비존재
도덕적인 비존재
불안의 유형
운명과 죽음의 불안
공허함과 의미상실의 불안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
극단적 형태
자살
절망
자기부정

  
유한한 존재는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의 비존재에 노출되어 세 가지 유형의 불안으로 고통 받습니다. 문제는 존재가 비존재의 위협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틸리히에 의하면 존재가 불안, 즉 죽음 불안, 의미상실의 불안, 정죄의 불안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비존재의 유형 가운데 죽음불안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측면입니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은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며 도저히 피할 수 없다.” Tillich, 존재의 용기, 77.
운명이 “상대적인 위협”이라면 죽음을 “절대적인 위협”입니다. 죽음불안이 틸리히의 불안 이론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이 죽음불안이 존재론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죽음의 위협은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곳에서도 불안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의 주장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비존재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하여 이끌려가는 우리 경험의 배후에 단 한 순간의 단절도 없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실존의 위협과 불안정의 배후에 서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 안에 있는 존재의 힘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공격 - 나약함과 질병과 사고 등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 의 이면에 위치한다. 이러한 모든 모습 속에서 운명은 자기 자신을 현실화하고 비존재의 불안은 그러한 현실적인 양상들을 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다.” Ibid., 80.


틸리히에 따르면 비존재의 위협은 오직 존재 자체이신 신에 의해서만 극복가능힙니다.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이 비존재를 극복하는 과정에 대해 전성민은 틸리히의 말을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틸리히는 주장한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님은 비존재를 포용한다. 비존재는 존재 그 자체 안에 품어지면서 결국 하나님의 삶의 과정 안에 영원히 극복된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의 하나님은 절대적인 비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존재의 전적인 위협을 낳게 되고, 또한 이 비존재의 위협은 노출된 무방비의 불안(naked anxiety)을 낳게 된다. 만약에 하나님이 절대적인 비존재라면 이는 하나님과 비존재의 위협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비존재의 위협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비존재에 관련된 존재적인 문제, 즉 인간 유한성의 해답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틸리히의 비존재 이해가 매우 포용적임을 알 수 있다. 즉 비존재의 절대적인 위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틸리히의 주장은 하나님을 악의 근원지로 만들게 된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의 신학은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론을 넘어선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틸리히의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선과 악을 품으며 또한 초월한다. 정성민,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38-39.


틸리히에 따르면, 불안은 절망에서 완성됩니다. 죄의식과 정죄의 절망은 여기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예를 들어, 운명과 죽음의 불안이 심화되어 운명과 죽음에 대한 절망의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 사람은 자살을 통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식과 정죄의 절망은 자살을 통해서도 극복되지 않습니다. 정성민,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60.
틸리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절망은 죄의식과 정죄로 인한 절망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존재론적 자기 부정으로도 벗어나지 못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살은 운명과 죽음의 불안에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깨달은 것처럼 자살이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에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죄의식과 정죄는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무한하다. 그것들은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존재론적인 자기 부정의 유한한 행위로 제거될 수 없다. Tillich, 존재의 용기, 89.


죄의식의 불안은 자살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무한한 불안이며 절망입니다.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에 대해 틸리히는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죄의 용서를 인정하는 용기”를 주장합니다. 여기에서도 틸리히는 일반적인 실존주의 심리학자들과 조금 다른 뉘앙스를 풍깁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거나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틸리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의 용기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타인은 “자기 정죄의 절망에서 경험되는 비존재의 근본적이고 무한한 위협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Ibid., 203.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은 바울과 루터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of faith)교리입니다. 죄는 무규범적인 삶이나 율법주의적인 삶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임경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cih)의 ‘죽음불안개념’에 대한 기독교 상담신학적 통찰,” 250.
이신칭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부정하시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절대적인 긍정을 포함한다는 역설적인 구조를 지닙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긍정입니다. 신이 절대적으로 긍정할 때 그 긍정의 근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 긍정은 존재 자체의 자기 긍정에서 유래합니다. 존재 자체의 자기긍정은 존재 자체가 비존재를 포함하고 항상 극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용납과 용서는 존재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틸리히는 용납됨의 근거는 신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용납은 의학적인 치료의 수준을 초월한다. 종교는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납함으로써 치유하는 힘의 궁극적인 원천, 즉 바로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나님이 용납, 하나님의 용서, 혹은 의롭게 하심은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자신 속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존재의 용기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원천이다. 왜냐하면 자기 긍정의 궁극적인 힘만이 존재 자체의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Tillich, 존재의 용기, 203.


  틸리히는 이와 같이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의 문제는 존재자체의 자기긍정인 신의 용서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이신칭의 교리를 존재론화한 것이며 실존적 죄의식의 극복을 위해 “너 자신이 되라”고 가르치는 실존주의 가르침과 구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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