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봄호 (통권 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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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문화

2015년 봄호 (통권 35호)

계간
시각과 문화
2015년 봄호 (통권 35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_ 이석규

Pops English
All for the love of a girl - Johnny Horton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己未獨立宣言書  이석규 편집

서평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_ 이태호

우리가 답사한 유적

8월 문화 기행을 다녀와서 _ 김미화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인 당사자의 의사와 선택을 존중해야 _ 김시형

인문학 강좌
엔도 슈사쿠의 종교 문학 _ 김재현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라는 성구가 있는데, 한국 지식인의 국어 사용 실태를 보면 이 말이 진리임을 실감하게 된다. 물리적인 구덩이, 즉 눈에 보이는 구덩이에 빠지면 인도하는 이나 인도받는 이나 빠진 줄이나 알지만, 정신적인 구덩이,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빠지면 인도하는 이나 인도받는 이나 빠진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 구덩이가 예사 구덩이가 아니라 무저갱(無底坑)인데도 말이다. 오도하고도 선도한 줄 알고 뿌듯해하고, 오도되고도 선도받은 줄로 생각하고 고마워한다. 이것이 대한 민국이다.
  대한 민국은 오래전에 전국민의 문맹화가 완료되었다. 대한 민국은 민주 공화국이 아니라 문맹 공화국이다. 초․중고교와 대학, 언론 기관, 입법․사법․행정 삼부,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계가 온통 문맹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교육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데도 공교육이니 사교육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온 국민이 문맹자들인데 문과가 어떻고 이과가 어떻고 한다든지 인문학의 붕괴니 기초 과학의 부재니 하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초․중․고등 학교에서는 ‘급식’을 ‘음식 공급’이라는 의미로는 쓰지 않고 ‘학교에서 먹는 음식’이라는 엉뚱한 의미로 쓰는 데, ‘급식을 먹는다’, ‘급식 조리실’, ‘급식 조리원’, ‘급식 조리 종사원’ 등이 그 예이다. 또, 초․중․고교에서는 ‘전교’를 ‘학교 전체’가 아닌 ‘학년 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날마다 쓰는 ‘전교 1등’이니 ‘전교 수석’이니 하는 말은 결코 ‘그 학교에 재학 중인 전체 학생 중에서의 1등이나 수석’이 아니라, ‘어느 한 학년 학생 중에서의 1등이나 수석’이다. ‘1학년 전교 1등’이니 ‘2학년 전교 수석’이라는 말에는 단어만 다를 뿐 의미상으로는 ‘학년’이라는 말이 두 번 겹쳐 쓰인 셈이다. 초․중․고교는 전국민 문맹화의 초석을 다지는 기관이다. 모국어 공부하는 방법은 가르칠 줄을 모르고 지속적으로 말 안 되는 말만 학동들의 뇌리에 심어 주니 이후의 교육 기관에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문맹화는 중단없이 탄탄 대로를 달린다.
  대학 입학 시험에는 ‘수시 모집’도 있고 ‘정시 모집’도 있는데, 사실은 둘 다 ‘정시 모집’이다. 왜냐하면 ‘수시 모집’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모집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 둘을 하나는 ‘정시’라고 하고 하나는 ‘수시’라고 하는 것이다. 정부라는 소경이 그렇게 인도하니 온 국민이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인도한 정부도 자신이 국민을 구덩이에 빠뜨린 줄을 모르고, 국민도 자신이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진 줄을 모른다.
  지식인들, 특히 교수들이 많이 쓰는 단어 중에 ‘자문’이 있는데, 이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문 서비스’, ‘자문료’, ‘자문을 해 주다’, ‘자문을 받다’, ‘자문을 구하다’, ‘자문을 의뢰하다’처럼 ‘조언을 구함’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조언을 함’의 의미로 쓰고 있다. 거의 모든 지식인이 제대로 쓰지 못하므로 가끔 제대로 쓰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용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대학 교수들은 초․중․고등 학교 교사들처럼 본인들이 소경이니 어쩔 수 없이 고급 인재가 아닌 불빛도 인식하지 못하는 전맹 양산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전국을 시청 범위로 하는 방송국의 뉴스에서 ‘발언의 진위 여부를 조사한다’와 같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말을 날마다 쏟아 낸다. ‘진위’라고만 하면 될 것을 ‘진위 여부’라고 ‘여부’를 덧붙여서 한층 권위 있고 유식한 말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이들 중앙 방송국의 5분짜리 뉴스를 듣고 잘못된 표현을 글로 적는다면 그 글의 분량이 5분짜리 뉴스를 적은 분량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모국어를 들을 귀가 없어서 보도 내용은 듣지 못하므로 아나운서나 기자의 얼굴이나 복장이나 신장밖에 보지 못한다. 문맹으로 학교를 나온 언론인들은 전국민에게 개안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도록 주야로 점점 더 깊은 구덩이로 인도하고 5000만 소경들은 고마워하며 언론 소경들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사전”의 두산백과의 ‘축사’항에는 “축사[bless, 祝辭]: 일반적으로는 축하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나 글. 그리스도교에서는 감사와 찬미, 감사기도.”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이는 ‘祝辭’와 ‘祝謝’ 두 단어의 풀이를 ‘축사(祝辭)’ 한 단어 안에 뭉쳐 넣은 것이다. ‘祝辭’에는 ‘축하의 말’이라는 뜻만 있고, ‘감사 기도’라는 뜻은 없다. 이 사전의 주석은 마치 ‘석수(石手)’에 “일반적으로는 ‘돌장이’, 그리스도교에서는 ‘돌로 만든 짐승의 상’”이라고 ‘석수(石獸)’의 뜻까지 포함시키는 것과 같다. ‘감사 기도’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祝謝’로서 성경에 나오는 축사는 모두 이 단어뿐이다. 이 항의 필자가 인용한 성구 다섯 절 모두에 ‘祝謝’만 있고 ‘祝辭’는 없다. 이 필자는 ‘祝謝’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까지 언급하고 있으나 이 단어의 한국어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성경을 우리말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히브리어까지 가르치고 사전 주석까지 집필할 수 있다. 모든 목사들과 신도들이 ‘구유’를 ‘마구간’이라고 생각하여 예수가 말구유에서 났다고 말하고 찬송가나 복음 성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다. 모국어의 기본적인 단어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정신적인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이들에게서 물욕을 키우는 것 외에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뉴스에서 ‘국민 참여 재판’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는데, 이 말은 ‘참심’을 순화한 말인 듯하나 이 참여 재판이라는 것에 참여하는 사람을 ‘배심원’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배심’을 순화한 것이 ‘국민 참여 재판’임을 알 수 있다. ‘배심’은 ‘참여 재판’으로 바꾸면서 ‘배심원’은 ‘참여 재판관’이나 ‘참여 재판원’이나 ‘참여 재판인’과 같이 ‘참여 재판’을 수행하는 사람을 연상할 수 있는 용어로 바꾸지 않아서 관련 뉴스를 여러 번 듣고도 ‘배심원’이 ‘참여 재판’과 관련 있는 사람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말을 지어 낸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이들은 사재를 털어서 불우 이웃을 구제한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국민에게 어려운 전문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어 주었다고 흐뭇해할 것이다. 자신의 재산으로 남을 구제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나, 순화라는 미명하에 용어를 함부로 바꾸는 것은 삼가고 또 삼가야 할 일이다. 용어를 쉽게 바꾸어 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이 도리이고 공부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후진에게는 공부를 하지 말고 육체 노동에 종사하라고 권하는 것이 인생의 선배의 의무일 것이다.
  역사학자는 ‘6․25 전쟁’을 ‘한국 전쟁’이라고 한다. 자신의 전통대로 자신들이 명명한 사건명을 쓰지 않고 영미인들이 ‘Korean War’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수입해서 자신의 천박한 영어 지식을 드러내려 하니 이런 사람에게서 주체적인 사관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학자가 미국 사람이 부르는 대로 1954년~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지속된 전쟁을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며, 중국인들이 미국인들이 부르는 대로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을 ‘중국 혁명(Chinese Revolution)’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종교 집단 중에서 ‘축복’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아마도 개신교도들일 터인데, 교역자나 평신도 중에 이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축복’은 ‘복을 빎’이라는 뜻인데, 1000만 신자가 하나같이 ‘복을 내려 줌’이라는 뜻으로 쓴다.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이 구절의 뜻은 ‘복을 내려 줌’이라는 뜻으로 보아야지 ‘복을 빎’이라는 뜻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말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복을 비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일개 잡신에 불과하게 된다. 개역성경에는 ‘축복’이라는 말이 100여 회나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잘못 쓰는 그러한 뜻으로 쓰인 것은 단 한 번도 없음에도 모든 개신교 신자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의미로 쓰인 구절을 읽고도 정반대의 뜻으로 이해한다.
  ‘인연’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불교도들일 것이다. ‘백팔 대참회문’이라는 글에는 이 말이 스무 번 나오는데, 단 두 번만 ‘관계’라는 의미로 제대로 쓰였고 나머지는 전부 ‘어떤 관계로 맺어진 사람’이라는 엉뚱한 뜻으로 쓰였다. 마치 ‘농사’를 ‘경작’의 뜻으로 쓰지 않고 ‘경작자’의 뜻으로 쓰는 것과 같다. 이 글을 쓴 사람이 공양주도 아니고 청소부도 아니고 불교 초심자도 아닌 유명한 승려라고 하니 그저 정신이 멍해질 뿐이다. 이렇게 말 안 되는 글인데도 낭독하는 성우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마음이 편안해져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을 연발할 사람들이 적잖을 것이다. 이 글의 영역본을 보면 한국인의 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를 짐작하게 된다. 글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바른 표현으로 고쳐서 번역해야 할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모든 지식인은 문맹자이며 소경이다. 장차 지식인이 되려고 이들 선배 지식인에게서 배우는 예비 지식인들이 어떻게 문맹 선배들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참으로 지식인다운 지식인들이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지만 수많은 개천에서 몇 천 년 만에 한 마리쯤은 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찌 모든 개천에서 용들이 벌떼처럼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망상이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다. 헛된 희망, 거짓된 칭찬과 격려는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을 애써 있다고 기만하는 것보다 낫다.

  Pops English

  All for the love of a girl - Johnny Horton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Well, today I'm so weary.
Today I'm so blue
Sad and broken-hearted.
And it's all because of you.
Life was so sweet, dear.
Life was a song.
Now you've gone and left me.
Oh, where do I belong?
And it's all for the love
of a dear little girl,
All for the love
that sets your heart in a whirl.
I'm a man who'd give his life
and the joy of this world
All for the love of a girl.
And it's all for the love
of a dear little girl,
All for the love
that sets your heart in a whirl.
I'm a man who'd give his life
and the joy of this world
All for the love of a girl.

오늘 난 몹시 지쳤어요
너무 우울하고,
슬퍼서 마음이 아파요.
이 모든 건 당신 때문이에요.
삶은 너무 달콤했어요, 그대여.
마치 노래와 같았죠.
이제 당신은 날 남겨 두고 떠나버렸으니
오, 난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이 모든 건 사랑스런
작은 소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에요.
당신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든
그 사랑 때문이에요.
난 한 소녀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내 생명과 이 세상의 즐거움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이 모든 건 사랑스런
작은 소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에요.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든
그 사랑 때문이에요.
난 한 소녀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내 생명과 이 세상의 즐거움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에요.

  Johnny Horton
  1927년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56년 데뷔 싱글 'Honky Tonky Man'을 발표 컨트리 차트 Top 10에 진입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9년 싱글 ‘The Battle of New Orleans,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발표하며 대형 컨트리 싱어 스타로 발돋음하게 된다. 싱글 'The Battle of New Orleans'는 컨트리 차트와 싱글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빅 히트를 하며, 자니 호튼에게 컨트리 음악과 팝 음악의 크로스 오버 가수라는 평을 듣게 했다. 1960년 공연후 귀가중 교통사고로 인하여 33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English Humor]
  A six - year - old boy walks up to his father one day and announced, "Daddy, I'd like to get married." His father replied hesitantly, "Sure, son, do you have anyone special in mind?" "Yes", answered the boy. "I want to marry Grandma." "Now, wait a minute" said his father. "You dont think I'd let you get married to my mother, do you?" "Why not?" the boy asked. "You married mine.“

  여섯 살짜리 꼬마가 어느 날 아빠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빠, 나 결혼할래요.” 아빠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그래라, 얘야. 누구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니?” “네, 할머니와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꼬마가 대답했다. “얘야, 잠깐만.”하고 아빠가 말했다. “설마 우리 엄마와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왜 안 돼요? 아빠도 우리 엄마랑 결혼했잖아요.”라고 꼬마가 반문했다.

  명시와 명문

  己未獨立宣言書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 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 箝制의 痛苦를 嘗한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 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ㅣ며, 心靈上 發展의 障礙됨이 무릇 幾何ㅣ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ㅣ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奇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ㅣ뇨.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 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 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 하면, 民族的 良心과 國家的 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 하면, 各個 人格의 正當한 發達을 遂하려 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苦恥的 財産을 遺與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의 永久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 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 獨立을 確實케 함이니, 二千萬 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 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 軍과 人道의 干戈로써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하매 何强을 挫치 못하랴. 退하야 作하매 何志를 展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 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얏다 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려 안이하노라. 學者는 講壇에서, 正治家는 實際에서, 我 祖宗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 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 ᄲᅮᆫ이오,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 하야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辯을 暇치 못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ᄲᅮᆫ이오, 決코 他의 破壞에 在치 안이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오, 決코 舊怨과 一時的 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안이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羈縻된 日本 爲正家의 功名的 犧牲이 된 不自然, 又 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 又 合理한 正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에 民族的 要求로서 出치 안이한 兩國倂合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 威壓과 差別的 不平과 統計數字上 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 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없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積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 안인가. ᄯᅩ 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써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안일 ᄲᅮᆫ 안이라, 此로 因하야 東洋安危의 主軸인 四億萬 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스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 全局이 共倒同兦의 悲運을 招致할 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야금 正當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야금 邪路로서 出하야 東洋 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야금 夢寐에도 免하지 못하는 不安, 恐怖로서 脫出케 하는 것이며, ᄯᅩ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ㅣ리오.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過去 全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 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의 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穌를 催促하는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ㅣ라 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ㅣ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蹰躇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할 것 업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 精華를 結紐할지로다.
吾等이 滋에 奮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幷進하는도다. 男女老少 없이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群象으로 더부러 欣快한 復活을 成遂하게 되도다. 千百世 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 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ᄯᅡ름인뎌.

公約三章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ㅣ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ᄭᅡ지, 最後의 一刻ᄭᅡ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ᄭᅡ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朝鮮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日

기미 독립 선언서

선언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하야 차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야 차를 포명함이며, 민족의 항구 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야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 병진하기 위하야 차를 제기함이니, 시이 천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 하물이던지 차를 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하야 유사 이래 누천년에 처음으로 이민족 겸제의 통고를 상한지 금에 십년을 과한지라. 아 생존권의 박상됨이 무릇 기하이며, 심령상 발전의 장애됨이 무릇 기하이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기하이며, 신예와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대조류에 기여 보비할 기연을 유실함이 무릇 기하이뇨.
  희라, 구래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의 고통을 파탈하려 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염의의 압축 소잔을 흥분 신장하려 하면,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수하려 하면,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 재산을 유여치 아니하려 하면, 자자 손손의 영구 완전한 경복을 도영하려 하면, 최대 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케 함이니, 이천만 각개가 인마다 방촌의 인을 회하고, 인류 통성과 시대 양심이 정의의 군과 인도의 간과로써 호원하는 금일, 오인은 진하야 취하매 하강을 좌치 못하랴. 퇴하야 작하매 하지를 전치 못하랴.
  병자 수호 조규 이래 시시 종종의 금석 맹약을 식하얏다 하야 일본의 무신을 죄하려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아 조종세업을 식민지시하고, 아 문화 민족을 토매인우하야, 한갓 정복자의 쾌를 탐할 뿐이오, 아의 구원한 사회 기초와 탁락한 민족 심리를 무시한다 하야 일본의 소의함을 책하려 아니하노라.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오인은 타의 원우를 가치 못하노라. 현재를 주무하기에 급한 오인은 숙석의 징변을 가치 못하노라.
  금일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할 뿐이오, 결코 타의 파괴에 재치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구원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를 질축 배척함이 아니로다. 구사상, 구세력에 기미된 일본 위정가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부자연, 우 불합리한 착오 상태를 개선 광정하야, 자연, 우 합리한 정경 대원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서 출치 아니한 양국 병합의 결과가, 필경 고식적 위압과 차별적 불평과 통계수자상 허식의 하에서 이해 상반한 양 민족 간에 영원히 화동할 수 없는 원구를 거익 심조하는 금래 실적을 관하라. 용명 과감으로써 구오를 확정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 소복하는 첩경임을 명지할 것 아닌가.
  또 이천만 함분 축원의 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소이가 아닐 뿐 아니라, 차로 인하야 동양 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지나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와 시의를 갈수록 농후케 하야, 그 결과로 동양 전국이 공도 동망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하니, 금일 오인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야금 정당한 생영을 수케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야금 사로로서 출하야 동양 지지자인 중책을 전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야금 몽매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 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구구한 감정상 문제이리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내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동빙 한설에 호흡을 폐칩한 것이 피일시의 세라 하면 화풍 난양에 기맥을 진서함은 차일시의 세이니 천지의 복운에 제하고 세계의 변조를 승한 오인은 아모 주저할 것 없으며, 아모 기탄할 것 없도다. 아의 고유한 자유권을 호전하야 생왕의 낙을 포향할 것이며 아의 자족한 독창력을 발휘하야 춘만한 대계에 민족적 정화를 결뉴할지로다.
  오등이 자에 분기하도다. 양심이 아와 동존하며 진리가 아와 병진하는도다. 남녀 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로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 군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천백세 조령이 오등을 음우하며 전세계 기운이 오등을 외호하나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인저.

공약삼장
  일.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디까지든지 광명 정대하게 하라.

조선 건국 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  일

  서평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글: 이태호(통청아카데미 원장)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 심리학의 개척자이면서 정신 분석학자이며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이 책은 그가 말년(76세)에 쓴 것이며 지금까지의 여러 저작의 완성작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에는 『소유냐 존재냐』 이외에도 정치 심리학의 선구적 저서인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년)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랑의 기술』(1956년)이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근대 이후 세계가 자유를 확대해 가는 과정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위세를 떨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과 함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고독과 불안이 강하게 대두되며, 이것을 피하기 위해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형제와 친구 등의 사랑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사랑도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익히고 연습을 거듭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실패하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익히고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원제목은 “To Have or To Be”인데 이것을 우리 나라에서는 두 가지로 번역을 했다. 하나는 위에서 제시한 『소유냐 존재냐』이며, 다른 하나는 『소유냐 삶이냐』이다. ‘삶이냐’로 번역한 사람은 ‘존재냐’라는 말이 너무 철학적이고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에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본 것 같다. 본래의 의미를 조금 풀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인생의 중심을 소유하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잘사는) 데 둘 것인가.>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개인의 불행과 사회적 모든 문제는 소유 중심의 삶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존재 중심의 삶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소유 중심의 삶과 존재 중심의 삶을 구분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이 차이점을 알게 된다면 독해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다. 프롬이 존재 중심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롬은 자신의 주장이 크리스트교 사상, 도가 사상, 불교 사상 등의 근본과 닿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소련 공산주의와 서구의 혁신주의적 사회주의로 왜곡되지 않은 상태의 휴머니즘적인 마르크스의 사상이나 ‘생명에 대한 외경’을 윤리적 기초로 삼은 슈바이처의 사상과도 맥을 닿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들의 공통점은 소유 중심의 삶을 거부하고 존재 중심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서문을 제외하면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서장 : 위대한 약속 그 실패와 새로운 선택’이다. 둘째는 ‘제1편 :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셋째는 ‘제2편 : 두 가지 존재 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이다. 넷째는 ‘제3편 :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이다.
  프롬은 ‘서장’에서 소유 중심의 삶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고 있다. 1장~3장까지는 제1편에 포함되어 있다. 1장에는 여러 가지 시적 표현의 실례 등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일반적 고찰’이 있다. 2장에는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 지식, 신념, 사랑 등 ‘일상 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가 구분되고 있다. 3장에는 ‘구약․신약 성서 및 에크하르트의 저술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가 언급되면서 진정한 크리스트교의 정신이 존재 중심이었다는 점이 언급되고 있다.
  4장~6장까지는 제2편에 포함되어 있다. 4장에는 존재하(살)기 위해 필요한 생존적 소유가 긍정되고 신경증적이고 정신적으로 병든 성격학적 소유가 부정되는 등 소유의 본질을 논하면서 ‘소유 양식이란 무엇인가’가 깊이 다루어지고 있다. 5장에는 ‘존재 양식이란 무엇인가’가 논의되고 있다. 존재 양식이란 진정한 능동성이며, 표면을 꿰뚫고 실재를 통찰할 때 가능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6장에는 ‘소유와 존재, 그 새로운 측면’으로 안정감과 불안감, 연대(連帶)와 적의(敵意) 등 대비 개념을 사용하여 소유와 존재의 개념이 보다 폭넓게 언급되고 있다. 특히 지금 여기(now, here)는 존재와 연결되고, 과거와 미래(past, future)는 소유와 관련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7장~9장까지는 제3편에 포함되어 있다. 7장에는 ‘종교․성격․사회’의 단어들을 묶은 사회적 성격과 종교적 욕구에 따른 소유와 존재 양식이 설명되고 있다. 8장에는 존재 양식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간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과 변혁된 인간의 특질이 언급되고 있어 그 제목이 ‘인간 변혁의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특질’이다. 9장의 제목은 ‘새로운 사회의 특징’으로, 존재 중심의 삶이 뿌리내리기 위한 사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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