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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호 (통권 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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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각과 문화
2014년 여름호 (통권 34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제 이름이라도 바로 썼으면 _ 이석규

Pops English
We Are One(Ole Ola) - 2014 브라질 월드컵 공식 주제가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신약 성경 요절  이석규 편집

서평
모차르트형 천재와 베토벤형 천재 (원제: 사로잡힌 자, 사로잡은 자) _ 최성재

우리가 답사한 유적

김제를 다녀와서  _ 김한숙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를 _ 문성국

인문학 강좌
감성 교육과 학업 성취도 _ 윤일현

생활단상
우리에겐 더 이상 높고 튼튼한 벽은 필요 없다! _ 탁노균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제 이름이라도 바로 썼으면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한국인은 지적으로 기본이 없다. 유치원 때에 이미 읽기를 다 배우는데도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한글 자모 명칭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ㄱ(기역)’을 ‘기윽’이라고 하고 ‘ㅎ(히읗)’을 ‘히응’이라고 한다.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들이 ‘2-1번’을 하나같이 ‘2 다시 1번’으로밖에 읽지 못하는데, ‘-’의 명칭이 ‘다시’냐, 의미가 ‘다시’냐 물으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한다. 전 국민이 영어에 광분하고 있지만 영어를 전공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영어 사전의 발음 기호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animation’의 발음이 [ӕ̀nəméiʃən]]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고도 평소의 습관에 따라서 또는 철자를 보고 짐작해서 [애니메이션]이라고 읽어 버리고, 1강세가 어디에 붙어 있느냐고 물으면 ‘1강세’, ‘2강세’라는 말이 생소해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먼저 있는 것이 1강세겠거니 생각하고는 앞에 1강세가 있다고 대답한다. 이는 마치 음악을 전공한다고 하면서 악보를 읽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지적 수준이 이 정도이니 한국에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지성인도 극히 드물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느냐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한글, 한자, 로마자 세 가지로 제대로 적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한자는 음훈과 획수, 필순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음훈은 아는 것 같아서 자형을 물으면 아예 모른다고 하거나 전혀 엉뚱하게 말하거나 질문을 받고 난생 처음으로 주민 등록증을 꺼내서 말하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서 인터넷에 검색을 하기 시작한다. 로마자라면 막연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적는지 규칙을 알아야 하지만 영어 단어에서 비슷한 음절을 빌려서 그대로 적거나, 아는 이들 중에서 자신과 유사한 이름을 가진 이들의 것을 모방해서 적기 일쑤다. 한국인은 자기 이름도 못 쓴다고 하면 한글로 못 쓰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개탄을 금치 못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지만 정작 개탄하는 본인도 초등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다 배운 한글 이름만 알 뿐이고 한자나 로마자는 아예 모르거나 전혀 엉뚱하게 그림인지 글자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희미한 이미지만 머리에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인이 자신의 이름 중 로마자 표기를 얼마나 엉뚱하게 알고 있는지를 실례를 들어 본다. 몇 년 전에 어느 영어 회화책 저자 중 한국인의 이름이 ‘Sookhe’로 적혀 있어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숙희’를 그렇게 적어 놓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영어에서 자기 이름의 ‘숙’이나 ‘희’와 음이 유사한 음절을 찾다가 ‘book’, ‘cook’, ‘hook’, ‘took’ 등의 ‘oo’의 음에서 힌트를 얻어서 ‘숙’을 ‘sook’로 적고, 3인칭 남성 대명사 ‘he’가 ‘희’와 음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가져다 쓴 듯하다. 한국어 ‘숙희’의 정확한 로마자 표기는 ‘Sukhui’이다. 또, 몇 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미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이 영국계 회사에 지원서를 제출했다가 낙방해서 그 원인을 알아보았더니 두 기관에서 강좌를 이수하고 발급받은 수료증이 원인이었다. 지원서와 함께 제출한 두 통의 수료증에 로마자 이름이 각각 다르게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선’의 로마자 이름이 한 기관의 수료증에는 ‘Misun’으로 적혀 있었고 한 기관의 수료증에는 ‘Miseon’으로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자로 적힌 두 이름을 다시 한글로 옮겨 보면 ‘Misun’은 ‘미순’이고 ‘Miseon’은 ‘미선’이다. 한국 회사에 지원서를 제출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미순’과 ‘미선’ 두 가지로 적힌 이수증을 첨부했었더라도 역시 불신을 받았을 것이다. 성명이 두 가지인 사람을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명 ‘미선’의 정확한 로마자 표기는 ‘Miseon’이다.
  자기 이름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개인만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표기법을 가르쳐야 할 학교, 특히 대학도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경남대는 ‘경남’을 ‘Gyeongnam’이 아닌 ‘Kyungnam’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을 한글로 다시 적으면 ‘큥남’이 된다. 경북대는 ‘경북’을 ‘Gyeongbuk’이 아닌 ‘Kyungpook’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을 다시 한글로 적으면 ‘큥푹’이 된다. 우석대는 ‘우석’을 ‘Useok’이 아닌 ‘Woosuk’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을 다시 한글로 적으면 ‘우숙’이 된다. 영남대는 ‘영남’을 ‘Yeongnam’이 아닌 ‘Yeungnam’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은 한글로 전사할 수가 없다. 선문대는 ‘선문’을 ‘Seonmun’이 아닌 ‘Sunmoon’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을 다시 한글로 적으면 ‘순문’이 된다. 성균관대는 ‘성균관’을 ‘Seonggyungwan’이 아닌 ‘Sung Kyun Kwan’으로 한 단어를 세 단어로 분할하여 적고 있는데, 많은 한국인이 그러듯이 성균관대의 교명을 이렇게 적은 사람도 자신의 로마자 이름을 세 단어로 나누어서 표기할 것이다. 지극히 기계적인 로마자 교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육 기관에서 어찌 지식의 전달과 수용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이러한 잘못된 교명 표기는 이미 잘못 쓰고 있는 학생들의 오기를 정당화하거나 강화하게 되어 성명 삼자도 못 쓰는 지성인을 양산하고 있다.
  자신의 로마자 이름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대학뿐만도 아니다. 대학생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책을 공급하는 출판사 역시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로 제대로 쓰지 못한다. 예컨대, 출판사 천재 교육은 ‘천재’를 ‘Cheonjae’가 아닌 ‘Chunjae’로 적고 있는데, 이를 다시 한글로 표기하면 ‘춘재’가 된다. 금성 출판사는 ‘금성’을 ‘Keumseong’이 아닌 ‘Kumsung’으로 적고 있는데, 이를 다시 한글로 표기하면 ‘쿰숭’이 된다. 청연 출판사는 ‘청연’을 ‘Cheongyeon’이 아닌 ‘Chungyoun’으로 적고 있는데, 이를 다시 한글로 표기하면 ‘충요운’이 된다. 형설 출판사는 ‘형설’을 ‘Hyeongseol’이 아닌 ‘Hyungseul’로 적고 있는데, 이를 다시 한글로 표기하면 ‘흉슬’이 된다. 청림 출판사는 ‘청림’을 ‘Cheongrim’이 아닌 ‘Chungrim’으로 적고 있는데, 이를 다시 한글로 표기하면 ‘충림’이 된다. 책을 공급하는 출판사가 자신의 로마자 상호 표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 거기서 어찌 책다운 책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개인과 단체를 구별할 수 없다. 개인이 모여서 대학을 이루고 개인이 모여서 출판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대학의 구성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출판사의 구성원이 땅에서 솟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바로 쓰지 못하는 개인이 대학을 구성하니 대학의 이름도 바로 쓰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바로 쓰지 못하는 개인이 출판사의 구성원이 되니 출판사의 이름도 바로 쓰지 못하게 된다.
  왜 한국인은 개인의 이름도 단체의 명칭도 로마자로 제대로 쓰지 못할까? 그 원인은 단 한 가지이다. 한국인의 머리에는 의미가 없고 이미지만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영어’를 ‘영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고 ‘꼬불꼬불한 글자’라고 생각한다. 언어와 문자를 혼동하는 것이다. 영어를 비롯하여 구미의 여러 언어를 표기하는 데에 사용하는 문자, 즉 로마자를 ‘영어’라고 하거나 더 유식해 보이기 위해 ‘영문’이라고 한다. 흔히 농으로 알파벳을 ‘꼬부랑 글자’라고 부르는데, 이 말이 한국인에게는 농이 아니라 사실이며 지식이다. 오래 전부터 ‘로마자 표기법’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하나같이 이 표기법을 명칭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영문 표기’로 번역하여 생각해 버리니 ‘로마자 표기법’이라는 명칭은 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초등 학생에게나 대학생에게나 대학 교수에게나 매일반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아는 대로 행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을 적는 규칙, 즉 로마자 표기법이 있는데, 그 규칙을 보아도 그 명칭대로 보이지 않고 오로지 ‘영문’으로 번역되어서 보이니 자기 이름을 쓰는 데에 엉뚱하게 영어 단어에서 같은 자모군을 찾으려고 사투를 벌이다가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자 기상천외한 자모군을 만들어 내곤 하는데, 앞에서 든 ‘Sookhe’나 ‘Chungyoun’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언어 교육에서 속히 이미지 교육을 탈피하여 의미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모순을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Pops English

  We Are One(Ole Ola) - 2014 브라질 월드컵 공식 주제가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Put your flags up in the sky (put them in the sky)
And wave them side to side (side to side)
Show the world where you're from(show them where you're from)
Show the world we are one (one love, life)

Ole ole ole ola ×4

When the moment gets tough You've got keep going
One love, one life, one world One fight, whole world, one night, one place
Brazil, everybody put your flags in the sky and do what you feel

It's your world, my world, our world today
And we invite the whole world, whole world to play
It's your world, my world, our world today
And we invite the whole world, whole world to play

Es mi mundo, tu mundo, el mundo de nosotros
Invitamos a todo el mundo a jugar con nosotros

Put your flags up in the sky (Put them in the sky)
And wave them side to side (side to side)
Show the world where you're from (show them where you're from)
Show the world we are one (one love, life)

Ole ole ole ola ×4

One night watch the world unite Two sides, one fight and a million eyes
Full heart's gonna work so hard Shoot, fall, the stars
Fists raised up towards the sky Tonight watch the world unite, world unite, world unite For the fight, fight, fight, one night Watch the world unite
Two sides, one fight and a million eyes

Hey, hey, hey, força força come and sing with me
Hey, hey, hey, ole ola come shout it out with me
Hey, hey, hey, come on now Hey, hey, hey, come on now Hey, hey, hey, hey, hey

Put your flags up in the sky(Put them in the sky)
And wave them side to side (side to side)
Show the world where you're from(show them where you're from)
Show the world we are one (one love, life)

Ole ole ole ola ×4

Claudia Leitte, obrigado

É meu, é seu Hoje é tudo nosso
Quando chega o mundo inteiro pra jogar é pra mostrar

que eu posso Torcer, chorar, sorrir, gritar
Não importar o resultado, vamos extravasar

Put your flags up in the sky(Put them in the sky)
And wave them side to side (side to side)
Show the world where you're from(show them where you're from)
Show the world we are one (one love, life)

Ole ole ole ola ×4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세요. 그리고 좌우로 흔들어요.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세상에 보여주세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세요.
잘하고 있어요. 힘내세요. ×4
힘들어 질 때 계속해서 힘들어도 우리는 하나의 사랑, 인생, 세상이죠.
함께 싸우고 모두가 한 장소에서 하나가 되는 밤 브라질에서 모두 하늘을 향해 깃발을 올리고
느끼는대로 해보자구요. 오늘은 당신의 세상, 나의 세상, 우리 모두의 세상이에요.
우리는 모두를 초대했어요. 함께 경기하는 거죠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세요. 그리고 좌우로 흔들어요.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세상에 보여주세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세요.
잘하고 있어요. 힘내세요. ×4   Jenni, 마음대로 해봐
하룻밤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걸 지켜보세요. 한 경기에서 두 팀이 수백만의 관중들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뛸 거 에요. 공을 걷어차며 하늘에 별들은 쏟아지고 하늘 위로 주먹을 높이 들죠. 오늘밤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걸 지켜보세요. 오늘 밤의 승부를 위해 세상이 하나가 되는 걸 지켜보세요. 한 경기에서 두 팀이 수백만의 관중들을
모두 어서 나와 함께 노래해요. 모두 어서 나와 함께 외쳐 봐요. 모두 어서 지금요.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세요. 그리고 좌우로 흔들어요.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세상에 보여주세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세요.
잘하고 있어요. 힘내세요. ×4  Claudia Leitte, 감사해요.
내것이 나의 것 오늘은 우리 모두의 날. 내가 온 세상을 향해 시작하라고 외치면, 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힘내, 외치고, 웃고, 소리 질러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우린 함께 흘러넘치는 기쁨을 느낄 거야.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세요. 그리고 좌우로 흔들어요.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세상에 보여주세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세요.
잘하고 있어요. 힘내세요. ×4

  괴체 결승골

  2014년 브라질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이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제20회 브라질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7월 14일 4시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결승전에서 독일은 연장 후반 8분에 터진 마리오 괴체의 결승골로 1대0으로 승리했다.
  독일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또다시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24년 만에 다시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월드컵 84년 역사상 남미 대륙에서 열린 대회에서 유럽팀이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는 최우수 선수에 선정돼 골든볼 트로피를 받았다. 득점왕은 6골을 넣은 콜롬비아의 하메스 로드리게스에게 돌아갔으며, 최고의 골키퍼에게 주는 골든 글러브 상은 독일의 우승을 이끈 노이어 골키퍼가 받았다.
또 독일은 우승상금 3500만 달러(약 355억원), 준우승팀은 아르헨티나 2500만 달러(약 253억)를 받게 된다.
  이번 우승으로 독일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5회), 1947년 서독월드컵(10회),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14회)에 이어 통산 4번째 24년만의 우승을 차지했다.


  [English Humor]

  문제 1. I am sorry. 답 : 나는 소리다.
  문제 2. Yes, I can. 답 : 오냐, 난 깡통이다.
  문제 3. What is your name? 답 : 왓이 네 이름이니?
  문제 4. May I help you? 답 : 5월에 내가 너를 도와줄까?
  문제 5. I am fine, and you? 답 : 나는 파인주스, 너는?
  문제 6. Love is long. 답 : 사랑하지롱!
  문제 7. Nice to meet you!  답 : 오냐, 너 잘 만났다.
  문제 8. How do you do? 답 :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문제 9. See you later! 답 : 두고 보자!
  문제 10. ‘아, 저 말입니까?’를 영작하라. 답 : Am I a horse?


  명시와 명문

  신약 성경 요절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의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the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es?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Who of you by worrying can add a single hour to his life? And why do you worry about clothes? See how the lilies of the field grow. They do not labor or spin. Yet I tell you that not even Solomon in all his splendor was dressed like one of these. If that is how God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her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fire,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 O you of little faith? So do not worry,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hat shall we wear? For the pagans run after all these things, and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고린도전서 13:1~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If I speak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but have not love, I am only a resounding gong or a clanging cymbal.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If I give all I possess to the poor and surrender my body to the flames, but have not love, I gain nothing.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It is not rude, it is not self-seeking, it is not easily angered, it keeps no record of wrongs. 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always protects, always trusts, always hopes, always perseveres. Love never fails. But where there are prophecies, they will cease; where there are tongues, they will be stilled; where there is knowledge, it will pass away.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but when perfection comes, the imperfect disappears. When I was a child, I talked like a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childish ways behind me.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서평

  모차르트형 천재와 베토벤형 천재 (원제: 사로잡힌 자, 사로잡은 자)
  피터 키비 지음, 이화신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글: 최성재

  천재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다. 암기를 잘해도 천재, 노래를 잘 불러도 천재, 악기를 잘 연주해도 천재, 달리기를 잘해도 천재, 얼음을 잘 지쳐도 천재, 수영을 잘해도 천재, 공을 잘 차도 천재, 컴퓨터를 잘해도 천재, 앱을 잘 개발해도 천재, 돈을 잘 벌어도 천재 등등. 세상에 온통 천재가 넘쳐난다. 어느 분야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 아낌없이 천재 칭호를 붙여 준다. 가히 천재 인플레이션이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서양에선 어땠을까.
  우선 동양은 어땠을까. <손자병법>의 손무나 <(소설) 삼국지>의 제갈량을 군사 천재라고 불렀지만, 고대 중국을 이상화했던 한자 문화권의 동양에선 주나라에서 춘추 시대까지 산만하게 전해져 오던 유교를 깔끔하게 정리한 공자를 유일한 천재로 여겼다. 생이지지(生而知之) 곧 ‘나면서 알고 있었던 분’은 오로지 공자에게만 해당되었던 것이다.
  서양에선 오랫동안, 그러니까 약 2000년 동안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유일한 천재로 여겨졌다고, 이 책의 저자 피터 키비(Peter Kivy)는 밝힌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천재는 작곡가 헨델, 이어서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서 다시 모차르트, 다시 베토벤으로 진자 운동한다. 그 뒤에는 시대적 조류와 뒷받침하는 철학이 있었다. 헨델은 생전에 줄곧 천재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후에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모차르트가 나오고 뒤이어 헨델과 비슷한 유형의 악성 베토벤이 나오면서 천재의 두 전형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굳어진다.
  서양 최초의 천재론은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에 등장한다. 이온은 호메로스의 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만 정통하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답한다.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기 때문이라고. 우리말로 하면 접신(接神)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술(테크네: techne, art)이 아니라 ‘신에게서 받은 감화력(divine influence)’이 창작 활동의 원천이다. 신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신의 대변인으로 삼는다.”
  ‘사로잡힌 자(the possessed)’의 이론은 여기서 비롯된다. 이를 플라톤적 천재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약 500년 후 서기 1세기에 작자 미상의 짧은 논문 <숭고함에 대하여>에서 플라톤적 천재에 의문을 표한다. 소논문의 저자는 롱기누스(Longinus)라고 잘못 알려졌는데, 편의상 저자는 롱기누스로 통일한다. 영어 속담에 ‘호머(호메로스)도 존다.(Even Homer nods.)'란 말이 있는데, 저 위대한 호메로스조차 졸다가 쓴 것인지 아주 평범한 시구가 있다는 뜻이다. 롱기누스의 회의론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2부작 중 <오디세이>에 대해 롱기누스는 회의적이었다. 평범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해 롱기누스는 호메로스가 기력이 떨어진 노년에 썼기 때문이라고 본다. 만약 뮤즈 여신이 호메로스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라면 나이와는 무관하여야 한다. 신으로부터 받는 영감(inspiration)보다는 인간의 타고난 재능(talent) 쪽으로 진자가 기운다. 재능은 재능이되 필요하면 범속한 규칙을 깨뜨리고 숭고함(sublime)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로잡은 자(the possessor)’의 이론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를 롱기누스적 천재라고도 한다.
“가장 뛰어난 자질들은 완전무결함이 가장 적은 법이다. 최고의 부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글에도 반드시 뭔가 결여된 것이 있어야 한다.”
  시대를 껑충 뛰어 르네상스를 지나 계몽주의 시대가 열린다. 1711년 작곡가 헨델(1685~1759)이 영국에서 처음으로 크게 성공한 그 해에 공교롭게 미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요셉 애디슨(Joseph Addison)이 헨델에 꼭 알맞은 천재론을 발표한다. 롱기누스적 천재론은 11개의 논문으로 체계화되고 그 후 영국은 50년 동안 ‘숭고한’ 천재 헨델에 열광한다. 타고난 재능을 어릴 때부터 절차탁마하고 기존의 음악 규칙을 때로 과감히 어기고 숭고함에 도달한 천재 헨델에 열광한다.
  도무지 노력할 필요가 없는, 누구나 인정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후에 독일이 자랑하는 천재 괴테가 음악 천재로 유일하게 인정한 신동이 등장하면서 헨델에게 기울었던 진자는 급격히 모차르트(1756~1791)로 기운다. 괴테는 천재의 재능은 자연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재능은 자연에 속하며 그 위대함은 자연에 내재되어 있다.”
  모차르트형 천재에 대한 철학적 설명은 쇼펜하우어가 완성한다.
  ‘애 어른, 어른 어린이, 영원한 어린이, 현실을 뛰어넘는(그래서 현실 생활에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이처럼 무능력한) 발군의 관조 능력’ 등으로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적 천재에 대해 마침표를 찍는다. 그 사이 재능의 원천은 고대인이 누구나 믿던 신에서 근대인의 무신론에 바탕을 둔 자연으로 옮겨간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해서는 과학계도 비상한 관심을 가져 1769년 영국 왕립 학회에 과학적 보고서가 제출되기도 했다.
  “여덟 살도 채 되지 않은, 키가 매우 작은 어린 소년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일로 여겨질 줄 압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성실한 증언을 담아 보고서를 올린다면, 최소한 왕립 학회 심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가차 없이 퇴짜를 맞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망 있는 학회에 전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역사상 가장 일찍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꽃피운 예가 담겨 있는 이 보고서는 학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베토벤(1770~1827)의 차례다. 헨델의 숭고함에서 모차르트의 아름다움으로 갔다가 다시 베토벤의 숭고함으로 넘어간다. 천재의 원천은 신에서 자연으로, 마침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간다. 베토벤은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귀족이나 왕족의 취향 또는 교회의 가치 대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최초의 프로 음악가다. 모차르트보다 수명이 22년 길었으나 작품 수는 4분의 1도 안 된다. 그러나 창의성 면에서는 베토벤이 모차르트보다 앞선다. 베토벤은 중기 무렵부터 기존의 음악 형식을 과감히 깨뜨린다. 대표적인 것이 <운명> 교향곡과 <합창> 교향곡이다. 베토벤은 교향곡 C단조에서 3악장과 4악장을 쉬지 않고 바로 연주하도록 했고, D단조에서는 교향곡에서는 꿈에도 생각 못 하던 ‘목소리 악기’를 집어넣어 버렸다. 사로잡은 자 베토벤을, 스스로 신이 되었던 베토벤을, 기존의 규칙을 파괴하고 새 규칙을 제정한 베토벤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다음의 두 마디다.
  “자네는 실수를 범했지만(commit), 나는 실수를 허용했네(permit).”
  “이제 내가 그것을 허용하노라(And so I allow them!).”
  칸트는 베토벤에 매료되었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는 천재의 4가지 특성을 얘기한다. 독창성, 전범성(典範性), 과학적 설명 불가성, 배타성! 여기서 전범성이 칸트의 가장 뛰어난 통찰로서 그것은 옛 규칙을 파괴하고 후세대가 따를 새 규칙을 제정하는 것이다.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으로서 낭만주의에 여명을 비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배타성은 천재가 예술에만 한정된다는 주장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칸트에 의해 베토벤은 모차르트와는 다른 또 다른 유형의 천재임이 철학적으로 명확해진다.
  모차르트형 천재와 베토벤형 천재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한쪽이 더 각광을 받기도 하고 서로 융합되기도 한다. 20세기에는 상대주의가 넘쳐나면서 구조주의의 이름으로 천재를 해체하려는,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득세한 적도 있다. 또한 천재가 모든 분야로 확대되기도 했다. 여성주의자들은 천재론 자체를 남성 우월주의로 폄하하기도 했다.
  재능과 노력은 모차르트형 천재에게조차 필수 불가결하다. 모차르트의 초고에 보면, 그도 여러 번 고쳐 쓴 것이 발견된다. 천재를 신으로 우상화할 필요도 없지만, 미치광이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 천재의 인간적 약점은 너그러이 보아 넘기고, 그들이 더 큰 성취를 이루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어떤 분야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거나 두루 혜택을 주면서, 천재 자신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내 편’이면 인간 말자도 천재로 떠받들고(히틀러급 김일성과 스탈린급 김정일과 차우셰스쿠급 김정은은 북한에서 생전에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불세출의 천재로 떠받들림), ‘내 편’이 아니면 아무리 천재라도 사이코패스의 눈을 반짝이며 실컷 이용만 하고 걷어차거나 작심하고 헐뜯기에 여념 없는 고약한 풍토가 있다. 천재의 재능이 꽃피기가 매우 힘든 나라이다. IQ 210의 천재도 한국에서는 단지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다 만다. 그 재능을 꽃 피우고 열매 맺어 개인적으로도 행복하고 사회와 나라도 여러모로 덕을 보기는 무척 어렵다. 그나마 예체능 쪽에서는 천재에게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버금가는 천재는 아직 한 명도 없었지만, 아마 한국에서 태어나면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번역서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1. p.249 ‘현악4중주 18번 C단조’는 ‘현악4중주 작품18 C단조’가 맞다. 베토벤의 현악4중주는 16번이 마지막 번호다. 원문에는 ‘초기 바이올린 4중주의 하나인 C단조(one of his earlier violin quarters in C minor’로 되어 있는데, 번역자가 불편한 친절을 베풀었다. 베토벤의 작품 18은 현악 4중주 6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2. p.262 ‘베토벤의 현악 4중주 가운데 하나(제18번 4악장)’은 ‘베토벤의 현악 4중주 가운데 하나(제4번 작품 18)’이 맞다. 원문에는 ‘현악 4중주의 나중 것 중 하나 제4번 작품 18(one of the latter's string quarters(OP.18 NO.4)'인데, 이건 원문에도 잘못이 있다. ‘latter's’를 ‘earlier’로 바꿔야 한다. 작품 18의 6곡 중 앞의 3작품과 뒤의 3작품은 작곡 연대가 크게 둘로 나눠지고 4번은 그 중에서 가장 나중에 작곡되었다는 게 정설인데, 아마 저자는 이걸 염두에 두고 쓰다가 문맥에 닿지 않는 ‘latter's’를 쓴 듯하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비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창건된 절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全域誌)』에 비암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그 무렵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근대에 들어와 극락전 앞뜰에 있는 높이 3m의 고려시대 삼층석탑 정상부분에서 사면군상(四面群像)이 발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 대웅전을 지었으며, 1995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산신각과 요사 2동을 지었다. 1996년 범종각을 짓고 1997년 요사 1동을 지었다.
  석상 중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石像)은 국보 제106호로,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과 미륵보살반가석상은 각각 보물 제367호와 제368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이며, 전내에 아미타불을 안치하였고, 불상 위의 닫집과 조각물들은 그 수법이 우수하다. 이 밖에 사면군상이 발견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인 삼층석탑과 부도 3기가 있다.

  (2) 감곡성당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있는 청주교구 소속의 가톨릭 교회이다. 1896년 9월 17일 본당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부이용 가밀로 신부이다. 원래 부엉골 본당에 부임한 부이용 신부는 본당의 위치가 적당치 않음을 깨달은 후, 장호원 매산 언덕에 한옥을 매입하여 부엉골 본당을 폐지하고 장호원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일제 말기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로 연금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연금에서 풀려나, 감곡 본당의 제4대 주임신부로 다시 돌아와 재임하였다. 감곡 본당은 충청북도의 모본당으로서 많은 자본당을 낳았으며, 1986년 본당 설립 90주년을 기념하여 성모 동산을 정비하고 부이용 신부의 입상을 제작하는 한편, <감곡 본당 90년사>를 편찬하였다.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전국에서 18번째, 충청북도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임오군란 당시 충주목사(忠州牧師)로 있던 민응식(閔應植)의 집이 있던 곳이다. 민응식(1844~?)은 명성황후의 6촌오빠로, 민태호(閔台鎬) 등과 함께 수구파(守舊派)의 중심이었던 인물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자기 집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하였는데, 당시 그 집은 109칸 넓이의 대궐 같은 집이었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되고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된 후 의병들이 그 집을 점거하고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 집은 주위의 집들과 함께 일본군의 방화로 건물의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그후 임가밀로 신부가 이 집터를 싼값에 구입하여, 1930년 지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하였다. 화강암으로 된 2층 건물인 사제관은 성당이 건립된 4년 후인 1934년에 지은 것이다.
  성당은 프랑스 신부인 시잘레가 설계하였고, 공사는 중국 사람들이 맡았다. 길이 40m, 넓이 15m, 종탑높이 36.5m의 고딕식 건축물은 명동성당의 축소판 같은 인상을 준다. 내부의 천장은 원형 돔이며, 중앙제대(中央祭臺)와 옆면에 4개의 소제대(小祭臺)가 있다. 내부 정면 위에 모셔진 성모상(聖母像)에는 6.25전쟁 중에 생긴 7발의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3) 만년교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보물 제564호. 마을 돌담을 끼고 흐르는 실개천 위에 놓인 반원형의 아치로 된 아담한 석교로서,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통행하고 있다. 이 다리는 위쪽 노면이 완만하게 휘어진 경사를 이루고 있다. 1780년(정조 4) 석공 백진기(白進己)의 축조라 한다. 이 다리는 꾸밈새 없이 서민적이고 조선 후기의 민예적(民藝的)인 수수한 멋을 풍긴다. 홍예(虹蜺 : 무지개모양)를 이룬 부채꼴의 화강석은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다란 이 석재 위에 장대석(長臺石)을 올리지 않고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겹겹이 쌓아올렸다. 그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다리의 양안은 역시 자연석을 쌓은 석축으로, 앞뒤로 길게 연장되어 통로와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쌓은 잡석의 짜임새가 허술한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매우 견고하여 홍수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무지개 다리를 중심으로 양쪽에 좌우로 뻗친 호안(護岸)의 석축이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개천이 빠져나가는 홍예의 너비는 11m, 높이가 5m, 홍예 석축의 교폭은 4.5m이다. 다리 입구에는 주민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비석이 하나 있다. 만년교가 완성될 무렵 이 고을에는 신통한 필력(筆力)을 가진 13살 난 신동(神童)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공되던 날 밤 소년의 꿈속에 나타난 노인은 자신이 산신임을 자처하며 “듣건대, 네가 신필(神筆)이라고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다. 다리의 이름은 만년교로 정하겠다.”고 말하였다. 노인이 사라진 뒤 소년은 먹을 갈아 ‘萬年橋’의 석 자를 밤을 새워 써 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다리 입구에 남아 있는 이 비석은 글씨가 기운차고 살아 움직이는 듯 가히 명필임을 알 수 있는데 끝에는 ‘十三歲書’라고 씌어 있다. 개천이 남산(南山:咸朴山이라고도 한다.)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라 하여 만년교는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린다.
  
  (4) 의림지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저수지.
  우리 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저수지로 손꼽힌다.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奈吐)·대제(大堤)·내제(奈堤)가 모두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제방의 역사가 서력 기원 전후의 시기까지 오르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세종실록≫에는 의림제(義臨堤)라고 표기하였다.
  낮은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막은 제방은 길이가 530척이며, 수위는 제방 밖의 농경지보다 매우 높아서 관개면적이 400결이나 되었다. 둘레는 5,805척이나 되고 수심은 너무 깊어서 잴 수 없다고 하였다. 상주의 공검지(恭儉池)나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같은 시기의 것이지만 제방의 크기에 비해 몽리면적이 큰 것은 제방을 쌓은 위치의 수위가 높기 때문이다.
  현재는 물의 주입부에서부터 토사가 쌓여 작아진 것이다. 제방은 산줄기 사이의 낮은 위치에 자갈과 흙과 모래·벌흙을 섞어서 층층으로 다지되 제방 외면이 크게 단을 이루도록 하였다. 단면이 이중의 사다리꼴을 이루고 외면은 석재로 보강하였다.
  출수구는 본래의 자리가 원토인 석비레층으로 그 위에 축조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원형이 사태로 말미암아 없어지고 패어나간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제방은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처음 쌓았다고 하고 그로부터 약 700년 뒤에 박의림이 쌓았다고 한다.
  문헌에 기록된 바로는 세종 때 충청도관찰사였던 정인지가 수축하고 다시 1457년(세조 3) 체찰사가 된 정인지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 복위 운동에 대비하여 군사를 모으면서 호서·영남·관동지방의 병사 1,500명을 동원해서 크게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1910년부터 5년 동안 3만여 명의 부역에 의해 보수하였던 것이 1972년의 큰 장마 때 둑이 무너지자 1973년에 다시 복구한 것이 오늘날의 못이다. 현재의 의림지는 둘레가 약 2㎞, 면적은 15만 1,470㎡, 저수량은 661만 1,891㎥, 수심은 8∼13m이다. 현재의 몽리면적은 약 300정보에 이른다.
  관개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경승지로 이름이 있으며, 충청도 지방에 대한 별칭인 ‘호서’라는 말이 바로 이 저수지의 서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방과 호수 주변에는 노송과 수양버들이 늘어섰고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가 있으며, 이곳 특산물로는 빙어가 유명하다.

  (5) 장륙사 건칠 관음 보살 좌상
  1989년 4월 10일 보물 제993호로 지정되었다. 전체높이 87.6cm, 보관 높이 15.6cm, 머리높이 25cm, 무릎 너비 61cm이다.
  복장 발원문과 개금 묵서명 발견으로 1395년(태조 4)에 백진을 비롯한 영해부(영덕)의 관리들과 부민들의 시주로 조성되었고, 1407년(태종 8)에 개금되었음이 밝혀졌다.
  보살상의 얼굴은 두꺼운 금칠로 인하여 선명하지 않지만, 표정이 생경하고 신체가 약간 앞으로 굽은 점,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엄숙함을 나타낸 점 등은, 1362년경에 제작된 봉림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과 유사하다. 한편, 14세기 전반의 지순명 금동 관음 보살·대세지 보살 입상이나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의 금동 관음 보살 좌상(1330년 제작)에 비하여 장식성이 더욱 강조되어, 가슴의 목걸이 이외에도 양 옷깃 소매, 배, 다리에까지 달개[瓔珞]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또 웃내의의 치레 장식이 허리에 가깝게 처진 것은, 퇴화되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조선 시대 보살상 이전의 과도기적 표현이다. 전체적인 모습에서는 머리, 양 어깨, 양 무릎을 잇는 선이 안정된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비례가 좋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의 조각으로 연결해주는 분기점에 위치한 작품으로, 조각사적 의의가 크다.

  (6) 금산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金山面) 모악산(母岳山) 남쪽 기슭에 있는 대사찰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 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 왕사가 대가람으로 중창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이라는 대사구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 대공전, 광교원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이 재건에 착수하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 때에 이르러 미륵전, 대장전, 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 금강문, 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은 혜덕왕사 이외에도 도생승통, 원명, 진묵, 소요, 남악 등이 있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 대장전(보물 827), 명부전, 나한전,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 등이 있고, 석련대(보물 23), 혜덕 왕사 진응 탑비(보물 24), 5층 석탑(보물 25), 방등계단(보물 26), 6각 다층 석탑(보물 27), 당간지주(보물 28), 석등(보물 828)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금산사는 일대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다.

  (7) 귀신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모악산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에 의상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법장 화상전」을 편찬하였다.
  고려시대 국사 원명이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에 춘봉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왜병 300여 기가 성을 함락한 후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이 격퇴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건물과 암자가 즐비했던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귀신사 삼층 석탑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63호인 귀신사 부도,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64호인 귀신사 석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층 석탑은 높이 4.5m의 화강암재 석탑으로,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선이 정밀하고 옥개석의 곡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도 신라 시대의 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부도는 청도원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에 있는데, 전성기에는 이 부도가 있는 곳까지가 절의 경내였음을 알 수 있다. 석탑과 통일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정교한 조각의 예술성을 보이고 있으며, 높이 2.5m이다.
  또 석수는 딴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앉아 있는 석수의 등 위 중간에 남근 같은 석주가 꽂혀 있고 도약하려는 듯한 석수의 모습에는 당당한 위용이 엿보인다. 석수나 남근은 모두 화강석으로 되어 있고, 높이 1.65m, 너비 1.65m이다.

  기행문
  김제를 다녀와서

  김한숙(본원 회원)

  우리 일행은 시원하게 뻗은 경부 고속 도로를 달리다가 호남 고속 도로로 접어든 지 3시간 남짓하여 금산사 입구에 도착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연하게 낀 가운데 여름 햇살이 따갑게 내리쪼이고 있었다. 정연원 선생의 해설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평온해졌고 이현동 선생의 해설은 우리가 답사한 유적지에 대한 예습의 기회가 되기에 충분했다.
  일주문까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걸으며 아름드리 단풍나무들을 끌어안으면서 모악산의 정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이 산은 나에게 상쾌함과 아늑함을 주었다. 팔공산을 ‘부악’이라 부르고 이 산을 ‘모악’으로 불렀다고 하니 이 말을 듣기 전부터 내 몸은 이런 의미를 느끼고 있었다고나 할까…….
  금산사는 신라 오교 중의 하나인 법상종의 창시자인 진표 스님의 행적이 짙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진표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활쏘기를 좋아하여 11세에 사냥을 나갔다가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물속에 넣어 놓았는데 그 다음해에 개구리 30여 마리가 그대로 꿰어져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참회하며 출가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출가 동기부터가 뭔가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이다.
  진표스님은 스승으로부터 ‘공양차제비법’과 ‘점찰선악업보경’을 배우고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깨달음을 얻고 미륵과 지장보살로부터 목간 등을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미륵과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심을 크게 열어 나갔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크게 선양되었다고 한다. 대구 동화사도 그 제자의 영향을 받은 사찰이라고 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금산사 경내는 넓은 공간에 많은 당우와 탑들이 배치되어 있어 과연 호남 제일의 사찰이라 불릴 정도로 큰 사찰임을 느낄 수 있었다. 미륵전을 비롯하여 국보와 보물이 무려 11점이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의 보고이다. 그중 미륵전은 국보로서 국내 유일의 3층 목조전인데 조선 인조 때 중창하였다고 한다. 통층으로 되어 있고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는데 전의 기둥과 법당 안의 좌대 등을 만져 보니 오래된 목재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설명만으로는 알 수 없는 문화재의 진면목을 파악하고자 나의 촉감을 총동원해 보는데 아무래도 그 한계가 있고 촉감과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잘 보전되길 바라면서 우리 일행은 금산사의 숲길을 내려와 즐거운 점심 식사를 하였다. 사찰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식당이라 그런지 산채비빔밥의 맛이 아주 좋았다. 도토리묵에 한모금의 막걸리는 기행의 맛을 한 층 높여 주는 감로수가 아닌가 한다.
  다시 버스에 올라 귀신사로 향했다. 이현동 선생은 이 절은 한때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고 임진란 때 승병을 양성하던 절이라고 했는데, 이 절에서 유명한 것은 석수라고 한다. 사자상 위에 남근상을 올려놓은 것이 보기 드문 것인데 불교와 무속이 합쳐진 것이라고 했다. 만져 보니 참으로 재미있는 석상이라 생각되었다. 이것은 이곳이 음기가 강하여 그것을 누르기 위하여 사자상 위에 남근상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기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전라도 지방에는 유달리 많은 남근 석상이 있는 것을 보면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옛날부터 익히 들어 온 그 유명한 삼국 시대부터의 오래된 저수지인 벽골제로 향했다. 이곳 김제 지방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곡창 지대라 한다. 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기 위해 백제 비류왕 때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무려 2,000년 가까이 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벽골은 ‘벼고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명을 들으니 왜 벽골제라 했는지 금방 이해가 되었다. 나는 벽골제가 굉장히 큰 저수지인 줄 알고 제방 위에 올라갔으나 저수지는 없고 수로만 있다는 설명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일제가 저수지를 메우고 수로만 남겨놓았다는 말을 듣고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 데 대한 안타까움이 많이 들었다.
  다행히 벽골제를 발굴하면서 나온 많은 유물을 농경 문화 박물관에 전시하였다 하니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이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호남이란 명칭이 이 벽골제 이남을 가리키고 호서는 제천의 의림지 서쪽을 지칭한다고 하니 우리의 문화 유산 답사가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벽골제에서 쌍룡 놀이의 전설을 들으며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의 갸륵함과 벽골제에 대한 이 곳 사람들의 애착심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김제 태수가 벽골제를 보수하려 기술자 원덕랑을 경주에서 불러 공사를 맡겼는데 악한 용인 청룡이 심술을 부려 착한 용인 백룡이 대적해 보았지만 역부족하여 청룡이 제방을 파괴하려 하자 주민들이 제물을 바치기로 하고 원덕랑의 약혼녀인 월내를 선택하였으나 태수의 딸인 단야가 나서 희생이 되면서 제방의 안전을 염원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주민들은 이를 기리어 지금까지 쌍룡놀이가 이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차중에서 선생은 이 곳 ‘금산’이란 지명은 금과도 관계가 있다는 설명을 곁들였는데 소설 ‘아리랑’의 이동만이라는 일본인 하수인이 사금 사업에 투자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평생 모은 전 재산을 탕진하고 알거지가 되어 자살하는 대목이 떠올랐다.
  기행을 마치고 오면서 차중에서 하는 사행시는 나를 항상 긴장시키는데 이렇게 지어 보았다.
  김: 김은 금과 통하고
  제: 제는 제방이라
  벽: 벽은 벼를 이름이니
  골: 골짝 골짝 금빛과 볏빛이 황금을 이루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세종 연기

  최유림
  세: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느꼈습니다
  종: 종일 사람들과 함께 나눈 정이
  연: 연둣빛 들판에서 환하게 빛납니다
  기: 기쁜 마음으로 희망을 얻고 갑니다

  박미정
  세: 세상 사람이 모두
  종: 종달새 같은 목소리를 가진 건 아니지만
  연: 연습만 열심히 하면
  기: 기막히게 노래를 잘할 수 있답니다

  시제: 음성 감곡

  박순정
  음: 음양 오행에 의해 계절이 돌고 돌아
  성: 성장한 여인의 한복처럼
  감: 감나무에는 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열리고
  곡: 곡간에는 곡식이 그득한 가을이 왔어요

  장민기
  음: 음력 10월 7일
  성: 성지 순례로
  감: 감곡 성당 향하는데
  곡: 곡조가 아름다운 클래식이 가을 풍경과 어우러져 울려 퍼진다

  권인중
  음: 음성이라는 먼 곳에 세 친구들이 와서
  성: 성당 관광을 끝으로 함께하는 여행의 재미와 더불어 봉사의 의미를 알고
  감: 감이 열리고 단풍이 예쁘게 물든 가을날에 비가 촉촉이 내리고
  곡: 곡이라는 운자를 끝으로 사행시를 마무리 짓고 아쉬운 맘을 뒤로한 채 음성 여행을 끝내려 한다

  장경희
  음: 음양의 이치를 따라 보덕산 용혈이 열리는 날 밤에
  성: 성공한 한국인 1호인 반기문 총장의 외유내강의 성품을 닮고
  감: 감우재 전승 기념관에 우뚝 선 승전 일사의 용맹을 받아
  옥: 옥새를 바로잡아 나라를 일으킬 큰 인물하나 점지해 주소서

  시제: 함안 창녕

이강화
  함: 함박웃음과 함께 떠난 역사 기행
  안: 안내하는 가이드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과
  창: 창공에 빛나는 햇살이 우리를 정답게 인도하니
  녕: 영혼을 숨 쉬게 하는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시제: 김제벽골

송용훈
  김: 김씨냐 이씨냐
  제: 제씨냐 갈씨냐
  벽: 벽처럼 말 안하네
  골: 골 때리네

김창연
  김: 김 빠진 맥주인 줄도 모르고 밤새 정신없이 퍼 마셨다 시작은 좋았었다 조니워커
  제: 제 아무리 천하장사도 술에 이길 수가 있으랴
  벽: 벽을 짚고 두드리며 안주는 뭘 먹었는지 생각이 날 듯 말 듯하여 확인도 해봤다 아 횟집에 갔었구나 술을 마시면 조금 전 일도 생각이 안 나는 구나
  골: 골골하며 보낸 117차 역사 문화 기행

이진우
  김: 김제 평야가
  제: 제 아무리 넓고 좋아도
  벽: 벽골제가 없으면 무슨 소용 있으랴
  골: ‘골’은 생각이 안 나요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를

문성국(41세, 남, 척수 장애 1급)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서른두 살 되던 1999년 11월 결혼을 했다. 아내와 함께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내던 중 2000년 5월 25일 부산의 어느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베란다 섀시 설치 작업을 하다가 추락하여 목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부산의 병원에서 응급 조치를 한 후 대구로 옮겨 영남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나는 경추 6-7번을 다쳐 척수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는 바람에 가슴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입원하여 손상된 경추 수술을 받았지만 복막염이 발생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장내로 번지면서 심해지는 바람에 1개월 정도 중환자실에서 지내야 했던 나는 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장애가 이처럼 중증인 줄은 알지 못했다. 복막염 치료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중환자실을 나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서야 나는 장애 정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아내는 당시 뱃속에 아이를 가진 상태로 나의 간병을 도맡아 했는데, 만삭의 몸으로 보호자용 간이 침대에서 불편한 잠을 자면서 휠체어를 밀고 다녔고, 나를 침대에 올려 눕히고 대소변을 받내면서 극진히 간호했다. 11월 어느 날 새벽 간이 침대에 누워 잠을 자던 아내는 산기를 느끼고 혼자서 산부인과로 내려가 아이를 낳기도 했다. 아내가 산후 몸조리를 하는 한 달 동안 나는 간병인을 구해야 했다. 나 같은 척수 장애인들은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휠체어로, 휠체어에서 침대로 들어서 옮겨야만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대소변을 받내야 하기 때문에 꺼리는 경향이 있어 간병인을 구하기가 어렵다. 아내를 대신해서 한 달 동안 돌보아 줄 간병인을 구하다가 구하다가 구하지 못해서 할 수 없이 재중 동포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영남 대학 병원에서 8개월 정도 재활 치료를 받은 후 인근의 가톨릭 병원으로 옮겨 3개월 간 재활 치료를 더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병원 체계에서는 한 병원에서 장기간 재활 치료를 받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중증 척수 장애인들처럼 나도 영남 대학 병원에서 계속 재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가톨릭 병원으로 옮겨서 재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중증 척수 장애인들은 재활 치료를 받던 병원을 떠나 집으로 가는 것을 무척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병원에는 이들이 일상 생활을 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간호사들이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집에는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상태가 나빠지면 다시 병원으로 와야 하는 불편과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병원에는 같은 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어 같이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여가에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다른 환자 보호자들이나 간호사들 등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데에 비해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 외에는 간병할 사람이 없어 아무래도 필요한 도움을 받기가 어렵고, 주로 종일 혼자서 지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병원을 떠나 집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지만 11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병원 생활을 청산하고 집이라고 하는 제한된 공간에서 새롭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구조를 개조하고 일상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준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나에 못지않게 이제 의사나 간호사, 병원 내 다른 동료 보호자들이 없이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나를 간병해야 하는 아내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퇴원에 앞서 종전에 살던 아파트는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했으므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종일 내 옆에서 나를 간병해야 하는 아내가 갓난아이를 돌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는 처제와 같이 살고 계시던 장모님과 함께 살기로 했다. 아내는 전적으로 나의 간호에 매달려야 했으므로 집안 살림과 아기를 돌보는 일은 장모님과 처제의 차지가 되었다.
  처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혼자서만 지내야 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병원에서는 담당 의사가 척수 장애인들의 재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었고 동료들과도 같은 장애인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우정을 나눌 수 있었는데, 종일 집에서만 지내야 하니 너무나 답답했다. 더군다나 나의 장애로 아내를 고생시키는 일이 모두 나의 잘못인 것만 같고 내가 죽을죄를 지은 것만 같아 장모님을 볼 면목이 없었고, 처제를 대하는 일이 너무나 괴로웠다. 장모님은 나를 만나 결혼을 하고, 내가 장애를 갖게 된 것도 다 스스로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내색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아내를 다독거렸고, 아내 역시 종일 내 옆에서 간병을 하느라 힘겨운 일상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가슴 속에 깊게 자리한 나의 자책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경추를 다쳐 척수 신경이 손상되어 가슴 아래로 복부와 하반신에 감각이 없다. 그래서 감각이 없는 부위에 상처가 나더라도 모르고 지내기 쉽다. 특히 등이나 엉덩이, 허벅지 등에 상처가 있는데 나나 가족들이 제때 발견하지 못한 채 방치하게 되면 욕창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침대에서는 늘 흰 시트를 깔고 옷을 벗고 생활하고 있다. 그래야만 부지중에 어디에 부딪혀 상처가 나는 경우에 시트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상처 유무를 확인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옷을 벗고 지내고, 대소변을 볼 때마다 아내가 처리를 해야 했으므로 장모님과 처제와 함께 생활하는 일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장모님은 장모님대로, 처제는 처제대로, 그리고 나는 나대로 많이 힘들었었다. 특히 집에 있으면 나는 거의 누워서 생활을 해야 했고, 아내와 함께 있지 않으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아내는 내가 잠들고 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 장모님이나 처제와 함께 이야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일상의 피로와 단조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내 곁을 떠나 밖으로 나가 여자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몹시 싫었다. 나는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종일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고 나 혼자만 소외되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괜히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기도 하였다. 아내는 나의 눈치도 봐야 하고, 장모님의 눈치도 봐야 했으므로 아마 중간에서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지만 별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가정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장모님은 홀로 두 딸을 키우면서 일을 해야 했기에 자식들을 독립심 강하게 키우셨던 것 같다. 집에서 살림을 하는 어머니의 상을 가지고 있는 나와 일을 하시면서 독립심 강한 딸을 키우신 장모님과는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면이 많아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힘들었고,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내의 마음은 많이 타들어 갔지만 아내를 비롯하여 식구들은 모든 일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처리해 나갔기 때문에 생활의 불편함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병원에서 나와 집에서 생활한 지 몇 달이 되자 종일 아내만 쳐다보면서 답답한 방 안에 갇혀 지내야만 하는 나도 힘들었지만 내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는 아내가 너무 힘들어 했다. 아내는 집에만 이러고 있지 말고 어디든 나가 보자고 했다. 병원에 있을 때는 동료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대화도 나누면서 하루하루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아파트 안에서 답답한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 계속되자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롭게 컴퓨터를 배우기도 했지만 컴퓨터에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았고, 컴퓨터와 노는 일이 그리 즐겁지도 않아서 가슴 속에 쌓여만 가는 답답함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수소문 끝에 일주일에 몇 번씩 장애인 스포츠 센터에 나가기로 했다. 집에서 아내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스포츠 센터에 가서 30분 정도 탁구를 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친다거나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손에 힘이 없어 탁구 라켓을 쥘 수가 없어 붕대로 탁구 라켓을 손에 묶고 팔을 움직여 공을 치곤 했다. 장애가 심해 배드민턴이나 수영과 같은 다른 운동은 할 수가 없고 단지 조금 가능한 것이 탁구였기 때문에 탁구를 잘 친다기보다는 그저 운동을 좀 하면서 가슴 속의 답답함을 털어 내고, 다른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알아 간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탁구를 치기 위해 우리는 일주일에 3일씩 몇 달을 꼬박 다녔다.
  집에서만 지내다가 차를 타고 드라이브도 하면서 나들이를 하게 되자 내 가슴 속에 쌓여만 가던 답답함은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지만 집에서도 나를 보살펴야 했고, 밖에 나가서도 늘 나와 함께 붙어 있어야 하는 아내는 점점 지쳐 가기 시작했다. 아내는 하루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나를 돌보는 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 나 역시 아내에게 자유의 시간을 주고자 했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가 없는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지쳐 가는 아내를 보면서 한 달 동안 나를 스포츠 센터에 데리고 다니는 일을 대신 해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임시 방편일 뿐이었다. 점점 지쳐 가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나 스스로가 아내만을 쳐다보는 것에서 벗어나 내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연습과 훈련을 통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것은 대소변 처리였다. 나는 목 부분의 중추 신경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가슴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러므로 대소변의 경우 변의나 요의를 느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변과 소변이 차서 밖으로 배설할 때가 되었을 때 혈압이 상승한다거나 열이 오른다거나 하는 몸의 신호를 통해 변을 볼 시간이 되었음을 감지하고 화장실에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 혼자서 대소변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부탁하거나 맡기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기구를 이용해 소변을 처리하는 것도 익숙한 사람이 하지 않으면 위생상의 문제가 생겨 감염 증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다. 장애를 갖게 되면 후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식사량이 많지 않아 대변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변은시간을 정해 놓고 처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때에 배출하지 않으면 갑자기 혈압이 오르고 열이 나는 전신 증상이 나타나면서 몸이 힘들어지고 방광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시는 물과 음료수의 양을 조절해 가면서 제때에 소변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다.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소변 처리를 할 수 있도록 기구를 사용하는 방법과 몸의 신호를 정확히 감지하는 훈련을 했다. 연습을 통해 혼자서 소변을 처리하는 일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나는 혼자서 스포츠 센터에 운동을 하러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잠시도 아내의 곁을 떠나지 못하다가 혼자서 사람도 만나러 다니고 운동도 하러 다니면서 지쳐 가던 아내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내 가슴의 답답함도 많이 가셨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있을 때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오로지 아내의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때는 그저 하루하루의 삶에 적응하는 것이 전부였고, 나 자신의 삶이라든가 미래에 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장애인으로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신변 처리와 관련하여 몇몇 가지를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자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 생활을 벗어나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3년 어느 날 나는 나보다 장애가 더 심하여 손을 전혀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분을 만나 입에 붓을 물고서 과연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나도 손에 힘이 없어 손으로 붓을 잡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는 없겠지만 팔에 연필과 붓을 묶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려 보기는 했지만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그려 보지는 못했고, 그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으나 조금씩 배워 나가다 보면 내 새로운 삶의 좋은 방향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지도를 받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중증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분들과 교류하면서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다. 나보다 앞서 그림을 시작한 분들로부터도 배우고 우리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알게 된 여러 사람들로부터 간간이 지도를 받아 가면서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취미삼아 소일거리로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부족한 그림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일이 부끄러워 처음에는 전시회를 개최할 용기가 나지 않았으나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도 받고 그림을 통해 사람을 만나면서 나를 표현해 가는 일이 늘어나자 이제는 그저 취미가 아니라 내가 걸어가야 할 분명한 길로 다가오고 있다. 건강과 체력을 관리하면서 좀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면서 나 자신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 갈 생각이다.
  장애를 갖기 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막상 장애인이 되고 보니 가장 견디기 힘드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지금도 아는 친구들은 많지만 그래도 가까이 지내는 건 어릴 적 친구들이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거리감이 생겨 멀어져 갔다. 어릴 적 친구들은 지금도 편안하게 집으로 찾아오고 이들이 찾아오면 예전과 다름없이 이야기도 나누고 아내나 아이와 함께 놀다가 돌아가곤 한다. 병원에서 나와 집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 예전에 계모임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내가 들어가자 갑자기 어색한 표정이 되더니 10분이 멀다하고 어디 불편한 곳이 없느냐, 어떻게 해 줄까 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 친구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그 친구들은 중증 장애를 갖고 나타난 나를 상대하기 힘들어했다. 그저 내 모습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대해 주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나를 볼 때마다 어떠냐, 힘들지 않느냐는 말로 애써 나를 위로하려 하였고, 나를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친구들 모임에 몇 번 참석했지만 내가 함께 하는 것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 같고 나로 인해서 좋던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 같고 어색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그 모임에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대하면 자신들이 무엇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며, 장애인은 늘 무엇이 불편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편안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나의 몸은 비록 심한 장애를 갖게 되었고,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이 있고,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나의 마음과 정신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친구들은 예전의 내 모습 그대로 예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대하기보다는 나와 본인들 사이에마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장애를 갖고 나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은 처음부터 장애인인 나를 만난 것이었기에 나의 모습 그대로 나를 대해 주었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예전부터 알던 친구들은 예전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난처해하는 것이었다. 나를 격의 없이 대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대하는 친구들과의 사이는 그렇게 서서히 멀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친척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장애를 갖고 나서 처음으로 외사촌 결혼식에 갔을 때였다. 결혼식에 모인 친척들은 나를 상대하기 어려워했다. 내가 처음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문안을 왔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사고를 당한 일과 중증 장애를 갖게 된 사실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 들으면서도 문안 한번 오지 않았던 사람들은 미안해서인지 나를 보자 매우 어색해하며 시선을 피하곤 했다. 나는 아루렇지도않은데 공연한 자격지심이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하지 못하고 과장된 행동과 말로 대하다 보니 자연스런 관계가 되지 못하고 불편함이 지속되자 같이 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힘이 들었던 것이다. 나를 불편해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나에게도 쉽지 않았다. 내가 참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음부터는 결혼식 같은 행사에는 아내만 보내고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모습 그대로 대해 주면 되는데 자신들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바라보는 일도 어색하게 여기기 때문에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 같다.
  장애를 가진 동료들을 만나면 어릴 적 친구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편안함을 느낀다. 상대의 힘겨움을 이해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무늬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으므로 가깝게 지내는 동료들이 많다. 그러나 가끔은 나처럼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람과 어릴 때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 사이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색함과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름대로 사회 생활의 경험이 있는 중도 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대인 관계의 규범도 이해하고 있고, 사회의 흐름에 대한 식견도 있어 함께 일을 진행할 경우에 상식선에서 일을 진행하는 편안함이 있다. 그러나 선천적인 장애인이나 어린 시절에 장애를 가져서 사회 생활의 경험이 부족한 장애인은 기본적인 대인 관계 룰에서나 상식선에서의 일 처리와 관련하여 답답한 행동과 말을 고집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면 장애 속의 장애, 장애인 사이의 벽과 단절이 느껴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일정한 법칙이 있겠는가. 서로 대화하고 나누면서 이해해 나가다 보면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 가는 것 아니겠는가.
  운동을 하면서 무릎을 다쳐 한쪽 다리가 좀 짧아 걷는 데 불편을 느끼는 후배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이 후배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을 때 함께 운동을 하던 중증 장애인들은 우리가 그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지 참석하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친구와 결혼을 하는 신부 측이나 그 친구 자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친구에게 우리의 결혼식 참석 문제에 관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더니 그 친구는 우리들에게 참석하지 말아 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들은 그 친구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중증 장애인은 갈 수 없어도 경증 장애인은 가도 되지 않겠느냐, 아니면 다른 하객들보다 먼저 식장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제일 나중에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 식당에서도 남몰래 먼저 밥을 먹고 나가면 되지 않겠느냐 등의 농담이 오가기는 했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 결혼식에 아내를 보내 축하해 주었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벽과 거리감, 단절감을 새삼 느껴야만 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나는 비록 내가 직접 경기를 하지는 못해도 관람하기 위해 자주 경기장을 찾는다. 한번은 아주 재미있게 관암을 하고 있는데, 뒤편에서 “나도 다음에 올 때는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고 저 사람들처럼 저 자리에 앉아야겠다, 장애인이면 다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한창 고조되던 기분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더는 경기에 시선을 집중할 수 없었다. 혹시나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해서 양해도 구하고 휠체어 전용석 바로 뒷줄은 함께 간 가족이나 안내인들이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향해 던지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말투와 날카롭게 찌르고 있을 그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여 좀처럼 편안히 경기를 관람할 수가 없었다.
  편의 시설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아 농구 경기장에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예전에 비한다면 지금은 휠체어용 경사로도 마련되어 있고 휠체어 전용석도 십여 석이나 준비되어 있으며, 경기 관람을 안내하는 사람들도 친절해서 농구 경기의 박진감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런데 휠체어 전용석을 설치하면서 다른 좌석과의 높이 차이나 다른 관람객의 편의 등을 함께 고려하지 않아 휠체어 전용석 뒤편에 앉아야만 하는 일반 관람객들의 불평을 사곤 한다. 휠체어 전용석은 휠체어에 비해 낮아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몇 개의 좌석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휠체어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비워 두고, 휠체어 전용석까지 휠체어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나 경사로 등의 편의 시설을 마련한 정도가 전부이다. 휠체어 전용석 뒤편에 앉아 경기를 관람해야 하는 일반 관람객의 좌석의 높이를 휠체어 높이와 휠체어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는 장애인의 키를 고려하여 적절하게 배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휠체어 전용석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게 되면 전용석 뒤편의 일반석에 앉은 관람객은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머리에 시야가 가려서 경기를 제대로 관람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 동일한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서 휠체어 전용석 뒷좌석을 배정받게 된 사람은 제대로 경기를 관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불평과 불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은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 같이 편리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이 비장애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한 일들이 사회구성원 모두의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날 경기 시간 내내 나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던 그 사람들도 마땅히 쾌적한 환경에서 경기를 관람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설치된 시설로 인해 마음이 언짢아진 것이고, 그 사람의 언짢은 기분이 우리 장애인들에게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도 자신의 권리 침해가 휠체어 전용석의 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체육관 시설 관리자의 잘못으로 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화풀이를 함으로써 경기를 관람하는 장애인들의 가슴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만일 휠체어 전용석을 마련하고 편의 시설을 준비한 사람들이 이러한 면들을 미리 검토할 수 있었더라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우리 사회를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이 아니라 서로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는 일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번은 비장애 선후배들과 모임을 갖고 나서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렀는데, 식당 주인이 휠체어가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나는 주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식당이 좁아서 내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없으니 휠체어에서 내려 다른 사람이 업고 들어와 앉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나 혼자뿐이고, 내 휠체어는 수동이어서 전동 휠체어처럼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주인의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났다. 주인의 태도에 대해 옆에 서 있던 선배가 주인에게 항의를 하려고 했지만 나는 나 한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선후배들이 모두 불편을 겪게 될까 봐 선배를 만류하면서 나는 방에 앉아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게 웃으면서 그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온 일이 있었다. 그 식당이 손님이 많아서 휠체어가 들어가면 복잡하기도 하고 우리들 몇 사람에게 음식을 팔지 않더라도 영업에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휠체어를 타고 식당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른 손님들 보기에 식당 이미지가 나빠질까 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주인의 어이없는 태도 때문에  맛있다고 소문난 그 집의 음식도 내게는 아무런 맛을 느끼게 하지 못했다.
  나처럼 중추 신경이 손상된 중증 장애인은 허리에 힘이 없어서 방바닥에 혼자 앉아 있기가 무척 힘이 든다. 방바닥에 앉아 낮은 상에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식당에서는 제대로 앉아 식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 할 경우에는 방에 앉아서 식사를 해야 하는 식당을 피하고 주로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식탁을 놓아 둔 식당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대다수의 식당이 방에 앉아 낮은 상에서 음식을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찾아 놓고 나면 식탁이 없고 방에 낮은 상에 앉아서 먹는 구조로 되어 있고, 식탁이 놓인 식당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고 식탁이 놓여 있는 식당을 찾아 헤매다 보면 점심 한 그릇 사 먹기 위해 한두 시간을 길에서 보내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니 밖에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식사를 해야 할 경우에는 몇몇 단골 식당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집을 구하거나 사무실을 얻으려 할 때 동네 사람들이 집이나 사무실 등을 임대하려 하지 않는 것 또한 장애인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 중의 하나이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동료 장애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그림에 대한 정보도 교환하며 이제 막 그림을 시작하려고 하는 장애인들에게 그림도 가르치기 위해서 작은 화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안정적인 화실이 없어 그동안 이사를 많이 했다. 화실을 얻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많은 건물주들이 장애인들이 세를 얻으러 왔다고 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 가며 임대를 거절했다. 사람들은 장애인이 거주하게 되면 건물이 지저분해지고 훼손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장애인들이 들락거리다 보면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일어날까 염려해서인지, 이미지가 나빠져 집값이 떨어지거나 나중에 세를 놓기가 어려워진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지만 가는 곳마다 입주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지금은 가까스로 다소 구석진 곳에 있는 주택의 1층을 얻어 사용하고 있는데, 집주인이 경증 장애인이어서 특별히 장애인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임대를 해 주었던 것 같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혼자서 운전을 해서 화실에 나가거나 볼일을 보러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혼자서 소변을 처리하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고, 부족한 팔 힘으로나마 스스로 수동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것도 별로 힘들지 않는다. 그런데 혼자서 차를 타고 볼일을 보러 갈 경우에는 휠체어를 차에서 내려서 옮겨 타는 일이 가장 문제가 된다. 휠체어를 내리거나 차에 싣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가 없다. 팔 힘이 부족하고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서도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해야만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와주지만 개중에는 도와 달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이 지나쳐 버리거나 바쁘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한두 번 도와준 사람들 중에도 내 시선을 피하며 지나쳐 가는 사람도 있고, 내가 도와 달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바빠서 안 된다고 말을 하고는 급히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예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는 이들도 종종 있다. 처음 혼자서 길을 나섰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와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몇 번이나 입을 떼려다가는 그만두고 입을 떼려다가는 그만두기를 반복한 적이 많았다.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지만 나를 돌아보고 인상을 쓰거나 모른 척 외면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무안하고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사람이 지나가기를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일도 종종 있다. 급한 볼일이 없을 경우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약속 시각이 임박했거나 소변이 급한 경우에는 마음이 초조해지고 혼자서 볼일을 보러 다니는 일의 힘겨움에 몸과 마음이 지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나가는 화실이 위치한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나처럼 휠체어를 내리고 올리는 일을 도와 달라고 하는 장애인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그들에게 불편을 끼친다고 생각해서인지, 장애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까닭에 동네 이미지가 나빠져 집값이라도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의 그런 태도를 접할 때마다 장애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우울하고 쓸쓸한 생각이 한동안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한다.
  장애인 복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장애인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이 늘어나고 있고 정부의 복지 정책도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아직 그다지 따스하지 못한 것 같다. 장애인을 별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하며, 무엇을 도와주어야 할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 역시 그대로인 것 같다.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장애인도 인격을 가진 사라음로 대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로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격적 주체로 대우하면서 소통할 수 있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장벽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문학 강좌

  감성 교육과 학업 성취도

  윤일현(교육평론가)

  1. 감성과 이성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착한 존재가, 사람의 손에서 모든 것이 타락한다.”
루소가 “에밀” 첫 줄에서 기술하고 있는 선언이다. 그는 ‘사회 제도와 정치 제도, 그리고 교육’이 인간의 본성을 왜곡한다고 지적했다. 루소가 추구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자연인’이다. 그가 말하는 자연인이란, 방치된 상태의 인간이 아니라 ‘감성’과 ‘이성’이 순차적인 발달 과정에 따라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제대로 교육받은 인간을 말한다. 그는 진정한 자연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단계적으로 조화시키는 과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에 따르면 아동기에는 ‘감성 교육’, 그 후 소년기, 청년기까지는 ‘이성 교육’에 중점을 둬야 한다. 감성과 이성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선후의 문제이다. 감성은 이성의 발달에 전제되는 기초이고, 이성은 감성의 성숙 단계이기 때문에 둘은 필연적인 협력 관계에 있다. 또한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진리 추구의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는 틀에 박힌 교육을 거부하고 개인의 잠재력과 개성을 그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광기에 가까운 논술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적이 있었다. 차가운 이성과 논리는 범람하는데 섬세한 감성과 뜨거운 감동, 온몸을 전율하게 하는 도취는 없었다. 독서의 즐거움과 작품 읽기를 통한 감동을 맛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딱딱한 논리와 형식적인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논술 지도는 가능성의 총체인 아이들을 정서적인 불구자로 만들 수 있다. 논리의 근저에는 풍부한 감성이 있어야 한다.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우리 아이들은 한 작품을 깊이 있게 읽으며 진한 감동을 체험하기보다는 요약집을 통하여 여러 작품의 줄거리를 암기하도록 강요받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독서에 무슨 감동이 있고 즐거움이 있겠는가. 논술 시험 따위는 염두에 두지 말고 좋은 글을 즐겁게 읽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가슴 뭉클한 감동과 도취를 경험하지 않으면 그 어떤 합리성과 논리의 추구도 결국에는 피로와 권태로 이어진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글을 읽고 몸과 마음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이는 작품 감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감동과 감성은 논리나 이성보다 깊고 긴 여운을 남긴다. 논술 지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루소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감성에 의해 이성은 완성된다.”

  2. 상상력과 국가 경쟁력
   아난트 인도 공과 대학 총장이 지난 2월 서남표 KAIST 총장과의 대담에서 “상상력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아시아 인재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다. 서양의 과학은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정리해서 모델을 만들어 실험하고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서양의 방식은 너무 오래 세계를 지배했다. 아시아는 서양에 부족한 직관(intuition)이란 게 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상상력이다. 그런데 아시아에서는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자제시키면서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 여기에 보다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상상력을 강조했다. “아시아 사람들은 서양에 의해 이미 증명돼 있는 문제를 좇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문제를 찾고 그것을 풀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 우리가 발전시키고 싶은 것, 그리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에서 학문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서남표 총장이 덧붙인 말이다.
  미래학의 대부로 불리는 짐 데이토 하와이 대학 미래 전략 센터 소장은 정보화 사회 다음에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가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 드림 소사이어티에서는 이미지(image)와 이야기(story)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이미지의 생산·결합·유통이 경제의 뼈대를 구성하며, 거기에 감성적 스토리가 덧붙여질 때 새로운 부가 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꿈과 이미지에 의해 움직이며, 경제의 주력 엔진이 정보에서 이미지로 넘어가고, 상상력과 창조성이 국가의 핵심 경쟁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포장하여 수출하는 한류(韓流)는 한국이 드림 소사이어티 1호 국가임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안대회 교수의 저서 “선비답게 산다는 것”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 보자. 조선 시대에는 어린이가 쓴 한시를 동몽시(童蒙詩)라고 불렀다. 광해군이 신임하던 무인(武人) 박엽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어느 날 등불을 켜라고 하고는 손자에게 시를 한 번 지어 보라고 했다. 박엽이 즉석에서 시를 지었는데 한 구절만 남아 전해진다. “등불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밤은 밖으로 나가네(燈入房中夜出外)” 안 교수는 소년의 깨끗한 영혼이 빚어낸 자연스러우면서도 재치 있는 표현에 감탄하며 어린이에게는 죽은 것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직관력과 상상력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완성된다. 어린 시절 약한 뿌리는 나중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동심과 시심(詩心)은 그 뿌리를 튼튼하게 살찌우는 최고의 자양분이다. 대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많이 느끼고 다양하게 체험할 때 동심과 시심은 활력을 유지한다. 죽은 것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창조자를 밀실에 가두고 타고난 상상력을 질식시키는 행위는 개인과 국가의 미래를 죽이는 폭거이다. 쉴 새 없이 학원으로 내몰리는 어린 영혼들이 너무 안쓰럽다.

  3. 모국어와 창의력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카이스트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학생과 교수의 자살은 우리 교육 전반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학점이 낮은 학생들에게 수업료 일부를 내게 하는 ‘차등 등록금제’는 대학 생활의 낭만과 즐거움을 빼앗아 갔고 무한 경쟁만 남겼다. 일부 학생들은 전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영어 강의 수업’이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영어 강의는 교수와 학생의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전달도 안 되는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절규했다.
  제18차 세계 언어학자 대회에서 옥스퍼드 대학의 S. 로메인 교수는 ‘국제화하는 세계 속에서 언어의 권리, 인간의 발전, 언어의 다양성’이라는 주제 발표를 하면서 “인간은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소수 민족의 언어는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 언어의 유지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며, 한 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복리 증진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언어의 다양성은 중시되어야 한다.”고 했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가 인간의 생존 기반 자체를 위협하듯이, 언어 다양성의 감소 또한 인류 전체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빈곤하게 하여 인류 역사를 퇴보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카이스트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중국사도 동양 철학도 일본어도 영어로 배운다. 딱 한 번 한국어로 강의를 받아 본 적이 있다. 보강 수업이어서 가능했다. 너무 잘 알아들을 수 있어서 혁명적이었다.”라고 했다. 게시판에는 “영어 강의를 한 번도 이해해 본 적이 없다.”는 글도 올라와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만큼만 사유한다는 말이 있다. 언어는 한 인간의 세계관, 사고의 깊이와 넓이까지도 규정한다.
  과학적 발견이나 창조, 문학적 영감은 서로 같은 정신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이론이나 문학 작품은 먼저 직관적으로 느끼고 그 다음 표현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과학이든 문학이든 최초의 직관은 대개의 경우 모국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어떻게 동양 철학을 영어로 이해하고 느껴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놀랍다. 인간은 언어 행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불렀다. 모국어로 사고하고 느끼는 과정을 박탈당한 카이스트 학생들은 존재의 집을 잃고 방황하다 자살까지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은 모국어를 매개로 할 때 가장 예민한 문화적, 정서적, 심리적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모국어를 잘 하는 것이 고급 영어를 습득하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알아야 한다. 젊은 날 모국어를 통해 풍부한 감수성과 표현력을 배양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4. 경쟁력을 기르려면
  고2 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진로 상담을 받으러 왔다. 장래 희망이 의사라고 했다. 현재로서는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 찾아왔다고 했다. 학교 생활과 공부가 즐거운지 등을 물었다.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고 했다. 또 질문이 없느냐고 묻자, 자기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의사가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미래에 성공하려면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간혹 가슴이 터질 정도로 답답한 때가 있어 힘이 든다고도 했다.
  좋은 의사, 병원 경영에 성공하는 의사가 되려면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의사도 서비스업 종사자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서비스 정신을 기르지 않으면 실력이 뛰어난 의사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예방과 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을 것이다. 치료보다는 의사와 대화하고 상담하며 위로받기를 원하는 환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실력은 기본이고 사람을 설득하고 감화시킬 수 있는 섬세한 감성이 최종적인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고객들은 상품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동을 받아야 가까이 다가간다. 사람을 가까이 다가오게 하려면 권위적인 태도를 버리고 친절하고 겸손해야 한다. 가식이 사라지고 알맹이만 남는 시대가 이미 도래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을 하여야 한다. 젊은 날 전공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식의 폭을 넓혀야 한다. 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는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라고 말했다. 자연 과학도가 인문학적 교양과 예술적 감성을 가질 때, 인문·사회 과학도가 자연 과학의 주요 흐름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이 학생은 공부는 잘 하고 있으니 더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F. 베이컨의 “독서는 완성된 사람을 만들고, 담론은 기지 있는 사람을 만들고, 작문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과 함께 몇 권의 책을 추천해 주었다. 가슴 속의 답답함은 여행으로 치유될 것 같았다. 여행의 진정한 기쁨은 새롭게 접하는 경치가 아니라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즐거운 기분이다. 출발할 때의 가슴 설레는 기대와 밤의 휴식이 주는 평화와 내적 충만함은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긴 대화를 요약하며 운동과 독서, 비록 짧지만 여행을 해 보라는 충고를 했다. 학생의 눈은 반짝거렸지만 어머니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5. 청소년기와 여가 선용
  “필연은 문명의 어머니이고, 여가는 문명의 유모”라고 토인비는 말했다. 서구식 의미의 ‘여가(leisure)’는 희랍어 스꼴레(Schole)와 라틴어 리께레(Licere) 등이 그 어원이다. 스꼴레는 ‘여가, 학술 토론이 열리는 장’이란 뜻이며, 후에 영어의 학교(school), 학자(scholar)로 바뀌었다. 리께레는 ‘허락되다, 자유스러워지다’란 뜻으로 현대적 여가의 어원이다. 스꼴레는 강제력 없이 자기 교양을 높이려는 진지하고 적극적인 지적·문화적 창조 활동을 의미한다. 두 어원이 말해 주듯이 여가란, 단순히 남는 시간, 혹은 쉬는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 학습, 자유, 예술 등을 포괄하는 매우 폭넓은 의미를 가진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안정을 유지했지만 제국을 얻자마자 붕괴되고 말았다. 그들은 평화가 가져다주는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들은 전쟁 훈련 이외는 다른 것과 더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훈련도 받지 못했다. 전쟁을 목적으로 삼는 국가의 대부분은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만 안전하다. 그들이 제국을 세우자마자 붕괴되고 평화 시에는 사용하지 않는 칼처럼 그들의 예리한 기질을 상실한다. 입법가는 여가를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은 데 대해 비난받아야 한다.” 신득렬 교수의 최근 저서 “행복의 철학”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와 교육 제도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나가고, 학교 수업 마치자마자 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하고, 다시 돌아와 새벽 1시 너머까지 책상 앞에서 버티고, 네다섯 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학교에 가는 우리 아이들. 대다수의 가정은 입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에만 안전하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던 형식적인 대화와 예리한 긴장은 상실하게 된다. 부모는, 특히 어머니는 심한 허탈감이나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진정한 대화를 경시하고 여가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은 데 대해 비난 받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수험생이 있는 가정의 상황으로 바꿔 본 것이다.  
  스파르타는 비옥한 농토 때문에 다른 도시 국가들보다 부유했다. 그러나 여가 선용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 대다수의 가정은 예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체계적인 여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소양과 인문적 교양이 결여된 상태로 대학에 입학한 후, 별 죄의식 없이 방종과 퇴폐에 빠져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 시간과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에 의해 공동체의 질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가는 교양의 기초”라고 했다. 5월이 가기 전에 온 가족이 함께 각 가정에 맞는 여가 선용 방법을 찾아 실행해 보자. 청소년기에 여가 선용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어른이 되고 나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6. 버지니아 울프의 학습 방법
  영화관에서 슬픈 장면이 계속 이어지자 앞 좌석에 앉은 어느 아저씨가 남에게 들릴 정도로 훌쩍인다. 그 뒤엔 젊은 부부가 앉아 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그 아저씨를 가리키며 여자에게 속삭인다. “좀 모자라는 바보 아냐? 사내가 영화를 보며 울다니.”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완전히 몰입하여 진정으로 주인공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바보인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 바보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슬픈 장면을 보고 같이 슬퍼할 수 없는 사람은 정서적인 불구자라고 할 수 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당대의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영국 인명 사전”의 초대 편집장이었으며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했다. 울프의 아버지는 날카롭고 명징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학문적으로 눈부신 성취를 이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그들의 공저 “생각의 탄생(에코의 서재)”에서 울프의 아버지는 위대한 문학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남긴 것은 무미 건조한 분석적 비평이 전부였다고 지적한다. 울프는 자기 아버지 스티븐을 분석·비평 능력과 창작 능력이 일치되지 않는 불행한 지식인으로 평가했다. 울프의 아버지도 자신이 이류 지성인에 불과하다고 딸에게 고백하곤 했다. 울프는 아버지가 받은 케임브리지의 교육이 두뇌만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하여 정신은 불구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했다. 케임브리지의 가혹한 교육은 음악, 미술, 연극, 여행 같은 여가 활동에 심각한 결핍증을 가져왔고, 그 결과는 지적 편중과 좁은 시야였다는 것이다. 주입식 공부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울프의 아버지는 훗날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된 후에도 학생들에게 항상 시험만 생각하고, 책에만 매달리며, 졸업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즐기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분석하고 종합하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창작하고 창조하는 능력에서는 좌절을 느낄 정도였다.
  아버지보다는 훨씬 괄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작가보다도 모험적이고 창의적이었던 울프는 대학에 갈 수 없어 좌절을 느끼기도 했지만, 집에서 독학하며 폭넓게 종합적인 방법으로 학습했다. 아버지를 통해 월터 스콧, 제인 오스틴,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의 고전 작품을 접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자연사 박물관에서 보냈고, 잠들기 전에는 형제들과 함께 지어낸 이야기를 가족 신문에 싣기도 했다. 울프는 책을 읽을 때 등장 인물에게 완전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으며 종종 자신을 잊고 그들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공부하며 편협한 분석 능력만을 키운 아버지의 한계와 진부함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학습 경험이 몸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울프 부녀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미래는 예민한 감수성과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사회이다. 단편적인 지식을 맹목적으로 암기하는 것으로는 경쟁력이 없다. 어떤 일에 집중하고 몰입하며 깊게 젖어들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배양해야 한다. 영화관에서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7. 정서적 공감대 만들기
  자녀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돈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투자에 비례하여 기대하는 바를 성취하고 있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다수 부모들이 고개를 흔들고 있다. 많은 부모들은 바친 시간과 돈과 노력에 비례하여 그만큼 허탈감도 커진다고 푸념한다. 심지어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도 위기를 느낄 정도로 힘들다고 고백한다.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가정도 많다. 자식에게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면서도 왜 이런 서글픈 결과를 얻게 되는가? 자녀 교육 전문가들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된다고 말한다. 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지적, 인격적 성장을 위해 정서적 공감은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 부모와 자식이 추억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본다.
  (1) 일상을 공유하는 지혜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거의 모든 것을 바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자녀에게 투자하는 돈과 관심은 분명히 예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진정한 정서적 교감은 줄어든 가정이 많다. 각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는 경제적 지원만 해 주면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부응하여 공부만 열심히 해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모의 수고도 모르고 주변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도 없이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한다. 자녀가 기대만큼 공부를 하지 못할 때 부모는 물질적으로 제공해 준 것만 생각하며 아이에게 온갖 악담과 실망의 말을 퍼붓는다.
  영국의 어느 연구소는 부모와 특히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집 자녀가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은 물론이고 정신적, 정서적 성장과 관계되는 일들도 가정 밖에 맡겨 버리는 경향이 있다. 요즈음은 학원이 자녀의 학습은 물론이고 생활 지도까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고 모든 것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한 가족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부를 떠나 부모 자식 간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이벤트가 많아야 한다. 다양한 가족 이벤트는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해 준다. 부모와 자녀가 육체적,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특별한 계획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다.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생활 속에 그 모든 해답이 있다.
  (2) 사례1 자연 속에서
  A씨는 범물동에 사는 주부이다. 첫째는 딸인데 의예과 2학년이고 둘째는 아들인데 고1이다. 아버지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첫째가 고3일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 가족은 지금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용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늘 가족과 함께한 산행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둘째와 함께 매주 일요일마다 동네 앞산인 용지봉에 오르면 자신과 아이는 남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며 늘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A씨의 남편은 첫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2 겨울까지 매주 일요일이면 가족과 함께 용지봉 산행을 했다. A씨 가족들은 산을 오르면서 봄부터 겨울까지 용지봉 주변의 야생화를 관찰했다. 노루귀, 깽깽이풀, 현호색, 할미꽃, 양지꽃, 은방울꽃, 뻐꾹채 등등의 야생화들이 언제 어느 비탈에서 피는지를 함께 기록했다. 해마다 은방울꽃이 만개할 때면 친구 가족들을 초대하여 봄꽃 축제를 벌이곤 했다. 물론 시험이 임박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함께 가지 못했지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같이 산행을 하려고 노력했다. “동네 앞산을 올라가는 것은 여러 면에서 좋습니다. 우선 돈이 들지 않습니다. 김밥은 집에서 만들어서 가고, 사정이 있어 준비를 못했을 경우 동네 앞 가게에서 사면 됩니다. 쉴 때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가파른 곳을 오를 때면 손을 잡고 끌어 줍니다. 그런 스킨십을 통해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 대화의 단절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게 어떤 상태인지 궁금합니다.” A씨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행복한 추억에 잠기는 것 같았다.
  병이 악화되어 움직일 수 없을 때도 남편은 아이들에게 산행을 권했다. 남편은 평소 “자연을 보라. 그리고 자연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가라.”고 한 루소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A씨는 세상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학교 생활이 어렵고, 인간 관계가 힘들 때 산행을 하면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많은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A씨는 많은 부모들이 한 치 앞만 바라보고 여유 없이 생활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자녀들과 함께 자연 속으로 나가 보라고 권한다. “남편은 일찍 아이들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렵지만 별로 내색하지 않고 자기 일을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는 가슴 뭉클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산이나 들로 나가면 열리는 마음 문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3) 사례2 책과 함께
  P씨는 중3 아들과 중1 딸을 가진 전업 주부이다. P씨 가족은 남편이 봉급을 받는 그 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점에 간다. 결혼하던 해부터 지금까지 17년간 계속 남편이 봉급을 받는 주일엔 서점에 간다고 한다. 특별한 동기가 있느냐고 묻자 고1 때 국어 선생님 때문이라고 했다. P씨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가르친 교과 내용은 다 잊어버려도 괜찮다. 다만 이것만은 꼭 기억해 다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 봉급날 쌍칼 들고 고기 썰며 외식하는 것을 여자의 행복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서점에서 만나 시집 한 권, 문예지 한 권이라도 사서 함께 읽을 수 있는 부부가 되어라. 아내가 현명하고 교양이 있을 때 자녀는 절로 잘 자라게 되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가 품위 있게 발전할 수 있다.”
  아이들이 없을 때는 주로 베스트 셀러류를 사서 읽었는데 아이가 생기고 성장하면서 아이 중심으로 책을 사게 되었다고 말한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온 가족이 함께 읽을 책을 샀다고 말한다. 독서 지도사 과정에도 등록하여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이들의 독서 지도를 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읽은 책의 독후감을 간단히 적어 기록한다고 말한다. 전에는 부모가 정한 책을 읽게 했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보자는 책을 많이 읽게 된다고 한다. 그 덕에 아이와 함께 판타지 소설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부모와 아이들이 각각 한 권씩 선정하기로 타협했다고 한다. P씨는 말한다. “아이들과 함께 서가에서 책을 선택하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함께 책을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한 지적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 공동의 책을 선정하기 위해 신문 서평을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4) 사례3  함께 식사하기
  N씨는 현직 교사이다. 3년 전에 처제가 같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유는 처조카가 다소 의지가 약하고 공부에 열의가 적어 교사인 N씨의 지도와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N씨는 아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학습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먼저 아이의 성격을 파악해야 했다. 처조카는 자존심이 강하여 남이 충고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지도 않았다. N씨는 아내와 역할을 분담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처조카를 한 달에 두 번 정도 N씨 집에 초대하여 같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모는 조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조카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모에게 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은 이모와 같이 시장에 가기도 했다. 시장을 오가면서 이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때 이모는 조카에게 공부 이야기는 하지 않고 무한한 애정과 관심만 보여 주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식탁에서 N씨도 공부와 관계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친해지고 나자 아이는 자발적으로 공부와 관련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N씨는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충고와 지도를 해 주었다. 처조카는 고3 때도 N씨 집에서 주기적으로 식사를 함께 했다. 아이에게 이모 집은 새로운 에너지와 활력을 얻는 재충전의 원천이었다. 중학교 때 전교 50등 정도 하던 아이가 고3 때는 전교 10등 안에 들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바라는 대학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N씨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도법을 ‘식사 요법’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요즈음은 각자가 너무 바빠 한자리에 앉아 같이 식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 부모 자식 간에 대화도 단절되고 서로 의사소통도 되지 않습니다. 같이 음식을 준비하고 즐겁게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면 그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 속 아이를 한번 보세요.
  “시험도 못 친 주제에 어딜 간단 말이냐? 보충 수업 마치고 오후에 학원 한 군데 더 다닐 생각이나 해라. 죽도록 공부해도 다른 아이들 따라 잡을 수 있을까 말까 한 녀석이 무슨 헛소리냐? 아예 놀 생각 따윈 하지도 말아라.” 기말 시험 마치던 날, 방학하면 친구들과 사흘 정도 바다로 캠핑하러 가게 해 달라는 아들의 간청에 아버지가 내뱉은 말이다. 이렇게 윽박지르는 아버지, 당신은 완전한 모범생이었는가?
  대다수 아버지들은 학창 시절 바닷가 솔밭에서 친구들과 야영한 경험이 있다. 좁은 텐트 속에서 여러 명이 다리를 포개어 잠을 잤다. 해거름 낙조의 풍경에 잠기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어느새 새가 되어 있었다. 갯바위에 앉아 시집을 읽다가 잠시 눈을 들어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 낸 해송을 바라보면 스스로 멋진 소나무가 되는 느낌도 받았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어린 왕자가 되어 우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한없이 게으름을 부리면서 별과 바람과 나무와 바다와 일체가 되어 본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으면 책 속에 몰입하는 것이 그 전보다는 훨씬 더 쉬웠다.
  감정 이입의 본질은 다른 사람, 다른 것이 되어 보는 것이다. 감정 이입을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자 칼 포퍼는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공감각적인 직관’, 혹은 ‘감정 이입’이라고 했다. 또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라고 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쓴 ‘생각의 탄생’에는 감정 이입에 탁월했던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예가 많이 나온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는 “작가는 묘사하고 있는 인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작업 중에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물이 될 때까지 계속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나무를 묘사하고 싶으면 스스로 나무가 되어야 한다.
  훌륭한 의사는 감정 이입을 통해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한다. 의사 스스로 환자가 될 때 환자는 마음의 문을 열고 진단과 치료에 필요한 모든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의사는 자신이 의료 기술자가 아니라 환자에게 보살핌과 배려를 해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에모리 의대의 존 스톤 교수는 “문학은 젊은 의사들이 적절한 감수성을 갖도록 해 주고,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심지어 자신이 환자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스스로 환자가 되어 보는 능력 유무가 뛰어난 임상의와 그렇지 않은 의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사냥에 성공하려면 사냥감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녀를 제대로 지도하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아이가 되어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건강한 어른의 내면에는 건강한 아이가 있다.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아이의 눈높이로 자기 아이와 마주할 때 모든 대화에서 수용과 경청은 가능하다.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먼저 아이와 유대감과 신뢰감을 형성한 뒤, 바람직한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어 준다. 아이의 감정과 욕망을 무시하고 방치하거나 억압하면 그 감정과 욕망은 더욱 격해지고 뒤틀리게 된다.
  “그래,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 실컷 놀다 오너라. 가볍게 읽을 책은 한 권 가져가거라. 아빠는 고2 때 계곡으로 캠핑 갔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떠내려갈 뻔했단다. 그날 어디서 모이니? 아빠가 데려다 줄게.” 아빠가 공감하고 지지해 줄 때 아이는 더 다양하고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자연과 문학은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가동시킬 수 있는 풍부한 자원과 기회를 제공한다. 곧 방학이 시작된다. 잠시나마 아이들에게 방학을 돌려주자. 이게 바로 미래를 위한 투자임을 아버지, 당신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8. ‘엄마의 방’이 있습니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꿈 많았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당신은 집에서 아이들만 잘 키우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당신은 나의 수고와 절망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 수중엔 돈 한 푼 없고, 내 귀에서는 늘 환청이 들립니다. 나는 힘들 때 친정 어머니 산소 외에는 혼자 마음껏 울 수 있는 장소조차 없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어느 여인이 일기장에 적은 유서의 첫머리이다. 우연히 유서를 훔쳐본 남편이 아내에게 무심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아내를 입원시켜 놓고 조언을 구하러 필자를 찾아왔다. 필자는 그 유서를 읽으며 불현듯 버지니아 울프와 ‘자기만의 방’을 떠올렸다.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소설 ‘세월’을 탈고한 후 1941년 3월 어느 날, 주머니 속에 돌을 채우고 오즈 강물에 몸을 던진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유서의 첫 부분이다.
  앞의 유서는 남편과 자녀와 자신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고, 뒤의 유서는 유년의 상처를 이해해 준 남편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시작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시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 모두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생각하며 유서를 썼다.
  버지니아 울프는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쓴 곳은 그녀만의 공간에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울프는 오스틴이 그 대작을 가족 모두가 함께 기거하는 공동 거실에서 집필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억압받는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자기만의 방’에서 만약 여성이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두 가지 열쇠만 찾을 수 있다면 미래에는 여성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열쇠란, ‘고정적인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투표권과 돈을 선택하라고 하면 돈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돈이란,  사람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며, 가난으로 인해 생긴 분노를 없애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권 신장이 남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는 21세기에도 한국의 여성은 가사와 자녀 교육이 주는 그 모든 부담을 감당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힘겹다. 남자는 남자대로 이 불황에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바깥에서 얼마나 악전고투하는지 처자식은 모른다고 항변할 것이다. 자신의 어려움만을 주장하며 일방적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부와 자녀 모두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같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엄마들은 자신이 자녀와 남편의 몸종이 된다고 그들이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맹목적으로 가족의 몸종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할 때 남편과 자녀는 더 행복해 질 수 있고, 자신의 존재감이 더 강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행복’에서 연애 시절의 사랑은 세월과 더불어 다른 형태로 변한다고 말한다. 연애 시절의 낭만적 열정이 평생 유지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남편은 “이제 우리는 조금만 옆으로 비켜서서 각자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거야.”라고 말한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도록 서로에게 자유로운 여지를 주는 것이 부부가 추구해야 할 사랑법이라는 것이다. 부부 사이만 그렇겠는가.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가능하다면 가족 구성원 각자는 자기의 방, 자기만의 여지를 가지는 것이 좋다. 엄마도 엄마의 방을 가져야 한다.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홀로 머물며 자신을 성찰하고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정신적 독립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남편과 자녀는 엄마의 수고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엄마의 방’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온 가족이 함께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 단상

  우리에겐 더 이상 높고 튼튼한 벽은 필요 없다! - 뮤지컬 <로스트 가든>을 보고

  탁노균(아동문학가)

  지금 그대의 정원에도 향기로운 꽃이 피고,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다니고, 고운 목소리로 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관객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로 공연이 끝나고, 나는 새삼 가슴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네게도 혹 거인의 정원이 있지나 않은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수많은 벽들이 있기 전에 그냥 자연 그 자체였다. 나무와 풀, 하늘과 땅, 흙과 시냇물, 바람과 비, 꽃과 나비, 새들과 구름이 자유롭게 이리저리 넘나들며 어울려 지내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간의 그 작은 가슴에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함께 나누고, 함께 즐기고, 함께 지내기보다 홀로 독차지하고, 홀로 즐기고, 홀로 조용히 살고 싶어하게 되었다.
  동네 아이들의 시끄러운 노래소리도 듣기 싫고, 이웃들의 관심도 받기 싫어진 것이다. 누가 나의 편안한 휴식을 방해하면 그 참을 수 없는 울화통이 거친 말싸움을 일으키고, 심지어 이웃 간의 끔찍한 사건으로 발전하기도 했으니. 우리는 점점 더 두터운 벽을 쌓아 소음을 막으려 애를 쓰고,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보며 대화하기보다는 첨단의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고,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서 각자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혼자만의 세상 속에 갇혀 사는 꼴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외로워도 함께 놀 장남감이 손바닥에 있어서 외롭지 않다고, 추워도 그저 오리털이니 거위앞가슴털이니 하는 걸로 만든 것만 껴입으면서 춥지 않다며 자위하고, 지하철 안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서도 타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로지 <쑤구리족>의 자손인 양 고개 숙인 똑같은 자세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뮤지컬 <로스트 가든>의 제목을 듣고 내용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욕심쟁이 거인>이 원작이라고 했다. 제목을 보아하니 동화 같은 냄새가 풍겨 와서 좀 더 뒤져보니 정말 예전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단편 동화였다. 내용은 그다지 길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정원에 와서 시끄럽게 노는 것이 싫어 거인은 마음 속의 악마들을 동원해서 아이들을 정원에서 몰아내고 높은 담을 쌓아 버렸다. 아무도 없는 정원은 고요하고 좋았다. 거인은 혼자만의 정원을 즐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었다.
  세상에는 봄이 왔는데 거인의 정원에는 여전히 겨울이 계속되어 눈의 여왕, 서리, 찬바람, 추위의 악마들만 뛰어노는 놀이터가 되었다. 신나게 뒹굴고 재주넘기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거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바이올린의 찢어지는 고음이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며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저음의 베이스기타와 가슴 밑바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드럼의 배경음악은 눈보라치는 정원을 내려다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점점 더 춥고 떨리게 만들었다. 거인은 점점 병이 들어 가고, 여전히 봄은 찾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도 각자 눈보라치던 겨울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과 단절하여 홀로 어두운 터널 속에서 힘겨웠던 순간들. 스스로 마음의 벽을 쌓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거부하며 절망했던 시간들. 거기에는 늘상 매서운 찬바람만이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가느다란 봄바람 한 줄기도 들어올 틈을 허용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룹 <GOD>의 싱어였다는 가수 김태우가 거인 역으로 나왔다. 어쩐지 관객들 중에 어린 학생들이 많더라니……. 아이들은 거인의 노래에 까무라칠 듯한 반응을 보이며 박수 세례를 보내고 있었다. 역시 인기 가수라 그런지 노래는 잘 불렀다. 외로운 거인의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겨울 악마들의 놀이는 계속되었다. 텀블링을 하고, 춤을 추고, 바닥을 비비며 일명 <브레이크 댄스>를 추었다. 뮤지컬인지 댄스극인지 헷갈리긴 했지만…….
  뮤지컬의 내용은 동화의 그것과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별다른 각색도 없이 약간은 지루한 느낌도 있었다. 다음에 전개될 내용은 누구라도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 진행되었으니. 거인은 벽을 허물어 아이들에게 정원을 내어 주었다. 그리하여 거인의 정원에는 다시 봄이 찾아왔다. 꽃도 피고 새도 울고 아이들 웃음소리도 들리게 되었다.
  겨울 정원에서 외롭게 병들어 가던 거인에게 처음 찾아온 아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을까?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거인의 정원에 다시 꽃이 피게 만들었다. 아이는 추운 겨울을 몰아내는 봄이요, 외로움을 떨쳐 내는 즐거움이요, 이웃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요, 세상을 밝게 비춰 주는 빛이었던 것이다. 거인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 세상과 소통하게 한 인도자였다.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 내고 다시 세상과 어울려 지내는 데는 분명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라도 이런 경험은 다 있지 않을까? 거인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마음을 열어야 세상이 보인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사는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거인은 자신이 쌓았던 벽을 다 허물어버렸다. 다시 아이들이 정원에 놀러와 꽃이 피고 새가 찾아와 노래를 불렀다. 행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나누고 배려하고 열린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리라. 이 간단한 이치를 우리는 문득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공연이 끝난 오페라 하우스 로비에는 거인 김태우의 사인을 받으려고 어린 학생들이 들뜬 얼굴로 줄을 서 있었다. 가수의 인기를 실감하는 장면이었으니……. 뮤지컬 <로스트 가든>이 저 아이들의 가슴 속에 무엇을 남겨 주었을까? 노래로 만들어진 연극이 뮤지컬이다. 사실 얼마나 배우들이 노래를 잘 하는지가 관람 포인트겠지만, 극의 내용이 주는 의미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주 짧고 단순할 수도 있는 동화 <욕심쟁이 거인>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벽을 쌓으면 작은 공간만이 자신의 정원이 되지만, 벽을 허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바로 나 자신의 정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늘 훌륭한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해 주는 대구 시각 문화원의 담당자와 원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밖으로 나오니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벽을 넘듯이, 님들의 관심과 애정이 주변의 힘들어하는 우리 이웃들의 벽을 허물고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기를…….


  문화원 소식

  2013년 10월 11일 대구 문화 예술 회관에서 열린 클래식 대구 시립 교향 악단의 <아마데우스>를 관람하였습니다.
  2013년 10월 12일 112차 역사 문화 기행으로 세종시의 비암사, 연기 향토 박물관, 교과서 박물관, 부강 약수터를 다녀왔습니다. 교과서 박물관에서 월인 천강 지곡도 만들어 봤습니다.
  2013년 10월 17일 제2기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연구 재단에서 두 번째로 지원받은 사업입니다.
  2013년 10월 19일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오페라 ‘청라 언덕’을 관람하였습니다. 향토 작곡가 박태준 선생의 일대기였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2013년 10월 29일 봉산 문화 회관에서 상연된 뮤지컬 ‘빨래’를 관람하였습니다.
  2013년 11월 9일 113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북 음성에 있는 반기문 기념관 및 생가, 감우재 전승 기념관, 철 박물관, 감곡 성당을 다녀왔습니다.
  2013년 11월 15일 대구 문화 예술 회관에서 상연된 국악 창극 <봉사 심학규>를 관람하였습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것 같은 우리 작품이었습니다.
  2013년 11월 22일 수성 아트피아에서 재즈 ‘웅산 재즈 콘서트’를 감상하였습니다.
  2013년 11월 29일 하모니아 아트홀에서 상연된 연극 ‘아 유 크레이지’를 관람하였습니다.
  2013년 12월 14일 114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남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 창녕의 만년교, 우포늪을 다녀왔습니다.
  2013년 12월 15일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서 상연된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관람하였습니다.
  2013년 12월 20일 대구 문화 예술 회관에서 열린 클래식 대구 시립 교향악단 <송년음악회>를 관람하였습니다.
  2013년 12월 27일 봉산 문화 회관에서 뮤지컬 ‘사랑꽃’을 관람하였습니다.
우리를 문화의 향연에 흠뻑 빠지게 해 준 한국 문화 예술 위원회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14년 1월 10일 대구 시민 회관에서 대구 시립 교향 악단의 ‘2014 신년음악회’를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1월 16일 정기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2014년 2월 14일 대구 문화 예술 회관에서 국악 ‘흥이 나서 휘영청’을 감상하였습니다.
  2014년 4월 2일 자원 봉사 양성 과정인 ‘제9기 도서 낭독 아카데미’를 10주 과정으로 개설하였습니다.
  2014년 4월 4일(금요일) 오후 5시 30분, ‘철학으로 명상하기’를 8주 과정으로 개설하였습니다.
  2014년 4월 12일 115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북 제천의 의림지, 청풍 문화재 단지, 능강 솟대
공원을 다녀왔습니다. ‘호서 지방’이 의림지 서쪽 지방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2014년 5월 17일 116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북 영덕의 블루 로드, 장륙사, 화수루, 까치구멍집, 괴시리 전통 민속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블루 로드를 걸으니 땀은 비 오듯 하였으나 정자에 올라앉으니 오장 육부가 시원해졌습니다.
  2014년 6월 14일 117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북 김제의 금산사, 귀신사, 벽골제를 다녀왔습니다. 벽골제 이남을 호남 지방이라고 하는데 저수지는 흔적도 없고 수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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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x : 053 - 257 - 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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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년 7월 1일
발행인․김현준
편집․김창연
교열․이석규
디자인․이유란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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