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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봄호 (통권 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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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각과 문화
2015년 봄호 (통권 35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_ 이석규

Pops English
All for the love of a girl - Johnny Horton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己未獨立宣言書  이석규 편집

서평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_ 이태호

우리가 답사한 유적

8월 문화 기행을 다녀와서 _ 김미화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인 당사자의 의사와 선택을 존중해야 _ 김시형

인문학 강좌
엔도 슈사쿠의 종교 문학 _ 김재현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라는 성구가 있는데, 한국 지식인의 국어 사용 실태를 보면 이 말이 진리임을 실감하게 된다. 물리적인 구덩이, 즉 눈에 보이는 구덩이에 빠지면 인도하는 이나 인도받는 이나 빠진 줄이나 알지만, 정신적인 구덩이,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빠지면 인도하는 이나 인도받는 이나 빠진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 구덩이가 예사 구덩이가 아니라 무저갱(無底坑)인데도 말이다. 오도하고도 선도한 줄 알고 뿌듯해하고, 오도되고도 선도받은 줄로 생각하고 고마워한다. 이것이 대한 민국이다.
  대한 민국은 오래전에 전국민의 문맹화가 완료되었다. 대한 민국은 민주 공화국이 아니라 문맹 공화국이다. 초․중고교와 대학, 언론 기관, 입법․사법․행정 삼부,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계가 온통 문맹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교육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데도 공교육이니 사교육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온 국민이 문맹자들인데 문과가 어떻고 이과가 어떻고 한다든지 인문학의 붕괴니 기초 과학의 부재니 하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초․중․고등 학교에서는 ‘급식’을 ‘음식 공급’이라는 의미로는 쓰지 않고 ‘학교에서 먹는 음식’이라는 엉뚱한 의미로 쓰는 데, ‘급식을 먹는다’, ‘급식 조리실’, ‘급식 조리원’, ‘급식 조리 종사원’ 등이 그 예이다. 또, 초․중․고교에서는 ‘전교’를 ‘학교 전체’가 아닌 ‘학년 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날마다 쓰는 ‘전교 1등’이니 ‘전교 수석’이니 하는 말은 결코 ‘그 학교에 재학 중인 전체 학생 중에서의 1등이나 수석’이 아니라, ‘어느 한 학년 학생 중에서의 1등이나 수석’이다. ‘1학년 전교 1등’이니 ‘2학년 전교 수석’이라는 말에는 단어만 다를 뿐 의미상으로는 ‘학년’이라는 말이 두 번 겹쳐 쓰인 셈이다. 초․중․고교는 전국민 문맹화의 초석을 다지는 기관이다. 모국어 공부하는 방법은 가르칠 줄을 모르고 지속적으로 말 안 되는 말만 학동들의 뇌리에 심어 주니 이후의 교육 기관에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문맹화는 중단없이 탄탄 대로를 달린다.
  대학 입학 시험에는 ‘수시 모집’도 있고 ‘정시 모집’도 있는데, 사실은 둘 다 ‘정시 모집’이다. 왜냐하면 ‘수시 모집’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모집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 둘을 하나는 ‘정시’라고 하고 하나는 ‘수시’라고 하는 것이다. 정부라는 소경이 그렇게 인도하니 온 국민이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인도한 정부도 자신이 국민을 구덩이에 빠뜨린 줄을 모르고, 국민도 자신이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진 줄을 모른다.
  지식인들, 특히 교수들이 많이 쓰는 단어 중에 ‘자문’이 있는데, 이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문 서비스’, ‘자문료’, ‘자문을 해 주다’, ‘자문을 받다’, ‘자문을 구하다’, ‘자문을 의뢰하다’처럼 ‘조언을 구함’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조언을 함’의 의미로 쓰고 있다. 거의 모든 지식인이 제대로 쓰지 못하므로 가끔 제대로 쓰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용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대학 교수들은 초․중․고등 학교 교사들처럼 본인들이 소경이니 어쩔 수 없이 고급 인재가 아닌 불빛도 인식하지 못하는 전맹 양산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전국을 시청 범위로 하는 방송국의 뉴스에서 ‘발언의 진위 여부를 조사한다’와 같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말을 날마다 쏟아 낸다. ‘진위’라고만 하면 될 것을 ‘진위 여부’라고 ‘여부’를 덧붙여서 한층 권위 있고 유식한 말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이들 중앙 방송국의 5분짜리 뉴스를 듣고 잘못된 표현을 글로 적는다면 그 글의 분량이 5분짜리 뉴스를 적은 분량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모국어를 들을 귀가 없어서 보도 내용은 듣지 못하므로 아나운서나 기자의 얼굴이나 복장이나 신장밖에 보지 못한다. 문맹으로 학교를 나온 언론인들은 전국민에게 개안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도록 주야로 점점 더 깊은 구덩이로 인도하고 5000만 소경들은 고마워하며 언론 소경들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사전”의 두산백과의 ‘축사’항에는 “축사[bless, 祝辭]: 일반적으로는 축하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나 글. 그리스도교에서는 감사와 찬미, 감사기도.”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이는 ‘祝辭’와 ‘祝謝’ 두 단어의 풀이를 ‘축사(祝辭)’ 한 단어 안에 뭉쳐 넣은 것이다. ‘祝辭’에는 ‘축하의 말’이라는 뜻만 있고, ‘감사 기도’라는 뜻은 없다. 이 사전의 주석은 마치 ‘석수(石手)’에 “일반적으로는 ‘돌장이’, 그리스도교에서는 ‘돌로 만든 짐승의 상’”이라고 ‘석수(石獸)’의 뜻까지 포함시키는 것과 같다. ‘감사 기도’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祝謝’로서 성경에 나오는 축사는 모두 이 단어뿐이다. 이 항의 필자가 인용한 성구 다섯 절 모두에 ‘祝謝’만 있고 ‘祝辭’는 없다. 이 필자는 ‘祝謝’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까지 언급하고 있으나 이 단어의 한국어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성경을 우리말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히브리어까지 가르치고 사전 주석까지 집필할 수 있다. 모든 목사들과 신도들이 ‘구유’를 ‘마구간’이라고 생각하여 예수가 말구유에서 났다고 말하고 찬송가나 복음 성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다. 모국어의 기본적인 단어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정신적인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이들에게서 물욕을 키우는 것 외에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뉴스에서 ‘국민 참여 재판’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는데, 이 말은 ‘참심’을 순화한 말인 듯하나 이 참여 재판이라는 것에 참여하는 사람을 ‘배심원’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배심’을 순화한 것이 ‘국민 참여 재판’임을 알 수 있다. ‘배심’은 ‘참여 재판’으로 바꾸면서 ‘배심원’은 ‘참여 재판관’이나 ‘참여 재판원’이나 ‘참여 재판인’과 같이 ‘참여 재판’을 수행하는 사람을 연상할 수 있는 용어로 바꾸지 않아서 관련 뉴스를 여러 번 듣고도 ‘배심원’이 ‘참여 재판’과 관련 있는 사람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말을 지어 낸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이들은 사재를 털어서 불우 이웃을 구제한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국민에게 어려운 전문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어 주었다고 흐뭇해할 것이다. 자신의 재산으로 남을 구제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나, 순화라는 미명하에 용어를 함부로 바꾸는 것은 삼가고 또 삼가야 할 일이다. 용어를 쉽게 바꾸어 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이 도리이고 공부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후진에게는 공부를 하지 말고 육체 노동에 종사하라고 권하는 것이 인생의 선배의 의무일 것이다.
  역사학자는 ‘6․25 전쟁’을 ‘한국 전쟁’이라고 한다. 자신의 전통대로 자신들이 명명한 사건명을 쓰지 않고 영미인들이 ‘Korean War’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수입해서 자신의 천박한 영어 지식을 드러내려 하니 이런 사람에게서 주체적인 사관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학자가 미국 사람이 부르는 대로 1954년~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지속된 전쟁을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며, 중국인들이 미국인들이 부르는 대로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을 ‘중국 혁명(Chinese Revolution)’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종교 집단 중에서 ‘축복’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아마도 개신교도들일 터인데, 교역자나 평신도 중에 이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축복’은 ‘복을 빎’이라는 뜻인데, 1000만 신자가 하나같이 ‘복을 내려 줌’이라는 뜻으로 쓴다.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이 구절의 뜻은 ‘복을 내려 줌’이라는 뜻으로 보아야지 ‘복을 빎’이라는 뜻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말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복을 비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일개 잡신에 불과하게 된다. 개역성경에는 ‘축복’이라는 말이 100여 회나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잘못 쓰는 그러한 뜻으로 쓰인 것은 단 한 번도 없음에도 모든 개신교 신자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의미로 쓰인 구절을 읽고도 정반대의 뜻으로 이해한다.
  ‘인연’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불교도들일 것이다. ‘백팔 대참회문’이라는 글에는 이 말이 스무 번 나오는데, 단 두 번만 ‘관계’라는 의미로 제대로 쓰였고 나머지는 전부 ‘어떤 관계로 맺어진 사람’이라는 엉뚱한 뜻으로 쓰였다. 마치 ‘농사’를 ‘경작’의 뜻으로 쓰지 않고 ‘경작자’의 뜻으로 쓰는 것과 같다. 이 글을 쓴 사람이 공양주도 아니고 청소부도 아니고 불교 초심자도 아닌 유명한 승려라고 하니 그저 정신이 멍해질 뿐이다. 이렇게 말 안 되는 글인데도 낭독하는 성우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마음이 편안해져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을 연발할 사람들이 적잖을 것이다. 이 글의 영역본을 보면 한국인의 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를 짐작하게 된다. 글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바른 표현으로 고쳐서 번역해야 할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모든 지식인은 문맹자이며 소경이다. 장차 지식인이 되려고 이들 선배 지식인에게서 배우는 예비 지식인들이 어떻게 문맹 선배들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참으로 지식인다운 지식인들이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지만 수많은 개천에서 몇 천 년 만에 한 마리쯤은 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찌 모든 개천에서 용들이 벌떼처럼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망상이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다. 헛된 희망, 거짓된 칭찬과 격려는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을 애써 있다고 기만하는 것보다 낫다.

  Pops English

  All for the love of a girl - Johnny Horton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Well, today I'm so weary.
Today I'm so blue
Sad and broken-hearted.
And it's all because of you.
Life was so sweet, dear.
Life was a song.
Now you've gone and left me.
Oh, where do I belong?
And it's all for the love
of a dear little girl,
All for the love
that sets your heart in a whirl.
I'm a man who'd give his life
and the joy of this world
All for the love of a girl.
And it's all for the love
of a dear little girl,
All for the love
that sets your heart in a whirl.
I'm a man who'd give his life
and the joy of this world
All for the love of a girl.

오늘 난 몹시 지쳤어요
너무 우울하고,
슬퍼서 마음이 아파요.
이 모든 건 당신 때문이에요.
삶은 너무 달콤했어요, 그대여.
마치 노래와 같았죠.
이제 당신은 날 남겨 두고 떠나버렸으니
오, 난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이 모든 건 사랑스런
작은 소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에요.
당신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든
그 사랑 때문이에요.
난 한 소녀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내 생명과 이 세상의 즐거움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이 모든 건 사랑스런
작은 소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에요.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든
그 사랑 때문이에요.
난 한 소녀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내 생명과 이 세상의 즐거움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에요.

  Johnny Horton
  1927년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56년 데뷔 싱글 'Honky Tonky Man'을 발표 컨트리 차트 Top 10에 진입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9년 싱글 ‘The Battle of New Orleans, 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발표하며 대형 컨트리 싱어 스타로 발돋음하게 된다. 싱글 'The Battle of New Orleans'는 컨트리 차트와 싱글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빅 히트를 하며, 자니 호튼에게 컨트리 음악과 팝 음악의 크로스 오버 가수라는 평을 듣게 했다. 1960년 공연후 귀가중 교통사고로 인하여 33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English Humor]
  A six - year - old boy walks up to his father one day and announced, "Daddy, I'd like to get married." His father replied hesitantly, "Sure, son, do you have anyone special in mind?" "Yes", answered the boy. "I want to marry Grandma." "Now, wait a minute" said his father. "You dont think I'd let you get married to my mother, do you?" "Why not?" the boy asked. "You married mine.“

  여섯 살짜리 꼬마가 어느 날 아빠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빠, 나 결혼할래요.” 아빠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그래라, 얘야. 누구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니?” “네, 할머니와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꼬마가 대답했다. “얘야, 잠깐만.”하고 아빠가 말했다. “설마 우리 엄마와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왜 안 돼요? 아빠도 우리 엄마랑 결혼했잖아요.”라고 꼬마가 반문했다.

  명시와 명문

  己未獨立宣言書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 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 箝制의 痛苦를 嘗한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 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ㅣ며, 心靈上 發展의 障礙됨이 무릇 幾何ㅣ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ㅣ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奇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ㅣ뇨.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 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 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 하면, 民族的 良心과 國家的 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 하면, 各個 人格의 正當한 發達을 遂하려 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苦恥的 財産을 遺與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의 永久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 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 獨立을 確實케 함이니, 二千萬 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 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 軍과 人道의 干戈로써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하매 何强을 挫치 못하랴. 退하야 作하매 何志를 展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 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얏다 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려 안이하노라. 學者는 講壇에서, 正治家는 實際에서, 我 祖宗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 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 ᄲᅮᆫ이오,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 하야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辯을 暇치 못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ᄲᅮᆫ이오, 決코 他의 破壞에 在치 안이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오, 決코 舊怨과 一時的 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안이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羈縻된 日本 爲正家의 功名的 犧牲이 된 不自然, 又 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 又 合理한 正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에 民族的 要求로서 出치 안이한 兩國倂合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 威壓과 差別的 不平과 統計數字上 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 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없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積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 안인가. ᄯᅩ 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써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안일 ᄲᅮᆫ 안이라, 此로 因하야 東洋安危의 主軸인 四億萬 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스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 全局이 共倒同兦의 悲運을 招致할 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야금 正當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야금 邪路로서 出하야 東洋 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야금 夢寐에도 免하지 못하는 不安, 恐怖로서 脫出케 하는 것이며, ᄯᅩ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ㅣ리오.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過去 全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 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의 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穌를 催促하는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ㅣ라 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ㅣ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蹰躇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할 것 업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 精華를 結紐할지로다.
吾等이 滋에 奮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幷進하는도다. 男女老少 없이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群象으로 더부러 欣快한 復活을 成遂하게 되도다. 千百世 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 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ᄯᅡ름인뎌.

公約三章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ㅣ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ᄭᅡ지, 最後의 一刻ᄭᅡ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ᄭᅡ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朝鮮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日

기미 독립 선언서

선언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하야 차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야 차를 포명함이며, 민족의 항구 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야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 병진하기 위하야 차를 제기함이니, 시이 천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 하물이던지 차를 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하야 유사 이래 누천년에 처음으로 이민족 겸제의 통고를 상한지 금에 십년을 과한지라. 아 생존권의 박상됨이 무릇 기하이며, 심령상 발전의 장애됨이 무릇 기하이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기하이며, 신예와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대조류에 기여 보비할 기연을 유실함이 무릇 기하이뇨.
  희라, 구래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의 고통을 파탈하려 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염의의 압축 소잔을 흥분 신장하려 하면,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수하려 하면,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 재산을 유여치 아니하려 하면, 자자 손손의 영구 완전한 경복을 도영하려 하면, 최대 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케 함이니, 이천만 각개가 인마다 방촌의 인을 회하고, 인류 통성과 시대 양심이 정의의 군과 인도의 간과로써 호원하는 금일, 오인은 진하야 취하매 하강을 좌치 못하랴. 퇴하야 작하매 하지를 전치 못하랴.
  병자 수호 조규 이래 시시 종종의 금석 맹약을 식하얏다 하야 일본의 무신을 죄하려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아 조종세업을 식민지시하고, 아 문화 민족을 토매인우하야, 한갓 정복자의 쾌를 탐할 뿐이오, 아의 구원한 사회 기초와 탁락한 민족 심리를 무시한다 하야 일본의 소의함을 책하려 아니하노라.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오인은 타의 원우를 가치 못하노라. 현재를 주무하기에 급한 오인은 숙석의 징변을 가치 못하노라.
  금일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할 뿐이오, 결코 타의 파괴에 재치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구원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를 질축 배척함이 아니로다. 구사상, 구세력에 기미된 일본 위정가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부자연, 우 불합리한 착오 상태를 개선 광정하야, 자연, 우 합리한 정경 대원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서 출치 아니한 양국 병합의 결과가, 필경 고식적 위압과 차별적 불평과 통계수자상 허식의 하에서 이해 상반한 양 민족 간에 영원히 화동할 수 없는 원구를 거익 심조하는 금래 실적을 관하라. 용명 과감으로써 구오를 확정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 소복하는 첩경임을 명지할 것 아닌가.
  또 이천만 함분 축원의 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소이가 아닐 뿐 아니라, 차로 인하야 동양 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지나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와 시의를 갈수록 농후케 하야, 그 결과로 동양 전국이 공도 동망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하니, 금일 오인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야금 정당한 생영을 수케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야금 사로로서 출하야 동양 지지자인 중책을 전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야금 몽매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 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구구한 감정상 문제이리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내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동빙 한설에 호흡을 폐칩한 것이 피일시의 세라 하면 화풍 난양에 기맥을 진서함은 차일시의 세이니 천지의 복운에 제하고 세계의 변조를 승한 오인은 아모 주저할 것 없으며, 아모 기탄할 것 없도다. 아의 고유한 자유권을 호전하야 생왕의 낙을 포향할 것이며 아의 자족한 독창력을 발휘하야 춘만한 대계에 민족적 정화를 결뉴할지로다.
  오등이 자에 분기하도다. 양심이 아와 동존하며 진리가 아와 병진하는도다. 남녀 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로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 군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천백세 조령이 오등을 음우하며 전세계 기운이 오등을 외호하나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인저.

공약삼장
  일.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디까지든지 광명 정대하게 하라.

조선 건국 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  일

  서평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글: 이태호(통청아카데미 원장)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 심리학의 개척자이면서 정신 분석학자이며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이 책은 그가 말년(76세)에 쓴 것이며 지금까지의 여러 저작의 완성작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에는 『소유냐 존재냐』 이외에도 정치 심리학의 선구적 저서인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년)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랑의 기술』(1956년)이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근대 이후 세계가 자유를 확대해 가는 과정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위세를 떨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과 함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고독과 불안이 강하게 대두되며, 이것을 피하기 위해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형제와 친구 등의 사랑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사랑도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익히고 연습을 거듭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실패하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익히고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원제목은 “To Have or To Be”인데 이것을 우리 나라에서는 두 가지로 번역을 했다. 하나는 위에서 제시한 『소유냐 존재냐』이며, 다른 하나는 『소유냐 삶이냐』이다. ‘삶이냐’로 번역한 사람은 ‘존재냐’라는 말이 너무 철학적이고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에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본 것 같다. 본래의 의미를 조금 풀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인생의 중심을 소유하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잘사는) 데 둘 것인가.>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개인의 불행과 사회적 모든 문제는 소유 중심의 삶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존재 중심의 삶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소유 중심의 삶과 존재 중심의 삶을 구분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이 차이점을 알게 된다면 독해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다. 프롬이 존재 중심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롬은 자신의 주장이 크리스트교 사상, 도가 사상, 불교 사상 등의 근본과 닿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소련 공산주의와 서구의 혁신주의적 사회주의로 왜곡되지 않은 상태의 휴머니즘적인 마르크스의 사상이나 ‘생명에 대한 외경’을 윤리적 기초로 삼은 슈바이처의 사상과도 맥을 닿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들의 공통점은 소유 중심의 삶을 거부하고 존재 중심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서문을 제외하면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서장 : 위대한 약속 그 실패와 새로운 선택’이다. 둘째는 ‘제1편 :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셋째는 ‘제2편 : 두 가지 존재 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이다. 넷째는 ‘제3편 :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이다.
  프롬은 ‘서장’에서 소유 중심의 삶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고 있다. 1장~3장까지는 제1편에 포함되어 있다. 1장에는 여러 가지 시적 표현의 실례 등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일반적 고찰’이 있다. 2장에는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 지식, 신념, 사랑 등 ‘일상 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가 구분되고 있다. 3장에는 ‘구약․신약 성서 및 에크하르트의 저술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가 언급되면서 진정한 크리스트교의 정신이 존재 중심이었다는 점이 언급되고 있다.
  4장~6장까지는 제2편에 포함되어 있다. 4장에는 존재하(살)기 위해 필요한 생존적 소유가 긍정되고 신경증적이고 정신적으로 병든 성격학적 소유가 부정되는 등 소유의 본질을 논하면서 ‘소유 양식이란 무엇인가’가 깊이 다루어지고 있다. 5장에는 ‘존재 양식이란 무엇인가’가 논의되고 있다. 존재 양식이란 진정한 능동성이며, 표면을 꿰뚫고 실재를 통찰할 때 가능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6장에는 ‘소유와 존재, 그 새로운 측면’으로 안정감과 불안감, 연대(連帶)와 적의(敵意) 등 대비 개념을 사용하여 소유와 존재의 개념이 보다 폭넓게 언급되고 있다. 특히 지금 여기(now, here)는 존재와 연결되고, 과거와 미래(past, future)는 소유와 관련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7장~9장까지는 제3편에 포함되어 있다. 7장에는 ‘종교․성격․사회’의 단어들을 묶은 사회적 성격과 종교적 욕구에 따른 소유와 존재 양식이 설명되고 있다. 8장에는 존재 양식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간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과 변혁된 인간의 특질이 언급되고 있어 그 제목이 ‘인간 변혁의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특질’이다. 9장의 제목은 ‘새로운 사회의 특징’으로, 존재 중심의 삶이 뿌리내리기 위한 사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소유 중심의 삶을 살아왔다. 특히 현대를 이끌어가는 중심 이념인 자본주의는 소유 중심의 삶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프롬은 소유 중심의 삶은 인류를 필연적으로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성인(聖人)들과 마찬가지로 강하게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존재 중심의 삶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 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과 일반인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책은 심리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등의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을 습득한 저자의 통찰이 표현된 것으로 인류의 진로를 밝은 쪽으로 방향 전환할 수 있게 도와주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명저(名著) 중 하나이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수타사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원효 대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데 경내에는 사천왕상을 비롯하여 대적광전, 봉황문, 칠성각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세조 4년(1458)에 간행된 월인석보 2권이 사천왕상 안에서 발견되었다. 주변에는 동남쪽으로 이어진 8km길이의 수타사 계곡이 있다.
  ◈대적광전(유형 문화재 제17호): 수타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은 인조 14년(1636)에 공잠 대사가 중건한 것인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공포는 내2출목, 외1출목으로 쇠서는 앙서로 되고 내부 살미는 일부가 초각되어 있다. 내출목 도리가 없는 것이 특이하며 규모는 크지 않으나 부재 간의 비례가 잘 잡혀 있고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을 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전의 하나이다.
  ◈삼층 석탑(기타 제11호): 이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1.15m의 화강암 삼층석탑이다. 단층 기단 위에 건립한 3층 석탑으로 지대석과 면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갑석은 바깥쪽으로 경사졌고 상면에는 2단의 몰딩이 있어 탑신부를 받고 있다. 2,3층의 탑신과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원래는 큰 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우당 부도(기타 제15호): 수타사 입구에 부도와 부도비가 늘어서 있는데 청송당대사탑, 기허당대연대사탑, 서곡대사부도, 유화당대사묘위지탑, 중봉당탑, 홍파대사승왕탑, 홍우당 부도 등이다. 이 가운데 홍우당 부도는 높이 2.15m로 방형 판석을 지대석으로 놓고 그 위에 하대와 중대를 한 돌로 만들었으며 상대 위에 구형의 탑신석을 놓고 옥개석을 얹었는데, 6각의 기본형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시대의 건조로 추정된다.

  (2) 양동 마을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전형적인 한국의 양반촌으로서 150여 호의 대소 고가가 보존된 민속 마을이다. 문헌상으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이는 손소(1433~1484)로 알려져 있으며, 이의 둘째 아들 우재 손중돈(1463~1529)과 외손자 회재 이언적 등 조선 5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마을은 설창산을 주봉으로 하여 ‘勿’자 모양으로 내려오는 세 줄기 구릉에 자리잡았는데, 지주들이 살았던 큰 기와집은 이 골짜기 깊은 둔덕에 배치되어 밖으로 보기에는 눈에 띄지 않으며, 안에서는 한적한 산촌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이 기와집은 몇 채의 가랍집(하인의 집)에 둘러싸여서 하나의 가옥군을 이루고, 이들이 여러 개 모여 전체 마을 공간을 구성했다. 이곳에는 지정된 문화재로서 보물 3점, 중요 민속 자료 12점, 경상 북도 유형 문화재 3점이 보존되어 있어서, 안동의 하회 마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관가정(보물 제44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1463~1529)과 연고가 있는 집이라 하며, 조선 중기에 지은 주택건물이다. 건물의 평면이 ㅁ자형을 이루고 아담한 중정이 있으며, 안채 뒤로 맞배지붕의 사당이 있다. 안채는 네모 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외관을 이루고 있으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의 공포를 결구하였으며, 누마루 둘레에는 길게 난간을 돌려 격식을 갖추고 있다. 세부 구조에서 안 대청의 주두 위 초공과 종도리를 받친 대공의 조각 등은 특이한 수법이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이 건물은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의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ㄱ자형 평면에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간단한 초익 공계양식으로 꾸며 소박하면서도 보아지(樑奉)나 파련대공 등에서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고 있으며, 별당 건축의 기능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별당은 상류 주택에 부속된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가장의 접객, 독서, 한유 등 다목적인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이곳에는 회재 선생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향단(보물 제412호): 이 건물은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을 당시에 지은 건물이라 한다. 두 개의 중정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붙여 전체가 일자형의 한 건물같이 배치하였으며, 상류 주택의 격식을 갖추면서 주거건물의 묘를 살리고 있다. 사가로서 전 건물이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동쪽의 사랑채는 간단한 초익공계의 양식이면서도 보아지(樑奉)나 파련대공 등은 섬세하고 팔작지붕이 조화를 이루어 입면상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손동만씨 가옥(중요 민속 자료 제23호): 이 가옥은 경주 손씨 대종가로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가 건립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1463~1529)과 그의 외손이며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일자형의 대문채 안에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사랑 후원 뒤쪽 높은 곳에는 신문과 사당이 배치되었다. 종가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이며, 사랑 대청에서 바라보이는 후원의 경치 또한 가경이다. 이 집의 당호는 송첨 또는 서백당이라 하며, 과거에는 이 가옥 주위에 외거 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랍집이 있었다 한다. 정원에는 당시에 심은 향나무가 있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봉정사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그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전해진다.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자료가 소실되어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1972년 극락전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할 때 상량문에서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런 사실이 발견되어 이 극락전이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 건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극락전·고금당(古今堂)·화엄강당(華嚴講堂)·해회당(海會堂)·적연당(寂然堂)·객료(客寮)·양화루(兩化樓)·장경고(藏經庫)·동암(東菴: 靈山菴)·서암(西菴: 知照菴)·덕휘루(德輝樓) 등의 중요 건축물과 고려 시대의 대표적 석탑인 삼층 석탑이 있다. 이 가운데 극락전은 국보 제15호, 대웅전은 국보 제3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서암에는 독포도덕(獨抱道德)이라는 선조 어필의 현판이 있고, 극락전·대웅전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고금당(보물 제449호): 맞배지붕의 주심포계 건물로서 집 이름으로 보아 원래는 불상을 안치한 부속 전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 복원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광해군 8년(1616)에 중수한 사실이 있었으나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남쪽에는 우화루(雨花樓)가 있어서 고금당의 남쪽 지붕이 우화루와 연결되고 그 아래쪽을 부엌으로 사용하였는데, 1969년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해체하면서 우화루가 철거되었다. 1930년대에 『동양미술』에 발표된 봉정사 배치도에 의하면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로서 대웅전 영역과 구별되는 극락전 영역의 문루로 자리잡고 있다. 고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임에도 다양한 건축 기법을 사용, 치밀하게 구성되어 주목받고 있다.
  ◈극락전(국보 제15호): 이 건물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건축 중 최고의 건물로 유명하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고려 시대의 건물이지만 전대인 통일 신라 시대의 건축 양식을 내포하고 있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1972년에 실시한 보수 공사 때 밝혀진 바에 의하면, 건립 후 첫 수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며, 그 뒤 조선 인조 3년(1625)에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다. 원래는 대장전이라 불렀었으나, 뒤에 극락전이라 개칭한 것 같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 가구의 고격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부재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적 기법을 갖추고 있어 한층 더 지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대웅전(보물 제55호): 봉정사의 정전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주칸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초창 후 변경되었으나 골격은 전형적인 다포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공포의 힘있고 가식 없는 수법은 초기의 다포 양식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건물 내부에서 가구 형식이나 세부 기법에서도 외부와 같이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이 초기의 다포 양식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단청은 창건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삼층 석탑(유형문화재 제182호): 봉정사를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으로 나누었을 때 이 탑은 고금당과 함께 극락전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으며 가람 배치나 조성 양식으로 보아서 건립 연대는 고려 중엽으로 추정된다. 이중 기단의 방령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 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률이 적고 옥개석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 일부는 남아 있지 않다. 탑의 높이는 318cm이다.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화엄강당(華嚴講堂)은 스님들이 불교학을 공부하는 장소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돌방 구조를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의 연혁은 봉정사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다.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은 『양법당 중수기』 등에 따르면 17세기에 중수되었다. 이런 중요 건물의 중수가 있을 때 스님들의 강학 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대에 『동양미술』에 발표된 『천등산 봉정사』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이 건물이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깔려 있으며 부엌이 지금보다 넓게 자리잡고 있다. 평면 구성이 언제 오늘날처럼 바뀌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1930년대 이후로만 짐작될 뿐이다.

  (4) 충의사
  신도비, 묘소와 함께 1974년 지방 문화재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약 16㎡ 규모의 작은 사당이었으나 1978년 호국 선현 유적지 정화 사업으로 13,209㎡의 부지에 사당, 전시관, 내외 삼문, 기념비, 관리 사무소 등을 세워 확장 정비하였다. 전시관에는 보물 제669호인 5점(교서 2점, 교지, 신패, 옥대 각 1점)과 동산 문화재(교지 19점, 매헌실기 판목 58판)를 전시하고 있다.
  정기룡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에서 출생하였으며 초명은 무수(茂壽),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이다. 20세 때 상주로 이주하였다. 1586년 무과에 급제, 왕명에 의해 기룡(起龍)으로 개명하였으며 훈련원 봉사로 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 금산 등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쳐 공을 세웠으며 상주 판관으로 있을 당시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 경상도 방어사, 3도 통제사 겸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로 재직하다가 병사하였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5) 닭실마을
  이중환이 “안동 북쪽에 있는 내성촌에는 충재(冲齋) 권벌이 살던 옛터인 청암정(靑巖亭)이 있다. 그 정자는 못의 한복판 큰 바위 위에 위치하여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둘러싸듯 흐르므로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라고 기록한 내성촌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이곳 닭실마을은 유명한 양반의 성씨인 안동 권씨 중에서도 권벌을 중심으로 일가를 이룬 동족 마을이다. 금계 포란형의 명당이라는 닭실마을은 동북쪽으로 문수산 자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서남으로는 백운령이 뻗어 내려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며,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치는 형상으로 자리해 있다.
  조선 시대 문신인 권벌은 1496년 진사에 합격하고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 하에서 급제가 취소되었다가 3년 뒤인 1507년에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였다.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는데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몰아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자 귀향하였다.
그는 파직 이후 15년 간 고향인 유곡에서 지냈으나, 1533년 복직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1539년에는 병조참판, 그해 6월에는 한성부 판윤, 그리고 1545년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구명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였고 조광조, 김정국과 함께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1567년에 신원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선조 24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닭실마을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로서 현재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권벌 종택의 서쪽 쪽문 뒤의 건물이 청암정이다. 권벌이 1526년 봄, 집의 서쪽에 재사(齋舍)를 지으면서 그 옆에 있는 바위 위에다 정자도 함께 지었다. 커다랗고 널찍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 지은 ‘J’자형 건물인 청암정은 휴식을 위한 것으로서 6칸으로 트인 마루 옆에 2칸짜리 마루방을 만들고 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을 함께 조성하였다. 이 청암정에는 퇴계 선생이 65세 무렵에 방문하여 남긴 한시 한 편이 있다.
  한편 권벌의 집 부근에는 창평천과 기계천이 합류하는 합수머리가 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나고 그 앞을 흐르는 창류벽에는 권벌의 아들 동보가 지은 석천 정사가 세워져 있다.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항시 물가에 그늘을 드리운 채 줄지어 서 있고 매끄러운 반석 위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이다. 훗날 이곳을 찾은 성호 이익은 「충재 권벌의 닭실마을 경치」라는 글에서 “선생이 살고 있던 동문 밖은 물이 맑고 돌도 깨끗하여 그 그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세상을 떠난 듯하다”라고 묘사하였다.

  기행문
  8월 문화 기행을 다녀와서

  김미화(본원 회원)

  시각 장애인 문화원에서 매년 8월에 실시하는 1박 2일 문화 유산 답사 여행이 올해도 8월 15, 16일로 정해지자마자 참가 신청을 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가하는 여행이다. 작년 이맘때 처음으로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했던 1박 2일 답사 여행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다 해설이 있는 답사로 인상 깊은 여행이었다. 아직까지 여운이 남아 있는 그때를 생각하면서 두 번째인 올해 8월 답사도 한껏 기대되었다.
  강원도는 17년 전 속초에 다녀온 이후 이번 여행지인 원주, 횡성, 홍천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더 설레고 기다려졌다.
  15일 아침 8시 20분 홈플러스 성서점 앞에서 버스에 올라 오랜만에 회원들과 자원 봉사자님들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때 아닌 장마에 계속 비가 내려 여행하는 동안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날씨가 흐리긴 했지만 충남 쪽에 가니 해님이 방긋 고개를 내밀며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휴게소에서 잠시 머무르고 다시 고속 도로를 달렸다.
  처음 도착한 곳은 원주의 박경리 토지 문학 공원이었다. 해설을 들으며 박경리 선생이 살던 집과 전시실을 관람하였다. 대하 소설 “토지”를 소재로 꾸민 공원이라고 한다. 소설가 박경리의 옛 집이 1995년 택지개발지에 포함되어 헐릴 위기에 처하자, 한국 토지 공사에서 공원 부지로 결정하여 1999년 5월 ‘토지 문학 공원’으로 개원하였다가 같은 해 8월 원주시와 유족의 협의로 ‘박경리 문학 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한다. 박경리의 옛집과 평사리 마당, 홍이 동산, 용두레벌 등의 주제로 꾸며져 있다. 이는 모두 “토지”에서 따온 지명들이다. 이중 옛집은 작가가 1980년부터 1994년 8월 15일까지 “토지”를 집필한 곳이다. 안채와 안마당, 사랑 마당, 별당 마당, 텃밭 등이 조성되어 있다.
평사리 마당에는 섬진강과 백사장, 둑길이 꾸며졌으며, 홍이 동산은 뒷동산으로 정자바위가 있다. 그리고 용두레벌에는 신작로와 철길, 일송정, 용두레 우물, 만주 들길, 돌무덤과 흙무덤 등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만주의 지명을 따온 시설이 들어서 있다. 한편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는 토지 문화관이 있어 문학도들은 물론 일반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은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손수 호미를 들고 농사를 지었고 손수 지은 농산물로 찾아오는 문학도들의 식사를 제공하여 문학도들이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실 관람 후 점심을 먹으러 갔다.
  먼저 강원도 치악산의 맑은 물로 빚었다는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순간 그 시원함에 더위가 싹 가시는 듯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서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원주 한지 테마 파크로 걸음을 옮겼다.
  원주시 무실동에 자리한 원주 한지 테마 파크는 원주 한지의 유래와 역사는 물론 관람 및 교육, 체험을 통해 한지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테마 공간이다.
한지 영상실에서 원주 한지의 역사와  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우리 옛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어서 새삼 놀라웠다. 99번의 단계를 거쳐 한지가 탄생한다는 영상물을 보고, 한지 역사실을 둘러보았다. 종이의 발명, 전파 과정, 한지의 역사, 한지의 유래, 한지 관련 유물 등 전시물의 종류도 정말 많았다.
역사실 한쪽에 갑옷이 걸려 있었는데, 그 갑옷은 줌치갑옷이라 하여, 한지에 물을 뿌려 다시 한지를 얹고 치대기를 반복하여 한지와 한지가 잘 붙을 수 있도록 하는 줌치 기법으로 일반 한지와 달리 면이 오돌토돌하고 두껍다고 한다. 줌치 한지는 가볍고 공기가 통하는 특성이 있으면서도 화살에 뚫리지 않을 만큼 강해서 옛날에는 갑옷이나 방한복의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한지와 더불어 살았던 조상들의 삶을 통해, 여리고도 연약한 종이 하나로 무궁무진한 놀라운 창의성과 인고의 세월 속에서 하늘도 뚫을 것 같은 무한한 내공이 느껴졌다.
  산과 숲에 둘러싸인 횡성호는 남한강 제1지류인 섬강의 물줄기를 막은 횡성댐으로 인공 호수다. 총 저수량 8690만 톤, 유역 면적 209㎢인 횡성호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호수길은 2011년 가을에 조성됐으며, 모두 6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6개 구간 중 호수를 가장 가까이서 걸을 수 있는 5구간은 평탄한데다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코스라 인기가 높다고 하여 우리도 이 코스를 택해 걸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사람만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로 변했다. 전날까지 비가 온 터라 숲속의 습도가 높고 땅도 미끄러워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낙상하기 십상이었다. 앞서서 안내하는 봉사자의 팔을 꼭 잡고 조심조심 천천히 걸어야만 했다. 갈수록 바람 없고 습한 공기에 벌써 지치는 것 같았다. 독한 산모기한테 물릴까 봐 잠바도 벗지 못하여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조금 후 넓고 평탄한 길이 나타났다. 그제야 잠바를 벗고 땀을 좀 식힐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안전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군데군데 물웅덩이를 건너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을 하염없이 걷자니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데, 갑자기 산속이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한두 방울 얼굴에 떨어졌다. ‘산속에서 비를 맞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늘이 알아차렸는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세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서 불안한 마음은 일시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앞서 가는 학생들이 MP3로 음악을 들려주어 덜 지루하게 걸을 수 있었다. 드디어 1시간 40분 만에 출발점에 돌아왔다. 몸은 비록 비 오듯하는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주파한 성취감에 마음은 상쾌하고 개운하였다.
  숙소인 횡성 고라데이 마을로 향했다. ‘고라’는 강원도 방언으로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고라데이 마을은 해발 900미터 이상의 발교산과 병무산, 수리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산촌으로, 절골 계곡의 청류와 봉명 폭포의 절경은 가히 별유천지 비인간이라 할 수 있으며, 낙엽송과 단풍나무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다고 한다.
  여름에 와서 횡성의 특산물인 복분자 와인을 음미할 수 있어 좋았다. 가을에는 산골 단풍 트레킹과 심마니 체험을 할 수 있다니 가을에 꼭 다시 한 번 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 후 다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3개의 조로 나눠 조별 대항 게임과 장기 자랑 등을 하는 사이에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는 어느새 유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우리 조는 허물어지고 망가지며 갈 때까지 가 보자는 구호 아래 막장 막장 파이팅을 외치며 필사적인 협동심을 발휘했다. 승리는 우리팀이었다. 주변에서 연주 중이던 사물놀이패가 축하 연주로 멋들어지게 한바탕 놀아 주었다. 기쁨은 두 배로 늘고 음악이 매개체가 되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고 화합하는 멋진 밤,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어둠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며 ‘당신이 나보다 더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횡성의 맑은 공기, 계곡의 선율을 뒤로 하고 홍천 마리소리골 악기 박물관으로 향했다. 2007년 11월 16일 홍천군 서석면 검산리에 마리소리골 악기 박물관이 개관했다. 마리소리골 악기 박물관에는 악기 전시뿐 아니라 가족 단위로 단체 체험 프로그램, 문화 교실도 운영하고 있으며 전시장 가운데 마련된 공연장에서는 각종 전통국악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마침 우리가 간 그날 전통 국악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의 소리에 본능적으로 어깨가 들썩하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참가자들과 한마음이 되어 자연스럽게 추임새도 넣으며 장단에 맞춰 박수를 하며 함께 어울렸다. 어느 남자분이 즉흥 출연으로 전통 국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춤사위를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춤을 추는 손동작과 발동작 하나하나가 묘기라는 말에 그 솜씨가 짐작이 갔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서둘러 나왔다.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708년)에 원효 대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절 안에는 사천왕상을 비롯하여 대적광전, 봉황문, 칠성각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세조 4년(1458)에 간행된 월인석보 2권이 사천왕상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벌로부터 동남쪽으로 이어진 8㎞ 길이의 계곡이 있다.
  유형 문화재 제17호인 수타사대적광전은 우적산 아래에서 일월사로 창건되어 선조 2년(1569)에 현재의 위치인 공작산으로 옮기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본전인 대적광전은 인조 14년(1636)에 공잠 대사가 중건한 것인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공포는 내2출목, 외1출목으로 쇠서는 앙서로 되어 내부 살미는 일부가 초각되어 있다. 내출목 도리가 없는 것이 특이하며 규모는 크지 않으나 부재 간의 비례가 잘 잡혀 있고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을 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전의 하나이다. 수타사에 들어서자마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바로 경내에 있는 식당에서 절밥을 먹고 잠시 마당에 서 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정겨웠다.
  일행을 따라 본전 옆에 자리한 방에서 수타사 스님과의 만남을 가졌다. 산사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조용히 눈을 감고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를 주었는지, 또 생각 없이 한 말 한마디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잠시나마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신중하게 생각해서 말을 내뱉도록 해야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함께한 회원들과 자원 봉사자 여러분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훌륭한 해설을 해 주신 문화 해설사님께도. 이 여행길 얼마나 큰 보람이고 또한 깨달음인가!   즐거웠고, 행복했고, 소중한 추억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 하나도 눈에 담을 수 없다는 것, 아쉽지만 마음에 담아 놓았다가 한 번씩 끄집어내어 미소 지을 수 있는 추억으로 간직해야겠다. 기회가 된다면 가을에 한 번 더 가고 싶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횡성 홍천

김현준
횡: 횡재를 바라다가 낭패 보는 것은
성: 성실을 밑천 삼아 근면하게 노력하는 것만 못하고
홍: 홍진 만장에 홍진을 보태는 것은
천: 천성을 보존하고 천명을 따르는 것만 못하리

김병구
횡: 횡으로 종으로
성: 성곽이며 사찰이며 박물관에다
홍: 홍천같이 먼 곳까지 열심히 찾아다니는 문화원 가족 여러분
천: 천년 만년 행복하세요

조경호
횡: 횡단 보도
성: 성질 급한 사람들
홍: 홍색 신호 무시
천: 천천히 좀 천천히

시제: 양동 옥산

이진우
양: 양쪽을 아무리 봐도
동: 동안 얼굴밖에 없네요 이분들과함께
옥: 옥산 서원에 가서 이현동 선생의 설명을 들으려 하니 “나가주세요!”
산: 산통 다 깨네

조경호
양: 양반 양반 어디나 양반이란다
동: 동네방네 번듯한 기와집만 남았구나
옥: 옥수수밭을 매던 우리 할배 할매
산: 산비탈 초가집이 왜 이리 그리운고

시제: 병산 봉정

조경호
병: 병산 서원 휘감아 도는 강변을 걸었습니다
산: 산에는 빨간 단풍이 춤을 추고 내 가슴에는 가을이 물듭니다
봉: 봉정사 오르는 길을 낙엽과 함께 걸었습니다
정: 정다운 사람들의 목소리 내 가슴에는 또 한편의 성훈이 내렸습니다

이경재
병: 병아리처럼 예쁜 병산 서원 은행은
산: 산세 좋은 안동에서
봉: 봉정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이 있어
정: 정말로 다시 찾고 싶은 곳이오

맹영숙
병: 병들기 전에
산: 산에 오르고
봉: 봉우리까지 오르고 나면
정: 정신이 편안해집니다

시제: 상주 삼백
서관수
상: 상복을 입은 나
주: 주머니 속에는 체온으로 따스해진 동전 몇 닢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삼: 삼삼오오 팽이치기에 돌아가는 팽이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 백팔배도 오백팔배 되어도 어린 시절 나의 겨울 이야기

이진우
상: 상주에 왔어요
주: 주손 종손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삼: 삼삼한 막걸리를 마시면서
백: 백세까지 역사 기행 같이 다닙시다

시제: 봉화 청양

김현준

봉: 봉선화 연정
화: 화개 장터
청: 청춘가
양: 양곡은 많은데 국악은 없네

이경재
봉: 봉화는 부드럽고 아늑하고 정겹다
화: 화려하게 꾸미지도 다듬지도 않았다
청: 청춘처럼 순수하고 소박하다
양: 양양하게 흐르는 계곡물에 영육의 때를 씻자

배순선
봉: 봉화는 가는 곳마다
화: 화창한 봄 날씨에 어울리는
청: 청정한 산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양: 양심 없는 이들로 문화재가 훼손되어 마음이 아픈데 앞으로 보존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석규
봉: 봉화백이 아니면 누구에게서 치국의 도를 들으랴
화: 화담이 아니면 누구에게서 우주 운행의 이치를 들으랴
청: 청하노니 대조선 모든 여성들이여
양: 양춘 가절을 허송하지 말고 청사에 이름 남길 방도를 오늘부터 당장 실행하시라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인 당사자의 의사와 선택을 존중해야

김시형(25세, 남, 뇌병변 장애 1급)

  나는 대구에서 2남 1녀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일 무렵, 급성 황달에 걸렸는데, 수혈을 통해 황달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내게는 적용될 수 없어서 나는 뇌병변이라고 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매우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나를 이곳 저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나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물리 치료도 받게 하고 장애를 가진 내가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애를 쓰셨다.
  나는 세 살 때부터 여섯 살 때까지는 <요한 바오로의 집>이라고 하는 장애 어린이를 위한 시설에 기거하면서 물리 치료 등 유아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일곱 살 때는 나이가 차서 더는 이 시설에서 생활할 수 없게 되자 집으로 돌아와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물리 치료와 언어 치료, 작업 치료를 받았다.
  여덟 살이 되어 취학 통지서가 날아왔지만 부모님은 나의 장애가 심해 학교 생활이 어렵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물리 치료와 운동을 더 받게 되면 나의 몸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학교 입학을 2년 늦추고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서 물리 치료를 받고 운동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집에서는 어머니가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시면서 내가 학교에 들어가서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지도해 주셨다.
  아홉 살이 되자 나는 지체 장애 학교인 대구 보건 학교에 입학했다. 초등 학교 3학년 때까지는 교과 과정 중에 물리 치료와 운동이 포함되어 있어 계속 치료와 운동을 받을 수 있었지만 4학년 때부터는 물리 치료와 운동을 할 수가 없어 팔과 다리의 장애가 더 심해지게 되었다.
  초등 학교 3학년 무렵인가 동생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놀러 갔다가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심한 놀림을 받았다. 그 전에는 주로 가족들과 지내거나 장애 어린이집에서 생활했고, 학교도 특수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비장애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드물었으므로 놀림을 받는 일은 없었다. 심한 놀림을 받은 나는 마음이 너무나 아파 어머니를 찾아가 크게 울었지만, 처음으로 장애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막내 동생은 나와 열두 살이나 차이가 난다. 친척들은 내가 장애가 있기 때문에 낳지 않아도 될 동생을 늦게 낳게 되었고, 그 동생이 아들이어서 너무나 잘 되었다고 하는 말을 자주 하여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부모님의 배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밝게 보낼 수 있었다.
  초등 학교와 중학교 9년을 대구 보건 학교에서 보낸 나는 고등 학교는 일반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일반 고등 학교에서의 생활을 위해 물리 치료와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말 나와 부모님은 일반 학교 진학을 위해 먼저 집에서 가까운 D 고등 학교에 입학 문의를 하러 갔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나의 장애 상태를 확인하고서는 학교에 아직 엘리베이터와 같은 시설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교육 여건도 구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의 입학을 거부했다. 나와 부모님은 마음이 몹시 상했지만 우리 나라 학교가 장애인들에게는 늘 그렇지 하는 생각으로 이 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다시 인근의 K 고등 학교에 입학 문의를 했다. 다행히 이 고등 학교에서는 내가 입학을 원한다면 받아 주겠다고 했기에 나는 입학하여 3년을 보내게 되었다.
  K 고등 학교에도 다른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도 않았고, 장애 학생을 위한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나는 어머니가 아침에 학교까지 차를 태워 주고 방과 후에는 나를 다시 데리러 와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통학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그래도 학교에 도착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무사히 고등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고등 학교 때까지는 나는 다리가 뒤틀려 있고 힘이 부족해서 혼자서는 걷기가 어려웠지만 옆에서 누가 부축을 해 주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지만 교실까지 오가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고등 학교 시절 3년 동안 체육 시간에는 혼자서 교실을 지켜야만 했지만 소풍이라든가 수학 여행 등 학교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손에 장애가 있어 글씨를 쓰는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필기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몇몇 선생님들은 강의 노트를 복사해 주셔서 내가 일일이 필기하는 수고를 덜어 주셨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강의 내용을 칠판에 적었고, 나는 느리게 그것을 노트에 옮기느라 땀을 흘려야만 했다. 내가 제대로 필기하지 못한 과목들은 친구들이 필기를 해 주거나 친구들의 노트를 복사해서 봐야만 했다. 힘들고 불편했지만 친구들은 나의 필기를 잘 도와주어서 공부를 겨우 할 수 있었다.
  학교 측에서는 나를 위한 별도의 조치나 적극적인 배려를 하지는 않았고 다만 내가 화장실을 좀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지봉을 설치해 주고, 3학년 때는 나를 위해서 교실을 1층으로 옮겨주었다. 중간 고사나 기말 고사를 치를 때는 양호실에서 혼자서 시험 시간을 연장해서 보았지만 모의 고사는 친구들과 동일한 시간을 적용받으면서 교실에서 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었다.
  처음 입학을 했을 때 내 몸에 맞는 책상이 없어서 아버지가 특별히 나의 몸에 맞도록 책상과 의자를 제작하여 3년 동안 사용하는 등, 장애 학생으로서 교육에 필요한 특별한 교구는 직접 마련해야만 했다. 장애 학생을 교육한 경험이 없었던 학교 측은 장애 학생의 정당한 학습권을 보장하고 장애 학생을 불편함과 어려움 없이 교육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으며,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권한도 여건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장애 학생에 대한 교육을 개별 선생님들의 재량에 맡겨 놓았기 때문에 마음이 너그럽고 배려심이 깊은 선생님들은 나의 학습을 위해 좋은 방안을 찾으려고 고민했지만 몇몇 선생님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고등 학교 시절 보행을 도와주고 필기를 대신해 주는 등 도와준 좋은 친구들도 많았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도 많았다. 나를 육체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말로 나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친구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 나로서는 그저 날카롭게 파고드는 마음의 깊은 상처만 홀로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말로 괴롭히고 무시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좀 더 강하게 대응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견디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면 으레 ‘저 사람은 장애가 이렇게 심하니 이런 일들은 못할 거야’라든가 나처럼 뇌병변 장애가 있어 언어 장애와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능이 부족하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하고 자신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이들이 많은데 내가 함께 공부를 했던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대구 대학교 정보 통신 공학부에 입학하였다. 집에서 경산 캠퍼스까지는 너무 멀기도 하고 학교 내에 기숙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그리고 캠퍼스가 너무 넓고 강의실을 자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전동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다.
  대구 대학교는 다른 대학에 비해 장애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많은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경사로가 마련되어 있는 등 편의 시설이 상당히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장애 학생을 위한 편의 시설이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거나 장애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이 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가 없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에는 장애 학생들이 수업을 받을 수가 없다. 나 역시 어떤 과목을 수강 신청했다가 나중에 확인해 보니 강의실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3층에 있는 것을 알고는 행정실에 강의실 변경을 요청했지만 행정실 직원으로부터 수강 신청을 변경하라는 말만 들었다. 학생들이 수강 신청한 내용을 사전에 살펴보고 나서 해당 과목에 장애 학생이 수강 신청했다면 그에 맞게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 학생이 수강 신청한 과목은 강의실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건물에 배정한다든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건물을 사용해야 한다면 1층에 강의실을 배치하고, 또 청각 장애 학생이나 시각 장애 학생이 수강 신청을 했다면 이들의 학습을 위해 수화 통역이나 노트 대필, 교재의 점역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리하게 학생들에게 수강 신청을 변경하라고 하는 행정실 직원의 태도에서 보여지듯이 아직도 장애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학교측의 조치는 미흡하기 이를 데 없다. 또 한 번은 시험을 치기 위해 급히 강의실로 이동하고 있는데, 그 건물에 한 대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힘들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올라갔지만 시험 시간에 늦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시험 기간에 장애 학생들이 요청하면 장애 학생 지원 센터에서 대필자를 구해 주지만 전에는 장애 학생이 직접 대필자를 구하다 보니 시험 공부는 뒷전이고 대필자를 구하러 다니다가 시험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장애 학생에게 대필을 해 주는 학생들에게 봉사 학점을 인정해 주는 것이 전부였고, 대필 시간에 해당하는 아르바이트 비용을 지불하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장애 학생들이 대필자들에게 대필을 부탁하고, 봉사에 대한 고마움을 직접 표해야 했기에 심리적 부담감도 많았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통학 지원을 위해 많은 스쿨 버스를 운행하고 있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쿨 버스 가운데 저상 버스가 한 대도 없었기 때문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 학생들은 한 번 경산 캠퍼스에 들어가면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마치 수용소와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나 역시 주말에 한 번씩 부모님이 데리러 올 때는 학교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평일이나 부모님이 데리러 오지 않는 주말에는 꼼짝없이 기숙사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장애 학생들은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쇼핑을 하러 간다거나 하는 일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학교 앞 식당이나 술집, 카페가 전부였고, 대구 시내나 경산 시내, 하양읍 등으로는 볼 일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장애 학생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학교 측에서는 스쿨 버스 한 대를 저상 버스로 마련했지만 저상 버스를 운행하는 시간은 평일 등하교 시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애 학생들은 야간이나 주말에는 저상 버스를 이용할 수 없었고, 평일 등하교 시간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강의실을 오가며 수업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저상 버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장애 학생들의 저상 버스 이용률이 떨어지자 학교 측에서는 이용도 하지 않을 것이면서 저상 버스를 요구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저상 버스의 운행을 줄이겠다고 하기도 하였다. 장애 학생들은 수업만이 학업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 과외 활동이나 문화 활동 등도 대학 생활의 일부이므로 야간과 주말에 저상 버스를 운행해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학교 측에서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애 학생들도 다른 비장애 학생들처럼 평일에도 문화 생활을 위해 학교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어야 하고, 주말에도 볼일을 보기 위해 출입이 자유로워야 하며, 장애인 특례 입학을 통해 다수의 장애 학생을 받은 학교 측은 당연히 이들의 이동 편의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대구 대학교 내에 있는 장애 학생 동아리인 <장애 학생 복지회> 활동을 하면서 교내의 편의 시설 문제나 장애 학생들의 학습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장애인 자립 생활 지원 센터를 만들어 장애인의 복지 증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는 장애가 나 자신이나 부모님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을 했으나 대학을 다니면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한 활동들을 하면서 장애인의 문제가 장애인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회가 장애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한 사회가 장애인을 만들어 내고, 장애인들에게 온갖 장벽을 설치하고 있다면 우리 장애인들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회가 만들어내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온갖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나가는 일은 장애인 스스로가 해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우리 사회를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졌다.
  나는 볼일이 있을 때면 주로 지하철이나 저상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저상 버스가 많지 않아 배차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시간과 이동하고자 하는 지역의 운행 노선이 맞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의 약도를 준비했다가 지하철을 이용하여 가장 가까운 역에 내려 전동 휠체어로 원하는 곳을 찾아가곤 한다. 그런데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여 길을 가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는 인도로 가야 하지만 우리 나라의 인도는 너무 폭이 좁고 울퉁불퉁하여 전동 휠체어가 지나가기에 어려움이 많아 대다수의 지체 장애인들은 인도가 아니라 차도로 다니고 있다. 도로 사정이 복잡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들이 난폭 운전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전동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늘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야간에는 휠체어 앞뒤로 자동차처럼 폭을 표시해 주는 등이나 브레이크 등이 없기 때문에 자동차와의 충돌의 위험을 늘 안고 있다. 요즈음은 야간 주행용 등을 장착한 전동 휠체어가 일부 제품에 부착되어 출시되기도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전동 휠체어에는 등이 없어서 나는 휠체어 앞뒤에 형광 테이프를 부착하여 야간 주행 시 사고를 예방하고 있는데, 정부에서 전동 휠체어를 제작하거나 수입할 때 야간 주행용 전등을 의무적으로 부착하도록 하는 형식 승인 제도를 시행해야만 장애인들의 안전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려고 휠체어 리프트 쪽으로 가고 있는데, 지하철 공사 직원이 다가와 전동 휠체어를 수동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당황하여 그 직원에게 인상을 쓰면서 화를 내었다. 직원은 리프트를 작동하고 장애인이 안전하게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여 리프트에 오르도록 하면 되는데 내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휠체어를 수동으로 전환하려고 한 직원의 행동에 놀랍고 불쾌했다. 그 직원은 아마도 자신이 휠체어를 밀어서 리프트에 태우려고 수동으로 조작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리프트가 플랫폼에 닿자 지하철을 타기 전에 그 직원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아까는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갑자기 휠체어를 수동으로 조작하려고 해서 놀라서 화를 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장애인을 도와줄 때는 반드시 의견을 물어보고 그 장애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도와주어야 하지 절대로 비장애인이 혼자 생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해 주었다. 그 직원 역시 우리 나라 대다수의 비장애인들처럼 장애인을 도와 주려는 마음은 아름답지만 장애인에게 무엇을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는지 물어보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도와주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으로 일방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도리어 장애인을 불편하게 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한 번은 혼자서 기숙사를 나와 볼일을 보러 나가기 위해 어렵게 방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지나가던 비장애 학생이 나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하고는 내가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줄 잘못 알고 일방적으로 내 손에서 열쇠를 빼앗다시피 해서는 내가 어렵게 잠근 문을 다시 열어 버린 일이 있었는데, 이 일 역시 그 학생이 장애인의 의사는 아랑곳 않고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일방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장애인을 도와주기보다는 도리어 불편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장애인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비장애인들은 사회 생활에서 사람을 만나고 할 때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근래에 와서 대구시에서는 중증 장애인의 이동 편의를 위해 저상 버스를 도입하여 운행하고 있다. 현재 대구시에는 50대 정도의 저상 버스가 운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 수를 늘려 나갈 계획으로 있다. 그런데 저상 버스가 점차 늘어나 중증 장애인들의 이동에 많은 도움이 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다. 첫째는 저상 버스에 사용하는 연료가 다른 버스에 사용하는 연료와 달라 기사들이 가스 충전의 어려움 때문에 저상 버스 운전을 기피하고 있고, 둘째는 저상 버스의 경우 휠체어 슬라이드를 올리고 내리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배차 시간 조정 등과 같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어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는 정차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셋째는 저상 버스가 휠체어를 싣기 위해서는 인도에 바싹 붙여서 정차하고 슬라이드를 인도 위에 내려놓아야 하는데, 버스 정류장에 불법 정차 중인 택시 등으로 인해 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차도에서 슬라이드를 내리다 보니 인도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장애인은 버스를 타기 위해 인도턱이 없는 곳으로 인도를 멀리 돌아 차도로 내려서 위험하게 버스를 타야 한다. 그리고 버스가 차도에다 슬라이드를 내리다 보니 슬라이드 각도가 너무 높아 전동 휠체어가 쉽게 버스에 오르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뒤로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넷째, 현재 운행 중인 저상 버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운행 노선도 일부에 국한되어 있고 배차 시간도 너무 길어 버스를 타려고 하면 미리 운행 시간에 맞추어 정류장으로 나와야 하고, 한 번 버스를 놓치고 나면 장시간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이러한 배차 시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상 버스의 수를 대폭 늘림과 동시에 현재 정류장에 설치되어 있는 노선 안내도와 내비게이션 등을 이용하여 해당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려고 하는 중증 장애인들이 자신이 타고자 하는 버스의 번호를 입력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운행 중인 버스에 그 내용이 전달되어 특정 정류장에 중증 장애인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기사가 해당 정류장에 도착하면 중증 장애인을 안전하게 태울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의 구축과 함께 배차 시간의 문제 역시 조정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이러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상 버스를 타려고 하는 중증 장애인들이 개별적으로 자주 타는 버스 기사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자신이 몇 시에 어느 곳에서 버스를 탈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서 이용하다 보니 운전 기사로서는 운전 중에 장애인들의 전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관계로 저상 버스의 운전을 싫어하게 되고 이는 저상 버스를 이용하는 중증 장애인이나 유모차를 모는 주부, 노인들에게 불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나는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화관에 가곤 하는데 전동 휠체어를 타고 영화관에 가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요즈음은 영화관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해서 접근하는 데은 별로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영화관에 막상 들어가게 되면 휠체어를 위한 좌석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맨 앞 좌석 앞이나 맨 뒤편 통로에서 관람해야만 한다. 맨 뒤편에서 영화를 보면 화면이 너무 멀어서 불편하고, 맨 앞 좌석 앞에서 영화를 보면 화면을 바라보기 위해서 고개를 2, 3시간 동안 뒤로 젖히고 있어야 하므로 목이 여간 아픈 게 아니다. 영화관 측에서 좌석 2~3개 정도만이라도 휠체어 이용 장애인 전용으로 비워 둔다면 영화를 좋아하는 장애인들이 자주 찾아가 감상할 수 있을 텐데 여러 가지로 배려가 아쉬울 따름이다.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휠체어가 접근하기 어려운 곳들이 여전히 많이 있어 식당이나 카페 등을 이용할 경우에는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자주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반월당 메트로센터에 자주 가는 식당이 있어 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친구와 함께 들어가려고 했더니 주인이 자리가 없다면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식당 안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가운데 몇 개의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주인은 아마 휠체어가 들어가면 식당이 복잡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비어 있는 자리는 예약된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다. 전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우리를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 주었었는데, 그 날은 아주머니는 안 계시고 주인이 식당 일을 보면서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주인을 밀치고 그냥 안으로 들어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처음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던 주인도 우리가 밀고 들어가자 더는 막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지난해부터 중증 장애인 활동 보조 제도가 마련되어 나 역시 현재 활동 보조를 받고 있다. 그런데 중증 장애인 활동 보조의 시급이 낮아서인지 남성 활동 보조인을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나처럼 휠체어를 사용하는 중증 장애인의 경우에는 일상 생활에서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 보조인보다는 남성 보조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활동 보조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주로 여성이고 남성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대학생들의 방학 기간 중에는 남학생들이 활동 보조에 참여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방학이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중증 장애인의 활동 보조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중증 장애인에 대한 활동 보조는 중증 장애인과의 호흡도 대단히 중요한데, 방학 동안 한두 달 활동 보조를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남학생을 활동 보조인으로 하는 경우 활동 보조의 연속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정부나 대구시에서는 현재 절대적으로 부족한 활동 보조 시간을 늘리는 일과 함께 각 장애 유형별로 보조가 필요한 활동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개별 장애인에게 맞는 보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의 보안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현재 어머니가 경영하시는 식당의 골방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어머니가 식당에 오셔서 나의 아침을 차려 주시면 나는 아침을 먹고 동료들이 일하는 사무실로 나온다. 그리고 저녁에 내가 식당에 가면 어머니는 나에게 저녁을 차려 주시고 나서 아버지와 동생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신다.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지만 어머니가 아침, 저녁을 챙겨 주시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 친구와 장래 일을 의논해 보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나는 지금처럼 어머니가 일하시는 식당 골방에서 기거하면서 중증 장애인들의 독립 생활과 권익 증진을 위한 일들을 하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되고 여건이 마련된다면 독립해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사무실을 하나 운영해 보고 싶다.

  인문학 강좌

  엔도 슈사쿠의 종교 문학

  김재현(계명 대학교)


Ⅰ. 왜 엔도 슈사쿠를 읽는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가톨릭 소설가입니다. 그의 중요한 작품들인 “침묵”, “예수의 생애”, “깊은 강” 등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톨릭 작가로 여겨집니다. 엔도는 아쿠다가와 상을 비롯하여 일본 국내에서 저명한 문학상을 다수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등 여라 나라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엔도의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의 서구와의 대결 및 그가 주제화하고 있는 ‘거리감’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거리감이란 서구 기독교와 일본적 종교 세계가 가지는 거리감입니다. 엔도는 어머니를 통해서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과 자신의 혈관에 흐르는 일본적-동양적 전통의 거리감을 자신의 숙명적 작업으로 인식했습니다. 엔도의 전체 문학은 이러한 서구와의 대결이라는 근본 테마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엔도의 작품이 동양적 기독교의 조형이라는 작업을 함에 있어서 동양에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는 사람의 ‘혼의 여정’을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엔도 연구가인 다케다는 엔도의 문학을 혼의 지성소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우리들이 엔도씨의 단편 소설을 발표된 순서대로 읽어 나간다면 엔도의 작가로서의 궤적과 그 성숙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다카다는 “엔도씨가 그 작품에서 진지하고 깊이 있게 형상화하고 있는 엔도 자신의 정신상의 문제를 통해서 나 자신 안의 무언가를 각성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Ⅱ. 엔도 문학의 원점과 가톨릭 문학의 만남
  엔도 슈사쿠는 1923년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전공한 재원이었습니다. 네 살 무렵 아버지의 전근으로 만주로 이사했던 엔도는 부모의 이혼으로 말미암아 이모가 살던 고베로 되돌아왔습니다. 거기에서 가톨릭에 귀의한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나가게 된 엔도는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게 됩니다.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를 통해서 받은 비자발적인 세례는 엔도의 삶을 결정해 버린 중요한 체험이었습니다.
  “나의 세례를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나는 어머니로부터 기성복을 받은 셈이었다. 이 양복을 입어 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양복이어서 일본인인 나의 몸에 맞지 않았다……몇 번이고 몇 번이고 벗어 버렸지만 그렇게 되면 벌거벗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 입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평생에 걸쳐서 의탁하면서 살아왔던 것을 어린아이였던 내가 버리게 되면 어머니가 가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양복을 나에게 맞추고자 하는 노력이…… 나의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어머니가 주신 양복을 일본인인 나의 몸에 맞는 일본 옷으로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와 소설>
  이러한 타율적인 세례는 그의 어머니 체험과 더불어 그의 근본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기독교 신앙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 없이는 생각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엔도는 1940년 17세에 대학 시험을 쳤지만 낙방했고 3수를 해서 게이오 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습니다. 우연히 고서점에서 프랑스 문학책을 사서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불문과에 진학했습니다. 엔도가 썼던 초기 평론 중 <신들과 신>을 보면 엔도 문학의 출발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곳에 기성 양복이라고 표현되었던 ‘거리감’이었습니다. 신들(범신성의 혈액)로 대변되는 일본과 신으로 대변되는 서양 기독교 사이의 거리감과 위화감이야말로 그의 문학의 모티브였습니다. 초기 평론 시기에는 이런 문제 의식이 잘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엔도는 <생일 밤의 회상>이라는 글에서도 ‘일본적 감성’은 분명한 대비와 구분을 싫어한다고 논평합니다. “일본적 감성은 밝음을 싫어하는 것이다. 밝은 빛 아래, 거기에는 빛과 그림자가 대비되기 때문이다. 일본적 감성이 좋아하는 것은 대개의 것이 희미하게, 혹은 회색으로 아물거리는 봄비나 한 차례 내린 후의 습윤한 풍경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글에서 엔도는 서구적인 사막성과 대비되는 동양적인 습윤성을 부각시킵니다. 일본적 심성은 죄에도 죽음에도 무감동하게 있으며 무 속에서 자신을 소멸시키는 존재 방식입니다. 엔도는 일기에서도 “기독교가 범했던 죄 가운데 하나는 절대를 하나의 질서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절대란 그러한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혼돈으로서 무질서이다”라고 썼습니다.

Ⅲ. 초기 작품 세계: 거리감의 극명화
1. 아덴까지
  1950년 엔도는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프랑스로 유학의 길을 떠납니다. 이 유학 생활은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3년만에 중단되고 맙니다. 기독교 서구에 대한 엔도의 거리감은 1954년 발표한 첫 소설인 <아덴까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인공인 지바는 자신이 사랑하던 백인 프랑스 여학생과 헤어져 아라비아 아덴까지 가는 화물선 선창에 있는 4등칸을 타고 가는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주인공 지바가 자신이 좋아하던 프랑스 여학생의 하얀 피부와 자신의 황색 피부를 대조시켜 보면서 자신의 피부가 추하다고 느끼는 대목입니다.
  “방의 불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여자의 어깨와 유방의 찬란함 옆에 나의 육체는 생기가 없는 어두운 황색을 띠고 가라앉아 있었다…… 이 탁한 누런 색은 점점 둔한 광택을 더해 갔다. 그래서 여자와 나의 몸이 합쳐진 두 개의 색에는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나 조금만큼의 조화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추악함이었다……비겁하게도 나는 그때 방의 불을 꺼서 어두움 속에서 나의 육체를 잃어버리고자 했다.”
  이것은 주인공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비겁한 행위였습니다. 즉 색의 차이를 차이 그대로 긍정하지 못한 비겁한 도피였으며, 자신을 무화시킴으로서 동과 서의 거리 차이를 무화시키려는 헛된 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도 동과 서의 영성의 차이는 무화될 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백색과 황색의 차이는 동과 서의 정신 세계의 거리감을 상징했습니다. 이러한 거리감의 자각 없이는 거리감의 극복은 불가능합니다.
2. <백색인>과 <황색인>
  <아덴까지>가 동서의 거리감이 명시화된 작품이라면 1955년 아쿠다가와 상을 엔도에게 안겨 주었던 <백색인>은 후에 발표된 <황색인>과 짝을 이루면서 일본적 풍토와 기독교 사이의 거리감이 생기는 이유를 밝힌 작품입니다. 백색인은 신의 부재 상황인 죄악에서도 신의 존재를 느끼는 반면, 황색인의 세계에는 악은 단지 피로감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엔도는 “기독교를 가지고 있는 서구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이나 교회를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신이라는 것은 염두에서 떠날 수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백색인>의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독일군의 앞잡이가 되어 평소 증오하던 신학생 자크를 체포하고 그의 약혼녀까지 능욕하려는 주인공 ‘나’는 사랑하는 애인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가톨릭 교인이어서 자결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자크에게 깊은 당혹감을 느낍니다.
  “마치 내가 자크를 오랫동안 사랑해 오면서 그 사랑에 배반당하고 사랑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혀를 물다니, 나는 거의 그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자살은 가톨릭 교인에게는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될 대죄이기 때문이다. ‘너는 신학생이 아니냐? 그런데도 너는 이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살을 택했단 말인가?’”
  이 독백은 신을 부정하고 혐오하며, 교회를 증오함에도 불구하고 서구인인 ‘나’의 마음의 근저에서는 신을 구하고 기독교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악을 의식적으로 행하면서도 그 행위를 악이라고 의식하도록 해 주는 지평으로서 절대적인 신의 존재는 전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신학생 자크보다도 의도적으로 기독교와 멀어지고자 하고 신을 믿는 자들을 혐오하는 주인공에게 신은 뚜렷한 그림자로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황색인에게 있어서 죄의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를 인식시켜 주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황색인의 주인공 지바는 동경 대학 의학부에 적을 두고 있는 학생인데, 폐결핵 때문에 휴학하고 시골에서 휴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아 세례를 받았음에도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사촌 여동생(그녀는 지바의 친구인 사에키의 약혼녀이다)이 찾아와 둘은 육체 관계를 맺어 나갑니다. 지바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부로우 신부에게 이 관계를 털어놓습니다. 그는 부로우 신부에게 이 관계에서 두터운 피로를 느끼지만 죄의 어두움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이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고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황색인인 나에게는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당신들과 같은 죄의식이나 허무와 같은 심각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피곤함과 같은 짙은 피로감입니다.” 황색인은 결국 기독교와 일본의 거리감의 근원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그 근원에는 죄의식의 부재로밖에 보일 수 없는 일본적 영성의 본질을 밝혀내는 것이었습니다. 엔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 기독교와 일본의 모순을 <황색인>이라는 하나의 소설에서 씀으로서 피리어드를 찍은 것이다. 하지만 이 모순은 나에게 하나의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일본인은 일본인으로서 기독교의 전통과 역사와 유산과 감각도 없는 이 일본의 풍토를 등에 지고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Ⅳ. 전환
1. ‘독약’을 희석시키는 ‘바다’
  <황색인> 이후 엔도 작품의 지향점은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풍토를 등에 지고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문제, 즉 기독교 수용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작품이 바로 <바다와 독약>입니다. 가사이는 <바다와 독약> 이후에 엔도의 문학에는 근본적인 “작풍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고합니다. <바다와 독약>에서 엔도는 일본과 서구 기독교 사이의 거리감을 내적으로 극복하고서 차이를 통해서 조형되는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다와 독약>에서 엔도는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 5~6월에 걸쳐 쿠슈 대학 의학부에서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자행된 생체 해부 사건을 다루면서 그 일에 아무런 저항 없이 참여한 젊은 의사 수구로와 도다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수고로와 도다는 생체 해부 실험 제의를 받고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두가 죽어 가는 시대인데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참여합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만두려고 한다면 기회가 있는데”/ “응”/ “그만둘까?”/ “응”/ “신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 “신이라고?”/ “뭐야,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자기를 억눌러 오는 것으로부터,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네……”/ “나한테는 신이 있어도, 없어도 아무래도 좋아.”
  ‘신이 있어도 없어도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는 신 앞에서의 죄가 아니라 ‘타인의 눈,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만’을 의식하고 있는 황색인의 전형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엔도는 이것을 자신이 이종사촌과 육체 관계를 맺고도 다만 자기 혐오와 불안만을 느꼈던 도다에게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도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간통만이 아니다. 죄악감의 결핍만이 아니다. 나는 다른 것에 대해서도 무감각하였던 것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나는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내가 두려운 것은…… 자기가 죽인 인간의 일부분을 보아도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는 이상한 마음이다.”
  일본적 영성에 있어서 신앙의 출발을 이룰 수 있는 죄의 자각은 신 앞에서의 존재 양태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운명에의 연대에 대한 거부라는 사실을 엔도는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바다’는 인간 속에 있는 독약을 아시아적으로 해독시키는 방법입니다. <바다와 독약>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엔도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바다의 이미지는 은총의 바다라고 해도 좋고, 사랑의 바다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인간 안에 있는 독약과 대치되는 것입니다.”
  바다는 <침묵>에서 말하는 ‘늪’이나 <깊은 강>의 ‘강’처럼 아시아적 토양의 범주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두 일체의 대립 구도를 빨아들이는 한없이 부드러운 어머니의 이미지입니다. ‘바다’는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골고루 비를 내리는 신의 이미지입니다. 악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성입니다. 신앙은 현실의 어두움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성화시켜 나갈 뿐입니다(<루오 속의 예수>). 악의 성화는 악과 대립하여 싸우는 선한 사람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이분법을 초탈한 바보를 통해서 육체성을 입게 됩니다.
2. 일상과 초월
  <바다와 독약> 이후 엔도는 경소설을 씁니다. <내가 버린 여자>(1964)와 <바보 선생님>(1969)이 대표적입니다. <내가 버린 여자>의 주인공 모리다 미츠는 남자 주인공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인생으로 그려집니다. 그녀의 이름 ‘미츠’는 죄를 의미하는 ‘츠미’를 거꾸로 읽은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바보는 그녀를 버린 남자에게 죄를 일깨워 주는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엔도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버린 여자>의 보다 직접적인 제목은 <내가 버린 예수>이다”라고 말합니다. 엔도에게 있어서 일상은 바로 초월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엔도는 일상성 속에서 무명의 예수를 찾아냅니다.

Ⅴ. 애가와 후미에 체험: 약자의 문학
  엔도는 <애가>라는 단편집을 쓰는데,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나중에 <침묵>을 쓰기 위한 전주곡이자 절정에 오르는 계단이 됩니다. 엔도는 1960년 폐결핵이 재발하게 되면서 1961년 세 번에 걸친 폐수술을 받습니다. 1962년이 되어서야 퇴원합니다. 2년 7개월의 병상 체험은 엔도의 유학 체험과 더불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엔도의 병상 체험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후미에 체험입니다. 후미에(踏絵)란 일본의 막부가 기독교 신자라고 판명된 사람들을 배교시키기 위해서 밟도록 강요한 그림입니다. 후미에에는 목판에 동판으로 된 예수상이나 예수와 마리아 모자상 등이 있었습니다.
  “우선 저 검은 발자국의 흔적을 후미에 주변의 판에 남겼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그 발로 자신이 믿고 있는 자의 얼굴을 밟을 때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어머니의 종교로의 개종
1) <침묵>
  <침묵>(1966)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소설이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17세기 초 일본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세바스찬 로도리코입니다. 그는 자신의 선배인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 선교하러 왔다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일본행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배교하였으며, 그 후 일본 여인과 결혼하여 오카야마 산우에몬이라는 일본명으로 64세까지 살았던 실재 인물입니다.
  <침묵>은 엔도 스스로도 말하듯 일본인으로서의 작자의 감성과 기독교의 거리를 메우려고 한 시도였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기독교를 어머니의 종교로 이해하고자 한 작품이었습니다. 로도리코는 후미에를 밟고 나서 “나는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과 나의 주는 다르다고 알게 되었다”고 독백합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은 아버지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이며, 나의 주는 어머니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합니다. “나는 전향하였다. 그러나 주여, 내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만은 알고 계십니다”라는 독백처럼 로도리코는 후미에를 밟았지만 그리스도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종교의 그리스도가 어머니의 종교의 그리스도로 전환되었을 뿐입니다.
  엔도는 사무라이적 기독교, 강자를 위한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학이 추구한 것은 약자의 논리로서의 문학이었습니다. 성화를 밟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던 약자에게 비쳤던 그리스도의 얼굴은 어떠하였을까 하는 문제가 바로 <침묵>의 주제입니다. <침묵>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은 여러 번 바뀝니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인 얼굴은 후미에를 밟기 전에 보았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새벽의 희미한 빛, 빛은 노출된 신부의 닭처럼 가느다란 목과 쇄골이 드러나 있는 어깨에 비쳤다. 신부는 두 손으로 성화를 들어 올려 얼굴에다 갖다 댔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싶었다. 목판 속의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힌 탓으로 마멸되고 오그라든 채 신부를 슬픈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선 진정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 하고 신부는 떨었다. ‘아프다.’”
  전후 최초의 일본 신학이라고 평가받는 <신의 아픔의 신학>의 저자 기다모리 가조는 자신의 책명을 본떠 이 장면을 “발의 아픔의 문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로도리코가 발을 올려서 예수의 상을 밟는 순간 놀라운 거룩한 체험으로 변하게 됩니다.
  “신부는 발을 올렸다…… 자기는 지금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인간의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밟는다. 이 발의 아픔. 이 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
  엔도의 목적은 위대한 신앙에 흠집을 낸다든지, 죽음을 뛰어넘는 신앙의 위대함을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엔도의 메시지는 하느님은 가장 약한 자, 비겁한 자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느님, 모든 것을 감싸 안아 주시는 어머니 같은 하느님이라는 주장입니다. 엔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가르친 하느님은 분노의 하느님도, 벌하는 하느님도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처럼 넘어진 자를 안고, 그 눈물을 씻어 주며, 용서하고 뉘우칠 때마다 머리를 끄덕이는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근본 사상이요, 불행한 자를 볼 때, 우는 자를 볼 때, 괴로워하는 자를 볼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그의 손은 저절로 펴져서 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내가 성서를 읽을 때 무엇보다도 감동하는 것은 이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 사람은 인간이 얼마나 슬퍼하는가를 뼈에 사무치도록 알고 있었다. 자기를 응시하는 인간의 서글픈 눈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며 다가갔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랑을 그는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하느님의 이미지는 결코 분노하고 심판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뿐만이 아니었다.”
2) 동반자 예수
  <침묵>에서 결정화된 어머니의 종교로의 개종은 엔도의 예수전인 <예수의 생애>(1973)를 통해서 일본적 그리스도에 대한 추구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엔도의 예수전에서 예수는 나사렛의 조그만 거리의 가난함과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알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예수에게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가 그들에게 주었던 대답은 산상 수훈에 나타난 사랑의 외침뿐이었습니다. 실망한 군중은 예수를 무력한 사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내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엔도는 왜 제자들은 무력한 예수를 신앙하게 되었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엔도에게는 수수께끼였고, 성서가 성서가 되는 본질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추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픈 마음에, 저 사람을 저버린 일에 대한 마음 아픔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현실적으로 무력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으나 버림받은 예수의 괴로운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무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엔도는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린 스승이 자신들을 저주할까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을 듣습니다.
  “주여,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의 한 바를 모르고 있나이다.”
  예수는 한 마디도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생전에 예수가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예수를 오해하였음도 알게 됩니다. 즉, 예수는 말없는 사랑의 동반자로서 자신들과 동행하였는데 자신들은 예수를 무력한 사나이라고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한없는 사랑의 힘이 그들을 압도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서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Ⅵ. 커다란 생명이 흐르는 ‘깊은 강’
  1993년에 발표된 엔도의 마지막 작품은 <깊은 강>입니다. <깊은 강>은 엔도가 초기 평론을 쓰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평생에 걸쳐서 추구해 오던 모든 여정이 하나의 아름다운 종합을 이루고 있는 대작입니다. <깊은 강>의 등장 인물들은 모두 물과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인도 여행을 통해서 보다 큰 물이 갠지스 강에 합류하면서 동양적 범신성으로 정신적인 세례를 경험합니다. 엔도는 인도로의 여행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의 여행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인 오오츠와 미츠코는 세 번 만납니다. 처음에 미츠코가 오오츠를 만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대학에 다니던 학생 시절이었고, 두 번째 만남은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는 오오츠를 신혼 여행차 프랑스에 왔던 미츠코가 찾아갔을 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 오오츠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세 번의 만남은 엔도가 평생 추구했던 서구 기독교 신앙과 일본적 영성 사이의 번민의 골과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의 정황은 이렇습니다. 오오츠는 대학 내에서 어리숙하며 어딘가 모자라는 ‘약충’으로 소문난 철학과 학생입니다. 그는 여자의 호기심이나 관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나루세 미츠코는 그런 오오츠에게 호기심을 품게 됩니다. 그것은 오오츠가 믿고 있는 신을 조롱하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습니다. 미츠코는 오오츠를 유혹해서 결국 오오츠로 하여금 신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 때 그녀는 채플실에서 보았던 십자가에 달린 무력한 사나이에 대해 승리를 거둔 쾌감을 맛보았습니다. “당신은 무력해. 내가 이기고 만 거야. 그는 당신을 버렸어. 버리고서 내 방에 온 거야.” 그리고 곧장 미츠코는 오오츠를 버립니다. 미츠코는 자신에게 버림받는 오오츠에게서 또 한 번의 쾌감을 느낍니다.
  미츠코가 오오츠를 두 번째 만난 것은 대학 졸업 후 미츠코가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줄 남자와 결혼해서 파리로 신혼 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미츠코는 리용의 수도원에 있던 오오츠를 만납니다. 오오츠를 만난 미츠코는 “당신은 신을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신학생이 되었는가?”라고 조롱기어린 지적을 합니다. 오오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에게 버림을 받고서 나는……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사람의 괴로움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나루세씨로부터 버림을 받고서…… 성당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저는 들었습니다.
  “듣다니 무얼 말이에요?”
“‘이리 오려무나’라는 소리였어요. 이리 오려무나. 나는 너와 똑같이 버림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라는 소리를 말입니다.”
  “누구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오오츠씨가 신학생이 된 것은 제 덕택이군요”라는 미츠코의 말을 받아서 오오츠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 이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마술사처럼 무엇이나 활용하신다고요. 우리들의 약함과 죄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술사가 상자 안에 더러운 참새를 집어넣고 뚜껑을 닫고서 기합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잖아요. 그러면 상자 안의 참새는 새하얀 비둘기로 변해서 날아가게 되지요…… [저는] 마술사인 신에 의해서 변화된 것입니다.”
  미츠코가 신이라는 단어와 인연이 없다고 대꾸하자 오오츠는 그럼 신이라는 말이 싫다면 양파나 토마토라고 말해도 좋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신은 존재한다기보다 작용하고 있습니다. 양파는 사랑이 작용하는 덩어리지요…… 양파는 어떤 장소에서 버림받은 나를 어느 순간엔가 다른 장소에서 살게 해 주었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미츠코가 일본인인 당신이 구라파의 기독교를 믿는 것이 역겹다고 하자 오오츠는 자신은 구라파의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오오츠는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수도원에서 이단으로 취급을 당한다고 고백합니다.
  오오츠와 미츠코는 인도에서 세 번째 만납니다. 오오츠는 이미 가톨릭 측에서 배척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도 실패한 무력한 사나이로 나타납니다. 오오츠와 미츠코의 대화는 종교 다원주의자 엔도의 시련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찾았어요, 아주 많이. 교회에 가서도 물어보았고.”
  “죄송합니다. 전 교회에는 가 있지 않습니다. 힌두교도들의 아슈람에 들어갔습니다.”
  “힌두교로 개종한 건가요?”
  “아니요, 난…… 옛날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가톨릭 신부입니다. 그러나 힌두교인 사두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주인 없는 개를 돌봐 주듯이?’
  “네, 나는 그때 주인 없는 개와 똑같았습니다. 그때 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힌두교도 같은 이들과 함께 산다고 비난받지 않았어? 교회에서?”
  “나야 뭐 언제나 교회에서 비난만 받았으니까요.”
  “아직도 신부?”
  “그럼, 낙오되긴 했지만.”
  양파는 유럽 가톨릭 안에뿐만 아니라 힌두교 안에도, 불교 안에도 계신다고 믿으면서 단순히 생각뿐 아니라 그분 같은 삶을 선택한 오오츠에게서 미츠코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오오츠씨 얼굴에 부스럼이 났어.”
“알고 있습니다. 사창굴 같은데 들락거리니까.”
“설마…… 그 여자들을 안았어?”
“꼬옥 안았지요. 남자들을 위하여 온갖 짓을 다 하다가 죽은 그 가엾은 그 여자들의 누더기 같은 시신을”
  그러나 사랑의 연대는 배타성과 증오가 있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것이 예수의 무력함입니다. 무심한 일본 관광객을 대신해서 오오츠는 무력하게 아무런 의미없는 것 같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미츠코는 그런 그를 수없이 “바보”라고 부르는데, 엔도에게 바보는 위대한 바보이며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존재 양태입니다.
  “들것에 실렸을 때 오오츠는 고통에 찬 양이 마지막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안녕히”
  들것 위에서 오오츠는 마음 속으로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좋아. 나의 인생은…… 이것으로 좋아.”
  “바보 같아. 정말 바보잖아. 자기는”
  실려 가는 오오츠를 보내면서 미츠코는 외쳤다.
  “정말 바보야. 그런 양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자기가 양파 흉내를 냈다 한들, 증오와 이기주의밖에 없는 이 세상이 바뀔 리 없잖아. 자긴 여기 저기서 쫓겨다니기만 하다가 끝내는 목이 부러졌어. 그리고 죽어야 타는 들것에 실려서…… 자기는 무력했던 것 아냐.”
그녀는 웅크리고 앉아서 주먹으로 돌계단을 하염없이 두들겼다.”
  엔도가 그리는 신은 우리들에게 버림을 받고 밟힘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는 우리의 존재의 근거.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분이 생명의 근원이신, 커다란 생명이신 사랑의 하느님, 어머니 같은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밟힘으로서 밝혀지는 현실.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릅니다. <깊은 강>에서 엔도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인고의 고난을 함께 하는 볼품없는 여신 ‘차문다’에서 어머니를 봅니다.
  “차문다는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발 밑에는 새에게 쪼이거나 작은 늑대 같은 재규어에게 먹히고 있는 인간의 시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젖가슴은 노파처럼 이미 쭈글쭈글합니다. 그러나 그 쭈글쭈글한 시든 젖가슴에서 젖을 짜내 늘어서 있는 아이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인도 사람의 모든 고통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이분은 다름 아닌 인도의 성모 마리아이며 아시아의 어머니입니다.



  문화원 소식

  2014년 8월 7일 제10기 문화 아카데미가 개설되어 대구의 저명 예술인들이 펼치는 문화의 향연이 시작되었습니다.
  2014년 8월 15--16일 119차 역사 문화 기행 문화 캠프는 강원도 횡성에 원주 박경리 토지 문학 공원, 한지 테마 파크, 횡성 호수길, 고라데이마을, 마리소리골 악기 박물관, 수타사를 다녀왔습니다. 한여름 밤의 캠프는 이위경 실장의 멋진 사회에 의한 조별 경연을 거쳐 사물놀이 한마당으로 더욱 흥겨웠고 마침내 서라벌 나이트에서 절정을 이룬 잊지 못할 캠프였습니다.
  2014년 9월 5일 12주간 이태호 박사가 진행하는 ‘명언을 통한 삶의 지혜’를 개설하였습니다.
  2014년 9월 13일 120차 역사문화 기행은 경북 경주의 경상북도 수목원, 양동 마을, 옥산 서원, 독락당을 다녀왔습니다.
  2014년 9월 17일 10주 동안 자원 봉사 향상 과정인 제10기 도서 낭독 아카데미를 개설하였습니다.
2014년 9월 19일 계명 아트 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모차르트’를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9월 26일 수성 아트피아에서 열린 클래식 ‘수성 아트피아 가을 음악회’를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9월 30일 대구 시민회관에서 열린 클래식 ‘낭만에 대하여: 슈만’을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10월 2일 제3기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3년 째 개설하였습니다.
  2014년 10월 10일 수성 아트피아에서 열린 연극 ‘멧밥 묵고 가소’를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10월 19일 대구 시민회관에서 열린 클래식 ‘슈투트가르트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10월 24일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오페라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을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11월 1일 121차 역사문화 기행은 경북 안동에 병산 서원, 봉정사, 군자리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2014년 11월 15일 아양 아트센터에서 열린 재즈 ‘말로 재즈 콘서트-동백아가씨’를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11월 21일 대구 문화 예술 회관에서 열린 국악 ‘신춘향전’을 관람하였습니다.
  2014년 12월 13일 121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북 상주의 선산 죽장동 오층 석탑, 양진당, 오작당, 충의사, 전사벌왕릉, 경천대, 상주 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경천대 절경에 답사 참가자들은 탄성을 금치 못했고 살을 에는 추위도 기행의 즐거움을 감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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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5년 4월 1일
발행인․김현준
제작․정연원
편집․김창연
교열․이석규
디자인․이유란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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