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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봄호 (통권 36호)
CONTENTS



4 권두칼럼
국어원에 바란다 _ 이석규


9  Pops English
Evergreen tree - Cliff Richard _ 김창연


13  명시와 명문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 _ 김구


20 서평
에밀 _ 이태호


28 우리가 답사한 유적 다이아몬드의 밤 _ 정연원 평화의 댐 _ 정연원
답사 사행시


50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내 삶의 주인이고 싶다 _ 조경원


72  문화원 소식




계  간 · 시각과 문화   발  행 · 2016년 4월 1일   발행인 · 김현준 제  작 · 정연원        편  집 · 김창연        교  열 · 이석규 디자인 · 기미향        발행처 ·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국어원에 바란다



이석규 _ 본원 운영위원


요즈음은 예전처럼 종이 사전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종이 사 전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사전 중에 서는 국어사전이 가장 중요한데, 국어 단어를 검색하는 사람들은 주로 네이버 국어사전을 이용한다. 대학 수학 능력 시험 출제자들 이나 국어 교재 집필자들도 이 사전을 이용하는데, 수능 문제지나 국어 교재에 제시된 주석이나 예문을 이 사전과 비교해 보면 양자 가 정확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본인도 방대한 종이 사전을 서가 에서 뺐다가 다시 꽂기가 번거로워서 네이버 국어사전(표준 국어 대사전)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검색할 때마다 부적절한 풀이와 예 문이 많아서 고소와 폭소와 실망과 분노를 금하지 못할 때가 자 주 있다. 고소를 금하지 못하는 것은‘보석보증금(保釋保證金)’을 ‘보석금(保釋金)’의 동의어로 처리해 놓은 것과 같이, 같은 옷을 겹겹이 첩첩이 껴입은 듯한 풀이를 볼 때이고, 폭소를 금하지 못 하는 것은‘천명(喘鳴)’의 순화어를‘쌕쌕거림’으로 제시해 놓은 것과 같이 실생활에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하라고 권 하는 것을 볼 때이고, 실망을 금하지 못하는 것은‘적재적소(適材 適所)’의 순화어를‘알맞은 곳’으로 제시해 놓은 것과 같이 무지 한 식자들의 국어 오용을 정당화해 주는 풀이를 볼 때이고, 분노

[ 권두칼럼]


를 금하지 못하는 것은‘모택동(毛澤東)’을‘마오쩌둥’의 잘못이 라고 처리해놓은 것과 같이 우리의 오랜 언어 전통을 일시에 무너 뜨리는 작태를 볼 때이다.(최근에 와서‘모택동’을‘마오쩌둥’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라고 고쳐 놓았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굴삭기(掘削機)’를 찾으면 이 단어가‘굴 착기’와 같은 말이라고 되어 있고, 그 순화어도‘굴착기’로 되어 있다.‘굴착기(掘鑿機)’는“땅이나 암석 따위를 파거나, 파낸 것을 처리하는 기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고, 굴삭 기(掘削機)가 비슷한 말로 제시되어 있다. 일한사전의‘くっさく’ 항에는‘くっさく[掘削·掘鑿]’처럼 한자 두 가지가 병기되어 있 는데,‘削’은‘鑿’과 음이 같기 때문에 획수가 많은‘鑿(28획)’보 다 획수가 적은‘削(9획)’을 더 많이 써서 사전에도‘鑿’보다‘削’ 을 먼저 제시해 놓았다. 일본 사람들은 의미와 상관없이 획수가 많은 글자를 획수가 적은 글자로 대용하는 경향이 있고,‘掘鑿’을 ‘掘削’으로 적는 것도 그 한 예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한국 인들이 확인도 해 보지 않고‘掘削’과‘掘鑿’을 별개의 단어로 단 정하여 그렇게 읽고 쓴 것이 널리 퍼져서 국어사전 편찬자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쳐서 분명히 하나인 단어를 두 단어로 처리하고 있 다. 한국은 무지가 잘 이기는 나라이다. 무지가 잘 이긴다는 것은 짐작과 억측이 지식으로 인정받기 쉽다는 말이다.

표준 국어 대사전의‘그물망(--網)’은“그물코 같은 구멍이 있 는 망.”이라고 풀이되어 있고,‘형틀’은“물건을 만들 때 그 형태 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라고 풀이되어 있고,‘담장(-牆)’은‘담’ 과 같은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그물망’은‘그물’이나‘망’이 라고만 하면 되고,‘형틀’은‘형’이나‘틀’이라고만 하면 되고, ‘담장’은‘담’이라고만 하면 되는데, 허전해서 또는 얼른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 널리 퍼지면서 사 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머지않아, 현재는‘늘’의 잘못이라고 되 어 있는‘늘상(-常)’도‘늘’과 같은 말로 처리할 것이고,‘둑방’이 나‘뚝방’도‘방죽’과 같은 말로 처리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누가 실수로‘물’을‘물수(-水)’라고 하거나‘풀’을‘풀초(-草)’ 라고 하고 그것이 재미있어서 따라 하는 사람이 좀 생기면 신어 자료집에 실었다가 사전의 표제어로 올릴 것이다.

또,‘교적(敎籍)’은“신도의 소속을 밝히는 등록 문건.”이라고 풀이되어 있고 비슷한 말로‘교적부(敎籍簿)’가 제시되어 있고, ‘병적(兵籍)’은 비슷한 말로‘병적부(兵籍簿)’가 제시되어 있고 ‘병적부’는“군인 개개인의 신분에 관한 사항을 기록해 놓은 장 부.”라고 풀이되어 있고 비슷한 말로‘병적(兵籍)’이 제시되어 있 다. 이들 단어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 것에는‘학적(學籍)’과‘학 적부(學籍簿)’,‘호적(戶籍)’과‘호적부(戶籍簿)’가 있다.‘명부(名
簿)’나‘명적(名籍)’에서 보듯이‘簿’나‘籍’두 자 다‘문서’의 뜻 인데, 어떻게 이미‘문서’라는 뜻을 가진 조어 요소에 다시‘문서’ 라는 뜻을 가진 요소를 덧붙일 수가 있으며 그것을 따라 할 수 있 고, 또 그것을 사전에까지 올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말은 결코 무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타가 식자라고 공인하는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실제보다 유식 해 보이기 좋아하는 이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의미 불 통의 신어를 지어 내서 쓰고, 똑같은 허영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런 말 같잖은 말을 맹목적으로 따라 쓰다 보니 이런 말이 세력 을 얻게 된다. 이런 유의 말로는 워낙 오래되어서 아무도 어색함 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청첩장(請牒 狀)’과‘춘화도(春畫圖)’가 있다.‘請牒狀’의‘牒’이‘편지’라는

[ 권두칼럼]


의미를 가진 글자인데, 거기에 다시 똑같은 의미를 가진‘狀’자를 덧붙인 것이다.‘春畫圖’의‘畫’가‘그림’이라는 의미인데, 거기 에 다시 똑같은 의미를 가진‘圖’를 덧붙였다.

이 사전의‘땅파기’는“땅을 파는 일.”이라고 풀이되어 있고, “이 땅은 돌이 많아 땅파기가 힘들다.”라는 예문이 제시되어 있 다.‘땅파기’는‘굴삭’이나‘굴착’의 순화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땅은 땅파기가 힘들다”라는 예문을 보는 순간, 이 예문을 만든 사람이나 이 순화어를 만든 사람이 한국어를 처음 배운 외국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땅파기’와 같은 종류의 순화어로 ‘글쓴이’를 들 수 있다. 사전에는“글을 쓴 사람”으로 풀이만 되어 있고 예문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국어책마다“이 글의 글쓴이” 라는 구절을 무수히 볼 수 있다.“국어책에 어떻게 이런 구절이 실 릴 수 있을까?”하고 놀라야 하지만 오랫동안 의미를 생각하지 말 도록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땅을 땅파기”나“이 글의 글쓴이” 와 같은 구절을 보고도 태연자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밖에 박장대소를 금할 수 없는 순화어의 예로는‘뿜이개(분 무기)’,‘잎파랑이(엽록소)’,‘잎노랑이(엽황소)’등 무수히 많다. ‘뿜이개’가 문제 되는 것은 한 단어 안에 똑같은 기능의 조어 요소 가 둘이나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이’도‘-개’도 도구를 나타 내는 접미사인데, 같은 종류의 접미사를 한 단어에 둘이나 붙이고 사전에까지 실었으니 장난치고는 너무 심한 장난이다. 이는‘손톱 깎이’하면 될 것을‘손톱깎이개’라고 하는 것이나‘장애인’이나 ‘장애자’라고 하면 될 것을‘장애인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국어사전 편찬자들의 고충을 약간은 이해할 듯도 하다. 지성인 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 밥 먹듯이 쓰는 말을 일일이 잘


못되었다고 지적하기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전 국 민이 틀린 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말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난처하고 부담스 럽더라도 잘못된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 한다. 왜냐 하면 잘못된 말을 여러 사람이 모방해서 쓰다 보면 그 말을 지어 낸 사람뿐만 아니라 국민 다수의 사고까지 망치기 때문이다. 국어 사전 편찬자가 잘못된 말을 잘못되지 않았다고 사전에 실어 주는 것은 식품이나 의약품 검사자가 유해한 식품이나 의약품을 유해하 지 않다고 판정해 주는 것과 같다.

국어원에 간절히 바라는 것은, 국어를 깊이 연구한 이들의 역량 을 총결집해서 평생 국어사전을 보지 않고 살 사람들의 비위를 맞 추는 사전이 아닌, 한 단어라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 한 사전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Pops English




Evergreen tree
- Cliff Richard

김창연 _ 본원 운영위원


Oh darling, will our love be like an evergreen tree Stay ever green and young as the seasons go
Your kisses could make love grow like an evergreen tree Bloom in the summer's sun and the winter's snow

On every branch will blossom, dreams for me and you Our tree of love will stay ever green,
if our hearts stay ever true
Oh darling, I love you so, don't you know that I'll be True 'til the leaves turn blue on the evergreen tree

On every branch will blossom, dreams for me and you Our tree of love will stay ever green,
if our hearts stay ever true
Oh darling, I love you so, don't you know that I'll be True 'til the leaves turn blue on the evergreen tree

On the evergreen tree, on the evergreen tree.


9


오, 그대여, 우리의 사랑이 늘 푸른 상록수 같을까요? 세월이 지나도 저렇게 항상 푸르게 그리고 젊게 살아가요. 당신의 키스는 우리의 사랑을 상록수처럼 자라게 할 거예요. 여름철의 태양 아래서 또한 겨울철의 눈 위에서 꽃 피워요.

모든 가지마다 당신과 나의 꿈을 꽃피울 거예요. 우리의 사랑의 나무는 늘 푸르게 남아있을 거예요. 만일 우리의 마음이 늘 진실되게 남아 있으면요.
오, 그대여. 나는 그렇게 사랑해요, 아시죠? 내가 진실하다는 걸 나뭇잎들이 상록수에서 떨어져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모든 가지마다 당신과 나의 꿈을 꽃피울 거예요. 우리의 사랑의 나무는 늘 푸르게 남아있을 거예요. 만일 우리의 마음이 늘 진실되게 남아 있으면요.
오, 그대여. 나는 그렇게 사랑해요, 아시죠? 내가 진실하다는 걸 나뭇잎들이 상록수에서 떨어져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상록수에, 상록수에















2016.봄_시각과 문화

[ Pops English]

Cliff Richard
1940년 10월 14일, 인디아의 룩크노우에서 태어난 클리프 리차 드(Cliff Richard)는, 8살 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학교를 다녔다. 18 살이 되던 1958년에 자신의 그룹‘Cliff Richard & The Drifters’를 결성하고, 자신의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여, 레코드 프로듀서인 노 리 파라모를 찾아갔고 노리 파라모는 이 데모 테이프를 들어 보고 는 크게 감명을 받고, 클리프 리차드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그 후 Cliff Richard & The Drifters는 그룹명을‘The Shadows’ 라고 개명하고, EMI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으며 발표한 데뷔 싱글
<Move It>는 영국 인기 차트 2위까지 랭크되었으며 1959년에는
<Living Doll>을 발표하며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하였다.
클리프 리차드는 『Serious Charge』로 영화계에 데뷔하였으 며 『Express Bongo』에도 출연했으며, 많은 인기를 모았던 뮤지 컬『The Young Ones』,『Summer Holiday』,『Wonderful Life』,
『Finders Keepers』등에 출연하여 자신의 연기력을 마음껏 과시하 기도 했다.
‘영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며 많은 인기를 누리던 클리프 리차드는 이스라엘에서 촬영되어 전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보여진 다큐멘터리『Two A Penny』에서 주역을 맡았다. 클리프 리차드의 독실한 크리스찬으로서의 믿음과 성실이 크게 작용된 이 영화 외 에도, 연극을 비롯하여 BBC-TV에서 자신의 시리즈 프로를 갖기 도 하면서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1976년에 클리프 리차드는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활동을 전개시 켜 나가면서 <Devil Woman>을 히트시켜 영국과 미국에까지 차 트 10위권 내에 랭크되었으며, 앨범〈I'm Nearly Famous〉는 비평 에 있어서나 판매 면에 있어서 커다란 성공을 보았다. 또한 서방 의 로큰롤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철의 장막 속에서 공연을 가졌다.
클리프 리차드가 데뷔한 지 22년째가 되던 해인 1980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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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대영제국의 공로 훈장인 OBE(Order of British Empire)를 수 여받기도 했으며, 그는 또한 싱글 <Carrie>를 발표하면서 80년 대에도 어느 가수 못지않은 활동을 벌였다. 1982년에는 그레이그 프르이스(Craig Pruess)와 함께 공동 프로듀스한 앨범〈Now You See Me, Now You Don't〉를 발표하여, <The Only Way Out>가 싱글 커트되어 영국에서 Top10을 순식간에 기록했다. 우리에게 친 숙한 축하곡〈Congratulations〉를 부른 가수이기도  하다.
1969년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시민회관과 이화여대에 서 가진 내한 공연은 지금의 소녀 팬들 못지않은 열광적인 반응으 로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35년 만인 2003년 3월 7일 금요일 오후 8시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두 번째 내 한 공연을 펼친 바 있다.


E        N        G        L        I        S        H

Humor~


A married farmer showed a friend a story he had cut out of the rural newspaper. It concerned a man who had obtained a divorce on the grounds his wife went through his pockets at night.
“Are you going to show it to your wife?”the friends asked. “No,”the farmer replied.“I̓m just going to leave it in my pocket.”

결혼한 농부가 지역 신문에서 오린 기사를 친구에게 보여 주었다. 한 남자가 부인이 밤에 자기의 주머니를 뒤진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이혼 허가를 얻어냈다는 내용이었다.
“너 그걸 집사람한테 보여줄 거야?”그 친구가 물었다. “아니, 그냥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둘 거야.”그 농부가 대답했다.

2016.봄_시각과 문화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




김 구


친애하는 삼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 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 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生靈)을 희생하여서 최후의 승리를 전취(戰取)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 다. 이로 인하여 제3차 전쟁은 온양(醞釀)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 로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 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그 아들을 또다시 전장(戰場) 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위험이 닥쳐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 랴.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파시스트’강도군(强盜群)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파시스트’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혹 왈남정(或曰南征) 혹왈북벌(或曰北伐)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


망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 니라, 전쟁이 폭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들의 투지를 북돋울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 지라도 저희들의 자질(子姪)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 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 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 전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계속하여 혈 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 때에 우리 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환소(歡笑) 중에 유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 되 우리 한인은 공포 중에서 죄인과 같이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 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배은망덕하는 자라고 질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신문 기자‘리차드’씨의 입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기다리던 해 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 전 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UN은 이러 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 기를 방지하여서,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UN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 시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는, 내정 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써,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 하여 우리에게 남북통일의 완전 자주독립을 줄 것과 미·소 양군 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의 보이코트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진행에 방해가 불무(不無)하나, 그 위원단은 UN

[ 명시와 명문]


의 위신을 가강(加强)하여서 세계 평화 수립을 순리하게 진전시키 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업적을 한국 독립운동 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민족 간에 있어서 영원 한 은의(恩誼)를 맺기 위하여 최선한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 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UN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은 삼척 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 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박테리아’ 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造出)하 여서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UN 위원단을 미혹하 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 군정의 난익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 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明察)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 그러 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 매족의 일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 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 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 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 지사들이 생명을 도(賭)하여 반항하였 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 는 동경까지 가서 합병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자들은 영 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UN 위원단 이 금일에 단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冤情)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며, UN 위원단 제공은 한인과 영원히 불해(不解)의 원을 맺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 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UN 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 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 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 회의 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 까지 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써 순식 만 변(瞬息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 것이 중국 장주석(蔣主席)의 이른바「不變으로 應萬變」이라는 것 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 정 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 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 정부 를 중앙 정부라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 조선 과도 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사 망념 (邪思妄念)은 해인 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 정부 수립만 위 하여 노력할 것이다.

삼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가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요,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 민족의 견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 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미 군정의 앞잡이로 인정을 받는 한민당의 영도하에 있는 소위‘한협(韓協)’은 나의 의견에 대하여 대경 소괴 (大驚小怪)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써 원칙도 없고 조

[ 명시와 명문]


리도 없이 모욕만 가하였다. 한민당의 후설(喉舌)이 되어 있는 동 아 일보는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 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 일찍이 조소앙·엄항섭 양씨가 수도청(首都廳)에 구인되었다고 허언을 조 출(造出)하던 그 신문은 이번에 또‘애국 단체 제출한 의견서 김구 씨 동의 표명’이라는 제목으로써 허언을 조출하였다. 이와 같은 비열한 행위는 도리어 애국 동포들의 분노를 야기하여 각 방면에 서 토죄(討罪)의 격랑이 높았다. 이리하여 내가 바라던 단결은 실 현도 되기 전에 혼란만 더 커졌을 뿐이다.

시비가 없는 사회에는 개량이 없고 진보가 없는 법이니 여론이 환기됨을 방지할 바이 아니나, 천재 일우의 호기를 만나서 원방 (遠方)에서 내임(來任)한 귀빈을 맞아 가지고 우리 국가 민족의 운 명을 결정하려는 이 순간에 있어서 이것이 우리의 취할 바 행동은 아니다. 일절 내부 투쟁은 정지하자! 소불인(小不忍)이면 난대모 (難大謀)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 보 자!

삼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 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 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 사욕을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 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 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唾 罵)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 와 파공(罷工)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 는 결과를 조출할 것뿐이다. 악착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 으로 임해 보자. 마음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 제 칠십유삼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 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내가 대한민국 임 시 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 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전 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 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 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마하트마 간디’에게 서도 배운 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凶漢)을 용서할 것 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 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 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 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 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 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須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 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 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 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삼팔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 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怨鬼)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

[ 명시와 명문]


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 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하라.
대한민국 30년 2월 10일










에밀



이태호 _ 통청아카데미 원장


1. 에밀이 무엇이며 저자는 누구인가?

에밀은 18세기 프랑스의 교육 관련 소 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이며, 그 인물이 교육받는 과정을 그린 소설의 제 명이기도 하다. 그 소설에서 에밀은 태 어나서 결혼할 때까지‘나’라고 불리는 주인공에게 교육을 받는다. 에밀을 교육 하는 주인공인‘나’는 이 책의 저자인 루
소(Rousseau, Jean-Jacques, 1712~1778) 자신이다. 루소는 계몽 사상가이고 자연주의 철학자이며 소설가이다.『에밀』은 그가 50 세(1762년)에 저술하였다. 그가 계몽사상가로 불리는 이유는 불평 등과 부자유가 존재하는 신분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 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연결된다.

그가 자연주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자연(본성)의 권리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서평]

이 자연에 따르는 삶이 가장 훌륭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이념을 우 리는 자연주의라고 부른다. 이 이념을 잘 나타낸『에밀』의 첫 구절 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모든 것은 창조주의 수중에서 나올 때는 선한데 인간의 수중에 서 모두 타락한다. …… 그들은 무엇 하나 자연이 만든 상태 그대 로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인간에 대해서까지 도 조련된 말처럼 자신들을 위해 인간을 훈련해야 하며, 그들 정 원의 수목들처럼 그들의 기호에 따라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의 자연은 본성이라고도 불리는 Nature(라틴어로는 나투라, 프랑스어로는 나튀르, 영어로는 네이처)이다.

자연주의(自然主義)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위적(人爲的)인 것을 부정하고 타고난 본성대로 살 것을 강조한 자연주의는 서양 에서는 루소가 두드러지고, 동양에서는 노자가 두드러진다.

루소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의 한 청교도 가정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루소가 출생한 후 10개월 만에 어머니 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10세 때 외삼촌에 게 맡겨져 성장하였으나 12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등 그의 삶은 유·소년 시절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 지 못한 루소는 생계를 위해 도제 생활도 하였다. 루소는 16세 때 에 집과 고향을 떠나 각지를 방랑하다가 평생의 은인이 되는 바랑 (Warens) 부인을 만나 정서적 안정을 찾으며 독학을 통해 다양한 학문과 교양을 쌓게 된다. 루소는 다년간 바랑 부인의 농장에서 살면서 그녀의 설득으로 칼뱅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하였다.


28세 때 잠시 가정 교사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가 교육에 평생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30세 때 파리로 간 루소는 당시 지식인들의 사교장이던 살롱에서 상류 계층의 문화를 접하게 되는데, 그들의 생각이나 복장, 언어 등에 나타나는 인위 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문화를 비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파리 에 묵는 동안 호텔의 하녀 테레즈(Therese)를 사랑하여 동거하게 되었으며, 이후 그녀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 두 양육원에 보냈다. 이 문제로 나중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 만 루소는『고백록』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지금도 그런 상황이라면 애들을 양육원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당시의 루소는 동거녀하고 동거만 하고 결혼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당시의 프랑스 정부의 양육원은 아주 잘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키우는 것보다 애들의 성장 조건이 좋았다.

루소는 상류 사회의 집안과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상류 사회의 인위(가식)적인 모습을 배격하고 하류 사회 출신인 테레즈를 사랑 하게 된다. 이것은 루소가 인간의 본성(자연)에 기반한 자유와 평 등을 몸소 실행하고 있으며, 상류 사회로 갈수록 자연에 위배된 삶을 산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참고로 루소의 다른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1755년(43세) :『과학과 예술론』,『인간 불평등 기원론』,
『정치 경제론』
1758년(46세)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1761년(49세) :『신 엘로이즈』
1762년(50세) :『민약론 혹은 사회 계약론》,『에밀』 사후 간행 :『언어 기원론』,『고백록』

[서평]

2. 『에밀』의 목차와 중심 내용은 무엇인가?

『에밀』은 에밀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누었다. 각 단 계마다 그 시기에 중요한 교육 내용을 담고 있다. 교육 내용 중에 는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해야 되는 것을 담고 있다.

『에밀』의 목차
제1부 : 유아기(출생에서 다섯 살까지) 제2부 : 아동기(다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제3부 : 소년기(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제4부 : 청년기(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제5부 : 성년기(스무 살에서 결혼까지)

『에밀』의 중심 내용 :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려면 오로지 한 가지, 자유를 잘 규제하기만 하면 된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규칙만으로 아이를 가르쳐 야 한다.

제1부 : 유아기(출생에서 다섯 살까지) - 본능적 욕구 시기
·아기의 발육을 억압하거나 왜곡하지 않음.
·젖은 모유를 먹임.
·도시보다 시골에서 자람.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 :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 모두를 들어주는 것.

제2부 : 아동기(다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 소극적 교육 시기
·말을 배우면서 경험을 학습하는 시기이므로 섣부른 지식을 주 입하려 해서는 안 됨.


·관념보다는 관찰을, 추론보다는 깨달음이 필요함.
·감각 기관을 훈련하는 데 더 노력해야 함.
·서둘러 가르치지 말라.(조기교육 반대)

제3부 : 소년기(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 적극적 교육 시기
·감각에 이성을 더한 훈련(학문)을 실시해야 함.
·책 속의 지식보다는 자신의 관찰을 통해 체현된 지식이 필요 함.
·편견이나 고정 관념에 휩쓸리지 않도록 함.
·사회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지식 습득함.

제4부 : 청년기(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 제2의 탄생기
·윤리적 자아에 눈을 떠 정념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함.
·체험을 통해 깨닫게 해야 함.(무조건적인 규제나 억압은 안 됨.)
·사실을 에둘러 설명하지 말고, 설교로써 감화시키려 해서는 안 됨.
·스스로 깨닫는 것 이외에 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지배되어서는 안 됨.

제5부 : 성년기(스무 살에서 결혼까지) - 배우자를 찾는 시기
·남녀의 성은 조화로워야 함.(남자가 능동적이면 여자는 수동 적)
·남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하고 여성은 그 일에 협조해야 함.(사랑의 법칙은 아닐지 몰라도 자연의 법칙 임에는 틀림없다.)
·남녀 모두 정숙해야 함.(특히 여성이 정숙지 못하면 가정을 해 체함)

[ 서평]

·여성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은 마이너스 요인이 됨.(외모의 아 름다움으로 인한 효용은 일시적으로 수주일만 지나면 무감각 해진다. 하지만 그로 인한 위험은 보다 항구적이기 때문)

3. 『에밀』이 금서(禁書)였다는데 왜 그런가?

『에밀』은 당시 프랑스 정부로부터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로 지 적되었고 저자인 루소는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도피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에밀』의 자연주의 교육관은 당시의 기득권 층이 보았을 때는 너무 혁명적이었다. 그중 핵심적인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루소는 어른들의 지위가 높아서 낮은 지위에 있는 애들을 자신 들의 생각대로 키워도 된다는 전제(前提)를 부정했다. - 루소는 어른과 애들 사이의 불평등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함.

루소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교육관에 대해 객 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 정규 교육의 틀(구조)이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고 주장함.

루소는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와 문명 때문에 타락해 간다 고 주장했는데, 그 사회와 문명을 주도하는 세력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보임.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관은 아이들의 자연적 개화, 자연적 능력 개발, 주체성의 함양, 아이 중심의 주도적 교육학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루소는 제4부의 ‘자연의 이성에 따라 선택해야 할 종교’의 장에서“구원받기 위해


서 신을 믿어야 한다는 교리는 인간 이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헛된 가르침의 근본”이라고 했다. 이 내용은 당시의 크리스트교 성직자 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4. 『에밀』을 우리는 왜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자유를 구속한다. 그리 고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육자인 선생은 피교육자인 학생 보다 높아야 한다면서 불평등을 당연히 여긴다. 그래야 가르치는 자의 권위가 생기고 그 권위로 교육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하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는 엄청난 착각이 숨어 있다. 왜냐 하면 학생들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인 인권이 무시되고 있고, 이 인권의 무시는 이들의 본성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밀』은 부모와 교사를 반성케 한다. 내가 부모와 교사라는 신 분으로 자식과 제자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지금도 자식과 제자의 본성을 살피지 않고 나의 의도대로 키우거나 사회의 잘못된 관습대로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체 크해서 고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직장이나 조직 사회에서 상 사로서 부하를 대할 때도 부하의 본성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내가 주도하면서 그의 본성 을 해쳐서 그를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한다.

『에밀』은 교육서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가르치는 자가 가 르침을 받는 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나 간 접적으로는 모든 인간관계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며, 어

[ 서평]


떻게 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있으며, 자 연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이유는『에밀』이 인간 이 본성(本性)대로(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좋다는 기본 명제를 알 려 주기 때문이다.『에밀』은 이 기본 명제를 통해서 지금의 우리들 삶이 얼마나 본성 또는 자연과 멀어져 있는지를 알려 준다. 따라 서 우리의 잘못된 삶을 반성하고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도 우리는
『에밀』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대조사
대한 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부여읍지(扶餘邑誌)에 의하면 이 절은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 율 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와서 백제 불교의 방향을 달리한 겸익(謙 益)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사적기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 판에 의하면 527년 담혜(曇慧)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주 에 대한 설은 다소 다르지만 이 절이 6세기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이 절은 고려 원종 때 진전장로(陳田長老)가 중창하였고, 그 뒤 1989년에는 명부전, 1993년에는 종각, 1994년에는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 보전과 용화 보전, 명부전,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며, 대웅전 뒤에 있는 석조 미륵 보살 입상이 보물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 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 보살상으로 변하여 있었으므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 남장사
대한 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경상북도

[ 우리가 답사한 유적]


팔경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 흥덕왕 7년(832) 진감 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가 창건하여 장백사(長柏寺)라 하였으며, 고려 명종 16 년(1186) 각원 화상(覺圓和尙)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남장사라 하였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쌍계사 진감 국사비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국사가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서 선(禪)을 가 르치니 배우는 이가 구름처럼 모였다’는 기록이 있고, 상주의 명 찰(名刹) 모두 진감 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사적기(寺蹟記)에 기록 되어 있다.
그 뒤 신종 6년(1203) 금당(金堂)을 신축하였고, 조선 성종 4년 (1473)에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인조 13년(1635) 정수 선사(正修禪師)가 금당 등을 중창하였다. 조선 중·후기에 걸쳐 몇 차례 영산전(靈山殿)을 중수하였으며, 진영각(眞影閣)과 상로전(上爐殿)이 신축되었고, 순조 7년(1807)에 진허(鎭虛)가 극 락전과 조사각을 중건하였다. 다시 1889년에는 보광전, 1903년에 는 칠성각, 1907년에는 염불당(念佛堂)을 건립하였다.

(3) 진안 백운면의 물레방아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는 섬진강 본류와 마치천, 미재천이 합수 하여 마령 방향으로 흘러 나가는 곳에 있어서 수량이 풍부하다. 강줄기에는 구수보, 확보, 삼굿보 등 여러 개의 보가 설치되어 있 다. 물레방아가 위치한 곳이 원산(圓山)이어서‘도르메[뫼] 방앗 간’이라고 부른다.
현재 소유자인 전송훈의 큰집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것을 전송훈 의 부친인 고 전영태가 인수하였다. 전영태는 백운 면장을 역임했 으며, 매 사냥 기능 보유자이기도 했다.
과거 백운면의 물레방아가 있는 하천에는 물레방아가 10여 개가 넘었으나 일감이 차차 줄고 하천의 수량이 줄어들면서 모두 사라


졌다. 반면 백운면의 물레방아는 풍부한 수량과 큰 규모에 동력을 현대화하여 인근 하천에서 유일한 물레방아로 남아 있었다.
백운면의 물레방아처럼 과거 모습이 온전히 보존된 물레방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백운면의 물레방아가 주민들에게 가장 각 광받던 시기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일감이 많아서 고정 일꾼을 다섯 명까지 둘 정도였고 다른 물레방앗간이 차츰 폐쇄되면서부터 오히려 일감이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물레바퀴로만 찧어도 됐지만 나중에는 감당이 안 되어 발동기를 구비하였고, 다시 자동차 엔진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었 다. 도정해야 할 물량이 적을 때는 물레방아로 찧고, 많을 때는 동 력을 이용하는 식으로 방앗간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 후 물량이 많이 줄어들면서 물레방아의 사용도 줄어들게 되었다.
백운면의 물레방아는 물을 끌어대는 수문만 열면 언제든 가동이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지만 2013년 현재 가동하지는 않고 있다. 대부분 주민들이 현대화된 도정 공장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2002년 4월 6일에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4) 벽송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경상남 도 전통 사찰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 말 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사적기가 전하지 않아 자세 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조선 중종 15년(1520) 벽송(碧松) 지엄(智 嚴:1464∼1534)이 중창한 뒤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영 관, 원오, 일선 등이 이곳에서 선을 배웠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 때 불에 탔으나 바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 물로는 법당인 보광전을 비롯하여 방장 선원, 간월루, 산신각 등 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벽송사 삼층 석탑과 목장승 2기가 전한다. 이 중 높이 3.5m의 삼층 석탑은 2층

[ 우리가 답사한 유적]


기단 위에 세운 것으로 보물 제 474호로 지정되었다. 2기의 목 장승은 본래 높이는 4m이나 절 반이 땅에 묻혀 있으며, 마천면 이 변강쇠와 옹녀의 일화를 담 은 가루지기타령이 전하는 곳 이라 특히 주목을 받는다. 왼
쪽이 금호 장군(禁護將軍), 오른쪽이 호법 대장군(護法大將軍)이 고 재질은 밤나무이다. 이 중 금호 장군은 1969년에 일어난 산불 로 머리가 파손되었다. 한편 산내 암자인 서암(西庵)은 벽송사 주 지였던 원응(元應)이 1989년부터 10여 년간 불사를 일으킨 곳으로 굴법당과 각종 불교 조각이 눈에 띈다. 이곳의 유물로는 1997년 1 월 30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315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 책판 과 벽송당 지엄 영정, 화엄경 금자 사경 등이 전한다. 벽송당 지엄 영정은 서산 대사 휴정(休靜)의 스승 지엄을 그린 영정으로, 영정 에 휴정의 사언 절구가 전한다.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5) 파로호(破虜湖)
면적 38.9㎢. 저수량 약 10억 톤. 1944년 화천군 간동면(看東 面) 구만리(九萬里)에 북한강 협곡을 막아 축조한 호수로, 댐 높이 77.5m의 낙차를 이용하는 화천 수력 발전소는 출력 10만 8000kW 이다. 호반이 일산(日山:1,190m), 월명봉(月明峰:719m) 등의 높은 산에 둘려 있고, 주위에는 우거진 숲과 맑은 계곡이 잘 어우러져 있어 현재 관광지로 지정 개발 추진 중이다. 또한 공해 없는 깊은 물에 잉어, 붕어, 메기, 쏘가리 등 담수어가 풍부히 서식하고 있어 낚시터로 각광을 받고 있다.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은 6.25 동란 때인 1951년 5월, 해병 1연대가 중공군 10, 25, 27연대를 수장시키


는 승전고를 울림으로써 화천 저수지가 오랑캐(虜), 즉 중공군을 크게 무찌른 호수라 하여, 고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휘호를 내린 데에서 비롯되었다.

(6) 낙안읍성
삼한 시대 마한 땅, 백제 때 파 지성, 고려 때 낙안군 고을 터 며, 조선 시대 성과 동헌, 객사, 임경업 장군 비, 장터, 초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성과 마을이 함께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 로 지정되었다. 조선 태조 6년
(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 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 후 인조 4년(1626) 충 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 했다. 다른 지역 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 지대에 1~2m의 정방형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성곽 전장이 1410m로 동내, 남내, 서내 등 4만 1000평에 달하는 3개 마을 생활 근거지를 감싸 안은 듯 방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400년이 지난 지금도 끊긴 데가 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성안에는 108세대 가 생활하고 있는 살아 숨 쉬는 민속 고유의 전통 마을이다. 순천 시가에서 서쪽 22km 거리의 읍성 민속 마을은 6만 8000여 평으로 초가는 초라한 느낌마저 들지만,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 친근 한 정감이 넘치며, 남부 지방 독특한 주거 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 섬돌 위의 장독과 이웃과 이웃을 잇는 돌담은 모나지 도, 높지도 않고 담쟁이와 호박 넝쿨이 어우러져 고향을 연상케 한다. 마을 주변 음식점 거리도 옛 정취를 자아낸다. 주변에 조계 산 도립공원, 송광사, 선암사, 제석산, 동화사, 주암호, 고인돌 공

[ 우리가 답사한 유적]

원 등의 명소가 있다.

(7) 영동 노근리 평화공원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노근리 평화공원’은 제주도 에 있는‘4·3평화공원’과 함께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의‘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곳이다. 전쟁 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숨져 간 넋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 땅에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아야 함을 가슴 깊이 새기게 만들어 주는 교육의 현장이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2011년 10월 국비 191억 원을 들여 학살 현장 인근 13만 2240㎡(약 4만 73평)에 조성됐다. 공원 운영은 지난해 4월부터 사단 법인 노근리 국제 평화 재단에서 맡고 있다. 공원 안 에는 위령탑, 평화 기념관, 교육관, 조각 공원, 야외 전시장 등이 들어섰다. 또 1940, 50년대 미군의 주력 전투기이자 노근리 피란 민 공격에 동원됐던 F-86기와 미군 트럭(K-511)과 지프(K-111)도 전시됐다.
평화 기념관 지하 1층에 들어서면 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경과를 영상과 모형으로 복합 연출한 것을 볼 수 있다. 경부선 철도 모형 과 쌍굴 다리 인근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물도 전시돼 있다. 또 당 시 사건의 전모와 피해자, 미군 가해자 인터뷰 등을 담은 15분짜리 영상물도 관람할 수 있다. 지상 1층에는 이 사건을 처음 알린 AP 통신의 취재 과정과 국내 매체들이 집중 보도한 내용을 볼 수 있 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각각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를 하는 과정 과 당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하는 모습도 연출돼 있다. 국회에서‘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 별법’이 제정된 내용도 설명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과 유사한 국 내외 전시관들의 정보와 세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어 떻게 해결됐는지도 알 수 있다.


(8) 해저 터널
통영 해저 터널은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터널 이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만들어진 동양 최 초의 해저 터널로 길이 483m, 너비 5m, 높이 3.5m이다. 그 전의 미륵도는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때는 도보로 왕래할 수 있었 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어민의 이주가 늘면서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해저 터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양쪽 바다를 막고 바다 밑 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을 만든 것으로 터널 입구에 쓰여 있는‘용 문달양(龍門達陽)’은‘섬과 육지를 잇는 해저도로 입구의 문’이라 는 뜻이다.
통영시내 당동 쪽 터널 입구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터널 내부는 포장된 경사로이며 약 483m 길이이다. 안쪽에 통영 관광 명소들 에 대한 소개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콘크리트 구조로 약간 음침 한 분위기이지만, 우리 역사의 애환을 담고 있는 장소이다.

(9) 가사 문학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가사 문학관. 많은 가사 문 학 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송순(宋純)의 <면앙집(俛仰集)>과 정철의
<송강집 (松江集)> 및 친필 유묵(遺墨)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사 문학 관련 문화유산의 전승, 보전과 현대적 계승, 발전을 위하여 2000년 10월 완공하였다. 1만 6,556㎡의 부지에 2,022㎡ 규모의 한옥형 본관과 기획 전시실(갤러리), 자미정, 세심정, 토산품 전시 장, 전통찻집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요 전시물은 가사 문학 관련 서화 및 유물 1만 1,461점, 담양권 가사 18편과 관계 문 헌, 가사 관련 도서 약 1만 5,000권 등이다. 주변에는 가사 문학의 주요 무대가 된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면앙정 등이 자 리 잡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밤



정연원 _ 본원 원장


익숙함과 타성에서 일탈의 길은 여행이다. 복잡함과 결별이 필 요할 때 여행을 선택한다.‘나에게 온전하게 집중 못할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내달릴 때, 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 때’여행은 절대 필요하다고 한다.(정은길『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에서)
새롭고 단순함을 선택한 대구 시각 장애인 문화원 회원들을 태 운 버스가 파로호 안보 전시관에 도착했다. 파로호는 1944년 북한 강 협곡을 막아 축조한 화천댐으로 인해 생겨난 인공 호수다. 약 10억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다. 1951년 5월 6·25 남침 한국 동란 때 수력 발전 설비를 갖춘 이 댐을 차지하기 위해 중공군 3개 연대 와 우리 해병 1개 연대 장병들이 목숨을 건 격전 끝에 수적인 열세 에도 중공군을 모조리 수장시킨 승전 기념으로 당시 이승만 대통 령이 파로호(破虜湖)라 명명하고 친히 휘호를 내렸다고 한다. 지 금의 파로호는 청정하고 경치가 빼어나다. 당시는 우리의 유일한 수력 발전소였다.
굽이굽이 돌아 700고지에 직선으로 1,986m의 해산 터널을 지나 평화의 댐 길목에서 하차하였다. 보트가 아니면 이 길밖에 없는 오지 마을, 비수구미(飛水口尾) 가는 길에 들어섰다. 행렬 제일 뒤


에서 마무리하면서 걷는다. 발걸음마다 진한 숲의 향기와 동행하 면서 계곡물 소리, 산새 소리, 살랑대는 바람 소리와 지천으로 널 린 개망초, 구절초 등 들꽃들이 함께했다. 내 발자국 소리와 숨소 리까지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들리는 내리막길이었다. 중간중 간 땀을 식히고 발을 씻는 회원들을 기다리며 사람 발자취가 드문 계곡길을 만끽하였다. 도중에 힘들어하던 회원들도 끝까지 완주하 여 2시간 30여 분을 지루함 없이 걸었다. 도착한 곳은 TV 인간 극 장에도 출연한 장윤일(69), 김영순(53) 부부가 운영하는 비수구미 산장이다. 도착 즉시 4명씩 앉으면 나물 반찬 한 상이 나오고 밥 은 각자 알맞게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나물 반찬에 눈이 휘 둥그레졌다. 내가 좋아하는 곤드레, 곰취, 취나물, 얼레지, 엄나무 순, 참나물, 당귀, 뽕잎 등 장씨가 온 산을 뒤져 장만한 나물 반찬 의 화려한 모습이 나를 반긴다. 오래 걸은 뒤의 허기가 모처럼 꿈 틀대는 뱃속을 나물로 가득 채웠다. 오래간만에 맛본 귀한 진수성 찬이다. 저녁 식사 후 이장 댁을 지나 펜션까지 10명씩 보트를 타 고 파로호 물 위를 달린다. 물 냄새가 향긋한 청정한 파로호 물길 위로 오늘 흘린 땀과 찌든 먼지가 훨훨 날아간다. 펜션에 도착하 여 순서대로 샤워를 하였다.
중세의 금욕주의자들이 수행을 하다가 욕정을 못 이겨 이탈하려 할 때 갑자기 얼굴에 발진이 생겨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새로운 장 소로 옮겨가면 감쪽같이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몸의 욕망에 마음이 수행을 가능하게 작용하여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님을 나타 내는 현상을‘성자(聖者)의 병(病)’이라고 한다. 지난 초여름 메르 스(MERS : 중동 호흡기 증후군)로 인해 온 사회가 서로 의심하고 배척하며 불신의 도가 지나쳐‘모두가 모두를 위한 늑대’가 되어 생겨난 마음에 발진들로 가득하였다. 유례없는 가뭄과 무더위로 지친 몸의 짜증과 무력감으로 헝클어진 응어리들이 비수구미 펜션 의 샤워 한 번에 감촉같이 없어지고 상쾌하고 가뿐한 몸과 마음이

[ 기행문]


하나로 되돌아왔다.
잔디밭 야외의 전체 시간은 여름밤이 아닌 가을밤 정취 속에서 흥과 신명을 마음껏 발산한 시간이었다. 야외 등불이 꺼지자 별을 보라고 탄성들이다. 기다렸다는 듯 초롱초롱한 별빛이 내려다보고 있다.
새벽 2시경 소나기 소리에 잠을 깨어 마루에 나가 하늘을 보니 벌써 개어 있었다. 들리느니 계곡물 소리와 풀벌레 소리, 간지럽 히는 바람, 다시 점퍼를 입고 나왔다. 오늘 하루 정지와 멈춤은 적 절하였는가? 하루 일과에서 과거로, 존재와 역할에 대한 진지한 성찰 속으로 호흡이 깊어졌다. 생활 속에서 독창과 합창의 역할은 어떠했던가...? 발바닥과 손끝에 서늘한 느낌과 함께 짜릿한 기감 (氣感)이 온몸을 휘돌았다. 명료함 속에 한 생각이 스친다. 그동안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장 길다는 여행을 고집하였지만 머리에서 가 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팔과 다리로 여행하여 행동을 하는‘실천’ 이라는 생각이 번쩍였다.‘아무도 없는 황야에서 잠을 자다 깨어 별빛 밝은 하늘을 쳐다보다가 깊은 깨달음을 얻은 밤을 다이아몬 드 밤’이라고 한다. 알음알이를 지혜로 그것을 실천하라는 새로운 생활의 길을 구체적으로 얻은 밤이었다.
새소리와 주위가 조금 소란스러워 눈을 뜨니 벌써 동이 트고 있 었다. 보이는 산허리를 안개가 휘감고 파로호 수면에 피어오르는 잔잔한 물안개가 손짓한다. 싱그런 자연의 음악도 함께하는 수채 화를 옮겨 놓은 종합 예술 영상이다. 잊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담 았다.
서울 아가씨가 이 펜션에 묵으면서 지금의 경치를 보고 반해 친 구를 데려와 펜션 주인, 순두부집 노총각과 미팅을 하여 그와 짝 이 되었다는 상큼한 시 한 편을 들었다. 그 처녀 입장이 되어 다시 보니 평생을 이곳으로 택한 아가씨 안목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새벽에 갈아 만든 순두부 아침밥은 지난 저녁 나물과 또 다른 별


미다. 서울 색시가“마음껏 드세요. 부족하면 말씀하세요.”라고 큰소리로 말한다. 넉넉해진 시골 인심이 벌써 밴 모양이다. 다시 오기 힘든 세속의 삶을 떠난 단순한 삶, 자연의 삶이 있는 비수구 미 마을. 여느 때처럼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얻은 깨달음을 실천하는 생활 속에서는 계속 이어지리라. 비수구 미를 떠나는 보트가 우리를 위해 한 바퀴 크게 돌아 선착장을 향 한다. 15분 여의 시간은 은하 철도를 탄 것처럼 환상의 뱃길이었 다. 파로호도 아쉬운지 하얀 물보라의 긴 여울을 남겼다. 모두가 환호와 탄성이다. 새로 충전된 힘으로 익숙한 곳을 향하여!



























2016.봄_시각과 문화





평화의 댐



정연원 _ 본원 원장


여행은 삶의 해독제다.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는 아침이다. 지난 밤 비수구미 펜션에서 켜켜이 쌓였던 세속의 욕심들을 씻어내고 파로호의 환상적인 뱃길로 가슴이 벅차다.
대구 시각 장애인 문화원 회원들을 태운 버스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빈 호수의 댐인‘평화의 댐’에 도착하였다. 아름다운 경치 를 기대했던 회원이 실망했다며 불평이다. 자그마한 여성 해설자 의 또렷한 음성이 파고든다. 댐의 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 저 수량 28억 3천만 톤이다. 북한이 임남댐(금강산댐)을 건설하자 물 의 공격과 홍수 발생 시 하류 댐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국민성 금 639억 원을 포함, 1,666억 원을 들여 1989년 1차 공사를 완공하 였다. 그동안 금강산 댐의 위협이 부풀려졌다며 한때 공사가 중단 되기도 했고 규모는 크지만 발전 기능이 없고 인위적인 홍수 조절 기능이 없어 댐의 무용론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1995~1996년 집 중 호우 때 홍수 조절 기능이 입증되어 2차로 월드컵 해, 노벨 평 화상을 수상한 대통령이 금강산 댐의 안전 문제를 고려해 댐의 높 이를 80m에서 125m로 높이는 공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2005년 10월 2,329억 원을 들여 완공하였다. 주변에는 비목 공원, 상설 야 외 공연장, 수하리 낚시터, 비수구미 계곡 등 관광지와 함께 안보


관광 요충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설명이 끝나고 평화의 댐 언덕에 세워진‘평화의 종’타종이 있 었다. 타종은 북한이 6·25 기습 남침 때 우리를 도와준 에티오 피아 돕기 모금을 위해 희망자만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방금 평 화의 댐 건설 내용을 들은 회원 모두가 동참하여서 10명씩 한 조 가 되어 한 번씩 종을 쳤다. 통일과 평화의 염원을 담고 은혜를 갚 는 기쁨이 웅장한 종소리로 울려 퍼졌다. 긴 여운 속에 댐 건설 반 대자들의 거짓 선동으로 갖게 된 선입견과 편견이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했던지 현장에 와서 보니 황당하다. 마치 오랜 친구나 고향 풍경처럼 익숙하고 다정히 다가왔다.
물이 없어 민둥산처럼 드러난 콘크리트의 웅장한 댐이 눈에 들 어온다. 일본의 침탈과 남북 분단, 북의 남침과 각종 도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잔재들이 이 댐에 다 녹아 있다. 바라보는 시 선이 복잡해졌다.
당시 권위주의 시대 밀어붙이기식 정책 과정에도 문제가 많았 다. 코흘리개의 동전까지 국민 성금에 동참하여 관심이 대단했었 다. 그러나 댐 건설 목적을 반박하며 공사를 중단시키고 댐의 무 용론을 제기하자 국민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1차 공사보다 더 많 은 세금이 들어간 2차 공사 때는 그렇게 똑똑하게 말 잘하며 반 대하던 정치인, 학자, 전문가들, 소위 운동권자들은 그들의 주장 이 거짓으로 드러나도 사과 한마디 없다. 모른 체 꿀 먹은 벙어리 인 양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말았다. 무책임의 극치다. 그들은 대 한민국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민주주의의 자유와 권리를 명분으로 사사건건 곳곳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으며 국민의 엄청난 혈세를 탕진하고 있다. 과잉 민주주의, 천민 민주주의자들.
힘이 없는 명분이나 정의는 말뿐이지 존재할 수 없다. 임진왜 란, 인조반정 이후 권력을 잡은 노론 세력들, 주자학 단일 이념으 로 예절과 전통을 중시하며 군대나 나라 경제를 무시하였다. 철저

[ 기행문]

한 신분 제도와 사대부 천국에서 저희들끼리 파당의 이익을 위해 명분 다툼을 일삼다가 병자호란을 거쳐 일제에게 병합을 당했다. 또한 조상의 관직을 내세우며 문벌을 자랑하면서도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행적을 꺼내지 못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뻔뻔한 후손 들! 피땀 흘려 없앤 보릿고개와 품에 안은 민주화의 양 날개를 단 대한민국에서조차 하나의 이념에 끼리끼리 무리 지어 자기 명분과 자존심을 앞세우고 있다. 더구나 북쪽은 백두 혈통 운운하며 삼대 세습과 공산 독재로 인간성을 박탈하고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지 옥에서 우리 동포가 굶주리고 있다. 각각의 매듭들이 너무 단단하 고 복잡하다. 바라볼수록 화가 치민다. 웅장한 평화의 종이 장엄 하게 다시 울려 퍼진다. 저 종소리 나비 효과로 북한 전역에 울려 퍼져라!
‘세계 유일의 빈 호수의 댐!’
지난번 집중 호우 때와 부실한 금강산 댐이 붕괴된다 해도 북한 강 댐들의 파괴와 물바다는 있을 수 없다. 이제는 빈 호수의 댐이 가로막아 저 넓은 골짜기를 가득 채워 보통 인공 호수가 될 때, 국 민 성금과 세금으로 만든 콘크리트 둑은 황금과 같은 명품 둑이 될 것이다. 용도 폐기된 이념과 투쟁에 놀아나던 무리들의 역할은 수장(水葬)되고 말리라! 속살을 드러낸 둑과 빈 호수의 특별한 모 습, 비정상의 정상이다. 분단의 냉엄한 현장이다. 안보와 평화를 동시에 끌어안은 상징,‘빈 호수의 댐’인‘평화의 댐’이다. 가슴에 한없는 애정과 신뢰가 벅차오른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움도 필요하다. 일격의 능력 없 이 입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다. 북한 괴뢰의 6·25 기습 남침 65주년인 올해 며칠 전 비무장 지대에 몰래 지뢰를 매설하여 우리 병사 2명에게 지뢰 폭발로 중상을 입힌 도발을 일으켰다. 이에 대 응하여 전 국군이 비상 상태에 들어가‘칠성 전망대’방문이 취소 되었다. 분노와 아쉬움으로 뒤돌아보는 웅장한 빈 호수 댐이 역설


적으로 더욱 든든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을 들으 며 마무리에 들어갔다. 퀴즈가 끝나고 사행시 발표 시간이다. 미 리 제시한 시제는‘비수구미’였다. 사행시 진행자가 던진 예시에 재치가 번뜩인다.

비: 비 오는 날은 수: 수제비 먹고 구: 구름 낀 날은 미: 미더덕찜

박수가 요란하다. 회원 모두가 열정적으로 사행시에 참여하는 바람에 나는 발표할 시간이 없었다.

비: 비무장 지대에서 지뢰 폭발을 도발한 북한 당국자에게 알린다 수: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분노했다
구: 구름과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 미: 미래에 곧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이번 문화원 문화 기행은 삶을 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온몸으 로 익힌 절실한 안보 교육의 장이었다.

답사 사행시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 부여 백제>

김병구
부: 부여, 그대의
여: 여러 역사적 편린을 접하고 보니 백: 백제 문화의 화려함보다
제: 제국의 침략에 맞서던 그대의 외로움이 떠올라 더 가슴 아프네

김현준
부: 부자나 빈자나 일부토로 돌아갈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이치인데 여: 여류하는 세월을 거스르기라도 할 듯이
백: 백 가지 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제: 제왕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려 드는구나


<시제 : 상주 낙동>

배순선
상: 상냥하고 친절한 분들이 주: 주변에 많아서
낙: 낙원에 온 것 같습니다
동: 동행하는 분들의 행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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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상: 상상의 소산 중의 으뜸은 휴대 전화일 터인데
주: 주야로 만지면서도 사고력이 마비되어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낙: 낙제를 두렵지 않게 해 주고
동: 동무가 없어도 외롭지 않다고 착각하게 해 주는 마력 때문은 아닐까요


<시제 : 백무 칠선>

정이정
백: 백성들아, 이네 말씀 들어 보소 무: 무엇보다 기쁜 것이 무엇이겠소 칠: 칠첩 반상 맛나게 차려서
선: 선풍도골 우리 낭군 생남 의욕 고취하는 것이라오

김현준
백: 백화점에 가나 플라자에 가나 문제는 옷걸이
무: 무지무지하게 부러운 것은 내 친구는 애도 용도 쓰지 않아도 칠: 칠년 대한에 단비 만난 듯 뭇 남자들이 달려와서
선: 선후를 다투어 가며 호의를 보이며 도우려 하는 것


<시제 : 비수구미>

김창연
비: 비목의 노래가 유장하게 흐르는 산골에 수: 수많은 젊은 영령들이 잠들어 있구나

2016.봄_시각과 문화


구: 구국의 중차대한 사명을 받고
미: 미완의 독립을 완성하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꽃다운 임이시여

김병구
비: 비통하도다
수: 수년간 동고동락했으며 구: 구년을 함께 할 내 형제여
미: 미욱한 주인을 만나 외로이 수장된 내 딸딸이여

김현준
비: 비분 강개도 잘하고 망각도 잘하는 냄비 근성
수: 수많은 사건 사고의 장본인들이나 수사 당국자가 확신하는 바는
구: 구라파에도 미주에도 이와 같이 건망증이 심한 국민은 없다 는 것
미: 미봉과 기만이 잘 통하니 참사가 반복될 수밖에

이현창
비: 비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수: 수분 수초도 허비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 구구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미: 미래는 근면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연원
비: 비무장 지대에서 지뢰 폭발을 도발한 북한 당국자에게 알린다 수: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분노했다
구: 구름과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 미: 미래에 곧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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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 : 보성 순천>

김병구
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 성공은 출세하는 것이고
순: 순진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천: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은화
보: 보성에서의 하루를 성: 성공리에 보내고 순: 순수한 마음이 되어
천: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렵니다

정연원
보: 보배 중의 으뜸은 자식이요
성: 성공 중의 으뜸은 자식을 효순하게 기르는 것이니 순: 순금에 비할 수 없는 것이 효자이고
천: 천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효손입니다


<시제 : 평화 공원>

장민기
평: 평화 공원에서 느꼈다
화: 화목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공: 공동으로 모내기도 하고 추수도 하던 어진 사람들에게 원: 원망스러운 전쟁이 고통을 가져다주었음을

2016.봄_시각과 문화


김현준
평: 평화와 전쟁 화: 화와 복
공: 공과 색
원: 원래 명암이 있는 법이니 어두운 면은 보지 말고 밝은 면만 보고 삽시다


<시제 : 충무 통영>

박재영
충: 충무공 이순신이
무: 무구한 백성들과 함께 통: 통 큰 정치를 펼쳤더라면
영: 영광의 역사만 있고 치욕의 역사는 없지 않았을까요

정연원
충: 충렬사와 충혼탑이 외면당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무: 무지가 나라의 소중함을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곤란합 니다
통: 통일이 되어서도 선진국이 되어서도 영: 영원히 필요한 것은 애국심입니다

이경재
충: 충성스러운 개는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무: 무관심한 사람들은 눈먼 사람을 좌절시킨다
통: 통기타를 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영: 영혼 없이 자주 입을 여는 사람은 한숨만을 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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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충: 충군애국의 일념으로 무: 무장은 살다 가셨네
통: 통일은 우리의 지상 과제이니
영: 영순위로 삼을 것이 이 밖에 무엇이 있으랴

김병구
충: 충성의 화신 무: 무장 이순신
통: 통영을 지금까지 먹여 살려 온 영: 영웅이시여

맹영숙
충: 충충한 하늘이 맑게 개고
무: 무지무지하게 기분 좋은 오늘 하루
통: 통통배도 보고 넓은 바다를 향해 소리 지른다 영: 영원한 나의 로망 푸른 바다여

장민기
충: 충무의 자랑거리 무: 무엇이 있을까 통: 통영 시장
영: 영화의 풍경 같다








2016.봄_시각과 문화


<시제 : 광대 담양>

이경숙
광: 광대한 우주의 한 모퉁이
대: 대한민국 전라남도 담양 소쇄원 담: 담벼락 옆 울창한 대숲을 걸어
양: 양지바른 정자의 마루 끝에 앉으니 행복하여라

황진희
광: 광주를 여행한 것도 아닙니다 대: 대구를 여행한 것도 아닙니다
담: 담양으로 여행을 하고 오는 길입니다
양: 양적으로 질적으로 너무나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박소영
광: 광주를 출발하여
대: 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담: 담양에서 멋진 풍경도 보고
양: 양껏 먹고 마시니 세상에 부족할 것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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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주인이고 싶다



조경원 _ 29세, 남, 지체 장애  1급


나는 고향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리고 부모님이 누구인지도 모 른다. 두 살 무렵, 하지 장애를 가진 채 대구에 있는 장애 아동 시 설인 J원에 맡겨진 나는 그곳에서 열세 살까지 살았다. 열 살이 되 기까지 나는 내가 장애 아동 시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 하지 못했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 내가 접한 전부였고, 함께 지 내는 아이들과 보육 교사들이 내가 아는 세상과 사람의 전부였다. 가족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일반인의 삶과 바깥세상에 대해서도 아 무것도 몰랐다.
열 살이 지나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기 시작했다. 나도 사람인데 사람답게 한 번 살아 보아야겠다는 생 각을 하기 시작했다. 열 살 전까지는 나는 나름대로는 시설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제대 로 알지 못하면서 다만 좁은 세계 안에서 내가 누리는 조그마한 행 복감에 취해 스스로를 다른 장애 아이들과는 달리 행복하고 즐거 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작은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나는 함께 생활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장애도 심 하지 않았고, 지적 능력도 우수했기 때문에 보육 교사들로부터 언 제나 칭찬을 듣고 모범생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나이가 어렸음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에도 불구하고 방장으로서, 조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다른 아이들 앞에서 우쭐할 수 있었고, 골목대장으로서의 지위를 누리 며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의 지지와 위임받은 권한을 이용하여 아이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 좁은 세계에서 영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아이들을 돌 보고 시설 내에서의 질서 유지와 규율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으 므로 선생님들은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나를 신 뢰하고 절대적인 권한을 주었다. 나는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경 우에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규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생님들로 부터 꾸중을 들을까 봐 내가 먼저 아이들을 혼내는 일이 많았다. 그런 나의 행동을 다른 아이들은 아마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 이다.
지금은 시설에 대한 지원과 함께 규제가 강화되면서 시설의 기 준이 예전보다는 많이 달라져 시설에 거주하는 아이들의 수가 1실 에 몇 명하는 정도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만 내가 어린 시절을 보 낸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는 시설 전체에 거주하는 아동의 수 에 대하여 지원 규정이 있었을 뿐, 아이들이 1실에 몇 명이 거주해 야 한다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시설에서는 좁은 방에 많은 아동을 수용했기 때문에 시설 내에서의 생활 환경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어려웠다. 내가 기거했던 좁은 방에도 열세 명의 아이 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을 이기며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당시에는 그나마 한 방에 많은 아이들이 함께 기거함으로써 아이 러니컬하게도 아이들의 사회성을 어느 정도 키워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설이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 고, 아이들은 시설 내에서 그 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데, 함께 지내는 아이들의 수가 몇 명에 불과했더라면 잠자리 가 조금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또래 아이들과의 단체 생활의 경험 을 쌓아나가면서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는 데 있어서는 또 다른 장


벽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은 그 시절 그 시설 내의 아이들의 생활이라는 것이 그 정도로 외 부 세계와는 단절되고 고립되고 소외된, 그야말로 감옥과 같은 것 이었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열 살 때 나는 나를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있던 어느 분의 가정에 외출을 나가 일주일간 함께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시설 측에서는 내가 선생님들의 말씀도 잘 듣고 같은 방의 아이들도 잘 보살피면 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판단해서 나의 개인 후원자가 나 를 데리고 자신의 집에서 얼마간 생활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분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의 일주일간의 바깥 나들이를 허락 해 주었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는 단지 그 집 아이들이 부러웠고, 단란한 그 가정의 행복이 부러운 정도였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 이 지나면서, 꿈 같던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시설로 돌아와 야 했을 때 나는 왜 그 가정의 아이들처럼 살 수 없고 시설 내의 좁 은 세계에 갇혀 지내야만 하는가, 나도 나의 삶에 대해 판단할 수 있고, 나의 삶을 선택할 권리도 있는데 나는 왜 저들과 달리 살아 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외출 후 나는 시설 생활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 고, 바깥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을 앓아야 했다. 가끔 씩 외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시설을 찾아올 때마다 나의 바깥 세 계에 대한 동경은 열병이 되어 나를 아프게 했다. 바깥세상의 또래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시설을 찾아올 때마다 그 아이들의 삶과 바깥 세계가 너무 부러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이 깊어 갈수록 나는 선생님들과 자주 부딪쳤다. 내가 밖 으로 나가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할 때마다 선생님들은 나에게 지 금은 때가 아니니 참아야 한다고 설득했고, 나중에 때가 되면 보내 주겠다는 말로 위로하며 나의 마음을 묶어 두려 했고, 나 역시 바 깥 세계에 대해 너무나 아는 것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시설을 나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갈 수 있는지, 시설을 나가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열세 살이 되기까지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끓어오르는 열망을 가슴에 묻은 채 좀 더 나이가 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열세 살 때 나는 그동안 살고 있었던 J원을 떠나 장애 성인 시설 인 K 재활원으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살기 시작했다. 장애 아동 시 설인 J원을 나와 K 재활원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내 나이가 아동 기를 지나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더는 J원에 기거하기 어려운 이 유도 있었지만 학교에 가고 싶은 욕망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J 원은 장애 아동 시설로 교육 시설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열세 살이 되기까지 나는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고, K 재활원에는 특수 학교가 있어 그곳에 가면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었다. J원에도 장애 성인들이 일부 살고는 있었지만 대다수는 장애 아동들이었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학 교에 가고 싶은 아이들은 J원을 떠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다른 시 설로 옮기고는 했는데, 나는 특수 학교가 있는 K 재활원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고 싶었기 때문에 열세 살 때 K 재활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비록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또 다른 시설로 거처를 옮기는 것에 불과했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대는 J원을 떠나는 나의 마음을 한껏 설레게 했다.
J원에서 방장으로, 골목대장으로, 아이들의 리더로 대단한 자부 심을 갖고 지내던 나는 K 재활원에 오자 시설의 막내둥이에 불과 했다. J원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장애인들에게도 내가 방장으 로서 명령을 하면 다 통했지만 K 재활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다 들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졸업한 분들이었 기 때문에 나보다 아는 것도 많았다. 그전에 나는 내가 아주 똑똑 하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세계에서는 결코 똑똑한 것이 아니었 고, 나의 지식은 그분들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내


가 직면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나는 너무나 당황 스러워서 사흘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설쳐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대장에서 졸병이 되었고, 대단히 똑똑한 아이에서 그 저 그런 아이로 전락해 버린 자신 앞에서 많이 울었지만 나는 J원 보다 넓은 K 재활원에 차차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비록 늦은 나 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공부를 하고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은 나의 가슴을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라고 하는 낯선 세계의 설렘에 기뻐하면서 K 재활원에서 처음 가졌던 당혹감이나 평범한 나 자신 앞에서 우 울했던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K 재활원이나 학교 역시 시설은 시설이었다. J원에서는 좁은 방안이 전부의 세계였다고 한다면 K 재활원에서의 생활은 재활원과 학교가 전부였다. J원에서와는 달 리 바깥바람을 쏘일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은 있었고, 집에서 통학 하는 친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도 조금씩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재활원과 하교로 제한된 공 간은 답답함을 더해만 갔다. 장애인의 날과 같은 특정한 날에 시설 밖에서 행사가 있거나 가끔 후원이 있어 영하관에 갈 경우를 제외 하면 50미터를 사이에 두고 학교와 재활원을 오가는 반복된 일상 은 나를 지치게 했고, 그럴 때마다 바깥으로의 탈출을 꿈꾸었다.
선생님들의 감시와 통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이 우리들의 바 깥 나들이를 가로막았던 것은 아니었다. 설령 선생님들의 감시와 통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밖에 나가서 할 일도 없었고,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나머지 감히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지 못하 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담 밖으로 내다보이는 바깥세상을 그저 멀리 바라보기만 하다가 중학 시절 어느 날 나는 너무나 갑갑한 나머지 용감하게 탈출을 시도했다. 무작정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시설을 벗어나 멀리멀리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다섯 시간 넘게 손바닥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이 부르트도록 휠체어를 굴렸지만 시설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 고는 너무나 참담했다. 시설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시설 주 변만 맴돌다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고 이 시설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생 각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때 부터는 생각을 바꾸어 조금씩 시설을 벗어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외출을 가곤 했다. 처음에 는 시설 밖의 지리도 알지 못했고, 바깥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컸 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몰래 빠져나가더라도 멀리 가지는 못하 고 돌아와야만 했는데, 몰래 시설을 나가는 횟수가 많아지자 조금 씩 바깥 지리도 눈에 익기 시작했고, 용기도 생겼다. 점점 시설로 부터 더 멀리 외출을 시도하면서 시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더해만 갔고, 바깥 세계의 지리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K 재활 원은 성인 시설이고 학교도 있었기 때문에 J원보다는 덜 폐쇄적이 었다. 아침저녁으로 방장이 인원 점검을 하는 등의 일상적인 통제 는 있었지만 학생들이 학교를 오가야 했고, 학교에는 재활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았기 때문에 내 부 학생들과 외부 학생들을 구분하여 일일이 통제하기가 어려웠던 탓에 우리들은 자주 선생님들 몰래 바깥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는 중증 장애인의 경우에는 비장애인이 5분이 면 걸어서 움직일 수 있는 거리를 15분 내지 20분이 걸려야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외출을 하는 것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설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밤에는 10시만 되면 잠이 오지 않더라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컴퓨터 작업을 더 하고 싶어도 컴퓨터실을 나와야 했으며, 밤늦도 록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하고 싶어도 일부 선생님들 은 우리들의 꿈보다는 취침 규정을 더 중하게 생각했고, 시설의 에


너지 절약을 위해 강제로 전등을 끄기도 했으며, 식사 시간을 놓치 는 날에는 밥을 굶어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K 재활원으로 옮겨 학교에 입학하 고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은 채워지지 않 았다. 우리나라 특수 학교에서의 교육은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 리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민 기초 교육 교과가 편 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교과에 맞게 시행되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때에는 생활 훈련과 같은 기초 훈련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중· 고등학교에서는 사회 적응 훈련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국어, 영어, 수학 등 일반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기본 적인 내용들은 뒤로 밀리기 일쑤다. 그리고 교육을 맡고 있는 교사 들도 기본 교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여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 치려는 노력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교사들은 장애 학생들이 일 반 학교 학생들에 비해 학습 능력도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편 성된 교과와는 달리 장애 학생들의 일상생활이나 사회 적응에 주 로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실시했던 것 같다.
지체 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학습 능력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 일 반 학생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여러 차례 선 생님들에게 요구도 하고 건의도 해보았지만 번번이 거절되거나 무 시되고 말았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학생들이 교과 내용을 잘 따라 가지 못하는 경우에도 어떻게든 수업 시간에 기본 교과 교육을 하 려고 애를 써 주었지만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교육부의 방침이 바뀌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편성된 교과 내용이 일반 학교와는 너 무나 다른 것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교내 방송을 통해 학교 소식이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등을 듣고는 정규 수업에 들어가는 데, 일부 열의가 있는 선생님들은 교과서를 펼쳐서 학생들과 함께 책도 읽곤 하였지만 대다수의 선생님들은 교과 내용이 너무 쉬워 서 교과서를 펴지 않고서도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지 아니면 책을 펼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교과서도 아예 가지고 오지 않거나 교과서를 가지고 오더라도 책을 펴지도 않은 채 수업을 진행하기 일쑤였고, 수업 내용도 무엇을 가르친다기보 다는 학생들과 그저 이야기나 하고 놀며 시간만 보내다가 나갔다 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수준이 자신이 생 각하는 것 이상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수업을 준비하는 성 의도 보여주지 않았고, 학생들 역시 교과 내용과 동떨어진 것을 가 르치거나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더라 도 항의를 하거나 불만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특수 학교에서의 교육은 특정 교사들의 열의나 무성의 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시스템이나 제도의 문제가 큰 것 같다. 장애인들은 종류별로 장애 정도가 다르고, 학습 능력도 천차 만별인데, 특수 학교의 교육은 개별 장애인의 장애 정도와 학습 능 력 등을 고려하여 개개인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일정하 게 정해진 틀에 따라 일방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 특수 교 육과 일반 교과 교육 등이 겉돌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취업을 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진로 문제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무슨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 무렵 새롭게 개설된 전공과에 진학했 다. 전공과는 중증 장애인의 직업 재활을 위해 기술 교육을 실시한 다는 설립 취지와는 달리 기술 교육이나 직업 교육이 제대로 이루 어지지는 않았다. 장애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장애 정도, 지적 능 력과 학습 수준 등을 고려하여 기술 교육과 직업 훈련이 이루어져 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사회 적응 훈련이 중심이 되고 일반 과목의 수업은 있었으나 기술 교육이나 직업 교육은 없었다. 정보 검색 대 회와 같은 특정한 대회가 열리는 경우에 그 대회에 대비하여 관심 있는 학생들을 모아 단기간의 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지기는 했으


나 일상적인 교육 과정에 기술 교육이나 직업 교육이 포함되어 있 지는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지면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취업을 비롯한 진로가 불투명했던 나는 전공과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진학을 했지만 전공과 교육은 너 무나 실망스러웠다. 전공과 교육은 고등학교 교육보다 나은 것이 없었고, 직업 훈련과 취업에 대한 기대를 안고 진학했던 많은 학생 들의 기대를 송두리째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지체 장애 학생들은 농사를 짓기에 어려운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도 농업 교육 이 일방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고, 오늘날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대다수 공장에서 전자 부품을 기판에 붙이고 납땜을 하는 것은 자 동화되어 있는데도 전공과에서는 아무런 장래성도 없는 전자 부품 납땜 훈련을 습관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교육 내용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교육 과정은 형식적으로 반 복되기만 하고 교사들도 의욕이 전혀 없었다. 교사들은 오로지 취 업 박람회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취업 박람회가 개최 되면 어떻게 해서든 장애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취업시켜서 실적 만 쌓으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취업이 곤란한 지체 장애 학생들 은 제외하고, 그나마 취업의 길이 조금 열려 있는 정신 지체 장애 학생들을 내보내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을 취업 시키고 나서도 그 학생이 직장에서 제대로 적응을 하고 있는지, 무 리 없이 일을 해 나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사후 지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사들은 월말이면 신규 취업 상황 등을 교육청에 정기적 으로 보고하는 것 같았지만 졸업한 학생들이 직장에서 문제가 발 생하여 학교로 연락을 해 오지 않는 이상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좀 더 열의가 있는 선생님들은 1년에 한두 번 취업한 졸업생들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는 정도였 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그나마 안부 전화라도 하는 학생들은 학교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졸업하기 전에 취업한 사람에 한정되어 있 었고, 학생들이 졸업하여 학교에 적이 없을 경우에는 그 정도의 안 부 전화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는 취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했지만 선생 님들은“취업을 해야지.”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 나의 취업을 적극 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았다. 대놓고 취업을 포기하라는 말을 하지 는 않았지만 주변 여건과 환경으로 인해 스스로 취업을 포기하도 록 만들었다. 한 번은 내가 시계 수리를 해 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래, 해 봐야지.”라고 말하면서 그저 시계를 건네주었을 뿐 시계 수리에 대해 조금도 지도해 주거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시계 수리 가 취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기술이라 생각을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생 님의 무성의한 태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시계를 드라 이버로 풀어 그 내부의 정밀한 구조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뚜껑을 덮기만 했다. 선생님들은 나의 취업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서 취업을 해 보려고 정보도 수집하고 회사를 찾 아가 보기도 했지만 어떤 곳에서는 편의 시설이 준비되지 않았다 며 채용을 거절했고, 어떤 곳에서는 학력이 낮다며 거절했다.
외부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부모님 이나 가족들의 지원과 협력이 있어 졸업 후에 취업을 하거나 취업 을 하지 않았더라도 나름대로의 자기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 나 재활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재활원 직원들이나 학교 교사들 이 취업을 비롯한 진로 문제에 대해 그다지 애착을 가지고 지도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나면 컴퓨터실에서 컴퓨터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 점심을 먹 고 나면 다시 컴퓨터를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같은 방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루를 마치는 날이 반복되었다. 학교에 다닐 때와 다른 점은 공부를 하는 시간에 컴퓨터나 인터넷을 좀 더 한다


든가 낮잠을 더 자는 정도이지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집에서 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부모님의 지원 하에 복지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지만 시설에서 생활하던 우리는 시설 밖으로 나가 복지관이나 직업 전문학교에 간다든가 하는 일에 대하여 두 려움도 많았고, 필요한 정보나 절차, 이동 수단 등 대부분의 것을 스스로가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위해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서기가 어려웠다.
한 번은 무엇을 배우러 가려고 복지관에 문의를 했더니 내가 시 설에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시설 관계자로부터 허락 을 받아 오라고 했다. 재가 장애인의 경우에는 복지관에서 운영하 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할 때 참가 신청만 하면 되고, 참 가 신청이나 복지관으로의 이동 등도 가족들이 해결해 주는 경우 가 많지만 시설에 거주하는 우리들은 작은 프로그램에 한 번 참가 하려고 해도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하여 복지관은 책 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시설 역시 시설 거주자에게 무슨 일이 발생 할 경우 관계자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양측은 소극적이었고 이동 이 불편해서 포기해 버리기 일쑤였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우리 장애인들에게 후원금이 얼마 나 들어오는지, 장애인 개인에게 용돈이 지급되고, 장애인들이 용 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시설 에서 나를 먹여 주고 재워 주며, 가르쳐 주니 고맙다는 생각만 했 을 뿐이다. 시설 측에서 운영이 어렵다고 하면 어려운 줄로만 알았 고, 정부로부터의 보조금이나 각종 후원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후원금도 시설로 들어오는 것과 개인에게 지급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우 리들도 용돈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친구들과 함께 시설 측에 용돈 지급을 요구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이 높아지고, 장 애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제도적 조치가 많이 마련되었으며, 인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터넷도 발달하다 보니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우리들에게 용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용돈이 주어지 자 나는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군것질을 하는 등 나름대로의 독립 적인 경제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용돈이 생겼을 때는 만 원짜 리 한 장이 얼마만큼의 가치인지, 그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 몰랐다. 경제생활이나 물가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용돈이 지급되 면 아무것이나 사다 보니 돈을 계획적으로 쓸 수가 없었고, 불필요 한 물건을 사기도 하였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고 나서 후회 한 적도 많았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용돈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고,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고 모을 줄도 알게 되었다.
취업도 장벽에 부딪히고, 진로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시설 내에 서의 답답하고 무료한 시간이 지속되자 나는 보람 없는 삶을 계속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번씩 선배들이 시설에 찾아올 때마다 어떻게든 시설을 나가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선배들의 모습은 시설을 떠나야 한다는 갈망을 더욱 부채질 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자아를 잃어버린 생활을 반복할 수 없다 는 생각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나는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 리 모험이라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음은 이미 시 설을 떠나 있었지만 아직은 두려움도 많았고, 시설을 벗어나 독립 생활을 하기 위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시설을 벗어나려면 나가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염려하는 시설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집과 생활비 를 마련하는 계획이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어야만 했다.
나는 조금씩 시설을 벗어나 독립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 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취업을 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를 볼 때마다, 비록 취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시설을 떠나 독립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 친구를 볼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빨리 시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무엇을 하며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시설 관계자의 우려를 불식시켜내고 나 스스로도 자신감을 가지고 시설을 떠날 수 있도록 마음과 여건을 준비하기까지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 다.
2006년 초 나는 비록 직장은 없었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나 름대로 보람 있는 일들을 찾아 건실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와 장애인 야학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동료 장애인들을 보고 용기를 얻어 친구네 집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여전히 내 가 거주할 집을 구하고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뜻을 들은 친구 어 머니께서 친구와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해 주어 독립생활을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생활을 시작하자 나에게도 내 삶의 자유와 함께 나 자신의 생활이 생기게 되었다. 시설에서도 삶이란 것이 있었지만 나 스스 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은 없었는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부족 하나마 생활비를 아껴 가면서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기쁨이었다.
독립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또 다른 장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식당을 찾아갈 때면 식당 사람들의 과잉 친절 앞에서 내가 사람들 로부터 동정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 고, 분명 내가 먼저 식당에 들어갔는데도 나보다 늦게 들어온 손님 에게 먼저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다른 손님들에게 음식을 다 가져다주고 나서야 나에게도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식당 사람을 대할 때면 나도 돈을 내고 음식을 사 먹으러 왔는데 차별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려 오기도 했다. 그런 일을 당 할 때마다 식당 주인에게 따지고 항의도 하고 싶었지만 사회생활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의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아 아파만 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장애인 먼저’라고 하는 슬로건이 휘날리고 있지만 은행을 가서 창구 직원과 상담이라도 할라 치면 상담 내용 이 동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좀 기다리라고 하고는 나보다 늦게 온 다른 손님의 일을 먼저 처리하고 나서 나의 일을 처리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은 은행에는 고객의 순서를 지켜 주기 위해 번호표를 나누어 주고 순서에 따라 용무를 처리해 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장애인들에게는 번호표 와 순서가 무의미한 것 같다.
대구에는 지하철 노선이 2개밖에 없고, 저상버스가 많지 않아 볼 일을 보기 위해 한 달이면 열 번 이상 택시를 타게 된다. 예전보 다는 택시 기사나 시민들의 인식이 많아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중 증 장애인으로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일 부 기사들은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을 택시에 태우고 내리려 면 시간이 많이 들고 힘도 든다고 생각해서인지 내가 택시를 기다 리고 있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택시를 잡기가 힘이 들어서 콜택시를 부른 경우에도 미리 휠체어 사용자라고 이 야기했더라면 자신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 시하는 기사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한 번은 시각 장애인 한 분에 게 택시를 잡아 주려고 도로에 나란히 서 있었는데, 많은 택시들이 흰 지팡이를 짚은 그분과 휠체어를 탄 내가 함께 서 있어서인지 차 를 세우지 않고 지나가곤 했다. 20분 이상을 서 있어도 택시가 서 지 않자 그분은 나더러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하고는 혼자서 지팡 이 짚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뒤로 물 러나고 혼자서 손을 든 지 30초도 안 되어 택시가 와서 그분을 태 우고 간 일도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다 보면 내가 탈 순서인데도 나보다 뒤에 서 있는 일반인을 태우고 가 버리는 택시를 만나는 일 은 너무나 흔하다. 그런 일을 당할 때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깊


은 슬픔을 억제하느라 오랜 시간 허공만 올려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택시 기사들 중에는 휠체어만 타고 있으면 무조건 자신
이 내려서 장애인을 안아서 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수동 휠체어를 타고 있고 혼자서도 충분히 탈 수 있 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를 묻고 그들의 의사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것만 도와주면 되는데 말이다. 물론 장애인들 중에는 혼자서는 택시에 오를 수 없고 택시 기사분이 몸을 들어 택시에 올려 주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기사가 내려서 안아서 태우고 휠체어도 실어야 한다. 그러나 나처럼 혼자서 탈 수 있는 장애인에게는 혼자서 타게 하고 기사는 휠체어만 실어 주는 것이 좋다.
영화관에서 표를 사려고 하면 직원들은 으레 장애인들을 뒷전에 밀어 놓고 일반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표를 팔기 일쑤이다. 휠체어 를 타고 있다 보니 창구는 높고 직원의 입장에서 장애인이 바로 보 이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비장애인 손님에게 우선적으로 표를 팔 고 장애인은 다른 일반인들이 다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무슨 영 화를 보려고 그러느냐고 물으면서 표를 건네주는 일을 당할 때마 다 헛웃음이 절로 나오게 된다.
나는 언어 장애가 없어서 전화 상담을 자주 하게 된다. 함께 일 하고 있는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 의사 전달이 자유롭다고는 하지 만 가끔은 말이 꼬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전화를 받는 상대편 에서는 나더러 장애인이냐고 묻고는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때부터 는 나를 대하는 목소리가 달라지고 대충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전화 를 끊곤 한다. 그리고 활동 보조와 관련하여 사무실을 찾은 일반인 들은 언어 장애가 있는 뇌성 마비 장애인이 상담을 하려고 하면 그 분의 말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없냐고 하면서 언어 장애가 없는 사람을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나는 그 뇌성 마비 장애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싶어 가슴이 아렸지만 하는 수 없이 내가 상담을 도와주곤 한다. 물론 처음 언어 장애가 심한 뇌성 마비 장애인을 대하면 말을 알아 듣기가 힘들고 의사소통의 불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신 경을 써서 귀 기울여 듣는다면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데도 일 반인들은 아예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시청이나 구청의 공무원들은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교육도 하니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일반 국민들보다는 더 나을 것이고, 장애인을 대하는 방법이나 예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나 역시도 예전에는 그렇 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공무원들을 대하다 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볼일이 있어 시청이나 구청에 찾아가 공무원을 만나는 경우에는 장애인이 들어가면 귀찮은 표정을 노골 적으로 드러내면서 아주 건성으로 대하는 때가 많고, 장애인이 들 어가면 자신들이 장애인을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고 자신들의 입장 에서 생각한 나머지 장애인들에게는 본인들의 의사는 확인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 가면 어떤 공무원은 내 휠체어를 무조건 밀어서 움직이려고 하는 데,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스스로 휠체어를 운전하여 필요한 장소로 이동하고자 한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 으로 휠체어를 움직이거나 몸을 들어 올리는 등의 일은 매우 불쾌 감을 주는데도 일반인들은 이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곤 한다. 일 반인이 누군가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장애인이 하지 못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장애인이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반인이 다 해 주려고 하는 것은 장애인을 대 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장애인을 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 도는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 다.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일반인의 판단으로 일방적으로


주는 도움은 결코 장애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반인의 자기만족을 위한 행동일 뿐이다.
얼마 전에는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해 시험장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내가 휠체어를 밀고 시험장 건물로 다가가자 시험 관계자는 시험장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학교 건물 2층에 마련 되어 있어서인지 아주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다음에 시험을 치면 안 되겠느냐고 하면서 응시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처음에는 시험 관계자들이 시험장에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당 황하여 그러는 줄 알고 내가 타는 수동 휠체어는 크게 무겁지 않으 니까 몇 사람이 들어서 2층까지 올려 주면 된다고 말하면서 시험 장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시험 관계 자는 장애인들에게는 시간을 더 주어야 하지 않느냐, 우리는 장애 인을 위한 시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음 기회에 시험을 보 도록 하라며 계속해서 나의 응시를 막았다. 나는 휠체어를 타고는 있지만 상체는 장애가 없으므로 별도로 시간을 더 줄 필요고 없고 별도의 시험 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시험장까지만 데려다주 면 일반인과 함께 시험을 칠 수 있다고 입실을 허가해 달라고 계속 부탁했으나 그들은 다음 기회에 편의 시설이 준비된 장소에서 장 애인들만을 위한 별도의 시험이 준비될 때 응시하라고 하면서 끝 내 입실을 막았다. 그때 나는 워드프로세서 자격시험에 장애인을 위한 시험 절차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 문에 그 사람들의 말을 믿고 다음에 응시하고자 그날의 시험을 단 념했다. 나중에 알아본 사실이었지만 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시험 절차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험을 관장하는 기관에 전화를 걸 어 별도의 시험 절차가 없는데도 왜 장애인의 응시를 막았느냐고 항의했더니 자신들은 그런 일이 없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당시 에는 장애인 차별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장애인의 권익을 위 해 일하는 단체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났지만 전화기를 내려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놓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정보 검색 관련 자격시험을 치기 위해 시험장에 갔더 니 장애인 응시자들의 자리를 일반인들의 자리와는 별도로 시험장 맨 뒤편에 몰아서 배치해 놓고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 식이 변하고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비롯하여 장애인의 인권 보장 을 위한 제도적 조치들이 마련되어 가자 편의 시설이 마련되고 각 종 시험에서 장애인 응시자를 위한 별도의 조치가 마련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시험을 치러야 하는 책상에 전동 휠체어가 들어 갈 수 없다거나 중증 뇌성 마비로 인한 자세 문제와 대필 등이 필 요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장애인으로서 별도의 시간이 필 요한 수능 시험과 같은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굳이 장애인과 일반 인의 시험 장소나 책상을 따로 구별하여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 는데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장애인을 별도의 공간에서 별도의 책 상에 앉혀서 시험을 치게 하는 것을 보면서‘우리 사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 여전히 멀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대학 진학을 해 볼까 싶어 지역의 어느 전문 대학에 장애인 특별 전형을 비롯한 입학과 관련된 사항들을 문의한 적이 있었다. 내가 상담한 대학 직원은 그 대학에서 시행하고 있는 장애 인 특별 전형과 함께 등록금을 비롯한 학사와 대학 생활 등에 관한 아주 친절한 상담을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몇 개월 뒤에 오 겠다고 말하자 자기네 대학은 편의 시설도 잘 되어 있지 않고 해서 휠체어를 사용하는 중증 장애인이 혼자서 공부를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은근히 나의 입학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대학은 장애인 특별 전형을 통해 대학 의 이미지도 높이고, 장애 학생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대학 정원도 채우는 나름대로의 목적은 달성하면서도 중증 장애인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을 갖추고, 그들의 학습을 위한 투자는 하 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대학은 겉으로는 중증 장애인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혼자서 계단을 충분히 올라갈 수 있고 별 다른 학습 지원이 필요 없이도 수업을 받을 수 있는 2, 3급의 중증 장애인만을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장애인들이 장애인 특별 전형 등을 통해서라도 대 학 진학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많은 대학에서 장애인들의 생활 을 위한 편의 시설이나 학습 지원과 같은 조치는 제대로 강구하지 않은 채 장애 학생들을 입학시켜 놓고는 장애 학생 스스로가 자신 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졸업해 주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 가 무늬만이 아닌 진정으로 장애인을 위한 제도와 정책들을 마련 해주기를 바란다.
동사무소에서 사회 복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도 장애 인들을 대할 때면 말로는“힘드시죠?”라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장애인들을 건성으로 대하고 있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제대 로 잘 제공해 주지 않는 것 같다. 내가 2년 전에 시설을 나와 독립 생활을 하려고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기초 생활 수급과 관련된 것을 문의하자 담당 복지사는 좋은 시설을 놔두고 뭐 하러 밖으로 나와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며 나의 퇴소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 았다. 아마도 그 사회 복지사는 자신이 관리해야 하는 중증 장애인 이 한 명 더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업무가 늘어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기 초 생활 수급비를 마치 자신이 지급하는 듯이 대하는 태도에 불쾌 감을 금할 수 없었다. 너무나 화가 난 나는 구청에 전화를 걸어 관 할 동사무소 사회 복지사의 어처구니없는 태도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나는 가끔 일상에 지치고 가슴이 답답할 때면 혼자서 열차를 타 고 여행을 하곤 한다. 그런데 혼자서 휠체어를 굴리며 여행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몸도 불편한데 왜 이렇게 혼자서 멀리 여행을 다니느냐,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마다 나는 일반인들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자 유롭게 여행을 다니지 않느냐? 나도 마찬가지다. 장애인들도 여행 을 하고 싶을 때면 열차도 타고 버스도 타면서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장애인을 여행도 하지 못하고 여행 할 마음도 갖지 못하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 우울했다. 장애인도 다 같은 사람이고 장애인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느끼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그동안 장애인들의 노력을 통해 장애인 인권과 복지를 위한 많 은 제도가 마련되고 시행되면서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 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여전한 것 같다. 비록 내가 휠체어를 타고 거리 를 이동할 때 열에 열 모든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쳐다보던 것에서 두 세 사람이 쳐다보는 정도로 변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장애인 을 낯선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나는 지금도 나의 질병과 장애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 한다. 구루병이 아닌가 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 만 뼈가 약해서 쉽게 부러지는 것으로 인해 나의 다리에 장애가 왔 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비록 뼈가 약해서 다리가 자주 부 러졌지만 나는 어릴 때는 어느 정도는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시설 내에서는 마음껏 기어 다니며 개구쟁이 노릇을 하곤 했다. 뼈가 한 번씩 부러질 때마다 입원하거나 깁스를 해야 했고, 치료를 받고 뼈 가 붙기는 했지만 부러진 뼈가 붙는 과정에서 변형이 생기고 근육 이 약해져서 지금은 다리가 휘어져 있고 힘이 없어 휠체어를 사용 하고 있다. 어릴 때에는 뼈가 잘 부러지는 병이 있기 때문에 늘 조 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스스로 절제하며 몸조 심을 하는 것은 힘든 것이 아니었다. 수술 등 지속적인 치료를 받 았더라면 질병이 치료될 수 있고, 장애가 지금보다 훨씬 가벼워졌 을지도 모르지만 시설에서 나 하나만을 위해 많은 병원비를 지불


할 수도 없었고, 부모님처럼 질병과 장애 정도를 고려하여 생활을 세심하게 관리해 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결국 하 반신을 쓰지 못하는 중증 장애를 갖고 말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리 한 쪽이 절단된 것처럼 보이는 정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 면 제대로 된 뼈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두 다리가 망가져 있다. 하 지만 나와 같은 질병을 앓았던 다른 사람들이 두 팔도 휘어지고 팔 의 근육에도 문제가 생긴 것에 비하면 나는 피나는 노력 끝에 비 록 두 팔이 조금 휘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수동 휠체어를 조작고 도 남을 정도의 팔힘을 유지하고 있다. 수동 휠체어를 사용하면서 엉덩이를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엉덩이뼈는 많이 휘어 있지만 자 세를 똑바로 하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고, 다행히 척추는 문제가 없다. J원에 있을 때는 늘 좁은 방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다리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휠체어를 사용하지는 않았고, 주로 시설 내를 기어 다니거나 굴러다녔다. 하지만 K 재활원으로 옮기면서부터는 학교도 가야 했기 때문에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동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언젠가 나의 두 팔에 힘이 없어져서 더는 수동 휠체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전 동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는 팔힘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있고, 힘이 들기는 하지만 수동 휠체어를 사 용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왜 전동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 고 힘들게 수동을 고집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전동 휠체어는 나이 가 들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지만 팔에 힘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수동 휠체어를 사용하는 것이 나의 자부심이자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도 굵은 땀을 흘려가며 수동 휠체어를 굴리고 있다.
나는 형식적으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일반인과 비슷한 교육 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내가 다닌 특수 학교에서의 교육이 너무나 부실했기 때문에 일반인과 비교하면 나의 학습 수준이나 사회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사회

[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일반의 교양과 인식 수준을 확보하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 을 기울이고 있지만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 도 있고 사회인 다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욕망도 있어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등록금 문제와 같은 어려움도 있고, 부 족한 학습 문제 등도 있고 해서 아직은 대학 진학의 희망을 실현하 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장애인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 활동 보조와 관련된 상담을 하고 있다. 그동 안 시설을 나와 독립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려움도 많았고, 고민과 갈등도 많았지만 현재 하고 있는 일들에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 인하고 있고 보람도 느끼고 있다. 아직은 여건이 되지 않아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독립 아닌 독립생활을 하고 있지만 좀 더 노 력하고 준비를 해서 진정한 독립생활을 하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에 대한 열망도 실현해 보고 싶다.
나는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한 남자로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은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박한 꿈에 불과하지만 내가 이 꿈 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하지 만 나의 소박한 꿈을 이루어 가며 그 속에서 나 나름의 행복을 맛 보며 살아가고 싶다.




문화원 소식






[ 문화원 소식]


남장사, 장각 폭포, 동학교당, 우복 종가 에 다녀왔습니다.

제126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북 진안의 영모 물레방아, 마이산 탑사, 한천 풍혈 에 다녀왔습니다. 돌탑의 신비함과 에어 컨 바람보다 시원한 풍혈 바람이 발길을 돌리기 아쉽게 하였습니다.

제127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북 남원의 실상사, 마천면의 마애불, 백무동 계곡 벽 송사에 다녀왔습니다. 지리산에 자리 잡 은 불교 유적을 둘러보고 백무동 계곡에서 발을 담그며 더운 여름날의 청량함을 맛본 하루였습니다.

한국 연구 재단의 지원을 받아 개설한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종강 되었습니다. 장장 36주에 걸쳐 진행되었는 데, 수고해 주신 교수님들과 참여해 주신 회원 여러분들과 책임 연구원으로 수고해 주신 이태호 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제128차 역사 문화 기행은 문화 캠프를 겸하여 1박 2일 강원도 화천의 파로호 안보 전시관, 꺼먹다리, 딴산, 비수구미, 평화의


댐, 비목 공원, 해산령을 다녀왔습니다. 2 시간 30분 트레킹을 하여 비수구미에 도착 하였습니다. 파로호라는 이름과 비목비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절절히 느꼈고 평화의 염원을 품고 해산령을 걸었습니다. 계곡물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듣고 총총한 별들을 보며 잔 기울이고 여름밤의 정취를 만끽해 보는 잊을 수 없는 기행이었습니다.

제12기‘도서 낭독 아카데미’가 10주 과 정으로 개설되었습니다.

제129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남 순천, 보성의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낙안읍 성, 선암사에 다녀왔습니다. 조정래의 소 설‘태백산맥’에 나오는 주요 무대를 다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천년 고찰 선암사를 가을날의 여유를 가지고 느낄 수 있어 기쁨이었습니다.

수성 도서관과 공동으로‘찾아가는 인 문학 강좌’를 이태호 박사의 진행으로 10 주 과정으로 개설하였습니다.

제130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북 영동의 영국사, 송재휘가옥, 신항리 석불, 노근 리 평화 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전쟁의 비

[ 문화원 소식]











본 문화원을 도와주신 분들

강구정, 강대성, 강선옥, 고수환, 고윤자, 권태옥, 권혁성, 권호종, 기미향, 김경화,
김경흠, 김대석, 김동억, 김동현, 김동환, 김명한, 김미영, 김병구, 김상봉, 김성수, 김수희, 김숙희, 김순근, 김순선, 김영대, 김영숙, 김영진, 김은철, 김재룡, 김재현, 김정애, 김정환, 김종회, 김진도, 김창연, 김칠봉, 김태자, 김한숙, 김현기, 김형덕, 김효신, 마원민, 마인섭, 맹영숙, 문학배, 민효순, 박선애, 박순정, 박영숙, 박 정, 박추자, 박현철, 박희숙, 반용음, 반태석, 배경애, 배세달, 배칠봉, 변기식, 석찬영, 손명란, 손은성, 손일원, 손중성, 손춘수, 손해룡, 송미라, 송준관, 신봉기, 신 윤, 신창호, 안승철, 안창빈, 양진모, 엄진성, 여길화, 우진기, 유대안, 윤일현, 윤정석, 이강화, 이경숙, 이경재, 이근갑, 이민영, 이삼승, 이석규, 이성율, 이성환, 이수영, 이영목, 이영수, 이우녕, 이원영, 이위경, 이윤하, 이일우, 이재민, 이제상, 이종순, 이진우, 이창훈, 이태호, 임선애, 임성식, 임진수, 장경희, 장세영, 전병태, 전재원, 전평준, 정갑태, 정극일, 정연원, 정종규, 정해관, 조경호, 조영우, 조해정, 최동철, 최병문, 최성재, 한영숙, 허증, 허지원, 현재만, 황기진, (주)롯데건설, (주)평화발레오, 계성고 63 대전 지부, 교보생명 성서 지점, 대구 시각 장애인 연합회, 대구 점자 도서관, 대구 희망 신협, 대구 보원 덴탈, 북성 신협, 시각 장애인 복지관, 안마사 협회 대구 지부, 청운 신협, 코오롱 떡집, 한길 로타리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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