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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호(통권37호)
  계간
  시각과 문화
  2017년 여름호 (통권 37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악서를 퇴치하려면 _ 이석규

  Pops English
  Super Trouper - ABBA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阿房宮賦 - 이석규 역

  서평
  군주론 _ 이석규 편집

  우리가 답사한 유적

  기행문
  향기로운 대화 _ 배순선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인을 좀 더 배려하고 편견 없는 사회가 되기를 _ 하태운

  생활 수필
  외갓집 _ 황진희
  꽃빗자루 _ 정연원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악서를 퇴치하려면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20여 년 전에 자전을 보다가 좌전(左傳)의 저자인 좌구명(左丘明) 항에서 그를 ‘맹좌(盲左)’라고도 한다는 주석을 보고, 좌전에 그가 이 별명을 얻게 된 단서가 있을까 하여 “신완역 춘추좌씨전(新完譯春秋左氏傳)”이라는 좌전의 역서를 구입해 두었었는데, 지금껏 목차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기회가 와서 다소 들뜬 마음으로 최신 개정판을 구하여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가는 동안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은 다시 분노로 바뀌어 갔다. 고전을 국역하는 역자의 한국어 사용 수준이 너무도 형편없었고, 역사가 100년이 다가오는 고전 전문 출판사인 명문당이 이런 불량 역서를 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휴지 뭉치를 비싼 값에 시중에 내놓은 출판사의 후안 무치한 처사에 배신감을 참을 수가 없었고, 과연 필자 외에 이 책을 돈 주고 구입한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이것이 한국의 인문학의 현상(現狀)이라고 생각하니 암담하고 참담한 심정 비길 데 없었다.
  본서가 필자를 비롯한 독자를 실망시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 때문이다.
  첫째, 기본적인 한자어의 철자조차 잘못 적는 일이 흔하다. “각 제후국의 대부들이 간 게제에(→ 계제에) 진나라의 새 군주를 만나보려 하니”에서처럼 ‘계제(階梯)’를 ‘게제’로 적은 것이 한 번뿐이면 무의식적인 실수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적은 것이 여러 번이니 이 역자는 이 단어를 늘 이렇게 적는 모양이다. 또, ‘不侮矜寡(홀아비와 홀어미를 업신여기지 않음)’의 ‘矜寡(관과)’를 ‘긍과’로 적고 있으니 한학자로서의 전문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또, ‘蔡蔡叔’의 주해에서 “채숙을 추방함. 앞의 ‘蔡(채)’는 추방함으로 풀이된다. 혹 오자일런지도 모른다.”라고 하고 있다. 앞의 ‘蔡’는 ‘내칠 살’이라고 포켓용 옥편에도 음훈이 나와 있고, 조금 큰 자전에는 여기의 구절이 그대로 출전과 함께 예문으로 제시되어 있는데도 오류 운운하니 학자로서의 나태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다.
  둘째, 동사, 형용사의 활용법이 잘못된 곳이 많다. “그런데 어찌 속히 완성시킬 것을 서두룬단(→ 서두른단) 말이오?”, “양공께서는 자신이 군주의 여행길이 무사하시도록 빌으시었으니(→ 비시었으니) 군주께서는 가시지 못하실 게다.”, “옛날에 우리 조상의 백부였던 곤오는, 허나라의 옛땅에 살으셨었소(→ 사셨었소).”, “성왕께서는 친히 그 결박을 풀으시사(→ 푸시사), 희공의 입에 물었던 구슬을 받아내시고, 그 관을 불에 태우셨나이다.”, “도중에 있는 창고를 텀(→ 턺)”, “하늘이 앞으로 무슨 잔악한 짓을 하게 할런지도(→ 할는지도) 모르옵니다.”, “오나라 왕 부차가 월나라군을 부초에서 쳐부셨는데(→ 쳐부수었는데”), “고문학이란 선진시대의 고문자로 기술되어진(→ 기술된) 서책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문을 말하는 것이고”, “국토가 넷으로 나뉘어져(→ 나뉘어․나누어져) 백성들이 군주 아닌 다른 사람들한테 지배당하고”에서와 같이 용언의 활용이 잘못된 곳이 부지기수인데, 초등 학교 학생도 고학년이라면 이런 유의 오류는 저지르지 않을 것 같다.
  셋째, 일상적인 단어마저 잘못 사용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자반은 재배하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초왕에게 말을 올렸다.”에서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자꾸 숙이는 것’이 ‘조아리다’인데, 불필요한 ‘땅에’를 덧붙였다. “빨리 돌아오면 전의 관직에 복직시킬 것이지만, 늦어지는 자는 코를 베는 형에 처하리라.’에서 ‘전직을 회복하는 것’이 ‘복직’인데 그 앞에 ‘전직’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신인 저는(→ 신은․소신은) 그런 초나라 군주의 명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에서 대명사인 ‘신(臣)’이 무슨 뜻인지 모를까봐 ‘저는’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대사(大史)는 사관의 장이었고, 내사(內史)는 사방에서 보고해온 것을 검토하여 기록하고, 외사(外史)는 사방으로 알리는 일을 기록하여 알림을 장악했다(→ 관장했다).”와 같이 ‘관장하다’라고 해야 할 것을 ‘장악하다’로 잘못 쓴 곳이 무수히 많다. “도읍에서 도망나온 나는 불민하여 국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잡초 우거진 곳에 머물고 있으니 그대는 귀국 군주의 명하신 말씀을 더럽히지 말게 하시오.”에서 ‘사직(社稷)’은 ‘국가’와 같은 말인데, 그 앞에 또 ‘국가’를 붙였다. 더군다나 “사(社)는 토지신이고, 직(稷)은 곡물을 주관하는 신인데, 옛날 천자나 제후는 궁전 서편에 이 두 신을 모시고 제사지냈다. 뜻이 변하여 사직이라는 말은 국가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라고 주해를 달아 놓고 실제로 이 단어를 이렇게 쓰니 주해는 왜 달았는지, 주해자와 번역자가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군주께서는 그들의 자문을 받아 회합을 치를 좋은 방법을 선택하옵소서.”에서 한국에서는 전문가와 문외한의 지적 수준에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자(諮)’와 ‘문(問)’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조언’이라는 말보다 더 품위 있고 고상한 말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쓰는 사람들과 한문 고전을 일반인에게 알리겠다고 나선 사람의 한자어 사용 능력이 다르지 않다.
  넷째, 신어를 날조한다. “나이가 어리면서도 그를 공경스럽게(→ 공손하게) 대하지 않았으니 연장자를 잘 모시지 못한 것이며”, “충성스럽고 신의로운(→ 신실한) 일은 잘 되는 것이지만”, “신의스럽지(→ 신실하지) 못해서 얻은 요행은 두번 다시 얻을 수가 없다.” 등은 한자어와 고유어 접미사를 마구 조합하여 자기류의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고, “네 사람은 다 현(縣)을 영유지(→ 영지)로 받고, 그 뒤에야 위헌자를 비로소 찾아뵈었다.”, “내 한기에게 발목 끊는 형을 가하여 수위로 삼고, 양설힐에게 거세의 형을 가하여 내시관(→ 내시)을 삼을 것 같으면, 진나라에게 치욕을 가할 수 있고, 나도 소원을 풀게 되는 거요.”, “지금 군주께서 병환에 걸려 있음이 제후들의 근심거리가 됨은, 축관과 제사관(→ 제관)의 죄이옵니다.” 등은 조어 능력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널리 사용되는 용어가 있는데도 그런 용어를 쓰지 않고 굳이 신어를 만들어 낸 예이다.
  다섯째, 방언과 표준어를 혼동한다. “위나라 태자가 다시 정나라 군사를 치니, 정나라 군사가 대패했고, 제나라가 보낸 천대 수레의 조쌀(→ 좁쌀)을 빼앗았다.”에서 ‘조쌀’은 ‘좁쌀’의 방언임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말 해(→ 혀)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그 몸 병들게 되는구나.”에서 ‘해’가 ‘혀’의 방언임을 추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아닌 고전 번역에서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표준어로 된 다른 사람의 글을 전혀 읽지도 않고 표준어 사용자와 대화도 전혀 하지 않아서인지 어떻게 ‘혀’를 ‘해’라고 할 수 있을까. 본서에서 무수히 보이는 어색한 표현도 이 사람의 지역 방언인지도 모른다.
  여섯째, 남은 이해하지 못하는 어법을 구사한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였다가(→ 구원하다가) 중지하다”,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했다.]라고 있는(→ 라고 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4세기 후반기에 이미 학교 교육을 실시하여 널리 나라의 자제를 교육 양성하였다.”, “속담에 ‘신하는 한 몸인데, 군주는 둘이다’라고 있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문장을 보면 이 역자는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없는 자기류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일곱째, 원전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겨울 11월 기유날에, 초나라 군주인 자작 균이 세상을 떠났다.”에서 “초나라 군주인 자작 균이 세상을 떠났다”는 ‘楚子麇卒(초자균졸)’이라는 넉 자의 역문이다. 김구용 선생이 “열국지” 번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원문에서 두 자인 ‘楚子’는 역문에서도 두 자로 ‘초자’라고 옮기면 될 것을 여덟 자로 늘려서 ‘초나라 군주인 자작’으로 옮겨 놓았는데, ‘齊侯(제후)’는 ‘제나라 군주인 후작”, ‘許男(허남)’은 “허나라 군주인 남작”과 같이 두 자를 여덟 자로 늘려 놓은 것이 수천 회는 될 것이다. 또, “길(吉), 저야 저의 한몸도 비호하지 못하는데, 어찌 종족을 비호할 수 있겠습니까?”와 같은 문장도 무수히 많은데, 한문에서 화자가 자기 이름자를 주어로 말하면 겸양의 표시인데, 이것을 엉뚱하게 ‘이름자, 저(나)’라는 매우 어색한 화법을 만들어 내어서 독자를 실망시키기도 하고 오도하기도 한다. 또, “군주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가시도록 하십시오.”와 같이 ‘군주’라는 말을 호칭어로 사용한 대목도 셀 수 없이 많은데, ‘주군’이라면 혹 모를까 ‘군주’를 지칭어도 아닌 호칭어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호칭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님은 그 화를 막아내지 못하고 계십니다.”에서처럼 ‘님’이라는 말을 접미사가 아닌, 21세기를 전후하여 널리 쓰이기 시작한 2인칭 대명사로 쓰고 있다. 주공, 환공, 공자 등 2000년도 훨씬 전의 인물들이 상대를 ‘님’이라는 말로 호칭하게 한 것은 ‘경(經)’과 ‘전(傳)’을 현대의 드라마 대본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여덟째, 이 밖에도 비문법적이고 난삽한 문장들이 전편을 뒤덮고 있다. “주나라 성왕의 동생으로, 당에 봉되었고(→ 봉함을 받았고), 뒤에 진나라 공실의 시조가 되었다.”, “도적인 두 공자를 떨치었고(→ 놓쳤고) 채공이 반란군을 편성하고 있는데, 나를 죽이는 것이 무슨 이익이 되오?”, “경문에 초나라가 그 나라의 대부 성호를 죽였다고 써 말한 것은(→ 기록한 것은), 그가 재산을 아깝게 여긴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날로 잘못을 고치지 않는데서야(→ 않아서야),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정나라 군주가 조문차 진나라에 가 황하 가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 사람이 군주가 직접 올 필요가 없다고서(→ 없다면서) 정나라 군주가 조문차 입국함을 사양했다.”, “나랏일을 맡은 사람을 조정에 들게 하여, 군주의 명으로 준다고서(→ 준다고 하면서) 각기에 상을 주고, 그리고 그들에게 군주의 말이라고 전해 이르기를,”,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타인에게 요구한대서야(→ 요구해서는) 아니되오나, 다른 이와 같은 욕구라면 다 잘 되어질 것이옵니다.”, “어린 주인님이 이미 장성했는데, 우리들의 가문을 돕는다고서는(→ 돕는다는 구실로), 이 가문을 그분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 “공자 위는 초나라 도읍에 당도하여 궁중으로 들어가 국왕을 문병한다고는(→ 문병한다며) 국왕의 목을 졸라 죽이고, 곧이어 국왕의 두 아들 막과 평하를 죽였다.”, “당시 노나라 숙손목자는 배가 있으면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뜻으로 이 편의 시를 노래부른(→ 읊은) 것이다.”, “행차하실 날짜를 물어 올리겠나이다(→ 여쭙겠나이다).”, “그래서 이에 가신으로 하여금 감히 저의 뜻을 펴 올리게(→ 아뢰게) 하옵니다.”와 같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로 전편을 채우고 있다. 위에 든 여러 문장에서 단어 하나를 고친다고 올바른 문장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러한 책을 접하다 보면 실망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보통 지식인도 아니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지식인 중의 지식인인 대학 교수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니 실망하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고, 또 학생들의 논문의 지도와 심사를 무수히 반복했을 것이고, 그렇게 많은 지적 경험을 쌓은 후에 교수 생활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이 번역서를 냈을 것이니, 그러한 연륜과 학식이 배어 있어야 할 책이 이와 같이 휴지 뭉치와 방불한 불량 도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서가 양산되는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는 학교에서의 국어 교육이 부실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비판적인 독자가 없기 때문이고, 셋째는 출판사에서 교정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악순환은 단시일 내에 단절하기 어렵다. 부실한 교육을 받은 교육자에게 충실한 교육을 기대하기 어렵고, 독서를 비상 마시기보다 더 싫어하는 이 나라 대중이 비판적인 독자가 되기를 기대하기 어렵고, 고급 교정 인력이 없는 출판사에 불량 원고를 양서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독립의 가망이 거의 없던 때에 우리의 선진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마지막 순간까지 광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다. 오늘의 의식 있는 이들은 그러한 선진들을 본받아서 구국 일념으로 그 자녀와 생도와 후진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출판사와 저자에게 격려와 질정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문맹 공화국을 문명 공화국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Pops English

  Super Trouper - ABBA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Super Trouper beams are gonna blind me
  But I won't feel blue
  Like I always do
  'Cause somewhere in the crowd there's you
  I was sick and tired of everything
  When I called you last night from Glasgow
  All I do is eat and sleep and sing
  Wishing every show was the last show
  So imagine I was glad to hear you're coming
  Suddenly I feel all right
  And it's gonna be so different

  When I'm on the stage tonight
  Tonight the Super Trouper lights are gonna find me
  Shining like the sun
  Smiling, having fun
  Feeling like a number one
  Tonight the Super Trouper beams are gonna blind me
  But I won't feel blue
  Like I always do
  'Cause somewhere in the crowd there's you

  Facing twenty thousand of your friends
  How can anyone be so lonely
  Part of a success that never ends
  Still I'm thinking about you only
  There are moments when I think I'm going crazy
  But it's gonna be alright
  Everything will be so different
  When I'm on the stage tonight
  So I'll be there when you arrive
  The sight of you will prove to me I'm still alive
  And when you take me in your arms
  And hold me tight
  I know it's gonna mean so much tonight

  슈퍼 트루퍼 조명에 눈이 부셔도
  우울해하지 않을 거예요
  늘 그랬던 것처럼
  왜냐하면 관중 속 어디에 당신이 있을 테니까요
  난 모든 일에 신물 나고 지쳐 있었어요
  어젯밤 글래스고에서 당신에게 전화했을 때
  내가 하는 일이라곤 먹고 자고 노래하는 일이 전부니까요
  공연을 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길 바라면서
  그러니 상상해 봐요 당신이 온다는 말에 내가 얼마나 기뻤을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어요
  너무나 다를 거예요

  오늘 밤 무대에 오르면
  오늘 밤 슈퍼 트루퍼 조명이 날 비추겠죠
  태양처럼 빛나며
  웃으면서, 즐거워하겠죠
  최고가 된 듯한 기분일 거예요
  오늘 밤 슈퍼 트루퍼 조명에 눈이 부셔도
  우울해하지 않을 거예요
  늘 그랬던 것처럼
  왜냐하면 관중 속 어디에 당신이 있을 테니까요

  2만여 명의 팬들 앞에서
  누가 이렇게 외로울 수 있을까요
  절대로 끝나지 않을 성공의 일부지만
  여전히 난 당신만을 생각해요
  미쳐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제 괜찮을 거예요
  모든 게 다를 거예요
  오늘 밤 무대에 오르면
  당신이 도착하면 난 거기 있을 거예요
  당신을 보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되겠죠
  그리고 당신이 날 가슴에 안고
  꼭 품어 주면
  오늘 밤 너무나 큰 의미라는 걸 알죠

  ABBA
  스웨덴 출신의 보컬 4중창단인 아바(ABBA)는, 두 쌍의 부부 그룹으로서 1974년에 유로비전 가요 경연 대회에서 <Waterloo>란 곡이 그랑 프리를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스탠더드 팝 그룹으로 성장했다. 1945년 4월 25일에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출생한 비요른 울바이우스(Bjorn Ulvaeus)는 후트내니 싱어스(Hootenanny Singers)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던 가수였으며, 1946년 12월 16일에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은 헤프 스타즈(Hep Stars)라는 그룹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작사가로 활약했는데, 1966년에 이 두 사람은 콤비를 이루어 듀오로 활동했다.
  듀오로 활동하면서 많은 곡을 발표해서 스웨덴에서는 나름대로 인기를 유지하여 나가던 비요른과 베니는, 1972년에 <People Need Love>란 곡을 녹음하면서, 자신들의 걸프렌드였던, 1950년 4월 5일에 옌체핑에서 태어난 아그네사 할트스코그(Agnetha Faltskog)와, 1945년 11월 15일 노르웨이의 나르비크에서 출생한 아니 프리드 린지스타드(Anni Frid Lyngstad)라는 두 여성에게 백 보컬을 맡겼는데, 이 곡이 크게 히트하여 성공을 보자 1973년에 이 네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 첫 자를 따서 ‘아바(ABBA)’라는 그룹명을 만들고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Ring Ring>이란 곡으로 그 해 유로비전 가요 경연 대회의 예선에 응모했으나 실패하고, 다음 해인 1974년에 <Waterloo>란 곡으로 다시 같은 대회에 출전하여 대상을 받아, 그때부터 스웨덴의 달러 박스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 브리튼에서 열린 이 유로비전 가요 경연 대회에는 올리비아 뉴턴 존(Olivia Newton John)과 질리오라 친케티(Gigliola Cinguetti) 같은 유명 스타들이 대거 참가했던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율동과 비트에 넘치는 리듬, 그리고 완벽한 하모니로 그랑 프리를 차지한 이들은 그 뒤로도 계속 발표한 히트곡으로 전 세계에 아바의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일대에서는 ‘아바 마니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붐을 일으켰던 아바는, 1975년경에는 비행기 사고로 자신들이 죽었다는 루머가 퍼져 혼란 속에 빠지기도 했었다. 1975년에는 <S.O.S>와 <Mamma Mia>로, 다음해인 1976년에는 <Fernando>, <Dancing Queen>, <Honey, Honey>, 1977년에는 <Knowing Me, Knowing You>, <Name of The Game>, 1978년에는 <Summer Night City>, 1979년에는 <Voulez Vous>, <Gimme, Gimme, Gimme> 등 발표하는 수많은 곡마다 전 세계 팝 팬들을 매료시켰으며, 영국, 미국 등 각국의 인기 차트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떠날 줄 몰랐다.
  1977년 2월에 열렸던 오스트레일리아 공연은 『ABBA The Movie』라는 기록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되기도 했으며, 1979년 1월 9일에는 유엔 본부에서 마련한 ‘불우 아동을 위한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UNICEF Charity Concert)’에서는 <Chiquitita>란 곡을 불러 찬사를 얻기도 했다.
  또한 ABBA는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스웨덴의 국위 선양과 외화 획득에 공헌한 공으로 공로상을 받기도 했는데, 1971년 7월에 결혼한 아그네사와 비요른은 1979년 1월에 이혼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1978년 7월에 결혼한 프리다와 베니는 1981년에 이혼을 발표하여, 평소 자신들을 좋아하던 팬들을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그룹 활동은 계속하여 1980년에 「Super Trouper」란 앨범과 1981년에는 「The Visitors」 같은 앨범을 발표하여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스웨덴 국왕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다는 이들은 갖가지 사업에도 손을 뻗쳐 대재벌로 성장했다고 하는데, 아니 프리다 린지스타드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솔로 활동을 펼치면서, 아바의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다.

  [English Humor]
  A pretty student comes to a young professor's office. She closes his door and kneels pleadingly. "I would do anything to pass this exam."
  She gets closer to him, flips back her hair, gazes meaningfully into his eyes. "I mean." she whispers, "I would do anything!!!"
  He returns her gaze. "Anything?"
  "Yes, Anything!"
  His voice turns to a whisper. "Would you …… study?"

  [해석]
  예쁜 여학생 하나가 젊은 교수의 연구실에 왔다. 그녀는 문을 닫고서 사정하듯이 무릎을 꿇었다. “이 시험에 합격시켜 주시면 뭐든지 다 하겠어요.”
  여학생은 교수에게 더 다가가서 머리카락을 뒤로 흔들어 넘기며 그의 눈에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정말로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교수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정말 뭐든지 다 하겠나?”
  “네, 정말요.”
  이제 교수의 목소리도 속삭임으로 변했다. “그럼……공부나 하지 그래?”

  명시와 명문

  阿房宮賦(아방궁부)-杜牧(두목)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역

  六王畢(육왕필)하고: 육국이 망하고
  四海一(사해일)하니: 사해가 일통되었더라
  蜀山兀(촉산올)하고: 촉산이 독산(禿山) 되고
  阿房出(아방출)이라: 아방궁이 생겨나
  覆壓三百餘里(복압삼백여리)하여: 삼백여리에 늘어서서
  隔離天日(격리천일)하니라: 해를 가리더라
  驪山北構而西折(여산북구이서절)하여: 여산 북록에 축조되어 서으로 틀어
  直走咸陽(직주함양)하고: 함양으로 내달았으니
  二川溶溶(이천용용)하여: 두 강물이 도도히
  流入宮墻(유입궁장)이라: 궁장으로 흘러들더라

  五步一樓(오보일루)요: 다섯 보에 한 누(樓)요
  十步一閣(십보일각)이라: 열 보에 한 각(閣)이라
  廊腰縵廻(낭요만회)하고: 낭요는 굽이굽이 돌고
  簷牙高啄(첨아고탁)하며: 처마는 하늘을 향한 부리 같고
  各抱地勢(각포지세)하여: 각기 지형에 따라 섰으며
  鉤心鬪角(구심투각)하니: 갈고리 같은 옥심(屋心), 맞닿은 합각머리는
  盤盤焉(반반언)하며: 광대하면서도
  囷囷焉(균균언)하여: 구불구불하여
  蜂房水渦(봉방수와)이: 벌집과도 같고 소용돌이와도 같아서
  矗不知其幾千萬落(촉부지기기천만락)이로다: 우뚝 솟은 추녀의 낙숫물은 몇 천만 줄기인지 모를러라

  長橋臥波(장교와파)하니: 긴 다리가 물 위에 누웠으니
  未雲何龍(미운하룡)이며: 구름도 없는데 웬 용이며
  複道行空(복도행공)하니: 복도가 허공에 떴으니
  不霽何虹(부제하홍)가: 비 온 뒤도 아닌데 웬 무지개인가
  高低冥迷(고저명미)하여: 높으락낮으락 밝으락 어두우락하여
  不知選(부지서동)이라: 동서를 분간하지 못할러라
  歌臺暖響(가대난향)은: 가대의 간드러진 노랫소리
  春光融融(춘광융융)하고: 봄볕같이 융융(融融)하고
  舞殿冷袖(무전냉수)는: 무전(舞殿)의 서늘한 소매
  風雨凄凄(풍우처처)하여: 비바람같이 차가우니
  一日之內(일일지내)와: 하루 동안
  一宮之閒(일궁지간)에: 한 궁안에서도
  而氣候不齊(이기후부제)로다: 공기가 같지 않도다

  妃嬪媵嬙(비빈잉장)과: 비빈과 잉장
  王子皇孫(왕자황손)이: 왕자와 황손이
  辭樓下殿(사루하전)하여: 누(樓)에서 나오고 전(殿)에서 내려와
  輦來于秦(연래우진)하여: 연(輦)으로 진궁으로 모여 와서
  朝歌夜絃(조가야현)하여: 아침 노래 저녁 풍류로
  爲秦宮人(위진궁인)이로다: 진나라의 궁인이 되었도다
  明星熒熒(명성형형)은: 샛별이 형형함은
  開粧鏡也(개장경야)요: 장경(粧鏡)을 여는 까닭이요
  綠雲擾擾(녹운요요)는: 푸른 구름이 어지러이 읾은
  梳曉鬟也(소효환야)요: 새벽에 머리를 빗는 까닭이요
  渭流漲膩(위류창니)는: 위수에 기름기 넘침은
  棄脂水也(기지수야)요: 지분 씻은 물을 버리는 까닭이요
  煙斜霧橫(연사무횡)은: 연기 오르고 안개 낌은
  焚椒蘭也(분초란야)요: 초란을 사르는 까닭이요
  雷霆乍驚(뇌정사경)은: 뇌성 같은 소리에 놀람은
  宮車過也(궁차과야)인데: 궁의 수레 지나가는 까닭이니
  轆轆遠聽(녹록원청)에: 덜거덕거리는 소리 멀리 들려도
  杳不知其所之也(묘부지기소지야)로다: 아득하여 그 가는 곳을 모르겠도다
  一肌一容(일기일용)이: 살결과 얼굴빛 하나하나가
  盡態極姸(진태극연)하여: 교태와 연염(姸艶)을 극하여
  縵立遠視而望幸焉(만립원시이망행언)이로되: 하염없이 서서 거둥 기다리나
  有不得見者(유부득현자)가: 뵙지 못한 지
  三十六年(삼십육년)이라: 삼십육년이나 되었도다

  燕趙之收藏(연조지수장)과: 연나라와 조나라의 수장품(收藏品)과
  韓魏之經營(한위지경영)과: 한나라와 위나라의 조형물(造形物)과
  齊楚之精英(제초지정영)은: 제나라와 초나라의 보화는
  幾世幾年(기세기년)에: 몇 세대 몇 년을 두고
  取掠其人(취략기인)하여: 그들에게서 빼앗았던지
  倚疊如山(의첩여산)이라: 산더미같이 쌓였으되
  一旦有不能(일단유불능)하고: 하루 아침에 가질 수 없어서
  輸來其間(수래기간)하여: 그간에 실어 와서
  鼎鐺玉石(정쟁옥석)고: 보정(寶鼎)이 가마솥 같고 옥이 돌 같고
  金塊珠礫(금괴주력)을: 금덩이는 흙덩이 같이, 진주는 자갈같이
  棄擲邐迤(기척리이)하되: 버려졌는데
  秦人視之(진인시지)엔: 진나라의 궁인들이 그것을 보고도
  亦不甚惜(역불심석)이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도다
  嗟乎(차호)라: 아아
  一人之心(일인지심)은: 일인의 마음이
  千萬人之心也(천만인지심야)라: 천만인의 마음이라
  秦愛紛奢(진애분사)어든: 진왕이 호사를 좋아하니
  人亦念其家(인역염기가)어늘: 백성들도 자신의 살림살이만을 생각하거늘
  奈何取之(내하취지)를: 어찌하여 이를 취하기를
  盡錙銖(진치수)하고: 치수(錙銖)까지도 다하는가
  用之如泥沙(용지여니사)오: 쓰기를 진흙같이 하는가

  使負棟之柱(사부동지주)가: 마룻대 받친 기둥이
  多於南畝農夫(다어남무농부)며: 들판 농부의 수효보다 많으며
  架梁之椽(가량지연)이: 대들보에 걸린 서까래는
  多於機上之工女(다어기상지공녀)며: 베틀의 직녀보다 많으며
  釘頭磷磷(정두린린)이: 번쩍이는 못대가리는
  多於在庾之粟粒(다어재유지속립)이며: 곳간의 곡식 낟알보다 많으며
  瓦縫參差(와봉참치)가: 기와의 이음매 들쑥날쑥한 것이
  多於周身之帛縷(다어주신지백루)며: 몸에 두른 비단실보다 많으며
  直欄橫檻(직란횡함)이: 종횡의 난간은
  多於九土之城郭(다어구토지성곽)이며: 구주의 성곽보다 많으며
  管絃嘔啞(관현구아)가: 관현의 요란한 소리가
  多於市人之言語(다어시인지언어)라: 상인의 말소리보다 큰지라
  使天下之人(사천하지인)으로: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不敢言而敢怒(불감언이감노)하니: 말도 못 하고 화도 못 내게 하니
  獨夫之心(독부지심)이: 독부(獨夫)의 마음이
  日益驕固(일익교고)러라: 날로 교만해지더라
  戍卒叫(수졸규)에: 수졸이 절규하매
  函谷擧(함곡거)하고: 함곡관이 함락되고
  楚人一炬(초인일거)에: 초인의 횃불 하나에
  可憐焦土(가련초토)로다: 가련하게 초토가 되었도다

  嗚呼(오호)라: 오호라
  滅六國者(멸육국자)는: 육국을 멸한 것은
  六國也(육국야)요: 육국이요
  非秦也(비진야)며: 진나라가 아니며
  族秦者(족진자)는: 진나라를 족멸한 것은
  秦也(진야)요: 진나라요
  非天下也(비천하야)라: 천하가 아니로다
  嗟夫(차부)라: 슬프다
  使六國(사육국)으로: 육국이
  各愛其人(각애기인)인덴: 각각 그 국인을 사랑했더면
  則足以拒秦(즉족이거진)이오: 족히 진을 물리쳤을 것이요
  秦復愛六國之人(진부애육국지인)이면: 진이 다시 육국의 인민을 사랑했더면
  則遞三世(즉체삼세)하며: 삼세를 계승하여
  可至萬世而爲君(가지만세이위군)이니: 가히 만세까지 군왕이 되었으리니
  誰得而族滅也(수득이족멸야)리오: 누가 멸망시킬 수 있었으리요
  秦人不暇自哀而後人哀之(진인불가자애이후인애지)요: 진인이 스스로를 슬퍼하기도 전에 후인들이 그들을 슬퍼하도다
  後人哀之而不鑑之(후인애지이불감지)면: 후인이 슬퍼만 하고 거울삼지 않는다면
  亦使後人而復哀後人也(역사후인이부애후인야)리라: 후인이 다시 그 후인을 슬퍼하게 하리라

  서평

  군주론(니콜로 마키아벨리)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편집

  점토질의 사상가 마키아벨리
  사상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두 종류로 나뉜다. 크게 보아 각자의 사상과 이념이 비교적 명확히 정리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카를 마르크스를 두고 자유주의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존 로크에게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일 사람도 없다. 하지만 장 자크 루소는 민주주의자와 전체주의자의 양면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계몽 사상가이면서 낭만주의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이른바 사상적 가소성(可塑性)이 뛰어난 경우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사상이 아주 다양한 면모로, 때로는 완전히 상반되는 방향으로까지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뜻이다. 딱딱한 화강암이기보다는 무른 점토질의 사상가라고나 할까.
  사상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앞의 경우보다 뒤의 경우에 더 많은 매력을 느낀다. 어떻게 한 사람의 사상이 완전히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내적 모순처럼 보이는 바로 이러한 점이야말로 우리가 그 사람에게 끌리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어떤 사상가 또는 텍스트의 의도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사상이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용될 수 있는 강력한 성형력(成形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아마도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문필가이자 정치 사상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를 따라올 인물은 거의 없을 듯싶다. 사람들은 그에게 본질적으로 다른 수많은 이름들을 붙여 주었다. 한쪽에서 그를 가리켜 권모술수가, 냉혹한 정략가, ‘권력 국가’의 선구자, 심지어는 악마의 사도라고까지 폄하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근대 정치론의 창시자이자 세속적 역사관의 선각자라고 칭송한다. 그를 공화주의자라고 하는가 하면 군주제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 관한 제일 큰 아이러니는 비록 그가 ‘마키아벨리즘’의 창시자로 비난받아 왔지만 그의 처세를 보면 전혀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의 판세를 날카롭게 읽어 내는 현실주의자의 혜안을 지녔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 하나를 추스르는 데는 실패했던, 어떤 면에서 매우 이상주의적이면서 인간적이기도 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군주론』은 어떻게 씌여지게 됐나
  마키아벨리는 도미니쿠스 교단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급진 공화파 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1498년, 29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이어 당시 최고 권력 기관이던 10인위원회 서기국의 서기장도 겸하게 된다. 특히 그는 1502년 이후 종신직 곤팔로니에레가 된 피에로 소데리니의 신임을 받아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프랑스, 독일, 로마, 시에나, 로마냐 등지에 파견된다. 그는 또 시민군 조직의 입안 및 구성에도 깊이 관여한다. 『군주론(Il principe)』을 비롯한 이후의 저술은 바로 이러한 때에 겪은 다채로운 현실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함께 1512년 소데리니 정권이 몰락하고 메디치가가 복귀하자, 마키아벨리는 모든 관직에서 축출된다. 이어서 반(反)메디치 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에다 고문까지 당하게 되지만, 이듬해 3월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함에 따라 특사로 풀려난다. 그는 이후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의 작은 농장에서 원치 않는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 가장 쓰라렸던 바로 이 시기에 그의 명성을 높인 저작들이 쏟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군주론』을 필두로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논고』, 『만드라골라』, 『전쟁의 기술』, 『피렌체사(史)』 등이 이때 씌여진 주요 작품들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감옥에서 풀려나 농장에 틀어박힌 뒤 몇 달 사이의 짧은 기간에 씌어졌다. 이에 관련된 정황은 그가 1513년 12월 10일 지기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실 이 편지는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히는데, ‘모든 것을 잃은 뒤’ 마키아벨리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갔는지 그 인간적인 면모까지도 탁월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원래 대인(大人) 로렌초의 셋째 아들 줄리아노에게 바치려 했다가, 뒤에 마음을 바꾸어 대인 로렌초의 장손인 동명(同名)의 로렌초에게 헌정하였다. 그가 메디치가 군주들에게 이 책을 바치려 한 것은, 물론 자신을 다시 공직에 천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메디치가가 축출된 후의 공화정에서 봉직하고, 그들이 돌아온 뒤에는 반(反)메디치파로 몰려 투옥에다 고문까지 당한 그가 다시 그들에게 책을 바치는 행위가 기회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현재사에 대한 오랜 경험과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를 바탕으로 “치국론 연구에 바친 지난 15년간이 결코 잠과 놀이만으로 헛되이 보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겠다는, 정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메디치가에도 덕이 될 것이라는 계산과 함께. 그러나 그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군주론』은 얼핏 보면 군주국의 종류와 권력 유지의 방법에 대한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설명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논지를 잘 뜯어보면 그가 극히 교묘한 구성을 통해 자신의 논점을 알리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다. 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군주국만을 다루겠다고 말한다. 군주국은 다시 세습 군주국과 신생 군주국으로 나뉘지만, 앞의 경우는 대체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점은 뒤의 경우에 맞추어진다(제1, 2장). 그는 신생 군주국을 다시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과 종래의 세습 군주국에 병합된 경우, 즉 혼합 군주국으로 구분하면서, 제3장부터 제5장까지의 논의를 혼합 군주국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이다. 그는 제6장에서 이를 다시 “자신의 군대 및 비르투에 의해” 획득된 경우와 “다른 사람의 군대 및 포르투나(fortuna)에 의한” 경우로 나눈다. 비르투란 힘, 역량, 능력, 활력, 에너지, 용기, 과감성 등을 뜻하며, 포르투나는 비르투 영역 밖의 운 또는 어떤 비합리적인 힘을 의미한다. 신군주에게는 무엇이 더 바람직한 것일까? 물론 비르투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보다는 오히려 포르투나에 대해 논하겠다고 언명한다. 왜냐하면 현대 이탈리아 군주 중 자신의 군대 그리고 비르투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을 세운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의 군대와 포르투나에 의한 경우들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실례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이다(제7장).
  마키아벨리의 유형 구분론은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른다. 그는 제8장과 제9장에서 각각 “사악한 방법으로 군주국을 획득한 인물들”과 ‘시민 군주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시라쿠사의 유력 시민들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던 아가토클레스나 자신을 길러 준 외숙부를 죽이고 페르모를 장악한 올리베르토는 비르투에도 포르투나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무자비한 방법을 통해 군주가 된 경우이다. 하지만 이렇게 폭력에 의하지 않고도 다른 시민들의 도움으로 군주가 되는 길이 있다. 상층 유력 시민들의 야심을 적절히 제어하면서 평시민들의 호의에 기대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때 군주가 정체를 시민정에서 절대정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시민 군주의 힘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경고와 함께, 현명한 군주라면 “언제나 그리고 때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정부를 필요로 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는 조언까지 곁들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서두에서 A는 ‘A1이거나 A2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 뒤, 이 중에서 A1을 배제하고 다시 A2는 'B1이거나 B2이다'라는 명제로 나아간다. 그러고는 다시 B1을 배제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국가의 종류를 계속 세분해 나간 끝에, 결국 “다른 사람의 군대와 포르투나에 의해” 획득된 신생 군주국으로 논의를 귀결시킨다. 그러고는 이에 덧붙여 군주의 자리는 얻었지만 오직 무자비한 폭력에 의한 경우와, 시민들의 동의에 의한 경우를 대비한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논의 방식은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
  그는 여기서 메디치가 군주에게 그들이 처한 입장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12년 메디치가가 피렌체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군대와 비르투” 덕분이 아니라 에스파냐 군대의 침입 때문이었다. 정세 변화로 ‘신군주’의 입장에 놓인 메디치가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되 폭력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조언하는 마키아벨리. 메디치가 군주의 입지를 세워 주면서도 피렌체의 공화주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의 심중복안(腹案)이 아니었을까. 야만인들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하는 ‘영광’을 얻으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마지막 장인 제26장 역시 이에 호응하는 면이 있다.
  신군주가 사는 방법
  시대가 바뀌어도 『군주론』이 언제나 주목을 받았던 것은 통상적인 도덕률과 대비되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적 행위 윤리가 이 책 속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 그가 던지고 있는 문제는, “과연 신군주라면 자신의 정권과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신민과 이웃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제15장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로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와는 다르므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행해져야 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고집하는 군주는 자신의 국가를 유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선하게만 행동하려는 사람은 전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국 패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권력을 보존코자 하는 군주는 비록 선하지 않은 방법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쓸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현실 인식의 원리, 즉 현실주의가 이보다 더 극명하게 표현된 곳을 찾기는 힘들다. 그는 여기서 현실과 당위를 엄격히 구분하면서, 현실 그 자체를 정치 행위와 판단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군주론』 후반부의 장들(제16장~제23장)은 르네상스 도덕론자들이 제시한 전통적인 덕성 개념을 하나하나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통해 흔히 악덕으로 간주되어 온 행위들이 정치의 장에서는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써 신군주의 새로운 행위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군주는 신민에 대해 가혹하게 대해야 할까, 아니면 자비롭게 대해야 할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사랑을 받는 편이 좋을까?(제17장).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은 후자가 전통적인 도덕률이나 이른바 선군(善君)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도 그렇게 보았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주목한 것은 그러한 가치들의 외피가 아니라 그 본질이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보통 가혹하고 잔인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취한 엄격한 조치 덕분에 로마냐는 안정과 질서를 누릴 수 있었다. 비록 소수가 희생되더라도 과도한 방종이 국가 전체에 초래할 더 큰 해악을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비심이며, 따라서 신군주는 자신이 가혹하다는 평판에 전혀 개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마찬가지로 군주는 신민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낫다. 사랑이란 신민들이 군주에게 주는 것이므로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그들이다. 인간의 변덕을 감안할 때, 신민의 사랑에 기대는 군주는 언제 자신의 기반을 잃을지 모른다. 반면 두려움 또는 경외감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스스로의 통제권 아래에 있다. 군주가 신민으로부터 사랑도 받고 경외심도 불러일으킨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마키아벨리식의 가정이 깔려 있다. 군주의 신의란 그것이 스스로의 이익과 합치될 때 지킬 가치가 있으며, 상대방 역시 언제나 그것을 성실히 지키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선한 방법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방법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제18장의 언명도 바로 이러한 이기적 본성론에 근거한다. 군주가 여우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치에 표피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그 본질을 직시하여 “운명과 상황 변화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바람 부는 대로 자신의 행동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마키아벨리가 신군주에게 권하는 처세술의 핵심이다.
  『군주론』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군주론』을 읽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이 책 속에 압축되어 있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대해 한편으로는 날카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주장 속에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스스로의 자화상이 너무나 뚜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행위 윤리란 것은 결코 그가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다만 우리 모두의 행동이 공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관찰하여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일 성공하고자 하는 군주라면’이라는 가정 아래 그 관찰의 결실을 권고한 것이다.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추하기까지 한 얼굴과 대면하는 것,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군주론』은 다양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군주’는 현대의 정치 보스이며, 그에게 조언하는 모사는 현대의 마키아벨리다. 군주가 때로는 마피아의 두목으로, 때로는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로 얼굴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하여 유사 『군주론』이 계속해서 간행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다. 왜? 아마 마키아벨리가 관찰한 인간의 행위 방식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여우’가 아닌 척하면서도 사실은 모두가 ‘여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 준 냉혹한 리얼리즘의 메시지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와 도덕―또는 종교―이 서로 다른 가치 영역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사인(私人)으로서 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과연 공인(公人)으로서도 적절한 것인지를 물음으로써, 가치 판단에서 공사(公私)의 구분이 필요함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는 정치가 합리적인 계산과 통제를 필요로 하는 영역임을 가르쳐 주었다. 불확실성의 제거야말로 정치의 안정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라는 비유는 단지 권력 쟁취의 수단과 방법이라는 뜻에서보다 오히려 이러한 면에서 해석되어야 하겠다.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그에게서 부도덕하고 권력 추구의 면만을 너무 부각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전통적 도덕론자들이 흔히 범하는 지극히 표피적인 시각이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마키아벨리의 주장 속에 담긴 바로 이러한 면이 우리 스스로의 행위를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뛰어넘는 시발점이 아니던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현대에 던져 주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한 개인으로서, 때로는 한 집단으로서 스스로의 이기적 본성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자국·자민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국가·민족들과 공존하고 공영하는 길을 찾는 것이라는 점을 깨우쳐 주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것이 우리 자신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시시로 대면해야 하는 고통을 안겨 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축서사(鷲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673년(신라 문무왕 13년)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당시 인근 지림사(智林寺)의 주지가 산 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의상에게 알렸다. 의상이 그곳으로 가보니 비로자나불이 광채를 발하고 있어 그 자리에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지림사는 오늘날 수월암(水月庵)이라고 한다. 867년(경문왕 7)에 불사리 10과를 가져와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이후 참선 수행 도량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1705년(조선 숙종 31)에 중건하였는데, 당시 법당 등의 전각 6동과 광명루 및 승방 10여 동이 있었고, 암자로 도솔암과 천수암 등이 있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선실, 요사가 있으며, 유물로 보물 제995호인 봉화 축서사 석불 좌상부 광배(奉化鷲棲寺石佛坐像附光背)가 유명하다. 높이 108cm의 비로자나불인 이 석불은 창건 당시 의상이 봉안한 것으로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내에 삼층석탑과 석등도 있는데, 각각 경상 북도 문화재 자료 제157호,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 삼층 석탑에서 석탑 조성 명기(石塔造成銘記)에서 이 석탑이 867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단부 하대와 3층 옥신, 상륜 등은 소실되었다. 석등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곡성 함허정(유형문화재 제160호)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광양, 곡성 등 여러 고을의 훈도를 지낸 바 있는 당대의 문사 심광형(沈光亨)이 만년에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중종 38년(1543)에 건립한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민도리 소로 수장의 간결한 구조로, 삼면이 트인 마루 1칸, 방 2칸 반, 그리고 바닥을 한단 높인 쪽마루 반 칸의 평면 구성이다. 건물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며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고 멀리 무등산이 백리 광야에 우뚝 솟은 명승지로 자리잡고 있어 과거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부임하면 반드시 봄철에 향음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가까이에 심광형이 후학을 위하여 건립한 군지촌 정사(涒池村精舍, 중요 민속 자료 제155호)가 있어 당대 문사들의 수양처와 휴식처로 이용되었다.

  (3) 필암 서원(筆巖書院, 사적 제242호)
  이 서원은 조선 중종 35년(1540)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을 지낸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고암 양자징(梁子徵, 1523~1594)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선조 23년(1590) 김인후 선생의 고리에 세워졌다가 병화로 소실된 후 인조 2년(1624)에 재건되었으며, 현종 3년(1662)에 사액되고 현종 13년(1672)에 현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쓴 판액이 걸린 확연루(廓然樓)를 들어서면 강당인 청절당이 있는데, 여기에 윤봉구(尹鳳九) 선생이 쓴 「필암 서원」이란 편액이 달려 있다. 강당 뒤편에는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쓴 편액이 걸려 있는 동·서재가 있고, 서재 옆에는 인종의 어필 묵죽을 소장하고 있는 경장각(經藏閣)이 있다. 사당 북측 벽에는 김인후 선생을, 동측 벽에는 양자징 선생을 향사하고 있다. 또한 서원 동북측 담장 밖에 있는 장판각은 《하서집(荷棲集)》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노비보, 원장선생안, 집강안, 문계안 2건, 서재 유안서, 원적 4건, 봉심록 양자징명 축관계 품목등이 일괄로 보물 제587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 밖에도 하서 유묵 등 60여건의 중요한 서책이 보관되어 있다.

  (4) 태백 구문소 전기고생대 지층 및 하식지형(太白求門沼前期古生代地層 河蝕地形)
  2000년 4월 24일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되었다. 황지에서 시작된 낙동강 물길이 문곡을 거쳐 동점동에 이르러 산맥을 뚫고 지나가면서 높이 20∼30m, 너비 30m 정도 되는 커다란 석문(石門)을 만들고 있다. 마치 개선문 같기도 하고 커다란 무지개다리 같기도 한 이 석회 동굴을 자개문(子開門)이라 하고 그 아래 물이 고여 있는 깊은 소(沼)를 구문소(일명 구무소)라고 한다.
  흐르는 물의 오랜 침식 작용으로 석회암 산이 뚫려서 만들어진 이 석회 동굴은 세계적으로 그 유형을 찾기 힘든 특수한 지형이다. 커다란 지상 동굴 밑으로 강물이 흐르고 있어 “물이 능히 돌을 뚫는다(水能穿石)”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이 동굴은 주위의 기암 절벽과 폭포가 한데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루어 예부터 시인 묵객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약 1억 5000만 년에서 3억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구문소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천천(穿川)'으로 표기하고 낙동강의  근원으로 기록하였다. 원래는 사근다리 쪽으로 돌아 말거랑(마리거랑)으로 흐르던 강물이 언제부터인지 이 구멍으로 곧바로 흐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증명하듯 사근다리 쪽에 모래밭이 남아 있다. 하천 물길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구문소 일원에는 하부고생대 오르도비스기(4억 4천만∼5억년 전)의 막골층과 직운산층이 나타난다. 막골층에는 건열·물결흔·스트로마톨라이트·새눈구조·생교란구조·소금흔 등 하부 고생대의 퇴적 구조가 하천변을 따라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또한 막골층을 부정합(不整合)으로 싸고 있는 직운산층에는 삼엽충·완족류(腕足類)·두족류(頭足類) 등 다종의 화석이 관찰된다. 이러한 퇴적구조와 화석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간혹 나타나고 있으나 구문소 일대처럼 한 곳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드물다. 역시 오르도비스기 지층인 태백시 장성동(長省洞) 하부고생대 화석 산지 18만 7000여 ㎡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얕은 바다에 살던 삼엽충과 바다에 사는 무척추동물인 완족류 등의 화석이 많이 나오는 퇴적암층이다.
  두 지역은 한반도가 약 5억년 전 현재의 적도 부근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등 고생대 지구와 한반도 자연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5) 불영사(佛影寺)
  대한 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51년(진덕왕 5)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부근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므로 천축산이라 하고, 전면의 큰 못에 있는 아홉 마리 용을 주문으로 쫓아낸 후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서편에 부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그 그림자가 항상 못에 비치므로 불영사라 불렀다고 한다. 1397년(태조 6)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소운(小雲)이 중건하였는데, 그 후 다시 소실되어 1500년(연산군 6) 양성 법사(養性法師)가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모두 소실되었으나 응진전(應眞殿)만은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그 후 1609년(광해군 1) 진성 법사(眞性法師)가 재건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의 손으로 중수가 거듭되었다.
  현재 당우로는 대웅보전 ·근락전 ·응진전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관음전 ·영산전(靈山殿) ·황화당(黃華堂) ·설선당(說禪堂) ·범종루 ·응향각(凝香閣) ·칠령각(七靈閣) 등이 있고, 창건 당시의 유적인 무영탑(無影塔)과 돌거북 2기가 있다.

  (6) 청암사(靑巖寺)
  대한 불교 조계종 제8 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858년(헌안왕 2) 도선(道詵)이 창건하였고, 혜철(惠哲)이 머물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의룡 율사(義龍律師)가 중창하였고, 1647년(인조 25) 화재로 소실되자 벽암(碧巖)이 허정(虛靜)을 보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 4월 다시 불타자 환우(喚愚)와 대운(大運)이 20여년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7년(고종 34)경에 폐사되어 대중이 흩어졌으나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이어서 응운(應雲)이 보광전을 건립하다가 입적하자 대운(大雲)이 이를 받아서 완성하고 42수(手)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11년 9월에 다시 화재로 인하여 전각이 불타자 대운이 1912년 봄에 다시 당우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 북도 문화재 자료 제12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육화전(六和殿), 진영각(眞影閣), 정법루(正法樓), 일주문(一柱門), 사천왕문(四天王門), 비각(碑閣), 객사 등이 있고, 계곡 건너 100m 지점에는 극락전(極樂殿), 보광전(普光殿), 요사채 등이 있는 극락암(極樂庵)이 있다.
  이 중 육화전은 과거에 강원(講院)으로 이용되었던 건물이고, 정법루는 현재 종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약 6m의 석탑은 경상 북도 문화재 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층 석탑에 여래상이 양각되어 있으나 탑신이 4층이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절 입구의 부도군에는 벽암대사의 사리탑을 비롯하여 태감(泰鑑)·지성(智性) 등의 공덕비가 있다.
  또 일주문 안에는 사적비를 비롯하여 회당비각(晦堂碑閣)과 대운당(大雲堂)의 비각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로는 유명한 수도 도량인 수도암(修道庵)과 1905년에 비구니 유안(有安)이 창건한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7) 삼년산성(三年山城)
  사적 제235호. 지정면적 226,866㎡, 둘레 1,680m. 오정산(烏頂山)의 능선을 따라 문지(門址) 4개소, 옹성(甕城)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水口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 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조되었으며, 486년(소지왕 8)에 개축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는 삼년군(三年郡)·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井자 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쌓기, 한 켜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다. 석재는 대개 장방형이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아 13∼20m에 달하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다.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그 하중도 막대하며,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4중의 계단식으로 쌓았다.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안으로 흙을 다져서 쌓았고, 바깥쪽은 돌로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문지는 동서남북의 네 곳에 있으나 지형상 동문과 서문을 많이 이용한 듯하며, 그 너비는 대개 4.5m에 달한다. 수구는 지형상 가장 낮은 서쪽 방향으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동쪽에는 지상에서 약 1m 되는 성벽부분에 65×45㎝의 5각형 수문이 남아 있다.
  한편, 7곳의 옹성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하였다. 또한, 우물터는 아미지(蛾眉池)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곳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玉筆), 유사암(有似巖), 아미지 등의 글씨가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로 전한다.
  1980년 7월 22일 호우로 인하여 서문지 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유구(遺構)가 드러나 발굴한 결과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信枋石)과 주춧돌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성문은 신라의 상대(上代)와 하대(下代)에 축조되었는데 상대 문지의 문지방석(門地枋石)에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분석한 결과, 중심거리가 1.66m에 달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의 발굴 결과 삼국 시대에서 고려, 조선 시대까지의 토기 조각과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의 이용 편년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지로서, 신라는 이 지역의 확보를 토대로 삼국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김헌창(金憲昌)의 난 때 거점지로도 이용되었으며, 918년(태조 1) 왕건(王建)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이용된 기록이 있다.

  (8) 고성 덕명리 공룡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41호)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으나 1999년 9월 14일 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승격).
  덕명리의 해안 4㎞에 분포하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 발자국의 화석 산지이다.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로는 1982년 1월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곳이며, 경상층군 상부의 진동층에 해당된다. 약 110m 두께의 지층 가운데 공룡 발자국 화석은 328개의 층준에서 발견되며, 516개의 발자국열이 보인다. 이 가운데 4족 보행의 용각류 발자국은 102개 층준에서 120개의 발자국열을 보이며, 2족 보행의 발자국은 대부분 초식 공룡인 조각류이고 육식 공룡인 수각류 발자국은 전체의 약 3% 미만이다. 당시 덕명 초등학교 남쪽 약 500m 해안에 발달하는 관입 화성암 표면에는 용각류의 발자국 열이 발견되며, 이는 세계적으로도 초유이다. 보다 남쪽 남단부 해안 노두에는 소형 용각류 공룡과 도각류 공룡의 발자국과 새발자국이 함께 발견되어 퇴적 당시 생태 환경의 일부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상족 마을 남서편 해안의 노두에는 많은 공룡들이 집단으로 활동하여 만든 전형적인 공란 작용(恐亂作用)의 구조가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공룡 발자국 외에도 30여 층준에서 새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이들 새 발자국은 크게 두 종류인데, 하나는 함안의 한국 새 발자국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신종으로 기재한 김봉균의 진동 새 발자국이다. 이곳은 중생대 백악기 공룡 발자국 산지로는 양적으로나 다양성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며, 중생대 조류의 발자국 산지로는 단연 세계 최다의 산지이다. 이곳의 화석은 공룡의 생태와 퇴적 환경, 그리고 새의 진화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9) 전라 좌수영 진남관(全羅左水營鎭南館)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건물이 있는 자리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 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당시에는 진해루라는 누각이었다. 진해루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되자 1599년(선조 32) 삼도 수군 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李時言)이 전라 좌수영 건물로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진남관이라 이름 짓고 수군의 중심기지로 사용하였다. 후에는 역대 임금의 궐패(闕牌)를 봉안하고 군수가 망궐례를 올렸으며 국경일에는 군민들이 모여 봉도식(奉道式)을 거행하였다.
  1716년(숙종 42)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전라 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다시 건립하였다. 1910년(순종 4)부터 50여 년 동안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교실로도 사용되었다.
  정면 15칸, 측면 5칸, 건평 240평(약 780㎡)의 단층 팔작 지붕으로 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는 제일 크다. 높은 언덕 위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쌓은 기단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둘레 2.4m의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평면 전체가 통칸으로 뚫려 있고 벽체도 없으며 창호도 달지 않았다.
  처마는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의 양측 합각은 널빤지로 마무리하였고 추녀 네 귀는 활주로 떠받쳤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椽背天障]이다.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이 웅장해 보인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화려한 화반(花盤)을 받쳤는데, 주심포(柱心包)와 다포식(多包式)을 절충한 양식이다.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건물 내부 공간을 크게 하기 위해 동·서쪽 각각 둘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內陳柱)를 옮겨서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렸다.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 문양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건물이다.

  기행문

  향기로운 대화

배순선(본원 회원)

  2017년 첫 역사 기행은 동백꽃이 아름다운 여수라고 해서 더욱 기대도 되고 설렘이 가득했다. 몇 달 동안 뵙지 못한 문화원 가족들을 만나는 행복함과 역사와 문화에 소소한 유래를 가미하여 해설해 주셔서 새로운 것을 알아 감에 역사 기행이 더욱 값지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어 간다.
  매번 가장 잘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을 준비하기 위해 선곡에 고심을 거듭하시는 원장님의 가방 속은 각종 음악 CD로 가득히 채워진 것을 옆자리에 앉는 행운으로 알게 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한 일상 속에는 어떤 이의 사랑과 정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부탁을 받고 펜을 들은 이 순간이 부끄럽지만 기행문을 쓰다 보면 새로운 문구가 떠오르고 사고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에 도전을 해 본 것이다.
  진남관을 둘러본 뒤 봄 햇살 이마에 이고 식당을 향한다. 동행한 분들과 음식 이야기를 하며 맛있는 점심을 먹고 수산 시장을 둘러본다. 바다 내음이 물씬 코끝에 와 닿는다.
  늘 시간을 잘 지켜 주시는 회원님들 덕분에 일정에 무리 없이 오동도로 향하고 버스에서 내린 우리들은 둘씩 짝을 이루어서 방파제 길을 걷는다. 파란 하늘 위에 하이얀 구름이 솜사탕처럼 둥둥 떠 있고, 바다 내음이 봄 내음에 묻혀 기분이 사랄라~~.
  동행하는 사람들과 바다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지나는 동백 열차를 탄 아이들과 손을 마주 흔들기도 했다. 동백잎을 닮았다는 오동도에 도착하여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른다. 가족들, 연인들, 단체 관광객들이 어울린 작은 섬 오동도는 손님 맞이 축제를 하듯 광장 분수대가 물을 시원스레 뿜어 낸다.
  곳곳에 동백꽃이 피어 수줍은 듯 반긴다. 동백꽃의 꽃말은 “인내하는 기다림과 그대만을 바라보는 지극한 사랑”이라고 한다. 겨울을 이겨낸 아름다움이 꽃말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대나무 숲을 올라가다 돌아보니 파도소리가 시원스레 들리는 바다 전망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 자연과 숨결을 고르는 사이 봉사단장님은 날렵한 솜씨로 자연산 물미역을 따오셨다. 회원님들은 바다 맛이 짭짤한 미역을 음미하며 즐겁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 섬의 향취에 힐링이 되어 활짝 핀 회원님들의 얼굴은 오동도의 요정이 된 듯하다.
  오동도 등대에 오르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살펴보니 1952년 5월에 처음 불을 밝힌 후 2002년에 높이 27m의 백색 8각형 콘크리트 구조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8층 전망대에 올라 남해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오늘의 시제인 ‘한려수도’
  한: 한번은
  여 여수에 와서
  수: 수려한 오동도를
  도: 도보로 다닐 만하다
  즉석 사행시를 지은 아들과 담소를 나누며 기행을 함께 하니 더욱 좋다. 141차 역사 문화 기행이 있기까지 함께하신 모든 분들의 소중한 마음 나눔에 감사드리며 건강한 모습으로 앞으로의 인연에도 좋은 이웃으로 함께하길 바라본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봉화영주
강구연
  봉: 봉숭아꽃 물 묻히고 깔깔대던 시절이 지나
  화: 화려한 다홍빛 입술이 새초롬한 미소를 흘립니다.
  영: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날이 오고
  주: 주저 않고 옮긴 발걸음이 분에 넘치게 환영받아 행복합니다.

김명수
  봉: 봉 잡았다
  화: 화끈하게
  영: 영원히 영원히
  주: 주인공은 김명수 끼다.

박오희
  봉: 봉황이 안은 소나무 수려함이 하늘에 닿았고
  화: 화사한 벚나무는 솜사탕 같구나
  영: 영주의 외나무 다리 세월을 말해 주고
  주: 주막의 막걸리 맛 잊을 수가 없구나.

  시제: 곡성태안
정숙환
  곡: 곡조의 설명을 잘 해 주셔서 이해가 더 잘 되었구요
  성: 성은 동래 정가입니다
  태: 태안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 안경 낀 둘째딸 옥정이랑 개울에 발을 담그니 오장육부가 시원했습니다

김순애
  곡: 곡에 어울리는 가사를 짓고 싶었습니다.
  성: 성급한 판단이나 성공인 듯 합니다
  태: 태어나 처음 해 보는 작업이니
  안: 안 좋다는 말씀만 말아 주십시오
이석규
  곡: 곡성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성: 성도 이름도 밝히지 않고
  태: 태무심한 나에게 계란 두 개를 건넨 그분에게
  안: 안면과 숙면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하루도 없기를 간절히 빕니다.

김현준
  곡: 곡성이 끊이지 않던 폐허의 나라 사람들이
  성: 성장의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극빈국의 백성들이
  태: 태평양을 건너고 아시아를 넘어서  
  안: 안하무인으로 세계를 활보하게 된 동인은 과연 무엇일까

  시제: 장성백양
김경민
  장: 장맛이 좋다
  성: 성공적이다
  백: 백반에
  양: 양껏 비벼 먹어야겠다

김주리
  장: 장돌뱅이 같은 일상의 틀을 깨고
  성: 성지 순례와도 같은 문화 기행을 나섰더니
  백: 백도라지 향기라고나 할까
  양: 양쪽과 앞뒤 사람들이 점점 좋아짐은 무엇 때문일까

김현준
  장: 장래를 예측한다,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과연 가능한 일이일까요
  성: 성공을 보장하고 실패를 예방하는 것이 과연 인력으로 될까요
  백: 백대 후에도 천대 후에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양: 양기 음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아낌없이 써 버립시다

  시제: 태백삼척
장경희
  태: 태백이 몰캉한 손 잡고 문화원 역사 기행 참여했다
  백: 백문이 불여일견 와 봐야 좋은 줄 안다
  삼: 삼삼오오 손 잡고 낮에는 물길 찾고 밤에는 꿈길 찾으며
  척: 척척 손발이 잘 맞는 아름다운 기행이었다

김결희
  태: 태양이 작렬하는 8월의 덕풍 계곡에서
  백: 백 번의 손부채질보다 한 번의 발 담금이 시원하다
  삼: 삼삼오오 모여 앉아 행복한 추억의 시간을 만드니
  척: 척 봐도 서로가 마음이 통해서 즐거워 보이누나

  시제: 울진불영
김연화
  울: 울진에 오니
  진: 진짜 진짜 행복합니다
  불: 불철주야로 수고하시는 문화원 관계자 여러분
  영: 영원히 행복하셔요

장경희
  울: 울 엄마의 노랗게 여윈 호박잎 같은 손을 잡고
  진: 진짜로 함께 여행 많이 다니고 싶었는데
  불: 불귀의 객이 되신 지 올해로 어언 10년
  영: 영원히 부르지 못한 사모곡은  비문처럼 가슴에 새기네

김현준
  울: 울적한 심사 달랠 길 없어 동산에 올랐더니
  진: 진홍빛 석양이 무한히 좋은데
  불: 불과 수시간 내에 황혼이 내리리니
  영: 영원할 줄 알았던 젊은 날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네


  울: 울고 싶을 때 참는 것은 카타르시스의 쾌감을 모르는 이의 짓이고
  진: 진정할 필요가 없는 울분을 누르는 것은 황천길을 재촉하는 일이요
  불: 불같이 화를 내고 싶을 때는 내고
  영: 영영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폭언 하고 싶을 때는 하고 삽시다

  시제: 성주김천
김은영
  성: 성숙아
  주: 주성아
  김: 김은영 내가
  천: 천상 천하에 제일이란다

나혜진
  성: 성주의 가을은 아름답습니다
  주: 주황과 노랑으로 가득합니다
  김: 김밥 싸 들고 소풍 다니던 유년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여행을 떠나봅니다.
  천: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대가야의 여인임을 자랑합니다.

배순선
  성: 성큼성큼
  주: 주춤주춤 올라선 수도암
  김: 김처럼 피어 오르는 물안개
  천: 천상의 정경이다

김현준
  성: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지 잘 모르지만
  주: 주초를 즐기는 사람들 중에 는 악인이 별로 없고
  김: 김현준 주변에는 선남 선녀들만 있습니다
  천: 천형만 받은 줄 알았는데, 천조가 더 큰 듯합니다  

  시제: 정부인송
이은화
  정: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부: 부푼 가슴을 안고
  인: 인간미를 새삼 느끼며 문화원의 늦가을 답사를 떠나 보니
  송: 송구스러울 정도로 큰 행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인옥
  정: 정욱이랑 위경이랑
  부: 부쩍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인: 인옥이는 문화 기행 올 때마다
  송: 송이송이 추억도 쌓입니다

김창연
  정: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부: 부단히 노력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인: 인생살이 오늘 139차 문화 기행을 다녀오는 길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송: 송구 영신 49일 남은 한 해 또 저물어 가네요

박오희
  정: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부: 부족한 저였지만
  인: 인정 많은 분들의 정을 듬뿍 받았습니다
  송: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시제: 병신정유

김연화
  병: 병 나면 절대 안 됩니데이
  신: 신 나게 살아야 합니데이
  정: 정말로 정말로 정답게 살아야 합니데이
  유: 유머러스하고 유들유들하게 살아야 합니데이

김국식
  병: 병신년 한 해 끝자락에서
  신: 신 나는 여행을 하고 보니
  정: 정유년 새해에는
  유: 유독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습니다

김기자
  병: 병신년 마지막 달
  신: 신기하게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파도 노래 한 곡 불러 봅니다
  정: 정유년은
  유: 유리알같이 맑고 밝은 한 해가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석규
  병: 병신년(1956)의 최대 사건은 김현준 이사장이 문화원 설립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고
  신: 신축년(1961)의 최대 사건은 박정희 장군이 불순한 무리를 규합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고
  정: 정해년(2007)의 최대 사건은 젖먹이 같던 우리 장남 현창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유: 유신 이후 최대 사건은 이현동 선생이 문화원 해설팀장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김현준
  병: 병자호란의 참상을 잊을 수가 있을까요
  신: 신유박해와 기해교난의 비극을 잊어도 될까요
  정: 정녕 이런 사건을 잊는다면
  유: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제: 한려수도
신명예
  한: 한 사람이 그렇게 좋더냐
  여: 여러 식구들 좀 챙기지
  수: 수많은 국민들 울려 놓고
  도: 도무지 갈 곳도 반기는 이도 없는 불쌍한 인생아

이윤주
  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여: 여러분 우리 자주 만나서
  수: 수없이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도: 도화지에 그려 보아요

김창연
  한: 한가로이 거닐어 오동도를 돌아 나와
  여: 여수만이 굽이치는 한려수도 바라보니
  수: 수놓은 듯 동백꽃잎 바람결에 흩날리네
  도: 도가의 무릉도원이란 바로 이곳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

김창연
  한: 한 푼 두 푼 아껴 모아 우리 모두 저축하세
  여: 여기저기서 긁어 모아 희망신협에 저축하세
  수: 수도세도 전기세도 신협으로 납부하세
  도: 도시 가스 요금도 희망신협 기억하세

조경호
  한: 한 잔 술에 영취산 진달래가 취하고
  여: 여수 아름다운 물소리에 내 귀도 취하고
  수: 수줍게 핀 동백꽃에 섬들도 취해 버렸네
  도: 도대체 봄은 어디서 와 우리를 취하게 하나

이석규
  한: 한 사람을 만나서 인생이 역전하는 수가 있으니
  여: 여태후는 한고조를 만나서 여제와 같은 권력자가 되었고
  수: 수군 통제사 충무공은 선조 대왕을 만나서 인간학자가 되었으니
  도: 도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앞날인가 하노라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인을 좀 더 배려하고 편견 없는 사회가 되기를

  하태운(28세, 남, 뇌성마비 3급)

  인천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첫돌 무렵 소아황달로 인해 뇌성마비를 갖게 되었다. 두 다리는 많이 걸으면 피곤하고 걸을 때 팔자걸음으로 뒤뚱거리기는 하지만 혼자서 걷기에 큰 무리는 없는 정도이다. 그리고 오른쪽 팔은 불편이 없고, 왼쪽 팔이 상당히 불편하지만 물건을 드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다만 손으로 섬세한 작업을 하는 것은 어렵다. 글씨를 쓰는 데에도 별다른 불편은 없지만 빨리 쓰지는 못한다. 언어 장애가 약간은 있지만 다른 사람과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이다.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를 일반 학교에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쉬운 대로 인천에 있는 특수 학교에 입학시켰다. 지금은 일반 학교에도 특수 학급이 개설되고,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경우에 일반 학교에 다니는 장애 학생이 많이 있지만 내가 초등 학교에 입학하던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었고, 일반 학교에서는 장애 학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일반 학교 선생님들 역시 장애 학생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도 마음의 준비도 없었던 탓에 장애를 가진 자식을 일반 학교에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다닌 특수 학교는 지체 장애 학생과 뇌성 마비 학생, 정신 지체 학생들이 혼합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수업 과정은 대체로 일상 생활 훈련이나 사회 적응 훈련이 많았다. 매사에 대단히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을 지닌 어머니는 내가 일반 학교 학생들과 비교해 학업이 뒤지지 않도록 각종 학원에 열심히 데리고 다니셨다. 어머니 덕분에 나는 특수 학교에서의 수업만으로 부족했던 일반 과목 공부를 충실히 할 수 있었다.
  인천의 특수 학교에서 초등 과정을 마친 나는 경기도 안산의 특수 학교에서 중고등부 과정을 공부했다. 어머니의 보호 아래 순탄하게 생활했던 초등 학교 시절과는 달리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학교 생활은 편의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친구들도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애착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내가 무척이나 염려되셨는지 주말에는 안산까지 나를 데리러 오시곤 하셨다.
  다른 특수 학교에서 장애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비디오나 보여주고, 체조나 운동 등을 통해 일상 생활과 사회 적응 훈련에 치중하느라 일반 과목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비해 내가 6년을 다닌 안산의 특수 학교는 지체 장애 학생들이 많았고 지적으로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업 시간에 정규 과목을 충실히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많은 장애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원하는 공부를 계속하고 미래를 위한 희망을 가꾸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학생들의 리더로서 역할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갖고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고등 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 대학교 사회 복지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입학하던 2000년에는 학과별이 아닌 학부별로 학생을 모집하고 있어서 나는 사회 과학부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학부에 속한 학생들의 수는 많고, 전공이 정해지지 않아서 학과에 대한 소속감도 적었고, 경기도에 있는 특수 학교에서 멀리 대구까지 공부를 하러 오다 보니 아는 친구도 없어 첫 학교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한 학기를 마치고 나서 휴학을 하고 말았다.
  휴학을 하고 나서는 인천으로 올라와 집에서 쉬면서 운전 학원과 컴퓨터 학원에 다니기도 하고 읽고 싶었던 책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당초에는 한 학기만 휴학을 하려고 했었는데, 집안 사정도 있고 해서 두 학기를 쉬게 되었다.
  휴학 기간이 다 되어 다시 복학했지만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는 여전히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면서 학과 배정이 되고 선후배들과 함께 장애 인권 동아리 <레츠>의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여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교 내의 비장애 학생들에게 장애 학생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장애 학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학교 내에서의 어려움과 불편함, 제도적 개선의 필요성 들을 알리는 일들을 주로 진행했고, 학생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나서는 장애 학생들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는 각 건물의 시설 문제와 각 장애 영역별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각종 지원책의 마련 등을 학교측에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장애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고, 특수 교육과 사회 복지의 메카라고 자부하고 있는 대구 대학교 네에 여전히 장애인의 접근이 곤란한 건물과 시설이 상당수 존재하고, 청각 장애 학생이나 시각 장애 학생들이 학교측의 학습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개인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힘겹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애 학생들의 힘을 모아 비장애 학생들 사이의 소통을 확대하고, 장애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켜 내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조금씩 학생들의 인식이 개선되고 학교 내의 시설이 바뀌어 가고, 장애 학생들을 위한 학교측의 지원이 늘어 가는 것을 보며 많은 보람을 느꼈다.
  대학 시절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학측은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을 방원으로 배정하여 비장애 학생들이 장애 학생들을 도와주면서 기숙사 생활을 원만하게 해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방을 같이 사용하면서 장애 학생을 도와주는 비장애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같은 인센티브가 주어지지만 당시에는 장애 학생과 함께 방원이 된 비장애 학생들에게는 봉사 학점 2학점을 인정해 주는 정도의 인센티브만 주어지고 있었으므로 중증 장애 학생과 방을 같이 사용하는 비장애 학생의 경우 방 배정에 대한 불만도 많았고, 장애 학생과 한 방원이 된 비장애 학생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 간의 이해 부족으로 인한 사소한 갈등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였다.
  나는 장애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고 일상 생활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었으므로 함께 방을 사용하는 비장애 룸메이트의 도움이 없어도 학교 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룸메이트가 된 비장애 학생의 경우에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장애인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해서인지 수업이 없는 시간에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학교 밖으로 놀러 나갈 때에도 나는 함께 갔으면 하는 생각이 많았지만 나의 룸메이트는 언제나 나를 놓아두고 혼자서만 다니곤 하였다. 물론 나의 성격이 적극적이지 못하고 사교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룸메이트와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학교 측에서 장애 학생과 방을 같이 사용할 비장애 학생들에게 장애인의 삶과 생활, 장애 특성, 장애인과의 소통 방법 등에 관해 충분한 교육을 하고, 장애 학생들이게도 비장애 학생과의 공동 생활에 대한 교육 및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의 상호 이해와 소통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캠퍼스가 매우 넓고 언덕이 많아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힘이 많이 들었지만 나는 전동 휠체어나 전동 스쿠터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전동 스쿠터 등을 사용하다 보면 아무래도 걷는 일이 부족해져서 근육이 약해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이동하면서 학교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열심히 걸으면서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한 시간 수업을 마치고 다른 수업을 듣기 위해 다른 건물로 이동하는 일은 너무 힘이 들어서 수강 신청을 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한 건물 내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강의실 위치를 고려하여 과목을 신청하기도 했다. 강의실 배정과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하면서 수강 신청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지 못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학과 생활에 크게 만족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큰 미련은 없다.
  수업을 받을 때 다른 어려움은 없었지만 필기 속도가 느려서 교수님이 칠판에 쓰거나 강의를 하는 내용을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해 나중에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복사하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고 신경이 많이 쓰였다. 시험을 칠 때에는 교수님들이 내가 글씨를 쓰는 속도가 느린 것을 아시고는 시간은 충분히 주셨지만 대학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평가하면서 상대 평가 제도를 적용하여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을 직접 비교하여 평가를 하다 보니 장애 학생들은 대부분 비장애 학생들에 비해 낮은 학점을 받곤 했다. 장애 학생들의 장애 특성과 장애에 따른 시험의 난이도 등을 고려하여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많았지만 졸업을 할 때까지 상대 평가 제도는 바뀌지 않았다.
  학과 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나는 학교에서 개최하는 행사나 모임 등에는 별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보다 적극적으로 비장애 학생들과 사귀면서 학과 행사나 모임에 참여하고자 노력하지 못했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비장애 학생들 역시 장애 학생들을 은근히 따돌리고 비장애 학생들끼리만 어울리고자 하는 분위기가 많이 느껴졌기 때문에 비장애 학생들과 어울려 학과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같은 장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장애인의 인권 문제 등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일이 훨씬 더 좋았다.
  나는 대학에 진학할 때는 대학에 가면 미팅도 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면서 나름대로 멋있고 보람찬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러한 생각은 나의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미팅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친구들은 비록 장애가 있으면서도 비장애 학생들과 섞여 미팅도 가고 여러 모임도 가졌지만 나는 소심했던 탓에 내가 나서서 미팅을 하자고 하지도 못했고, 나에게는 함께 미팅에 가지 않겠느냐고 한 번도 물어보지 않는 학과 친구들에게 왜 나를 미팅에 참여시켜 주지 않느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학과 MT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첫날 밤에 선배들이 후배들을 모아 놓고 얼차려를 시키는데 나를 비롯한 장애 학생들은 얼차려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닌가. 선배들의 입장에서는 장애 학생들에게 얼차려를 시키는 것이 인간적이지 못한 일이고, 장애 학생들을 제외하는 것이 장애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장애 학생들에 대한 배려보다는 차별과 배제, 따돌림에 익숙해 있던 우리들은 선배들의 이러한 처사 역시 장애 학생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그들을 비장애 학생과 구분하여 다르게 대우하면서 장애 학생을 배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비장애 학생들이나 장애 학생들 모두 선배들로부터 얼차려를 받아야 할 만큼 잘못을 하지 않았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행하는 얼차려가 선후배들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적인 행사라고 한다면 장애 학생들도 당연히 그 일에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비장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선배들이 실시하는 얼차려를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얼차려에서 제외한 것은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을 구별하고 장애 학생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장애 학생을 배려하는 것은 그들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어떤 일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 학생과 장애 학생을 동일하게 대우하되 장애인이 하기에 곤란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본인의 의견을 들은 다음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당연히 선배들은 얼차려의 목적을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들에게 동일하게 설명하고 장애 학생들의 의사를 물어서 원하는 장애 학생들에게는 비장애 학생들과 똑같이 대우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군사 정부 시절에 시작된 얼차려가 아직도 대학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유대 강화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별과 차별은 없어야 한다.
  학과 내의 비장애 학생들은 비장애 학생들끼리 어울리고 장애 학생들은 장애 학생들끼리 어울리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나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비장애 학생들과의 어울림과 소통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폭넓은 대학 생활을 해 보려던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절감해야만 했다.
  대학 시절 내내 학과 생활은 나에게 큰 만족을 주지 못했지만 장애 학생들의 권익을 위한 동아리 활동은 큰 만족을 주었고, 나는 동아리 활동에 주력하면서 대학 졸업 후의 진로를 설계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친구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든가, 복지관에 취업을 한다든가 하면서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기도 했으나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사회에서 중증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관한 경험담을 접하면서 공무원이나 복지관 취직보다는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바탕 삼아 졸업 후에도 장에인의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인연을 맺게 된 장애인 야학에 교사로 계속해서 자원 봉사를 하면서 장애인 야학을 운영하는 장애인 단체에서 활동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 원룸의 임차료가 너무 비싸서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하려고 신청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혼자 살아가면서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어릴 때 판정받은 장애 등급이 3등급이어서 중증 장애인에게만 지원되는 활동 보조를 받을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일상 생활을 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으므로 현재 부족한 예산으로 혼자서 일상 생활을 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들에게 보다 많은 시간의 활동 보조가 지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소간의 어려움을 견디고 있다.
  그런데 한번은 필요한 서류를 떼러 구청에 갔더니 담당 직원이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왜 본인이 직접 왔느냐고 좋지 않은 인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혼자서 충분히 관공서 볼일을 볼 수 있고, 언어 장애도 심하지 않아서 의사 소통에도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아예 대면하지도 않으려고 하는 그 공무원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참고 필요한 서류를 요청했다. 나는 비록 장애를 가졌을망정 대학까지 졸업한 사람인데 공무원들이 장애인이면 관공서 볼일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장애인이 혼자서 관공서를 방문할 경우에 업무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고 생각하고 장애인들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태도는 많은 장애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장애인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장애인을 대하는 방법을 잘 익혀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면서 장애인에게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리고 나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장애인이나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활동한 경험을 가진 장애인이 아닌 보통의 재가 장애인들은 이처럼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공무원들 앞에서 얼마나 주눅들고 가슴 속의 상처가 깊어 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고 힘이 없는 장애인들의 권익과 복지 증진을 위해 나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요즘은 많이 무뎌졌지만 내가 팔자걸음으로 뒤뚱거리며 길을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의 쳐다보는 시선은 가슴을 많이 아프게 한다. 지나가는 할머니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젊은 사람이 안됐다는 말을 내가 다 듣도록 내뱉을 때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아이들을 시켜서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사탕이나 껌 따위를 나에게 건네줄 때마다 내가 구걸하는 사람도 아닌데 동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면서 한없이 우울하기도 했다.
  한번은 혼자서 길을 가고 있는데 어디서 ‘야’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더니 지나가는 학원 셔틀 버스에서 어린 꼬마가 나를 쳐다보면서 고함을 지르는 게 아닌가. 나는 화도 나고 어이가 없었지만 어린 꼬마 녀석에게 무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 녀석을 향해 주먹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돌아서 버리고 말았지만 우리 사회 비장애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의 벽 앞에서 한 번씩 겪게 되는 우울한 경험은 장애인들의 가슴이 깊은 상처를 남기고 의욕을 떨어뜨리게 된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고 하는데, 장애인에 대한 인권과 복지 수준, 그리고 시민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 수준은 선진국을 논하기에는 여전히 멀다는 생각이 든다.
  복잡한 도심을 걷거나 지하철 역을 지날 때, 그리고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 보면 비장애인들이 어깨를 치면서 지나가는 일이 많다. 사람들 중에는 내가 걸어가고 있으면 나를 피해서 가는 경우도 많지만, 복잡하고 바쁘다고 앞서 가려고 내 몸을 치고 지나가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얼마전에는 대형 마트에 쇼핑을 하러 갔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비장애인이 나를 밀치고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오르는 바람에 넘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움직이는 기계이므로 장애인이 넘어지면 중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손잡이를 잡고 걸음을 옮기면서 매우 조심을 한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하더라도 비장애인들이 내 몸을 치면서까지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고 한다면 나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고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어져 간다고는 하지만 위험한 에스컬레이터에서나 계단에서만큼은 다른 사람, 특히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을 배려하여 좀 천천히 움직이고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성숙된 시민 의식이 아쉽다.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전단을 나누어 주곤 하는데, 교회 사람들이 전도용 전단을 나누어 줄 때는 매번 나에게도 건네주는데 보험 상품이나 자동차 등 상품을 광고하는 전단은 언제나 나는 빼놓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준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여겼으나 종종 그런 일을 겪게 되자 나는 비장애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이 정도로 심하구나 하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 교회 사람들이 전도하려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겠지만 특별히 장애인들에게는 반드시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장애인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이 유쾌하지는 않았는데, 상품 광고지의 경우 장애인이 구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면서도 장애인들에게는 애써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 가슴은 한없이 쓸쓸했다.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특정 상품에 대한 구매력을 가질 수도 있고, 상품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면 없었던 구매 욕구가 생기기도 하는데 장애인이라면 아-예 구매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광고지조차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기야 장애인이라고 하면 보험 가입을 원천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우리나라 보험 회사들이 애써 장애인들에게 보험 상품을 소개하는 전단을 나누어 주는 것은 낭비일지 모른다. 그리고 아예 운전을 할 수 없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자동차를 소개하는 것 역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전과 각종 보조 기기의 개발은 두 손이 없는 장애인도 충분히 운전을 할 수 있고, 나 역시 한 손만으로 운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았으며, 시각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가족들이 운전을 하면서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에게는 아예 이야기조차 하지 않으려는 비장애인들의 이러한 선입견은 우리 사회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높은 장애물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 목발을 사용하는 친구와 함께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내려오는데 계단을 두세 단 정도 내려왔을 때 뒤에서 내려오던 비장애인 한 사람이 우리가 내려가는 속도가 늦다고 불평을 하더니 나와 친구가 내려가고 있는 옆을 지나 앞서 내려가면서 친구의 어깨를 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사람의 힘에 밀리면서 친구는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 친구는 크게 다치치는 않았지만 타박상을 입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친구를 부축해 일으키고 나서 그냥 달아나려는 그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항의를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잘못하여 장애인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들이 앞을 가로막아서 자신의 가는 길을 방해했다고 큰 소리를 내면서 나를 때리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의 중재와 도움으로 우리들의 싸움은 거기서 그쳤지만 나와 친구는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와 비장애인의 무례 앞에서 또 한 번 장애인으로서의 서글픈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지하철 노선이 없는 곳으로 볼일을 보러 갈 때면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버스를 이용하는 것은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소 걸음이 느리기는 하지만 혼자서 걷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버스를 타려고 하면 기사들은 내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어색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해서인지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한번은 버스를 탔다가 중심을 잡지 못해 버스 안에서 넘어진 일이 있었다. 버스 기사는 넘어진 나를 향해 화를 내면서 장애인이 혼자서 버스를 탔느냐느니, 택시를 타지 왜 버스를 탔느냐는 둥 온갖 화풀이를 해댔다. 승객이 버스 안에서 넘어져 다치게 되면 버스 기사들이 문책을 당하기 때문에 승객들의 안전에 신경이 예민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장애인이 버스를 탔고, 장애인이 안전하게 좌석에 앉은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버스를 출발시켜 내가 넘어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나무라는 기사의 태도는 실로 적반하장이었다.
  나는 다리가 다소 불편하고 걸을 때마다 팔자걸음으로 뒤뚱거리고 때문에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균형을 잡고 이동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버스를 탈 때마다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날은 내가 제대로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버스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넘어졌던 것인데, 기사는 내가 다치지 않았는지, 자신이 너무 급하게 차를 몰아서 나를 넘어뜨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보다는 장애인이 혼자서 버스를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는 생각만으로 나에게 화를 내면서 모든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나는 화도 나고 넘어져 부딪힌 자리가 아파서 고통스러웠지만 기사에게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아픈 몸을 추스르기 바빴다. 주변 승객들의 도움으로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좀 더 약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 너그러워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동안 창밖만 응시했다.
  나는 현재 하고 있는 장애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들의 교육을 위해 장애인 야학에서의 봉사 활동을 계속 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사진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많다. 그동안 장애인을 위한 디지털 카메라 교육에도 참여해 보았고, 작품성 있는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면서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려는 생각을 키워 왔다. 아직은 카메라도 없고 시간도 별로 없어서 사진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걸음을 내딛지는 못했지만 조만간에 돈이 좀 모이면 좋은 카메라도 하나 사고 사진 전시회도 다니면서 사진 공부를 착실하게 해 볼 생각이다. 그래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중증 장애인들의 진솔한 삶과 아름다운 꿈들을 담아 내고 싶다.

  생활 수필

  외갓집

  황진희(본원 회원)

  어머니께서는 가끔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를 떠올리시며 집의 소중함을 이야기하시곤 합니다. 외갓집은 경상북도에서도 골짜기인 예천의 작은 면소재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기와집에 얽힌 웃지 못할 이야기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먼저 소개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환갑을 앞두고 서울에서 나름대로 작은 기업체를 경영하시며 또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꾀나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신 막내 외삼촌이십니다. 항상 근엄한 표정을 짓고 계시지만 카리스마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작은 키에 가운데 머리숱이 많이 모자라는 관계로 항상 옆머리를 빌려와야만이 헤어스타일의 완성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막내 외삼촌이십니다. 여러분도 조금은 눈치를 채셨겠지요? 요즘 아이들 말로 저질 유전자만을 받고 태어난 운 나쁜 사나이로 태어난 외삼촌은 7남매 중의 막내이십니다. 그런 외삼촌의 어린 시절의 사건 하나를 펼쳐 볼까 합니다.
  태어났을 때 이미 돌이 지난 조카가 하나 있었고, 돌이 되기가 무섭게 또 한 조카를 보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스 기질이 다분했던 외삼촌은 두 조카를 친구 겸 부하삼아 데리고 다니며 대장질을 하셨습니다. 마을을 무대로 말썽을 일삼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초겨울날이었습니다. 그 때 외삼촌 나이 겨우 9섯 살이었습니다. 여섯 살배기, 네 살배기 조카와 함께 놀다가 집으로 왔지만, 집에는 아무도 반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작은 조카가
“삼촌아! 춥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촌으로서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며 “기다리 바라. 이 삼촌이 뜨뜻하게 해 주꾸마!” 하며 부엌으로 향한 꼬맹이는 부뚜막에 놓여 있는 성냥통을 들고 미소까지 지으며 나옵니다. 그리곤 성냥을 하나씩 꺼내 그어서는 마당 가에 쌓아 둔 나뭇더미를 향해 마구 던집니다.
  그러던 중! 성냥 하나가 불씨를 살리며, 순식간에 시골 마당은 마치 캠프파이어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큰조카는 불을 향해 무엇인가를 집어 던져 넣으며 동생과 삼촌을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조금만 있어 바라. 내가 맛있는 거 주꾸마.” 그렇습니다. 배가 고팠던 큰조카는 어느 틈에 한 바가지의 감자와 고구마를 준비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건조된 나무와 적당한 바람은 불을 나뭇더미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초가집의 지붕으로 옮겨 붙어 활활 타기 시작했습니다. 세 명의 꼬맹이들은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추위고 배고픔이고 모두 잊은 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집에서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멀리서 광경을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이미 집은 잿더미로 변한 뒤였습니다. 초가집인지라 불길을 잡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대가족들은 이웃집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답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기가 무섭게 외할아버지께서는 집을 지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작은 집일지라도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크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른 결과, 따뜻한 어느 봄날. 새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넓고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온 가족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그날 이사를 마치고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막내아들 덕분에 기와집에서 다 살아보는구나!” 하셨습니다.
  그때 지어진 집은 그 후 50년 가까이 외갓집 식구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오다가 지난 가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꽃빗자루

  정연원(본원 원장)

  연초록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계절의 여왕이 펼치는 화려한 대관식이다.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고 싶다면 태안사로 오세요.’란 안내문을 보고 대구 시각 장애인 문화원 134차 역사 문화 기행 장소를 전남 곡성 태안사로 정했다. 주차장에서 양해를 얻어 능파각까지 약 2km를 버스로 이동하였다. 아름답고 수량이 풍부한 계곡, 아름드리 나무가 이룬 아침나절 숲의 손짓에 정신을 빼앗길 것 같았다.
  계곡을 가로지른 능파각(凌波閣)에 앉았다. 지붕이 있고 양 옆에 걸터앉을 수 있다. 처음 만난 교량과 각(閣)이 합쳐진 형상이다. 근세의 유명한 선사 한 분이 이곳에서 기연(奇緣)을 얻어 오도송(悟道頌)을 게송한 곳이기도 하다. 능파각에 앉아 해설을 들었다. 신라의 구산 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동리산문(桐裏山門),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개산조(開山祖)는 적인 혜철 국사(785~851), 1200여 년을 이어 온 몇 안 되는 참선 도량 고찰이다.
  부도탑과 비림(碑林)을 지나 대웅전 뜰에 다다랐다. 정성들여 쓴 빗자루 자국이 나를 일깨운다. 이 큰 마당을 눈에 띄게 비질을 한 사람은 보통 정성과 보시행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10여 년 전 실명 직전에 마음 공부를 위해 도봉산 광륜사(光輪寺)에 머무를 때였다. 며칠 동안 마당을 쓰는 스님을 살펴보았다. 마당은 밖에서 안으로 쓸어 모으고 길은 양쪽에서 가운데로 모아 쓰레기를 처리하고 있었다. 스님에게 ‘마당 쓰는 방법이 왜 다릅니까?’ 하고 물었다. 스님이 빗자루를 잠시 멈추고 ‘우스갯소리로 마당을 밖으로 쓸어 내면 복이 나간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수행처인데 밖의 나쁜 기운을 안으로 모으고 모아 정화해야 안 되겠습니까?’ 오히려 질문을 한다. 당연한 일인데 당연하지 않았다. 이어서 ‘쓰레기를 안으로 가운데로 모으는 것은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입니다.’ 또한 ‘양손을 합장하여 자신을 낮추고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을 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결국은 ‘부처님의 대자 대비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수행심의 실천입니다.’라며 빙그레 웃는다.
  마음 공부는 이론과 형식보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자비심을 놓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는 깨침을 얻었다. 그 후부터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좇았다. 지성인(知性人)이 삼가야 할 일은 멀리하였다. 방석에 앉아 결가부좌하고 참선하기보다 시간 나는 대로 걷는 행선(行禪)을 많이 해 왔다. 눈의 굴절률이 제로인 시력에도 지팡이 없이 혼자 걸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걷기 수행 덕분이다. 덤으로 녹음 도서 독서의 집중력도 높아져 풍족해진 마음 농사의 수확도 얻게 되었다.
  콩기름을 먹여 반질반질한 장판에 깨끗한 벽지와 보료, 민화 병풍을 친 할머니의 방에 곱고 예쁜 꽃빗자루가 걸려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 옷에 먼지와 흙을 묻혀 오면 할머니는 옷을 털어 주고 꽃비를 내려 깨끗이 쓸고 닦는다. 아무리 어질러도 할머니 방은 언제나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요술은 아니다. 할머니는 꽃비를 걸어만 두지 않았고 자주 사용하였다. 할머니의 꽃비는 때로는 회초리 역할도 하였지만 어머니보다는 아프지 않았다. 꽃비는 어릴 때부터 청결과 고귀한 기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꽃비를 보면 서책을 읽고 재미나는 이야기와 유익한 말씀을 들려주던 인자한 할머니. 학처럼 고고하고 단아한 할머니 모습이 옷매무새를 살피는 나의 모습과 함께한다.
  비질을 할 때는 비 끝을 들지 말라고 하였지만, 하기 싫어서 일부러 비 끝을 들어 먼지만 훌훌 날리기도 했었다. 철이 들어 낙엽이 지는 늦가을에 빗자루로 마당을 쓸 때면 서리 내린 아침에도 땀이 난다. 비질은 허리에 무리가 가는 힘든 일이다. 힘들뿐만 아니라 정성과 인내력을 키우는 훈련과 수행과도 같다.
  지금은 빗자루가 일상 생활에서 퇴출되어 거의 볼 수 없다. 자신의 빗자루도 성실하고 청결한 역할을 청소기에 맡긴 지 오래다. 이름뿐인 빗자루처럼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있고 탐욕과 이기심으로 꽉 막혀 있다. 스님의 비질과 할머니 방의 꽃비가 새로워진다.
  태안사에서 내려오는 숲길은 아침보다 더 짙어진 연초록 세상이 유혹한다. 계곡의 물소리, 연초록 잎을 애무하는 바람결, 춘정(春情)이 넘치는 지저귐, 뿜어내는 연둣빛 향기와 어우러진다. 청명한 봄의 교향악이 꽃빗자루 되어 무심해진 마음마저 깨끗하게 쓸어 준다.


  문화원 소식

  1월8일 대구 시립 교향악단 제421회 정기연주회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과 ‘교향곡4번’클래식 음악 연주를 관람하였습니다.
  1월14일 문화원 정기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2월19일 대구 시립 교향악단 제422회 정기 연주회 생의 고통을 딛고 수많은 걸작을 남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제3번‘에로이카’ 연주를 관람하였습니다.
  3월12일 제132차 역사 문화 기행 전라 남도 담양-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삼지천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서 만든 소쇄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원림으로 아늑한 선비 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월18일 대구 시립 교향악단 제423회 정기 연주회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탄생 110년 기념 연주회 ‘교향곡5번, 첼로협주곡 제1번’ 연주를 관람하였습니다.
  3월24일, 3월31일  성영헌 선생의 ‘베토벤의 삶과 음악’ 클래식 인문학강의가 있었습니다.
  4월~6월 이태호박사의 <동양 철학을 통한 명상(노자 도덕경, 공자 논어)>, <서양 철학을 통한 명상(플라톤 대화편, 칸드 실천이성비판)>,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내사고의 틀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행복한 사고의 틀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4월9일 제133차 역사 문화 기행 경북 봉화-영주 축서사, 도성암, 바래미 마을, 무섬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5월2일 대구 시립 교향악단 제424회 정기연주회 화려한 관현악법과 강렬한 피아니즘의 무대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대표작 셰에라자드’연주를 관람하였습니다.
  6월10일 대구 시립 교향악단 제425회 정기연주회 상임지휘자 줄리안 코바체프의 지휘로 모차르트‘프리메이슨 장송곡’과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연주를 관람하였습니다.
  6월11일 제134차 역사 문화 기행 전남 곡성–군지촌 정사, 함허정, 태안사, 섬진강 문화 학교를 다녀왔습니다.
  7월9일 제135차 전남 장성의 백양사, 필암 서원, 홍길동테마파크. 700년된 갈참나무에 감탄하고 백양사 입구 쌍계루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어 연못에 어른거리는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다웠습니다.
  7월15일 대구 시립 교향악단 제426회 정기 연주회 지휘자 정치용, 한가야의 피아노 독주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교향곡 제2번’ 서정성이 짙어 브람스다운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한가야의 열정적인 피아노 독주를 관람하였습니다.
  8월13일~14일 제136차 역사 문화 기행은 강원도 태백의 구문소, 황지연못, 검룡소, 삼척 너와 마을, 덕풍 계곡, 봉화 만산 고택, 한수정을 다녀왔습니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연못. 그 곳에서 솟아나오는 메마르지 않는 샘물이 우리들에게 온다는 게 고맙고 자연을 잘 보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지인 강원도 삼척의 너와 마을의 밤은 청량함과 신선함 그리고 함께할 수 있어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8월26일 <뉴 사운드 오브 대구 2016>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젊은 작곡가들의 무대 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8월31일~11월23일 제13기 시각 장애인을 위한 도서 낭독 아카데미를 12주 과정으로 개설하였습니다.
  9월1일~29일 이태호박사의 <즐거운 삶을 방해하는 요소는 진실로 무엇인가?>, <즐거운 삶의 방해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즐거운 삶의 요소는 진실로 무엇인가?>, <즐거운 삶의 요소를 증가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9월9일 대구 시립 교향악단 제427회 정기연주회 슈베르트 ‘교향곡 제5번’,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사랑의 죽음’, ‘발키리의 기행’의 거침없는 팀파니의 연주가 인상적이었습니다.
  9월10일 제137차 역사 문화 기행 경북 울진-울진 봉평 신라비, 불영사, 망양 해수욕장, 해월헌을 다녀왔습니다.
  10월25일 인평서당 임성식 훈장님의 한문 강좌가 2007년 3월에 개강하여 만 10년간 수업으로 종강하였습니다. 임성식 훈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0월8일 제138차 역사 문화 기행 경북 김천–무흘구곡, 수도암, 인현왕후길, 청암사를 다녀왔습니다. 해발 천삼백여미터의 수도암은 안개가 자욱하니 몽한적인 분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11월3일 윤일현선생의 ‘시지프스의 형벌’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11월10일~12월1일 성영헌 선생의 ‘모짜르트, 베토벤, 쇼팽의 클래식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11월12일 제139차 역사 문화 기행 충북 보은–선병국가옥, 정부인송, 속리산 법주사, 정이품송, 삼년산성을 다녀왔습니다.
  12월8일 대금 연주자 여병동 선생의 ‘국악의 장단’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소고로 국악의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시간을 보냈습니다.
  12월10일 140차 역사 문화 기행 경남 고성–상족암, 소을비포성지, 학동마을, 문수암을 다녀왔습니다.
  12월22일 문화원의 송년 행사는 대금 연주와 청아한 오카리나 소리가 가슴을 적시며 한 해를 되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본 문화원을 도와 주신 분들 (2016. 1.~2017. 3.)
  강대성, 강말술, 고수환, 고윤자, 권태옥, 권호종, 기미향, 김경화, 김경흠, 김대석, 김동억, 김동현, 김동환, 김명한, 김미영, 김병구, 김수희, 김순선, 김숙희, 김영대, 김영숙, 김완주, 김유리, 김은철, 김인순, 김재룡, 김종회, 김진도, 김진섭, 김창연, 김칠봉, 김태영, 김태자, 김한숙, 김현기, 김형덕, 도제헌, 마원민, 마인섭, 맹영숙, 문학배, 민효순, 박기석, 박동열, 박순정, 박영섭, 박영숙, 박정, 박추자, 박현철, 박홍삼, 박희숙, 반용음, 배경애, 배세달, 배순선, 배칠봉, 백기종, 변기식, 서관수, 석종희, 성영헌, 손명란, 손영숙, 손은성, 손일원, 손중성, 손춘수, 손해룡, 송미라, 송주영, 송준관, 신윤, 신봉기, 신창호, 심경옥, 안승철, 안홍문, 양진모, 여길화, 여병동, 윤일현, 윤정석, 윤준학, 이경숙, 이경재, 이근갑, 이민영, 이삼승, 이석규, 이성율, 이성환, 이수영, 이영수, 이우녕, 이위경, 이윤하, 이일우, 이재민, 이제상, 이종순, 이준호, 이진우, 이창훈, 이태백, 이태성, 이태호, 이효경, 이현호, 임성식, 임진수, 장경희, 장유리, 전평준, 정갑태, 정선균, 정정의, 정연원, 정종규, 정해관, 조경호, 조영우, 조한용, 조해정, 최동철, 최성재, 허지원, 현재만
  교보생명성서지점,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대구노인복지회,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달서지회,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동구지회,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북구지회,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중구지회,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수성구지회, 대구북성신협, 대구시각장애인복지관, 대구점자도서관, 대구희망신협, ㈜평화발레오, 청운신협, 코오롱떡집, 킴스나비자선바자회, 하나우리회계법인, 한길로타리클럽
  -후원해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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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7년 7월 1일
발행인․김현준
제작․정연원
편집․김창연
교열․이석규
디자인․기미향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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