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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호(통권39호)
계간
  시각과 문화
  2019년 가을호 (통권 39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내 혈압이 오른 까닭 _ 이석규

  Pops English
  Green Green Grass Of Home - Tom Jones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계녀가 _ 이석규 편집

  서평
  서경 _ 이석규 편집

  우리가 답사한 유적

  기행문
  봉화의 닭실 마을과 청량사를 다녀와서 _ 이창훈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 극복기
  시각장애인도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고 싶다 _ 김병철

  생활 수필
  붉은 바위(홍바우) _ 김진섭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내 혈압이 오른 까닭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7, 8년 전에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내가 고혈압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나 재검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 후 혈압은 오르기만 하고 내릴 줄을 몰랐다. 몇 년 전에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더는 버티지 못하고 혈압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안 무엇 때문에 혈압이 상승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만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물론, 맵고 짠 음식을 즐기는 식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또한 버릴 생각도 없기는 하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 같은 식습관으로 아흔이 넘도록 사셨지만 검진을 받을 때마다 혈압은 정상으로 나왔고, 어머니 역시 나와 같은 식습관으로 아흔 넘게 살고 계시지만 고혈압 판정을 받은 적이 없고, 우리 형제들도 이러한 식습관을 고수하고 있지만 혈압이 나처럼 오르지는 않고 있다. 이로 보건대 내 혈압 상승의 원인이 식습관에만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내 혈압 상승의 원인은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언어폭력 행사자들, 즉 비정상적인 언어 사용자들 때문인 듯하다. 욕설이나 비속어뿐만 아니라 지위나 신분이나 학력에 맞지 않는 언어 역시 불쾌감을 주는데, 지속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언어는 폭력이 된다. 욕인 줄 모르고 하는 욕도 자꾸 들으면 불쾌하듯이 무지해서 잘못된 말인 줄 모르고 쓰는 잘못된 말도 계속 들으면 불쾌감이 쌓이게 되고, 이러한 불쾌감이 누적되면 병이 된다. 나를 고혈압 환자로 만든 사람들, 즉 언어 폭력배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가 된다. 물론, 한 사람이 한 부류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부류에 속할 수밖에 없다.
   첫째, 억측한 말의 의미를 확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입추 다음 절기인 처서를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절기”로 설명하는 글을 흔히 볼 수 있다. 처서를 이렇게 풀이하는 사람들이 괄호 안에 한자 ‘處暑’를 병기하기는 하지만 이 한자의 의미는 단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선배들이나 다른 무지렁이들이 풀이해 놓은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할 뿐이다.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하면서도 그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나 사전에 있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가져다 쓸 뿐, 그 자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처서가 ‘더위가 물러감’의 의미라고 들었거나 보았거나 생각되었더라도 한 번쯤은 정말 그러한 의미일까 하고 의심하고 자전에서 ‘處’자의 의미를 확인해 볼 만도 하건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짐작한 것으로 시청자들이나 독자들에게 설명을 하고도 불안함이나 미진함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줄을 모른다. 이런 자들이 해마다 말 안 되는 설명을 설명이랍시고 해 대니 수축기고 이완기고 정상에서 이탈할 줄을 모르던 내 혈압은 더는 참지 못하고 상승을 개시하였다.
  둘째, 단어를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사업에 필요한 재무, 법무, 마케팅, 홍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문을 해 준다.”와 같은 문구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자문(諮問)’은 ‘질문’과 같은 의미인데, ‘조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문위원이라는 말을 듣거나 자문료라는 것을 받는 사람들이 전국에 수만 명은 될 터인데, 각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태연히 이런 바보 같은 말을 쓰면서 식자연하는 것을 보고 내 혈압이 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셋째, 중복 표현, 즉 의미 중복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사월 초파일을 ‘석가 탄일’이나 ‘석가 탄신’이라고 하면 될 것인데, 많은 달력에서 이 날을 ‘석가 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고 똑같은 의미인 ‘辰’과 ‘日’을 겹쳐서 적고 있다. 이것은 ‘할머니 생신’을 ‘할머니 생신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팔만대장경을 국역하고 동남아시아에서 고대 인도어로 된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온 사람들의 눈에도 이 바보 같은 단어는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은 내 혈압을 올리지는 않는다.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현재의 상용 단어가 보이지 않는 눈에 어찌 한역 불전이 제대로 보이며 팔리어 불경이 들어오겠는가.
  넷째, 비논리적인 신어를 양산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대중교통기관 안내방송에서 노인을 ‘경로자’라고 하고, 임신부를 ‘임산부’라고 해도 승객들이 그런 용어가 말이 안 되는 용어임을 깨닫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고상한 용어라고 착각하여 앞 다투어 따라 쓰기에 급급하다. 어떤 사람이 영어의 ‘senior citizen’을 ‘선배 시민’으로 중학교 1학년생처럼 저급한 수준으로 번역해서 퍼뜨려도 노인이라는 말보다 품위 있는 말로 생각하여 주저하지 않고 따라 쓴다. 사고가 온전치 않은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어찌 내 혈압이 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섯째, 한자의 훈과 음, 즉 한자의 뜻과 음을 한 단어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그물을 쳐 놓고 고기를 잡는다.”라고 해야 할 것을 “그물망을 쳐 놓고 고기를 잡는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물망은 어구 이름이 아니고 글자 이름이다. 물속에 ‘그물 망(網)’자를 써 놓고 고기를 잡는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것은 ‘풀 베기’를 ‘풀초 베기’라고 하거나, ‘나무 심기’를 ‘나무목 심기’라고 하는 것과 같다. 풀초 베기라고 하면 써 놓은 글자 ‘풀 초(草)’자를 벤다는 뜻이 되고, 나무목 심기라고 하면 ‘나무 목(木)’자를 땅속에 묻는다는 말이 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어찌 내 혈압이 오르지 않겠는가.
  여섯째, 무비판적으로 잘못된 말을 따라 쓰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전국에 실내 체육관이라는 건물이 무수히 많이 있는데, 이 수많은 건물이 동시에 지어진 것은 아닐 것이고, 어느 한 지역에 세워진 것을 보고 이곳 저곳에서 따라 지었을 것이다. 이 건물명에서 ‘실내’라는 말은 빼고 그냥 ‘체육관’이라고 해야 말이 된다. 왜냐하면 실내 박물관, 실내 도서관, 실내 미술관 같은 건물이 있을 수 없듯이 ‘관’ 안에 ‘실’이 있는 것이지 ‘실’ 안에 ‘관’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내 체육관이라는 말은 ‘장바구니 내 시장’과 같은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이니 어찌 내 혈압이 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곱째, 발음을 더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도서관장을 [도서간장]으로 발음하고 좌회전을 [자애전]으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입술이 오므려지지 않아서 이러는지 어리광을 부린다고 이러는지 교태를 부린다고 이러는지 알 수 없다. 유튜브를 [유투브]로 발음하는 사람들은 유휴 자본을 [유후 자본]으로 발음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얼토당토않은 발음도 방송인이 하면 전 국민이 원숭이처럼, 앵무새처럼 모방하고 따라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보고 듣고 내 혈압이 어찌 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덟째, 영어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이다. 일전에 유명 정치인이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듣고 로텐더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국어사전, 영한사전, 백과사전 등 여러 사전에서 찾아보았으나 없어서 네이버 지식인의 ‘Q&A’란을 보았더니 어느 지식인의 답변에 그 의미가 적혀 있었다. ‘로턴더(rotunda)’를 ‘로텐더’로 바꾼 것이었다. 로턴더보다는 로텐더가 더 고상한 영어로 보일 것 같아서 이렇게 바꾼 듯했다. 이런 자들이 국어를 영어로 보이게 하려고 장난질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어마저도 더욱 영어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이 짓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뼛속까지 사대 근성에 젖어 있는 정치인들이 어찌 양인(洋人) 정치인들을 당당하고 의연한 자세로 대하겠는가. 내 혈세를 이런 자들의 세비로 쏟아 붓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하니 어찌 불면의 밤이 연속되지 않겠으며 어찌 혈압이 치솟지 않겠는가.
  아홉째,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국어 교사 경력 수십 년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한자가 병기된 평이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자기들은 한글세대라서 그렇다고 변명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후안무치한 인사들을 볼 때 어찌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으며 어찌 혈압이 급상승하지 않겠는가.
  교육 재정은 급증하고, 교원 1인당 담당 학생 수효는 격감하고, 전 국민의 학습 기간은 급속도로 연장되고, 석,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거리를 메우고 있지만 이와 반대로 국민들의 지적 수준은 저하 일로에 있다. 이럼에도 정부와 교육 당국에서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 비위 맞추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공부 덜 시키고 높은 점수 줄 방법만 연구하고 있다. 이러니 내 혈압이 상승일로를 달리지 않을 수 없다.
  내 혈압을 올리는 언어폭력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것도 아니고 초중고등 학교 학생들이나 대학생들에게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교사, 교수, 언론인, 작가, 성직자, 판검사 등 모든 식자들이 자행하고 있는 광범위한 행위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내 한 가지 소원은 하루속히 교육이 정상화되어서 국민들의 정신이 맑아지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글이 말다운 말, 글다운 글이 되어서 내 기분이 상쾌해지고 혈압이 정상을 되찾는 것이다. 禽獸江山이 錦繡江山으로 회복될 날이 내 평생에 올 수는 없겠지만 내 고손자 대에라도 실현되어서 제사 지내는 손자들의 입에서 짐승 소리가 아닌 사람 소리를 듣게 된다면 내 혼령의 혈압이 정상을 회복할 것이다.

  Pops English

  Green Green Grass Of Home - Tom Jones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The old home town looks the same as I step down from the train
  And there to meet me is my Mama and Papa
  Down the road I look and there runs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Yes, they'll all come to meet me arms reaching, smiling sweetly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The old house is still standing tho' the paint is cracked and dry
  And there's that old oak tree that I used to play on
  
  Down the lane I walk with my sweet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Yes, they'll all come to meet me arms reaching, smiling sweetly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Then I awake and look around me at the four grey walls that surround me
  And I realize, yes, I was only dreaming
  For there's a guard and there's a sad old padre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Again I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Yes, they'll all come to see me in the shade of that old oak tree
  As they lay me neat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기차에서 내려 보니 고향 마을은 옛날과 같았어
  어머니 아버지가 마중 나와 계시네
  길 아래를 보니 금발에 앵두 같은 입술의 메리가 뛰어오네
  고향의 푸르디푸른 잔디를 만지니 행복해
  그래, 사람들은 팔을 뻗어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보러 오겠지
  고향의 푸르디푸른 잔디를 만지니 행복해
  페인트가 낡고 바랜 옛집은 여전히 거기 있구나
  내가 놀던 늙은 그 참나무도 거기 있구나
  
  기찻길 옆에서 금발에 앵두 같은 입술의 예쁜 메리와 걷네.
  고향의 푸르디푸른 잔디를 만지니 행복해
  그래, 사람들은 팔을 뻗어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보러 오겠지
  고향의 푸르디푸른 잔디를 만지니 행복해
  
  그때 깨어 보니 잿빛 벽에 갇혀 있네
  그래, 꿈이었던 거야
  간수와 슬픔에 잠긴 노신부가 있네
  동이 트면 우리는 팔장을 끼고 걷겠지
  
  다시 고향의 푸르디푸른 잔디를 만져 보네
  그래, 사람들은 모두 늙은 그 참나무 그늘로 나를 보러 오겠지
  고향의 푸르디푸른 잔디 아래 나를 누이려고
  
  Tom Jones
  톰 존스는 1940년 6월 7일 웨일스 폰티프리드의 트리포레스트마을(Treforest)에서 토머스 우드워드(Thomas Woodward, 1981년 1월 5일 사망)와 프레다 존스(Freda Jones, 2003년 2월 7일 사망)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부였다. 톰 존스의 외할아버지가 웨일스계였던 반면 친가 직계 조상들은 모두 잉글랜드계이다.
  톰 존스는 9세 때인 1949년 영국 영화 《The Last Days of Dolwyn》의 아역 조연을 통하여 연예계에 발을 디뎠으며, 어린 나이에 노래를 시작하여 가족 모임, 결혼식, 학교 합창단 등에서 공연 활동을 하였다. 톰 존스는 1년여간 결핵에 걸려 투병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16세 때인 1957년 3월 2일, 톰 존스는 멜린다 트렌처드(Melinda Trenchard)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시기에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공사장 인부와 청소기 방문 판매 사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성악과 뮤지컬을 하면서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63년에 결국 ‘Tommy Scott And The Senators’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이 그룹에서 활동하던 중 그를 눈여겨 본 뮤지션 Gordon Mills의 도움으로 솔로로 전향하였다. 당시 인기 있던 영화 제목을 따서 ‘톰 존스’로 성명을 바꾸고, 1964년에 첫 싱글 ‘Chills And Fever’를 발표한다. 그 이듬해에 발표한 ‘It's Not Unusual’이 영국 차트 정상과 미국 차트 탑텐에 오르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60년대에 ‘What's New Pussyca’t, ‘With These hands’, ‘Thunder Ball’, ‘Little Lonely one’ 등의 히트 행진을 이어 나간 톰 존스는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열정적인 무대 매너와 테너에 가까운 풍부한 성량의 창법을 구사하여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면 수많은 여성 팬들이 속옷을 벗어서 무대 위로 던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66년경부터는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여 컨트리 히트송을 발표한다. 60년대 말에는 미국 TV에 진출하여 3년간 쇼 프로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 이후 라스 베가스로 거점을 옮겨 라이브 활동에 전념하며 히트 앨범을 발표하면서 8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인기를 유지했다. 88년에도 일렉트로닉 댄스 스타로 변신하여 그의 노래는 클럽가를 강타하며 톰 존스의 명성을 공고히 다졌다. 최근까지도 후배 뮤지션들과 리메이크 앨범을 발매하여 노장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Delilah’를 부른 톰 존스의 본명은 ‘Thomas John Woodward’라고 한다. 영국 왕실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2006년에 영국 여왕이 Knight 작위를 수여했다.

  [English Humor]

  Flying First Class
  On a plane bound for New York, the flight attendant approached a blonde sitting in the first class section and requested that she move to coach since she did not have a first class ticket. The blonde replied, "I'm blonde, I'm beautiful, I'm going to New York, and I'm not moving."
  Not wanting to argue with a customer, the flight attendant asked the co-pilot to speak with her. He went to talk with the woman, asking her to please move out of the first class section. Again, the blonde replied, "I'm blonde, I'm beautiful, I'm going to New York, and I'm not moving." The co-pilot returned to the cockpit and asked the captain what he should do. The captain said, "I'm married to a blonde, and I know how to handle this."
  He went to the first class section and whispered in the blonde's ear. She immediately jumped up and ran to the coach section mumbling to herself, "Why didn't anyone just say so." Surprised, the flight attendant and the co-pilot asked what he said to her that finally convinced her to move from her seat. The pilot replied, "I told her the first class section wasn't going to New York."

  1등석 비행
  뉴욕으로 향하는 한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1등석에 앉은 금발의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가 1등석 탑승권이 없기 때문에 보통석으로 옮겨 앉으라고 요청했다. 그 금발녀는 답했다. “난 금발이에요. 난 아름다워요. 난 뉴욕으로 가요. 그리고 난 옮겨 앉지 않을 거예요.”
  고객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승무원은 부조종사한테 가서 그녀와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다. 그는 그 여자에게 가서는, 1등석에서 옮겨 앉으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다시 그 금발녀는 답했다. “난 금발이에요. 난 아름다워요. 난 뉴욕으로 가요. 그리고 난 옮겨 앉지 않을 거예요.” 부조종사는 조종실로 가서는 기장에게 부탁했다. 기장이 말했다. “내가 금발의 여자와 결혼을 했거든. 어떻게 다루는지는 내가 잘 알지.”
  그는 1등석으로 가서는 그 금발녀의 귀에다가 속삭였다. 그녀가 즉시 일어나서는 보통석으로 황급히 옮겼다.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면서, “왜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 놀라서 그 승무원과 부조종사가 어떻게 마침내 그녀를 설득해서 자리를 옮기게 했는지 물었다. 기장이 답했다. “그녀에게 1등석은 뉴욕으로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네.”

  명시와 명문

  계녀가(戒女歌)
  작자 미상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편집

  아해야 들어 봐라 내 본래 소루(疏漏)하야
  범사(凡事)에 등한(等閒)하고 자녀 자정(子女慈情) 바이없어
  오 남매 너 하나를 십칠 년 생장(生長)토록
  일언반사(一言半辭) 교훈 없이 자행자재(恣行自在) 길렀으니
  견문(見聞)이 바이없어 일무가관(一無可觀) 되었으니
  연기장성(年紀長成) 하얐으매 매작(媒妁)이 구혼하니
  울산산성 엄씨 댁에 길연(吉緣)이 걸렸구나
  문벌도 좋거니와 가법(家法)이 장할시고
  층층분(層層分) 인심 인물(人心人物) 뉘 아니 칭찬하리
  사심에 과협(過冾)하야 일언에 결약(結約)이라
  무오지월 염육일(戊午之月念六日)에 도요지절(桃夭之節) 되었구나
  전안청(奠雁廳) 빈주석(賓主席)에 현서(賢壻)를 맞아보니
  표연(飄然)한 저 거동이 계군(鷄群)에 서봉(瑞鳳)일세
  침중개제(沈中愷悌) 군자태(君子態)요 공명현달(功名顯達) 부귀상(富貴相)이
  택서고망(擇壻高望) 맞혔으니 의기가인(宜其家人) 어찌할꼬
  내념에 생각하니 좋은 중에 걱정이라
  너 비록 미거(未擧)하나 자질이 방사(倣似)하니
  교훈이나 하여 볼까 오늘날 하는 말이
  너 해 듣기 꿈 같으나 인성이 본선(本善)하니
  깨쳐나면 되느니라 고사(故事)에 실린 말씀
  역력히 있건마는 장황하여 다 못하고
  대강으로 기록하니 자세히 들어 두고
  명심하여 잊지 마라 태임 태사(太任太姒) 착한 사적
  만고에 유훈(遺訓)이요 그 남은 여중군자
  여자 중에 몇몇인고 지금도 짐작하면
  옛 사람뿐이로다 인문(人文)이 생긴 후에
  오륜(五倫)이 좇아 나니 규중(閨中)의 여자로서
  다 알 수야 있나마는 칠거지악(七去之惡) 옛법이라
  삼종지도(三從之道) 모를쏘냐 그중에 사친지도(事親之道)
  백행 중에 으뜸이라 효자의 애일지심(愛日之心)
  백 년이 순식(瞬息)이니 순식간 사친사(事親事)를
  일시인들 잊을쏘냐 온공(溫恭)에 뜻을 두고
  지성으로 봉양하되 혼정신성(昏定晨省) 석 달 사관(伺觀)
  대체로 하련마는 사실(事實)이 있으나마
  냉철 없이 있지 말고 자주자주 나아가서
  기운을 살핀 후에 안색을 화(和)케 하며
  소리를 낮추어서 문안(問安)을 드린 후에
  식음을 묻자오며 잠잠히 기다려서
  묻는 말씀 대답하고 음식을 공궤(供饋)하되
  구미(口味)를 맞추어서 찾기를 기대 말고
  때 맞추어 드리오며 없다는 칭탁(稱託) 마라
  성효(誠孝)가 지성이면 얼음 속에 잉어 나고
  설중에 죽순(竹筍)이라 의복을 받들되
  한서(寒暑)를 살펴봐서 철철이 때를 찾아
  생각 전에 바치오며 품 맞고 길이 맞고
  일념에 조심하고 기운이 첨상(添傷)되어
  환후(患候)가 계시오면 황황(遑遑)한 이 모양이
  주야에 전읍이라 잠시도 잊지 말고
  탕로(湯爐)를 친집(親執)하며 급한 중 정신 차려
  약물을 조심하라 효성이 극진하면
  복상(復常)이 쉬우리니 복상이 되신 후에
  평시(平時)와 같삽거든 안색도 화케 하며
  몸 수렴도 하나니라 시키신 일 있삽거든
  물러가 짐작하되 동동촉촉(洞洞燭燭) 조심하야
  하다가 의심커든 다시금 사려(思慮)하되
  불안히 알지 말고 자망(自妄)으로 하지 마라
  내 난 것이 자망이요 내 난 것이 병통이라
  먹던 술도 떨어지니 아는 길도 물어 가라
  꾸중이 내리거든 황공히 들어보면
  무비(無非) 다 교훈이라 교훈 없이 사람 되리
  옳다고 발명 말고 그르거든 자죄(自罪)하되
  속속히 개과하여 두 번 허물 짓지 마라
  한두 번 글러지면 옳던 일도 글러지고
  한두 번 옳은 뒤는 용서가 쉬우니라
  하해 같은 자정(慈情)으로 사랑을 하시거든
  더구나 감격하여 다시금 조심하라
  쓰시는 기물(器物) 등도 애중(愛重)히 여기거든
  하물며 친동기야 부모 일신 갈랐으니
  그 아니 관중하며 그 아니 친애(親愛)할까
  소소한 일 허물 말고 내 도리나 극진하면
  남이라도 화합커든 동기(同氣)야 이를쏜가
  형제가 기흡(旣翕)하면 화락차담(和樂且湛) 하나니라
  인간의 우애 보전 내간(內間)에도 매였으니
  우애가 끊어지면 화기(和氣)가 다시 없어
  가도가 비색(否塞)하면 그 아니 한심하리
  일척포(一尺布) 일승곡(一升穀)을 있는 대로 갈라 하고
  우애(友愛)만 생각하니 재물을 의론 마라
  재물 끝에 의 상하면 형제가 남과 같다
  천륜으로 생긴 우애 나날이 솟아나니
  형우제공(兄友弟恭) 각각 하면 목족(睦族)도 되려니와
  차차로 추원(追遠)하면 봉선지심(奉先之心) 절로 난다
  예교(禮敎)를 다 알쏘냐 칭가유무(稱家有無) 형세대로
  제일(祭日)이 당하거든 전기(奠器)에 조심하여
  의복을 씻어 입고 재계(齋戒)를 정(淨)히 하되
  부정지색(不正之色) 보지 말며 부정지성(不正之聲) 듣지 말고
  갖가지 제수(祭需) 등물 정결토록 조심하여
  한가지나 잊을세라 차차로 생각하여
  정성이 지극하면 훈호처창(焄蒿悽愴) 그 가운데
  신도(神道)가 흠향(歆饗)하고 여음이 있느니라
  조선(祖先)의 끼친 문호(門戶) 그 아니 극중(極重)한가
  문호를 수호하여 접빈객 잘할지라
  외당(外堂)에 통기 있어 손님이 오시거든
  없다고 눈속 말고 있는 것 사념(邪念) 마라
  반상을 볼 때도 조심을 다시 하여
  반찬이 유무간(有無間)에 먹도록 대접하면
  돌아가 공론 인사(公論人事) 아무 집 아무 댁이
  안흠새도 없거니와 밖에서 생색이라
  접빈객 하자 하면 사령(使令) 없이 되겠느냐
  비복(婢僕)은 사령이라 수족과 같으니라
  귀천이 다르나마 그도 또한 혈육이니
  살뜰히 거두되 은위(恩威)를 병시하라
  위엄이 지중하면 충성이 절로 없고
  은애(恩愛)를 과히 하면 버릇없기 쉬우니라
  의식(衣食)을 살펴보아 기한(飢寒)이 없게 하며
  의심커든 쓰지 마라 시킨 후에 의심 마라
  양반이 의심하면 속일 눈을 뜨느니라
  죄가 있어 꾸짖어도 사정을 촌탁(忖度)하여
  위령(威令)을 세우나마 의리로 타이르면
  감복(感服)도 하려니와 후우(後憂)가 없느니라
  인간의 대부귀(大富貴)는 운수에 관계하나
  안 치산(治産) 잘못하면 손해가 없을쏘냐
  근검(勤儉)이 으뜸이나 일 봐 가며 할 것이며
  절용(節用)이 좋다 해도 쓸 데야 안 쓸쏘냐
  범백(凡百)을 요량(料量)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하라
  못할 일을 한다 하면 남에게 천히 뵈고
  쓸 데에 아니 쓰면 남에게 득담(得談)한다
  조선(祖先)의 세전지업(世傳之業) 한 푼인들 허비하며
  근로(勤勞)이 지은 농사 한 알인들 허용할까
  직임조순(織紝組紃) 주식제의(酒食祭儀) 여자의 본사(本事)로다
  치산(治産)에 쓰는 기물 제자리에 정해 두고
  문호를 단속하며 실당(室當)을 정히 하라
  여인 수작할 적에도 언어를 조심하라
  남의 흉이 한 가지면 내 흉이 몇 가지냐
  착한 사람 본을 받고 흉한 사람 경계하면
  그중에 사장(師長) 있어 내 사람 느느니라
  부녀의 본 성품이 편협하기 쉬우니
  일시에 못 참은 말 후회한들 미칠쏘냐
  참기를 위주(爲主)하고 속 너르기 힘을 쓰라
  차차로 행해 가면 그것도 공부 되어
  천성도 고치거든 허물이야 짓겠느냐
  매사(每事)를 당하거든 식사(飾詐)를 하지 말고
  진정으로 하여라 식사(飾詐)는 헛일이라
  남부터 먼저 아니 무색하기 측량 있나
  기림이 좋다 하나 기림 끝에 흉이 있고
  훼언(毁言)이 섧다 해도 그것이 사장이라
  훼언 듣고 자책(自責)하면 내 허물 내 알아서
  다시사 명심(銘心)하면 훼언이 예언(譽言)되네
  부녀 소리 높이 하면 가도(家道)가 불길하니
  빈계신명(牝鷄晨鳴) 옛 경계(警戒)는 규범(閨範)에 관계되니
  진선진미(盡善盡美) 못할망정 유순하기 으뜸이라
  주궁 휼빈(賙窮恤貧) 하는 도(道)와 시혜 보은(施惠報恩) 하는 일이
  예부터 적선지가(積善之家) 차례로 규범있어
  어른의 할 탓이라 네게야 관계 있나
  봉양군자(奉養君子) 하는 도와 교양자녀 하는 법은
  너의 듣기 수괴(羞愧)하여 아직이야 다 못하리라
  너 사람 무던하니 허다한 경계지언(警戒之言)
  이만 이만뿐이로다

  서평

  서경(書經)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편집

  『서경』은 중국 고대의 정치 문서로서 유교 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국가 통치의 거울이 되어 온 중요한 문헌이다. 『서경』은 본래는 ‘서(書)’라고 부르다가 한나라에 들어와서 ‘상서(尙書)’라고 하였다. 『서경』은 군신간의 대화, 군왕에 대한 신하의 건의, 인민에 대한 군왕의 포고, 전쟁에 임하는 군왕의 맹세, 군왕이 신하에게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는 명령 등 다섯 종류의 문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경』의 각 편은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서경』의 각 편에는 서(序)가 있어서 그 편이 지어진 경위를 밝혀 놓았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는 공자가 『상서』를 산정(刪定)했다고 하였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공자가 『상서』 100편을 엮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하는 『상서』는 58편인데, 25편은 고문(古文)이고, 33편은 금문(今文)이다. 전한 경제(景帝) 때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고가를 허물다가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었고, 무제 때 박사 공안국(孔安國)이 그 ‘고문상서’를 해독하니 모두 58편이었다고 한다.
  『서경』은 주서(周書)가 먼저 형성되고, 그 뒤 상서(商書)와 우하서(虞夏書)가 추가되었다. 현재의 58편 중 ‘오고(五誥)’라고 일컬어지는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소고(召誥)」, 「낙고(洛誥)」와 「금등(金縢)」, 「자재(梓材)」, 「다사(多士)」, 「다방(多方)」 등이 주나라 초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임금 때 각 지방의 토산물을 중앙에 납부하는 제도를 적은 「우공(禹貢)」은 춘추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경』은 어느 시대에 관련된 문건인가에 따라 크게 우하서(虞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로 나뉜다. 우하서에는 「요전(堯典)」, 「고요모(皐陶謨)」, 「우공(禹貢)」, 「감서(甘誓)」, 「오자지가(五子之歌)」등이 포함되고, 상서에는 「탕서(湯誓)」, 「탕고(湯誥)」, 「이훈(伊訓)」, 「태갑(太甲)」, 「고종융일(高宗肜日)」, 「서백감려(西伯戡黎)」, 「미자(微子)」 등이 포함되고, 주서에는 태서(泰誓)」, 「목서(牧誓)」, 「홍범(洪範)」, 「금등(金縢)」,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梓材)」, 「소고(召誥)」, 「낙고(洛誥)」, 「다사(多士)」, 「무일(無逸)」, 「군석(君奭)」, 「다방(多方)」, 「입정(立政)」, 「고명(顧命)」, 「군아(君牙)」, 「여형(呂刑)」, 「문후지명(文侯之命)」, 「비서(費誓)」, 「진서(秦誓)」 등이 포함된다.
  요순 시절과 하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우하서에서는 하늘의 질서에 따라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관직을 두어 덕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며, 군신이 합심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경』의 맨 처음에 실린 「요전」은 요임금이 정치를 행하고 순임금에게 선양(禪讓)한 사실을 밝혔다. 「고요모」에서는 덕 있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해야 함을 밝혔다.
  은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상서에서는 군주는 천명을 받들어서 올바른 정치를 하여야 한다는 정치 원리를 밝혔다. 「고종융일」, 「서백감려」, 「미자」에서는 민심을 잃은 자는 천명을 상실하여 결국 나라를 잃게 됨을 말하였다.
  주나라에 관한 글을 모은 ‘주서(周書)’는 대개 일곱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정치 원리를 제시한 글, 제후들과 관리들을 경계한 글, 신도 건설의 정당성을 밝힌 글, 왕과 제후 및 관료의 직분을 제시한 글, 왕통 계승 문제를 다룬 글, 형벌을 다룬 글 등이 그것이다.
  『서경』은 역사적 문건이다. 특히 주나라의 성립 및 발전과 관계가 매우 깊다. 주나라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글은 ‘주서’ 중 「태서(泰誓)」인데, 상·중·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편에는 혁명의 이념이 밝혀져 있다. 「목서(牧誓)」는 주나라 무왕이 주(紂)를 치러 갈 때 목야(牧野)라는 곳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한 내용이다.
  『서경』은 정치 강령의 책이다. 『서경』은 곳곳에서 군주의 덕치(德治)를 강조하였다. ‘주서’ 중 「무일(無逸)」은 대표적인 정론이다. 또한 『서경』은 ‘명덕신벌(明德愼罰)’과 ‘애민중민(愛民重民)’의 정치사상을 말하였다.
  『서경』 전편에서 정치 철학을 논한 가장 중심적인 부분은 ‘주서’의 「홍범」이다. 이 글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한 뒤 은나라의 현자 기자(箕子)에게 치국의 도리를 묻자 기자가 질문에 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유가의 정치·도덕적 사상을 집약한 것인데, 오행(五行: 水, 火, 木, 金, 土), 오사(五事: 貌, 表, 視, 聽, 思), 팔정(八政: 食, 貨, 祀, 司空, 司徒, 司寇, 賓, 師), 오기(五紀: 歲, 月, 日, 星辰, 曆數), 황극(皇極), 삼덕(三德: 正直, 剛克, 柔克), 계의(稽疑), 서징(庶徵: 雨, 暘, 燠, 寒, 風, 時), 오복(五福: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및 육극(六極: 凶短折, 疾, 憂, 貧, 惡, 弱)이 그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서경』 가운데서도 「홍범」을 매우 중시하였다.
  『서경』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우리 지식 계층의 필독서였다. 신라 청년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학업의 성취를 다짐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을 보면, 신라 젊은이들은 『시경』·『예기』·『춘추』와 함께 『서경』을 필독서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에도 『서경』은 유교 정치의 이념을 담은 책으로서 매우 중시되었다. 특히 정치 이념을 논하거나 행정 방안을 제시하는 상소문에서는 『서경』이 자주 인용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사 성어나 명구 중에는 『서경』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익직(益稷)」에 나오는 고굉지신(股肱之臣), 「대고(大誥)」에 나오는 긍구(肯構)나 긍당(肯堂), 「태서(泰誓)」에 나오는 시불가실(時不可失), 「탕서(湯誓)」에 나오는 식언(食言), 「상서(商書)」에 나오는 습여성성(習與性成), 시원유명(視遠惟明) 등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갑사(甲寺)
  계룡사·계룡갑사·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라고도 한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
  505년(무령왕 5) 천불전(千佛般)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 혜명(惠明)이 천불전·보광명전·대광명전을 중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의상(義湘)이 당우(堂宇) 1,000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十刹)의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54년(효종 5) 사정(思淨)·신휘(愼徽) 등이 크게 중창하였고, 1875년(고종 12) 다시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강당·대적전(大寂殿)·천불전·응향각·진해당(振海堂)·적묵당(寂默堂)·팔상전·표충원·삼성각·종각 등이 있다. 또, 보물 제256호인 철당간 및 지주와 제257호인 부도(浮屠)가 있으며, 《석보상절(釋譜詳節)》의 목각판이 있고, 1584년(선조 17)에 만든 범종, 경종이 하사한 보련(寶輦), 10폭의 병풍, 1650년(효종 1)에 만든 16괘불이 있다.

  (2) 청남대(靑南臺)
  대청호반에 자리 잡고 있는 청남대는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뜻으로 1983년부터 대한민국 대통령의 공식 별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다. 총면적은 182만 5천m²로, 주요 시설로는 본관을 중심으로 골프장, 그늘집, 헬기장, 양어장, 오각정, 초가정 등이 있고 여섯 명의 대통령이 89회 472일 이용 또는 방문하였으며, 2003년 4월 18일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사계(四季)에 따라 제 모습을 바꾸는 조경수 124종 11만 6천여 그루와 야생화 143종 35만여 본은 청남대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자연 생태계도 잘 보존되어 천연 기념물 수달, 날다람쥐와 멧돼지, 고라니, 삵, 너구리, 꿩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각종 철새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3) 관수루(觀水樓)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낙단교와 낙정 양수장 사이에 있던 누각이다. 고려 시대에 세워져 1734년(영조 10)에 상주 목사 김태연(金泰衍)이 다시 세워 현판하고 1843년(현종 9)에 다시 수리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넘어져 유실되었으나 1889년 양도학(梁道鶴)의 특지로 복원되었다.
  고려조(高麗朝)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대표로,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이황(李滉, 1501∼1570) 등이 지은 15편의 시가와 권상일(權相一, 1679∼1760), 유주목(柳疇睦, 1813∼1872) 등의 중수기문이 있었다. 후에 신현택(申鉉澤) 군수의 중건 기문, 진사 하서룡(進士河瑞龍)의 상량문, 강재기(康在璣)의 중건 상량문이 추가되었다.

  (4) 선몽대(仙夢臺)
  선몽대는 1563년(조선 명종 18) 퇴계 이황의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가 세운 정자이다. 앞쪽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의 널따란 백사장이 내다보이고, 뒤쪽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주변 풍광이 가히 절경으로 이름나 있다.
  선몽대는 선경을 이룰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정자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황의 친필 편액과 정탁, 류성룡, 김상헌, 이덕형,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새겨진 목판이 걸려 있다.
  뒤쪽에 있는 선몽대 숲은 수해와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된 보호림 또는 비보림(裨補林: 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으로, 수령 100∼200여 년 된 소나무와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동제가 거행되며, 선인들의 자취가 깃들어 있는 전통 공간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2006년 11월 16일 명승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예천군 및 진성이씨 백송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5) 수원 화성
  조선 태종 때 도호부로 승격된 수원은 한성 4진(鎭)의 하나였다.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인 광주, 강화, 수원, 개성에 진을 설치하여 수도 한양을 방위케 한 것이다. 그 수원을 지키고 있는 화성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또한 다양한 상시 공연을 진행하고, 매년 가을이면 문화제를 개최하여 수원 화성을 알리고 있다. 팔달산(143m)을 중심으로 쌓은 화성(사적 제3호)은 전장(全長)이 5,700m에 달한다.
  화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건축학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화성의 축조는 정조의 한과 효심에서 비롯됐다.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21일 사도 세자(고종 때 장조로 추존)는 당쟁으로 인하여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죽었다. 사도 세자의 아들 정조는 당시 11세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13년 만에 부친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묘를 양주 땅 배봉산(지금의 서울시 전농동)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을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정조 18년 정월부터 20년 9월까지에 걸쳐 성곽을 축조하였다.
  화성은 조선 성곽 제도의 최고 완성형이다. 한국 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다. 화성 축조에 매달린 선조들은 한국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참고하기도 했다.
  이 성에 관련된 사항은 “화성 성역 의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화성의 건축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당시 30세였던 다산은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 서적들을 섭렵하고 중국에서 들여온『고금도서 집성』 5,000권을 참조해서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에는 성문을 비롯하여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복원된 것을 포함하여 41개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을 비롯하여 팔달산을 둘러싼 시설 가운데 가장 높은 서장대(西將臺), 화포를 감춰 두고 적군에게 총을 쏘도록 축조된 남포루(南砲樓), 선조들의 시적 정취가 가득한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 등 200년 전 건물에는 조선의 문화 향기가 가득하다.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6) 달전리 주상 절리(達田里柱狀節理, 천연 기념물 제415호)
  포항 달전리 주상 절리는 채석장에서 암석을 캐내다 발견되었다. 면적은 32,651㎡이다. 달전리는 연일읍 달전리에 위치해 있어 붙은 지명으로, 이 지역의 능선을 따라 개간한 밭에 농사가 잘 되어 달밭들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화한 것이다.
  주상 절리는 단면의 형태가 육각형 내지 삼각형으로 긴 기둥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절리(마그마나 용암이 고결할 때에 수축이 일어나 생기는 틈)를 말한다.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서서히 식게 되는데 이때 식는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다.
  용암은 식을 때 표면부터 균열이 육각형으로 형성되고 점점 깊은 곳도 식어가면서 균열은 큰 기둥을 만들어낸다. 용암이 식는 속도와 방향에 따라 주상 절리의 모양과 크기가 결정된다. 주로 온도가 높고 유동성이 커서 수축 작용이 탁월한 현무암질 용암에서 발달하는데 조면암과 안산암에서도 형성된다.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는 현무암으로 된 오각형·육각형의 돌기둥이 여러 개 이어져 높이 20m, 너비 100m 규모의 암벽을 이루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은 휘어진 국수 모양, 오른쪽은 부채 살 모양을 나타낸다.
  국내 다른 지역의 주상 절리가 신생대 제4기에 형성된 데에 비해 포항 달전리 주상 절리는 신생대 제3기 말인 약 200만 년 전에 현무암 분출로 형성되어 희소성이 높다. 또한 다른 지역의 주상 절리에 비해 규모가 크고, 발달 상태도 좋기 때문에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다만 발견 직전에 암석 채굴 중에 충격을 받아서 손상된 부분도 있다.

  (7) 단양 신라 적성비 (丹陽新羅赤城碑)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 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 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 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 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고관 10인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 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 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8) 실상사(實相寺)
  대한 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창건은 828년(흥덕왕 3)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홍척과 함께 입당(入唐), 수학한 도의(道義)는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는데 1700년에 승려들의 상소로 36동의 건물이 조성되었으나 1882년(고종 19)에 소실되어 수난을 겪고, 다시 여러 승려들의 힘으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중요 문화재로는 백장암 3층 석탑, 수철 화상 능가 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 수철 화상 능가 보월탑비, 부도(浮屠), 3층 석탑 2기(基), 증각 대사 응료탑(凝寥塔), 증각 대사 응료탑비, 백장암 석등, 철제 여래 좌상(鐵製如來坐像), 백장암 청동 은입사 향로(靑銅銀入絲香爐), 약수암 목조 탱화(藥水庵木彫幀畵)가 있다.

  (9) 경포호(鏡浦湖)
  경포호는 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석호이다. 경포호는 수면이 거울같이 청정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 자리의 평균 수심이 2∼3m정도이고, 중심부는 1m 내외의 수심을 이루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정철(鄭澈)은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경포호에 뜨는 달에 반하여 관동팔경 중 이곳을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호수 한 가운데에는 월파정과 새 바위가 있으며, 새 바위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쓴 ‘조암(鳥巖)’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경포호는 최근 염호로 바뀌고 있다. 2004년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바닷물을 막던 보를 트면서 바닷물이 대거 유입되었다. 인근 지역의 수질은 개선됐지만, 민물 유입이 줄어든 경포호는 사실상 바다로 변했다. 홍합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전복이 자라고 있으며, 일반적 기수호에서는 살 수 없는 파래와 같은 홍조류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10) 안동 의성김씨종택(보물 제450호)
  의성 김씨의 종가로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김성일(1538∼1593)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규모는 앞면 4칸, 옆면 2칸이고 형태는 一자 형이다. 안채는 口자 형이고 다른 주택과 달리 안방이 바깥쪽으로 높게 자리를 잡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고 있는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 가옥 구성이 巳자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행랑채에서 안뜰로 통하는 중문이 없어 외부인이 드나들 수 없었는데 이것은 유교의 남녀 유별 사상을 건물 구성에 반영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랑채는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는 별도의 문이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이어주는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은 서재로,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와 같은 2층 구조는 다른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훗날 추가로 연결한 서쪽 끝의 대청문은 지붕이 커서 집 전체 겉모습에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은 간결한 양식으로 지었지만 보기 드문 구조여서 조선 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행문

  봉화의 닭실 마을과 청량사를 다녀와서

  이창훈(본원 원장)

  우리 시각 장애인 문화원의 제168차 역사 문화 기행으로 봉화군을 다녀왔다. 문화원의 원장직을 맡고 나서부터는 행사 전체의 매끄러운 진행에 신경을 써야 하다 보니 아무래도 경치를 돌아보고 유적을 감상하는 데 몰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회원 중 한 분도 사고 없이 행사를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 다음은 참여자분들이 최대한의 만족을 얻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제168차 역사 문화 기행의 날인 10월 12일 아침이 밝았다. 문화 기행의 출발 시각은 오전 8시이지만 나는 우리를 싣고 달릴 버스가 도착하기도 전인 7시 20분경에 출발 장소에 도착하여 참여하시는 회원 분들을 맞이했다. 평소에 이 정도 이른 시각이면 당연히 1등이지만 이날은 먼저 와 계신 분이 있었다. 충북 영동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시는 시각 장애인분인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대전까지 가서 KTX로 대구까지 오셨다고 한다. 대학 교수로 퇴직하신 남편분과 함께 참여하셨는데, 이번이 5, 6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이다. 역사 문화 기행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버스가 도착하자 두 분에게 차량에 오르시기를 권하고, 나는 후배의 도움을 받아 속속 도착하시는 다른 참여자분들께도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멀리서 오신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는데, 안양대에서 문화재 정책을 연구하고 계신 류호철 교수이다. 봉사 활동에 열정이 대단한 분이시다.
  오전 8시에 탑승 인원 점검이 끝나고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성서 홈플러스에서 타는 분들을 위해서 버스는 잠시 정차하는데, 여기서 타는 분들의 수효도 적지 않다. 버스가 고속 도로에 진입하여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하면서 문화 기행 행사는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게 된다.
  이위경 실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한껏 띄우기 위해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를 가미한 달콤한 진행 멘트를 날리기 시작한다. 아이스브레이킹(ice-breaking)이 먹혀들어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할 즈음 ‘원장님 한 말씀’이라는 멘트와 함께 마이크를 나에게 넘겨준다. 나는 가을에 대한 적당한 시후(時候) 인사와 참여에 대한 감사 말씀을 전하고, 새로 참여한 분들의 성함을 소개했다. 이날의 시후 인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대충 이러하다.
  “이제 가을입니다. 피부에 닿는 햇볕은 따스하고, 얼굴에 닿는 바람은 상쾌하고, 시선에 닿는 경치는 곧 단풍이 시작됨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상춘객이 아닌 상추객이 되어 가을의 상쾌한 정취를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오늘 방문하게 되는 곳을 모티브로 한 사행시 시제에 대한 안내까지 마치고 나서 마이크를 문화 해설사님께 넘겼다. 우리 해설사님은 한강 이남에서 제일의 해설사라고들 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자칫 무료해질 수 있는 시간을 당일 방문지에 대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해설로 알차게 채워 주신다. 해설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 더욱 자세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버스는 약 2시간을 달려 첫 목적지인 ‘닭실 마을’에 도착했다. 닭실 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길지에 자리했다고 한다. 닭실 마을을 둘러싼 옥적봉과 남산이 양 날개, 백설령이 꼬리에 해당하는 형국인데, 마을은 닭이 알을 품는 위치에 놓이게 되어 금계포란형에 해당한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충재 권벌(冲齋 權橃, 1478∼1548) 선생이 이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입향조가 되었는데, 후손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 형성되게 되었다. 닭실 마을로 들어가는 차도가 나지 않았다면 주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저곳에 과연 사람이 살 만한 마을이 있을까 상상하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유곡(酉谷: 닭실)이 경주 양동 마을, 안동 내앞마을, 풍산 하회 마을과 함께 삼남에서 4대 길지에 해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설사님의 안내로 우리는 석천 계곡을 따라가는 옛길을 통해서 마을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길이었는데, 불규칙하고 제법 울퉁불퉁한 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 시각 장애인분들과 봉사자분들의 발걸음을 약간 더디게 만들었다. 석천 계곡을 따라 200여 미터를 가니 길을 막아서는 듯한 바위가 나타났는데, 여기에 초서체로 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옆에 있는 안내문은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글자임을 알려 주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여기가 닭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려 주는 표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온다. ‘석천정사(石泉精舍)’가 너무 아름다워 도깨비들이 놀러 오곤 했는데, 선비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므로 권벌 선생의 5대 후손이 청하동천 글씨에 붉은 칠을 하여 도깨비들의 출현을 막았다고 한다.
  500여 미터를 가니 제법 큰 너럭바위들이 나타나 계곡을 가로막고 양변에 늘어서 있다. 잠시 너럭바위에 걸터앉아서 석천정사에 대한 해설사님의 설명을 경청했다. 그런데 바로 여기가 오늘의 최대 난코스였다. 석천정사로 가기 위해서는 석천계곡을 건너야 하는데, 폭이 좁은 징검다리와 나무다리를 밟고 이곳으로 건너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시력이 거의 없는 시각 장애인들이 징검다리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봉사자분들이 합심하여 한 명 한 명씩 손을 잡고 이끌어 디디고 밟아야 할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마침내 전원이 무사히 건넜다. 석천정사를 끼고 돌아 청암정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가는 도중에 안동 권씨의 고택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대문을 열어 주지 않아서 집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솔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청암정(靑巖亭)’이 나타났다.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로, 냇물을 끌어올려 못을 파고 조촐한 장대석 돌다리를 연결해 놓았다.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이다. 청암정은 인위적인 손길을 타긴 했지만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청암정을 처음 지을 때는 방들의 일부를 온돌방으로 꾸몄고, 그 둘레에는 못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겨울에 정자의 방에 불을 때자 거북바위에서 거북이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온돌을 없애고 거북바위에게 물을 끌어다 주는 형태로 개수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청암정 앞에는 별당채에 해당하는 자신의 호와 이름이 같은 ‘충재(冲齋)’가 있다. 별당의 처마는 높지는 않되 길게 쭉 나와 있어 뿌리는 빗줄기와 쏟아지는 햇볕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싶은 충재 선생의 기호가 반영된 듯했다.
  석천정사와 청암정의 이름이 붙은 연유에는 충재 권벌 선생의 후손을 아끼는 독특한 집안 가풍이 영향을 미쳤다. 청암정을 지으면서 권벌 선생은 자신의 아들 동보의 호인 ‘청암’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석천정사를 지으면서 권동보는 자신의 아들 래의 호인 ‘석천’을 이름으로 갖다 쓴 것이다. 후손들이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부모가 예쁜 정사를 지어 자식에게 선물한 느낌이랄까.
  멋진 정사를 감상했으니 이제는 이 운치에 어울리는 음악을 감상할 차례이다. 실장님이 대구 점자 도서관장이기도 한 김현준 이사장님께 한 곡조를 요청했다. 이사장님은 뺄 것도 주저할 것도 없이 단박에 음표들을 목청 밖으로 내어 놓으신다. 곡명은 ‘사공의 노래’였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후략)
  노래가 끝난 후 분위기가 고조된 것인지 침체된 것인지 조금 애매했다. 이 때 “이 곡은 멀리 영동에서 오신 교수님 부부를 위해 바칩니다.”라는 실장님의 너스레로 분위기는 좋게 마무리되었다.
  오전에 제법 걷고 열심히 구경했던 탓인지 시장기가 슬슬 돌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식당으로 이동하여 테이블에 한 분씩 착석했다. 오늘의 메뉴는 추어탕이다. 추어탕이 도저히 내키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는 청국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봉사 활동에 열심이던 초등학교 4년생 우용이가 더욱더 신바람을 내며 커피봉사를 하고 있다. 식사 후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분들끼리 담소를 나누며 조금 휴식을 취했다 싶을 때쯤 문화 기행의 오후 여정이 다시 시작됨을 알려 온다.
  오후 일정은 ‘청량사(淸凉寺)’이다. 청량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봉화군 청량산 도립 공원 내에 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하니 청량산이었다. 청량산은 명승 제23호로 지정된 한국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장인봉, 선학봉, 금탑봉, 연화봉 등 육육봉이라 불리는 12봉우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어풍대·밀성대·풍혈대·학소대 등의 4대(臺)가 있다. 통일 신라 말 최치원과 관련된 곳이 풍혈대이고, 그가 마셨다는 물이 총명수 샘터이다. 그리고 통일 신라 서예가 ‘김생(金生)’이 수도했다는 김생굴(金生窟)이 청량산 중턱에 있다.
  버스에서 내려 주차장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으면 청량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데,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경사도가 만만치 않음을 다리의 후들거림과 숨찬 헐떡임으로 직감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봉사 컨디션이 좋았던 우용이가 나를 돕겠다고 손을 내밀어 온다. 우용이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청량사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2, 3분도 못 걷고 다시 숨이 차 오르기 시작한다. 경사도가 보통이 아니다. 지그재그로 걸어 보기도 하고 냅다 뛰어 보기도 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 결국 잠시 또 쉬기로 한다. 우용이와 함께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우용이가 “이제 좀 쉬었으니 다시 출발할까요?”라고 채근하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어린애들은 역시 피로 회복 속도가 빠르다. 나는 채 풀리지 않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는데, 우용이는 올라가는 품이 마치 피로가 애당초 없었던 듯 씩씩하기만 하다. 예전의 에너자이저라는 모 건전지 광고를 보는 듯하다.
  가다가 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야 드디어 청량사 경내 아래에까지 도달했다. 길이 두세 갈래로 나뉘어 있어 잠시 섰다가 약수를 한 모금 들이켠 후 마주쳐 오는 등산객에게 길을 물어본다. 청량사가 바로 저 위에 빤히 보이는데 길을 물으니 그 등산객은 약간 당황한 듯 아래위로 나를 잠시 훑어보았다. 얼른 흰지팡이를 들어 흔들어 대니 그제야 알았다는 듯 친절하게 방향을 일러주었다. 청량사에 오르기 직전은 계단이 무척이나 많고 가팔랐다. 우용이와 함께 그 계단 개수를 세며 올라갔다.
  거친 경사 길과 가파른 계단을 올라 청량사에 도달하니 이미 등은 솟아난 땀방울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마치 수고했다는 의미로 샴페인 세례를 받은 듯하다. 땀을 식히며 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시원하게 탁 트인 시야와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고생한 나를 위무하는 듯했다. 청량사는 청량산 12봉우리 중에서 연화봉 중앙에 자리 잡아 마치 연꽃잎으로 둘러싸인 것 같은 절묘한 길지에 위치하고 있다. 잠시 쉬고 있노라니 해설사님이 참가자분들을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여 모으기 시작한 후, 주옥같은 해설을 시작한다. 모인 장소는 ‘유리 보전(琉璃寶殿)’ 앞이다. 유리 보전은 특이하게 종이로 만든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유리 보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인데, 홍건적의 침입 때 이곳까지 피난 와서 머무를 때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30여 분을 쉰 다음 참가자 일부는 ‘김생굴’을 향해 떠났고 나와 동행자 일부는 ‘청량정사(淸凉精舍)’ 쪽으로 향했다. 정사 가는 길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길이 좁고 잔돌과 나무뿌리가 제법 무성하여 한 번씩 발걸음에 태클을 걸어왔다. 청량정사는 퇴계 선생이 ‘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또한 후배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풍광이 빼어나고 공기가 신선하고 맑은데 어찌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었으랴.
  정사 바로 인근에 각종 기념품과 예술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산 꾼의 집이 있는데, 거기 들러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처음에 뭐 하는 건물인지 모르고 들어갔다가 차를 대접받고 기념품 구경은 못 하고 그냥 나왔으니 조금 미안하였다.
  이제 충분히 쉬고 구경했으니 버스로 돌아가기 위해 하산해야 했다. 이번에도 우용이가 도움을 준다. 올라올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으나 급경사는 여전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쯤 이번에 문화 기행에 처음으로 참가한 시각 장애인 교사 김성민 선생을 만났다. 우용이가 요즘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김 선생과 영어로 몇 마디 대화를 했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다. ‘자신은 오늘 청량사까지 갔다 와서 좀 타이어드(tired)할 뿐인데 원장님은 완전 이그조스티드(exhausted)되었다고….’ 나의 약한 체력을 질타하는 듯한 분위기의 대화였다.
  모든 참여자분들이 청량사 산행을 마치고 버스로 돌아와 숨을 좀 고르자 버스는 대구를 향해 출발했다. 다른 복지 기관의 여느 행사와 구별되는 우리 문화원의 역사 문화 기행만의 특징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잘 나타난다. ‘방문지와 관련된 퀴즈 풀이’, ‘칭찬합시다’, ‘사행시 짓기’ 등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며 분위기를 참여와 공감의 마당으로 이끌어 간다. ‘퀴즈 풀이’는 난이도가 낮은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난이도를 높여 가며 출제가 진행되는데, 선물을 마구 안겨다 주는 분위기였다. ‘칭찬합시다’에서는 하루 동안 시각 장애인을 위해 봉사해준 분들의 노고에 칭찬을 통해 감사한다. 주로 자기 파트너로 봉사해준 분들을 위한 칭찬 릴레이가 펼쳐지는 것이다. 식사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반찬을 잘 덜어 주었다든가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눈앞에 보는 듯 생생하고 자세히 잘 해 주었다든가 등의 칭찬이 쏟아진다.
  그 다음 이어진 ‘사행시 짓기’는 다들 재미있어하면서도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코너이다. 문화 기행에 참여한 모든 회원이 이구동성으로 시제를 한 자씩 운을 띄우면 그에 맞추어 준비한 내용을 읊게 된다. 오늘의 시제는 ‘봉화 청량(양)’이었다. 맨 뒷좌석부터 앞쪽으로 마이크가 건네지며 작품이 한 편 한 편씩 발표되었다. 사행시가 미처 준비되지 않아 건너뛰는 회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성의껏 자신의 작품을 발표했다. 청량산의 자태와 운치를 그려 낸 작품, 가을 운동회를 모티브로 추억을 떠올리게 한 작품, 짧지만 위트 있는 작품 등 각양 각색의 사행시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나는 앞쪽에 앉기 때문에 발표 순서가 늘 뒤쪽이다. 나도 당연히 운에 맞추어 한 편을 발표했다.
  봉: 봉우리마다 다른 이름 형형색색 12봉이 병풍처럼 둘러치며 백두 대간의 이단아를 만들어 놓았구나.
  화: 화려한 듯 화려하지 않은 화려한 것 같은 썸을 타는 듯한 청량산의 자태는
  청: 청명하고 고즈넉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더욱더 선명해지는 만산 홍엽의 물결을 예고하고 있음이구나!
  양: 양금 택목의 혜안을 옛 성현들은 지녔나 보다. 퇴계 선생은 이 빼어난 선계에다 학문의 도량을 세우고자 했으니 말이다.
  해설사님의 채점이 진행되는 동안 노래를 꽤나 잘 부르시는 정덕기 반장님이 한 곡조 하신다. 노래가 끝나고 이윽고 사행시의 장원이 뽑혔다. 사실 장원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행시 짓 기에서는 얼마나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가, 참여한 분들이 공감대를 얼마나 많이 형성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역사 문화 기행만의 고유한 코너들이 한바탕 즐거움을 주고 끝을 맺으면 곧 대구 입성이 눈앞에 와 있게 된다. 원장으로서 오늘 수고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댁까지의 무사 귀환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이것으로 오늘의 역사 문화 기행은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버스는 출발할 때와는 반대로 먼저 성서 홈플러스에서 한 번 정차하여 회원분들을 내려 드린 다음, 당초 출발지였던 남산동으로 가서 나머지 회원분들을 내려 드린다. 참여한 회원분들 모두 댁으로 가시는 것을 보고 나서 그제야 나도 발걸음을 집 쪽으로 향했다. 심신이 무척 피곤했지만 다치신 분 없이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얼른 집으로 가서 씻고 한숨 푹 자고 싶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또 뜰 것이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청학소금
김병구
  청: 청춘으로 산다는 게 별 거 아니란 걸 이번에 좀 안 것 같습니다
  학: 학이 시습지하며 자신을 바꾸고
  소: 소풍하듯 유람하듯 많이 내려놓고 또 나누다 보면
  금: 금단의 영역 같던 늘 푸른 청춘으로 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배순선
  청: 청정 지역으로 떠난 1박 2일 시각장애인문화원 역사기행
  학: 학이 깃들고 선녀가 내려온다는
  소: 소금강 계곡은 좁고 깊은 협곡이다
  금: 금수강산이 바로 이곳인가 보구나!

  시제: 수원화성
김병구
  수: 수원화성 행궁의 위용을 보니
  원: 원망의 사슬을 끊어 내고
  화: 화려한 문화 전성기를 이룩한
  성: 성군 정조 대왕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시제: 남원실상
조정훈
  남: 남의 등 뒤에서 험담하지 말고
  원: 원한 품은 사람 만들지 말며
  실: 실랑이하는 다툼 벌이지 말고
  상: 상처 주는 말 하지 말고 살지어다

배순선
  남: 남남이 만나 동행이 되어가는 역사 기행길
  원: 원하는 것들을 서로 도와주며 유적지를 답사하니 배꼽시계가 점심을 알린다
  실: 실컷 먹고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은 행복 만점!
  상: 상큼하고 싱그러운 역사 기행이었습니다

  시제: 안동만휴
이창훈
  안: 안단테 템포로 느리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염원하지만
  동: 동분서주하며 비바체 템포로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토마스 홉스의 말처럼 치열하고 각박한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휴: 휴머니즘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잊지 않도록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가리

이석규
  안: 안락한 우리의 현재는 선인들의 크나큰 희생 위에 이룩되었고
  동: 동삼 김 공 같은 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과 가산을 바친 것이 그 희생의 예인데
  만: 만대가 지나도록 이들의 공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니
  휴: 휴식 중에도 근로 중에도 이를 기억하는 것이 같은 고난을 다시 겪지 않는 길인가 하노라

  시제: 도담삼봉
김기용
  도: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품어 안고
  담: 담담하게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
  삼: 삼 만원으로 맛있는 점심도 먹고 멋진 풍경도 즐길 수 있다면
  봉: 봉 잡은 거 아니겠어요

이경희
  도: 도화지에
  담: 담고 싶은
  삼: 삼봉의 조화로움을 바라보면서
  봉: 봉사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시제: 구례화엄
김기용
  구: 구름도 휘돌아 쉬어가는 지리산 자락에
  례: 예스런 사찰들이 자리잡은 아름다운 이 풍경을
  화: 화이트하우스에 사는 트럼프가 와서 보았다면 뭐라고 할까요
  엄: 엄~빌리 버블!

추용수
  구: 구층암 천불보전에서
  례: 예리한 눈으로
  화: 화이트 토끼를 먼저 찾아 밴드에 올려
  엄: 엄청난 선물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오늘은 수지맞는 역사문화기행이 될 것 같습니다

  시제: 봉화청양
김경우
  봉: 봉봉포도 주스 하나에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
  화: 화창한 가을하늘에 만국기 나부끼던 가을 운동회
  청: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양: 양편으로 나뉘어 목청껏 응원하던 가을 운동회

이진희
  봉: 봉지라면 하나에도 행복하던 20대도 지나고
  화: 화장품 하나 없어도 나이를 속일 수 있던 30대도 지나고
  청: 청산해야할 빚만 늘어나는 40대가 되니
  양: 양손, 양발만 바쁘네.

이경희
  봉: 봉우리 봉우리 연꽃잎이 연상되는 청량사 절터
  화: 화려함보다
  청: 청아한 풍경 소리가
  양: 양미간에 스며들어 더없이 행복한 가을 여행이였습니다

  장애인의 장애 극복기

  시각 장애인도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고 싶다

  김병철(46세, 남, 시각 장애 1급)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우기전이라고 하는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자동차 전기 부품을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녹내장이 발생하여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고, 4년 전에는 전맹이 되고 말았다. 녹내장이 발생한 후 10여 년 동안 약시로 살아오면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을 단념할 수 없어서 1994년에 대신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녹내장으로 시야가 좁아지고 시력이 떨어져서 공부하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그나마 혼자서 걸어다닐 수 있고, 잔존 시력으로 느리게나마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대학 공부는 큰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자 눈에 갑작스런 바이러스 감염 증상이 나타나 조금 보이던 눈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어 학업을 더는 지속할 수 없어서 휴학을 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닥친 완전 실명은 나를 무척 힘들게 했지만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1년의 세월을 보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바이러스 감염 증상이 치료되자 1년 만에 감염 전의 상태로 시력이 회복되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걸어가야 할 목회자로서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 위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시 시력을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복학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였다. 시력을 잃어 가고 있던 나에게 귀하게 키운 딸을 주시기가 못내 서운했던 장인어른은 우리의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하셨지만 아내와 나의 사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동사무소에서 주선하는 공공 근로도 하고 교회 전도사 일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힘겹게 일했지만 시각 장애인이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한 공공 근로는 재활용품 수집 작업이었는데, 수집 차량이 오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재활용품을 찾아 차에 싣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간 재활용품 수집 일을 하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그만두려고도 생각을 했으나 이 정도의 어려움도 견디지 못한다면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끝까지 견디며 일을 했었다. 그런 중에도 마음속에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아서 서울에 있는 총신 대학원에 진학하여 3년 동안 공부했다. 시력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력을 잃고 나자 혼자서는 바깥출입도 할 수 없었고, 교회 전도사 일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집에서 지내던 나는 2006년에 시각 장애인 복지관에서 실시하는 재활 교육에 참여하여 점자와 보행을 익히는 등 시각 장애인으로서의 재활을 위해 노력하였고, 2007년에는 직업 재활을 위해 맹학교에 편입하여 안마와 침술을 배웠다.
  약시로, 전맹으로 10여 년을 살아오면서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어려운 환경임을 절감했다. 대학을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은 내가 가진 장애의 특수성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일반 학생들과 동일한 기준에서 시험을 치고 평가를 하는 바람에 같은 과목에서 몇 번이나 낙제하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고, 어느 교수님은 시험 때 오픈 테스트를 하면서 다른 학생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를 하는 바람에 시력이 부족하여 교과서를 문제에 따라 빨리 찾아볼 수 없었던 나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다. 대학원 시험 때는 문제를 읽어 주는 것을 듣고 답안을 작성하였는데 눈으로 문제를 읽어가며 시험을 보는 일반 학생들에 비해 읽어 주는 문제를 듣고 답안을 작성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수능 시험이나 공무원 시험 등 공식적인 시험에서는 시각 장애인에게 시험 시간을 길게 주는 등의 배려가 있지만 보통 비장애인과 함께 경쟁해야 하는 시험에서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적극적인 배려나 조치가 없기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2008년도부터는 고등학교 수행 평가와 관련하여 교사들이 학생들의 평가 점수를 학생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일일이 학생들의 사인을 받는 제도가 신설되어 내가 다니고 있는 특수학교에서도 과목마다 실시하는 수행 평가에서 성적을 확인하고 사인을 해야 했는데, 일부 교사들은 시각 장애 학생들에게 개별적으로 점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점수를 불러 주고 확인하도록 하였다. 점수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 학생들이라면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자신의 점수를 다른 학생들이 다 들었다는 것에 속이 많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교사들이 이런 문제를 생각해서 점수 공개를 원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비밀을 지켜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들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고 누구 하나 세심하게 학생들의 인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얼마 전 장애인 기능 경기 대회에 참여하였을 때에도 장애 정도와 사용하는 도구에 따른 균형 있는 평가 방식이 적용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점역·교정 부문에 참가하였는데, 심사 위원들이 점자판을 사용하는 사람과 점자 정보 단말기(한소네)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평가 기준을 달리하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함으로써 점자판을 사용한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다. 점자판을 사용할 경우에 점자를 찍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오자가 났을 경우에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잘못 찍은 글자를 지우고 다시 찍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점자 정보 단말기를 사용하면 점자 입력 시간이 훨씬 단축될 뿐만 아니라 오자를 수정하는 것도 훨씬 편리하기 때문에 두 도구 사용자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최 측에서는 두 도구의 차이에 따른 별도의 평가 기준을 적용하거나 부문을 달리하여 점자판 부문과 점자 단말기 부문으로 이원화하여 경기를 진행하는 등의 세심한 배려를 하지 못해서 많은 시각 장애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교육 정보원에서 주최한 문서 편집 대회에서도 문제지를 점자로만 제공하고 테이프나 파일로는 제공하지 않아서 점자 독해 속도가 느린 사람의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부족하여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다. 대회의 근본 취지가 시각 장애인이 음성 지원 컴퓨터를 활용하여 문서를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작성하느냐 하는 것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라면 문서 편집과 관련된 사항에서만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여타의 것들에서 미리부터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매체가 가진 장단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대회를 진행함으로써 시각 장애인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한 공정한 대회가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신학 대학에 다닐 때 파트 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전도사 자리를 찾아 다녔지만 약시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교회에서 거절을 당한 것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내가 겪었던 최초의 차별이었으며,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장벽이었다.
  녹내장 수술을 받으려고 입원했을 때는 인턴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 검사를 한답시고 불러내는 바람에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병원 이곳저곳을 헤매기도 하였다. 안압이 올라서인지 머리가 몹시 아파 병원에 갔었는데 의사가 검사를 위해 CT를 찍어야 한다고 해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 적용을 하지 않고 자부담으로 처리하였다가 나중에 건강 보험 공단에 이의를 제기하여 검사비를 돌려받기도 하였다.
  볼일이 있어서 외출을 할 때에는 택시를 많이 이용하게 되는데, 늘 이용하는 구간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요금을 요구하는 기사들을 만날 때면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확인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달라는 대로 지불하기도 하는데, 요즈음처럼 전자 기술이 발전한 상황에서 택시 요금기에 시각 장애인도 액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점자나 음성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 없는지 의문이다. 점자나 음성 시스템을 갖춘다면 요금을 속는 일도 속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했는데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곳에 내려놓고 달아나 버리는 기사들을 만나는 날이면 몸과 마음 고생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번은 대명동에서 택시를 타고 범물 용지 아파트로 가자고 했는데 지산 용지 아파트로 가서 내려 주는 바람에 집을 못 찾아 한참 헤매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귀가한 일도 있었다. 내가 갈 곳을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그 곳이라고 내려 준 곳이 내가 가야 할 곳이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했던 일은 시각 장애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일 것이다.
  버스를 타는 경우에 어떤 기사들은 내가 흰지팡이를 짚고 올라와 교통카드를 찍으려고 하면 됐으니 그냥 앉으라고 할 때가 있는데, 이런 일을 당할 때면 기분이 몹시 상한다. 꼭 내가 구걸하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당하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들의 교통비 부담을 경감해 주기 위해 열차 요금 할인, 지하철 무료 승차제 등을 시행하고 있으나 열차를 타야 할 일은 많지 않고 지하철도 대구의 경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많으나 버스 요금과 택시 요금은 할인 제도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 특히 버스의 경우 준공영제가 시행되면서 버스 회사에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지하철처럼 장애인들에게 요금 면제나 할인 제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인들에게 요금 할인이나 면제 제도가 시행된다면 일부 기사들이 선심 쓰듯이 요금을 받지 않거나 택시 요금을 적게 받는 일을 당할 때마다 마음이 상하는 일 없이 당당하게 우리의 권리를 누리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볼일이 있어 거리를 보행하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몸도 불편한데 집에 있을 것이지 왜 힘들게 나와서 그러느냐는 소리를 자주 한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도 나고 나 자신의 장애가 사회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한없이 우울해진다. 한번은 아이들 때문에 중고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하려고 자동차 LPG 지원이나 세금 문제 등을 상담하러 동사무소 사회 복지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복지사는 시각 장애인이 왜 자동차가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아주 퉁명스러운 태도로 나를 대하는 것을 보고는 몹시 불쾌했다. 시각 장애인이 자가 운전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운전을 할 수 있는 가족이 있고, 필요하다면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것임에도 사회 복지사라고 하는 사람이 시각 장애인이 왜 자동차가 필요하냐는 의문을 제기했을 때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의 정도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번은 국회의원 선거 투표를 하러 갔는데, 내가 직접 투표를 할 수 있도록 기표 기구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서 불편하나마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거 때마다 나 자신의 선택이 공개되는 권리 침해를 받았으며, 투표소 관리자들도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인도에는 시각 장애인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서 유도 블록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시각 장애인의 안전하고 편리한 통행을 위해 설치된 유도 블록이 오히려 이들의 통행을 위협하는 경우가 흔하다. 유도 블록이 잘못 설치되어서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갈 수 없거나 유도 블록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 있어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는 일도 잦다. 어떤 곳은 도로의 폭이 달라지는 지점에서도 유도 블록이 계속 이어져서 시각 장애인의 통행을 방해하기도 한다. 소방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유도 블록이 끊어져서 조심스럽게 끊어진 인도를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차도로 들어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크게 놀라곤 한다. 잘못하여 차도로 들어선 자신을 향해 울려 대는 경적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몸도 불편한 사람이 혼자서 길거리에 나와서 위험하게 다닌다고 욕을 해 대기도 하였다. 통행이 많은 길에서 유도 블록 위에 좌판을 설치해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유도 블록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흰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다 보면 시각 장애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주차 금지를 위해 설치해 놓은 볼라드와 인도 쪽으로 튀어나온 돌출 간판과 가게 앞에 세워 놓은 입간판, 불법 주차 차량, 뚜껑을 열어 놓은 맨홀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볼라드는 인도 위 주차를 막기 위해 설치해 놓았다고는 하지만 무릎보다 조금 낮은 높이로 설치되어 있어서 흰지팡이를 짚고 가다 보면 지팡이로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흰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경우 보행 속도로 말미암아 위험물을 감지하고 나서 걸음을 멈춘다 하더라도 관성으로 곧바로 멈추어 서기는 어려운데, 지팡이로 감지되지 않는 볼라드에 정강이를 부딪히는 날이면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증을 감내해야만 하고, 조금만 부딪혀도 바로 피가 나는 상처가 치료되기까지 또 얼마나 아픔에 시달려야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볼라드는 즉시 철거되어야 할 것이다. 인도 위 불법 주차를 막기 위해서라면 엄격한 단속과 처벌, 그리고 시민 의식의 제고를 통해 해결하여야 할 것이지 시각 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장애인들의 통행을 방해하면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곳곳에 볼라드를 설치할 일은 아니다.
  인도 쪽으로 돌출된 간판에 부딪혀 이마가 깨지고 피가 날 때마다 혼자서 거리에 나서기가 두려워서 단독 보행을 주저하게 되는데, 이것이 몸의 상처가 마음의 상처로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보행이 곤란하여 혼자서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지내는 시각 장애인들이 많은데, 안전하게 혼자서 보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보다 많은 시각 장애인들이 당당하게 거리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져서 크게 다친 시각 장애인들의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되는데, 비장애인들은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도 있지만 시각 장애인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맨홀은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지금은 편의 시설법이 제정되어 있어서 신축 건물이나 공용 건물 등의 엘리베이터에 음성 안내와 점자 표기가 의무화되고 있어서 시각 장애인들이 건물을 오르내리기에 편리해졌지만 아직도 엘리베이터에 점자 표기가 잘못되어 있어서 시각 장애인들의 출입을 불편하게 하는 건물이 많다. 건물을 신축할 때 시각 장애인 기관에 조언을 구한다면 부적절한 편의 시설로 장애인들이 불편을 겪고 안전을 위협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각 장애인은 각종 정보로부터 너무나 소외되어 있다. 가게마다 진열되어 있는 숱한 상품 중에 시각 장애인을 위해 점자로  이름이나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필요한 상품명과 정보를 점자로 제공한다면 시각 장애인들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쇼핑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종 고지서나 민원 서류가 점자로 제공되지 않아서 시각 장애인이 그 내용을 알려면 일일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극히 비생산적이다. 시각 장애인들이 요구할 경우에 고지서나 민원 서류 등을 점자로 제공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부담감을 덜 수 있다.
  시각 장애인들은 신문이나 잡지 등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흐름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하여 사회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부 복지관에서 일간지나 주간지 등을 녹음하여 시각 장애인들에게 제공하고 있으나 일일이 녹음을 해야 하니 인력의 낭비가 심하고 이들 정보 중에는 뒤늦게 제공되는 것이 많다.
  오늘날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을 통하여 비장애인들은 많은 정보를 얻고 있지만 시각 장애인들은 인터넷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음성을 지원하는 스크린리더 프로그램이 있어서 시각 장애인들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지만 인터넷 환경의 경우 많은 사이트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이콘의 글자가 그림으로 되어 있어 아이콘에 별도로 텍스트를 붙여 놓지 않은 사이트들은 시각 장애인이 해당 사이트에 접속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내용을 들을 수 없고, 아이콘에 텍스트를 첨가해 놓은 일부 사이트의 경우에도 시각 장애인이 소리를 들으며 사이트 내의 여러 공간을 이동하고 제공된 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지 않아서 이용하기가 어렵다.
  도서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각 장애인의 독서 생활을 위해 점자 도서나 녹음 도서, 컴퓨터 파일을 제공하는 시각 장애인 복지관이나 점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의 경우 전체가 1만 여권에 지나지 않으며, 소장 도서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소설 등 베스트셀러류에 지나지 않아서 전문적인 지식의 습득이나 대학 공부 등을 원하는 시각 장애인들은 각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녹음이나 입력을 부탁해야만 하는 실정이다.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책을 언제든지 점자나 테이프, 파일의 형태로 제공받지 못하고, 필요한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신속하게 접하지 못하는 것은 시각 장애인이 근원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각 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장애인들이 보험 가입을 제한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제도적으로 장애인을 차별하는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나 역시 보험 가입을 하려다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몇 번이나 거부를 당한 일이 있다. 2006년에 유엔에서 통과된 국제 장애인 권리 협약에서는 보험 가입과 관련하여 장애인들의 차별을 금하고, 국내법에서 이러한 차별 조항이 있는 법률을 개정하도록 하고 있으나 우리 정부는 장애인의 보험 가입과 관련된 조항을 유보한 상태로 국제 장애인 권리 협약을 비준하려 하고 있으며, 장애인 차별 금지법도 장애인의 보험 가입과 관련된 차별을 막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장애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행태 역시 시각 장애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흰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다니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나를 도와준답시고 지팡이를 잡아당기거나 내 팔을 잡고 막무가내로 이끄는 경우가 있는데, 시각 장애인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안내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시각 장애인에게 불편을 주게 되는 것이다. 가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딸은 나를 안내하다가 지팡이를 길에 아무렇게나 두기도 하고 아내는 옆에 장애물이 있는 것을 간과한 채 나를 안내하다가 어깨를 부딪히게 하기도 한다.
  한번은 일행과 함께 등산을 갔는데, 내려오시던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는 우리들을 보고는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힘이 없나 하면서 혀를 차는 일도 있었고, 지팡이를 짚었다고 버릇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빈 좌석이 많이 있는데도 승객들이 어느 곳에 빈자리가 있는지 알려 주지 않아서 자리를 두고서도 서서 가야 했던 때가 많다. 내가 흰지팡이를 짚고 서 있어도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만국 공통의 시각 장애인 보조 기구인 흰지팡이에 대하여 시민들이 좀 더 이해하고 시각 장애인을 만났을 때 안전하고 편리하게 안내해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시각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인해 이들은 큰 상처를 받고 있다. 한번은 혼자서 길을 가는데 뒤에서 “어이, 봉사 아저씨”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기분이 상했다. 물론 ‘봉사’라는 말은 ‘참봉’이라는 말과 함께 조선 시대 시각 장애인들이 종사했던 벼슬의 이름으로서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사’나 ‘참봉’, ‘장님’이라는 말이 그동안 우리 사회의 시각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멸시, 낙인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용어이므로 시각 장애인들이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일부러 봉사니 장님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장애인을 위한 각종 법과 제도가 마련되고 있고, 장애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 깊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장애인을 대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오는 차별과 인권 침해가 상존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인권 침해를 막고 장애인도 당당한 시민으로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장애인 스스로 권리와 의무의 주체인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으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장애인도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는 보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 조성되기를 소망해 본다.

  생활 수필

  붉은 바위(홍바우)

  김진섭(수필가)

  사방에서 봄 향기가 물씬 풍겨 오고 사람들 마음은 봄바람 따라 설레고 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봄을 향한 울렁임이 기지개를 켠다.
  나는 산이 많은 두메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내게는 잊지 못할 산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어쩌다 한 번쯤 달려가 보고 싶은 그런 산이다. 그 이름은 태기산이다.
  나에게는 위로 누나가 세 분이 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딸은 아무리 많아도 아들이 꼭 있어야 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남모르게 아들을 낳고자 기도를 시작하셨다. 마을을 서너 개쯤 지나서 산골짝을 넘고 넘어 찾아 낸 곳이 태기산이었다. 정성을 다해 빌면 태기가 있게 해 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산 중턱에는 천연 동굴이 하나 있었다. 그 동굴 옆에는 붉은색을 띤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사람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 바위가 우리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 만드는 신이 되었다. 한 달에 두세 번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먼 길을 걸어가서는 치성을 드리고, 어쩌다 날이 저물어 늦어지면 아예 그 동굴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셨다.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그로부터 2년 뒤에 나는 태어났다. 그때 치성을 드리던 바위 이름을 따서 나는 어릴 적 잠시 ‘홍바우’라고 불렸다. 그렇게 바위에 빌어서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 어머니의 등에 업히고 치마꼬리에 매달려 그 산을 처음 갔었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나는 양어머니가 한 분 있었다고 한다. 삼신할머니가 시샘하여 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어느 점쟁이의 말 때문에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을 양어머니로 모셨다고 한다. 그 양어머니는 태기산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기억 나지 않는다. 어느 화창한 봄날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기도를 하고자 동네 아주머니들과 태기산에 갔다. 산으로 가는 길은 내게 너무도 힘들고 걷기 험한 길이었다. 산을 넘고 또 넘어 비탈길을 올라가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나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길옆으로 비켜섰다. 함께 가던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먼저 가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와 오르던 산길을 돌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계곡에서 밥을 지어 허기를 면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며칠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나에게 그날 산을 내려온 연유를 말씀하셨다. 산신령께서 그날은 치성을 드리지 말고 돌아가라고 일러 주었다고 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그날 상황을 내게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산을 오르던 중에 어머니 눈에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내 발 앞을 가로질러 지나갔다고 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니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신기한 일이 있은 후에도 나는 어머니를 따라 몇 번 그 산에 가서 바위에 절을 하고, 동굴 옆에 흐르는 계곡물에서 놀기도 했었다.
그런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차츰 그 산을 잊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후로도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가끔 치성을 드리려고 태기산을 찾으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면서 나는 그 태기산을 추억 속에 묻어 버렸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숨을 쉬고 있는 그 산은 이제 영영 볼 수가 없다. 울창한 숲 속에 온갖 새가 재잘거리며 노래하던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엄마의 품처럼 포근했던 산들이 인간의 허영에 의해 허리가 잘리고 가슴이 뚫린 채 사라졌다. 그런 잔혹한 짓을 하고도 사람은 염치없이 또 산을 찾는다. 산을 오르려고 또 하나의 산이 한숨을 쉬고, 이름 모를 다른 산이 가슴을 친다. 마치 산과 산이 도로에 꿰어진 고기 산적 같아 보기도 흉물스럽다. 우리는 언제쯤 산을 위해 모든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 산이 제각기 자신의 모습으로 활짝 웃는 날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사시사철 자신들의 멋진 옷을 갈아입도록 지켜 주었으면 한다. 더는 산에 가슴 뚫린 아픔이 없기를 바란다.
  홍바우가 사라짐으로써 이제껏 간직해 온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렸다. 그 마음의 고향을 이따금 꿈속에서 만나곤 한다. 비록 가슴에 묻었으나 내 삶의 한 때는 언제나 산이다. 그래서 힘들 때나 괴로울 때나 삶의 위안이 필요할 때면 늘 그리워 달려가곤 한다.

  문화원 소식

  1월 5일  오후 5시 문화 나들이 행사로 롯데시네마 프리미엄 만경관에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관람하였습니다.

  3월 9일  제161차 역사 문화 기행으로 경상북도 예천군의 용문사, 초간정, 금당실, 병암정, 선몽대 등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우리나라 유일의 윤장대를 비롯한 10여 점의 성보 문화재, 조선 숙종 때 조성된 한국 최고의 목각 탱화를 감상하였습니다.
  
3월 14일, 3월 21일, 3월 28일, 4월 4일  본 문화원과 시립수성도서관 공동 주관으로 이태호 박사의 찾아가는 인문학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3월 30일  오후 3시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관람하였습니다.
  
4월 11일, 4월 18일  지성학원 윤일현 이사장의 ‘제4차 산업 혁명과 아날로그적 감성―시 읽고 쓰기’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4월 13일  제162차 역사문화기행으로 경기도 수원의 수원 화성, 화성 행궁을 다녀왔습니다. 화성 행궁은 정조가 능원을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서, 평소에는 부사나 유수의 집무소로, 567칸의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축성술과 선현들의 지혜를 엿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4월 25일, 5월 2일  영화평론가 겸 철학박사 이강화 강사의 ‘영화 감상 몇 배로 즐기기’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5월 9일  대구시립극단 수석배우 천정락 강사의 ‘인생은 연극’이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5월 11일  제163차 역사 문화 기행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일원의 달전리 주상절리, 상달암, 봉강재, 덕동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높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주상 절리가 시각 장애인에게 선뜻 와 닿지는 않았지만 해설사의 상세한 해설과 봉사자들의 친절한 안내로 손끝으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문화 기행이 되었습니다.
  
5월 16일  최금희 탈북민 인문학 강사의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5월 22일  오후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 홀에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장애인가족 지원센터에서 주최한 ‘행복 드림 콘서트’를 관람하였습니다.
5월 23일, 5월 30일, 6월 13일  음악 칼럼니스트 성영헌 강사의 ‘러시아 클래식’이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6월 8일  제164차 역사문화기행으로 충청북도 단양 일원의 단양적성, 도담 삼봉, 석문, 단양강 잔도, 선사 유적, 사인암을 다녀왔습니다. 단양적성은 동서로 긴 타원형의 안장 모양을 한 테뫼식 석축 산성입니다. 계단과 경사로가 많아서 걷기에 힘들었지만 시각 장애인과 봉사자가 하나 됨을 보여 준 날이었습니다.
  
6월 20일 국외여행가 노현태 강사의 ‘유럽 여행 100배 즐기기’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6월 27일  신학박사, 계명대학교 김재현 강사의 ‘즐거운 윤리학―스토아학파 철학자 에피쿠로스’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6월 29일  오후 7시 계명아트센터에서 뮤지컬 ‘투란도트’를 관람하였습니다.
  
7월 4일  통청 아카데미원장 이태호 박사의 ‘노자를 알면 왜 편안해지는가?’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7월 5일  오후 5시 아양아트센터에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관람하였습니다.
  
7월 11일  전 경북 대학교 총장 박찬석 박사의 ‘삶의 지혜’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7월 13일  제165차 역사 문화 기행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일원의 실상사, 지리산 뱀사골, 퇴수정을 다녀왔습니다. 날씨가 더웠지만 주파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목표점에 도달하였습니다.
  
7월 18일  중국문학 박사 강경희 강사의 ‘논어―앎이 삶이 되는 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7월 25일  중국문학 박사 강경희 강사의 ‘시경―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시 쓰기’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8월 10∼11일  제166차 역사문화기행으로 강원도 강릉시 일원의 허균, 허난설헌 유적지와 명주 청학동, 소금강, 경포대 등을 다녀왔습니다.
㈜케이토토의 지원을 받아서 유서 깊은 도시 강릉의 명승지와 유적지를 돌아보며 뛰어난 문장가들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속담 맞히기 등 재미있는 게임으로 화합의 장이 되었습니다.

8월 24일  오후 5시 아양아트센터에서 연극 ‘월곡동 산 2번지’를 관람하였습니다.

9월 19일  통청 아카데미원장 이태호 박사의 도덕경을 소재로 한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9월 21일  제167차 역사문화기행으로 경북 안동시 일원의 만휴정 원림, 백운정, 개호송 숲, 지례동 오류헌, 호계 서원을 다녀왔습니다.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성지에 걸맞은 품위와 산수화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만휴정은 조선의 선비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정자였습니다.
  
9월 26일  시낭송가 오지현 강사의 시 낭송에 대한 인문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본 문화원을 도와주신 분들


㈜평화발레오, 현재만치과, ㈜케이토토, 분도치과, 세라젬침산점, 대구희망신협, 북성로신협, 청운신협, 대구시각장애인복지관, 대구점자도서관,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안마사협회 대구지부, 코오롱떡집, 보원덴탈,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수성구지회,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중구지회


강경희, 강대성, 강명애, 강선옥, 권태옥, 권호종, 김경옥, 김경흠, 김광우, 김기용, 김동억, 김명한, 김수희, 김영대, 김은철, 김인순, 김재룡, 김정환, 김정희, 김진도, 김창연, 김칠봉, 김태자, 김현기, 김현준, 도제헌, 류호철, 마원민, 마인섭, 박기석, 박순정, 박영숙, 박오희, 박재형,박 정, 박현철, 박희숙, 반용흠, 배경애, 백기종, 변기식, 서복순, 성영헌, 손명란, 손일원, 손창호, , 손춘수, 송무근, 송미라, 송승헌, 송준관, 신봉기, 신윤, 안승철, 양진모, 여길화, 오기주, 오성용, 오재경, 우성정, 윤일현, 이민영, 이삼승, 이석규, 이성율, 이성환, 이수영, 이영수, 이우녕, 이원형, 이위경, 이윤하, 이일우, 이재민, 이제상, 이종순, 이종우, 이준호, 이진우, 이창훈, 이태호, 장경희, 장석범, 정갑태, 정경미, 정덕기, 정연원, 정종규, 정해관, 조영우, 조해정, 최금희, 최동철, 허지원, 현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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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금주 (사)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발행․2019년 10월 1일
발행인․김현준
제  작․이창훈
편  집․김창연
교  열․이석규
디자인․이은진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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