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합니다.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입니다.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홈페이지로
문화원 안내
문화원 발자취
회원가입 안내
도우미를 기다립니다
공지사항
남기고 싶은 이야기
문화 엣세이
우리문화읽기
프로그램 안내
정보지원센터
사진실
계간 시각과 문화
자료실
 
   
 
 

 *
2011년 겨울호 (통권30호)

UPLOAD 1 ::시각과문화30호_내지_1차.pdf (770.2 KB) | DOWN : 623

UPLOAD 2 :: 시각과문화30호_표지안.pdf (1.33 MB) | DOWN : 618
계간
시각과 문화
2011년 겨울호(통권30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국어를 신중히 다루라 _ 이석규

Pops English
To Live Without Your Love -Monika Martin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陳情表(진정표)  - 李密(이밀)  _ 이석규 역

서평
털 없는 원숭이 (The Naked Ape) _ 최성재

우리가 답사한 유적


괴산을 다녀와서  _ 방지원
하동길, 따로 또 같이_ 최점화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 여성들의 차별 극복과 인권을 위해 _ 김명주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국어를 신중히 다루라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지난 8월 국립 국어원에서는 새로 추가한 표준어 39개를 발표하였다. 그 추가한 단어는, ‘간지럽히다(간질이다)’, ‘남사스럽다(남우세스럽다)’, ‘맨날(만날)’, ‘묫자리(묏자리)’, ‘허접쓰레기(허섭스레기)’, ‘걸리적거리다(거치적거리다)’, ‘나래(날개)’, ‘내음(냄새)’, ‘눈꼬리(눈초리)’, ‘끄적거리다(끼적거리다)’, ‘두리뭉실하다(두루뭉술하다)’, ‘떨구다(떨어뜨리다)’, ‘먹거리’, ‘바둥바둥(바동바동)’, ‘새초롬하다(새치름하다)’, ‘손주(손자와 손녀의 병칭)’, ‘오손도손(오순도순)’ 등이다. 이번의 발표를 보면서 과거의 신중하지 못하였던 조처가 떠올라서 마음이 적잖이 언짢다. 예컨대, 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하도 자주 바꾸어서 학교를 나올 만큼 나오고도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로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외래어 표기법은 너무 많은 예외를 인정해서 거의 규칙이 없다시피 되어 버렸고, 띄어쓰기 규정에서는 띄어쓰던 성과 이름을 붙여 쓰게 한 결과, 언론인 중에도 자기의 성과 이름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장모음 표기를 없앤 결과, 모든 장음 단어를 단음으로 발음하고 그 대신 원어에서는 자음으로 끝나서 음절도 형성되지 않는 부분을 강세까지 두어 발음하게 되었다.  
  금번에 추가 발표된 표준어도 과거의 다른 발표처럼 심의의 경솔함과 불합리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39개 전체가 각각 큰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그러한 문제점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리말 조어법에 맞지 않는 말까지 표준어로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 예로 ‘먹거리’를 들 수 있다. ‘볼거리’, ‘읽을거리’는 조어법에 맞으므로 단어가 될 수 있지만 ‘보거리’, ‘읽거리’는 조어법에 맞지 않으므로 단어가 될 수 없다. 이 점은 한국인이면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누구나 즉시 수긍할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거리’는 조어법에 맞으므로 단어가 될 수 있지만, ‘먹거리’는 조어법에 맞지 않으므로 단어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음료’를 ‘마실거리’로 순화한다면 무리가 없겠지만 ‘마시거리’로 한다면 단어가 될 수 없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와 같이 조어법상 도저히 단어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을 ‘살아가기 위해 먹는 음식을 통틀어 이름.’이라는 풀이까지 붙여 새로 표준어로 인정하였다는 것은 국어 심의 위원회 위원들의 수준과 심의의 진지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둘째는 방언을 표준어로 인정하면서도 그 방언의 쓰임이나 체계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남사스럽다’와 ‘새초롬하다’를 들 수 있다. ‘남사스럽다’는 ‘남사시럽다’라는 방언을 비논리적인 규칙에 의거해서 표준어로 만든 말이다. 즉, ‘지름’을 ‘기름’으로 하니 표준어가 된 경험에 의거하여 ‘짐승’을 ‘김승’이라고 하면 표준어가 된다는 비논리적인 규칙, 즉 부정 회귀에 의하여 방언을 표준어로 바꾼 말이다. 부연하면, 방언의 ‘-시럽다’를 ‘-스럽다’로 바꾸면 표준어가 되는 실례를 보고 ‘남사시럽다’ 전체의 표준어를 찾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접미사 ‘-시럽다’만 ‘-스럽다’로 바꾸어서 써 온 말이 ‘남사스럽다’이다. 이러한 것까지 표준어로 인정한다면 ‘계추(계취)’, ‘낑기다(끼이다)’, ‘놀래키다(놀래다)’ 등도 마땅히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남우세스럽다’에서 ‘남’을 뺀 ‘우세스럽다’라는 단어는 있지만 ‘남사스럽다’에서 ‘남’을 뺀 ‘사스럽다’는 없다. 그 이유는 ‘남사시럽다’는 ‘남우사시럽다’의 준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사시럽다’는 실제로 쓰이는 말이니 ‘남사스럽다’를 표준어로 인정한다면 ‘우사스럽다’도 함께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새초롬하다’를 표준어로 인정한다면 그 큰말인 ‘시추룸하다’도 함께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새치름하다’의 큰말이 ‘시치름하다’이듯이 ‘새초롬하다’의 큰말이 ‘시추룸하다’인데, 둘 다 많이 쓰이는 작은말-큰말 관계에 있는 한 쌍의 말에서 어느 한 단어만 표준어로 인정하고 다른 하나는 버린다는 것은 모순이다. 비슷한 예로, ‘걸리적거리다’를 ‘거치적거리다’와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였는데, ‘거치적거리다’에는 ‘가치작거리다’라는 작은말이 있지만 ‘걸리적거리다’에는 ‘갈리작거리다’라는 작은말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말은 ‘걸리다’와 ‘거치적거리다’를 혼합해서 만든 말이므로 큰말이나 작은말이 있을 수 없다. 같은 뜻을 지닌 사용 빈도 높은 방언 중에서 큰말-작은말의 쌍으로 된 것으로 ‘걸거치다-갈가치다’가 있는데, 차라리 이 말들을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이 ‘걸리적걸리다’를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언중의 지지도 받을 것이다. ‘바둥바둥’도 새로 표준어에 포함시켰는데, 우리말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모음 조화에서 큰말-작은말 체계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큰말-작은말 체계는 ‘촐랑촐랑-출렁출렁’, ‘캉캉-컹컹’, ‘해롱해롱-희룽희룽’ 등과 같이 두 단어 쌍이지 세 단어 쌍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둥바둥’을 표준어로 인정하였으니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체계를 도입한 셈이다. 그러니까 ‘바동바동-버둥버둥’이 작은말-큰말 관계였는데, 여기에 ‘바둥바둥’을 사이에 넣는다면 ‘작은말-중간말-큰말’이라는 새로운 체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치 ‘깡총깡총’과 ‘껑충껑충’ 사이에 ‘깡충깡충’을 넣어서 ‘깡총깡총-깡충깡충-껑충껑충’의 세 단어쌍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20여 년 전에 ‘깡총깡총’은 표준어에서 제외하고 ‘깡충깡충’만을 표준어로 인정하였었다. ‘바둥바둥’을 써 온 사람은 ‘버둥버둥’이나 ‘바동바동’을 의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은말-큰말이라는 체계 의식이나 어감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관계를 인식했다면 다른 모든 의태어에 있는 큰말이나 작은말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러한 노력을 했더라면 올바른 관계에 있는 말을 못 찾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추가 표준어 발표에서 엿볼 수 있는 국어원의 경솔함의 극치는 ‘오손도손’이다. 이 단어도 20여 년 전에 표준어에서 제외하고 ‘오순도순’만을 표준어로 인정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느닷없이 전에 버렸던 말을 새로 주워 와서 다시 표준어로 삼은 것이다. ‘깡총깡총’을 버리고 ‘깡충깡충’을 표준어로 인정한 것과 똑같은 처사인데, 이왕 도로 주워 올 바에야 ‘깡총깡총’도 같이 주워 올 일이지 왜 하나만 주워 오는지 의심스럽다. 다음에 주워 오려고 일부러 남겨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립국어원은 언어 사용 실태 조사 및 여론 조사를 통하여 국민의 언어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그 결과를 규범에 반영함으로써 국민들이 국어를 사용할 때에 더욱 만족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계획이라고 한다. 마치 국회의원 선거 후보가 선거구 주민들의 생활의 불편 사항을 찾아서 해결해 주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우는 어투이다. 표준어를 몰라서 불편해할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표준어인지 방언인지,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방송이나 글을 통해서 퍼뜨린 말들이 이번에 표준어로 추가되어 발표된 말들이다. 이 말들을 표준어로 인정해 주니 그들의 불편을 해소해 준다고 고마워하겠는가. 표준어로 인정되기 전에 위에 열거한 단어들을 쓰던 사람들이 그것들이 표준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했겠는가. 그 사람들이 국어 사전을 단 한 번이라도 검색해 보았겠는가. 국어 심의 위원회 위원들이 진실로 국어를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국어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고 그들에게 올바른 국어를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표준어든지 비표준어든지 전혀 관심없고 사전이 무엇인지 어문 규정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살다가 생을 마칠 사람들을 위해서 국어를 다룰 것이 아니라, 국어를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국어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어원에 있는 사람들부터 의미를 좀 생각해 가면서 국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초등 학교의 교과서 말미에 있는 해당 교과서 제작진 명단 끝에는 ‘국립 국어원 어문 규범 감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도대체 ‘감수’가 무슨 뜻이기에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일까? 또 표준 국어 대사전의 10만 단어를 유명 아나운서들이 육성으로 발음을 하여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있다. 그 발음을 국립 국어원에서 감수를 했다고 적어 놓았는데, 이렇게 쓰인 ‘감수’는 무슨 뜻일까.
  문화의 창조, 전수, 계승, 전파의 일차적인 수단이 언어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모든 문화 소산에는 그 창조자나 향유자의 정신이 반영되게 마련이고, 창조자의 정신을 올바로 표현하고, 그 반영되어 있는 정신을 바로 해석해 내는 수단이 언어이므로, 이러한 언어가 혼탁해지고 불명료해지면 그 언어 사용자의 정신 또한 혼탁해지고 불명료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혼탁하고 불명료한 정신으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하거나 향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어 정책을 수립하고 어문 규정을 다루는 기관에서는 국어 정책 입안 시에 근시안적이고 인기 영합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원시안적이고 신중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날로 흐려 가는 우리 국민의 정신을 맑게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Pops English

   To Live Without Your Love -Monika Martin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Why does my heart keep yearning
Knowing there's no returning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Why must I keep pretending
I see a happy ending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Yet still I go on hoping
You'll come to me at last
It seems I'm only groping for
something in the past

Though I may keep on trying
Slowly my heart is dying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Without your hand to lead me
Now you no longer needed me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Yet still I go on hoping
You'll come to me at last
It seems I'm only groping for
something that is past

왜 내 마음은 이토록 그리워할까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왜 나는 해피 엔딩을 맞이한 척해야 하나요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아직도 나는 당신이 결국
내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어요
그것은 내가 지난날의 어떤 것을
더듬어 찾으려는 것 같아요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내 마음은 서서히 시들고 있어요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나를 이끌어 줄 당신의 손이 없고
당신은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아직도 나는 당신이 결국
내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어요
그것은 내가 지난날의 어떤 것을
더듬어 찾으려는 것 같아요

  * Monika Martin
  모니카 마틴은 196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서정적인 국민 가수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노래는 그리스 출생인 NaNa Mouskouri (나나 무스쿠리)에 의하여 1964년에 처음으로 출반되었는데 그 후에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송창식, 윤형주(트윈 폴리오)가 1980년대에 ‘하얀 손수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러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유머

1. 신혼 부부
The bride wanted to disguise the fact that they were honeymooning and asked her husband while on the plane if there was any way they could make it appear that they had been married for a long time.
"Sure," said the husband, "you carry the bags."

  신부는 신혼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 신랑을 보고 결혼한 지 오래된 부부같이 보일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있지. 짐들을 당신이 들고 다니면 되는 거요."

2. A candidate for governor in a southern state of the United States was asked what he planned to do if elected.
"That's not worrying me at all," he replied.
"What I am concerned about is what I will do if I'm not elected."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지사로 출마한 사람을 보고 당선하면 무엇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당선하지 못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가 그 후보의 대답이었다.


명시와 명문

陳情表(진정표)                                                          
                          李密(이밀)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臣密言(신밀언) : 신 밀은 아뢰나이다.
臣以險釁(신이험흔)으로 : 신은 운수가 기박하니
夙遭愍凶(숙조민흉)하여 : 일찍이 민흉을 당하여
生孩六月(생해육월)에 : 난 지 여섯 달 만에
慈父見背(자부견배)하고 : 아비를 여의었고
行年四歲(행년사세)에 : 네 살에는
舅奪母志(구탈모지)니이다 : 외숙이 어미를 개가시켰나이다.
祖母劉閔臣孤弱(조모유민신고약)하여 : 조모가 고아가 된 신을 불쌍히 여겨
躬親撫養(궁친무양)이니다 : 손수 무육하였나이다.
臣少多疾病(신소다질병)하여 : 신은 유시에 다병하여
九歲不行(구세불행)하고 : 아홉 살이 되도록 보행을 하지 못했었나이다.
零丁孤苦(영정고고)하며 : 의지가지없어 홀로 신고하며
至于成立(지우성립)하니 : 장성하였사오나
旣無叔伯(기무숙백)이오 : 윗대에는 백숙부가 없고
終鮮兄弟(종선형제)니이다 : 당대에는 형제가 적으니
門衰祚薄(문쇠조박)하여 : 가문이 쇠미하고 복조가 박한 까닭이니이다.
晩有兒息(만유아식)하니 : 늦게 자식을 두었으니
外無朞功强近之親(외무기공강근지친)이요 : 밖으로는 기공의 근친이 없고
內無應門五尺之童(내무응문오척지동)이니이다 : 안으로는 문전에서 손을 맞을 삼척 동자 하나 없나이다.
煢煢孑立(경경혈립)하여 : 홀로 외롭게 지내면서
形影相吊(형영상조)어늘 : 몸과 그림자가 서로 위로할 따름이온데
而劉夙嬰疾病(이유숙영질병)하여 : 조모도 일찍이 병을 얻어
常在牀褥(상재상욕)하니 : 매양 자리 보전하고 있으므로
臣侍湯藥(신시탕약)하여 : 신은 시탕하며
未嘗廢離(미상폐리)로이다 : 곁을 떠난 적이 없나이다.
逮奉聖朝(체봉성조)에 : 성조를 받들게 되어
沐浴淸化(목욕청화)하여 : 청화를 입고 있나이다.
前太守臣逵(전태수신규)가 : 전임 태수 규는
察臣孝廉(찰신효렴)하고 : 신을 효렴으로 천거하였고
後刺史臣榮(후자사신영)이 : 후임 자사 영은
擧臣秀才(거신수재)하나이다 : 신을 수재로 천거하였사오나
臣以供養無主(신이공양무주)로 : 신은 공양자가 없는 고로
辭不赴(사불부)러니 :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사옵더니
會詔書特下(회조서특하)하사 : 마침 특별히 조서를 내리사
拜臣郞中(배신랑중)하시고 : 신을 낭중에 배하시었고
尋蒙國恩(심몽국은)하여 : 얼마 후 또 국은을 입었으니
除臣洗馬(제신세마)하시니 : 신을 세마에 제수하셨음이니이다.
猥以微賤(외이미천)으로 : 외람되이 미천한 몸으로
當侍東宮(당시동궁)이라 : 동궁을 시측하게 되니
非臣隕首所能上報(비신운수소능상보)니이다 : 신이 목숨을 바쳐도 다 갚을 수 없는 고로
臣具以表聞(신구이표문)하여 : 신은 표로써 구진하고
辭不就職(사불취직)이러니 : 사퇴하고 도임하지 않았었나이다.
詔書切峻(조서절준)하여 : 다시 조서로써
責臣逋慢(책신포만)하시고 : 신의 포만함을 준절히 책망하시니
郡縣逼迫(군현핍박)하여 : 군과 현에서는 핍박하며
催臣上道(최신상도)하니 : 신이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고
州司臨門(주사임문)이 : 주의 관원들은 문전에 와서
急於星火(급어성화)니이다 : 성화같이 서두르나이다.
臣欲奉詔奔馳(신욕봉조분치)인댄 : 신도 성조를 받들어 달려가고 싶사오나
則以劉病日篤(즉이유병일독)이오 : 조모의 병이 날로 위독해지고
欲苟順私情(욕구순사정)인댄 : 구차히 사정을 따르고자 하여도
則告訴不許(즉고소불허)하니 : 호소가 불허되니
臣之進退(신지진퇴)가 : 신의 진퇴가  
實爲狼狽(실위낭패)로소이다 : 실로 낭패니이다.
伏惟聖朝(복유성조)가 : 엎드려 생각건대 성조는
以孝治天下(이효치천하)하사 : 효도로 천하를 다스려서
凡在故老(범재고로)라도 : 모든 노인들이 살아서
猶蒙矜育(유몽긍육)하니 : 긍육되고 있나이다.
況臣孤苦(황신고고)가 : 더욱이 신은 홀로 신고함이
特爲尤甚(특위우심)이니이다 : 남달리 우심하니이다.
且臣少事僞朝(차신소사위조)하여 : 또한 신은 젊어서 위조를 섬겨
歷職郞署(역직랑서)하니 : 낭서를 지냈으므로
本圖宦達(본도환달)하여 : 본시 환달은 바랐으나
不矜名節(불긍명절)이니이다 : 명절을 자랑하지는 않았나이다.
今臣亡國之賤俘(금신망국지천부)라 : 이제 신은 망국의 천한 포로로
至微至陋(지미지루)어늘 : 지극히 미천하고 지극히 비루함에도
過蒙拔擢(과몽발탁)하니 : 과분하게 발탁되니
寵命優渥(총명우악)하온대 : 총명이 우악하옵거늘
豈敢盤桓(기감반환)하며 : 어찌 감히 주저하며
有所希冀(유소희기)이리까 : 바라는 바가 있겠나이까
但以劉(단이유)가 : 다만 조모가
日薄西山(일박서산)하여 : 해가 서산에 걸린 것처럼
氣息奄奄(기식엄엄)하니 : 기식이 엄엄하여
人命危淺(인명위천)하여 : 목숨이 위태로우니
朝不慮夕(조불려석)이니이다 : 조불려석이니이다.
臣無祖母(신무조모)면 : 신에게 조모가 없었다면
無以至今日(무이지금일)이오 : 오늘까지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요
祖母無臣(조모무신)이면 : 조모에게 신이 없다면
無以終餘年(무이종여년)이니 : 여년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니
母孫二人(모손이인)이 : 조모와 손자 양인이  
更相爲命(갱상위명)이니이다 : 서로 목숨을 이어 주고 있나이다.
是以區區(시이구구)하여 : 이런 까닭으로 소심해져서
不能廢遠(불능폐원)이로소이다 : 능히 그만두고 멀리할 수 없나이다.
臣密(신밀)은 : 신 밀은
今年四十有四(금년사십유사)오 : 올해 마흔넷이요
祖母劉(조모유)는 : 조모 유씨는
今九十有六(금구십유육)이니 : 이제 아흔여섯이니
是臣盡節於陛下之日長(시신진절어폐하지일장)하고 : 신이 폐하께 충절을 다할 날은 많고
報劉之日短也(보유지일단야)니이다 : 조모에게 보은할 날은 적으니이다.
烏鳥私情(오조사정)이 : 까마귀의 반포지정으로
願乞終養(원걸종양)하노니 : 끝까지 봉양하기를 허락하시기를 바라나이다.
臣之辛苦(신지신고)는 : 신의 신고함은
非獨蜀之人士(비독촉지인사)와 : 촉의 인사들만이 아니라
及二州牧伯所見明知(급이주목백소견명지)니이다 : 양주의 목백까지도 보고 밝히 알고
皇天后土(황천후토)가 : 황천과 후토도
實所共鑑(실소공감)이시니이다 : 실로 함께 감찰하시는 바니이다.
願陛下(원폐하)는 :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矜愍愚誠(긍민우성)하사 : 우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廳臣微志(청신미지)하여 : 신의 작은 뜻을 청허하소서.
庶劉僥倖(서유요행)하여 : 바라옵기는 조모가 요행히
卒保餘年(졸보여년)이면 : 여년을 보전한다면
臣生當隕首(신생당운수)요 : 신은 살아서는 마땅히 목숨을 바치고
死當結草(사당결초)리이다 : 죽어서도 마땅히 결초보은하겠나이다.
臣不勝怖懼之情(신불승포구지정)하여 : 신은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謹拜表以聞(근배표이문)하노이다 : 근배하고 표로써 아뢰나이다.

서평

털 없는 원숭이 (The Naked Ape)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 지음,  김석희 옮김, 정신세계사(1991), 266페이지)

글: 최성재

  인간은 태고 이래로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왔다. 종교와 철학이 가장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을지 모른다. 역사도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에 대한 기록이요 인간에 대한 탐구 노력이다. 그만큼 연원이 깊다. 넓은 의미에서 역사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구술로써 인간에 대한 탐구 결과를 후손에게 전했다.
  철학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인류학적인 접근과 정신의학적인 시도가 몇 세기 동안 유행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두 방법은 주로 정상적인 인간보다 비정상적인 인간을 다루었다. 이 책은 정상적인 인간을 동물학적 측면에서 바라본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역추적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동물적 측면을 정면에서 다룬다. 억지스럽고 꿰어 맞추기식으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아, 그렇구나!’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부분이 많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듯이, 또는 실험실의 동물을 관찰하듯이 아무 선입견이나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털 없는 원숭이’를 바라보고 관찰한 바를 나름대로 해설과 더불어 담담히 들려준다. 저자는 철저한 무신론자이다.
  영국의 유명한 동물행태학자인 데스몬드 모리스는 동물적 본능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니까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이해의 첩경이 동물학적 접근이라고 본다. 그러면 이 책이 인간의 본질을 속속들이 드러냈을까. 천만에! 여전히 인간은 수수께끼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지구상에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이 있는데, 딱 한 종만이 털이 없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만약 동물원에 인간도 전시한다면 그 이름을 ‘털 없는 원숭이’라고 하면 제일 적합할 것이다. 책의 제목은 바로 그런 발상으로 붙여진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털이 없는 것’ 외에 인간과 동물, 인간과 다른 원숭이나 유인원 사이에서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두뇌다. 지금까지는 단지 신체에 비해서 인간의 두뇌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강조했다. (두뇌 자체는 고래가 제일 크다.) 모리스는 유태보존(幼態保存)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아기의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을 이른다. 인간의 두뇌 발달은 이로써 크게 도움을 받는다. 다른 원숭이나 유인원은 태어날 때의 모습과 성장한 후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성장한다. 특히 놀라운 것은 두뇌 성장이다. 원숭이는 태어날 때 두뇌의 70%가 자란 상태다. 나머지 30%는 6개월 만에 다 자란다. 유인원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 침팬지도 생후 12개월 만에 두뇌 성장이 완성된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 그 두뇌가 성인의 23%밖에 안 된다. 23년이 지나야 두뇌가 다 자란다. 이것은 성적으로 성숙한 후에도 약 10년 동안 두뇌는 계속 자란다는 말이다. 침팬지가 생식 능력을 갖기 6~7년 전에 두뇌 성장이 멈추는 것과 크게 차이난다.
  인간은 두뇌가 23세까지 성장하므로 그때까지 완전히 독립하기가 힘들다. 자연히 부모는 자녀를 오랫동안 돌보아야 하고, 자식은 두뇌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계속 배워야 한다. 여자는 1명의 자식을 낳아도 약 20년 동안 보살펴야 하므로 남자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한다. 남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야 한다. 이때 섹스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털 없는 원숭이의 암컷은 생리 기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수컷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필요 때문이라고, 모리스는 주장한다. 인간이 모든 유인원 중에 제일 섹스를 밝힌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반론의 여지가 있다.
  인간은 원숭이와 침팬지 중간이라고 생각했으나, 새로운 종이 발견되었다. 보노보는 20세기 후반에 주로 연구되었는데, 이 유인원은 침팬지와 달리 암컷이 무리를 주도한다. 모계 사회다. 수컷의 서열은 어미의 서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인간 이상으로 호전적인 침팬지와 달리, 이들은 싸움을 모른다. 모든 걸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이 평화의 무기가 바로 섹스다. 보노보는 인간보다 훨씬 자주 섹스를 즐긴다. 남이 보거나 말거나!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정상체위가 이들에게도 정상체위다. 오르가즘도 느낌에 틀림없다. 절정에 달하면 인간 못지않게 교성을 지른다. 이들은 동성끼리도 긴장을 풀기 위해 섹스를 사용한다. 또한 인간 못지않게 사랑을 갈구한다. 인간과 친해지면 끊임없이 안아달라고 보챈다. 아예 착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2006년 인간과 동물 간 두뇌 차이를 분자생물학적으로 입증하는 획기적인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데이비드 하우슬러(David Haussler)는 ‘인간가속부위(Human Accelerated Regions: HARs)’를 발견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HARs 중에서 두뇌 발달과 관련된 HAR-1은 침팬지와 닭의 염기서열 차이는 2개뿐인데, 인간과 침팬지의 염기서열 차이는 무려 18개라고 한다. HAR-1은 임신 7~19주 무렵, 태아의 두뇌에 존재하는 카잘-레치우스(Cajal-Retzius) 세포라는 곳에서 발현된다. 카잘-레치우스 세포는 대뇌피질의 발생과정에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이언스타임즈, 김우재)  
  재미있는 대목 중에 이런 것도 있다. 도톰하게 뒤집혀진 인간의 입술은 마주 보며 나누는 섹스에서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제2의 성기라고 한다. 색깔도 조직도 비슷하다고 한다. 불룩하고 둥그스름한 여자의 유방은 제2의 엉덩이라고 한다. 흥분하면 발그레해지는 귓불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게 아니라 순전히 섹스를 위해 발달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목차는 <기원 origin>, <짝짓기 sex>, <기르기 rearing>, <모험심 exploration>, <싸움 fighting>, <먹기 feeding>, <몸 손질 comfort>,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 animals> 이상 8개로 구성되어 있다.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으로 한 권 더 권하고 싶은 책은 ‘인간 동물원’이다. 현대 인간 사회, 특히 도시가 일종의 동물원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의 많은 문제에 대해 신선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각연사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514~539)때 유일 대사가 세웠다는 구전이 있다. 각연사 ‘창건유래기’에는 “법흥왕 때에 어느 대사가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 떼가 날아와서 나무 토막을 물고 날아가기를 자주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가 그 까마귀 떼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 속에 나무 토막을 떨어뜨림으로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 있어 그 곳에 절을 세우고 ‘각유불어연중(覺有佛於淵中)’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각연사라 했다.”고 되어 있고, 고려 혜종(944~945)연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세여래급관음개금기」에는 ‘차소이통일대사가람(此所以通一大師伽藍)’이라 하여 고려 광종 때의 고승인 통일대사가 창건했다고 했다. 한편 「대웅전상량문」에는 ‘금전대대왕지원찰’이었다 하고 융경(1567~1572), 이치(1644~1661), 강희(1662~1722) 연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각연사에는 비로자나불 좌상, 통일 대사탑비, 비로전, 대웅전, 통일 대사 부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2) 송광사십자각(유형문화재 제3호)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
  조선 세조 12년(1466) 벽계 정심 선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1592) 때 소실되어 철종 8년(1857) 대웅전 중건시 제봉 선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이 건물의 용도는 범종각으로서 평면 구성이 십자형으로 되어 있어 십자각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나라 목조 건축물 중에서 유례가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건축된 중층의 누각으로 공간포를 1구씩 배치한 다포계 양식이며, 포작수가 많아 화려하면서도 공포의 구조 수법은 비교적 건실하다. 지붕도 십자로 구성되었으며 사방의 끝은 팔작으로 처리하였다. 2층 누각 안에 걸려있는 동종은 명문에 의하면 조선 숙종 42년(1716)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주조되었으며, 영조 45년(1769)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동종의 높이는 107cm, 아래 부분의 지름은 73cm, 두께는 4.5cm이다.

(3) 광양 장도 박물관
  이 박물관은 국가 중요 무형 문화재 제 60호 박용기 옹의 평생 숙원 사업으로 17년 전부터 계획하여 개관하기까지 정부와 전라남도, 그리고 광양시에서 건축에서 인테리어까지 모든 일을 담당하였고 박용기 옹이 수탁 운영하는 시립 박물관이다. 현재 이 박물관에는 박용기 옹이 14세 때부터 62년 동안 만들어 온 각종 장도와 세계 각국의 칼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국가 문화재와 지방 문화재 및 명장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장도를 만드는 전통적인 공구들과 작업실의 광경이 재현되어 있으며, 체험 학습 공간이 마련되어 관람과 교육, 체험을 동시에 행할 수 있다.

(4) 쌍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신라 성덕왕 22년(723)에 의상 스님 제자 삼법 스님이 창건한 절로 처음 이름은 옥천사였다. 그 후 문성왕 2년(840)에 진감 선사가 대가람으로 중창 후 887년 정강왕이 선사의 도풍을 앙모하여 쌍계사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절은 임진왜란 시 불탄 것을 인조 10년(1,632)에 벽암 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다. 산의 입구인화계동에서 절까지의 6km거리에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계곡과 맑은 물, 기암과 고목들이 어울려 장관을 이루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 쌍계석문, 진감 선사 태공탑비(국보47호)를 지나 북쪽 500m거리의 국사암 뜰에 느릅나무(사천왕수), 또한 동북쪽으로 2km 남짓 거리에 청학봉과 백학봉의 두 계곡을 끼고 있는 높이 60m의 불일 푹포(지리산 8경중의 으뜸) 등의 이름난 곳이 있다. 한편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신라 흥덕왕 3년(828) 김대렴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음으로 차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남쪽 줄기 쌍계사 일원에 심었다고 하며 일주문 근처에 차 시배 추원비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 차밭에도 차 시배지 기념비(도 기념물 제61호)가 있다.

(5) 순창삼인대(유형문화재 제27호)
  조선 연산군 12년(1506), 중종반정이 성공된 후 공신들은 왕비 신씨를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출하고 장경왕후(1491~1515)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에 돌아가셨다. 이 소식이 전하여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등이 회동, 결의하여 폐출되었던 단경왕후 신씨 복위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으로부터의 추방과 죽음을 각오한 나머지 직인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그 뒤 이곳에 비각을 건립하고 삼인대라 하게 되었다.

(6) 대관령
  해발고도 832m이며, 고개의 총연장이 13km이고,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 서울과 영동을 잇는 태백산맥의 관문이며, 영동고속도로가 지났으나 2002년 11월 횡계 - 강릉 구간이 터널로 바뀌었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남대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松川)이 된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발왕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 평탄 지형을 이룬다. 한랭 다우 기후 지역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서리가 내린다. 특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스키장이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이다. 연평균 기온은 6.4℃, 연강수량은 1,717.2mm이다. 고랭지 채소 및 씨감자의 주산지이며 목축업이 발달하였다.

(7) 죽서루(보물 제213호)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원종7년(1266)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이 누에 올라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1266년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각 동쪽에 죽림이 있었고 죽림속에 죽장사가 있었다하여 죽서루라 하였고, 또한 그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었다하여 죽서루라 했다는 말도 전해 온다. 이 누각은 관동 8경의 하나로, 자연암반을 기초로 삼았다. 하층은 17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중 9개의 기둥은 자연암반에 세웠고, 나머지 8개 기둥은 석초(石礎)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7개의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른 점이 특징이며,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間)8작(作) 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경색은 멀리 태백준령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가까이는 근산, 갈야산, 봉황산이 솟아 있어 마치 삼신산의 선계(仙界)를 느끼게 하는 경지이다. 오십굽이나 휘돌아 흐른다 하여 이름을 붙인 오십천은 누각 밑 깎아지른 절벽에 부딪쳐 갈길을 잃고 머뭇거리며 웅벽담을 만들어 놓았다. 웅벽담은 맑기도 하거니와 천길 벼랑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면 그 누구도 현란하지 않을 수 없다. 관동팔경이 모두 해경(海景)을 끼고 있지만 죽서루만은 해색(海色)을 볼 수 없는 것이 특색이며, 숙종과 정조가 내린 상찬의 시와 이율곡 등 많은 명사들의 서액이 걸려 있다. 남쪽에 본루의 별관으로 연근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초석만 드문드문 보이며, 누대 밑의 절벽에는 역사굴이 있다.

(8) 마곡사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에 자장  율사가 창건한 충남의 대표적인 사찰로, 그 이후 불일 보조 국사가 중창하여 불법의 큰 도량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다. 공주시에서 약 25km 떨어진 태화산 남쪽에 웅장하게 들어서 있다. 물의 흐름과 산의 형세가 태극형이라고 하는 이곳은 택리지, 정감록 등 많은 옛 책자에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명당으로 꼽을 만큼 산세가 아름다우며  특히 봄철의 경치가 아름답다. 마곡사 일대에는 영은암(0.2km), 대원암(0.4km), 은적암(0.6km), 청련암(0.3km) 등 많은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절앞 냇가 바위벽에는 고란사에만 있다는 고란초가 밝은 녹색잎 빛으로 피어 등산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9) 고모산성
  1500여 년의 기나긴 역사 속에 검푸른 이끼와 넝쿨에 묻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진남교반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고모산성은 성밖의 수직으로 쌓아 침공에 대비하고 성 안쪽은 비스듬히 쌓아 군병이 오르내리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남북쪽으로 두 개의 통문을 낸 흔적이 뚜렷이 남았으나 성안의 건축물은 흔적조차 없고 농토로 사용되어 원형을 찾을 길이 없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의 주력부대를 성을 지키는 우리군사 한 명 없이도 만 하루 동안 진격을 지연시킬 만큼 천혜의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철옹성이었으며 가은읍 출신 전국도의창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이 이끄는 의병이 왜병과 경렬한 전투를 벌였고 6.25 동란 때에는 어룡산 진남교반 일대의 치열한 전투로 쌍방이 수많은 희생자를 내게 했던 민족수난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천년고성 이나 그 원형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10) 보석사
  금산읍에서 약 9km 떨어진 진악산(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2년 (886)에 조구대사가 창건한 역사 깊은 절이다.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지난날 전북 불교의 이사중추기관이었고 현재는 충남교구 산하로 되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앞산 중허리의 암석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하였다는데서 이름지어 졌으며 주위의 울창한 숲과 암석은 맑은 시냇물과 어울려 대자연의 조화를 이루고 속세를 떠난 듯 하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선각, 산신각, 선방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절경의 12폭포가 있다. 특히 높이 40m, 둘레가 10.4m나 되는 1,1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있어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 주며 200~300m 정도의 전나무길이 나있어 호젓한 산행코스를 즐길 수 있다.

(11) 죽령 옛길
죽령 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는데,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옛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져 있는 수목 터널이 주변에 펼쳐지는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명승지이다.



기행문
괴산을 다녀와서

방지원

  “꼴딱” 어릴 적 소풍 전날처럼  들뜬 마음에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시각 장애인 문화원에서 답사 가는 날이다. 4월 제83차 기행지는 충청 북도 괴산군 산막이 옛길, 각연사, 벽초 홍명희 생가다.
  문화원 원장님의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된 사회를 이루어 나가자는 말씀과 이현동 선생님의 사전 설명으로 소풍은 시작 되었다.
  괴산은 3년 전 인조~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우암 송시열이 은거한, 화양 구곡 답사 때 온 곳으로, 계곡에 발 담그고 놀다가 소나기를 만나 돗자리를 우산 삼아 내려온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 때 계곡에 떨어지던 빗소리와 우리들의 왁자지껄한 수다와는 대조적으로 각연사는 고요했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514-539) 때 유일 대사가 세웠다는 구전이 있다. “유일 대사가 산 너머 쌍곡리에 먼저 절터를 정하고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대팻밥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대사가 괴이하게 여겨 유심히 살펴보니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나타나 대팻밥을 물고 날아가기에 그 까마귀 떼를 따라가서 깊은 산골 연못 속에 나뭇조각을 떨어뜨림으로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 있어 그곳에 절을 세우고 유일 대사가 연못 속에 불상이 있음을 깨달았다(각유불어연중).”라고 하는 말에서 각연사라는 사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못 속 석불이 현재 비로전에 안치된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이라고 한다.
  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려 비로전에 드니 단상에 계실 줄 알았던 부처님은 우리와 눈높이를 같이하여 내려와 앉아 맞이해 주신다. ‘감히 눈도 맞춰 보고 이렇게 가까이 계시니 옆에 서서 사랑의 몸짓을 하고 있자니 헉! 붉고 도톰한 입술! 뽀뽀도 해 버릴까? 마음을 억누르고 그저 가슴에 담아서 갑니다.’
  각연사가 처음이지만 너무 좋아 이다음 나이 들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어느 보살님께 언제라도 오시라는 스님의 말씀 끝에 “화장실에 휴대폰이 떨어졌어요” 라고 했더니 건져 주시겠단다. 그냥 투정 부려 본 건데 건져 달란 거 아니였는데.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건져 주시겠다고 빗자루로 잠자리채를 만들어 가벼이 건져 올리셨다. 재래식 화장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예술적으로 거의 원형 그대로다. 이 폰 돈 버는 폰이니 잘 간직하라는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갔다.
  비 온 뒤이기 때문일까, 계곡이 깊어서일까? 제법 많은 물이 흐른다. 지천으로 핀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봄이라고 우기는 것 같다. 계곡에서 손 씻으시는 원장님의 연두색 점퍼와 생강나무 꽃이 어울리는 것이 꼭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점심시간이다.
“병풍 잔치방”이라는 식당 간판과 같이 우리를 맞이한 것은 미선나무다. 처음 보는 꽃이라 신기했는데 경복궁 자경전 뜰에 당당히 자리한 순수 토종으로 1속 1종의 식물이라고 노순희 씨가 설명해 준다. 수목원에서 조금 공부했다는 실력이 아니신 것 같다. 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박이다. 음식 솜씨는 물론이고 인심 또한 넉넉하다. 감사히 잘 먹고 벽초 홍명희 생가로 출발했다.
  역사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생가이자 금산 군수 재직시 경술국치에 항거해 자결한 항일 지사 일완 홍범식이 살던 가옥으로, 홍범식은 홍명희의 부친이다. 좋은 기가 흐른다는 해설사의 말씀처럼 좋은 기를 받아 고가에서 300m옆에 괴산 군민 가마솥으로 이동하였다. 이 가마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가마솥으로 4만 군민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크기며, 군민의 화합을 상징한다고 한다. 깜짝 선물로 기쁨을 주신 문화 해설사님께 작별 인사를 고하고 산막이 옛길로 출발했다.
  2월에도 권중노 선생과 같이 앉았는데 밤늦게까지 일하시고 피곤해하시더니 차에서 쉬시겠단다. 시각 장애인의 안마 시술이 병원이나 한의원에서 물리 치료 받듯 국민 건강 보험이 적용되어 누구든지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시간이다.
  3인 1조가 되어 달라는 간사님 주문에 나는 현창이, 현창 아버지와 한 조가 되어 충북 괴산군 칠성면 의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 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총 2.5km의 덧그림을 그리듯 그대로 복원된 옛길에 접어든다. 현창이는 빠르다. 현창이 아버지도 빠르다. 차마 크게 헉헉거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연리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부부애를 상징한다는 연리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거짓말처럼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가 되어 있다.
  소원을 적어 걸어 두고 다시 길을 떠났다. 길가엔 할미꽃과 이름 모를 들꽃이 한가롭다. “주로 소나무가 많아요.” 하고 옆을 보니 그네와 출렁다리가 있다.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이현동 선생님을 두고 현창이가 다리에 올랐다. 이어서 현창이 아버지, 그리고 내가 뒤이어 올랐다. 우리 앞뒤로 문화원 식구들이 줄지어 간다. 내려다보니 아득한데 잘 들 가신다, 출렁다리를 출렁이면서.
  옛길은 대부분 나무받침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계단을 이어주는 비스듬한 판자가 문화원 식구들이 미끄러지기 쉬워 조심스러웠다.
  앉은뱅이 약수터에서 약수를 한 사발씩 마시고 살아 있는 나무 밑동을 뚫어 약수가 나오도록 했다는 나의 설명에 현창이네 아버지께서 잔인하다고 하신다. 고공 전망대에 이르러 휘 둘러본다. 저기 가물거리는 곳이 산막이 마을이리라. 돌아오는 길 현창이가 뛴다. 현창이네 아버지도 뛴다, 아니 난다. 뒤처진 나는 아리랑만 부른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니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그나마 미선 나무가 있어 위로가 된다.
  길 옆 과수원엔 나물 캐는 사람과 나비가 어우러져 있고 산들바람은 머리를 날리며 어깨춤을 추게 한다. 내려오니 권중노 선생님도 바람을 쐬었다니 다행이다.
  문화원 기행은 문화원 식구들의 도우미로 온 것이지만 실상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 준다. 그저 스쳐 지나가던 풍경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더 자세히 알아야 하고 혹여 사고 나면 안 되니 여유 있게 다니기 때문에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행이다. 무엇보다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도와 가며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준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5월 기행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한 것이리라.  


하동길, 따로 또 같이

최점화

  나는 늘 여행을 꿈꾸었다. 어려서는 학교 너머로 사라지는 신작로 끝을 따라 가 보고 싶은 아련한 그리움과 기대가 있었고, 학교를 마치고 일터를 얻으면서는 산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길로 향하고자 했으며,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여행길을 원한 듯하다.
  가끔은 석양이 기우는 저물녘에 혼자만의 나섬을 꿈꾸었고, 더러는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다가가고 싶은 바람을 갖기도 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잘 꾸며놓은 꽃동산으로, 바닷가로, 놀이동산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영상센터로, 역사와 유물이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산속의 절집으로……. 많이도 다녔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더하면서 늘어나야 할 여유는 오히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점점 일상과 세상살이로 인한 피로감으로 고작 동네 산책길이나 도심의 영화관 정도가 맘먹고 나서는 휴일 나들이가 되고 있음이 문득문득 느껴지지만, 선뜻 신발 끈을 매고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바쁜 일상에 묻혀 있던 길 나섬에 대한 갈망을 단번에 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행이 시작됐다. 시각장애인문화원 문화 체험 기행이었다. 몇 번을 나서던 그 여행은 갈 때마다 새로웠다. 처음 만나 본 그곳에 가족과 함께 다시 가 보기도 했다. 특히 이번 하동 녹차밭 체험길에 함께 하자는 선생님의 전화는, 하루 힘이 거의 소진해갈 쯤 후배가 건네주던 얼음커피 한잔 같은 고마움이었다.
  아이들이 중·고교생이다보니 가족이 많지 않아도 함께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모처럼 중학생 아들과 단둘이 집을 나서기로 했다. 오랜만에 반가운 선생님도 뵙고, 아들에게 낯선 바람과 건실한 분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주고, 하동의 맑은 산바람으로 자라는 찻잎을 딸 수 있어 좋으리라. 간간이 나 혼자만의 여유도 가져보며 아들과 함께 집을 떠나 마음나누기가 된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부모보다 친구가 좋을 나이에 닿은 아들은 언제나 제 할 일을 잘 챙기고 의젓하지만 “예, 아니요, 괜찮아요.”외의 긴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을 시기다. 이곳 문화원의 두 번째 동행이며 한비야씨와 반기문 총장을 좋아하는 아들과 함께 약간의 간식과 책 한 권을 챙겨 하동행 버스가 기다리는 주유소 앞으로 갔다. 버스에 오르고 낯익은 몇 분과 낯선 분들을 둘러보며 모두 오늘의 한식구들이구나 생각을 하며 아들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의 두 분 선생님을 뵐 때면 찬란했으나 결코 순탄치 않았던 내 생의 소중한 시절이 반추된다. 떠나온 지 오래라서 기억에 희미하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는 먼 고향 같은 분들.
  푸르렀으나 현실은 곤궁했던 그 시절,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를 했던 내게 선뜻 따뜻한 밥을 사주셨는데 제대로 갚아 드리지도 못하고 세월은 어느새 나를 중년의 한 지점으로 데리고 왔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다녀오다 보니 옆에 앉은 아들이 보인다. 가져온 책을 펼쳐 얘기를 건네니 평소보다 훨씬 조근조근 의견을 말해준다. 아마도 사방으로 열린 산천이 우리 둘의 마음도 얼마만큼 더 열어주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쌍계사로 오르는 길. 예전과 달리 가는 곳에 따라 둘씩 짝 지은 명단을 주시니 아들도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설 수 있어서 좋았다. 절집 안 담장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듯 나뭇잎과 커다란 한자를 드문드문 박아 넣은 꽃담은 참으로 신선했고, 9층 석탑 옥개석 끝마다 매 달린 은행잎 풍경은 이색적이었으며, 몽실몽실 부처님 머리를 닮은 불두화는 태초부터 제 집인 듯 수수하고 복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게 된 선생님들과 나란히 걸으며 안부라도 묻고 싶었지만 옆에서 성심껏 안내를 해드리는 학생들에게 양보를 해드렸다. 그날따라 날씨는 여름을 방불케 했지만 회원선생님들은 너무나 열심히 듣고, 만져보고, 귀 기울이시는 모습이었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 특산물을 맛보라는 얘기처럼 섬진강표 작은 조개 재첩국으로 점심을 먹고, 역시 하동의 매실로 담근 막걸리까지 한잔 마시고 차밭으로 향했다.
  보성 차밭이 차나무의 키가 크고 정리가 잘된 도시의 모습이라면, 그날 본 하동의 차밭은 유년의 내 고향 천수답처럼 정겹던 고향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좀 더 잘 보이는 아들이나 두꺼운 안경을 써서 덜 보이는 그의 짝이나 똑같이 처음 해 보는 일인데도 진지한 자세로 찻잎을 따고, 닦고 비비며 성심으로 녹차를 만드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하루 일과를 정리하듯 퀴즈로 역사공부를 하고 사행시를 지어 체험 여행을 더욱 의미롭게 만드는 진행자의 힘도 다른 여행이나 체험 학습과는 달랐다. 사행시를 지어내는 솜씨 또한 한 두 번의 참가로는 선보일 수 없는 내공마저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와서 섭씨 260도의 더운 솥에 잴 수 없는 열정까지 보태어 한 줌 녹차를 우려냈다. 그 맛이 참으로 산뜻했다. 직접 내손으로 수고한 대가였으니 그 맛을 어디다 견줄 수 있을까?
  특별한 영농기술도 없이 하늘이 주신 대로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뙤약볕 아래 김을 매고, 고추를 따고, 감자를 캐면서, 어른이 되어서는 그늘진 사무실에서 일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길에서 다시금 생각했다. 아들이 처음해보는 생소한 체험을 기꺼이 해내는 걸 보면서, 삶을 가꾸는 건 뜨겁잖은 그늘이 아니라 햇볕과 바람과 땀이 있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함께 여행한 아들도 스스로 알아가기를.
하동의 맑은 바람과 푸른 산천, 배우고 실행하며 진실하게 삶을 엮어 가시는 문화원 가족들, 성큼 자란 아들의 뒷모습,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조용히 돌아본 나 자신……. 이번 여행에서 내가 만난, ‘함께하기, 그리고 나만의 따로하기’ 였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괴산 벽초

                          정연원
  괴: 괴이하고 괴이한 세상일이
  산: 산더미같이 많은 이때에
  벽: 벽 보고 앉아 스트레스를 풀고 녹이다보면
  초: 초탈한 경지에 이르리라

                        김민준
  괴: 괴나리 봇짐을 둘러메고
  산: 산들바람처럼 경쾌하게 걷는 이 기분 좋기도 좋구나
  벽: 벽창우처럼 안 온다고 고집부리던 나
  초: 초싹초싹 잘도 쏘다니는구나

시제: 송광 편백

                         김창연
  송: 송광사 가는 산모퉁이 한적한 마을 아담한 집의
  광: 광 속에 묻어 놓은 동동주가 잘도 익어 가는구나
  편: 편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에 발 담그고 글을 외는 한 사람 있으니
  백: 백면 서생 김 선비라 한두 잔 동동주에 목소리 한번 낭랑도 하여라

                           강구연
  송: 송진처럼 끈끈하고
  광: 광석처럼 단단하고
  편: 편백처럼 고상한 인연을 맺은 우리 문화원 식구들
  백: 백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그런 좋은 사람들과 오늘도 함께 해서 좋았습니다

                          홍미라
  송: 송알송알 맺혀 있는 꽃잔디
  광: 광채를 발하며 춤을 추네
  편: 편안한 마음으로 숲을 거니니
  백: 백 가지 시름이 눈 녹듯이 스러지네

                         김지예
  송: 송광사의 맑은 풍경 소리와
  광: 광활한 편백 숲은
  편: 편안한 우리 마음을
  백: 백지로 만들어 주네

시제: 쌍계 정금

                          정희령
  쌍: 쌍화차는
  계: 계란 노른자를 넣어야
  정: 정말로
  금: 금메달감 맛이 된다

                          박영숙
  쌍: 쌍계사로 해서 하동 정금 녹차 밭에 왔네
  계: 계곡에도 산에도 들에도 녹차밭이라네
  정: 정금에서 잎사귀를 따서 볶고 비벼서 건조시킨
  금: 금쪽같은 녹차, 오늘 저녁 가족과 함께 한잔 해야지

                         송기찬
  쌍: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 선사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계: 계단을 허위허위 오르고 또 올라
  정: 정상의 맑은 경치를 대하니 선계 불계가 따로 없구나
  금: 금세 쌓인 피로가 풀리고 막힌 가슴이 뚫리네

                          이석규
  쌍: 쌍놈과 양반의 구별이 생긴 이래로 백성 간에는 평등이 없었고
  계: 계자와 장자의 구별이 생긴 이래로 형제간에는 우애가 없었고
  정: 정실과 측실의 구별이 생긴 이래로 아내들 간에는 화목이 없었고
  금: 금화와 은화의 우열이 생긴 이래로 빈부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더라


시제: 하늘 김용

조은숙
  하: 하늘이 청명한 날
  늘: 늘 찾고 싶었던
  김: 김용사에 들러 배례하고
  용: 용이 승천할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방지원
  하: 하늘재 오르며 숙제하는 아이들아
  늘: 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
  김: 김용사 계곡물에 뛰어들 때처럼
  용: 용감하게 미래에 도전할 수 있단다

                            이영수
  하: 하늘 김용 주제도 어렵네
  늘: 늘 가볍게 써 냈는데 오늘은 안 되네
  김: 김이 서리고 연기가 끼도록 머리를 쥐어짜네
  용: 용신님, 비만 내리지 말고 시재도 좀 내려 주세요

시제: 순창 강천

                           박소영
  순: 순창에 가려고 하니
  창: 창밖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강: 강아지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천: 천둥이 쳐도 오늘은 꼭 가 보련다

                            이영수
  순: 순창 강천, 지난달 시제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창: 창창한 나이에 고민해서 썼습니다
  강: 강천산 구름다리에서 진짜 팔짝 펄쩍 뛰었습니다.
  천: 천하의 용자는 바로 나라고 외치고 싶은 건 왜일까요?

                           이채빈
  순: 순천자는 존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말이
  창: 창세 이후로 불변의 진리임을 믿습니다
  강: 강산이 뒤바뀌고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천: 천성을 지키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시제: 서천 한산

                         김창연
  서: 서천 엄나무 칼국수로 허기진 배 불리고 월하성 갯벌에서 맛조개를 잡아 오니
  천: 천하의 신선 놀음 이보다 더 나을쏘냐
  한: 한산 모시 차려 입고 소곡주 한잔 들이켜니
  산: 산신령도 부러워할 저 산 팔읍 선비로세

                          홍미라
  서: 서두르지 않고
  천: 천천히 호미질을 해서인가
  한: 한 줌 올라오는 것은 개흙뿐
  산: 산산이 부서지는 맛조개구이의 꿈이여

                         백병준
  서: 서슴지 않고 내디딘 이 발걸음
  천: 천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분들과 함께 하니
  한: 한평생 함께 걸어온 부부처럼
  산: 산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처럼 명랑한 발걸음


시제: 대관 환선

                         송기찬
  대: 대관령 험한 길이었다
  관: 관동별곡의 송강, 사친의 신사임당, 그들의 문재와 효심이야 누가 모르리요마는
  환: 환락의 도심에서야 어찌 그들의 숨결을 느끼리요
  선: 선죽교에서 충절을 배우듯이 이곳에서 언제 다시 두 어른의 효심을 배울꼬

                          조해정
  대: 대다수 사람들은 황금보다는 소금이, 소금보다는 지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관: 관찰사 고형산이 수레로 닦은 이 길을 나와 동반자는 살얼음판 지나듯이 한발 한발 내딛지만    
  환: 환희의 순간이 올 것을 믿고 금강송과 계곡물의 격려를 받으며
  선: 선인들의 얼이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그들의 정신이 내게도 남아 있는지 생각해 본다


시제: 금강 정안


                          최희규
  금: 금강 수목원에 가니
  강: 강물도 시원하고
  정: 정안 마을에서는 밤도 줍고
  안: 안전 사고도 없이 잘 다녀 왔습니다

                           이석규
  금: 금수강산이 아름다운 것은 강산이 금수 같기 때문이 아니라
  강: 강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금수 같기 때문입니다.
  정: 정월부터 섣달까지 날마다 생각하여도 이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은
  안: 안력 부족에 보행 불능을 겸한 나 같은 사람들도 조선 팔도를 안방 드나들 듯이 편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제: 문경새재

                           강구연
  문: 문방사우를 등에 지고 한양으로 향하던 유생들
  경: 경사 보러 가는 길이니 불원천리는 당연지사
  새: 새재를 오르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던 선비들의 과행을
  재: 재연해 보니 그들의 포부에 우리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시제: 금산인삼

                          박수현
  금: 금빛의 영롱한 은행나무
  산: 산속을 가득 메우는 은은한 가을 향기로
  인: 인적 드문 숲속을 황금빛 정원으로 만들어 준다네
  삼: 삼국 시대 전부터 세상을 따스하게 해 준 은행나무처럼 나도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김민준
  금: 금의환향의 뜻을 아시는가?
  산: 산 넘고 물 건너 한양 가서 출세해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라네
  인: 인간의 자식으로서 귀하게 되어 집에 돌아가면 어버이 기뻐하시겠지만
  삼: 삼 들고 집에 가는 아들내미도 대견해하신다네

                          민경욱
  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산: 산삼 사촌인 인삼튀김을 먹고 나니
  인: 인삼 먹은 때보다
  삼: 삼 배나 힘이 솟는다

                         곽학규
  금: 금산에 와서
  산: 산 중의 산 진악산의 보석사를 둘러보고
  인: 인삼을 캐어 튀겨 먹고 나니
  삼: 삼백 년은 살 것 같네

시제 : 죽령옛길

                          홍미라
  죽: 죽령 주막에서 감자전을 안주로 동동주 기울이고
  영: 영롱한 희방사역에서
  옛: 옛길을 낙엽 밟으며
  길: 길가 나무 사이로 또 가을을 보냈네


                           정이정
  죽: 죽마고우와 낙엽 밟으며
  영: 영남 좌로를 천천히 걸으니
  옛: 옛 선비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길: 길이 전하라는 조상의 당부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김병구
  죽: 죽어서도 다시 오고픈 내 고향 예천
  영: 영광스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삶이지만
  옛: 옛 정으로 반겨 줄 옛 친구는 보이지 않는구나
  길: 길이 달라서 그런 것을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한하리요

곽학규
  죽: 죽령을 따라 소백산 자락에 안긴 고찰 희방사가 나를 반기네
  영: 영주와 단양을 잇는 천 년의 옛길
  옛: 옛길에서 들이켜는 막걸리는
  길: 길손의 마음을 더욱 여유롭게 하는구나

                          도신록
  죽: 죽령 산길을 동무 손 잡고 걸어올라
  영: 영마루에서 지나온 길 돌아보니    
  옛: 옛사람들의 발자취가 느껴지네
  길: 길이 길이 보전되기를 바라 봅니다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 여성들의 차별 극복과 인권을 위해

김명주(32세, 여, 뇌병변장애 1급)

  
  


강원도 강릉에서 2남 3녀의 넷째로 태어난 나는 생후 100일 무렵 갑작스런 고열로 인해 뇌손상을 받아 중증의 장애를 갖게 되었다.
  나는 다리가 불편해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누가 부축을 해 주거나 옆에 책상이나 문과 같이 잡고 몸을 지탱할 것이 있다면 몇 걸음 정도는 걸을 수가 있다. 그래서 휠체어에 옮겨 타거나 휠체어에서 내리는 일도 혼자서 할 수 있다. 왼팔은 등 뒤쪽으로 돌아간 채 굳어 있어 앞으로 펼 수도 없지만 오른팔은 별로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취사와 식사는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세수나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는 등의 일상생활도 큰 어려움 없이 혼자서 잘 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한손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느리기는 하지만 컴퓨터 자판도 잘 다룰 수 있고, 마우스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를 다루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직 운전 면허증은 없지만 예전에 다른 사람의 차를 이용하여 운전을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운전 면허증도 따서 운전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언어 장애가 심해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주로 휴대폰에 문자를 입력하거나 컴퓨터 자판으로 타자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곱 살 때까지는 유치원을 다닌다거나 동네 친구들과 어울린다거나 하지도 못했고 그저 집안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마치 사육되는 가축과도 같은 생활을 하며 지냈다. 가끔씩 어머니의 등에 업혀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만 보냈다.
  여덟 살이 되자 취학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 나의 장애를 치료하러 이곳저곳을 찾아 다녔다. 병원에서는 이미 치료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병원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소문으로 들은 용하다고 하는 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으러 다닌 것이었다. 하지만 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다녔지만 안마나 침, 뜸과 같은 것으로 나의 장애가 치료될 수는 없었다.
  열세 살 무렵부터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더는 치료를 받으러 다닐 수는 없었고, 나는 춘천에 있는 지적 장애인 수용 시설에 들어가서 스무 살 때까지 지내면서 초등 학교를 다녔다. 답답한 시설에 갇혀서 어린 아이들과 때늦은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따분해서 선생님들에게 반항도 많이 했었다. 나는 무단 결석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퇴를 해 버리겠다고 여러 번 엄포도 놓아 보았지만 나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선생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연히 선생님들과는 마찰이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나처럼 나이가 들어 초등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몇 명 있어서 그들과 다소나마 답답한 마음을 터놓으며 힘겨운 시절을 겨우 견뎌 낼 수 있었다.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더는 시설에 있고 싶지 않아서 부모님에게 그 곳에서 나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너무나 가족을 보고 싶어 하고 시설 생활을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부모님은 나의 청을 받아들여 집으로 데리고 돌아오셨다. 시설 측에서도 별로 만류하지 않고 가족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춘천의 시설에서 초등 학교를 마친 나는 경기도에 있는 S 재활원에서 중학교와 고등 학교를 다녔다. 중고등 학교 시절 나의 학교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초중등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센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특수 학교의 경우에는 치맛바람이 더욱 심하다. 정부에서 장애인들에게는 무상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서 학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우리 집으로서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에 보조를 맞출 수가 없었다. 중고등 학교 시절, 선생님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지만 친구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스물여섯 살 되던 2002년 나는 대구 대학교 심리학과에 진학했다. 상담을 제대로 공부해 보려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나의 대학 생활은 형극의 길이었다. 손이 부자유로워서 필기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교수님들에게 강의 노트를 좀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대체로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시험을 칠 때에는 답안을 작성하는 속도가 느려 시간을 더 줄 것을 요구했지만 교수님들은 내가 답안을 열심히 작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시간이 되자 작성 중인 답안지를 빼앗아 가 버리곤 했다. 다른 학과 교수님들은 장애 학생들에게 시험 시간을 어떻게 부여했는지 모르지만 심리학과 교수님들은 나에게 시험 시간을 연장하거나 평가 방식을 달리하는 것과 같은 배려를 해주지는 않았다. 우리 과에는 나 외에도 중증 장애 학생이 두 명 더 있었지만 그 학생들은 언어 장애도 없고 손놀림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시험 시간 부족이나 필기 곤란과 같은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나는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왔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아주 열심히 했지만 학과 성적은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활발하게 친분을 나누면서 적극적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는 초등 학교나 중고등 학교 시절과는 달리 기쁘고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을 했을 때부터 학과 행사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학과 친구들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학과생 중에는 그다지 가까이 지내지 못한 사람들도 있으나 가까이 지낸 친구들도 많다. 그런대로 보람 있는 대학 생활을 보냈지만 대학 측에서 장애 학생의 학습을 지원을 좀더 실질적인 측면에서 해 주었더라면 더 나은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앞으로 여성 장애인의 감수성에 기초하여 여성 장애인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몇몇 장애인들과 함께 구체적인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기숙사를 나와서 혼자 생활할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나는 그동안 시설과 기숙사 생활에서는 알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거대한 장벽에 부딪쳤다. 처음 기숙사를 떠나 친구 집에 짐을 맡겨 놓고 집을 보러 다닐 때는 며칠이면 내가 살 수 있는 작은 보금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세를 놓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집집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것을 보고는 집세가 얼마인데 언제까지 살 것인가 하는 것 등 계약을 위한 어떤 이야기도 나누려 하지 않고 다짜고짜 세를 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동네 사람들이 집값이 떨어진다느니 동네 이미지가 나빠진다느니 하면서 장애인들에게는 집을 세주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세상에 저런 일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내가 집주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냉담과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접하게 되자 우리 사회의 거대한 장벽 앞에 숨이 막히기도 하고 가슴 속에서 울분이 솟구치기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러 왔을 때도 내가 혼자 살 것이라고 하면 집주인이 세를 놓지 않겠다고 할 것만 같아 비장애인 친구와 함께 살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부탁에 부탁을 하고서야 겨우 세를 얻을 수 있었다. 주거 환경이나 집의 상태, 구조 등이 집세에 비해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집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예 세를 놓지 않으려 할 까 봐 집세를 놓고 흥정도 해 보지 못하고 기숙사를 떠난 지 몇 달 만에 간신히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할부 조건이나 모델, 기능이 마음에 드는 휴대 전화가 있어 구입하려고 이동 전화 가게를 찾아갔는데, 가게 주인이 장애가 심한 경우에는 부모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면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런 일로 부모님께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고 나는 성인이고 지적 장애도 없기 때문에 부모님의 동의가 없어도 휴대 전화를 구입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미성년자이거나 지적 장애인의 경우에는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도 졸업하고 지적 장애도 없는데 단지 언어 장애가 있고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동의를 요구하는 그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복지 카드도 보여주고 휴대 전화 액정에 열심히 문자를 찍어 가며 항의를 했지만 나의 소리 없는 항변은 그 사람의 억지 앞에서 묻히고 말았다.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이 나의 명의로 된 휴대 전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그 전화 번호의 요금이 연체되었다는 메시지가 들어와서 그 내용을 확인하려고 인근의 휴대 전화 대리점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대리점에 들어가서 나는 내가 찾아온 경위를 열심히 문자로 찍어 점원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사람은 내 휴대 전화 액정에 찍혀 있는 나의 이야기를 읽어 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내가 내민 휴대 전화는 다른 회사 제품이니 다른 대리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잘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내 휴대 전화를 다시 들어 그 사람에게 보여 주었지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내면서 내가 비록 다른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더라도 이 회사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고, 이 대리점에서도 내가 확인하고 싶은 회사의 통화 요금과 관련된 일을 확인할 수 있다고 알고 있기에 이곳을 찾아왔는데, 나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다. 내가 거칠게 항의를 하자 그 사람은 이내 나에게 사과를 하고 나에게 필요한 요금 내역을 확인해 주었지만 울렁거리던 가슴은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한 번은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 그 옷을 사려고 옷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주인이 장애인에게는 옷을 팔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화를 참아 가며 그냥 나온 적이 있다. 장애인은 자기 돈을 내고서도 옷을 살 수가 없는 것인지, 장애인에게 옷을 팔면 무슨 큰 해라도 입게 되는 것인지, 도대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 나는 내내 우울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나는 대형 마트에 쇼핑을 하러 가면 왼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물건을 집어 휠체어 뒤쪽에 얹어 가지고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대형 마트에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물건을 집어서 휠체어 뒤쪽에 올려놓고 있는데, 마트 직원이 내가 물건을 훔쳐 가는 것으로 오해를 했는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왜 그러나 싶어 의아했지만 이내 그 사람이 나의 모습을 보고 오해했구나 생각하고는 나의 왼손 상태와 장애에 관해 열심히 문자를 찍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오해가 풀린 그 사람은 나에게 사과를 하면서 나의 쇼핑을 도와주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장애가 있고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이 취해야만 하는 자세와 태도로 인해 예상치 못한 오해를 받게 되면 장애가 가져다주는 쓰라린 기억에 삶의 의욕이 꺾이기 일쑤다. 제발 사람들이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장애인을 대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볼일이 있을 때는 주로 지하철이나 저상 버스를 타게 되는데, 저상 버스를 타게 되면 내가 언어 장애가 있으므로 내려야 할 곳을 문자로 찍어 기사에게 보여 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버스 기사가 그것을 잘 보지 못했을 경우에는 내려야 할 정류장에 제대로 내리지 못해 난감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차 벨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배차 시간에 쫓기는 기사들은 정류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지나쳐 버려서 엉뚱한 곳에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은 시내 버스 교통 체계가 전산화되어 있는데 나와 같은 언어 장애인들이 타고 내리는 정보를 체계화된 전산 시스템을 통해 버스 기사에게 신속, 정확하게 전달하고 장애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상 버스 기사들을 대상으로 장애인들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얼마 전에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식당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휠체어를 밀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다른 손님들이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주인은 우리들에게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가로막고는 다른 곳으로 가 보라고 했다. 우리들은 화가 났지만 완강한 그 사람과 싸우기도 뭣하고 해서 그곳을 떠나 다른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했지만 음식을 먹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언어 장애가 심하여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에 불편이 많기도 하고, 동사무소나 은행 같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종종 어린아이로 취급하면서 반말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언짢을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술을 한 병 사려고 슈퍼마켓에 갔었는데, 내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술을 팔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혹시나 주인 아저씨가 나를 어리게 보고 술을 팔지 않으려 하는가 싶어 대학까지 졸업한 성인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아저씨는 끝내 장애인인 나에게는 술을 팔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른 슈퍼마켓으로 가서 술을 사 오긴 했지만 장애인이라고 해서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인지, 장애인에게 술을 파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이없는 편견 앞에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 어려웠다.
  씩씩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중증 장애를 지니고 혼자 살아가는 일은 많이 불편하고 힘이 든다. 그래서 나도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으려고 신청을 했으나 그동안 나의 주소지가 서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신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주소지와 다른 곳에서도 활동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어 최근 서울로 가서 나의 장애 정도에 대한 실사를 받고 시간 판정을 받았다. 이사를 할 계획이 있어 아직은 받고 있지 않지만 조만간 이사를 하고 나면 받으려고 한다. 그동안 혼자서 생활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었는데, 활동 보조를 받게 되면 어려움이 많이 해소될 것 같다.
  장애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장애 여성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이중의 차별을 받아 가며 살아가고 있는 장애 여성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장애 여성들의 삶의 질 개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장애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남성 장애인에 비해 어려움이 많은데 활동 보조 시간을 더 배정하는 등 장애 여성의 특수성을 고려한 정책상의 배려가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 그리고 내가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절감한 것이지만 장애 여성들이에 남성 장애인에 비해 집을 구하는 데 있어 훨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정부에서는 장애인들을 위해 임대 주택을 보급하고 있는데, 장애 여성들을 위한 제도를 통해 그들이 보다 안전하고 안락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앞으로 부족한 힘이나마 장애 여성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열정을 다 바치고 싶다.



문화원 소식

  3월 12일 한국 장애인 재단의 후원으로 ‘흰지팡이로 찾아가는 우리나라 옛길 탐방’ 첫 번째 기행지인 광양의 동백숲길, 중흥사, 섬진강 매화 마을 매화숲길을 찾았습니다. 기나긴 겨울 한파로 아직 매화꽃이 만개되지는 않았지만 봄의 기운을 받으며 도선 국사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특별한 하루였습니다.
  3월 25일 지난 8년 동안 사용했던 중구 남일동 131-1번지의 문화원 사무실을 중구 종로 2가 33-1번지 희망 신용 협동 조합 2층으로 옮겨 회원 내빈들을 모시고 조촐하게 문화원 방문의 날 행사를 가지고 문화원의 발전과 역할 증대를 위해 서로 격려하고 다짐하였습니다. 또한 이날부터 지난 2년 동안 수고한 박진희 간사의 뒤를 이어 류은숙 간사가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4월 9일 제83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북 괴산의 산막이 옛길, 각연사, 벽초 홍명희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괴산호를 따라 옛길을 걸으며 청명한 봄날을 마음껏 감상하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 선생의 삶과 문학을 잠시나마 훑어본 하루였습니다.
  4월 13일 시각 장애인을 비롯한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계층을 위하여 도서 낭독 봉사자를 양성하는 교육인 제7기 도서 낭독 아카데미가 15주 과정으로 개설되었습니다.
  4월 29일 2011년 첫 문화 나들이로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계명 아트 센터에서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관람하였습니다.
  5월 14일 제84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북 완주의 진안 원연장 마을, 공기 마을 편백나무 숲을 다녀왔습니다. 피톤치드가 제일 많이 뿜어져 나온다는 편백나무숲길을 걷고 유황족탕으로 피로를 푼 하루였습니다.
  5월 28일 제85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남 하동의 쌍계사와 정금 녹차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기행은 한국 마사회의 지원을 받아 현장 체험으로 진행되었는데 녹차를 직접 따고 쪄서 말리는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녹차 제조 공정을 잘 체득한 기행이었습니다.
  6월 11일 제86차 역사 기행은 충북 충주의 월악산 미륵사지, 하늘재, 문경 망댕이가마, 문경 김용사를 다녀왔습니다. 삼국 시대에 처음으로 개척된 계림령길(하늘재)를 걸어 봄으로써 문화 교류에 있어서 길의 소중함을 느껴 본 하루였습니다.
  6월 26일 제4회 대구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의 창작 뮤지컬 ‘투란도트’를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서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7월 9일 제87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북 순창의 장류 박물관, 강천산 군립 공원, 장안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비가 오는 가운데 걸어 본 강천 산길, 폭포와 계곡과 운무에 싸인 전망대는 감탄을 자아낸 잊을 수 없는 기행이었습니다.
  7월 23일 제88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남 서천의 한산 모시 전시관, 기산 이색 체험 마을, 월하성 갯벌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기행에서는 손수 만든 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갯벌의 생태학적 중요성을 배우고 체험하였습니다.
  8월 19~20일 제89차 역사 문화 기행은 문화 캠프를 겸하여 진행되었습니다. 강원도의 대관령 길, 죽서루, 환선굴, 추암 촛대 바위, 신재생 에너지 전시관을 다녀왔습니다. 고생하며 걸은 대관령 옛길과 게스트 하우스에서의 별밤 보내기, 경탄을 자아낸 환선굴, 문화 캠프의 추억 쌓기가 하나 더 늘어난 기행이었습니다.
  9월 22일 이날부터 제7기 문화 아카데미가 매주 목요일 6주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역사, 문학, 월드 뮤직, 연극, 국악, 클래식 등 사계의 전문가들의 수준 높은 강의로 문화의 향연에 흠뻑 젖어든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9월 24일 제90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남 공주의 금강 수목원, 공주 정안 알밤 마을(풀꽃이랑 마을), 마곡사를 다녀왔습니다.
  9월 30일 대구 오페라 축제의 개막작인 베르디의 대작 ‘아이다’ 공연을 계명 아트 센터에서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10월 8일 제91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북 문경의 새재 옛길, 고모산성, 장수 황씨 종택을 다녀왔습니다.

  10월 14일 대구 문화 예술 회관에서 열린 대구 시립 국악단의 제152회 정기 연주회 ‘달빛이 미닫이에 걸리다’를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관람하였습니다.
  10월 문화원 산하에 나이스 볼링동아리의 탁노균씨가 말레이시아 코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4회 세계 시각장애인 볼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4개를 획득하여 귀국하는 값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어머나 ~ 장해라!!!
10월 22일 제92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남 금산의 보석사, 적벽강 및 수통부리 마을, 금산 인삼관(인삼 캐기)을 다녀왔습니다. 떡메를 쳐서 인절미를 만들고 인삼 캐는 요령을 배우는 즐거움을 만끽한 하루였습니다.
  10월 28일 대구 계명 아트 센터에서 열린 클래식 공연, 권혁주, 손열음의 ‘아름다운 동행’을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주소 : 대구시 중구 종로2가 33-1번지 2층 (우 700-192)
Tel : 053 - 257 - 5657
Fax : 053 - 257 - 5659
E-Mail : blindculture@hanmail.net
음성사서함 : 152 - 5657
홈페이지주소 : www.blindlove.org

후원계좌 :
  대구은행) 096-05-002769-1
  국민은행) 801301-01-345119
  예금주 - 사)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계간․시각과문화  

발행․2012년 1월 1일  
발행인․김현준  
기획․편집
편집․김창연
교열․이석규
디자인․류은숙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계간
시각과 문화
2011년 겨울호(통권30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국어를 신중히 다루라 _ 이석규

Pops English
To Live Without Your Love -Monika Martin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陳情表(진정표)  - 李密(이밀)  _ 이석규 역

서평
털 없는 원숭이 (The Naked Ape) _ 최성재

우리가 답사한 유적


괴산을 다녀와서  _ 방지원
하동길, 따로 또 같이_ 최점화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 여성들의 차별 극복과 인권을 위해 _ 김명주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국어를 신중히 다루라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지난 8월 국립 국어원에서는 새로 추가한 표준어 39개를 발표하였다. 그 추가한 단어는, ‘간지럽히다(간질이다)’, ‘남사스럽다(남우세스럽다)’, ‘맨날(만날)’, ‘묫자리(묏자리)’, ‘허접쓰레기(허섭스레기)’, ‘걸리적거리다(거치적거리다)’, ‘나래(날개)’, ‘내음(냄새)’, ‘눈꼬리(눈초리)’, ‘끄적거리다(끼적거리다)’, ‘두리뭉실하다(두루뭉술하다)’, ‘떨구다(떨어뜨리다)’, ‘먹거리’, ‘바둥바둥(바동바동)’, ‘새초롬하다(새치름하다)’, ‘손주(손자와 손녀의 병칭)’, ‘오손도손(오순도순)’ 등이다. 이번의 발표를 보면서 과거의 신중하지 못하였던 조처가 떠올라서 마음이 적잖이 언짢다. 예컨대, 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하도 자주 바꾸어서 학교를 나올 만큼 나오고도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로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외래어 표기법은 너무 많은 예외를 인정해서 거의 규칙이 없다시피 되어 버렸고, 띄어쓰기 규정에서는 띄어쓰던 성과 이름을 붙여 쓰게 한 결과, 언론인 중에도 자기의 성과 이름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장모음 표기를 없앤 결과, 모든 장음 단어를 단음으로 발음하고 그 대신 원어에서는 자음으로 끝나서 음절도 형성되지 않는 부분을 강세까지 두어 발음하게 되었다.  
  금번에 추가 발표된 표준어도 과거의 다른 발표처럼 심의의 경솔함과 불합리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39개 전체가 각각 큰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그러한 문제점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리말 조어법에 맞지 않는 말까지 표준어로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 예로 ‘먹거리’를 들 수 있다. ‘볼거리’, ‘읽을거리’는 조어법에 맞으므로 단어가 될 수 있지만 ‘보거리’, ‘읽거리’는 조어법에 맞지 않으므로 단어가 될 수 없다. 이 점은 한국인이면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누구나 즉시 수긍할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거리’는 조어법에 맞으므로 단어가 될 수 있지만, ‘먹거리’는 조어법에 맞지 않으므로 단어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음료’를 ‘마실거리’로 순화한다면 무리가 없겠지만 ‘마시거리’로 한다면 단어가 될 수 없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와 같이 조어법상 도저히 단어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을 ‘살아가기 위해 먹는 음식을 통틀어 이름.’이라는 풀이까지 붙여 새로 표준어로 인정하였다는 것은 국어 심의 위원회 위원들의 수준과 심의의 진지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둘째는 방언을 표준어로 인정하면서도 그 방언의 쓰임이나 체계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남사스럽다’와 ‘새초롬하다’를 들 수 있다. ‘남사스럽다’는 ‘남사시럽다’라는 방언을 비논리적인 규칙에 의거해서 표준어로 만든 말이다. 즉, ‘지름’을 ‘기름’으로 하니 표준어가 된 경험에 의거하여 ‘짐승’을 ‘김승’이라고 하면 표준어가 된다는 비논리적인 규칙, 즉 부정 회귀에 의하여 방언을 표준어로 바꾼 말이다. 부연하면, 방언의 ‘-시럽다’를 ‘-스럽다’로 바꾸면 표준어가 되는 실례를 보고 ‘남사시럽다’ 전체의 표준어를 찾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접미사 ‘-시럽다’만 ‘-스럽다’로 바꾸어서 써 온 말이 ‘남사스럽다’이다. 이러한 것까지 표준어로 인정한다면 ‘계추(계취)’, ‘낑기다(끼이다)’, ‘놀래키다(놀래다)’ 등도 마땅히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남우세스럽다’에서 ‘남’을 뺀 ‘우세스럽다’라는 단어는 있지만 ‘남사스럽다’에서 ‘남’을 뺀 ‘사스럽다’는 없다. 그 이유는 ‘남사시럽다’는 ‘남우사시럽다’의 준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사시럽다’는 실제로 쓰이는 말이니 ‘남사스럽다’를 표준어로 인정한다면 ‘우사스럽다’도 함께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새초롬하다’를 표준어로 인정한다면 그 큰말인 ‘시추룸하다’도 함께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새치름하다’의 큰말이 ‘시치름하다’이듯이 ‘새초롬하다’의 큰말이 ‘시추룸하다’인데, 둘 다 많이 쓰이는 작은말-큰말 관계에 있는 한 쌍의 말에서 어느 한 단어만 표준어로 인정하고 다른 하나는 버린다는 것은 모순이다. 비슷한 예로, ‘걸리적거리다’를 ‘거치적거리다’와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였는데, ‘거치적거리다’에는 ‘가치작거리다’라는 작은말이 있지만 ‘걸리적거리다’에는 ‘갈리작거리다’라는 작은말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말은 ‘걸리다’와 ‘거치적거리다’를 혼합해서 만든 말이므로 큰말이나 작은말이 있을 수 없다. 같은 뜻을 지닌 사용 빈도 높은 방언 중에서 큰말-작은말의 쌍으로 된 것으로 ‘걸거치다-갈가치다’가 있는데, 차라리 이 말들을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이 ‘걸리적걸리다’를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언중의 지지도 받을 것이다. ‘바둥바둥’도 새로 표준어에 포함시켰는데, 우리말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모음 조화에서 큰말-작은말 체계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큰말-작은말 체계는 ‘촐랑촐랑-출렁출렁’, ‘캉캉-컹컹’, ‘해롱해롱-희룽희룽’ 등과 같이 두 단어 쌍이지 세 단어 쌍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둥바둥’을 표준어로 인정하였으니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체계를 도입한 셈이다. 그러니까 ‘바동바동-버둥버둥’이 작은말-큰말 관계였는데, 여기에 ‘바둥바둥’을 사이에 넣는다면 ‘작은말-중간말-큰말’이라는 새로운 체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치 ‘깡총깡총’과 ‘껑충껑충’ 사이에 ‘깡충깡충’을 넣어서 ‘깡총깡총-깡충깡충-껑충껑충’의 세 단어쌍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20여 년 전에 ‘깡총깡총’은 표준어에서 제외하고 ‘깡충깡충’만을 표준어로 인정하였었다. ‘바둥바둥’을 써 온 사람은 ‘버둥버둥’이나 ‘바동바동’을 의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은말-큰말이라는 체계 의식이나 어감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관계를 인식했다면 다른 모든 의태어에 있는 큰말이나 작은말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러한 노력을 했더라면 올바른 관계에 있는 말을 못 찾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추가 표준어 발표에서 엿볼 수 있는 국어원의 경솔함의 극치는 ‘오손도손’이다. 이 단어도 20여 년 전에 표준어에서 제외하고 ‘오순도순’만을 표준어로 인정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느닷없이 전에 버렸던 말을 새로 주워 와서 다시 표준어로 삼은 것이다. ‘깡총깡총’을 버리고 ‘깡충깡충’을 표준어로 인정한 것과 똑같은 처사인데, 이왕 도로 주워 올 바에야 ‘깡총깡총’도 같이 주워 올 일이지 왜 하나만 주워 오는지 의심스럽다. 다음에 주워 오려고 일부러 남겨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립국어원은 언어 사용 실태 조사 및 여론 조사를 통하여 국민의 언어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그 결과를 규범에 반영함으로써 국민들이 국어를 사용할 때에 더욱 만족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계획이라고 한다. 마치 국회의원 선거 후보가 선거구 주민들의 생활의 불편 사항을 찾아서 해결해 주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우는 어투이다. 표준어를 몰라서 불편해할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표준어인지 방언인지,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방송이나 글을 통해서 퍼뜨린 말들이 이번에 표준어로 추가되어 발표된 말들이다. 이 말들을 표준어로 인정해 주니 그들의 불편을 해소해 준다고 고마워하겠는가. 표준어로 인정되기 전에 위에 열거한 단어들을 쓰던 사람들이 그것들이 표준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했겠는가. 그 사람들이 국어 사전을 단 한 번이라도 검색해 보았겠는가. 국어 심의 위원회 위원들이 진실로 국어를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국어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고 그들에게 올바른 국어를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표준어든지 비표준어든지 전혀 관심없고 사전이 무엇인지 어문 규정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살다가 생을 마칠 사람들을 위해서 국어를 다룰 것이 아니라, 국어를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국어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어원에 있는 사람들부터 의미를 좀 생각해 가면서 국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초등 학교의 교과서 말미에 있는 해당 교과서 제작진 명단 끝에는 ‘국립 국어원 어문 규범 감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도대체 ‘감수’가 무슨 뜻이기에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일까? 또 표준 국어 대사전의 10만 단어를 유명 아나운서들이 육성으로 발음을 하여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있다. 그 발음을 국립 국어원에서 감수를 했다고 적어 놓았는데, 이렇게 쓰인 ‘감수’는 무슨 뜻일까.
  문화의 창조, 전수, 계승, 전파의 일차적인 수단이 언어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모든 문화 소산에는 그 창조자나 향유자의 정신이 반영되게 마련이고, 창조자의 정신을 올바로 표현하고, 그 반영되어 있는 정신을 바로 해석해 내는 수단이 언어이므로, 이러한 언어가 혼탁해지고 불명료해지면 그 언어 사용자의 정신 또한 혼탁해지고 불명료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혼탁하고 불명료한 정신으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하거나 향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어 정책을 수립하고 어문 규정을 다루는 기관에서는 국어 정책 입안 시에 근시안적이고 인기 영합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원시안적이고 신중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날로 흐려 가는 우리 국민의 정신을 맑게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Pops English

   To Live Without Your Love -Monika Martin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Why does my heart keep yearning
Knowing there's no returning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Why must I keep pretending
I see a happy ending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Yet still I go on hoping
You'll come to me at last
It seems I'm only groping for
something in the past

Though I may keep on trying
Slowly my heart is dying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Without your hand to lead me
Now you no longer needed me
What can I build a dream on
To live without your love

Yet still I go on hoping
You'll come to me at last
It seems I'm only groping for
something that is past

왜 내 마음은 이토록 그리워할까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왜 나는 해피 엔딩을 맞이한 척해야 하나요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아직도 나는 당신이 결국
내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어요
그것은 내가 지난날의 어떤 것을
더듬어 찾으려는 것 같아요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내 마음은 서서히 시들고 있어요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나를 이끌어 줄 당신의 손이 없고
당신은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당신의 사랑 없이 산다면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아직도 나는 당신이 결국
내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어요
그것은 내가 지난날의 어떤 것을
더듬어 찾으려는 것 같아요

  * Monika Martin
  모니카 마틴은 196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서정적인 국민 가수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노래는 그리스 출생인 NaNa Mouskouri (나나 무스쿠리)에 의하여 1964년에 처음으로 출반되었는데 그 후에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송창식, 윤형주(트윈 폴리오)가 1980년대에 ‘하얀 손수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러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유머

1. 신혼 부부
The bride wanted to disguise the fact that they were honeymooning and asked her husband while on the plane if there was any way they could make it appear that they had been married for a long time.
"Sure," said the husband, "you carry the bags."

  신부는 신혼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 신랑을 보고 결혼한 지 오래된 부부같이 보일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있지. 짐들을 당신이 들고 다니면 되는 거요."

2. A candidate for governor in a southern state of the United States was asked what he planned to do if elected.
"That's not worrying me at all," he replied.
"What I am concerned about is what I will do if I'm not elected."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지사로 출마한 사람을 보고 당선하면 무엇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당선하지 못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가 그 후보의 대답이었다.


명시와 명문

陳情表(진정표)                                                          
                          李密(이밀)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臣密言(신밀언) : 신 밀은 아뢰나이다.
臣以險釁(신이험흔)으로 : 신은 운수가 기박하니
夙遭愍凶(숙조민흉)하여 : 일찍이 민흉을 당하여
生孩六月(생해육월)에 : 난 지 여섯 달 만에
慈父見背(자부견배)하고 : 아비를 여의었고
行年四歲(행년사세)에 : 네 살에는
舅奪母志(구탈모지)니이다 : 외숙이 어미를 개가시켰나이다.
祖母劉閔臣孤弱(조모유민신고약)하여 : 조모가 고아가 된 신을 불쌍히 여겨
躬親撫養(궁친무양)이니다 : 손수 무육하였나이다.
臣少多疾病(신소다질병)하여 : 신은 유시에 다병하여
九歲不行(구세불행)하고 : 아홉 살이 되도록 보행을 하지 못했었나이다.
零丁孤苦(영정고고)하며 : 의지가지없어 홀로 신고하며
至于成立(지우성립)하니 : 장성하였사오나
旣無叔伯(기무숙백)이오 : 윗대에는 백숙부가 없고
終鮮兄弟(종선형제)니이다 : 당대에는 형제가 적으니
門衰祚薄(문쇠조박)하여 : 가문이 쇠미하고 복조가 박한 까닭이니이다.
晩有兒息(만유아식)하니 : 늦게 자식을 두었으니
外無朞功强近之親(외무기공강근지친)이요 : 밖으로는 기공의 근친이 없고
內無應門五尺之童(내무응문오척지동)이니이다 : 안으로는 문전에서 손을 맞을 삼척 동자 하나 없나이다.
煢煢孑立(경경혈립)하여 : 홀로 외롭게 지내면서
形影相吊(형영상조)어늘 : 몸과 그림자가 서로 위로할 따름이온데
而劉夙嬰疾病(이유숙영질병)하여 : 조모도 일찍이 병을 얻어
常在牀褥(상재상욕)하니 : 매양 자리 보전하고 있으므로
臣侍湯藥(신시탕약)하여 : 신은 시탕하며
未嘗廢離(미상폐리)로이다 : 곁을 떠난 적이 없나이다.
逮奉聖朝(체봉성조)에 : 성조를 받들게 되어
沐浴淸化(목욕청화)하여 : 청화를 입고 있나이다.
前太守臣逵(전태수신규)가 : 전임 태수 규는
察臣孝廉(찰신효렴)하고 : 신을 효렴으로 천거하였고
後刺史臣榮(후자사신영)이 : 후임 자사 영은
擧臣秀才(거신수재)하나이다 : 신을 수재로 천거하였사오나
臣以供養無主(신이공양무주)로 : 신은 공양자가 없는 고로
辭不赴(사불부)러니 :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사옵더니
會詔書特下(회조서특하)하사 : 마침 특별히 조서를 내리사
拜臣郞中(배신랑중)하시고 : 신을 낭중에 배하시었고
尋蒙國恩(심몽국은)하여 : 얼마 후 또 국은을 입었으니
除臣洗馬(제신세마)하시니 : 신을 세마에 제수하셨음이니이다.
猥以微賤(외이미천)으로 : 외람되이 미천한 몸으로
當侍東宮(당시동궁)이라 : 동궁을 시측하게 되니
非臣隕首所能上報(비신운수소능상보)니이다 : 신이 목숨을 바쳐도 다 갚을 수 없는 고로
臣具以表聞(신구이표문)하여 : 신은 표로써 구진하고
辭不就職(사불취직)이러니 : 사퇴하고 도임하지 않았었나이다.
詔書切峻(조서절준)하여 : 다시 조서로써
責臣逋慢(책신포만)하시고 : 신의 포만함을 준절히 책망하시니
郡縣逼迫(군현핍박)하여 : 군과 현에서는 핍박하며
催臣上道(최신상도)하니 : 신이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고
州司臨門(주사임문)이 : 주의 관원들은 문전에 와서
急於星火(급어성화)니이다 : 성화같이 서두르나이다.
臣欲奉詔奔馳(신욕봉조분치)인댄 : 신도 성조를 받들어 달려가고 싶사오나
則以劉病日篤(즉이유병일독)이오 : 조모의 병이 날로 위독해지고
欲苟順私情(욕구순사정)인댄 : 구차히 사정을 따르고자 하여도
則告訴不許(즉고소불허)하니 : 호소가 불허되니
臣之進退(신지진퇴)가 : 신의 진퇴가  
實爲狼狽(실위낭패)로소이다 : 실로 낭패니이다.
伏惟聖朝(복유성조)가 : 엎드려 생각건대 성조는
以孝治天下(이효치천하)하사 : 효도로 천하를 다스려서
凡在故老(범재고로)라도 : 모든 노인들이 살아서
猶蒙矜育(유몽긍육)하니 : 긍육되고 있나이다.
況臣孤苦(황신고고)가 : 더욱이 신은 홀로 신고함이
特爲尤甚(특위우심)이니이다 : 남달리 우심하니이다.
且臣少事僞朝(차신소사위조)하여 : 또한 신은 젊어서 위조를 섬겨
歷職郞署(역직랑서)하니 : 낭서를 지냈으므로
本圖宦達(본도환달)하여 : 본시 환달은 바랐으나
不矜名節(불긍명절)이니이다 : 명절을 자랑하지는 않았나이다.
今臣亡國之賤俘(금신망국지천부)라 : 이제 신은 망국의 천한 포로로
至微至陋(지미지루)어늘 : 지극히 미천하고 지극히 비루함에도
過蒙拔擢(과몽발탁)하니 : 과분하게 발탁되니
寵命優渥(총명우악)하온대 : 총명이 우악하옵거늘
豈敢盤桓(기감반환)하며 : 어찌 감히 주저하며
有所希冀(유소희기)이리까 : 바라는 바가 있겠나이까
但以劉(단이유)가 : 다만 조모가
日薄西山(일박서산)하여 : 해가 서산에 걸린 것처럼
氣息奄奄(기식엄엄)하니 : 기식이 엄엄하여
人命危淺(인명위천)하여 : 목숨이 위태로우니
朝不慮夕(조불려석)이니이다 : 조불려석이니이다.
臣無祖母(신무조모)면 : 신에게 조모가 없었다면
無以至今日(무이지금일)이오 : 오늘까지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요
祖母無臣(조모무신)이면 : 조모에게 신이 없다면
無以終餘年(무이종여년)이니 : 여년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니
母孫二人(모손이인)이 : 조모와 손자 양인이  
更相爲命(갱상위명)이니이다 : 서로 목숨을 이어 주고 있나이다.
是以區區(시이구구)하여 : 이런 까닭으로 소심해져서
不能廢遠(불능폐원)이로소이다 : 능히 그만두고 멀리할 수 없나이다.
臣密(신밀)은 : 신 밀은
今年四十有四(금년사십유사)오 : 올해 마흔넷이요
祖母劉(조모유)는 : 조모 유씨는
今九十有六(금구십유육)이니 : 이제 아흔여섯이니
是臣盡節於陛下之日長(시신진절어폐하지일장)하고 : 신이 폐하께 충절을 다할 날은 많고
報劉之日短也(보유지일단야)니이다 : 조모에게 보은할 날은 적으니이다.
烏鳥私情(오조사정)이 : 까마귀의 반포지정으로
願乞終養(원걸종양)하노니 : 끝까지 봉양하기를 허락하시기를 바라나이다.
臣之辛苦(신지신고)는 : 신의 신고함은
非獨蜀之人士(비독촉지인사)와 : 촉의 인사들만이 아니라
及二州牧伯所見明知(급이주목백소견명지)니이다 : 양주의 목백까지도 보고 밝히 알고
皇天后土(황천후토)가 : 황천과 후토도
實所共鑑(실소공감)이시니이다 : 실로 함께 감찰하시는 바니이다.
願陛下(원폐하)는 :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矜愍愚誠(긍민우성)하사 : 우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廳臣微志(청신미지)하여 : 신의 작은 뜻을 청허하소서.
庶劉僥倖(서유요행)하여 : 바라옵기는 조모가 요행히
卒保餘年(졸보여년)이면 : 여년을 보전한다면
臣生當隕首(신생당운수)요 : 신은 살아서는 마땅히 목숨을 바치고
死當結草(사당결초)리이다 : 죽어서도 마땅히 결초보은하겠나이다.
臣不勝怖懼之情(신불승포구지정)하여 : 신은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謹拜表以聞(근배표이문)하노이다 : 근배하고 표로써 아뢰나이다.

서평

털 없는 원숭이 (The Naked Ape)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 지음,  김석희 옮김, 정신세계사(1991), 266페이지)

글: 최성재

  인간은 태고 이래로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왔다. 종교와 철학이 가장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을지 모른다. 역사도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에 대한 기록이요 인간에 대한 탐구 노력이다. 그만큼 연원이 깊다. 넓은 의미에서 역사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구술로써 인간에 대한 탐구 결과를 후손에게 전했다.
  철학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인류학적인 접근과 정신의학적인 시도가 몇 세기 동안 유행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두 방법은 주로 정상적인 인간보다 비정상적인 인간을 다루었다. 이 책은 정상적인 인간을 동물학적 측면에서 바라본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역추적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동물적 측면을 정면에서 다룬다. 억지스럽고 꿰어 맞추기식으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아, 그렇구나!’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부분이 많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듯이, 또는 실험실의 동물을 관찰하듯이 아무 선입견이나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털 없는 원숭이’를 바라보고 관찰한 바를 나름대로 해설과 더불어 담담히 들려준다. 저자는 철저한 무신론자이다.
  영국의 유명한 동물행태학자인 데스몬드 모리스는 동물적 본능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니까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이해의 첩경이 동물학적 접근이라고 본다. 그러면 이 책이 인간의 본질을 속속들이 드러냈을까. 천만에! 여전히 인간은 수수께끼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지구상에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이 있는데, 딱 한 종만이 털이 없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만약 동물원에 인간도 전시한다면 그 이름을 ‘털 없는 원숭이’라고 하면 제일 적합할 것이다. 책의 제목은 바로 그런 발상으로 붙여진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털이 없는 것’ 외에 인간과 동물, 인간과 다른 원숭이나 유인원 사이에서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두뇌다. 지금까지는 단지 신체에 비해서 인간의 두뇌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강조했다. (두뇌 자체는 고래가 제일 크다.) 모리스는 유태보존(幼態保存)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아기의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을 이른다. 인간의 두뇌 발달은 이로써 크게 도움을 받는다. 다른 원숭이나 유인원은 태어날 때의 모습과 성장한 후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성장한다. 특히 놀라운 것은 두뇌 성장이다. 원숭이는 태어날 때 두뇌의 70%가 자란 상태다. 나머지 30%는 6개월 만에 다 자란다. 유인원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 침팬지도 생후 12개월 만에 두뇌 성장이 완성된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 그 두뇌가 성인의 23%밖에 안 된다. 23년이 지나야 두뇌가 다 자란다. 이것은 성적으로 성숙한 후에도 약 10년 동안 두뇌는 계속 자란다는 말이다. 침팬지가 생식 능력을 갖기 6~7년 전에 두뇌 성장이 멈추는 것과 크게 차이난다.
  인간은 두뇌가 23세까지 성장하므로 그때까지 완전히 독립하기가 힘들다. 자연히 부모는 자녀를 오랫동안 돌보아야 하고, 자식은 두뇌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계속 배워야 한다. 여자는 1명의 자식을 낳아도 약 20년 동안 보살펴야 하므로 남자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한다. 남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야 한다. 이때 섹스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털 없는 원숭이의 암컷은 생리 기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수컷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필요 때문이라고, 모리스는 주장한다. 인간이 모든 유인원 중에 제일 섹스를 밝힌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반론의 여지가 있다.
  인간은 원숭이와 침팬지 중간이라고 생각했으나, 새로운 종이 발견되었다. 보노보는 20세기 후반에 주로 연구되었는데, 이 유인원은 침팬지와 달리 암컷이 무리를 주도한다. 모계 사회다. 수컷의 서열은 어미의 서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인간 이상으로 호전적인 침팬지와 달리, 이들은 싸움을 모른다. 모든 걸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이 평화의 무기가 바로 섹스다. 보노보는 인간보다 훨씬 자주 섹스를 즐긴다. 남이 보거나 말거나!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정상체위가 이들에게도 정상체위다. 오르가즘도 느낌에 틀림없다. 절정에 달하면 인간 못지않게 교성을 지른다. 이들은 동성끼리도 긴장을 풀기 위해 섹스를 사용한다. 또한 인간 못지않게 사랑을 갈구한다. 인간과 친해지면 끊임없이 안아달라고 보챈다. 아예 착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2006년 인간과 동물 간 두뇌 차이를 분자생물학적으로 입증하는 획기적인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데이비드 하우슬러(David Haussler)는 ‘인간가속부위(Human Accelerated Regions: HARs)’를 발견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HARs 중에서 두뇌 발달과 관련된 HAR-1은 침팬지와 닭의 염기서열 차이는 2개뿐인데, 인간과 침팬지의 염기서열 차이는 무려 18개라고 한다. HAR-1은 임신 7~19주 무렵, 태아의 두뇌에 존재하는 카잘-레치우스(Cajal-Retzius) 세포라는 곳에서 발현된다. 카잘-레치우스 세포는 대뇌피질의 발생과정에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이언스타임즈, 김우재)  
  재미있는 대목 중에 이런 것도 있다. 도톰하게 뒤집혀진 인간의 입술은 마주 보며 나누는 섹스에서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제2의 성기라고 한다. 색깔도 조직도 비슷하다고 한다. 불룩하고 둥그스름한 여자의 유방은 제2의 엉덩이라고 한다. 흥분하면 발그레해지는 귓불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게 아니라 순전히 섹스를 위해 발달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목차는 <기원 origin>, <짝짓기 sex>, <기르기 rearing>, <모험심 exploration>, <싸움 fighting>, <먹기 feeding>, <몸 손질 comfort>,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 animals> 이상 8개로 구성되어 있다.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으로 한 권 더 권하고 싶은 책은 ‘인간 동물원’이다. 현대 인간 사회, 특히 도시가 일종의 동물원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의 많은 문제에 대해 신선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각연사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514~539)때 유일 대사가 세웠다는 구전이 있다. 각연사 ‘창건유래기’에는 “법흥왕 때에 어느 대사가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 떼가 날아와서 나무 토막을 물고 날아가기를 자주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가 그 까마귀 떼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 속에 나무 토막을 떨어뜨림으로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 있어 그 곳에 절을 세우고 ‘각유불어연중(覺有佛於淵中)’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각연사라 했다.”고 되어 있고, 고려 혜종(944~945)연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세여래급관음개금기」에는 ‘차소이통일대사가람(此所以通一大師伽藍)’이라 하여 고려 광종 때의 고승인 통일대사가 창건했다고 했다. 한편 「대웅전상량문」에는 ‘금전대대왕지원찰’이었다 하고 융경(1567~1572), 이치(1644~1661), 강희(1662~1722) 연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각연사에는 비로자나불 좌상, 통일 대사탑비, 비로전, 대웅전, 통일 대사 부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2) 송광사십자각(유형문화재 제3호)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
  조선 세조 12년(1466) 벽계 정심 선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1592) 때 소실되어 철종 8년(1857) 대웅전 중건시 제봉 선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이 건물의 용도는 범종각으로서 평면 구성이 십자형으로 되어 있어 십자각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나라 목조 건축물 중에서 유례가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건축된 중층의 누각으로 공간포를 1구씩 배치한 다포계 양식이며, 포작수가 많아 화려하면서도 공포의 구조 수법은 비교적 건실하다. 지붕도 십자로 구성되었으며 사방의 끝은 팔작으로 처리하였다. 2층 누각 안에 걸려있는 동종은 명문에 의하면 조선 숙종 42년(1716)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주조되었으며, 영조 45년(1769)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동종의 높이는 107cm, 아래 부분의 지름은 73cm, 두께는 4.5cm이다.

(3) 광양 장도 박물관
  이 박물관은 국가 중요 무형 문화재 제 60호 박용기 옹의 평생 숙원 사업으로 17년 전부터 계획하여 개관하기까지 정부와 전라남도, 그리고 광양시에서 건축에서 인테리어까지 모든 일을 담당하였고 박용기 옹이 수탁 운영하는 시립 박물관이다. 현재 이 박물관에는 박용기 옹이 14세 때부터 62년 동안 만들어 온 각종 장도와 세계 각국의 칼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국가 문화재와 지방 문화재 및 명장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장도를 만드는 전통적인 공구들과 작업실의 광경이 재현되어 있으며, 체험 학습 공간이 마련되어 관람과 교육, 체험을 동시에 행할 수 있다.

(4) 쌍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신라 성덕왕 22년(723)에 의상 스님 제자 삼법 스님이 창건한 절로 처음 이름은 옥천사였다. 그 후 문성왕 2년(840)에 진감 선사가 대가람으로 중창 후 887년 정강왕이 선사의 도풍을 앙모하여 쌍계사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절은 임진왜란 시 불탄 것을 인조 10년(1,632)에 벽암 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다. 산의 입구인화계동에서 절까지의 6km거리에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계곡과 맑은 물, 기암과 고목들이 어울려 장관을 이루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 쌍계석문, 진감 선사 태공탑비(국보47호)를 지나 북쪽 500m거리의 국사암 뜰에 느릅나무(사천왕수), 또한 동북쪽으로 2km 남짓 거리에 청학봉과 백학봉의 두 계곡을 끼고 있는 높이 60m의 불일 푹포(지리산 8경중의 으뜸) 등의 이름난 곳이 있다. 한편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신라 흥덕왕 3년(828) 김대렴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음으로 차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남쪽 줄기 쌍계사 일원에 심었다고 하며 일주문 근처에 차 시배 추원비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 차밭에도 차 시배지 기념비(도 기념물 제61호)가 있다.

(5) 순창삼인대(유형문화재 제27호)
  조선 연산군 12년(1506), 중종반정이 성공된 후 공신들은 왕비 신씨를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출하고 장경왕후(1491~1515)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왕후가 된지 10년만인 중종 10년(1515)에 돌아가셨다. 이 소식이 전하여지자 당시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등이 회동, 결의하여 폐출되었던 단경왕후 신씨 복위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으로부터의 추방과 죽음을 각오한 나머지 직인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그 뒤 이곳에 비각을 건립하고 삼인대라 하게 되었다.

(6) 대관령
  해발고도 832m이며, 고개의 총연장이 13km이고,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 서울과 영동을 잇는 태백산맥의 관문이며, 영동고속도로가 지났으나 2002년 11월 횡계 - 강릉 구간이 터널로 바뀌었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남대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松川)이 된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발왕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 평탄 지형을 이룬다. 한랭 다우 기후 지역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서리가 내린다. 특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스키장이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이다. 연평균 기온은 6.4℃, 연강수량은 1,717.2mm이다. 고랭지 채소 및 씨감자의 주산지이며 목축업이 발달하였다.

(7) 죽서루(보물 제213호)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원종7년(1266)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이 누에 올라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1266년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각 동쪽에 죽림이 있었고 죽림속에 죽장사가 있었다하여 죽서루라 하였고, 또한 그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었다하여 죽서루라 했다는 말도 전해 온다. 이 누각은 관동 8경의 하나로, 자연암반을 기초로 삼았다. 하층은 17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중 9개의 기둥은 자연암반에 세웠고, 나머지 8개 기둥은 석초(石礎)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7개의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른 점이 특징이며,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間)8작(作) 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경색은 멀리 태백준령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가까이는 근산, 갈야산, 봉황산이 솟아 있어 마치 삼신산의 선계(仙界)를 느끼게 하는 경지이다. 오십굽이나 휘돌아 흐른다 하여 이름을 붙인 오십천은 누각 밑 깎아지른 절벽에 부딪쳐 갈길을 잃고 머뭇거리며 웅벽담을 만들어 놓았다. 웅벽담은 맑기도 하거니와 천길 벼랑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면 그 누구도 현란하지 않을 수 없다. 관동팔경이 모두 해경(海景)을 끼고 있지만 죽서루만은 해색(海色)을 볼 수 없는 것이 특색이며, 숙종과 정조가 내린 상찬의 시와 이율곡 등 많은 명사들의 서액이 걸려 있다. 남쪽에 본루의 별관으로 연근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초석만 드문드문 보이며, 누대 밑의 절벽에는 역사굴이 있다.

(8) 마곡사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에 자장  율사가 창건한 충남의 대표적인 사찰로, 그 이후 불일 보조 국사가 중창하여 불법의 큰 도량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다. 공주시에서 약 25km 떨어진 태화산 남쪽에 웅장하게 들어서 있다. 물의 흐름과 산의 형세가 태극형이라고 하는 이곳은 택리지, 정감록 등 많은 옛 책자에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명당으로 꼽을 만큼 산세가 아름다우며  특히 봄철의 경치가 아름답다. 마곡사 일대에는 영은암(0.2km), 대원암(0.4km), 은적암(0.6km), 청련암(0.3km) 등 많은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절앞 냇가 바위벽에는 고란사에만 있다는 고란초가 밝은 녹색잎 빛으로 피어 등산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9) 고모산성
  1500여 년의 기나긴 역사 속에 검푸른 이끼와 넝쿨에 묻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진남교반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고모산성은 성밖의 수직으로 쌓아 침공에 대비하고 성 안쪽은 비스듬히 쌓아 군병이 오르내리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남북쪽으로 두 개의 통문을 낸 흔적이 뚜렷이 남았으나 성안의 건축물은 흔적조차 없고 농토로 사용되어 원형을 찾을 길이 없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의 주력부대를 성을 지키는 우리군사 한 명 없이도 만 하루 동안 진격을 지연시킬 만큼 천혜의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철옹성이었으며 가은읍 출신 전국도의창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이 이끄는 의병이 왜병과 경렬한 전투를 벌였고 6.25 동란 때에는 어룡산 진남교반 일대의 치열한 전투로 쌍방이 수많은 희생자를 내게 했던 민족수난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천년고성 이나 그 원형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10) 보석사
  금산읍에서 약 9km 떨어진 진악산(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2년 (886)에 조구대사가 창건한 역사 깊은 절이다.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지난날 전북 불교의 이사중추기관이었고 현재는 충남교구 산하로 되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앞산 중허리의 암석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하였다는데서 이름지어 졌으며 주위의 울창한 숲과 암석은 맑은 시냇물과 어울려 대자연의 조화를 이루고 속세를 떠난 듯 하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선각, 산신각, 선방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절경의 12폭포가 있다. 특히 높이 40m, 둘레가 10.4m나 되는 1,1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있어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 주며 200~300m 정도의 전나무길이 나있어 호젓한 산행코스를 즐길 수 있다.

(11) 죽령 옛길
죽령 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는데,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옛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져 있는 수목 터널이 주변에 펼쳐지는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명승지이다.



기행문
괴산을 다녀와서

방지원

  “꼴딱” 어릴 적 소풍 전날처럼  들뜬 마음에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시각 장애인 문화원에서 답사 가는 날이다. 4월 제83차 기행지는 충청 북도 괴산군 산막이 옛길, 각연사, 벽초 홍명희 생가다.
  문화원 원장님의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된 사회를 이루어 나가자는 말씀과 이현동 선생님의 사전 설명으로 소풍은 시작 되었다.
  괴산은 3년 전 인조~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우암 송시열이 은거한, 화양 구곡 답사 때 온 곳으로, 계곡에 발 담그고 놀다가 소나기를 만나 돗자리를 우산 삼아 내려온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 때 계곡에 떨어지던 빗소리와 우리들의 왁자지껄한 수다와는 대조적으로 각연사는 고요했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514-539) 때 유일 대사가 세웠다는 구전이 있다. “유일 대사가 산 너머 쌍곡리에 먼저 절터를 정하고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대팻밥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대사가 괴이하게 여겨 유심히 살펴보니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나타나 대팻밥을 물고 날아가기에 그 까마귀 떼를 따라가서 깊은 산골 연못 속에 나뭇조각을 떨어뜨림으로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 있어 그곳에 절을 세우고 유일 대사가 연못 속에 불상이 있음을 깨달았다(각유불어연중).”라고 하는 말에서 각연사라는 사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못 속 석불이 현재 비로전에 안치된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이라고 한다.
  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려 비로전에 드니 단상에 계실 줄 알았던 부처님은 우리와 눈높이를 같이하여 내려와 앉아 맞이해 주신다. ‘감히 눈도 맞춰 보고 이렇게 가까이 계시니 옆에 서서 사랑의 몸짓을 하고 있자니 헉! 붉고 도톰한 입술! 뽀뽀도 해 버릴까? 마음을 억누르고 그저 가슴에 담아서 갑니다.’
  각연사가 처음이지만 너무 좋아 이다음 나이 들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어느 보살님께 언제라도 오시라는 스님의 말씀 끝에 “화장실에 휴대폰이 떨어졌어요” 라고 했더니 건져 주시겠단다. 그냥 투정 부려 본 건데 건져 달란 거 아니였는데.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건져 주시겠다고 빗자루로 잠자리채를 만들어 가벼이 건져 올리셨다. 재래식 화장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예술적으로 거의 원형 그대로다. 이 폰 돈 버는 폰이니 잘 간직하라는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갔다.
  비 온 뒤이기 때문일까, 계곡이 깊어서일까? 제법 많은 물이 흐른다. 지천으로 핀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봄이라고 우기는 것 같다. 계곡에서 손 씻으시는 원장님의 연두색 점퍼와 생강나무 꽃이 어울리는 것이 꼭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점심시간이다.
“병풍 잔치방”이라는 식당 간판과 같이 우리를 맞이한 것은 미선나무다. 처음 보는 꽃이라 신기했는데 경복궁 자경전 뜰에 당당히 자리한 순수 토종으로 1속 1종의 식물이라고 노순희 씨가 설명해 준다. 수목원에서 조금 공부했다는 실력이 아니신 것 같다. 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박이다. 음식 솜씨는 물론이고 인심 또한 넉넉하다. 감사히 잘 먹고 벽초 홍명희 생가로 출발했다.
  역사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생가이자 금산 군수 재직시 경술국치에 항거해 자결한 항일 지사 일완 홍범식이 살던 가옥으로, 홍범식은 홍명희의 부친이다. 좋은 기가 흐른다는 해설사의 말씀처럼 좋은 기를 받아 고가에서 300m옆에 괴산 군민 가마솥으로 이동하였다. 이 가마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가마솥으로 4만 군민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크기며, 군민의 화합을 상징한다고 한다. 깜짝 선물로 기쁨을 주신 문화 해설사님께 작별 인사를 고하고 산막이 옛길로 출발했다.
  2월에도 권중노 선생과 같이 앉았는데 밤늦게까지 일하시고 피곤해하시더니 차에서 쉬시겠단다. 시각 장애인의 안마 시술이 병원이나 한의원에서 물리 치료 받듯 국민 건강 보험이 적용되어 누구든지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시간이다.
  3인 1조가 되어 달라는 간사님 주문에 나는 현창이, 현창 아버지와 한 조가 되어 충북 괴산군 칠성면 의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 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총 2.5km의 덧그림을 그리듯 그대로 복원된 옛길에 접어든다. 현창이는 빠르다. 현창이 아버지도 빠르다. 차마 크게 헉헉거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연리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부부애를 상징한다는 연리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거짓말처럼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가 되어 있다.
  소원을 적어 걸어 두고 다시 길을 떠났다. 길가엔 할미꽃과 이름 모를 들꽃이 한가롭다. “주로 소나무가 많아요.” 하고 옆을 보니 그네와 출렁다리가 있다.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이현동 선생님을 두고 현창이가 다리에 올랐다. 이어서 현창이 아버지, 그리고 내가 뒤이어 올랐다. 우리 앞뒤로 문화원 식구들이 줄지어 간다. 내려다보니 아득한데 잘 들 가신다, 출렁다리를 출렁이면서.
  옛길은 대부분 나무받침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계단을 이어주는 비스듬한 판자가 문화원 식구들이 미끄러지기 쉬워 조심스러웠다.
  앉은뱅이 약수터에서 약수를 한 사발씩 마시고 살아 있는 나무 밑동을 뚫어 약수가 나오도록 했다는 나의 설명에 현창이네 아버지께서 잔인하다고 하신다. 고공 전망대에 이르러 휘 둘러본다. 저기 가물거리는 곳이 산막이 마을이리라. 돌아오는 길 현창이가 뛴다. 현창이네 아버지도 뛴다, 아니 난다. 뒤처진 나는 아리랑만 부른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니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그나마 미선 나무가 있어 위로가 된다.
  길 옆 과수원엔 나물 캐는 사람과 나비가 어우러져 있고 산들바람은 머리를 날리며 어깨춤을 추게 한다. 내려오니 권중노 선생님도 바람을 쐬었다니 다행이다.
  문화원 기행은 문화원 식구들의 도우미로 온 것이지만 실상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 준다. 그저 스쳐 지나가던 풍경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더 자세히 알아야 하고 혹여 사고 나면 안 되니 여유 있게 다니기 때문에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행이다. 무엇보다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도와 가며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준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5월 기행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한 것이리라.  


하동길, 따로 또 같이

최점화

  나는 늘 여행을 꿈꾸었다. 어려서는 학교 너머로 사라지는 신작로 끝을 따라 가 보고 싶은 아련한 그리움과 기대가 있었고, 학교를 마치고 일터를 얻으면서는 산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길로 향하고자 했으며,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여행길을 원한 듯하다.
  가끔은 석양이 기우는 저물녘에 혼자만의 나섬을 꿈꾸었고, 더러는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다가가고 싶은 바람을 갖기도 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잘 꾸며놓은 꽃동산으로, 바닷가로, 놀이동산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영상센터로, 역사와 유물이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산속의 절집으로……. 많이도 다녔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더하면서 늘어나야 할 여유는 오히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점점 일상과 세상살이로 인한 피로감으로 고작 동네 산책길이나 도심의 영화관 정도가 맘먹고 나서는 휴일 나들이가 되고 있음이 문득문득 느껴지지만, 선뜻 신발 끈을 매고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바쁜 일상에 묻혀 있던 길 나섬에 대한 갈망을 단번에 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행이 시작됐다. 시각장애인문화원 문화 체험 기행이었다. 몇 번을 나서던 그 여행은 갈 때마다 새로웠다. 처음 만나 본 그곳에 가족과 함께 다시 가 보기도 했다. 특히 이번 하동 녹차밭 체험길에 함께 하자는 선생님의 전화는, 하루 힘이 거의 소진해갈 쯤 후배가 건네주던 얼음커피 한잔 같은 고마움이었다.
  아이들이 중·고교생이다보니 가족이 많지 않아도 함께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모처럼 중학생 아들과 단둘이 집을 나서기로 했다. 오랜만에 반가운 선생님도 뵙고, 아들에게 낯선 바람과 건실한 분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주고, 하동의 맑은 산바람으로 자라는 찻잎을 딸 수 있어 좋으리라. 간간이 나 혼자만의 여유도 가져보며 아들과 함께 집을 떠나 마음나누기가 된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부모보다 친구가 좋을 나이에 닿은 아들은 언제나 제 할 일을 잘 챙기고 의젓하지만 “예, 아니요, 괜찮아요.”외의 긴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을 시기다. 이곳 문화원의 두 번째 동행이며 한비야씨와 반기문 총장을 좋아하는 아들과 함께 약간의 간식과 책 한 권을 챙겨 하동행 버스가 기다리는 주유소 앞으로 갔다. 버스에 오르고 낯익은 몇 분과 낯선 분들을 둘러보며 모두 오늘의 한식구들이구나 생각을 하며 아들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의 두 분 선생님을 뵐 때면 찬란했으나 결코 순탄치 않았던 내 생의 소중한 시절이 반추된다. 떠나온 지 오래라서 기억에 희미하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는 먼 고향 같은 분들.
  푸르렀으나 현실은 곤궁했던 그 시절,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를 했던 내게 선뜻 따뜻한 밥을 사주셨는데 제대로 갚아 드리지도 못하고 세월은 어느새 나를 중년의 한 지점으로 데리고 왔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다녀오다 보니 옆에 앉은 아들이 보인다. 가져온 책을 펼쳐 얘기를 건네니 평소보다 훨씬 조근조근 의견을 말해준다. 아마도 사방으로 열린 산천이 우리 둘의 마음도 얼마만큼 더 열어주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쌍계사로 오르는 길. 예전과 달리 가는 곳에 따라 둘씩 짝 지은 명단을 주시니 아들도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설 수 있어서 좋았다. 절집 안 담장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듯 나뭇잎과 커다란 한자를 드문드문 박아 넣은 꽃담은 참으로 신선했고, 9층 석탑 옥개석 끝마다 매 달린 은행잎 풍경은 이색적이었으며, 몽실몽실 부처님 머리를 닮은 불두화는 태초부터 제 집인 듯 수수하고 복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게 된 선생님들과 나란히 걸으며 안부라도 묻고 싶었지만 옆에서 성심껏 안내를 해드리는 학생들에게 양보를 해드렸다. 그날따라 날씨는 여름을 방불케 했지만 회원선생님들은 너무나 열심히 듣고, 만져보고, 귀 기울이시는 모습이었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 특산물을 맛보라는 얘기처럼 섬진강표 작은 조개 재첩국으로 점심을 먹고, 역시 하동의 매실로 담근 막걸리까지 한잔 마시고 차밭으로 향했다.
  보성 차밭이 차나무의 키가 크고 정리가 잘된 도시의 모습이라면, 그날 본 하동의 차밭은 유년의 내 고향 천수답처럼 정겹던 고향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좀 더 잘 보이는 아들이나 두꺼운 안경을 써서 덜 보이는 그의 짝이나 똑같이 처음 해 보는 일인데도 진지한 자세로 찻잎을 따고, 닦고 비비며 성심으로 녹차를 만드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하루 일과를 정리하듯 퀴즈로 역사공부를 하고 사행시를 지어 체험 여행을 더욱 의미롭게 만드는 진행자의 힘도 다른 여행이나 체험 학습과는 달랐다. 사행시를 지어내는 솜씨 또한 한 두 번의 참가로는 선보일 수 없는 내공마저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와서 섭씨 260도의 더운 솥에 잴 수 없는 열정까지 보태어 한 줌 녹차를 우려냈다. 그 맛이 참으로 산뜻했다. 직접 내손으로 수고한 대가였으니 그 맛을 어디다 견줄 수 있을까?
  특별한 영농기술도 없이 하늘이 주신 대로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뙤약볕 아래 김을 매고, 고추를 따고, 감자를 캐면서, 어른이 되어서는 그늘진 사무실에서 일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길에서 다시금 생각했다. 아들이 처음해보는 생소한 체험을 기꺼이 해내는 걸 보면서, 삶을 가꾸는 건 뜨겁잖은 그늘이 아니라 햇볕과 바람과 땀이 있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함께 여행한 아들도 스스로 알아가기를.
하동의 맑은 바람과 푸른 산천, 배우고 실행하며 진실하게 삶을 엮어 가시는 문화원 가족들, 성큼 자란 아들의 뒷모습,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조용히 돌아본 나 자신……. 이번 여행에서 내가 만난, ‘함께하기, 그리고 나만의 따로하기’ 였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괴산 벽초

                          정연원
  괴: 괴이하고 괴이한 세상일이
  산: 산더미같이 많은 이때에
  벽: 벽 보고 앉아 스트레스를 풀고 녹이다보면
  초: 초탈한 경지에 이르리라

                        김민준
  괴: 괴나리 봇짐을 둘러메고
  산: 산들바람처럼 경쾌하게 걷는 이 기분 좋기도 좋구나
  벽: 벽창우처럼 안 온다고 고집부리던 나
  초: 초싹초싹 잘도 쏘다니는구나

시제: 송광 편백

                         김창연
  송: 송광사 가는 산모퉁이 한적한 마을 아담한 집의
  광: 광 속에 묻어 놓은 동동주가 잘도 익어 가는구나
  편: 편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에 발 담그고 글을 외는 한 사람 있으니
  백: 백면 서생 김 선비라 한두 잔 동동주에 목소리 한번 낭랑도 하여라

                           강구연
  송: 송진처럼 끈끈하고
  광: 광석처럼 단단하고
  편: 편백처럼 고상한 인연을 맺은 우리 문화원 식구들
  백: 백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그런 좋은 사람들과 오늘도 함께 해서 좋았습니다

                          홍미라
  송: 송알송알 맺혀 있는 꽃잔디
  광: 광채를 발하며 춤을 추네
  편: 편안한 마음으로 숲을 거니니
  백: 백 가지 시름이 눈 녹듯이 스러지네

                         김지예
  송: 송광사의 맑은 풍경 소리와
  광: 광활한 편백 숲은
  편: 편안한 우리 마음을
  백: 백지로 만들어 주네

시제: 쌍계 정금

                          정희령
  쌍: 쌍화차는
  계: 계란 노른자를 넣어야
  정: 정말로
  금: 금메달감 맛이 된다

                          박영숙
  쌍: 쌍계사로 해서 하동 정금 녹차 밭에 왔네
  계: 계곡에도 산에도 들에도 녹차밭이라네
  정: 정금에서 잎사귀를 따서 볶고 비벼서 건조시킨
  금: 금쪽같은 녹차, 오늘 저녁 가족과 함께 한잔 해야지

                         송기찬
  쌍: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 선사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계: 계단을 허위허위 오르고 또 올라
  정: 정상의 맑은 경치를 대하니 선계 불계가 따로 없구나
  금: 금세 쌓인 피로가 풀리고 막힌 가슴이 뚫리네

                          이석규
  쌍: 쌍놈과 양반의 구별이 생긴 이래로 백성 간에는 평등이 없었고
  계: 계자와 장자의 구별이 생긴 이래로 형제간에는 우애가 없었고
  정: 정실과 측실의 구별이 생긴 이래로 아내들 간에는 화목이 없었고
  금: 금화와 은화의 우열이 생긴 이래로 빈부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더라


시제: 하늘 김용

조은숙
  하: 하늘이 청명한 날
  늘: 늘 찾고 싶었던
  김: 김용사에 들러 배례하고
  용: 용이 승천할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방지원
  하: 하늘재 오르며 숙제하는 아이들아
  늘: 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
  김: 김용사 계곡물에 뛰어들 때처럼
  용: 용감하게 미래에 도전할 수 있단다

                            이영수
  하: 하늘 김용 주제도 어렵네
  늘: 늘 가볍게 써 냈는데 오늘은 안 되네
  김: 김이 서리고 연기가 끼도록 머리를 쥐어짜네
  용: 용신님, 비만 내리지 말고 시재도 좀 내려 주세요

시제: 순창 강천

                           박소영
  순: 순창에 가려고 하니
  창: 창밖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강: 강아지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천: 천둥이 쳐도 오늘은 꼭 가 보련다

                            이영수
  순: 순창 강천, 지난달 시제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창: 창창한 나이에 고민해서 썼습니다
  강: 강천산 구름다리에서 진짜 팔짝 펄쩍 뛰었습니다.
  천: 천하의 용자는 바로 나라고 외치고 싶은 건 왜일까요?

                           이채빈
  순: 순천자는 존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말이
  창: 창세 이후로 불변의 진리임을 믿습니다
  강: 강산이 뒤바뀌고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천: 천성을 지키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시제: 서천 한산

                         김창연
  서: 서천 엄나무 칼국수로 허기진 배 불리고 월하성 갯벌에서 맛조개를 잡아 오니
  천: 천하의 신선 놀음 이보다 더 나을쏘냐
  한: 한산 모시 차려 입고 소곡주 한잔 들이켜니
  산: 산신령도 부러워할 저 산 팔읍 선비로세

                          홍미라
  서: 서두르지 않고
  천: 천천히 호미질을 해서인가
  한: 한 줌 올라오는 것은 개흙뿐
  산: 산산이 부서지는 맛조개구이의 꿈이여

                         백병준
  서: 서슴지 않고 내디딘 이 발걸음
  천: 천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분들과 함께 하니
  한: 한평생 함께 걸어온 부부처럼
  산: 산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처럼 명랑한 발걸음


시제: 대관 환선

                         송기찬
  대: 대관령 험한 길이었다
  관: 관동별곡의 송강, 사친의 신사임당, 그들의 문재와 효심이야 누가 모르리요마는
  환: 환락의 도심에서야 어찌 그들의 숨결을 느끼리요
  선: 선죽교에서 충절을 배우듯이 이곳에서 언제 다시 두 어른의 효심을 배울꼬

                          조해정
  대: 대다수 사람들은 황금보다는 소금이, 소금보다는 지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관: 관찰사 고형산이 수레로 닦은 이 길을 나와 동반자는 살얼음판 지나듯이 한발 한발 내딛지만    
  환: 환희의 순간이 올 것을 믿고 금강송과 계곡물의 격려를 받으며
  선: 선인들의 얼이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그들의 정신이 내게도 남아 있는지 생각해 본다


시제: 금강 정안


                          최희규
  금: 금강 수목원에 가니
  강: 강물도 시원하고
  정: 정안 마을에서는 밤도 줍고
  안: 안전 사고도 없이 잘 다녀 왔습니다

                           이석규
  금: 금수강산이 아름다운 것은 강산이 금수 같기 때문이 아니라
  강: 강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금수 같기 때문입니다.
  정: 정월부터 섣달까지 날마다 생각하여도 이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은
  안: 안력 부족에 보행 불능을 겸한 나 같은 사람들도 조선 팔도를 안방 드나들 듯이 편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제: 문경새재

                           강구연
  문: 문방사우를 등에 지고 한양으로 향하던 유생들
  경: 경사 보러 가는 길이니 불원천리는 당연지사
  새: 새재를 오르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던 선비들의 과행을
  재: 재연해 보니 그들의 포부에 우리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시제: 금산인삼

                          박수현
  금: 금빛의 영롱한 은행나무
  산: 산속을 가득 메우는 은은한 가을 향기로
  인: 인적 드문 숲속을 황금빛 정원으로 만들어 준다네
  삼: 삼국 시대 전부터 세상을 따스하게 해 준 은행나무처럼 나도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김민준
  금: 금의환향의 뜻을 아시는가?
  산: 산 넘고 물 건너 한양 가서 출세해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라네
  인: 인간의 자식으로서 귀하게 되어 집에 돌아가면 어버이 기뻐하시겠지만
  삼: 삼 들고 집에 가는 아들내미도 대견해하신다네

                          민경욱
  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산: 산삼 사촌인 인삼튀김을 먹고 나니
  인: 인삼 먹은 때보다
  삼: 삼 배나 힘이 솟는다

                         곽학규
  금: 금산에 와서
  산: 산 중의 산 진악산의 보석사를 둘러보고
  인: 인삼을 캐어 튀겨 먹고 나니
  삼: 삼백 년은 살 것 같네

시제 : 죽령옛길

                          홍미라
  죽: 죽령 주막에서 감자전을 안주로 동동주 기울이고
  영: 영롱한 희방사역에서
  옛: 옛길을 낙엽 밟으며
  길: 길가 나무 사이로 또 가을을 보냈네


                           정이정
  죽: 죽마고우와 낙엽 밟으며
  영: 영남 좌로를 천천히 걸으니
  옛: 옛 선비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길: 길이 전하라는 조상의 당부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김병구
  죽: 죽어서도 다시 오고픈 내 고향 예천
  영: 영광스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삶이지만
  옛: 옛 정으로 반겨 줄 옛 친구는 보이지 않는구나
  길: 길이 달라서 그런 것을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한하리요

곽학규
  죽: 죽령을 따라 소백산 자락에 안긴 고찰 희방사가 나를 반기네
  영: 영주와 단양을 잇는 천 년의 옛길
  옛: 옛길에서 들이켜는 막걸리는
  길: 길손의 마음을 더욱 여유롭게 하는구나

                          도신록
  죽: 죽령 산길을 동무 손 잡고 걸어올라
  영: 영마루에서 지나온 길 돌아보니    
  옛: 옛사람들의 발자취가 느껴지네
  길: 길이 길이 보전되기를 바라 봅니다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장애 여성들의 차별 극복과 인권을 위해

김명주(32세, 여, 뇌병변장애 1급)

  
  


강원도 강릉에서 2남 3녀의 넷째로 태어난 나는 생후 100일 무렵 갑작스런 고열로 인해 뇌손상을 받아 중증의 장애를 갖게 되었다.
  나는 다리가 불편해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누가 부축을 해 주거나 옆에 책상이나 문과 같이 잡고 몸을 지탱할 것이 있다면 몇 걸음 정도는 걸을 수가 있다. 그래서 휠체어에 옮겨 타거나 휠체어에서 내리는 일도 혼자서 할 수 있다. 왼팔은 등 뒤쪽으로 돌아간 채 굳어 있어 앞으로 펼 수도 없지만 오른팔은 별로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취사와 식사는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세수나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는 등의 일상생활도 큰 어려움 없이 혼자서 잘 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한손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느리기는 하지만 컴퓨터 자판도 잘 다룰 수 있고, 마우스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를 다루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직 운전 면허증은 없지만 예전에 다른 사람의 차를 이용하여 운전을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운전 면허증도 따서 운전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언어 장애가 심해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주로 휴대폰에 문자를 입력하거나 컴퓨터 자판으로 타자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곱 살 때까지는 유치원을 다닌다거나 동네 친구들과 어울린다거나 하지도 못했고 그저 집안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마치 사육되는 가축과도 같은 생활을 하며 지냈다. 가끔씩 어머니의 등에 업혀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만 보냈다.
  여덟 살이 되자 취학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 나의 장애를 치료하러 이곳저곳을 찾아 다녔다. 병원에서는 이미 치료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병원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소문으로 들은 용하다고 하는 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으러 다닌 것이었다. 하지만 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다녔지만 안마나 침, 뜸과 같은 것으로 나의 장애가 치료될 수는 없었다.
  열세 살 무렵부터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더는 치료를 받으러 다닐 수는 없었고, 나는 춘천에 있는 지적 장애인 수용 시설에 들어가서 스무 살 때까지 지내면서 초등 학교를 다녔다. 답답한 시설에 갇혀서 어린 아이들과 때늦은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따분해서 선생님들에게 반항도 많이 했었다. 나는 무단 결석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퇴를 해 버리겠다고 여러 번 엄포도 놓아 보았지만 나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선생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연히 선생님들과는 마찰이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나처럼 나이가 들어 초등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몇 명 있어서 그들과 다소나마 답답한 마음을 터놓으며 힘겨운 시절을 겨우 견뎌 낼 수 있었다.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더는 시설에 있고 싶지 않아서 부모님에게 그 곳에서 나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너무나 가족을 보고 싶어 하고 시설 생활을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부모님은 나의 청을 받아들여 집으로 데리고 돌아오셨다. 시설 측에서도 별로 만류하지 않고 가족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춘천의 시설에서 초등 학교를 마친 나는 경기도에 있는 S 재활원에서 중학교와 고등 학교를 다녔다. 중고등 학교 시절 나의 학교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초중등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센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특수 학교의 경우에는 치맛바람이 더욱 심하다. 정부에서 장애인들에게는 무상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서 학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우리 집으로서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에 보조를 맞출 수가 없었다. 중고등 학교 시절, 선생님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지만 친구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스물여섯 살 되던 2002년 나는 대구 대학교 심리학과에 진학했다. 상담을 제대로 공부해 보려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나의 대학 생활은 형극의 길이었다. 손이 부자유로워서 필기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교수님들에게 강의 노트를 좀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대체로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시험을 칠 때에는 답안을 작성하는 속도가 느려 시간을 더 줄 것을 요구했지만 교수님들은 내가 답안을 열심히 작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시간이 되자 작성 중인 답안지를 빼앗아 가 버리곤 했다. 다른 학과 교수님들은 장애 학생들에게 시험 시간을 어떻게 부여했는지 모르지만 심리학과 교수님들은 나에게 시험 시간을 연장하거나 평가 방식을 달리하는 것과 같은 배려를 해주지는 않았다. 우리 과에는 나 외에도 중증 장애 학생이 두 명 더 있었지만 그 학생들은 언어 장애도 없고 손놀림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시험 시간 부족이나 필기 곤란과 같은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나는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왔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아주 열심히 했지만 학과 성적은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활발하게 친분을 나누면서 적극적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는 초등 학교나 중고등 학교 시절과는 달리 기쁘고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을 했을 때부터 학과 행사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학과 친구들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학과생 중에는 그다지 가까이 지내지 못한 사람들도 있으나 가까이 지낸 친구들도 많다. 그런대로 보람 있는 대학 생활을 보냈지만 대학 측에서 장애 학생의 학습을 지원을 좀더 실질적인 측면에서 해 주었더라면 더 나은 대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앞으로 여성 장애인의 감수성에 기초하여 여성 장애인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몇몇 장애인들과 함께 구체적인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기숙사를 나와서 혼자 생활할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나는 그동안 시설과 기숙사 생활에서는 알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거대한 장벽에 부딪쳤다. 처음 기숙사를 떠나 친구 집에 짐을 맡겨 놓고 집을 보러 다닐 때는 며칠이면 내가 살 수 있는 작은 보금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세를 놓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집집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것을 보고는 집세가 얼마인데 언제까지 살 것인가 하는 것 등 계약을 위한 어떤 이야기도 나누려 하지 않고 다짜고짜 세를 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동네 사람들이 집값이 떨어진다느니 동네 이미지가 나빠진다느니 하면서 장애인들에게는 집을 세주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세상에 저런 일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내가 집주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냉담과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접하게 되자 우리 사회의 거대한 장벽 앞에 숨이 막히기도 하고 가슴 속에서 울분이 솟구치기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러 왔을 때도 내가 혼자 살 것이라고 하면 집주인이 세를 놓지 않겠다고 할 것만 같아 비장애인 친구와 함께 살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부탁에 부탁을 하고서야 겨우 세를 얻을 수 있었다. 주거 환경이나 집의 상태, 구조 등이 집세에 비해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집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예 세를 놓지 않으려 할 까 봐 집세를 놓고 흥정도 해 보지 못하고 기숙사를 떠난 지 몇 달 만에 간신히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할부 조건이나 모델, 기능이 마음에 드는 휴대 전화가 있어 구입하려고 이동 전화 가게를 찾아갔는데, 가게 주인이 장애가 심한 경우에는 부모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면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런 일로 부모님께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고 나는 성인이고 지적 장애도 없기 때문에 부모님의 동의가 없어도 휴대 전화를 구입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미성년자이거나 지적 장애인의 경우에는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도 졸업하고 지적 장애도 없는데 단지 언어 장애가 있고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동의를 요구하는 그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복지 카드도 보여주고 휴대 전화 액정에 열심히 문자를 찍어 가며 항의를 했지만 나의 소리 없는 항변은 그 사람의 억지 앞에서 묻히고 말았다.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이 나의 명의로 된 휴대 전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그 전화 번호의 요금이 연체되었다는 메시지가 들어와서 그 내용을 확인하려고 인근의 휴대 전화 대리점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대리점에 들어가서 나는 내가 찾아온 경위를 열심히 문자로 찍어 점원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사람은 내 휴대 전화 액정에 찍혀 있는 나의 이야기를 읽어 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내가 내민 휴대 전화는 다른 회사 제품이니 다른 대리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잘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내 휴대 전화를 다시 들어 그 사람에게 보여 주었지만 그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내면서 내가 비록 다른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더라도 이 회사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고, 이 대리점에서도 내가 확인하고 싶은 회사의 통화 요금과 관련된 일을 확인할 수 있다고 알고 있기에 이곳을 찾아왔는데, 나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다. 내가 거칠게 항의를 하자 그 사람은 이내 나에게 사과를 하고 나에게 필요한 요금 내역을 확인해 주었지만 울렁거리던 가슴은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한 번은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 그 옷을 사려고 옷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주인이 장애인에게는 옷을 팔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화를 참아 가며 그냥 나온 적이 있다. 장애인은 자기 돈을 내고서도 옷을 살 수가 없는 것인지, 장애인에게 옷을 팔면 무슨 큰 해라도 입게 되는 것인지, 도대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 나는 내내 우울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나는 대형 마트에 쇼핑을 하러 가면 왼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물건을 집어 휠체어 뒤쪽에 얹어 가지고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대형 마트에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물건을 집어서 휠체어 뒤쪽에 올려놓고 있는데, 마트 직원이 내가 물건을 훔쳐 가는 것으로 오해를 했는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왜 그러나 싶어 의아했지만 이내 그 사람이 나의 모습을 보고 오해했구나 생각하고는 나의 왼손 상태와 장애에 관해 열심히 문자를 찍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오해가 풀린 그 사람은 나에게 사과를 하면서 나의 쇼핑을 도와주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장애가 있고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이 취해야만 하는 자세와 태도로 인해 예상치 못한 오해를 받게 되면 장애가 가져다주는 쓰라린 기억에 삶의 의욕이 꺾이기 일쑤다. 제발 사람들이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장애인을 대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볼일이 있을 때는 주로 지하철이나 저상 버스를 타게 되는데, 저상 버스를 타게 되면 내가 언어 장애가 있으므로 내려야 할 곳을 문자로 찍어 기사에게 보여 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버스 기사가 그것을 잘 보지 못했을 경우에는 내려야 할 정류장에 제대로 내리지 못해 난감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차 벨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배차 시간에 쫓기는 기사들은 정류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지나쳐 버려서 엉뚱한 곳에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은 시내 버스 교통 체계가 전산화되어 있는데 나와 같은 언어 장애인들이 타고 내리는 정보를 체계화된 전산 시스템을 통해 버스 기사에게 신속, 정확하게 전달하고 장애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상 버스 기사들을 대상으로 장애인들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얼마 전에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식당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휠체어를 밀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다른 손님들이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주인은 우리들에게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가로막고는 다른 곳으로 가 보라고 했다. 우리들은 화가 났지만 완강한 그 사람과 싸우기도 뭣하고 해서 그곳을 떠나 다른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했지만 음식을 먹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언어 장애가 심하여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에 불편이 많기도 하고, 동사무소나 은행 같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종종 어린아이로 취급하면서 반말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언짢을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술을 한 병 사려고 슈퍼마켓에 갔었는데, 내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술을 팔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혹시나 주인 아저씨가 나를 어리게 보고 술을 팔지 않으려 하는가 싶어 대학까지 졸업한 성인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아저씨는 끝내 장애인인 나에게는 술을 팔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른 슈퍼마켓으로 가서 술을 사 오긴 했지만 장애인이라고 해서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인지, 장애인에게 술을 파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이없는 편견 앞에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 어려웠다.
  씩씩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중증 장애를 지니고 혼자 살아가는 일은 많이 불편하고 힘이 든다. 그래서 나도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으려고 신청을 했으나 그동안 나의 주소지가 서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신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주소지와 다른 곳에서도 활동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어 최근 서울로 가서 나의 장애 정도에 대한 실사를 받고 시간 판정을 받았다. 이사를 할 계획이 있어 아직은 받고 있지 않지만 조만간 이사를 하고 나면 받으려고 한다. 그동안 혼자서 생활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었는데, 활동 보조를 받게 되면 어려움이 많이 해소될 것 같다.
  장애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장애 여성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이중의 차별을 받아 가며 살아가고 있는 장애 여성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장애 여성들의 삶의 질 개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장애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남성 장애인에 비해 어려움이 많은데 활동 보조 시간을 더 배정하는 등 장애 여성의 특수성을 고려한 정책상의 배려가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 그리고 내가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절감한 것이지만 장애 여성들이에 남성 장애인에 비해 집을 구하는 데 있어 훨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정부에서는 장애인들을 위해 임대 주택을 보급하고 있는데, 장애 여성들을 위한 제도를 통해 그들이 보다 안전하고 안락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앞으로 부족한 힘이나마 장애 여성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열정을 다 바치고 싶다.



문화원 소식

  3월 12일 한국 장애인 재단의 후원으로 ‘흰지팡이로 찾아가는 우리나라 옛길 탐방’ 첫 번째 기행지인 광양의 동백숲길, 중흥사, 섬진강 매화 마을 매화숲길을 찾았습니다. 기나긴 겨울 한파로 아직 매화꽃이 만개되지는 않았지만 봄의 기운을 받으며 도선 국사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특별한 하루였습니다.
  3월 25일 지난 8년 동안 사용했던 중구 남일동 131-1번지의 문화원 사무실을 중구 종로 2가 33-1번지 희망 신용 협동 조합 2층으로 옮겨 회원 내빈들을 모시고 조촐하게 문화원 방문의 날 행사를 가지고 문화원의 발전과 역할 증대를 위해 서로 격려하고 다짐하였습니다. 또한 이날부터 지난 2년 동안 수고한 박진희 간사의 뒤를 이어 류은숙 간사가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4월 9일 제83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북 괴산의 산막이 옛길, 각연사, 벽초 홍명희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괴산호를 따라 옛길을 걸으며 청명한 봄날을 마음껏 감상하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 선생의 삶과 문학을 잠시나마 훑어본 하루였습니다.
  4월 13일 시각 장애인을 비롯한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계층을 위하여 도서 낭독 봉사자를 양성하는 교육인 제7기 도서 낭독 아카데미가 15주 과정으로 개설되었습니다.
  4월 29일 2011년 첫 문화 나들이로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계명 아트 센터에서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관람하였습니다.
  5월 14일 제84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북 완주의 진안 원연장 마을, 공기 마을 편백나무 숲을 다녀왔습니다. 피톤치드가 제일 많이 뿜어져 나온다는 편백나무숲길을 걷고 유황족탕으로 피로를 푼 하루였습니다.
  5월 28일 제85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남 하동의 쌍계사와 정금 녹차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기행은 한국 마사회의 지원을 받아 현장 체험으로 진행되었는데 녹차를 직접 따고 쪄서 말리는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녹차 제조 공정을 잘 체득한 기행이었습니다.
  6월 11일 제86차 역사 기행은 충북 충주의 월악산 미륵사지, 하늘재, 문경 망댕이가마, 문경 김용사를 다녀왔습니다. 삼국 시대에 처음으로 개척된 계림령길(하늘재)를 걸어 봄으로써 문화 교류에 있어서 길의 소중함을 느껴 본 하루였습니다.
  6월 26일 제4회 대구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의 창작 뮤지컬 ‘투란도트’를 대구 오페라 하우스에서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7월 9일 제87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북 순창의 장류 박물관, 강천산 군립 공원, 장안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비가 오는 가운데 걸어 본 강천 산길, 폭포와 계곡과 운무에 싸인 전망대는 감탄을 자아낸 잊을 수 없는 기행이었습니다.
  7월 23일 제88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남 서천의 한산 모시 전시관, 기산 이색 체험 마을, 월하성 갯벌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기행에서는 손수 만든 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갯벌의 생태학적 중요성을 배우고 체험하였습니다.
  8월 19~20일 제89차 역사 문화 기행은 문화 캠프를 겸하여 진행되었습니다. 강원도의 대관령 길, 죽서루, 환선굴, 추암 촛대 바위, 신재생 에너지 전시관을 다녀왔습니다. 고생하며 걸은 대관령 옛길과 게스트 하우스에서의 별밤 보내기, 경탄을 자아낸 환선굴, 문화 캠프의 추억 쌓기가 하나 더 늘어난 기행이었습니다.
  9월 22일 이날부터 제7기 문화 아카데미가 매주 목요일 6주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역사, 문학, 월드 뮤직, 연극, 국악, 클래식 등 사계의 전문가들의 수준 높은 강의로 문화의 향연에 흠뻑 젖어든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9월 24일 제90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남 공주의 금강 수목원, 공주 정안 알밤 마을(풀꽃이랑 마을), 마곡사를 다녀왔습니다.
  9월 30일 대구 오페라 축제의 개막작인 베르디의 대작 ‘아이다’ 공연을 계명 아트 센터에서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10월 8일 제91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북 문경의 새재 옛길, 고모산성, 장수 황씨 종택을 다녀왔습니다.

  10월 14일 대구 문화 예술 회관에서 열린 대구 시립 국악단의 제152회 정기 연주회 ‘달빛이 미닫이에 걸리다’를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관람하였습니다.
  10월 문화원 산하에 나이스 볼링동아리의 탁노균씨가 말레이시아 코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4회 세계 시각장애인 볼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4개를 획득하여 귀국하는 값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어머나 ~ 장해라!!!
10월 22일 제92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남 금산의 보석사, 적벽강 및 수통부리 마을, 금산 인삼관(인삼 캐기)을 다녀왔습니다. 떡메를 쳐서 인절미를 만들고 인삼 캐는 요령을 배우는 즐거움을 만끽한 하루였습니다.
  10월 28일 대구 계명 아트 센터에서 열린 클래식 공연, 권혁주, 손열음의 ‘아름다운 동행’을 여러 회원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주소 : 대구시 중구 종로2가 33-1번지 2층 (우 700-192)
Tel : 053 - 257 - 5657
Fax : 053 - 257 - 5659
E-Mail : blindculture@hanmail.net
음성사서함 : 152 - 5657
홈페이지주소 : www.blindlove.org

후원계좌 :
  대구은행) 096-05-002769-1
  국민은행) 801301-01-345119
  예금주 - 사)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계간․시각과문화  

발행․2012년 1월 1일  
발행인․김현준  
기획․편집
편집․김창연
교열․이석규
디자인․류은숙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목록보기   

Notice  2019년 가을호(통권39호)  
37  2018년 가을호(통권38호)  
36  2017년 여름호(통권37호)  
35  2016년 봄호 (통권 36호)  
34  2015년 봄호 (통권 35호)  
33  2014년 여름호 (통권 34호)  
32  2013년 가을호 (통권 33호)  
31  2013년 봄호 (통권 32호)  
30  2012년 여름호 (통권 31호)  
 2011년 겨울호 (통권30호)  

  목록보기   1 [2][3][4]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
[41934]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 31-1 전화 053-257-5657 팩스 053-257-5659 음성사서함 1570-5657 이메일 blindcultur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