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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봄호 (통권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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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각과 문화
2013년 봄호(통권32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우리의 국어 오용의 일례 _ 이석규

Pops English
One more night -Maroon 5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朝鮮獨立(조선 독립)에 對(대)한 感想(감상)의 槪要(개요) - 韓龍雲(한용운) _ 이석규 역

서평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투키디데스(Thucidides) _ 최성재

우리가 답사한 유적

제100차 역사 문화 기행을 다녀오며 _ 김병구
신의 물방울, 와인의 향기를 따라서 _ 강구연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 _ 엄연욱

생활단상
선입견과 철학 _ 이태호
닭을 잡아라!_ 남상임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우리의 국어 오용의 일례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날이 갈수록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다. 듣기 괴로운 말이 늘어나고 읽기 괴로운 글이 늘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들리느니 파괴된 말뿐이요 보이느니 파괴된 글뿐이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것이 타고난 사명이기라도 한 듯 국어 파괴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정인이 특정 단어를 망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이 국어 말살에 분연히 총궐기하였다. 선생이 일어서니 제자가 따라 일어서고, 선배가 일어서니 후배가 따라 일어서고, 언론인이 일어서니 시청자와 독자가 따라 일어서고, 성직자가 일어서니 평신도가 따라 일어서고, 부모가 일어서니 자녀가 따라 일어섰다. 을미사변 때에도 분기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 을사조약 때에도 일어서지 않은 사람이 허다하였고, 심지어 3․1 운동 때와 3:15 부정 선거 때에도 일어서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궐기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입으로 사는 이는 발음을 망치고, 붓으로 사는 이는 의미를 뒤바꾸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마구 지어 낸다. 그도 저도 아닌 사람들도 이들을 힘써 도우니 그 혀끝과 그 붓끝에서 다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는 말이 없다.
  이들 국어 파괴 역군 중 언론인이 힘써 파괴하고 있는 말 중에 ‘출사표(出師表)’가 있다. ‘出’은 ‘내다’를 의미하고, ‘師’는 군사를 의미하고 ‘表’는 ‘표문’을 의미한다. 표문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이다. 그러므로 ‘출사표’란, 출병의 취지를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는데 임금도 있고 신하도 있던 그 시대보다 오히려 이 말을 더 많이 쓴다. ‘왕비’, ‘왕자, ‘공주’라는 말을 오히려 왕조 시대보다 더 많이 쓰는 것과 흡사하다. 왕조 시대가 아니라도 그 시대에 쓰던 말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의미로 쓰는 것이 문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출사표’라는 말을 ‘도전장’이나 ‘선언’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또 ‘도전장을 내다’라는 동사로 쓰기도 하고,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의미로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말을 흔히 ‘던지다’라는 동사와 함께 쓴다는 것이다. ‘출사표’는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데, 어떻게 해서 던진다는 말이 붙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왕을 폐위시킬 세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출사표를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왕을 폐위시킬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올리고 던지고 할 것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될 터이니 이런 말조차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권에서는 ○○○ 현 시장과 3선의 ○○○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고 같은 3선의 ○○○ 의원, 재선의 ○○○ ․ ○○○ 의원 등도 선거에 뛰어들 태세다.”나 “민주당에서는 ○○○ 전 의원과 대전시당위원장인 ○○○ 전 의원이 출사표를 던지고 세 확산 경쟁에 나섰다.”에서는 ‘출사표를 던지다’가 ‘출마 선언을 하다’라는 의미로 쓴 것 같다. “국내 시장에 머물지 않고 해외 시장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출사표나 다름없다.”에서는 단지 ‘선언’의 뜻으로 쓴 것 같고, “구글 휴대폰 출사표, 내년 시장 진출…아이폰과 격돌”에서는 얼른 보기에는 ‘개발’의 뜻으로 쓴 것 같은데, 무슨 뜻으로 썼는지는 이 기사를 쓴 기자에게 물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물어 보아도 그저 좋은 말인 것 같아서 썼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서울식품, ‘건강기능식품 시장’ 출사표”에서는 ‘공략’이나 ‘진출’의 뜻으로 쓴 것 같지만, 기사 작성자에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말이란 적당히 쓰면 되는 것인데 왜 뜻을 따지고 그러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대학발표 최종 경쟁률까지 확인 → 지원율 변화 완만하면 출사표”에서는 ‘지원’이나 ‘응시’ 또는 ‘원서 제출’의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이렇게 ‘출사표’의 의미를 확장해 가다 보면 국어 사전에 실린 수십만 단어가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섭취도 출사표요 배설도 출사표요, 음식물도 출사표요 배설물도 출사표요, 출생도 출사표요 사망도 출사표요, 기립도 출사표요 착석도 출사표요, 취침도 출사표요 기상도 출사표요, 사랑도 출사표요 미움도 출사표요, 포옹도 출사표요 접문도 출사표요, 결혼도 출사표요 이혼도 출사표요, 교합도 출사표요 잉태도 출사표요, 분만도 출사표요 조산도 출사표요, 양육도 출사표요 성장도 출사표요, 입학도 출사표요 졸업도 출사표요, 진급도 출사표요 유급도 출사표요, 교수도 출사표요 학습도 출사표요, 학위 수여도 출사표요 학위 취득도 출사표요, 취업도 출사표요 퇴직도 출사표요, 출근도 출사표요 퇴근도 출사표요, 휴직도 출사표요 복직도 출사표요, 승차도 출사표요 하차도 출사표요, 시장도 출사표요 가게도 출사표요, 구입도 출사표요 매각도 출사표요, 주문도 출사표요 배송도 출사표요, 기름도 출사표요 주유소도 출사표요, 자동차도 출사표요 운전수도 출사표요, 비행기도 출사표요 조종사도 출사표요, 어선도 출사표요 어부도 출사표요, 상인도 출사표요 상품도 출사표요, 노래도 출사표요 가수도 출사표요, 산천도 출사표요 초목도 출사표요, 오대양도 출사표요 육대주도 출사표요, 생물도 출사표요 무생물도 출사표요, 아침도 출사표요 저녁도 출사표요, 부모도 출사표요 자녀도 출사표요, 친구도 출사표요 원수도 출사표요, 남자 친구도 출사표요 여자 친구도 출사표요, 병원도 출사표요 입원도 출사표요, 의사도 출사표요 환자도 출사표요, 질병도 출사표요 치료도 출사표요, 텔레비전도 출사표요 라디오도 출사표요, 아나운서도 출사표요 시청자도 출사표요, 신문도 출사표요 신문사도 출사표다. 인간의 행주좌와 어묵동정과 천지간의 삼라 만상에 출사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출사표로 대신하지 못할 말이 하나도 없다.
  개가 ‘멍멍’ 한 소리로 부족함을 모르고 살고, 고양이가 ‘야옹야옹’ 한 소리로 부족함을 모르고 살고, 소가 ‘음매’ 한 소리로 부족함을 모르고 살고, 참새가 ‘짹짹’ 한 소리로 부족함을 모르고 살듯이, 한국인도 ‘출사표’ 한 단어로 부족함을 모르고 살 날이 멀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생애 내에 그 날이 올지도 모른다.


Pops English

  One more night - Maroon 5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You and I go hard at each other like we going to war
  You and I go rough We keep throwing things and slammin' the door
  You and I get so Damn dysfunctional We stopped keeping score
  You and I get sick Yah I know that we can't do this no more

  But baby there you go again There you go again Making me love you
  Yeah I stopped using my head Using my head let it all go
  Got you stuck on my body On my body like a tattoo
  And now I'm feeling stupid Feeling stupid crawling back to you

  So I cross my heart and I hope to die
  Tha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And I know I said it a million times
  Bu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Trying to tell you no But My body keeps on telling you yes
  Trying to tell you stop But your lipstick got me so out of breath
  I'd be waking up in the morning probably hating myself
  And I'd be waking up Feeling satisfied but guilty as hell

  But baby there you go again There you go again Making me love you
  Yeah I stopped using my head Using my head Let it all go
  Got you stuck on my body On my body like a tattoo
  And now I'm feeling stupid Feeling stupid crawling back to you

  So I cross my heart And I hope to die
  Tha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And I know I've said it a million times
  Bu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Yeah baby give me One more night
  Yeah baby give me One more night
  Yeah baby give me One more night

  But baby there you go again There you go again Making me love you
  Yeah I stopped using my head Using my head
  Let it all go
  Got you stuck on my body On my body like a tattoo

  Yeah yeah yeah yeah

  So I cross my heart And I hope to die
  Tha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And I know I've said it a million times
  Bu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Yeah baby give me One more night)

  So I cross my heart And I hope to die
  Tha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And I know I've said it a million times
  But I'll only stay with you One more night

  (I don't know whatever)

  너와 난 힘들게 가지 서로에게, 마치 우린 전쟁을 하러 가듯
  너와 난 거칠게 가지 우린 계속 뭔가를 던져대며 문을 쾅쾅 닫잖아
  너와 나는 아주 제대로 틀어졌어. 그래서 우린 서로의 잘못을 가리려고만 해
  너와 난 질렸어 그래 나도 알아 우린 이 짓을 더는 계속할 수 없어

  하지만 자기야 또 넌 다시 또 넌 다시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고 있어
  이제 난 이성으로 생각하려는 노력도 멈췄어, 그냥 다 놓아버려
  넌 내 몸에 붙어있어, 내 몸 위에, 마치 문신처럼
  그리고 이제 난 바보 같은 기분이 들어 바보 같은 기분, 너에게 다시 기어서 돌아오며

  정말 엄숙하게 맹세할게
  너와 딱 하룻밤만 더 있을 거라고
  그리고 알아 백만 번은 이미 얘기했지
  하지만 난 하룻밤만 더 너와 함께 할 거야

  너에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지만 내 몸은 계속 '예스'라고 말하려고 해
  너에게 ‘멈춰’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너의 립스틱이 내 숨을 가쁘게 만들었어
  난 깨어날 거야 아침에 아마도 내 자신을 증오하면서
  그리고 난 깨어날 거야 기분은 만족스럽지만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면서

  하지만 자기야 또 넌 다시 또 넌 다시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고 있어
  이제 난 이성으로 생각하려는 노력도 멈췄어, 그냥 다 놓아버려
  넌 내 몸에 붙어있어, 내 몸 위에, 마치 문신처럼
  그리고 이제 난 바보 같은 기분이 들어 바보 같은 기분, 너에게 다시 기어서 돌아오며

  정말 엄숙하게 맹세할게
  너와 딱 하룻밤만 더 있을 거라고
  그리고 알아 백만 번은 이미 얘기했지
  하지만 난 하룻밤만 더 너와 함께 할 거야

  그래 나와 하룻밤 더 함께 보내자
  그래 나와 하룻밤 더 함께 보내자
  그래 나와 하룻밤 더 함께 보내자

  하지만 자기야 또 넌 다시 또 넌 다시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고 있어
  이제 난 이성으로 생각하려는 노력도 멈췄어
  그냥 다 놓아버려
  넌 내 몸에 붙어있어, 내 몸 위에, 마치 문신처럼

  그래, 그래, 그래, 그래

  정말 엄숙하게 맹세할게
  너와 딱 하룻밤만 더 있을 거라고
  그리고 알아 백만 번은 이미 얘기했지
  하지만 난 하룻밤만 더 너와 함께 할 거야

  (그래 나와 하룻밤 더 함께 보내자)

  너와 딱 하룻밤만 더 있을 거라고
  그리고 알아 백만 번은 이미 얘기했지
  하지만 난 하룻밤만 더 너와 함께 할 거야

  (나도 몰라, 어떻게 되든……)

  * Maroon 5
  마룬 5(Maroon 5)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5인조 팝 록 밴드이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애덤 리바인, 제시 카마이클, 미키 매든, 라이언 두식이 1994년 결성한 카라스 플라워스 (Kara's Flowers)가 전신이다. 카라스 플라워스는 ‘The Fourth World’라는 정규 음반을 낸 뒤에 2001년 기타리스트 제임스 발렌타인을 영입한 후 이름을 마룬 5로 바꾼다. 2002년에는 Songs About Jane을 발매하여 빌보드 200에서 6위를 기록하며,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제47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으로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2006년에는 드러머 라이언 두식이 부상 악화로 탈퇴를 하고, 한동안 투어 멤버로 활동하던 맷 플린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2007년에는 두 번째 정규 음반 ‘It Won't Be Soon Before Long’을 발매한다. 이 음반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하고, 첫 번째 싱글 ‘Makes Me Wonder’는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하였다. 그들의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로 뽑히는 Hands All Over의 싱글 ‘Moves like Jagger’는 발매 후 2012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070만장을 넘는 판매고를 기록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One more night’는 우리나라의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적 히트를 기록할 무렵 빌보드차트 1위를 고수하며 아성을 지켜낸 바 있다. 2012년 9월 내한공연을 가졌다.

  유머

  <Desk Sergeant>
  A woman who went to the police station to report her husband missing describe
him as "29 years old, six-foot-three feet and handsome."
  "I know your husband," pointed out the desk sergeant.
  "He's 48, short and overweight.
  "Sure, he is," the woman answered. "But who want him back?"

  <안내 경찰관>
  남편 실종 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온 여인이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이는 29세, 키는 6피트 3인치, 건장하고 미남이에요.”
  이에 안내 경찰관이 “제가 아주머니 남편을 알고 있는데, 그분은 48세에 키가 작고
뚱뚱하죠.”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여자가 이렇게 대꾸했다.
  “맞아요, 하지만 그런 남자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명시와 명문

朝鮮獨立(조선 독립)에 對(대)한 感想(감상)의 槪要(개요)
                          韓龍雲(한용운)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一(일). 槪論(개론)
  二(이). 朝鮮(조선) 獨立宣言(독립 선언)의 動機(동기)
  (1) 朝鮮民族(조선 민족)의 實力(실력)
  (2) 世界大勢(세계 대세)의 變遷(변천)
  (3) 民族自決條件(민족 자결 조건)
  三(삼). 朝鮮獨立宣言(조선 독립 선언)의 理由(이유)
  (1) 民族自存性(민족 자존성)
  (2) 祖國思想(조국 사상)
  (3) 自由主義(자유 주의) (自存主義(자존 주의)와 逈別(형별))
  (4) 對世界(대세계)의 義務(의무)
  四(사). 朝鮮(조선) 總督政策(총독 정책))에 對(대)하여
  五(오). 朝鮮獨立(조선 독립)의 自信(자신)

  一(일). 槪論(개론)

  自由(자유)는 萬有(만유)의 生命(생명)이요 平和(평화)는 人生(인생)의 幸福(행복)이라. 故(고)로 自由(자유)가 無(무)한 人(인)은 死骸(사해)와 同(동)하고 平和(평화)가 無(무)한 者(자)는 最苦痛(최고통)의 者(자)라 壓迫(압박)을 被(피)하는 者(자)의 周圍(주위)의 空氣(공기)는 墳墓(분묘)로 化(화)하고 爭奪(쟁탈)을 事(사)하는 者(자)의 境涯(경애)는 地獄(지옥)이 되느니 宇宙(우주)의 理想的(이상적) 最幸福(최행복)의 實在(실재)는 自由(자유)와 平和(평화)라. 故(고)로 自由(자유)를 得(득)하기 爲(위)하여는 生命(생명)을 鴻毛視(홍모시)하고 平和(평화)를 保(보)하기 爲(위)하여는 犧牲(희생)을 甘飴嘗(감이상)하느니 此(차)는 人生(인생)의 權利(권리)인 同時(동시)에 또한 義務(의무)일지로다. 그러나 自由(자유)의 公例(공례)는 人(인)의 自由(자유)를 侵(침)치 아니함으로 界限(계한)을 삼느니 侵掠的(침략적) 自由(자유)는 沒平和(몰평화)의 野蠻(야만) 自由(자유)가 되며 平和(평화)의 精神(정신)은 平等(평등)에 在(재)하니 平等(평등)은 自由(자유)의 相敵(상적)을 謂(위)함이라. 故(고)로 威壓的(위압적) 平和(평화)는 屈辱(굴욕)이 될 뿐이니 眞自由(진자유)는 반드시 平和(평화)를 保(보)하고 眞平和(진평화)는 반드시 自由(자유)를 伴(반)할지라.
  自由(자유)여 平和(평화)여 全人類(전인류)의 要求(요구)일지로다. 그러나 人類(인류)의 智識(지식)은 漸進的(점진적)이므로 草昧(초매)로부터 文明(문명)에, 爭奪(쟁탈)로부터 平和(평화)에 至(지)함은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에 證明(증명)하기 足(족)하도다. 人類進化(인류 진화)의 範圍(범위)는 個人的(개인적)으로부터 家族(가족), 家族的(가족적)으로부터 部落(부락), 部落的(부락적)으로부터 國家(국가), 國家的(국가적)으로부터 世界(세계), 世界的(세계적)으로부터 宇宙主義(우주주의)에 至(지)하도록 順次(순차)로 進步(진보)함이니 部落主義(부락주의) 以上(이상)은 草昧時代(초매 시대)의 落謝塵(낙사진)에 屬(속)한지라 回首(회수)의 感懷(감회)를 資(자)하는 外(외)에 論述(논술)할 必要(필요)가 無(무)하도다. 幸(행)인지 不幸(불행)인지 十八世紀(십팔세기) 以後(이후)의 國家主義(국가주의)는 實(실)로 全世界(전세계)를 風靡(풍미)하여 騰奔(등분)의 絶頂(절정)에 帝國主義(제국주의)와 其(기) 實行(실행)의 手段(수단) 卽(즉) 軍國主義(군국주의)를 産出(산출)함에 至(지)하여 所謂(소위) 優勝劣敗(우승열패), 弱肉强食(약육강식)의 學說(학설)은 最眞不變(최진불변)의 金科玉條(금과옥조)로 認識(인식)되어 殺伐强奪(살벌강탈) 國家(국가) 或(혹) 民族的(민족적) 戰爭(쟁탈)은 자못 止息(지식)될 日(일)이 無(무)하여 或(혹) 幾千年(기천년)의 歷史國(역사국)을 丘墟(구허)하며 幾十百萬(기십백만)의 生命(생명)을 犧牲(희생)하는 事(사)가 地球(지구)를 環(환)하여 無(무)한 處(처)가 無(무)하니 全世界(전세계)를 代表(대표)할 만한 軍國主義(군국주의)는 西洋(서양)에 獨逸(독일)이 有(유)하고 東洋(동양)에 日本(일본)이 有(유)하였도다.
  그러나 所謂(소위) 强者(강자) 卽(즉) 侵掠國(침략국)은 軍艦(군함)과 鐵砲(철포)만 多(다)하면 自國(자국)의 野心壑欲(야심학욕)을 充(충)하기 爲(위)하여 不人道(불인도) 蔑正義(멸정의)의 爭奪(쟁탈)을 行(행)하면서도 그 理由(이유)를 說明(설명)함에는 世界(세계) 或(혹) 局部(국부)의 平和(평화)를 爲(위)한다든지 爭奪(쟁탈)의 目的物(목적물) 卽(즉) 被侵掠者(피침략자)의 幸福(행복)을 爲(위)한다든지 하는 等(등) 自欺欺人(자기기인)의 妄語(망어)를 弄(농)하여 儼然(엄연)히 正義(정의)의 天使國(천사국)으로 自居(자거)하느니 例(열)하면 日本(일본)이 暴力(폭력)으로 朝鮮(조선)을 合倂(합병)하고 二千萬(이천만) 民族(민족)을 奴隸待(노예대)하면서도 朝鮮(조선)을 合倂(합병)함은 東洋平和(동양 평화)를 爲(위)함이며, 朝鮮民族(조선 민족)의 安寧(안녕) 幸福(행복)을 爲(위)함이라 云云(운운)함이 是(시)라.
  嗚呼(오호)라 弱者(약자)는 從古(종고)의 弱者(약자)가 無(무)하고 强者(강자)는 不盡(부진)의 强者(강자)가 無(무)하니 曝寒(폭한)의 大運(대운)이 其(기) 輪(윤)을 轉(전)하는 時(시)는 復讐的(복수적) 戰爭(전쟁)은 반드시 侵掠的(침략적) 戰爭(전쟁)의 踵(종)을 隨(수)하여 起(기)할지니 侵掠(침략)은 戰爭(전쟁)을 誘致(유치)하는 事(사)라 어찌 平和(평화)를 爲(위)하는 侵掠(침략)이 有(유)하며 또한 어찌 自國幾千年(자국기천년)의 歷史(역사)는 他國(타국) 侵掠 (침략)의 劍(검)에 斷絶(단절)되고 幾百千萬(기백천만)의 民族(민족)은 外人(외인)의 虐待下(학대하)에 奴隸(노예)가 되고 牛馬(우마)가 되면서 此(차)를 幸福(행복)으로 認(인)할 者(자)가 有(유)하리요. 何民族(하민족)을 莫論(막론)하고 文明程度(문명 정도)의 差異(차이)는 有(유)할지나 血性(혈성)이 無(무)한 民族(민족)은 無(무)하니 血性(혈성)을 具(구)한 民族(민족)이 어찌 永久(영구)히 人(인)의 奴隸(노예)를 甘作(감작)하여 獨立自存(독립 자존)을 圖(도)치 아니하리요. 故(고)로 軍國主義(군국주의) 卽(즉) 侵掠的主義(침략적 주의)는 人類(인류)의 幸福(행복)을 犧牲(희생)하는 最魔術(최마술)일 뿐이니 어찌 是(시)와 如(여)한 軍國主義(군국주의)가 天壤無窮(천양무궁)의 運命(운명)을 保(보)하리요. 理論(이론)보다 事實(사실), 嗚呼(오호)라 劍(검)이 어찌 萬能(만능)이며 力(역)이 어찌 勝利(승리)리요. 正義(정의)가 有(유)하고 人道(인도)가 有(유)하도다. 侵掠又侵掠(침략우침략) 惡極慘極(악극참극)의 軍國主義(군국주의)는 獨逸(독일)로써 最終幕(최종막)을 演(연)치 아니하였는가? 血耶肉耶(혈야육야) 鬼哭神愁(귀곡신수)의 歐洲(구주) 大戰爭(대전쟁)은 大略(대략) 一千萬(일천만)의 死傷者(사상자)를 出(출)하고 幾多億(기다억)의 金錢(금전)을 糜費(미비)한 後(후)에 正義(정의) 人道(인도)를 標榜(표방)하는 旗幟下(기치하)에서 講和條約(강화 조약)을 成立(성립)하게 되었도다. 그러나 軍國主義(군국주의)의 終極(종극)도 實(실)로 色彩(색채)를 莊嚴(장엄)함에 遺憾(유감)이 無(무)하였도다. 全世界(전세계)를 蹂躪(유린)하려는 海欲(해욕)을 充(충)하기 爲(위)하여 苦心焦思(고심초사) 三十年(삼십 년)의 準備(준비)로 幾百萬(기백만)의 健兒(건아)를 數百哩(수백리)의 戰線(전선)에 立(입)하고 鐵騎(철기) 飛船(비선)을 鞭馳(편치)하여 左衝右突(좌충우돌) 東聲西擊(동성서격) 開戰(개전) 三個月(삼개월) 內(내)에 巴里(파리)를 陷落(함락)한다고 自期(자기)하던 카이제르의 聲言(성언)은 一時(일시)의 壯絶(장절)을 極(극)하였도다. 그러나 그것도 軍國主義的(군국주의적) 訣別(결별)의 終曲(종곡)일 뿐이며, 理想(이상)과 聲言(성언)뿐 아니라  作戰計劃(작전 계획)의 事實(사실)도 卓越(탁월)하여 休戰(휴전)을 開議(개의)하던 日(일)까지 聯合國側(연합국측) 兵馬(병마)의 足跡(족적)은 獨逸(독일) 國境(국경)의 一步地(일보지)를 踰越(유월)치 못하였으니 航空機(항공기)는 空(공)에서 潛航艇(잠항정)은 海(해)에서 自動砲(자동포)는 陸(육)에서 各各(각각) 其(기) 妙(묘)를 極(극)하여 實戰(실전)의 作略(작략)에 絢爛(현란)한 色彩(색채)를 發(발)하였도다. 그러나 그것도 軍國主義的(군국주의적) 落照(낙조)의 反射(반사)일 뿐이다. 噫(희), 一億萬(일억만) 人民(인민)의 上(상)에 君臨(군림)하고 世界(세계) 一括(일괄)의 雄圖(웅도)를 自期(자기)하여 對世界(대세계)에 宣戰(선전)을 布告(포고)하고 百戰百勝(백전백승)의 槪(개)를 有(유)하여 神耶人耶(신야인야)의 間(간)에서 縱橫自在(종횡자재)하던 獨逸(독일) 皇帝(황제)가 一朝(일조)에 自己(자기) 生命(생명)의 神(신)으로 認(인)하는 劍(검)을 解(해)하고 踽凉落拓(우량낙탁), 天涯淪落(천애 윤락)의 和蘭(화란) 遐陬(하추)에 殘喘(잔천)을 僅保(근보)함은 何等(하등)의 突變(돌변)이냐? 此(차)는 곧 카이제르의 失敗(실패)뿐 아니라 軍國主義(군국주의)의 失敗(실패)니 一世(일세)의 快事(쾌사)를 感(감)하는 同時(동시)에 其人(기인)을 爲(위)하여는 一線(일선)의 同情(동정)을 禁(금)치 못하리로다. 그러나 聯合國側(연합국측)도 獨逸(독일)의 軍國主義(군국주의)를 打破(타파)한다고 聲言(성언)하였으나 其(기) 手段(수단) 方法(방법)의 實用(실용)은 亦是(역시) 軍國主義(군국주의)의 遺物(유물)인 軍艦(군함) 鐵砲(철포) 等(등)의 殺人具(살인구)인즉 是(시)는 蠻夷(만이)로 蠻夷(만이)를 攻(공)함이니 何(하)의 別(별)이 有(유)하리요. 獨逸(독일)의 失敗(실패)가 聯合國(연합국)의 戰勝(전승)이 아닌즉 數多(수다)한 强弱國(강약국)의 合致(합치)한 兵力(병력)으로 五年間(오년간)의 持久戰(지구전)에 獨逸(독일)을 制勝(제승)치 못함은 此(차)는 또한 聯合國側(연합국측) 準軍國主義(준군국주의)의 失敗(실패)가 아닌가. 그러면 聯合國側(연합국측)의 砲(포)가 强(강)함이 아니요, 獨逸(독일)의 劍(검)이 短(단)함이 아니거늘 戰爭(전쟁)의 終極(종극)을 告(고)함은 何故(하고)뇨? 正義(정의) 人道(인도)의 勝利(승리)요 軍國主義(군국주의)의 失敗(실패)니라. 然(연)하면 正義(정의) 人道(인도) 卽(즉) 平和(평화)의 神(신)은 聯合國(연합국)의 手(수)를 借(차)하여 獨逸(독일)의 軍國主義(군국주의)를 打破(타파)함인가. 曰(왈) 否(부)라. 正義(정의) 人道(인도) 卽(즉) 平和(평화)의 神(신)은 獨逸(독일) 人民(인민)의 手(수)를 假(가)하여 世界(세계)의 軍國主義(군국주의)를 打破(타파)함이니 곧 戰爭中(전쟁 중)의 獨逸革命(독일 혁명)이 是(시)라. 獨逸革命(독일 혁명)은 社會黨(사회당)의 手(수)에서 起(기)하였은즉 其(기) 由來(유래)가 久(구)하고 또한 露國 革命(노국혁명)의 刺戟(자극)을 受(수)한 바 有(유)하나 統括的(통괄적)으로 말하면 戰爭(전쟁)의 苦(고)를 感(감)하여 軍國主義(군국주의)의 非(비)를 痛切(통절)히 覺悟(각오)한 故(고)로 談笑容從(담소 용종)의 間(간)에서 戰爭(전쟁)을 自破(자파)하고 怒濤驚浪(노도 경랑)의 軍國主義(군국주의)를 發揮(발휘)하려던 劍(검)을 倒(도)하여 軍國主義(군국주의)의 自殺(자살)을 遂(수)하고 共和革命(공화 혁명)의 成功(성공)을 博(박)하여 平和的(평화적)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인즉 聯合國(연합국)은 其隙(기극)을 乘(승)하여 漁父(어부)의 利(이)를 得(득)함이라. 今番(금번) 戰爭(전쟁)의 終極(종극)에 對(대)하여는 聯合國(연합국)의 勝利(승리)뿐 아니라 또한 獨逸(독일)의 勝利(승리)라 하리로다.
  何故(하고)오? 今般(금반) 戰爭(전쟁)에 獨逸(독일)이 孤注一擲(고주 일척)의 最後(최후) 一戰(일전)을 決(결)할지라도 勝負(승부)를 可(가)히 知(지)치 못할지요 假使(가사) 獨逸(독일)이 一時(일시)의 勝利(승리)를 得(득)한다 할지라도 聯合國(연합국)의 復讐戰爭(복수 전쟁)이 一起再起(일기 재기)하여 獨逸(독일)의 滅亡(멸망)을 見(견)치 아니하면 兵(병)을 解(해)할 日(일)이 無(무)할지라. 故(고)로 獨逸(독일)이 戰敗(전패)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戰勝(전승)이라고 할 만한 境遇(경우)에 在(재)하여 斷然(단연)히 屈辱的(굴욕적) 休戰條約(휴전 조약)을 承諾(승낙)하고 講和(강화)를 請(청)함은 곧 機(기)를 見(견)하여 勝(승)을 制(제)함이니 講和會議(강화 회의)에 對(대)하여도 可及(가급)의 屈辱的條約(굴욕적 조약)에는 無條件(무조건)으로 承諾(승낙)함을 推知(추지)하기 不難(불난)하도다 (三月(삼월) 一日(일일) 以後(이후)의 外界消息(외계 소식)은 不知(부지)). 그러하면 現今主義(현금주의)로 見(견)하면 獨逸(독일)의 失敗(실패)라 할지나 遠視的(원시적)으로 見(견)하면 獨逸(독일)의 勝利(승리)라 하리로다.
  噫(희)라 曠古(광고) 未曾有(미증유)의 歐洲戰爭(구주 전쟁)과 奇怪(기괴) 不思議(불사의)의 獨逸(독일)의 革命(혁명)은 十九世紀(십구세기) 以前(이전)의 軍國主義(군국주의) 侵掠主義(침략주의)의 餞別會(전별회)가 되는 同時(동시)에 二十世紀(이십세기) 以後(이후)의 正義(정의) 人道的(인도적) 平和主義(평화주의)의 開幕(폐막)이 되어 카이제르의 失敗(실패)가 軍國主義的(군국주의적) 各國(각국)의 頭上(두상)에 痛棒(통봉)을 下(하)하고 威日遜(위일손)의 講和(강화) 基礎(기초) 條件(조건)이 各(각) 領土(영토)의 古査(고사)에 春風(춘풍)을 傳(전)하매 侵掠國(침략국)의 壓迫下(압박하)에서 呻吟(신음)하던 民族(민족)은 騰空(등공)의 氣(기)와 決河(결하)의 勢(세)로 獨立自決(독립 자결)을 爲(위)하여 奮鬪(분투)하게 되었으니 波蘭(파란)의 獨立(독립)이 是(시)며 체코의 獨立(독립)이 是(시)며 愛蘭(애란)의 獨立宣言(독립 선언)이 是(시)며 印度(인도)의 獨立運動(독립 운동)이 是(시)며 比律賓(비율빈)의 獨立 經營(독립경영)이 是(시)며 朝鮮(조선)의 獨立 宣言(독립선언)이 是(시)라 (三月(삼월) 一日(일일)까지의 狀態(상태)). 各(각) 民族(민족)의 獨立自決(독립 자결)은 自存性(자존성)의 本能(본능)이며 世界(세계)의 大勢(대세)며 神明(신명)의 贊同(찬동)이며 全人類(전인류)의 未來(미래) 幸運(행운)의 源泉(원천)이라. 誰(수)가 此(차)를 制(제)하며 誰(수)가 此(차)를 防(방)하리요.

  二(이). 朝鮮(조선) 獨立宣言(독립 선언)의 動機(동기)

  日本(일본)이 朝鮮(조선)을 合倂(합병)한 後(후)로 自存性(자존성)이 富(부)한 朝鮮人(조선인)의 四圍(사위)에 接觸(접촉)되는 事實(사실)은 一(일)도 獨立(독립)을 想起(상기)케 아니하는 事(사)가 無(무)하였도다. 그러나 最近(최근)의 動機(동기)로 言(언)하면 略三種(약삼종)에 分(분)하리라.

  (1) 朝鮮民族(조선 민족)의 實力(실력)
  日本(일본)이 朝鮮(조선)의 民意(민의)를 無視(무시)하고 闇弱(암약)한 主權者(주권자)를 欺凌(기릉)하며 幾個(기개) 小輩(소배)의 當局者(당국자)를 愚弄(우롱)하며 合倂(합병)의 暴擧(폭거)를 强行(강행)한 後(후)로부터 朝鮮民族(조선 민족)은 羞(수)를 抱(포)하고 恥(치)를 忍(인)하는 同時(동시)에 또한 忿(분)을 發(발)하고 志(지)를 勵(여)하며 精神(정신)을 刷新(쇄신)하고 氣運(기운)을 涵養(함양)하며 昨非(작비)를 改(개)하고 新善(신선)을 圖(도)하며 日本(일본)의 忌厭(기염)을 不拘(불구)하고 外國(외국)에 遊學(유학)한 者(자)도 實(실)로 數萬(수만)에 達(달)한즉 上(상)에 獨立政府(독립 정부)가 有(유)하며 各(각) 方面(방면)으로 獎勵(장려) 援助(원조)하면 萬事(만사)의 文明(문명)에 遺憾(유감)이 없이 日(일)을 計(계)하여 進步(진보)할지라. 國家(국가)는 반드시 物質上(물질상)의 文明(문명)이 一一(일일)이 完備(완비)한 後(후)에 비로소 獨立(독립)함이 아니라 獨立(독립)할 만한 自存(자존)의 氣運(기운)과 精神上(정신상)의 準備(준비)만 有(유)하면 足(족)하니 文明(문명)의 形式(형식)을 物質上(물질상)에 發揮(발휘)함은 刃(인)을 迎(영)하여 竹(죽)을 破(파)함과 如(여)할지니 何(하)의 難事(난사)가 有(유)하리요. 日本人(일본인)은 每每(매매) 朝鮮(조선)의 物質文明(물질 문명)이 不足(부족)함으로 話柄(화병)을 作(작)하나 조선인을 愚昧(우매)케 하고 野鄙(야비)케 하고자 하는 虐政(학정)과 劣等敎育(열등 교육)을 廢(폐)치 아니하면 文明(문명)의 現實(현실)은 日(일)이 無(무)할지니 此(차)가 어찌 朝鮮人(조선인)의 素質(소질)이 不足(부족)함이리요. 朝鮮人(조선인)은 堂堂(당당)한 獨立 國民(독립 국민)의 歷史(역사)와 遺傳性(유전성)이 有(유)할 뿐 아니라 現世文明(현세 문명)에 幷馳(병치)할 만한 實力(실력)이 有(유)하니라.
  (2) 世界大勢(세계 대세)의 變遷(변천)
  二十世紀(이십세기) 初頭(초두)로부터 全人類(전인류)의 思想界(사상계)는 稍稍(초초) 向新(향신)의 色彩(색채)를 帶(대)하여 戰爭(전쟁)의 慘禍(참화)를 厭(염)하고 平和(평화)의 幸福(행복)을 樂(낙)하여 各國(각국) 軍備(군비)의 制限(제한) 或(혹) 全廢(전폐)의 說(설)도 有(유)하며 萬國聯合(만국 연합)의 最高裁判所를(최고 재판소)를 設(설)하고 絶大(절대)의 裁判權(재판권)을 付(부)하여 國際的(국제적) 問題(문제)를 裁決(재결)하여 戰爭(전쟁)을 未然(미연)에 防(방)하자는 說(설)도 有(유)하고 其外(기외) 世界的(세계적) 聯邦說(연방설)과 世界的(세계적) 共和說(공화설) 等(등)은 實(실)로 禽噪蟬聲(금조선성)과 如(여)히 多(다)하니 是(시)는 다 世界的(세계적) 平和(평화)를 促進(촉진)하는 先聲(선성)이다. 所謂(소위) 帝國主義的(제국주의적) 政治家(정치가)의 眼(안)으로 見(견)하면 一笑(일소)에 付(부)할지나 事實(사실)의 現實(현실)은 時(시)의 問題(문제)뿐이요, 最近(최근)의 世界(세계) 思想界(사상계)에 痛切(통절)한 實物(실물) 敎訓(교훈)을 下(하)한 것은 곧 歐洲戰爭(구주 전쟁)과 露國革命(노국 혁명)과 獨逸革命(독일 혁명)이 是(시)라. 世界大勢(세계 대세)에 對(대)하여는 上述(상술)한 바가 有(유)한즉 重複(중복)을 避(피)하나 一言(일언)으로 蔽(폐)하면 現在(현재)로부터 未來(미래)의 大勢(대세)는 侵掠主義(침략주의)의 滅亡(멸망), 自存的(자존적) 平和主義(평화주의)의 勝利(승리)가 됨이라.
  (3) 民族自決主義(민족 자결주의)
  美國(미국) 大統領(대통령) 위일손氏(씨)는 對獨講和(대독 강화) 基礎條件(기초 조건) 卽(즉) 十四個(십사개) 條件(조건)을 提出(제출)하는 中(중)에 國際聯盟(국제 연맹) 民族自決(민족 자결)의 條件(조건)이 有(유)한데 英佛日(영불일)과 其他(기타) 各國(각국)이 內容(내용)으로는 이미 國際聯盟(국제 연맹)에 贊同(찬동)하였은즉 國際聯盟(국제 연맹)의 本領(본령) 卽(즉) 贊同(찬동)의 意義(의의)를 表(표)한 以上(이상)에는 國際聯盟(국제 연맹)과 民族自決(민족 자결)은 위일손 一人(일인)의 私言(사언)이 아니라 世界(세계)의 公言(공언)이며 希望(희망)의 條件(조건)의 아니라 旣成(기성)의 條件(조건)이며 且(차) 聯合國側(연합국측)에서 波蘭(파란)의 獨立(독립)을 贊成(찬성)하고 체코의 獨立(독립)을 爲(위)하여는 巨額(거액)의 軍備(군비)와 少多(소다)의 犧牲(희생)을 不顧(불고)하고 零下(영하) 三十度(삼십 도) 內外(내외)의 寒烈(한열)을 排(배)하여 兵馬(병마)를 西佰利亞(서백리아)에 出(출)함에는 美日(미일)의 行動(행동)이 最(최)히 顯著(현저)하였은즉 此(차)는 民族自決(민족 자결)을 事實上(사실상)으로 援助(원조)함이라. 民族自決主義(민족 자결주의) 完成(완성)의 表象(표상)이니 어찌 可賀(가하)할 바가 아니요.

  三(삼). 朝鮮獨立宣言(조선 독립 선언)의 理由(이유)

  嗚呼(오호)라 國(국)을 失(실)한 지 十個(십개) 星霜(성상)을 經(경)하고 獨立(독립)을 宣言(선언)한 民族(민족)이 獨立宣言(독립 선언)의 理由(이유)를 說明(설명)함에 至(지)하여는 實(실)로 沈痛(침통)과 自愧(자괴)를 禁(금)치 못하리로다. 獨立(독립)의 理由(이유)는 此(차)를 四種(사종)에 分(분)하리라.

  (1) 民族自存性(민족 자존성)
  走獸(주수)는 飛禽(비금)과 同群(동군)치 못하고 飛禽(비금)은 昆蟲(곤충)과 同群(동군)치 못하며 同一(동일)한 走獸(주수)로되 麒麟(기린)과 狐狸(호리)는 其居(기거)가 異(이)하고 同一(동일)한 禽獸(금수)이로되 鴻鵠(홍곡)과 燕雀(연작)은 其志(기지)가 逈別(형별)하고 同一(동일)한 昆蟲(곤충)이로되 龍蛇(용사)와 蚯蚓(구인)은 所好(소호)가 各存(각존)하며 同種物(동종물)의 中(중)에도 蜂蟻(봉의)는 自群(자군)이 아니면 絶對(절대)로 排斥(배척)하여 一處(일처)에 同居(동거)치 아니하느니 此(차)는 有情物(유정물)의 自存性(자존성)에서 出(출)함이니 是(시)는 반드시 利害得失(이해득실)을 較計(교계)하여 他(타)의 侵掠(침략)을 排斥(배척)할 뿐만 아니라 他群(타군)이 自群(자군)에 對(대)하여 福利(복리)를 加(가)한다 하여도 또한 此(차)를 排斥(배척)하느니 此(차)는 排他性(배타성)이 主體(주체)가 되어 그러한 것이 아니라 自群(자군) 自愛(자애)하여 自存(자존)을 營(영)하는 故(고)로 自存(자존)의 反面(반면)에는 自然(자연)히 排他(배타)가 有(유)하니 此(차)의 排他(배타)라 함은 自存(자존)의 範圍內(범위 내)에 入(입)하는 他(타)의 干涉(간섭)을 防禦(방어)함이요, 自存(자존)의 範圍(범위)를 超過(초과)하여 他(타)를 排斥(배척)함은 아니니 自存(자존)의 範圍(범위)를 超越(초월)하여 他(타)를 排(배)함은 排他(배타)가 아니요, 侵掠(침략)인 故(고)라. 人類(인류)도 是(시)와 如(여)하여 民族自存性(민족 자존성)이 有(유)한 故(고)로 有色種(유색종) 無色種(무색종)의 間(간)에 各各(각각) 自存性(자존성)이 有(유)하고 同種(동종)의 支那(지나) 全幅(전폭)은 一國(일국)을 形成(형성)하였으나 民族的(민족적) 競爭(경쟁)은 實(실)로 極烈(극렬)하도다. 最近(최근)의 事實(사실)로만 言之(언지)라도 淸朝(청조)의 滅亡(멸망)은 政治的(정치적) 革命(혁명)의 皮相(피상)의 有(유)하나 實(실)은 韓滿兩族(한만 양족)의 爭奪(쟁탈)이며 西藏族(서장족)이나 蒙古族(몽고족)이나 各各(각각) 自存(자존)을 夢想(몽상)하여 機會(기회)만 有(유)하면 鬧端(요단)을 惹起(야기)하며 其外(기외) 英國(영국)의 愛蘭(애란) 印度(인도)에 對(대)한 同化政策(동화 정책)이나 露國(노국)의 波蘭(파란)에 對(대)한 同化政策(동화 정책)이나 其他 (기타) 各國(각국)의 領土(영토)에 對(대)한 同化政策(동화 정책)은 一(일)도 水泡(수포)에 歸(귀)치 아니함이 無(무)하도다. 然(연)한즉 自族(자족)이 他族(타족)의 干涉(간섭)을 受(수)치 아니하려 함은 人類(인류) 通有(통유)의 本性(본성)이니 此(차)에 對(대)하여는 他物(타물)이 此(차)를 防遏(방알)치 못할 뿐 아니라 自族(자족)이 스스로 自族(자족)의 自存性(자존성)을 抑制(억제)코자 하여도 不可能(불가능)이라. 此性(차성)은 恒常(항상) 彈力性(탄력성)을 有(유)하여 膨脹(팽창)의 限度(한도) 卽(즉) 獨立自存(독립 자존)의 完善(완선)에 至(지)치 아니하면 止(지)치 아니하느니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을 可(가)히 侵(침)치 못하리로다.
  (2) 祖國思想(조국 사상)
  越鳥(월조)는 南枝(남지)를 思(사)하고 胡馬(호마)는 北風(북풍)이 嘶(시)하나니 此(차)는 基本(기본)을 忘(망)치 아니함이라. 動物(동물)도 猶然(유연)하거든 况(황) 萬物(만물)의 靈長(영장)인 人(인)이 어찌 基本(기본)을 忘(망)하리요. 基本(기본)을 忘(망)치 못함은 人爲(인위)가 아니오 天性(천성)인 同時(동시)에 또한 萬有(만유)의 美德(미덕)이라. 故(고)로 人類(인류)는 基本(기본)을 忘(망)치 아니할 뿐 아니라 忘(망)코자 하여도 得(득)치 못하느니 半萬年(반만년)의 歷史國(역사국)이 다만 軍艦(군함)과 鐵砲(철포)의 數(수)가 少(소)함으로써 他人(타인)의 蹂躪(유린)을 被(피)하여 歷史(역사)가 斷絶(단절)됨에 至(지)하니 誰(수)가 此(차)를 忍(인)하며 誰(수)가 此(차)를 忘(망)하리요. 國(국)을 失(실)한 後(후) 往往(왕왕) 愁雲悽雨(수운 처우)의 中(중)에 歷代(역대) 祖先(조선)의 號泣(호읍)을 見(견)하고 中夜淸晨(중야 청신)의 間(간)에 宇宙(우주) 神明(신명)의 呵責(가책)을 聞(문)하니 此(차)를 可(가)히 忍(인)하면 何(하)를 可(가)히 忍(인)치 못하리요.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을 可(가)히 侵(침)치 못하리로다.
  (3) 自由主義(자유 주의) (自存主義(자존 주의)와 逈別(형별))
  人生(인생)의 目的(목적)을 哲學的(철학적)으로 解釋(해석)하려면 各說(각설)이 紛紛(분분)하여 一定(일정)한 定義(정의)를 下(하)하기 難(난)하나 人生生活(인생 생활)의 目的(목적)은 眞自由(진자유)에 在(재)하니 自由(자유)가 無(무)한 生活(생활)이 何(하)의 趣味(취미)가 有(유)하며 何(하)의 快樂(쾌락)이 有(유)하리요. 自由(자유)를 得(득)하기 爲(위)하여는 何(하)의 代價(대가)도 不惜(불석)하느니 곧 生命(생명)을 賭(도)하여도 辭(사)치 아니할지라. 日本(일본)이 朝鮮(조선)을 合倂(합병)한 後(후)로 壓迫(압박) 又(우) 壓迫(압박) 一動一靜(일동 일정) 一語一默(일어 일묵)에 壓迫(압박)을 加(가)하여 自由(자유)의 生氣(생기)는 一毫(일호)도 無(무)한즉 血性(혈성)이 無(무)한 惰力物(타력물)이 아닌 바에 어찌 此(차)를 忍受(인수)하리요. 一人(일인)이 自由(자유)를 失(실)하여도 天壤(천양)의 和氣(화기)를 損(손)할지니 어찌 二天萬人(이천만 인)의 自由(자유)를 抹殺(말살)함이 是(시)와 如(여)히 甚(심)하리요.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을 可(가)히 侵(침)치 못하리로다.
  (4) 對世界(대세계)의 義務(의무)
  民族自決(민족 자결)은 世界平和(세계 평화)의 根本(근본) 解決(해결)이라 民族自決主義(민족 자결주의)가 成立(성립)되지 못하면 如何(여하)히 國際聯盟(국제 연맹)을 締結(체결)하여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할지라도 究竟(구경)에는 水泡(수포)에 歸(귀)할지라. 何故(하고)오? 民族自決(민족 자결)이 成立(성립)되지 못하면 何時(하시)라도 兵連禍結(병련화결)하여 戰爭(전쟁)이 連綿(연면)할지니 朝鮮民族(조선 민족)이 어찌 世界(세계)의 責任(책임)을 免(면)하리요. 故(고)로 朝鮮民族(조선 민족)의 獨立(독립) 自決(자결)은 世界平和(세계 평화)를 爲(위)함이요, 且(차) 東洋平和(동양 평화)에 對(대)하여는 實(실)로 重要(중요)한 關鍵(관건)이 되느니 日本(일본)이 朝鮮(조선)을 合倂(합병)함은 朝鮮(조선) 自體(자체)에 對(대)한 利益(이익) 卽(즉) 朝鮮民族(조선 민족)을 放逐(방축)하고 日本民族(일본 민족)을 移植(이식)코자 할 뿐 아니라 滿蒙(만몽)에 指(지)를 染(염)하고 一步(일보)를 進(진)하여 支那(지나) 大陸(대륙)을 夢想(몽상)함이니 日本(일본)의 野心(야심)은 路人皆見(노인 개견)이라. 支那(지나)를 經營(경영)함에는 朝鮮(조선)을 捨(사)하고 他(타)의 途(도)를 假(가)할 處(처)가 無(무)한 故(고)로 侵掠政策上(침략 정책상) 朝鮮(조선)을 唯一(유일)한 生命(생명)으로 認(인)함이니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은 곧 東洋平和(동양 평화)가 될지라.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을 可(가)히 侵(침)치 못하리로다.

  四(사). 朝鮮(조선) 總督政策(총독 정책))에 對(대)하여

  日本(일본)이 朝鮮(조선)을 合倂(합병))한 後(후) 朝鮮(조선)에 對(대)한 施政(시정) 方針(방침)은 武力壓迫(무력 압박) 四字(사자)로 代表(대표)하기 足(족)하도다. 故(고)로 前後總督(전후 총독) 卽(즉) 寺內(사내) 長谷川(장곡천)으로 言(언)하면 政治的(정치적) 學識(학식)이 無(무)한 一個軍人(일개 군인)이라 朝鮮(조선) 總督政治(총독 정치)는 一括(일괄)하여 言(언)하면 憲兵政治(헌병 정치)니 換言(환언)하면 軍力政治(군력 정치)요 鐵砲政治(철포 정치)라 軍人(군인)의 特徵(특징)을 發揮(발휘)하여 軍力政治(군력 정치)를 行(행)함에는 자못 遺憾(유감)이 無(무)하였도다. 故(고)로 朝鮮人(조선인)은 憲兵(헌병) 帽子(모자)의 影(영)만 見(견)하여도 毒蛇(독사)나 猛虎(맹호)를 見(견)함과 如(여)히 忌避(기피)하고 何事(하사)에든지 總督政治(총독 정치)에 接觸(접촉)할 時(시)마다 自然(자연)히 五千年(오천 년) 歷史(역사)의 祖國(조국)을 懷想(회상)하며 二千萬(이천만) 民族(민족)의 自由(자유)를 默訴(묵소)하면서 人(인)의 見(견)치 못하는 處(처)에서 淚(누)에 血(혈)을 半(반)이나 和(화)하여 流(유)하느니 此(차)는 곧 合倂後(합병후) 十年間(십년간)의 朝鮮(조선) 二千萬(이천만) 民族(민족)의 生活(생활)이라. 嗚呼(오호)라 日本人(일본인)이 진실로 人心(인심)이 有(유)하면 此(차)를 行(행)하고도 其夢(기몽)이 安(안)할까. 且(차) 宗敎(종교)와 敎育(교육)은 人類(인류) 全生活(전생활)에 對(대)하여 特別(특별)히 重要(중요)한 事(사)라 何國(하국)이라도 宗敎(종교)의 自由(자유)를 許(허)치 아니하는 國(국)은 無(무)하거늘 朝鮮(조선)에는 所謂(소위) 宗敎令(종교령)을 發布(발포)하여 信仰(신앙)의 自由(자유)를 拘束(구속)하고, 敎育(교육)으로 言(언)하면 精神的(정신적) 敎育(교육)이 無(무)함은 勿論(물론) 學科(학과)의 敎科書(교과서)도 廣義的(광의적) 日語冊(일어책)에 不過(불과)하며 其外(기외) 萬事(만사)에 對(대)한 虐政(학정)은 枚擧(매거)키 不遑(불황)할 뿐 아니라 枚擧(매거)할 必要(필요)도 無(무)하도다. 然(연)하나 朝鮮人(조선인)은 是(시)와 如(여)한 虐政下(학정하)에서 奴隸(노예) 되고 牛馬(우마) 되면서 十年間(십년간)에 小毫(소호)의 反動(반동)도 起(기)치 않고 安受(안수) 俯從(부종)하였으니 此(차)는 四圍(사위)의 壓力中(압력중)에 在(재)하여 反動(반동)의 不能(불능)도 勿論(물론)이나 朝鮮人(조선인)는 實(실)로 總督政治(총독 정치)를 重要視(중요시)하여 反動(반동)을 起(기)코자 하는 思想(사상)도 無(무)하였도다. 何故(하고)뇨. 總督政治(총독 정치) 以上(이상)의 合倂(합병)의 根本問題(근본 문제)가 有(유)함이니 換言(환언)하면 何時(하시)라도 合倂(합병)을 破(파)하고 獨立自存(독립 자존)을 保(보)하리라 함이 二千萬(이천만) 民族(민족)의 腦裏(뇌리)에 常主不滅(상주 불멸)하는 精神(정신)인 故(고)로 總督政治(총독 정치)는 如何(여하)히 惡極(악극)하여도 此(차)에는 報復(보복)의 怨毒(원독)을 加(가)할 理(리)가 無(무)하고 如何(여하)히 完善(완선)한 政治(정치)를 行(행)할지라도 또한 感謝(감사)의 意(의)를 表(표)할 理(리)가 無(무)하여 總督政治(총독 정치)는 곧 枝葉(지엽)의 問題(문제)로 認(인)하는 故(고)니라.  

  五(오). 朝鮮獨立(조선 독립)의 自信(자신)

  今番(금번)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國家(국가)를 創設(창설)함이 아니요 固有(고유)의 獨立國(독립국)이 一時(일시)의 恥辱(치욕)을 經(경)하고 復舊(복구)하는 獨立(독립)인즉 國家(국가)의 要素(요소) 卽(즉) 土地(토지) 人民(인민) 政治(정치)와 朝鮮(조선) 自體(자체)에 對(대)하여는 萬事(만사)가 具備(구비)하여 綽綽有餘(작작유여)하니 贅言(췌언)할 必要(필요)가 無(무)하고 各國(각국)의 承認(승인)에 對(대)하여는 元來(원래)로 朝鮮(조선) 對(대) 各國(각국)의 國際的(국제적) 交際(교제)는 親善(친선)을 保(보)하여 好感情(호감정)을 維持(유지)할 뿐 아니라 加之(가지) 槪論(개론)에 陳述(진술)한 바와 如(여)히 正義(정의) 平和(평화) 民族自決(민족 자결)의 新時代(신시대)인즉 朝鮮獨立(조선 독립)을 樂從(낙종)할 뿐 아니라 원조할지니 다만 問題(문제)는 日本(일본)의 承認(승인) 與否(여부)에 在(재)하도다. 然(연)이나 日本(일본)도 承認(승인)을 持疑(지의)치 아니할 줄로 思(사)하노라.
  大盖(대개) 人類(인류)의 思想(사상)은 時代(시대)를 隨(수)하여 變遷(변천)되느니 思想變遷(사상 변천)을 隨(수)하여 事實(사실)의 變遷(변천)이 有(유)함은 勿論(물론)이라. 人(인)은 實利(실리)만 爲(위)하는 者(자) 아니오 또한 名譽(명예)를 尊重(존중)하느니 侵掠主義(침략주의) 卽(즉) 功利主義(공리주의) 時代(시대)에 在(재)하여는 他國(타국)을 侵掠(침략)함이 勿論(물론) 實利(실리)를 爲(위)함이나 平和(평화) 卽(즉) 道德主義(도덕주의) 時代(시대)에 在(재)하여는 民族自決(민족 자결)을 贊同(찬동)하여 小弱國(소약국)을 援助(원조)함이 國光(국광)을 發揮(발휘)하는 名譽(명예)가 되는 同視(동시)에 또한 天惠神福(천혜신복)의 實利(실리)를 得(득)할지라. 萬一(만일) 日本(일본)이 依然(의연)히 侵掠主義(침략주의)를 繼續(계속)하여 朝鮮獨立(조선 독립)을 否認(부인)하면 是(시)는 東洋(동양) 又(우)는 世界的(세계적) 平和(평화)를 攪亂(교란)함이니 恐(공)컨대 美日(미일) 或(혹) 支日(지일) 戰爭(전쟁)을 爲始(위시)하여 世界的(세계적) 聯合戰爭(연합 전쟁)을 再演(재연)할는지도 知(지)치 못할지니 然(연)하면 日本(일본)에 加擔(가담)할 者(자)는 或(혹) 英國(영국)일는지? 英日(영일) 同盟關係(동맹 관계)뿐 아니라 英領(영령) 問題(문제)로 此(차)도 疑問(의문)이라. 然(연)하면 어찌 失敗(실패)를 免(면)하리오. 第二(제이)의 獨逸(독일)을 演(연)함에 不過(불과)할지니 日本(일본)의 劍(검)을 獨逸(독일)에 比(비)하면 孰長孰短(숙장숙단)이리요. 日本人(일본인)도 自短(자단)을 首肯(수긍)하리라. 然(연)하면 現今(현금)의 大勢(대세)에 逆行(역행)치 못할 것은 明瞭(명료)치 아니한가? 且(차) 日本(일본)의 夢想(몽상)하는 朝鮮民族(조선 민족)을 放逐(방축)하고 日本民族(일본 민족)을 移植(이식)하려는 殖民政策(식민 정책)도 絶對不可能(절대불가능)이요 支那(지나) 經營(경영)도 支那(지나) 自體(자체)의 反動(반동)뿐 아니라 各國(각국)에서도 肯定(긍정)할 理(리)가 絶無(절무)한즉 殖民政策(식민 정책)으로든지 朝鮮(조선) 支那(지나) 經營上(경영상) 假道(가도)로 利用(이용)하려는 政策(정책)이 모두 水泡(수포)에 屬(속)할지니 何(하)를 吝(린)하여 承認(승인)을 不肯(불긍)하리요. 日本(일본)이 廣達(광달)한 襟度(금도)로 朝鮮獨立(조선 독립)을 首先(수선) 承認(승인)하고 日本人(일본인)의 口頭禪(구두선)을 作(작)하는 支日(지일) 親善(친선)을 眞正(진정)히 發揮(발휘)하면 東洋平和(동양 평화)의 盟主國(맹주국)은 日本(일본)을 捨(사)하고 何(하)에 在(재)하리요. 그리하면 二十世紀(이십세기) 初頭(초두)에 世界的(세계적)으로 百千年(백천년) 未來(미래)의 平和的(평화적) 幸福(행복)을 爲(위)하여 福音(복음)을 傳(전)하는 天使國(천사국)은 西半球(서반구)에 美國(미국)이 有(유)하고 東半球(동반구)에는 日本(일본)이 有(유)할지니 何等(하등)이 榮譽(영예)이리요. 東洋人(동양인)의 顔色(안색)을 增輝(증휘)함이 果然(과연) 何如(하여)이리요.
  且(차) 日本(일본)이 朝鮮獨立(조선 독립)을 首先(수선) 承認(승인)하면 朝鮮人(조선인)은 日本(일본)에 對(대)하여 合倂(합병)의 舊怨(구원)을 忘(망)하고 深感(심감)의 意(의)를 表(표)할 뿐 아니라 朝鮮(조선)의 文明(문명)이 日本(일본)에 及(급)치 못함은 事實(사실)인즉 獨立(독립)한 後(후)에 文明(문명)을 輸入(수입)하려면 日本(일본)을 捨(사)하고 何(하)에 取(취)하리요. 何故(하고)뇨? 西洋文明(서양 문명)을 直輸入(직수입)함도 絶對不能(절대 불능)의 事(사)는 아니나 道路(도로)가 遼遠(요원)하여 往來(왕래)이 不便(불편)할 뿐 아니라 言語文字上(언어 문자상)이나 經濟上(경제상) 困難(곤란)한 事(사)가 多(다)하고 日本(일본)으로 言(언)하면 釜山海峽(부산 해협)이 不過(불과) 十餘時間(십여 시간)의 航程(항정)이요 朝鮮人(조선인)의 日語(일어) 日文(일문)을 解(해)하는 者(자)가 多(다)한즉 文明(문명)을 日本(일본)으로부터 輸入(수입)하기는 事半功倍(사반공배)가 될지니 然(연)하면 鮮日(선일)의 親善(친선)은 實(실)로 膠漆(교칠)과 如(여)할지라 東洋平和(동양 평화)에 對(대)하여 何等(하등)의 淸福(청복)이리요. 日本人(일본인)은 결코 世界(세계) 大勢(대세)에 反(반)하여 自損(자손)을 招(초)하는 侵掠主義(침략주의)를 繼續(계속)하는 愚擧(우거)에 出(출)치 아니하고 東洋平和(동양 평화)의 牛耳(우이)를 執(집)하기 爲(위)하여 朝鮮獨立(조선 독립)을 首先(수선) 承認(승인)하리라 하노라.
  假令(가령) 今番(금번)에 日本(일본)이 朝鮮獨立(조선 독립)을 否認(부인)하고 現狀維持(현상 유지)가 된다 하여도 人心(인심)은 水(수)와 如(여)하여 愈防愈決(유방유결)하느니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은 山上(산상)을 離(이)한 圓石(원석)과 如(여)하여 目的地(목적지)에 至(지)치 아니하면 其(기) 勢(세)가 止(지)치 아니할지니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時(시)의 問題(문제)뿐이라. 假使(가사) 朝鮮獨立(조선 독립)이 十年(십년) 後(후)에 在(재)한다 하면 其(기) 其間(기간)의 日本(일본)의 對朝鮮(대조선)의 所得(소득)은 幾何(기하)나 될까, 物質上(물질상) 利益(이익) 卽(즉) 財利(재리)로 言(언)하면 收支上(수지상) 剩利(잉리)를 生(생)하여 日本(일본) 國庫(국고)에 補用(보용)함은 容易(용이)한 事業(사업)이 아닌즉 然(연)하면 日本人(일본인)의 在朝鮮官吏(재조선 관리) 及(급) 其他(기타) 月給生活(월급 생활)하는 者(자)의 俸給(봉급)뿐일지니 努力(노력)과 資本(자본)을 上相(상상)하면 純利益(순이익)은 實(실)로 僅少(근소)할지요 其間(기간) 日本人(일본인)의 殖民(식민)은 歸國(귀국)치 아니하면 國籍(국적)을 移(이)하여 朝鮮民(조선민)으로 化(화)하는 外(외)에 他道(타도)가 無(무)할지니 然(연)하면 十年間(십년간)의 薄少(박소)한 財利(재리)를 貪(탐)하여 世界的(세계적) 平和(평화)의 氣運(기운)을 傷(상)하고 二千萬(이천만) 民族(민족)의 苦痛(고통)을 加(가)함이 어찌 國家(국가)의 不幸(불행)이 아니리요.
  嗚呼(오호)라 日本人(일본인)는 記憶(기억)할지라. 淸日戰爭(청일 전쟁) 後(후)의 馬關條約(마관 조약)과 露日戰爭(노일 전쟁) 後(후)의 포오츠머드 條約中(조약 중)에 朝鮮獨立(조선 독립)의 保障(보장)을 主張(주장)함은 何等(하등)의 義俠(의협)이며 其(기) 兩條約(양 조약)의 墨痕(묵흔)이 未乾(미건)하여 곧 節(절)을 變(변)하고 條(조)를 改(개)하여 詭計(궤계)와 暴力(폭력)으로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을 蹂躪(유린)함은 何等(하등)의 背信(배신)인가. 往事(왕사)는 已矣(이의)나 來者(내자)를 可諫(가간)이라 平和(평화)의 一念(일념)이 足(족)히 天地(천지)의 禎祥(정상)을 釀(양)하느니 日本(일본)은 勉之(면지)어다.

서평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투키디데스(Thucidides)

글: 최성재

  고대 그리스(그리스인은 ‘헬라스’라고 하고 로마인은 ‘그리스’라고 함. 아테네 북부 보이오티아의 ‘그라리아’에서 유래)에서는 3번의 격변기가 있었다. 트로이 전쟁(1250~1240 BC, 헤로도토스 주장), 페르시아 전쟁(490 BC 1차, BC 480 2차), 그리고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BC 431~404)은 그리스  민족의 집단 기억에 어제 일처럼 생생히 각인되었다. 그래서일까? 불멸의 세 고전이 탄생되었다. 그것들은 각각 호머의 『일리아드(그리스인들은 트로이를 ‘일리움’이라고 부름. 일리아드는 ‘일리움의 이야기’라는 뜻)』, 『히스토리아(원래의 의미는 ‘탐구(inquiry)’)』,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다. 『일리아드』는 서사시라서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문에서 역사적 사실과 시의 과장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트로이 전쟁에서 동원된 군대는 호머가 말한 1,200척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양초(糧草, 군인의 식량과 말의 먹이) 문제 때문에 가능한 정예병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그들은 트로이(오늘날의 소아시아 근방) 해변에 도착한 후에도 곧장 흩어져서 먹을 것을 약탈하거나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집중 공격을 못해서 전쟁을 10년간이나 끌었다고 추론한다.
  지금은 헤로도토스가 일반적으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투키디데스(BC 460~398)가 역사의 아버지라 불렸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의 박사 학위 논문은 실전되긴 했지만「투키디데스 연구」였다. 헤로도토스가 비록 대부분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역사』를 집필했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아서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기 전까지, 그는 허풍쟁이로 통했던 것이다.
  하여간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서양 역사에서 쌍벽을 이룬다. 그들의 서술 방식과 목적이 대조된다. 헤로도토스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중시하여 세상에는 다양한 민족과 나라가 있고 강대국과 약소국은 끊임없이 바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거의 사실(史實)이나 전승되는 이야기를 필자의 주관은 가급적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반면에 투키디데스는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 놓이면 인간은 거의 똑같은 행동을 보인다고 믿고 날카로운 이성으로 엄밀성을 추구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제거하고, 역사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고 후세에 교훈을 주고 했다. 동양과 비교하면, 헤로도토스는 『사기』의 사마천에 가깝고, 투키디데스는 『춘추』의 공자에 가깝다.
  투키디데스는 말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탐구한 결과에 바탕을 두고 쓰는 것을 첫째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도 편견이나 기억의 차이에 의해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 저작에는 흥미 본위의 이야기가 전무해서 청중들(그리스에서는 모든 글을 소리 내어 읽었기 때문에, ‘독자(reader)’란 말이 따로 없었음. 청중이 곧 독자.)에게는 아마 재미없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이나 이와 비슷한 것은 인간의 보편성에 따라 장래에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유익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갈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멸의 재산으로서 이 책을 썼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아티카의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의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제우스의 아들 ‘라케다이몬’이 에우로타스의 딸 ‘스페르타’와 결혼하여 스파르타 지역을 물려받았다고 함.)이 27년 전쟁으로 그리스 전체를 초토화시킨 원인이 무엇일까? 투키디데스는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냉정하게 한 줄로 말한다.
  “아테네가 강대해져서 라케다이몬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전쟁을 필연적으로 일으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BC480년 아테네인들은 크세르크세스의 파죽지세 대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거의 대부분 배를 타고 살라미스 섬 등으로 달아났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선견지명으로 아테네는 해군을 증강시켰는데, 일단 주민들을 배로 피신시킨 다음 살라미스 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 전함을 유인해서 일망타진한다. 이 전쟁의 승리로 오늘날의 서구가 탄생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승리 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군림한다. 페리클레스 장군이 상공업 진작과 여러 폴리스로부터 받은 공물로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다.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스파르타(스파르타는 왕이 2명)가 계속 딴죽을 건다. 아테네 식민지의 해방을 기치로 내걸고! 마침내 패권을 두고 양 진영은 파멸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크세노폰의 『1만인의 퇴각』에서 보듯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 페르시아 용병으로 갔다가 고용주가 망하는 바람에 스무 개 이상의 민족과 싸우면서 1년 반에 걸쳐서 돌아왔지만 5분의 1밖에 죽지 않은 데서 보듯이,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살인기계였다. 엄정한 규율, 높은 자긍심, 개인의 용기나 힘보다 대오(隊伍)를 중시하는 철벽 방진(方陣), 누구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장군이 앞장서는 민주 군대! 이런 자들끼리 27년간 싸웠으니, 그 처절함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보다 더했으리라는 투키디데스의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마침내 스파르타가 아테네에게 이기게 되고 그 후에는 다시 테베가 이긴다. 그러나 어릴 때 테베에 인질로 있었던 필리포스에 의해, 최종적으로 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그리스 전체가 마케도니아의 말발굽 아래 놓인다.
  투키디데스의 글은 화려하면서도 간결하고 난해하면서도 우아하고 차가우면서도 살갑다. 명문 아닌 문장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니체의 화려한 문체가 군데군데 번득이는 창의성으로 빛나지만 자아도취에 빠져 감정의 삼천포로 빠지기 쉬운 반면에 투키디데스의 겉보기에 화려한 문체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모든 문장을 꼭꼭 씹어서 읽어야 한다.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은 그만의 독특한 연설 기법이 있다. 그것은 중요한 사건에 중요한 사람이 나타나 연설하는 것이다. ‘이런 요지로 말했다.’고 기술한다.
  전쟁 초기 페리클레스가 전사자를 추모하는 연설의 일부를 소개한다. 아테네 장군 중 1명으로서 오로지 연설로써 직접 시민들을 설득하여,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아무리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웠더라도 조금만 수틀리면 가차 없이 추방하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여 아테네의 전성시대를 만들고 전쟁을 이끌어가는 페리클레스의 명연설은 곳곳에 등장한다. 이 추도 연설은 그중에서도 백미다.
  “우리의 정체(政體)는 이웃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 책임이 소수자에게 있지 않고 다수자 사이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분규와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따라, 즉 각자가 얻은 명성에 기초하여 계급에 의거하지 않고 능력 본위로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 이 도시의 위대함 때문에 온갖 물건이 빠짐없이 모이고, 우리 아테네인은 세상 끝의 산물까지도 이 땅의 산물처럼 똑같이 즐기고 있습니다. ……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으로 봅니다. ……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촉진시킵니다. 비판이 실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판으로만 흘러, 해야 할 행동을 소홀히 하는 일도 없습니다. …… 나아가 우리의 또 다른 특질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해를 따지지 않으며, 자유를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 그들은 지하에 묻히고 만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명(英名)은 영원히 기억되고,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언행 속에서 기억될 것입니다. 요컨대 대지는 모든 영웅들의 묘지가 되어, 모국에서 묘석의 비문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는 땅에서도 무형 무언의 기념비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자유가 없는 곳에 행복이 없고 용기가 없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의 위험 앞에서 망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이 전몰자들처럼 최상의 영광으로 가득 찬 최후를 맞이하고, 여러분이 바치는 것과 같은 애도를 받을 수 있으며, 게다가 그 풍요로운 생애의 종말까지 충실했던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의 깊은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전에 (맛보았던) 자신들의 기쁨을 오늘 이후로는 남들의 손안에서 찾아내야 할 때, 여러분은 수없이 그 추억에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도 쓰라리지 않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행복을 빼앗기는 것은 고통입니다. …… 내 자식의 생명을 나라에 바치지 않고 평등과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이 전몰자들과 그 유족에게 나라가 주는 그들에 대한 승리의 관으로서 그들의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를 아테네가 국고를 통해 오늘부터 보증합니다.”
  그리스는 13만㎢에 지나지 않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21,600㎢, 아테네가 속한 그리스 본토의 아티카는 3,800㎢, 스파르타가 속한 라코니아는 3,600㎢밖에 안 된다. 바로 여기서 서양의 거의 모든 본류가 흘러 나왔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미황사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에, 우리나라 육지의 절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세워진 오래된 절이다. 불교가 한창 흥할 때는 불교의 요람지가 되어 스님도 많이 있었고 주위에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제947호)과 응진전(보물 제 1183호), 요사채 등 건물만이 남아있고, 숲속에 떨어져 있는 부도밭과 사적비가 번성했던 옛날을 말해준다. 그러나 크거나 화려하진 않으나 미황사를 찾는 즐거움은 크다. 우선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리는 위치에 알맞은 규모로 자리잡은 절터와 대웅보전의 앉음새에서 편안함이 느껴지고, 특히 대웅보전 주춧돌에는 게나 거북 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으며, 가뭄이 들 때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괘불과 대웅보전이나 웅진전 안 벽과 천장에 그려진 18세기의 벽화들, 응진전과 명부전 안에 모셔진 보살, 나한, 동자, 신장상 등 조각을 살피는 재미가 사뭇 크다. 대웅보전 앞 마당 가운데는 긴 돌확이 있어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그 앞을 가로질러 오른쪽 숲속으로 난 길을 들면, 소나무와 동백나무 사이로 온갖 풀과 산죽, 진달래, 덤불이 깔려 있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부도 밭에 닿는다. 부도마다 거북, 게, 새, 연꽃, 도깨비 얼굴 등이 새겨져 있어 한적한 산속에서 뜻밖에 꾸밈없는 표정들을 만날 수 있다. 절에서 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거리로 기암괴석이 들쭉날쭉 장식하고 있어 거대한 수석을 세워 놓은 듯 수려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보는 다도해와 서해의 낙조는 매우 아름다우며, 절 바로 아래에는 동백나무 동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2)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말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18년 귀양생활 중, 강진읍 동문 밖에서 8년 간 머물다 이곳 만덕리 귤동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가 여기서 완성되었으며, 그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세 권의 책이 매우 유명하며, 선생의 애국애민사상이 스며있는 책이다. 당시 다산이 기거했던 집은 오랜 세월에 낡고 쓰러져 지금은 다시 세운 동암, 서암이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서있다. 현재 다산이 남긴 유적으로는 초당 앞마당에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다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약천이 있으며, 초당으로 이주 후 바닷가의 돌을 모아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과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새긴 정석바위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다산이 자주 들렀다는 백련사를 가기 위하여 초당의 왼편으로 가면 넓은 들과 바다가 펼쳐지고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된 둘째형 약전과 가족들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던 천일각이 나온다.   (3) 백련사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렸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렸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 스님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의 도움이 컸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 들어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4) 아산 봉곡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887년(진성여왕 1)에 도선이 석가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에 지눌이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석암이라 바꾸었다고 전해지지만 지눌의 활동 연대와 맞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1419년(세종 1)에 함허가 중창하였으며, 산 이름을 봉수산이라 하였다.   1584년(선조 17) 3월 화암이 중수하여 봉서암으로 고쳐 불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사되었다. 그 뒤 1646년(인조 24)에 중창하였으며, 1794년(정조 18) 경헌과 각준이 중수하고 지금의 이름인 봉곡사로 고쳤다. 1825년(순조 25)에는 요사를 중수하고 2층 누각을 신축하였으며, 1872년(고종 9) 서봉이 요사를 증축하였다. 1891년 다시 서봉이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931년에도 한 차례 중수하였다.  현재 대웅전, 향각전, 삼성각, 요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그 옆에 있는 고방(庫房)이 함께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23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 지장탱화는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5) 외암리 참판댁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19세기 말에 지은 집으로 추정되며 한말 규장각의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이정렬(李貞烈)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이라고 전해진다. 민속마을인 외암리 동쪽에 있으며 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남향한 큰집과 서남향한 작은집으로 나누어져 있다.   큰집은 ‘ㅁ’자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10칸의 ‘ㄱ’자 집으로 1고주(高柱) 5량(樑)의 납도리집이다. 2칸짜리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부엌, 안방, 윗방, 골방이 차례로 놓였고, 오른쪽으로는 건넌방, 작은 부엌, 머릿방이 있다. 사랑채는 5칸 일자(一字)집으로 왼쪽에서부터 작은사랑방, 대청, 큰사랑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고주 5량의 납도리집에 우진각지붕이다. 대문채는 일자형의 8칸 후퇴집으로 중앙에 솟을대문이 있고 헛간과 구들로 이루어졌다.   작은집은 앞에 문간채, 뒤쪽에 안채와 사랑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며 큰집의 동쪽에 있다. 문간채는 일자 맞걸이 4칸 초가지붕이고, 곳간채는 안채 동쪽에 거리를 띄워 세로로 배치한 일자 맞걸이 3량의 우진각지붕집이다. 안채는 6칸 ‘ㄱ’자형 후퇴집으로 앞에서부터 부엌, 안방, 사잇방, 윗방, 건넌방이 있다. 1고주 5량인데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에 덤벙주초를 두고 네모기둥을 세운 합각지붕이다. 사랑채는 7칸 ‘ㄱ’자형인데 1고주 4량가로 초가지붕이다.   이 집의 평면 구성은 대체로 대청이 안방 구들에서 꺾여져 놓이는 중부방식을 따랐지만 작은집 사랑채는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된 남도식이다. 집안의 살림살이 가구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큰집은 집을 둘러싸는 돌담으로 공간을 구획하였다.
  (6) 임고서원: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21필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중건, 사액되었다. 인조 21년(1643) 여헌 장현광 선생을 배향하고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 선생을 추향하였으나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 보수․정화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 현 임고면 우항동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관대사성,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국교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난 동방이학의 시조로 추앙되었고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 4년(1392)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무 등에게 피살되었다. 조선 태종 원년(1401)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7) 은해사괘불탱(보물 제1270호):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거대한 화면에 불을 단독으로 그린 독존 형식의 그림으로 자칫 단조로워지기 쉬운 화면을 좌우로 대칭되게 적당히 분배하여 연꽃이 활짝 피어난 연못으로부터 천상 세계로의 상승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화면 중앙부 양쪽의 단화배치와 상단좌우에 배치된 극락조와 천개장식(天蓋裝飾)은 불세계의 평화스러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불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꾸밈 내용이다. 녹색머리 광배에 붉은색의 대의(大衣)를 입고 있는 불상은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굽어보는 듯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뾰족한 육계의 정상에는 붉은색의 머리구슬이 장식되어 있다. 어깨선 또한 둥글게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원만한 상을 보여주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는 좌우에 배치된 단화(丹花)와 함께 천개에 장식된 구슬장식, 금박을 사용한 금란가사로 인해 더욱 증가되고 있다. 비교적 커다란 화면임에도 비단을 사용함으로써 필치가 매우 정밀하면서도 세련되어 있어 활기에 차있다. 황토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이 위주이나 법의와 연꽃, 모란, 천개 등 대부분이 붉은색으로 처리되어 전반적으로 붉은 색조가 매우 강하다. 피부 빛깔인 육색(肉色)은 호분을 많이 사용하여 화사하나 옅은 분홍빛에 가까워 청색 머리에 녹색 머리광배, 붉은색의 대의와 아주 잘 어우러진다. 상징적인 화면 구성과 원만한 형태, 유려한 필선, 적절한 색의 조화 등이 매우 돋보이는 18세기 불화 중 걸작으로 꼽힌다.
  (8) 상당산성(사적 제212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km나 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신라의 서원소경이 청주지 역에 설치되었는데,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세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바, 이때 쌓여진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현재의 성벽은 임진왜란(1592)때 수축되고, 숙종(1674~1720, 재위)때 대대적인 개축이 되었으며, 그 후 계속 수축된 것이 성문 무사석의 명문에 밝혀져 있다. 이 성은 남문과 동․서문을 비롯하여 동북과 서남에 암문이 있으며, 치성 3개가 있다. 성내에는 5개의 연못, 3개의 사찰을 비롯하여 각종의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다. 현재 한옥마을자리는 옛 지도에는 초옥의 민가가 있던 곳이며, 저수지는 본디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만든 것이다. 남문 밖에서 사량부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나오기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으로서 국방의 요충이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9) 양성산성   높이 해발350m 백제시대에는 일모산(一牟山), 신라시대에 연산(燕山)으로 불리우다 후에 양승산(養僧山), 양성산(壤城山), 양성산(養性山)으로 불리운다. 많은 역사와 전설이 깃든 청원군의 명산(名山)으로 자연 경관이 빼어나 관광 명소로 각광 받고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자비왕 17년(474)에 축성된 것으로 당시 일모산성(一牟山城)이 있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시대 화랑도 출신의 화은대사(和隱大師)가 양성산을 보고 “저것은 중이 발(鉢)을 들고 시주를 구하는 형세라 하며 양승지(養僧地)로 흠잡을 데가 없구나!” 하며 승병 300명을 제자로 삼아 불경과 무예를 익혔고 숲속에서 300명의 승병이 움직이고 소리를 질러도 밖에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고요한 산이었다고 하며 후에 화은대사와 승병들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일조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승병을 길렀던 곳이라 양승산(養僧山)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화은대사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을 ‘대지(大池)’라 하여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마을 유래지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초기의 일륜선사가 부처님의 도장을 세울 만한 명당을 찾던 중 서원의 남쪽을 지나다 일모산(현 양성산)에 올라 대청호 쪽을 바라보니 들녘에는 따뜻하고 명랑한 기운이 감돌고, 산야에는 발발(勃發)한 정기와 온후한 덕망이 안개와 무지개처럼 피어나 제자에게 말하기를 “사방의 정기는 명명하다. 장차 문(文)과 의(義)가 크게 일어나 숭상될 것이다. 육로와 수로가 사통팔달했으니 부락과 인물이 번성하리라. 그러나 어이하랴. 향후 천년 뒤의 운세가 물밑에 잠겼음을. 그때 이르러 새 터전을 마련케 되리라.”라고 예언을 남겨, 면의 명칭이 문의(文義)라 하였으며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오늘날 문의면의 중심지가 대청호에 수몰되고 새로운 소재지가 형성되었으니 천년 전의 예언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한편 양성산을 오르는 진입 부분이 예로부터 불당골이라 불린 것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또한 본산은 도읍이 앉을 자리라 하였으며 산신제, 기우제, 사직단 등, 제를 지내던 장소로 문의읍지에 전해오고 있으며 숭상의 대상으로 신성시 하는 곳이다. 2002년 8월 16일 충청북도 기념물 12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10) 경주불국사경내(사적 및 명승 제1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토함산 서남록에 자리잡은 이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 (751)에 당시 재상 김대성에 의해 기공되고 혜공왕 10년(774)에 이르러 80여 동의 목조 건물이 들어선 대가람으로 완성되어 신라 호국불교의 도량으로서 법등을 이어왔다. 조선 선조 26년(1593) 왜병의 침입 방화로 650여 년간 내려오던 불국사의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의 건물이 다시 세워져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불국사가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승되고 나라를 사랑하는 호국정신을 기르는 도량으로서의 옛 모습을 되찾게 하고자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쳐 창건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 조사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움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교, 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교․칠보교가 국보로 보존되어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이용한 예술품의 훌륭한 솜씨를 역력히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등을 비롯한 수다한 문화 유산들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 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11)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한국의 석탑 중에는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모양을 지닌 것이 몇 개 있는데, 이 탑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이만큼 기발한 의장으로 이루어진 탑은 없다. 불국사대웅전 앞에 서쪽 석가탑과 대조를 이루어 동쪽에 자리한 탑으로, 감은사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를 보여준다. 기단부는 4방에 보계를 마련하였는데, 보계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그 위는 네 모서리와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을 받치고 있다.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서리에 석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4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 돌기둥을 돌려 팔각연화석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 위에는 8개의 기둥머리 모양의 받침이 있어 8각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8각의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의 구조는 완전히 의표에서 벗어난 참신한 착상으로 이루어져서 전무후무한 걸작을 남겼고, 조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건축을 보는 듯 우려하며, 복잡한 아래위의 가교가 중심에 통일되어 한 점의 문란함도 없다. 이 탑을 다보탑이라고 하는 것은,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와 나란히 앉아 석가의 설법을 증명하는 상으로 해석되는데, 동양의 불교 국가에서 석조로서는 가장 뛰어나고 오랜 작품이다. 이 탑은 서쪽의 삼층석탑과 함께 신라 경덕왕 때의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1925년에 수리를 한 바 있다.


기행문

제100차 역사 문화 기행을 다녀오며
김병구

  흔히 ‘10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하나의 완성과 채움을 뜻하는 숫자일 것이다. 또한 그 채움과 완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비움의 숫자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과연 이번 100차 기행을 통하여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비우고 돌아올 수 있을지 자못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나선 길이었다.

  첫째 날, 대구에서 해남으로
  올 여름 계속되는 찜통더위에 하루 이틀쯤 시원하기라도 하면 하느님, 부처님 체면이라도 깎이시는지 오늘도 여전히 아침부터 덥다. 대구에서 해남땅 끝까진 워낙 먼 길이라 평소 기행 때보다 좀 더 일찍 출발하였다. 그러나 버스에 타자마자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토해 놓으며 우리 일행의 더위에 지친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천국이 바로 여기였던가? 참으로 과학의 힘, 인간의 능력이 대견할 뿐이다. 원장님의 인사말과 구름쌤의(여기서 구름쌤은 우리의 문화 해설사님) 전체적인 기행 일정 설명에 이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같은 참가자인 김외준 선생님의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한 즉석 강의가 있었다. 3%의 의식을 이용한 97% 무의식 활용 방법,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통한 효과 등에 관하여 구체적이고 쉽게 강의를 잘해 주셨다. 시각 장애를 가지신 분으로 저 정도 강의를 할 수 있다면 아마 독서량이 엄청나실 텐데 과연 사람의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정작 학생들보다 내가 더 공부가 된 듯하다.
  더위도 내려놓고 마음의 양식을 쌓는 사이에도 버스는 달리고 달려 해남 미황사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 때다. 금강산도 식후경일지니!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절밥을 먹어 보니 무수한 고승 대덕들이 득도함은 이 정갈한 음식에 기인함이 크지 않을까도 싶다. 식사 후 미황사 대웅 보전 주춧돌에 새겨진 거북이와 게도 살펴보며 경내도 돌아본 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동행한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버스 유리창을 깨뜨려 놓았다. 자동차 안전 유리의 특성상 동글동글하게 금이 간 모습이 조형상 아름답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지만 문제는 내가 앉은 좌석이 그 깨진 유리창 바로 옆이라는 것이다. 테이프로 대충 붙이기는 하였지만 약간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땅끝마을로 향하였다.
  개인적으로 해남 땅끝마을은 처음 와 보는 곳이었기에 기대가 컸던 만큼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반도 최남단의 전경은 마치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맑고 투명한 바닷물과 점점이 떠 있는 섬, 섬, 섬! 말 그대로 절경 그 자체였다. 좋은 이들과 함께, 이 시간에, 이곳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향유하는 나는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오후 4시경 한창 더울 때 대죽마을에 도착하여 갯벌 체험에 들어갔다. 마침 그 시간이 썰물 시각이라 대죽마을 건너편에 있는 ‘노루목’이라는 섬과 마을이 바닷길로 연결이 되어 마치 홍해의 기적을 보는 듯하여 참으로 경이로웠다. 갯벌에서 우리 일행이 채취한 꼬막들을 모아서 소중하게 보관한 후, 해남 읍내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깜깜해서야 가학산 휴양림 숙소에 도착하였다. 역사 문화 기행이 100차에 이르기까지 수고한 고마운 분들께 감사의 인사와 표창, 그리고 우리 참가자들의 숨어 있는 재주 자랑에 이은 자축 파티로 기행 첫날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7080세대들끼리 막걸리와 함께 여름밤은 깊어만 갔다. 바로 이때 소중히 보관했던 꼬막이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는데 간도 맞추지 않고 양념도 하지 않은 그 조개가 그리 맛있을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벌레도 지네도 벌의 공격과 원숭이의 괴성도 우리들의 흥취와 꿀잠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둘째 날,  해남에서 대구로
  숙소에서 아침 식사 후 출발할 무렵 갑자기 일행 중에서 한 분의 응급 환자가 발생하였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가 워낙 산중이라 다른 차편이 없어 버스에 환자를 태우고 병원에 다녀오느라 10시 무렵에야 출발할 수가 있었다. 오전 짧은 시간에 강진 무위사와 김영랑 생가를 돌아보는 순간에도 병원에 가신 분이 걱정이었다.
  점심 식사 후 2시경 빗방울이 약간씩 뿌리는 가운데 강진 백련사에 도착했다. 만경루에 올라 루 앞을 내다보니 강진만의 고요함과 만덕산의 산세가 어우러져 이 세상의 어느 화가도 그려내지 못한 아름다운 산수화가 한 폭 펼쳐져 있다. 넓은 대청마루엔 대나무 채반에 떡차를 말리고 있었는데 은은한 향기가 우리의 머리를 맑게 해준다.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은은한 차향과 산사가 주는 편안함에 취하여 잠시 마룻바닥에 누워 마음의 평화로움을 만끽하였다.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효령대군이 만년에 이곳에 머물면서 이런 여유로움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의 여유를 뒤로하고 조금씩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산 초당을 향하여 산길로 들어섰다. 시력이 좋은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일행 중에는 시각장애인이 많은 관계로 산길을 걷는 걸음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봉사자도 안내하기가 쉽지 않은 길이다. 경사길이라면 요철이 적게, 계단길이라면 수평을 잘 맞추어 길을 만들어 준다면 시각장애인도 좀 더 수월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동백나무 숲이며 차밭이며 만덕산의 경치가 참 수려하다. 다산 선생이 유배의 고통 속에서도 그 학문을 이루는데 만덕산의 아름다움이 일조하였을 성싶다. 다산 초당에서 녹차 한 잔 마시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산을 내려오니 비도 그치고 아침에 병원에 가셨던 일행분도 돌아오셨는데, 다시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다. 아침부터 종일 환자 곁에서 김창연 선생이 수고가 많았다.
  가지산 보림사! 참 큰 절이다. 국보인 삼층 석탑과 석등, 철비로자나불,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부도, 옛 선인들은 저 돌이나 쇠붙이들을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 주무르는 재주가 있었나보다. 그 솜씨에 그저 감탄의 말밖엔! 여기서 한 가지, 내가 생각해도 참 다행인 것은 구름쌤의 해설 가운데 알아듣는 단어가 더러 있다는 것이다. 역사 문화 기행에 자주 따라다니다 보니 얻어 들은 풍월의 효과? 좀 더 머물고 싶지만 돌아갈 길이 머니 오후 5시쯤에 대구를 향해 출발하였다. 돌아오는 차 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 문화 퀴즈와 ‘해남강진’을 시제로 한 사행시로 현장 학습에 대한 복습과 더불어 굳어 있는 머릿속 알고 있는 단어를 총동원하며 이번 기행을 마무리하였다.
  여러 봉사자님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이번 기행도 무사히 마칠 수 있어 참으로 감사드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 준비와 마무리 하느라 애쓴 간사님에게도 감사하다.
  이번 기행동안 자연에 대한 경외심, 주어진 내 삶에 대한 감사함과 이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과 배려, 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가슴 가득 채워 왔으니 내 마음에 머물고 있던 욕심이나 집착, 불평 원망 등의 어리석은 생각들이 그만큼 많이 비워졌으리라 믿어 본다. 이만하면 ‘100’이라는 숫자의 의미에 걸맞는 기행이었으리라.

신의 물방울, 와인의 향기를 따라서
강구연

  이번 역사 문화 기행에서 간 곳은 영천이다. 포도로 유명한 영천에서 와인을 만들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부터 한 번 가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되어서 문화원 식구들과 함께 다녀왔다.
  처음 방문한 곳은 와인 박물관이었다. 거대한 오크 통 안의 아기자기한 박물관이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처음에 외관을 보았을 때는 생각보다 작아서 고개를 갸웃했었는데 지하에 와인 저장고와 다른 것들이 있어서 공간을 잘 활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 저장고 안에 들어가기 전에 와인 잔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와인 잔은 모양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스파클링 와인(샴페인)이나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에 따라 와인 잔을 다르게 쓰는데, 스파클링 와인은 길고 날씬한 잔을 쓰고 화이트 와인은 향을 음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입구가 좁은 잔을, 레드 와인은 볼 부분이 다른 와인 잔들보다 더 불룩한 잔을 쓴다고 한다. 그렇게 와인 잔에 대한 설명을 다 들은 후 드디어 와인 저장고로 들어갈 순서였다. 와인 만들기 체험도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와인 저장고도 많이 기대를 하고 있었던 터라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와인 저장고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약간 서늘한 저장고 안에 들어가자 알코올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풍겨왔다. 와인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며 여러 가지 와인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영천의 와인 전문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의 와인도 전시되어 있었다. 솔직히 ‘와인’ 하면 프랑스에서 만드는 와인 종류밖에 안 떠오르는데 우리나라의 와인 사업도 이만큼 발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뿌듯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까치락골 와이너리’라고 하는 곳이었다. 순우리말인 ‘까치락골’과 ‘와이너리’의 만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것 같았다. 와인을 만들 포도를 따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심이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 번 느꼈다. 바구니 가득 수북하게 얹어 주시는 주인 아주머니의 인심에서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와인 만들기 시간. 와인을 만들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포도를 따서 주물럭거리는 동안 꼭 젤리 속에 손을 넣고 손가락을 꾸물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와인을 다 만들고 나서 정리할 동안의 막간을 이용해 게임을 했는데, 포도 껍질 멀리 뱉기였다. 생각보다 조금 어려웠지만 그래도 간단히 할 수 있는 게임이고 무엇보다 시각 장애인 분들도 할 수 있는 게임이라 좋았다. 그렇게 재미있게 체험을 끝낸 후 점심을 먹었다. 역시 꿀맛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손수 만든 와인과 포도 주스 시음을 했는데 정말 맛있었다. 아직 와인의 맛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와인인 것 같았다. 포도 주스는 마시고 나니 입술과 혀가 푸른 보라색으로 변해서 꼭 멍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이걸로 염색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천에서 와인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었지만 구체적인 것까지는 잘 몰랐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예전부터 와인에 관심이 조금은 있었는데 이 기행을 다녀온 뒤로 더 많이 관심이 가게 될 것 같다. 내가 만든 와인도 꼭 맛있는 와인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더 많이 관심을 가져주고 보살펴 주면 더 맛있어지겠지. 이러다 나 와인 애호가가 되는 거 아닌 가 몰라. 나중에 와인의 역사나 종류에 대해서도 더 알아봐야겠다. 프랑스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기면 꼭 와인의 고장을 들러 봐야지. 이번 기행도 많은 것을 얻고 느끼고 경험한 기행이었다. 문화원을 알게 된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는 날이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해남 강진

조경호
  해: 해설을 재미나게 해 주시는 이 선생님,
  남: 남다른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자원 봉사자 여러분
  강: 강진을 다녀온 100차 역사 문화 기행은
  진: 진정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이채빈
  해: 해맑은 웃음이 모여
  남: 남해바다 해질녘에 쫘악 퍼지더니
  강: 강낭콩 빛깔로
  진: 진하게 솟아나 역사 문화 기행 100회를 축하해 주는구나

홍미라
  해: 해수욕하고픈 날씨지만
  남: 남자아들 둘 델꼬 땅끝마을에 왔다
  강: 강한 기운 돋는 큰아들 사고나 치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진: 진한 여운 이대로 간직한 채 더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송주훈
  해: 해마다 매월 떠나는 역사 문화 기행이지만 올해 8월은 100회째 되는 뜻 깊은 문화 캠프였다
  남: 남도의 끝 땅끝마을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많은 아름다운 섬들, 그리고 갯벌체험
  강: 강한 햇살 속 무더위와 갑작스런 소나기를 맞으며 걸은 다산 초당 길
  진: 진짜 땀도 많이 흘렸지만 정말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 한 장이었다

조해정
  해: 해를 거듭하면서 마중물과 거듭물의 매듭이 제법 튼튼하여
  남: 남사당 한 패거리는 됨 직하다
  강: 강을 휘몰아 땀찬 산을 오르는 길 위에
  진: 진주알 한 백 개쯤 주렁주렁 엮어 신명나게 춤이나 한번 추어 볼거나

시제: 충남 아산

이재민
  충: 충분히 먹고 마시면
  남: 남녀를 불문하고
  아: 아무리 운동을 해도
  산: 산처럼 늘어나는 뱃살을 감당할 수 없는 법

김강신
  충: 충무공 이순신이
  남: 남쪽바다를 왜구로부터 지키니
  아: 아름답고 깨끗한
  산: 산야도 보전 되었네

김성희
  충: 충남 지방에 집중 호우 내린다기에
  남: 남몰래 걱정하며 잠 못 잤는데
  아: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화창히 개어
  산: 산소 풍부한 솔숲 길 걸으며 오장육부까지 청소하고 돌아갑니다.

시제: 영천 임고

김성희
  영: 영천 까치락골에 와서 포도도 신나게 따서
  천: 천상천하 가장 맛있는 와인을 만들고
  임: 임고서원에서 정몽주의 효를 배우고
  고: 고심하고 망설이던 끝에 온 여행인데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 갑니다.

박영숙
  영: 영천 와이너리에서 포도 따고 주물러서 담근 포도주
  천: 천하 일품의 맛이 될 레드와인
  임: 임자, 제대로 만나서 즐거워하는 것 볼 때까지
  고: 고스란히 보관해 둬야지

이정헌
  영: 영혼이 맑고
  천: 천성이 착한
  임: 임을 만나 사니
  고: 고마움 형용할 길 없습니다.

장설희
  영: 영천 포도밭에 와서
  천: 천천히 물 좋은 포도를 골라
  임: 임고의 시간을 거쳐
  고: 고생 끝에 좋은 와인을 얻었네, 캬!

방성원
  영: 영천의 맛난 포도 먹었네
  천: 천 년이 지나도 질리지 않을 그 맛
  임: 임마
  고: 고만 무라!

김병구
  영: 영천 기행길 편안한 마음으로 나섰는데
  천: 천만 뜻밖에도 해설사가 불참했다며
  임: 임시로 역사 문화 퀴즈를 진행하라고 하니
  고: 고민 고민하느라 점심에 마신 와인 맛을 잊었노라

시제: 상당 문의

김병구
  상: 상당 기간 권력자들의 전유물이던 청남대가
  당: 당연히 국민의 손에 돌아왔다면
  문: 문 앞에서 받는 입장료는
  의: 의당 받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제: 울주불국

조해정
  울: 울며 불며 지나온 날들
  주: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세월
  불: 불씨 하나 가슴에 품고 살아왔으니
  국: 국화처럼 향기 발하며 살렵니다.

이채빈
  울: 울산은 공업도시인 줄만 알았습니다.
  주: 주술적인 의미를 담은 반구대 암각화도 있었고
  불: 불국사의 겨울 모습을 처음 보면서 제가 좋아하는 다보탑을 다시 보니
  국: 국화처럼 굳건한 기개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다시 한 번 더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

엄연욱(25세, 남, 뇌성마비 1급)

  대구에서 1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난 나는 분만 시 사고로 뇌성 마비 1급의 장애를 갖게 되었다. 해산이 임박했을 무렵, 병원에서 태아의 머리가 비교적 큰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제왕 절개 수술로 분만을 하기로 하고 수술 날짜를 예약해 두었으나, 수술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예약해 둔 병원으로 가지 못하고 집에서 가까운 산부인과에서 나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황급히 입원한 병원에는 마침 의사가 출타 중이어서 제왕 절개 수술을 하지 못하고,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가며 유도 분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분만 촉진제를 맞고 유도 분만을 시도했지만 머리가 비교적 크게 자라 있었기에 분만은 여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랜 진통 끝에 가까스로 분만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난산으로 머리를 억지로 잡아당긴 탓에 뇌가 눌려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태어난 아기는 반주검 상태로 있다가 대학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야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난산으로 죽을 뻔한 목숨이 살아났다는 기쁨에 아기가 어느 정도 회복하자 바로 퇴원해 버렸다고 한다. 세 살이 되어서야 내가 걸음이 늦고 말을 잘 못하는 것을 아신 부모님이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본 결과 장애를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다리가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보행에 큰 지장은 없으나 두 손은 장애가 심한 편이다. 왼손은 거의 굳어 있는 편이고, 오른손도 장애가 심해서 글씨도 제대로 쓰기 힘들고 옷을 입을 때 단추를 끼우기도 힘들며 젓가락질을 하기도 어렵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는 주로 오른손가락 몇 개를 이용하여 키보드를 두드리고 왼손으로는 시프트나 컨트롤 키를 잠시 누르는 정도로만 사용하고 있다. 뇌성 마비 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보조 기구들이 보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그냥 불편한 대로 오른손가락 몇 개를 사용하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언어 장애도 심해서 남과의 대화에 힘이 많이 든다.
  네 살이 되던 봄, 장애인 종합 복지관의 물리 치료실이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일주일에 세 번씩 나를 데리고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러다가 그 해 겨울 어머니가 슈퍼마켓 운영을 시작하면서 복지관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기가 어려워지자 나는 더는 물리 치료를 못 받게 되었다.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슈퍼마켓은 공장 지대에 위치해 있었는데, 동네 꼬마들이 과자를 사 먹기 위해 많이 들락거리곤 했다. 나는 슈퍼마켓에 군것질거리를 사러 오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아이들은 내가 장애자라고 놀리거나 따돌리지도 않았고, 나 역시 말이 어눌하고 두 팔이 부자유스러웠지만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어울렸다. 다만 다른 아이들처럼 담장을 기어오르는 등의 다소 위험한 놀이는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술래잡기 놀이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내가 술래에게 잡히더라도 나를 술래로 세우지는 않았다. 술래에게 잡혔을 때 나도 술래를 하겠다고 강하게 요구하는 경우에는 나를 술래로 세웠지만 내가 강하게 요구하지 않을 때는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술래에게 잡히더라도 술래가 되지 않는 소위 ‘군고구마’로 취급했던 것이다. 원치 않는 ‘군고구마’가 되어 아이들의 술래 놀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조금씩 나의 장애를 알아 갔지만 그래도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깡통차기나 딱지치기, 병정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아이들과 어울려 슬라이딩 놀이를 하면서 놀았는데,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옷을 몽땅 적시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내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마음껏 노는 모습이 너무나 흐뭇해 옷이야 좀 버리더라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일곱 살이 되자 어머니는 나를 교회에서 운영하는 선교원에 입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선교원에서는 나의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불허했다. 나는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다시 1년을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며 보내야만 했다.
  여덟 살이 되어 취학 통지서가 날아오자 어머니는 처음에는 일반 학교에 나를 입학시키려 했으나 학교 측에서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특수 학급에 배정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일반 학교 내의 특수 학급은 교육 여건이 좋지 않았고, 일반 학급에 비해 진도가 늦고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비록 두 손이 불편하고 언어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지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비장애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더라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장애인은 특수 학급에 배치해버리는 일반 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망치기보다는 특수 학교에 입학시켜서 장애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를 받을 수 있고, 학업 진도도 비장애 학생과 마찬가지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어머니는 나를 특수 학교에 나를 입학시켰다.
  내가 다니던 특수 학교에는 기숙사가 없었기 때문에 스쿨 버스나 시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 했는데, 어머니가 슈퍼마켓을 운영하시다 보니 나를 매일 통학시킬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나의 등하교와 학교 생활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하셔야만 했다. 대다수 중증 장애 학생들의 부모는 자녀를 등하교시키는 것만도 힘에 겨운데, 특수 학교에서는 점심 식사 보조, 교실 청소 등 장애 학생들의 학교 생활과 관련된 많은 일을 부모들에게 부담시켰다. 지금은 활동 보조인이 있어서 장애 학생의 등하교를 이들이 도와주고 있고, 특수 학교에는 많은 보조 교사가 배치되어 있어서 학교 내에서의 학생들의 활동을 보조하고 있지만 내가 초등 학교에 입학하던 때만 해도 부모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는 장애 학생에게 도우미를 붙여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특수 학교에 입학한 나는 초등 학교 시절 내내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내가 소속된 학급에는 나와 다른 한 친구를 제외하면 대다수 학생들이 제대로 걷지 못하여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보행에 별로 불편함이 없었던 그 친구는 나에 비해 덩치가 상당히 큰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가 걸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를 경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큰 덩치를 이용해서 나의 물건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다른 학생들이 나와 함께 놀지 못하도록 선동하기도 하였다. 내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놀고 있으면 그 녀석은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과만 놀라고 하고 나와는 놀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 녀석의 덩치 앞에서 크게 대항하지도 못했고, 아이들이 놀아 주지 않고 따돌릴 때마다 참 많이 울었다. 학교 생활이 힘들 때마다 어머니에게 나의 외로움과 반 친구들의 따돌림에 대해서 하소연을 했지만 선생님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고자질을 했다고 보복이라도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선생님에게는 이런 사실들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아픔을 삭여야만 했다.
  4학년 때부터는 나도 용기가 생겨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규합하여 그 녀석에게 대항해 보기도 하였지만 아무래도 나와 친하게 지내는 학생들 역시 나처럼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으므로 나의 반항이나 단결 노력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그 녀석이 나보다 공부가 많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위안 삼으며 따돌림을 견디고 있었다.
  학교 생활에 별로 재미가 없었던 나는 방과 후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서 큰 만족을 얻었다. 동네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나와 스스럼없이 놀아 주었고, 오랫동안 거리낌 없이 대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학교 생활에서의 외로움과 힘겨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네 친구들과의 이런 관계는 5학년 때 이사를 가면서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가 좀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하셨던 까닭에 우리는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해야만 했고, 새로운 동네에는 내가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또다시 외롭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초등 학교 5학년 때 나는 이사 간 동네에서 태권도 학원에 다녔는데, 두 팔은 불편했지만 다리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던 나는 다른 비장애 친구들과 어울려 열심히 발차기와 자세 연습을 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한 달 만에 승급 시험을 거쳐 색깔이 다른 띠를 허리에 두를 수 있었던 데 비해 나는 비장애 친구들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되는 시간이 걸려 다른 색깔의 띠를 두를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닌 학원에서는 내가 다른 비장애 친구들과 똑같이 진도를 잘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받았지만 승급 시험 때만 되면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다. 학원측에서는 내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학원의 수업을 잘 따라가고 있고 승급 시험도 통과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승급을 허락하고 친구들과 같은 색의 띠를 매어 주려 했지만 태권도 협회의 규정이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다른 아이들이 1개월이면 통과하는 급을 나는 2개월이나 교육을 받고서야 통과할 수 있었고, 다른 친구들이 2개월에 통과하는 급수는 4개월 만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비장애 친구들은 모두 검은 띠를 받고 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지만 나는 결국 검은 띠를 받지 못하고 붉은 띠를 두른 채 학원을 수료해야만 했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접한 사회의 차별은 나를 무척 화나게 했고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학교 내에서의 외롭고 힘든 시간들은 중학교 2학년 때 인근의 일반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봉사 활동을 왔던, 비장애 학생들을 친구로 사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 중고등 학교 학생들의 봉사 활동이 생활 기록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비장애 학생들이 특수 학교에 찾아와 봉사 활동을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우리 학교에도 인근의 일반 학교에서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1998년 8월 29일 담임 선생님은 봉사 활동을 위해 우리 학교를 찾아온 일반 학생 한 명을 말벗이라도 되어 주라면서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학생은 인근의 여자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두 세 번 학교에 찾아와 우리들을 도와주면서 친구가 되었다. 그 여학생은 착하고 예뻤기 때문에 우리 반 아이들은 다들 그 여학생을 좋아했고 나 역시 그 여학생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그 여학생이 내가 좋은 학생이라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자기 친구에게 나에 대해서 좋게 말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나는 그 여학생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자주 만났고, 나는 나의 학교 생활의 힘겨움과 장래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그 여학생과 친해졌다. 그때까지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친구는 그 여학생이 처음이었다. 학교 친구들은 나와 별로 놀지도 않았고, 동네 친구들은 그저 놀기에만 바빴을 뿐 어린 나의 외로움과 고민들, 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는 되지 못했는데, 그 여학생은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나는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달픈 학교 생활의 외로움과 힘겨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친구가 그 여학생을 좋아한다는 말을 내게 전했고, 어렸던 탓에 남녀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그 여학생에게 내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나처럼 나의 친구도 그 여학생과 친한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그 친구에게 잘해 보라고 했고 둘이 친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밀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태도가 그  여학생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내 친구가 그 여학생을 괴롭히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나의 사려 깊지 못했던 행동과 내 친구의 괴롭힘으로 인해 그 여학생은 결국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고, 연락마저 두절되어 우리들의 관계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고 말았다.
  그 여학생과의 아름답고도 아쉬웠던 만남과 슬픈 이별에 아파하던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당시 유행하던 PC 통신에 빠져 많은 사람들을 사귀게 되었다. PC 통신을 하면서 나는 사람을 사귀는 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이란 부모님과 특수 학교 선생님, 그리고 사이가 좋지 않은 우리 반 친구들이 전부였는데, PC 통신을 통해 비록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었지만 전국 방방곡곡의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대인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들과 사람과 사람이 인격적 관계를 맺어 나가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야하는 것 등등에 관하여 알게 되었고, 그 후 나의 대인관계는 폭넓게 변할 수 있었다.
  고등 학교 시절에는 인터넷을 통해 문학회와 같은 여러 동호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면서 글을 쓰고 싶은 꿈을 키울 수 있었다. 비록 글 쓰는 재주가 없기는 했지만 글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또 다른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았다.
  특히 고등 학교 시절에는 중도장애를 입고 일반 중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입학하거나 전학을 오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근육 장애로 인해 우리 학교에 입학하게 된 친구와 정말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와 나는 과외 공부도 함께 하고, 장기도 같이 두고, 늘 같이 붙어 다니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청소년기의 우정을 쌓아 갔다. 사춘기의 반항심과 호기심으로 인근 학교의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려 호프집에 다니기도 했지만 엄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맥주는 별로 마시지 못했고 콜라를 마시면서 비장애 학생들과의 호기심어린 만남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근육 장애 친구와 함께 인근의 종합 사회 복지관에서 장애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운영하는 입시 지도반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우리의 공부를 지도하러 오시는 자원 봉사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회와 대학 생활 등을 알게 되었고, 대학 진학과 그 후의 삶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복지관에서의 수업은 절반 정도는 공부를 했지만 절반 정도는 이야기를 나누고 노는 시간이었다.
  사회 복지관 등에서 장애학생이나 저소득 청소년을 위한 방과후 과외 수업을 많이 진행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지도를 자원 봉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보통의 비장애 학생들이 학원을 다니면서 부족한 학교 공부를 보충하는 것에 비한다면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저소득 계층 청소년들이나 장애 학생의 경우, 가정에서의 학습 환경이나 학교에서의 교육 여건이 부족하기 때문이 비장애 학생들보다 과외 학습에 대한 요구와 필요성이 훨씬 많고 다양한 데, 오히려 저소득 계층 청소년을 위한 방과후 학습 지도 프로그램이나 장애 학생의 방과후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은 장애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서나 교육의 형평성 문제에서나 많은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할 것이다.
  고등 학교 2학년 말부터 나는 인터넷 방송을 듣다가 알게 된 부산의 어느 비장애인이 운영하고 있던 인터넷방송국에서 작가와 매니저 일을 맡아 활동하면서 새로운 경험과 대인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당시 윈앰프라고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윈엠프를 활용하여 가정에서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거나 인터넷 방송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거나 방송 운영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는데, 나 역시 노래를 함께 들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 방송에서 작가와 매니저 역할을 맡아 보았던 것이다. 그 방송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MT도 함께 가면서 친분을 쌓았는데, ‘특수 학교’라고 하는 좁은 세계에서 생활하는 나에게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좋은 계기였다. 글을 잘 쓰지는 못했지만 작가의 일을 맡아 하면서 작문 실력도 쌓을 수 있었고, 시인의 꿈을 키우기도 하였다.
  고등 학교 3학년 때는 전교 학생 회장을 맡아 후배들과 함께 학생들의 자치를 위해 노력했는데, 어린 후배들이 나의 리더십에 잘 따라주어 학교 축제를 훌륭하게 개최하는 등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학교 축제는 봄부터 겨울까지 거의 1년을 준비하고는 단 하루 행사로 막을 내려야 하는 아쉬움 많은 행사였지만 나는 다른 학생회 임원들과 뜻을 모아 축제를 준비하고 이를 무사히 치러 냄으로써 평소 선후배들 사이의 교류가 부족했던 학생들에게는 선후배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나 자신에게는 오랜 학교 생활 동안 외롭고 힘겨웠던 아픔들을 씻어 내며 고등 학교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3학년 때는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욕심이 많으셔서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야간 자습을 시키기도 했다. 비록 일반 학교 학생들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에 매진하는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지만 우리들은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1시간씩 문제 풀이 시간을 가졌고, 방과후에는 저녁 7시까지 자습을 하기도 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매주 모의 고사 문제를 풀리고, 후원받은 여러 권의 문제집을 풀리면서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힘써 주었다.
  수능 시험을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와 가장 가까웠던 근육 장애 친구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등 학교 시절 나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나와 함께 서로의 아픔과 꿈을 나누던 친구가 하늘 나라로 가자 한동안 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인생의 물음에 잠기면서 우울하고 슬픈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고등 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생활 훈련이나 운동 연습에 치중하느라 교과목에 대해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른 특수 학교와는 달리 우리 학교에서는 비장애 학생들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학생 전체의 학습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수업 진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의 경우에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특수 학교가 장애 학생 개개인의 장애 정도에 따른 개별화 교육이 이루어지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그래도 학습 역량이 부족한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정해진 틀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학교 교육은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 중에는 졸업할 때까지 한글을 제대로 깨치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학교 규정에 따라 학년만 계속 올라갔기 때문에 12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결국은 한글을 제대로 깨치지 못한 상태로 졸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그 친구처럼 학습 진도가 느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보충 학습이나 특별 지도가 이루어졌다면 적어도 12년 동안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손에 장애가 심해 필기를 하기가 무척 어려운데 선생님들은 나의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칠판에 학습 내용을 써 내려갔기 때문에 나의 학교 공부는 더없이 힘들었었다.
  내가 아는 시각 장애 친구의 말을 들으면 시각 장애 학교에도 요즈음은 시각장애와 지적 장애, 시각 장애와 발달 장애 등 이중의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많이 있는데, 학교에서의 수업 진행은 대부분 시각 장애만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니 이중의 장애를 지닌 학생들의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중의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은 이중의 장애 특성에 맞는 특수학교에서 별도의 교과 과정에 따라 개별적으로 교육을 해야만 한다. 시각 장애와 발달 장애를 함께 가진 학생을 시각 장애 학교에 배정하여 시각 장애인의 특성만을 고려하여 교육한다든지, 지체 장애와 학습 장애를 함께 가진 학생을 지체 장애 학교에 배정하여 지체 장애인의 특성에 맞추어 교육하거나 아니면 지체장애 학생을 발달 장애 학교에 배치하여 발달 장애 특성에 맞는 교육만 진행한다면 이들 학생들은 장애인 속의 장애인으로서 또 다른 차별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3년 나는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대학교에 입학했다. 국문과에 진학하여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가졌었지만 나의 장래를 생각하면 국문과보다는 사회 복지과에 진학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회 복지과에 진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어 통학이 불편했기 때문에 기숙사에 들어가서 생활했다. 기숙사에는 장애 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주로 남자 동기들이나 선후배들과 어울리면서 연애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마시고 하며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이코드라마의 기법을 사회 문제에 대입하여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주로 하는 사회 복지과 내의 동아리인 ‘소시오’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소시오’에서 연출을 맡아 일을 했는데, 신입 후배들을 많이 받아들이지 못해 너무나 힘든 1년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 학교는 1학년 때는 학부제로 되어 있어 학과가 나누어지지 않은 학생들이 함께 몇 개의 반으로 나누어 공부를 하다가 2학년이 되면 학과로 나누어져 전공 공부를 하였다. 내가 2학년이 되어 ‘소시오’의 연출 일을 맡게 되었을 때 ‘소시오’의 회장을 맡은 친구는 나와 다른 학과에 배정되었으므로 나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우리 동아리의 특성상 연출을 맡은 내가 사이코드라마를 기획하고 연출하며 후배들과 함께 드라마를 조직했어야 했는데, 후배들은 몇 명 없었고, 동아리 회장은 다른 학과에 소속되어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니 동아리의 일은 대부분 나에게 집중되었고, 그 모든 일을 감당하느라 나는 너무나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동아리 신입생 모집에 실패한 책임을 내가 전부 떠안아야 하는 심리적 부담 역시 나를 힘들게 했다.
  ‘소시오’는 사회 복지과 내에 소속된 동아리라서 이 학과 학생들을 많이 가입시켜야 했는데, 당시 이 과 내의 동아리들은 회원 유치에 지나칠 정도로 경쟁하였고, 다른 동아리들에서는 알게 모르게 제대하여 복학한 선배들의 후원이 있었지만 ‘소시오’는 복학한 선배들의 지원도 부족했고 회장도 사회 복지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에 소속되어 있어 사회 복지과 후배들을 동아리에 가입시키는 데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연출을 맡은 나는 언어 장애가 있어 후배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동아리로 유치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1학년 때는 어설픈 용기로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했고, 나도 선배가 되면 누구 못지않게 동아리를 위해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2학년이 되고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되자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데 많은 역량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힘겨운 동아리 활동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아버지와 다툼이 많았던 나는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고 말았다. 당시 막창 집을 운영하고 있었던 우리 집은 불경기가 지속되자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아버지는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당시에는  아버지와 자주 부딪혔고 다툼이 많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휴학을 권했고 나는 학업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휴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휴학을 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던 나는 기숙사 친구 방이나 학교 앞 친구 집에서 기거하면서 계속 학교에 등교하여 동아리 활동을 했다. 내가 연출을 맡았던 2학년 때 내가 회원들을 제대로 유치하지 못해 동아리가 거의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는 자책감에 동아리를 회생시키기 위해 휴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학교에 가서 피땀을 흘려가며 활동을 했다. 휴학 기간 동안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군에 가 버리고 외로웠던 나는 새롭게 접한 컴퓨터 게임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휴학 중이던 2006년 장애인 지역 공동체라고 하는 중증 장애인 단체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중증 장애인들에 비한다면 차별을 받은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이 무턱대고 나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무척 화도 나고 장애인을 무작정 어린애로 취급하여 함부로 대하는 시민들의 편견과 차별에 대해 우울하고 쓸쓸한 느낌을 갖게 된다. 버스를 탈 때 기사들이 “야, 빨리 타!”라고 한다든가,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야, 어디 가냐?” 하면서 반말로 묻는다든지 할 때면 기분이 몹시 상한다.
  한번은 절에 갔다 오다가 밤이 늦었는데 시계도 없고 핸드폰도 없어서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해서 옷가게에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죄송하지만 지금 몇 시나 되었느냐고 여쭈었더니 그 아주머니는 내게 시간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면서 나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 그 아주머니는 내가 늦은 밤에 구걸을 하러 왔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귀찮고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나는 그 아주머니를 향해 구걸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시간을 좀 물어보려고 왔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지폐를 쥔 아주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그냥 가게 문을 나서고 말았다.
  또 한 번은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배가 고파 식당에 갔었는데, 밥을 다 먹고 나서 내가 음식 값을 지불하자 내게 잔돈을 내주면서 “어여 빨리 받고 어서 가라.”라고 반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음식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나의 비장애 친구들을 향해서는 “무얼 드릴까요?”라고 아주 정중하게 물었던 바로 그 종업원이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교양이 없고 천박한 사람들이 식당에 가거나 주유소 등지에서 서빙을 하는 종업원들을 향해 무작정 반말을 하고 무시하는 행동과 말투를 하는 것이 버릇이듯이 장애인을 대하면 처음부터 반말을 하고 얕잡아 보는 듯하는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무식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장애인들의 상처가 너무 크다.
  고등 학교 시절 인근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주위 친구들이 둘이 잘 어울린다면서 잘해 보라고 하는 소리에 용기를 얻어 그 친구와 한 번 사귀어 볼까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핸드폰 문자와 관련한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해 이야기도 별로 나누어 보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손이 불편해 문자를 보내기 힘든 나는 문자를 주고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학교에서 수업을 하교 있는데 문자가 들어오는 진동이 있어 확인을 해 보았더니 그 여학생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수업 시간 중이고 손도 불편해서 문자를 보내기 어려워 답장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 전화를 걸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내가 자신의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당시 수업 중이었고, 손이 불편해서 문자를 보내기가 어려웠다고 말을 했지만 그 여학생은 나의 상황을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면서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예쁜 친구가 있어 한동안 많이 좋아했었다. 같은 과 동기였는데 몇 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너무 따뜻하고 나를 잘 이해해 주었기에 그녀와 차도 마시고 술도 한 잔 하면서 정을 나누었다. 술을 마시고 우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예쁘고 나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었다. 마음이 약해 좋아하는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가슴만 졸이다가 용기를 내어 편지로 마음을 고백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에게서는 답장이 없었다. 내 마음을 다한 고백이었기에 대답 없는 그녀 앞에서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그러다가 그 친구 개인  홈페이지에 다시 한 번 고백을 듣고 싶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용기를 내어 그녀의 생일날 선물을 준비하여 학교 본관 앞 분위기 좋은 장소에서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고, 친구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진심어린 고백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나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는지 결국은 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가슴만 태우다 끝이 나버린 첫사랑 앞에서 오랜 시간 그녀가 보고 싶어 많이 아파했다.
  2년 동안의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나는 지역의 어느 장애인 단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마지막 학기 수업을 받고 있다. 단체 활동과 학교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너무 바빠서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 잔 나눌 시간도 잘 나지 않지만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시 창작 공부를 좀 더 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

▣생활단상

선입견과 철학
이태호(통청 아카데미 원장)

  선입견을 버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여러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들은 어떤 선입견에 많이 사로잡혀 있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이것을 ‘4가지 우상(偶像)’으로 요약하였다. 첫째, 동굴 우상이다. 여기서의 동굴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의 한계를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경험한 것들 안에서 다음 경험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드러내는 속담이 ‘우물 안 개구리’이다. 물론 이 우상의 근원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동굴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둘째, 종족 우상이다. 개인의 경험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우리들의 경험으로 확대해 가도 종족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선입견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족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황인종이 가지는 한계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지는 한계도 극복해야 한다. 셋째, 시장 우상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건 팔 때 쓰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이나 진실은 ‘언어’로 담아내기 어려운 한계가 있음을 이 우상은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노자는, 진실한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들의 모든 사고는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데, 언어로 표현되었다면 이미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넷째, 극장 우상이다. 이것은 극장에서 배우들이 하는 행위는 작가가 꾸민 픽션(허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극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면서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면서 현실로 인식한다. 어느 분야든 전문가가 말하면 우리들은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 전문가라는 사람의 이론에도 이미 어떤 관점이 들어가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선입견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말했다. ‘무지의 지’는 내가 진실(진리)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선입견에서 쉽게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무지한 사람이다.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겸허한 구도(求道)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은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닭을 잡아라!
남상임(나이스볼링클럽 회장)

  나는 닭띠다. 충청도 논산이 고향인 촌닭 출신이다.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예전에는 재래시장에 가면 닭을 잡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얼기설기 철사로 만들어진 닭장 안에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빽빽이 닭들을 넣어 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씩씩하게 생긴 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닭을 사러 온 손님이 닭장을 훑어보고 손가락으로 한 놈을 가리키면 아주머니는 저승사자 같은 무서운 얼굴로 가차없이 문을 열고 그놈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아 끄집어내었다. “나 살려라!”고, 아니, “닭 살려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놈의 모가지에다 날이 시퍼런 식칼로 칼침을 한번 쿡 놓고는 탈수기 같은 통의 뚜껑을 열어 집어넣고는 스위치를 눌렀다. 잠시 후, 닭은 죽은 채로 알몸을 드러내고 도마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물론 시골에서 태어나기도 했고,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추억이나 정서가 많았다. 우리 집에는 여느 시골집처럼 마당 한편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하얀 감꽃이 떨어지는 날이면, 나는 아이들과 함께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기도 했고, 가을이면 가지마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빨간 감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기도 했다. 뒷마당에는 돼지우리, 닭장, 외양간이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언제나 닭들이 돌아다니며 지렁이나 벌레 같은 먹이를 찾았다. 그런 닭들이 가끔씩 우리 식구들의 보양을 위해 밥상에 맛있는 고기가 되어 오르기도 했다. 아버지가 닭을 잡는 날이면 언니들과 나는 수돗가에 올망졸망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가 닭 잡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징그럽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신기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닭의 내장을 꺼내 잘게 자른 뒤 마당에서 뛰어노는 닭들에게 던져 주었다. 흩어져 먹이를 뒤지던 닭들은 주인이 던져 준 먹이를 먼저 먹으려고 푸다닥 잰걸음으로 달려와 서로 부리를 쪼았다. 그것이 자기 친구의 살점인 줄도 모르고. 역시 닭대가리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아버지는 자식들을 앞에 앉혀 놓고 닭을 잡을 때면 가슴이 뿌듯하셨나 보다.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말처럼, 잡는 내내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대단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마도 3, 4학년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아침을 드시던 아버지가, “오늘 닭이나 한 마리 잡아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들 숟가락질을 멈추고 아버지의 말에 귀가 쫑긋했다. 오래간만에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겠구나……. 모두들 얼굴에 잔뜩 기대감이 서렸다. 나도 입 안에 씹고 있던 김치가 갑자기 맛있는 닭고기처럼 느껴졌다. 벌써부터 닭고기가 입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매번 반찬 투정을 하던 동생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군말 없이 한 그릇 뚝딱 비우고는 신나게 학교로 달려갔다. 우리 모두 저녁에 먹을 닭고기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다가 언제쯤 저녁이 될까 자주 하늘에 떠 있는 해를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왜 그리 느린지……. 친구들과의 놀이도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아버지가 지금쯤 집에 돌아와서 닭을 잡고 있을까? 아니,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으니 밭에서 돌아오시지도 않았을 거야. 나와 함께 놀던 동생이, “언니, 아버지가 닭 잡았을지 몰라. 어서 집에 가자.” 하고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나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둑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서산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산 그림자가 멀리 우리 집 처마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들도 둥지로 돌아가느라 이리저리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노을에 물든 구름은 저녁이 오기 전에 들판을 지나려는지 부지런히 뭉글뭉글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들길을 지나 집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벌써 아버지가 닭을 잡고 있는지도 몰라……. 입 안에는 어느새 군침이 가득 고여 들었다. 동생도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풀을 뜯고 있던 송아지가 그런 우리를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송아지에게, “음매” 하고 저녁 인사를 해 주고는 또 달렸다.
  점점 집이 가까워 오는데 별로 인기척이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일까? 아직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에서 돌아오지 않은 걸까? 나는 마당에 쓰러질 듯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당에는 닭들만 몇 마리 몰려다니며 모이를 주워 먹다가 갑자기 뛰어든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동생도 아직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풀이 죽었다. 나와 동생은 마루에 걸터앉아 어서 아버지가 들에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기다려도 아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마당에서 뛰노는 닭들을 쳐다보면서, ‘저 놈을 잡을까? 아니야, 저 놈이 더 통통해. 하지만, 저 놈은 달걀을 낳기 때문에 아버지가 잡지 않을 거야. 그러면, 저 놈이 좋겠네. 저 놈은 내가 모이를 줄 때 가끔 나에게 달려들기도 하는 나쁜 놈이거든. 하지만, 저 놈은 장닭이라서 아버지가 잡지 않을지도 몰라. 장닭은 닭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 같은 닭이니까. 그럼 저 멀리 비슬비슬하는 저 닭을 잡을지도 모르겠네…….’ 하고 나름대로 오늘 우리 밥상에 오를 닭을 골라 보았다.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갔는지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왔다. 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고 있었다. “언니, 아버지가 왜 이리 빨리 안 오시지? 빨리 닭을 잡아야 하는데…….” 동생은 기대감이 슬슬 무너지는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어쩌면 오늘 닭고기를 못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너무 늦게 돌아오시면 닭 잡을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내가 미리 닭을 잡아 놓을까? 그러면 아버지가 빨리 일을 하실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한시라도 빨리 닭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루에 엎드려 있는 동생을 일으켜 마당으로 내려섰다.
  “우리가 닭을 미리 잡아 놓자.” 동생은 신이 나서 나의 뒤를 따라다니며 언니가 닭 잡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닭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일단 닭을 죽여야 했다. 그러면, 어떻게 닭을 죽일 것인가? 아버지는 어떻게 닭을 죽였지? 닭 잡는 걸 몇 번이나 보았지만, 한 번도 아버지가 닭을 죽이는 장면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는 어디에서 닭을 죽였을까? 우리 몰래 숨어서 닭을 죽였었나 보았다. 나는 하나의 생각에 결론을 내렸다. 때려서 죽이자.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헛간에 들어가 닭을 때릴 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대문간에 세워 놓은 빗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가끔 어머니가 화가 단단히 날 때면 우리를 때리려고 들고 다니시던 것이었다. 나는 그 빗자루를 들고 미리 점찍어 두었던 닭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동생은 대장을 호위하는 졸병처럼 내 뒤에서 허리를 낮추며 나를 따랐다. 닭은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땅만 파고 있었다. 나는 사정권 안에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빗자루를 머리 위로 천천히 쳐들어 힘차게 내리쳤다. “이얏!” 빗자루 몽둥이는 정확하게 닭의 등에 내리꽂혔다. “꼬꼬댁, 꼬꼬댁!” 닭은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듯이 후다닥 솟구쳐 올랐다. 닭털이 서너 개 바람에 휘날렸다. 도망가는 닭을 쫓아 나는 연신 빗자루를 내리치며 따라갔다. 그러나 닭의 걸음이 내 걸음보다 훨씬 빨랐다. 닭은 마당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나는 기왕에 뽑은 칼이니 결판을 내야 했다. 동생도 닭이 도망가지 못하게 반대편에서 쫓았다. 나는 몇 번이고 닭을 향해 빗자루를 내리쳤다. 가끔씩 빗자루 몽둥이는 닭의 몸을 강타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힘으로 내리쳐 봐야 그리 힘이야 있었겠는가. 닭은 그래도 타박상을 입었는지 비틀거리기는 했다. 조금만 더 때리면 될 것 같았다. 궁지에 몰린 닭은 나를 향해 날카로운 부리를 들이대며 위협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으니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닭을 향해 빗자루를 내리쳤다. “이얏! 얏! 맞아라!” 또 한 대 정통으로 때린 것 같았다. 닭은 순간 고꾸라졌다가 정말 저 여자애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죽어라고 달아났다. 나도 뛰어다니고, 빗자루로 내리치고 하느라 힘도 빠지고 숨도 찼다. 어서 저 닭을 잡아야 했다. 이미 닭을 때려 놓았으니 그만둘 수도 없었다. 해는 져서 마당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닭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동생과 나는 마당 가운데 서서 숨을 헐떡거리며 닭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거 큰일이다. 내가 때린 닭의 몸에 멍이 들었을 텐데……. 그냥 살려둘 수도 없을 것인데……. 어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잡아 놓아야 하는데…….’ 하고 걱정이 되었다.
  동생과 나는 빗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없는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라도 죽은 건 아닐까? 지금 저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를 노려보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나 않을까? 아니면, 죽어서 귀신이 되어 밤마다 내가 변소 갈 때 나타나지나 않을까? 도대체 이놈은 어디로 도망간 거야? 맞아서 많이 아플 텐데 그냥 마저 맞고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 이제 어떡해?” 동생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아는지 걱정스런 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별자리들도 보였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북극성……. 그 보석이 빛나는 꽃밭을 하얀 반달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대문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우리는 벌떡 일어섰다. 언니들이 들어오고 뒤이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우리의 모양새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나와 동생은 울먹거리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내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급기야 ‘앙앙’ 하고 동생과 나는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닭을 잡겠다고 난리굿을 떤 나와 동생을 보며 웃었다. 어머니는 야단을 치시면서도 마음 고생을 한 나에게 괜찮다며 내 울음을 달래 주었다.
  그날 밤, 결국 우리 식구들은 나와 동생의 활약 덕분에 맛있는 닭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맞아서 피멍이 든 닭을 찾아 아버지만의 방법으로 잡았다. 아버지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닭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골 사람들은 닭을 잡아 목을 비틀어 발로 꾹 밟는다고 했다. 그러면 닭은 숨을 쉬지 못해 죽게 된다고. 질식사를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닭을 잡겠다고 빗자루로 때렸으니……. 때려잡을 거라고 생각하니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게 소름이 돋는다. 어린아이의 생각으로는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 게 당연하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 식구들을 위해 닭을 잡아 주시던 아버지는 지금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수돗가에 개골개골 개구리처럼 모여앉아 아버지가 닭을 잡는 모습을 보던 우리 형제들도 이제는 각자 식구를 거느리고 살고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 자상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리운 얼굴, 그리운 시골집 마당, 그때 나에게 맞았던 닭에게 미안스러운 마음이 든다. 어쩔 것인가,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서로 다른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업보이니…….

문화원 소식

  2012년 7월 12일 윤일현 시인의 ‘청포도가 익는 계절’을 필두로 9월 6일까지 한국 문화 예술 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8기 문화 아카데미가 진행되었습니다.
  2012년 7월 14일 제99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북 영양 봉감 모전 오층 석탑, 서석지, 금강 소나무 생태 경영림, 주실 마을, 막걸리 양조장을 다녀왔습니다. 경영림에서 금강송의 나이테를 손끝으로 느껴보는 인상 깊은 기행이었습니다.
  2012년 8월 13일 대구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린 ‘대구 국제 재즈페스티벌’ 개막 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2012년 8월 17~18일 뜻 깊은 제100차 역사 문화 기행은 전남 해남 보림사, 미황사, 땅끝마을, 대죽 어촌 마을, 다산초당, 영랑 생가, 무위사, 보림사를 다녀왔습니다. 문화 캠프를 겸하여 진행된 기행에서 그동안 문화 해설가로 수고하신 김정순, 김종규, 이현동 세 분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열심히 기행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표창도 하였습니다.
  2012년 9월 8일 제101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남 아산 봉곡사, 아산 외암리 민속 마을, 장영실 과학관, 송악 스머프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피자를 직접 만들어 보고 점심으로 먹은 특별한 체험이 있는 기행이었습니다.
  2012년 9월 13일 한국 연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장애인계 최초로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이태호 박사의 노자 도덕경 강의를 필두로 장장 40주에 걸쳐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펼쳐 갈 기중한 강좌가 되도록 다짐해 봅니다.
  2012년 10월 5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신영옥 콘서트’를 다녀왔습니다.
  2012년 10월 13일 제102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북 영천 영천 와인 학교, 케이브 와이너리, 임고 서원, 은해사를 다녀왔습니다. 직접 포도를 따서 으깨고 설탕을 첨가하여 만든 포도주 맛이 100일 후에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합니다.
  2012년 10월 19일 하모니아아트홀에서 열린 연극 ‘아빠는 월남 스키 부대’를 다녀왔습니다.
  2012년 10월 27일 인문 주간을 맞이하여 국난 극복의 역사를 주제로 해인사, 인각사,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을 다녀왔습니다.
  2012년 11월 3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연극 ‘고두심의 댄스 레슨’을 관람했습니다.
  2012년 11월 10일 제103차 역사 문화 기행은 충북 청주 청주 상당 산성, 청원 이항희 가옥, 문의문화재 단지, 청남대를 다녀왔습니다. 좋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신 하루였습니다.
  2012년 11월 23일 계명아트센터에서 열린 ‘장사익 소리판’을 다녀왔습니다.
  2012년 12월 2일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린 ‘사라 장 바이올린 연주회’를 관람하였습니다.
  2012년 12월 8일 제104차 역사 문화 기행은 경남 울산, 경북 경주 울산 반구대 암각화, 암각화 박물관, 천전리 각석, 경주 불국사, 신라 역사 과학관을 다녀왔습니다.
  2012년 12월 16일 계명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관람하였습니다.
  2012년 12월 28일 천마아트센터에서 열린 ‘조수미 콘서트’를 다녀왔습니다. 엄청난 폭설을 뚫고 찾아간 공연은 온몸이 전율토록 감동에 휩싸인 2012년의 아름다운 피날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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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년 3월 1일  
발행인․김현준
편집․김창연
교열․이석규
디자인․이유란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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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2016년 봄호 (통권 36호)  
34  2015년 봄호 (통권 35호)  
33  2014년 여름호 (통권 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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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봄호 (통권 32호)  
30  2012년 여름호 (통권 31호)  
29  2011년 겨울호 (통권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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