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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봄호(통권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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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각과 문화
2011년 봄호(통권29호)
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차례

권두칼럼
식문화에 대한 단상 _ 이경재

Pops English
Heal the world -Michael Jackson _ 김창연

명시와 명문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 - 이사(李斯) _ 이석규 역

서평
경제 IQ 200, 주용기 총리 _ 최성재

우리가 답사한 유적


고창을 다녀와서 _ 조경자
답사 사행시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늦게 시작한 공부가 나를 눈뜨게 했다. _ 박명애

생활단상
덧씌운 안경 …… _ 설보화
인사로 얻게 된 길동무_ 정희란

문화원 소식



권두칼럼
식문화에 대한 단상

  이경재(본원 이사)

  50 중반 정도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을 배고프게 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에서 나누어 준 껍질이 딱딱한 옥수수 빵의 맛을 기억하고 있다. 또 그들은 봄철 밭고랑과 언덕에 있는 특정 풀뿌리들을 꿀을 빨듯 맛있게 빨아 먹었던 경험도 있고, 보리개떡과 술찌끼, 물밤, 말린 고구마 조각 들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1960년생 정도부터는 열거한 음식들의 모양과 맛, 향, 재료 들을 잘 알지 못한다.
  1950년대까지의 사람들과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과는 식문화가 상당히 다르다. 안타까운 점은, 우리나라가 급속히 지구촌화되면서 여러 나라의 고유한 음식들을 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 접했던 물밤과 옥수수죽, 장떡, 보리껍질가루, 갱죽, 무밥 등등의 음식들은 그 맛이 머리에만 있을 뿐, 그러한 음식들을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 언급한 종류의 음식들을 자신 있게 만들어 주셨던 내 어머니 연배의 분들은 오늘날에도 그때의 그 가난의 맛들을 생생히 재현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들로부터 예전의 그 손맛을 인정받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50년대의 음식 맛을 깡그리 잊어버린 우리들의 무심함을 원망하며, 언제나 큰 감동 없이 무덤덤하거나 짠 음식만을 만들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로부터 삶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존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었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은 곧 삶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의 생존이 과거의 연속인 것과 같이 오늘날의 음식 문화가 과거와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 50년대의 음식이 2011년에도 당당히 이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음식들에는 국적이 있다. 그런데 나의 어린 시절 음식들인 50년대의 우리나라 음식들은 가난했을 때의 음식이라는 이유로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연의 재료와 손맛만으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음식들을 만드신 분들이 다수가 그 때의 그 음식을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50년대의 음식들이 맥을 잇지 못한다는 것은 음식 문화가 부재함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막걸리의 세계화도 중요하겠지만 50년대의 가난 극복의 음식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우리나라 음식 문화 보존을 위해 더 필요할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정치권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무상 급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무상 급식은 필요한 일부 계층에게만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갈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돈을 직접 받지 않고 식사를 제공한다고 하여 그것을 ‘무상 급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혈세로 제공하는 소중한 식사를 ‘무상 급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감언이설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음식을 얻기 위한 선대의 수고를 공감하려는 체험이 있었더라면 ‘무상 급식’이라는 적절하지 않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상 급식 논쟁 이전에 젊은 세대들이 50년대의 음식과 그 이전에 애용된 우리의 음식들을  공감할 수 있도록 체험 기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사라진 우리의 음식 문화를 2011 년으로 되돌려 가난의 발자취를 공유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의 마련이 시급하다. 그리고 식문화의 가치는 음식을 귀하게 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음식을 귀하게 대하지 않고 단체 배식 위주로 시스템화하는 것은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고, 식문화의 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한다.
자주 보도되고 있는 집단 식중독과 같은 대형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각자의 가정에서 제조한 식사를 지참하여 먹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각자의 가정에서 식사를 만들어 지참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학교나 사무실 근처에 있는 일반 주택에 거주하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10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식사를 만들어 제공할 수 있는 가칭 ‘가정 음식 판매업’을 활성화하는 활동이 요구된다.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에게 인근에 있는 일반 가정에서 10인분 정도의 식사를 공급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다면 집단 식중독을 예방할 수도 있고 단체 급식과 관련한 각종 비리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 정성과 개성 가득한 음식을 제공하고 있는 많은 수의 전업 주부들과 가난했던 시절 적절한 음식을 개발하여 제공한 나이 드신 분들의 손맛을 되살릴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제도가 자리잡게 된다면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보람된 수입을 안겨 줄 수 있다.    
  음식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재료, 먹는 사람의 태도와 주위 환경, 식문화와 관련된 정책 등이 과거의 것들과 단절됨이 없이 조화롭게 발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한 우리 민족의 식문화에 대한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과거의 맛을 잊어버리고, 음식의 가치에 무관심하며, 서구화와 집단 배식을 강조하는 현재의 식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한국을 세계에 깊이 알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식문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되돌려 놓아야 우리가 우리다워질 것이고 세계인들도 우리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ops English

   Heal the world -Michael Jackson

김창연(본원 운영위원)


There's a place in your heart and I know that it is love,        
And this place could be much brighter than tomorrow,        
And if you really try, you'll find there's no need to cry.          
In this place you'll feel there's no hurt or sorrow.                
There are ways to get there. If you care enough for the living,
Make a little space, make a better place.                              

Heal the world. Make it a better place                                
For you and for me and the entire human race.                  
There are people dying. If you care enough for the living,      
Make a better place for you and for me                            

If you want to know why there's a love that cannot lie,        
Love is strong  it only cares for joyful giving.                        
If we try we shall see in this bliss, we cannot feel fear or dread  
We stop existing and start living.                                        
Then it feels that always Love's enough for us growing.      
Make a better world, make a better world,                            

And the dream we were conceived in will reveal a joyful face    
And the world we once believed in will shine again in grace    
Then why do we keep strangling life, wound this earth, crucify its soul?
Though it's plain to see this world is heavenly,          
Be God's glow. We could fly so high.                      
Let our spirits never die in my heart. I feel you are all my brothers
Create a world with no fear. Together we'll cry happy tears    
See the nations turn their swords into plowshares                
We could really get there. If you cared enough for the living    
Make a little space to make a better place.                          

마음속 어딘가 한 구석에는 사랑이 깃든 곳이 있어,
거기는 항상 내일보다 더 밝을 희망의 빛이 비추는 곳.
진정으로 마음만 먹으면, 울음이 그치는 그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고통과 슬픔이 없을 것입니다.
그 곳에 이르는 길은 많지요.  만약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사랑이 깃들 조그만 공간을 만들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듭시다.

세상 아픈 상처를 치유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듭시다.
그대와 나,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네요. 만약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함께 더 좋은 세상을 만듭시다. 그대와 나를 위하여.

사랑이 자랄 수 없는 곳에도 사랑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사랑이 위대한 것은 오로지 기꺼이 주기 때문인이지요.
노력만 한다면 이 행복 속에서 두려움도 공포도 느낄 수 없답니다.      
이제 재재가 중단되고,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모든 삶이 항상 사랑으로 충만됨을 느낄 거여요.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사랑이 충만된 세상을.

그러면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이 환한 얼굴을 보여 줄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한때 믿었던 세상이 신의 은총으로 다시금 빛날 거예요
그런데 왜 생명을 억압하고, 지구에 상처를 주고, 영혼을 박해하나요?
이 세상이 천국이 될 거라는 바람이 비록 순진한 소망일지 모르지만,
신의 은총이 있기를, 우리의 소망이 하늘 높이 날 수 있도록.
우리 이런 소망을 결코 잃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모두가 한 형제가 됨을.
두려움이 없는 세상을 만듭시다. 그래서 우리 함께 행복의 눈물을 흘립시다.
온 나라들이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날을 볼 수 있도록.  
그 곳에 이르는 길은 많지요. 만약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사랑이 깃들 조그만 공간을 만들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듭시다.

  * 마이클 잭슨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이클 조지프 잭슨(Michael Joseph Jackson)이다. 5세 때 형제들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Five)에서 리드 싱어를 맡았으며, 1969년 무렵부터는 자신이 직접 안무한 인상적인 춤을 가미하여 그룹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1976년 잭슨스(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꾼 이 그룹에서 1984년까지 활동하였다.
  1984년 광고 촬영 도중에 화상을 입은 뒤로 희귀병인 백반증에 시달렸으며, 영국에서 열기로 한 재기 콘서트를 준비하다 2009년 6월 25일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팝의 황제'라 불리며 대중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헌액된 데 이어 2002년에는 '작곡자' 부문에도 헌액되었다.
  중동 사태와 일본의 지진에 이은 쓰나미로 대규모 희생이 발생하였습니다. 함께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이클 잭슨의 ‘heal the world’가 생각나는군요.

       유머

A man telephoned an airline office in New York and asked, "How long does it take to fly to Boston?"
The clerk said, "Just a minute."
"Thank you," the man said and hung up.
  한 남자가 뉴욕에 있는 항공사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보스턴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지요?"
  "1분만요."라고 안내원이 말했다.
  "고맙습니다."라고 그 남자는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명시와 명문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                                                        
                          이사(李斯)

이석규(본원 운영위원)

  臣聞吏議逐客(신문리의축객)하니: 신이 들으니 관원들이 객인을 방축할 것을 의논한다 하옵는데
竊以爲過矣(절이위과의)니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는 잘못이니이다.
昔者(석자)에: 옛적에
繆公求士(무공구사)할새: 목공께서 현사를 구하실새
西取由余於戎(서취유여어융)하고: 서으로는 융에서 유여를 얻으셨고
東得百里奚於宛(동득백리해어완)하고: 동으로는 완에서 백리해를 얻으셨고
迎蹇叔於宋(영건숙어송)하고: 송에서는 건숙을 영입하셨고
來邳豹公孫支於晉(래비표공손지어진)하니이다: 진에서는 비표와 공손지를 불러왔었나이다.
此五子者(차오자자)는: 이 다섯 사람은
不産於秦(불산어진)이로되: 진나라에서 나지 아니하였으되
而繆公用之(이무공용지)하사: 목공께서 등용하사
幷國二十(병국이십)하여: 이십 국을 병합하시어
遂覇西戎(수패서융)하니이다: 마침내 서융을 제패하셨나이다.
孝公用商鞅之法(효공용상앙지법)하여: 효공께서는 상앙의 법을 채용하사
移風易俗(이풍역속)하여: 풍속을 바로잡으시니
民以殷盛(민이은성)하며: 백성들이 은성하고
國以富强(국이부강)하여: 나라가 부강케 되니
百姓樂用(백성락용)하며: 백성들은 즐거이 부림을 당하고
諸侯親服(제후친복)하고: 제후들은 친히 복종하게 되었으므로
獲楚魏之師(획초위지사)하여: 또 초나라와 위나라의 군대를 얻어서
擧地千里(거지천리)하여: 천리의 땅을 빼앗아
至今致强(지금치강)하니이다: 태평하고 강성함이 오늘까지 이르렀나이다.
惠王用張儀之計(혜왕용장의지계)하여: 혜왕께서는 장의의 계책을 채용하사  
拔三千之地(발삼천지지)하고: 삼천 땅을 빼앗으시고
西幷巴蜀(서병파촉)하고: 서으로는 파촉을 병합하시고
北收上郡(북수상군)하고: 북으로는 상군을 차지하시고
南取漢中(남취한중)하고: 남으로는 한중을 공취하시고
包九夷制鄢郢(포구이제언영)하고: 구이를 아우르시고 언과 영을 제압하시고
東擧成皐之險(동거성고지험)하고: 동으로는 성고의 험지를 빼앗으시고
割膏肥之壤(할고비지양)하고: 비옥한 땅을 할취하시고
遂散六國之從(수산육국지종)하여: 마침내 육국의 합종을 해산하시어
使之西面事秦(사지서면사진)하여: 서으로 향하여 진나라를 섬기게 하셨으니
功施到今(공시도금)하나이다: 그 공업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나이다.
昭王得范雎(소왕득범저)하사: 소왕께서는 범저를 얻어
廢穰侯逐華陽(폐양후축화양)하고: 양후를 폐하시고 화양군을 방축하사
疆公室杜私門(강공실두사문)하며: 공실을 강하게 하고 사문의 전천을 막으셨으며
蠶食諸侯(잠식제후)하여: 제후들의 땅을 잠식하시어
使秦成帝業(사진성제업)하시니이다: 진나라로 하여금 제업을 이루게 하셨나이다.
此四君者(차사군자)는: 이 네 군주께서는
皆以客之功(개이객지공)이니이다: 다 객인의 공력으로 말미암아 대업을 이루셨나이다.
由此觀之(유차관지)컨대: 이로 보건대
客何負於秦哉(객하부어진재)리오: 객인들이 진나라에서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니이까?
向使四君(향사사군)으로: 전일에 네 군주께서
卻客而不內(각객이불내)하고: 객인을 물리쳐 용납하지 않으시고
疏士而不用(소사이불용)이런들: 현사를 멀리하고 등용하지 않으셨더라면
是(시)는: 이는
使國無不利之實(사국무부리지실)하여: 나라가 다대한 실리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며  
以秦無彊大之名也(이진무강대지명야)리이다: 진나라는 강대국의 명성도 얻지 못했을 것이니이다.
今陛下致昆山之玉(금폐하치곤산지옥)하며: 지금 폐하께서는 곤산의 옥을 가져오게 하시고
有隨和之寶(유수화지보)하며: 수화의 보옥을 소유하고 계시며
垂明月之珠(수명월지주)하며: 명월주를 늘어뜨리시고
服太阿之劒(복태아지검)하며: 태아검을 차시고
乘纖離之馬(승섬리지마)하며: 섬리마를 타시며
建翠鳳之旗(건취봉지기)하며: 취봉의 기를 세우시고
樹靈鼉之鼓(수령타지고)하시니: 영타고를 달아 놓고 계시니
此數寶者(차수보자)는: 이 여러 가지 보배도
秦不生一焉(진불생일언)이어늘: 진나라에서는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이로되
而陛下說之(이폐하설지)는: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何也(하야)니꼬: 무슨 까닭이니이까  
必秦國之所生然後可(필진국지소생연후가)인덴: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는 것이라야 한다면
則是夜光之璧(칙시야광지벽)이: 야광주로
不飾朝廷(불식조정)이오: 조정을 장식할 수 없을 것이요
犀象之器(서상지기)가: 서각과 상아 기구로  
不爲玩好(불위완호)요: 완호지물을 삼을 수 없을 것이요
鄭衛之女(정위지녀)가: 정나라와 위나라의 미녀로
不充後宮(불충후궁)이오: 후궁을 채울 수 없을 것이요
而駿良駃騠(이준량결제)가: 결제 같은 좋은 준마로
不實外廐(부실외구)요: 외구를 채울 수가 없을 것이요
江南金錫(강남금석)이: 강남의 금석도
不爲用(불위용)이오: 쓸 수가 없고
西蜀丹靑(서촉단청)이: 서촉의 단청도
不爲來(불위래)며: 가져오지 못할 것이니이다.
所以飾後宮充下陳(소이식후궁충하진)하여: 후궁을 장식하고 하진을 채우는 것이나
娛心意說耳目者(오심의설이목자)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목을 즐겁게 하는 것이
必出於秦然後可(필출어진연후가)인댄: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는 것이라야 한다면
則是宛珠之簪(칙시완주지잠)과: 완주의 수식과
傳璣之珥(전기지이)와: 전기의 귀고리와
阿縞之衣(아호지의)와: 아호 의복과
錦繡之飾(금수지식)이: 금수 장식물은
不進於前(불진어전)이오: 폐하께 진상되지 못할 것이요
而隨俗雅化(이수속아화)하여: 우아함이 습속을 좇아 변화하는
佳冶窈窕趙女(가야요조조녀)가: 아리땁고 얌전한 조나라의 미녀들도
不立於側也(불립어측야)리이다: 폐하 곁에 시립하지 못할 것이니이다.
夫擊甕叩缶(부격옹고부)하고: 항아리를 치고 질장구를 두드리며
彈箏搏髀而歌呼嗚嗚(탄쟁박비이가호오오)하여: 쟁을 타고 넓적다리를 두드리며 신나게 노래하고 소리를 쳐서
快耳目者(쾌이목자)는: 이목을 즐겁게 하는 것이
眞秦之聲也(진진지성야)요: 참으로 진나라의 노래니이다.
鄭衛桑間昭虞象武者(정위상간소우상무자)는: 그러나 정나라와 위나라의 노래와 상간의 노래 및 소우와 상무의 음악은
異國之樂也(이국지악야)니이다: 이국의 음악이니이다.
今棄擊壅叩缶而就鄭衛(금기격옹고부이취정위)하며: 지금 항아리를 치고 질장구를 두드리던 방식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노래를 취하고
退彈箏而取昭虞(퇴탄쟁이취소우)하니: 탄쟁을 버리고 소우를 취하고 계시옵는데
若是者(약시자)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은
何也(하야)니이까: 무엇 때문이니이까?
快意當前(쾌의당전)하여: 당장은 기분이 좋고
適觀而耳矣(적관이이의)니이다: 보기에 흡족하기 때문일 따름이니이다.
今取人則不然(금취인칙불연)하니: 지금 사람을 쓰는 데에는 그렇지 않으니이다.
不問可否(불문가부)하며: 가부를 묻지도 않고
不論曲直(불론곡직)하고: 곡직을 따지지도 않고
非秦者去(비진자거)하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보내고
爲客者逐(위객자축)하니: 객인은 내쫓으니
然則是所重者(연칙시소중자)는: 이는 중히 여기는 것은
在乎色樂珠玉(재호색락주옥)이오: 색악과 주옥이요
而所輕者(이소경자)는: 경히 여기는 것은
在乎人民也(재호인민야)니이다: 인민이니이다.
此非所以跨海內(차비소이과해내)하고: 이것은 해내를 건너
制諸侯之術也(제제후지술야)니이다: 제후들을 제어하는 술법이 아니니이다.
臣聞地廣者粟多(신문지광자속다)하고: 신이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고
國大多者人衆(국대다자인중)하고: 나라가 크면 인민이 많으며
兵强則士勇(병강칙사용)이라: 군대가 강하면 사졸이 용감하다고 하였나이다.
是以秦山不辭土壤(시이진산불사토양)니: 태산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으니
故(고)로: 그러므로
能成其大(능성기대)하고: 거대해질 수가 있고
河不擇細流(하불택세류)라: 하해는 세류도 가리지 않으니  
故(고)로: 그러므로
能就其深(능취기심)이니이다: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니이다.
王者不卻衆庶(왕자불극중서)라: 왕자는 여러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니
故(고)로: 그러므로
能明其德(능명기덕)이니이다: 성덕을 밝힐 수 있나이다.
是以地無四方(시이지무사방)하며: 그래서 땅은 사방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의 것이 되고
民無異國(민무이국)하여: 사람은 나라의 다름을 따지지 않고 모두 그의 신하가 되며
四時充美(사시충미)하고: 사철은 충실하고 아름답게 되고
鬼神降福(귀신강복)하나니: 귀신도 강복하나이다.
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차오제삼왕지소이무적야)니이다: 이것이 오제와 삼왕에게는 적이 없었던 까닭이니이다.
今乃棄黔首(금내기검수)하여: 그런데 지금 백성들을 버리어
以資敵國(이자적국)하고: 적국을 돕고
郤賓客(극빈객)하여: 객인을 물리쳐서
以業諸侯(이업제후)하여: 다른 제후들의 패업을 돕고
使天下之士(사천하지사)로: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退而不敢西向(퇴이불감서향)하고: 물러나서 감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裹足不入秦(과족불입진)이로소이다: 발을 싸매고 진나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이다.
此所謂敵寇兵而齎盜糧者也(차소위적구병이자도량자야)니이다: 이것이 소위 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대어준다는 것이니이다.
夫物不産於秦(부물불산어진)이로대: 물건 중에도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면서도
可寶者多(가보자다)하고: 보배가 될 만한 것이 많고
士不産於秦(사불산어진)이로대: 선비 중에도 진나라 출신이 아니면서도
願忠者衆(원충자중)이어늘: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이다.
今逐客以資敵國(금축객이자적국)하고: 지금 객인을 방축하여 적국을 돕고
損民以益讐(손민이익수)하여: 백성을 잃고 원수를 유익하게 한다면
內自虛而外樹怨於諸侯(내자허이외수원어제후)하니: 안으로는 자연히 허하게 되고 밖으로는 제후들에게 원한을 쌓아서
求國無危(구국무위)라도: 나라를 구하여 위태로움이 없게 하려고 해도
不可得也(불가득야)리이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니이다.

서평

경제 IQ 200, 주용기 총리
(원제: 주건영 지음, 신동기 옮김)

글: 최성재

  * 오늘날 승승장구하는 중국은 두 사람의 위대한 인물에 힘입은 바 큽니다. 물론 제일 큰 공로자는 등소평입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 후에 등소평이 무명의 주용기를 발탁해서 경제 정책을 그에게 일임하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을지 모릅니다. 10년 전에 쓴 글이지만, 중국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주용기(朱鎔基) 전 중국 총리의 전기에 대한 서평을 올립니다.
중국의 총리 주용기는 이른바 상해방으로 강택민이 상해시 당서기로 재직할 때, 그의 아래에서 상해시장으로 일했던 사람이다.(중국은 당 우위의 공산 국가라서 당의 서열이 우선한다.) 한 때 중국 재정 수입의 6분의 1을 담당했으나 비효율적인 사회주의 정책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상해시를 불과 3년 만에 기적적으로 회생시켜 그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주용기, 그는 과연 누구인가?’
‘주일장’은 그의 효율적인 업무 처리 방식을 잘 나타낸다. ‘주일장’이란 ‘주용기의 도장 하나’ 곧 130개의 도장이 필요하던 일을 단 하나의 도장만으로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한 제도를 말한다. 1990년 그는 등소평과 강택민을 설득하여 포동(浦東) 지구를 경제 특구로 지정하게 했다. 이로써 상해는 다시 중국 최대의 상공업 지역으로 화려하게 변신하게 된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발했을 때, 이에 동조하여 상해시에서도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그는 직접 TV에 나와 불편부당한 입장과 명쾌한 논리로 학생들을 설득하여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생방송으로 진행된 TV 연설에서 당시 단 한 마디도 ‘폭동’이란 말을 안 썼다.
북경에서는 결국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대대적인 검거 바람이 불었지만, 주용기는 사건 후에도 단 한 명 시위 주도자를 처단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도 탁월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1300 만 상해 시민 누구나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천안문 사태 후에 등소평은 가장 총애했던 조자양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과 발을 묶어 버렸다. 이어 조자양의 후임으로 중앙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깝던 강택민을  총서기에 앉혔다. 1991년 주용기는 경제 담당 부총리가 된다. 천안문 사태를 총칼로 진압한 이붕 총리는 총서기로 승진하지 못해 볼이 잔뜩 부어 있던 차, 자기에게 상대도 안 되던 새까만 강택민 당서기의 똘마니 주용기가 자기 밑으로 들어오자 바로 물을 한 주전자 먹여 버렸다.
자기가 수년 간 노력해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로, 누구나 불가능하다던 골칫덩어리 ‘삼각채’ 문제를 그에게 떠넘겼다.
--죽어 봐라.
한국의 재벌들이 상호 부채로 엉키고 엉킨 것과 똑같은 부채 문제가 바로 삼각채였다. 도저히 손을 댈 수도 없었고 손을 대면 댈수록 일이 더욱 꼬이는 고약한 문제였다. 그러나 주용기는 불과 1년 만에 삼각채를 깨끗이 정리했다. 이붕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정적의 부하여서 나의 정적이기도 하지만, 네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한테 불손하지도 않았으니 너한테는 이제 감정이 없다.’
우리나라 재벌 계열사의 상호 부채와 대우채를 해결하는 데 주용기의 방법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주용기의 방법은 알고 보면 간단했다. 빚으로 엉킨 회사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 회사씩 잡아 나갔다. 공적 자금을 과감히 투입하여 한 회사를 골라서 우선 부채로 허덕이지 않는 ‘깨끗한’ 회사로 만들어 다른 회사와의 나쁜 고리를 끊었다. 그 후에 다시 다음 회사의 삼각채를 정리하고 그 후에 다시 다음 회사, 다음 회사…….
처음에는 바다를 자갈 한 소쿠리로 막는 것 같아 참으로 미련하고 더뎌 보인 방식이었지만, 불과 1년 만에 거대한 삼각채의 바다를 메워 버렸다.
그러나 1993년 주용기에게는 더 큰 과제가 떠맡겨졌다. 인플레가 20%가 넘는 거품 경제를 해결하는 난제였다. 책임자인 총리 이붕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꽁꽁 숨어 버렸다. 부총리 주용기는 눈부신 활약을 다시 펼쳤다. 그는 단칼에 중앙 은행장의 목을 날려 버리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즉시 통화량을 줄이고 기업에 빌려 준 돈을 받아 내고 이자를 올려 저축을 늘렸다. 아무 희망이 없는 기업은 사정없이 도산시켰다.
통화 정책을 통한 이런 간접 방식의 자본주의 처방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그는 중국의 시장이 미성숙 상태에 있다는 것을 충분히 감안해서 행정 지도라는 채찍도 같이 휘둘렀다. 그의 긴축 정책은 대성공. 인플레는 한 자리 숫자로 내려갔다. 중국 최대의 희망 사항이었던 경제 연착륙(soft landing)에 성공한 것이다. 13억 인구의 중국에서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그는 거품 경제를 잠재웠다. 이 성공으로 그는 전 세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세계적인 경제 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붙여 준 유명한 그의 별명  ‘경제 IQ 200’은 이 무렵에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지도자 중 주용기만큼 최근의 경제 이론까지 포함해서 경제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가 경제에 관한 토론으로 그에게 이길 수 있을까. 그것도 영어로! 누가 주용기처럼 정규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북경대와 청화대에서 경제를 강의할 수 있을까. 박사 논문을 지도할 수 있을까.”
  중국 총리 주용기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100개의 관을 준비해 두었다. 그 중에 하나는 나를 위한 관이다.”
이 말은 부패 척결을 하면서 하는 말이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상해시장으로 선출되고 (단일 후보로 출마하지만 형식적으로 투표를 한다. 그는 이 당시 10분간 형식적으로 하게 되어 있던 연설을, 유머를 섞어 가면서 장장 1시간 50분에 걸쳐 하면서 10여 차례의 박수를 받으며 상해 시민을 매료시켰다.) 얼마 안 되어 무려 5,000명이 참가하는 대연회가 열렸다. 내 돈이 아니라는 생각에 중국의 회식은 한 끼에 노동자 한 달 봉급치에 해당하는 음식을 차리는 게 흔했다.
새 시장의 환영회를 겸하고 있었으니, 그 파티의 호화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주용기는 아무 말 없이 한 쪽 구석 자리에 가더니 갖고 온 도시락을 꺼냈다. 서슴없이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모두들 쫄쫄 굶는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이를 부득부득 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 후 공금을 회식에 마구잡이로 써 대던 풍토에 어떤 변화가 왔을지는 과히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용기는 10번 정도 암살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 하나와 못된 관리 99명과 맞바꿀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 각오와 용기로 부패와 맞서 싸운다. 그는 아직도 일반 서민과 별로 다름없는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부인과의 사랑도 자별하여 한가한 시간이면 집에서 부인과 같이 경극(京劇)을 연주한다. 그는 노래를 하고 부인은 반주를 하고.
주용기 총리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이 세 개 더 있다.
첫째,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문화 혁명 시 우파 분자로 몰려 하방(下放)되어 5년간이나 농촌에서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사람들과 시시덕거리지 않고 그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짬짬이 혼자 영어 공부를 했다. 그의 영어는 원래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이 때 사전 하나만 달랑 들고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은 영어 원어민도 놀랄 정도이다. 그는 초일류대인 청화대의 전기학부 학생 신분으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운동’을 하면서도 밤이면, 잠을 아껴 공부를 열심히 했다. 10억 인구의 영재들 사이에서 한 번도 3등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둘째, 그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마음이 열려 있어서 탁월한 균형 감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1928년생인 주용기는 모택동, 등소평에 이은 3세대 지도자이다. 모택동은 정치와 경제를 한손에 쥐고 정치 우위의 통치를 했고, 등소평은 정치와 경제를 한손에 쥐되 경제 우위의 통치를 했다. 등소평은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호요방과 조자양을 먼저 발탁하여 잠시 경제를 맡겼다. 그러다가 개혁 개방의 부작용으로 천안문 사태가 벌어지자 정치는 강택민에게, 경제는 주용기에게 맡겼다. 지금은 이원 체제이다.
호랑이 주용기는 현실적으로 자기보다 월등한 권력을 갖고 있는 용(龍) 강택민에게 절대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제대로 이행하려면 강택민이 용상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4세대, 5세대들에게 절대 거만하지 않다. 겸손하게 행동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치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하는 역할로 보아서 4세대에 가깝다. 스무 살 아래인 사람들보다 더 앞서 있다. 서른 살 위의 등소평의 마음도 사고 스무 살 아래의 후배들의 마음도 사로잡는다. 50년을 동시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등소평에게 ‘경제를 안다’는 칭찬을 들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상해의 대규모 시위에 등소평의 천안문 사태 진압과 정반대되는 방법으로 대응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해결책을 썼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등소평과 상해 시민 사이에서 목숨을 건 곡예를 부려, 놀라운 균형 감각으로 그 곡예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주용기는 2세대, 3세대, 4세대 이들 모두에게 마음을 열고 탁월한 균형 감각으로  중국을 이끌고 있다.
셋째, 그는 미국에 맞서 한 발도 지지 않고 대등하게 공생  공존(win-win)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WTO 가입이 대표적인 일이다. 여기서는 많이 알려진 그 일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매우 중요한 일에 대해 말할까 한다. 그의 전기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지만, 주용기는 세계 유일 초대강국 미국에 맞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 낸 적이 있다.  
1994년 1월 1일이었다. 전격적으로 주용기는 위안화를 50% 절하했다. 레이건 이래 미국은 달러 강세, 달러 약세를 떡 주무르듯 주물러 서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잘 나가던 국가들을 마음껏 농락했다. 미국에 대해 월등한 제조업 경쟁력을 갖고도 맥을 못 추었던 것이다. 핫 머니가 기승을 부렸다. 심지어 조지 소로스는 혼자 힘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정도였다. 일본과 독일은 깊은 침체에 빠졌다. 한국과 동남 아시아는 하루는 천국, 하루는 지옥이란 생활을 되풀이했다. 경제의 기초가 아주 허약해졌다. 중국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제의 연착륙에 성공한 주용기는 위안화의 강세, 달러화 약세로 중국 경제가 인플레보다 더 무서운 디플레, 곧 불황에 빠질 것을 즉시 깨달았다. 그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위안화가 고정 환율제라는 것을 이용하여 달러에 대해 이중 구조를 갖고 있던 체제도 하나로 통일하면서 시장 가치를 반영하여 위안화를 단 하루 만에 50%나 절하한 것이었다. 수출 경쟁력이 살아난 것은 불문가지다. 중국 상품은 미국의 시장을 급속히 침식해 들어갔다.
  직접 경쟁 상대에 있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과 간접 경쟁 상대에 있던 한국과 대만이 이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외환 위기를 3년 미리 내다보고 주용기가 선수를 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주용기가 아시아 외환 위기의 간접적인 진앙지였던 셈이다.
경제 대국 일본도 노련했다. 1달러에 80엔대에 머물던 엔화를 120엔대까지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렸다. 이에 맞서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는 금융에 시장 경제 원리를 과감히 받아들였다.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외환 보유고를 충분히 확보했다. 핫 머니가 공격을 개시하면 언제든지 단숨에 격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다. 제일 어리석었던 국가는 한국이었다. 경제 발전 단계가 한 단계 아래인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여러 면으로 보아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OECD까지 가입한 나라였다.
여야 누구도 주용기의 경천동지할 조치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경제학자,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덕우 전 부총리가 엔화 약세가 지속되는 것을 보고 몇 차례 경고했지만, 개발 독재 시대의 향수 정도로 무시되었다.)
  오로지 정치 얘기만 했다.
--YS, DJ, JP, 전통, 노통 ...
대기업들이 이를 남 먼저 감지하고 정부에게 환율을 무리하게 방어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히려 몽둥이찜질만 당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생산성이나 올려라.
나라가 크긴 하지만, 아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1인당 국민 소득이 우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중국에 경제 IQ 200이 총리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중국에게는 크나큰 복이 되었고 한국과 태국, 인도네시아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 되었던 셈이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다. 이에 뒤지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서로 이익을 보려면 이웃 나라 특히 미국과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의 지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국내 정치와 무관하게 신속 정확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면 전 국가,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답사한 유적



  (1) 성류굴
  1963년 5월 7일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탱천굴(撑天窟), 선유굴(仙遊窟)이라고도 한다. 주굴 길이 약 470m, 전체 길이 약 800m이다. 입구는 선유산(仙遊山) 절벽 밑, 왕피천(王避川)가에 있는 좁은 바위구멍이다.
  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동굴의 하나로, 고려 말의 학자 이곡(李穀)이 성류굴에 대하여 언급한 “관동유기(關東遊記)”는 한국 최초의 동굴 탐사기가 되는 셈이다.
  동굴은 대체로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해 전개되고 크고 작은 9개의 동방(洞房)과 5개의 호소(湖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각양각색의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빽빽이 늘어서 있다. 특히 제3동방은 남북간 32m, 동서간 50여m에 달하는 큰 공동(空洞)이다. 이 곳에는 최대깊이가 8m에 이르는 ‘마(魔)의 심연(深淵)’이라는 큰 동굴호가 있는데 주위 벽면에 발달한 큰 규모의 종유석들이 수면에 잠기는 절경을 보인다.
  제4~8동방으로 연결되는 일대에도 많은 석주열(石柱列), 거형 석순, 종유벽 등 크고 다채로운 퇴적 경관이 전개되어 만물상(萬物相), 운상대(雲上臺), 여의동(如意洞), 음향동(音響洞)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제9동방은 제8동방 남동쪽 후미진 곳에 있으며, 남북간 약 50m, 동서간 17m 가량이다. 이 곳의 바닥에는 많은 박쥐똥 등의 퇴적물이 있으며, 이 동굴에서 유일하게 오염이 안 된 부분이기도 하다. 동굴 안의 온도는 연중 15~17℃로 거의 변함이 없다.
  한국의 석회암 동굴 중 최남단에 위치한다는 지형학적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동굴이다. 그러나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고 관광 동굴로 개발된 이후에는 그 훼손도가 매우 심각하다.

  (2)  고창 지석묘군(사적 제391호)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
  이 지석묘군이 분포된 입지를 살펴보면 고창읍에서 서방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북방식 지석묘가 있는 도산 마을이 있다. 다시 이 마을을 안고 북행하면 약 1,2km 떨어진 곳에 죽림리 매산마을이 있다. 매산 마을은 화질봉(표고 400m)의 봉우리로부터 서남쪽을 향하여 활모양으로 뻗어내리는 산지맥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는 주진강 상류인 고창천이 흐르고 있다. 매산 마을 뒷산은 안부를 이루는데 그 서방은 섬틀봉(표고 158m)이라는 삼국시대의 산성이 있는 봉우리가 있다. 이 지석묘군은 매산 마을을 기점으로 동서에 걸쳐 산줄기의 남쪽 기슭을 따라 대체적으로 표고 15m~50m의 범위 내에서 몇 무더기로 나누어져 있다. 이곳 지석묘군을 관찰해보면 그 숫자의 방대함과 아울러 실로 다양한 형식 곧 이른바 탁자형 북방식으로부터 가장 말기 퇴행 형식인 다지석실에 이르기까지 집중 분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상석의 크기도 소형 성곽의 개석으로부터 차츰 거석화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성격을 간직하고 있어 동북 아시아의 지석묘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며 희소 가치가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지이다. 한편 이곳 지석묘의 총수가 50,000여 평에 1,000기 이상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1990년도에 마한백제 문화연구소가 이곳을 지표조사한 결과 북방형 2기, 지상 석곽식 44기, 남방식 247기, 기타불명이 149기, 계 442기가 확인되었으며 그중 108여기가 개간, 개답으로 파괴되고 이동 불명이 있으며 지석묘의 크기는 길이 1.0m미만에서 최대 5.8m에 이르는 것까지 공존하고 있으며 총442기 중 3.0m 미만이 80%, 3.0m 이상이 20%, 4.0m 이상은 21기, 그중 6기는 5.0m이상이다. 이곳 지석묘군은 약 2500년 전부터 약 50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 묘역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로 불리는 삼한시대 진국의 유물로 보며 청동기인은 농사를 기본으로 한 족장 내지 부족 체제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전에 살았던 빗살무늬토기인이 강가에서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낮은 야산과 비옥한 터전인 이곳 고창의 죽림, 아산 상갑을 찾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신재효고택
  전라 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453
  판소리를 집대성, 국문학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긴 동리 신재효 선생(1812~1884)의 고택이다. 판소리 박물관 바로 뒷편으로, 뒤뜰은 동리 국악당과 모양성(왜구침입에 대비, 1453년에 세운 자연석 성곽. 일명 고창읍성)에 대고 있다. 중요 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된 신재효의 고택은 1850년경에 지어졌으며, 현재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진 사랑채와 오동나무, 우물 등이 남아 있다. 판소리 문학의 이론가, 연출가이자 광대의 지휘자라는 평을 듣고 있는 신재효 선생은 1812년에 신광흡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이곳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동리 신재효는 애초 소리꾼이 아니라 재산이 넉넉한 중인 출신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집안을 번창시키면서 판소리의 발전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동리가에서도 노래했듯이, 그는 "시내 위에 정자 짓고/ 정자 곁에 포도시렁/ 포도 곁에 연못이라……"를 읊을 줄 알았던 풍류가객이기도 했다. 동리 선생은 말년까지 이 집에 살면서 노래청을 두고 수많은 제자를 불러 명창들을 길러냈으며, 토끼타령, 박타령,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가루지기타령 등 6마당의 판소리 사설을 편술했다. 여섯 마당 판소리 중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은 너무 음탕하다고 하여 부르기를 꺼려 왔던 바람에 그 가락이 잊혀지고, 오늘날 다섯 마당만이 전수되어 오고 있다. 신재효 고택은 1979년에 보수, 정화되었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고택 뒤에는 동리 국악당을 개관, 고창군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고택을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국악당에서 틀어놓은 판소리가 내내 귓전을 울린다. 생가 뜨락 한 편, 우물 뒤편 담벼락에는 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동리와 얽힌 재미난 에피소드 중의 하나가 ‘도리화가’라는 노래에 담겨 있다. 이 노래는 제자이면서 애인이었던 진채선이 대원군의 인정을 받아 운현궁의 기생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자 그이를 그리면서 지은 것이다. 또한 판소리 연구학자들은 동리 선생이 귀명창이었다고 평한다. 실제 소리는 못했으나 소리를 이해하고, 사설과 소리의 궁합을 맞출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소양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신재효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일은 동리 국악당 탐방으로 이어진다. 고택 바로  뒤의 이 건물은 신재효 선생을 기념하고 국악 발전을 위해 건립된 곳으로 가야금, 판소리, 민요, 농악 등을 교육하고 있다.

  (4) 동춘당(보물 제209호)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간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조선 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 옆면, 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의 차별 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 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5) 다솔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지증왕 12)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영악사(靈嶽寺)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선덕여왕 5) 새로 건물 2동을 지은 뒤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義湘)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바뀐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道詵)이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화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경상 남도 유형 문화재 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天王殿), 요사채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에 세워져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또한 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경상 남도 유형 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普安庵) 석굴,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 석굴은 고려 말기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석굴암과 비슷한 모양이다. 부도군은 도명(道明), 낙화(樂華), 성진(聖眞), 세진(洗塵), 풍운(風雲) 등 5인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한용운(韓龍雲)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한동안 머무르며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6) 해미 읍성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 읍성(海美邑城)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1491년(성종 22)에 완성되었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읍성은 지방 행정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로서, 평시에는 행정 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해미는 1414년(태종 14)부터 1651년(효종 2)까지 군사 중심지였다. 이 성은 동문, 서문, 남문의 3문 가운데 남문인 진남루만 원래의 모습이고,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의 시설은 1980~81년에 일부가 발굴되었다. 해미읍성은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다.
  한편,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도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1866년(병인)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신자가 1,000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는 3,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하였으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7) 진해 해군 사관 학교 박물관
  해군 사관 학교 박물관은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 애족 정신과 그의 위대한 활약상, 선조들의 해양 활동 역사를 해군 장병과 사관 생도들에게 교육할 목적으로 한국 해군에 의해 설립되었다.
  해군 사관 학교는 1946년 1월 17일에 창설된 이후부터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문헌 자료를 수집하여 도서관내에 임시로 전시실을 운영하여 오던 중 1976년 1월 17일 해군 사관 학교 박물관을 건립, 신축과 증축을 거쳐 1990년 4월 28일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박물관의 시설로는 전시실, 관장실, 기획실, 관리실, 자료실을 갖추고 있으며 총 면적은 2,622㎡이다. 전시실을 이충무공실, 해군 해양실, 해사실로 나뉘어 있는데 이충무공실은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를 표현한 전시실로서 공의행장, 공의 초상화, 공에 관한 각종 문헌, 임진왜란 각종 무기, 선박의 그림 등 모두 212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해군 해양실은 대한 민국 해군의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중국 원나라 청자, 조선 시대의 무기, 지도 등 모두 319점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해사실은 해군 사관 학교의 기념 자료 315점을 전시하고 있다.
  ♣ 중완구(보물 제859호)
  이 중완구는 해군 사관 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970년 3월 2일 통영군 산양면 앞바다에서 문동일씨가 발견, 인양하여 당시 통영 군청을 경유하여 인수한 것이다. 유물은 청동제이나 오랜 기간 해저에 있었기 때문인지 부식으로 인하여 그 명문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대완구의 형태나 계원필비 중완구와 비교하면 현저한 차등이 있고 또한 해저에서 인양하고 청동의 부식 정도로 추정하면 어느 해전에서 우리 해군의 함선으로부터 침몰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또한 그 형식으로 보아 명나라 신종(만역 18년경) 중완구와 같은 형태로서 이 완구 역시 전사나 화기 발달 사료로서의 귀중한 문화재로 사료된다.



기행문
고창을 다녀와서

조경자

  문화원과 인연을 맺은 지 3년 째, 여름의 축제인 1박 2일 역사 문화 기행도 3번째이다. 올해 들어서는 딸아이 학교 봉사단을 인솔하느라 봉사를 몇 번 못 가서인지 설렘과 기다림으로 보낸 며칠 동안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자체만으로도 즐겁지만 그보다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기다렸다는 말이 더 솔직한 심정이다. 유난히도 햇빛이 강렬한 이번 여름의 더위 때문에 빗줄기가 자주 쏟아지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 답사 일정을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온 태풍 소식은 반갑기는커녕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새벽에 눈을 뜨니 빗소리가 쏴아 들린다. 희뿌연 날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채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우리가 가는 고창은 괜찮겠지’ 서둘러 꾸린 짐을 들고 고등학교 1학년인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명덕역에는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성난 비도 누그러진 듯하다. 반가운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밝은 표정, 모두 활기차고 힘차다.
버스는 아침 8시에 명덕역을 출발, 그때까지도 가는 빗줄기는 여전히 오락가락한다. 차창으로 산천 수목이 구름을 뒤집어 쓴 채 다가오자마자 뒤로 떠밀려간다. 88 고속 도로를 들어서며 아침 식사 겸 간식으로 만두를 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찐만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첫 번째 이벤트였다. 만두의 맛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많은 양의 만두를 손수 만드느라 새벽부터 서둘렀을 자원 봉사자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져 더 맛있었다. 지리산 휴게소를 지나 원장님의 인사말에 이어서 이현동 선생님의 1박 2일 일정 소개가 있었다. 답사지는 고창 해넘이 마을과 고창읍성, 고인돌 공원, 미당 문학관, 선운사이다. ‘서해 갯벌 생태 체험’이라는 주제로 다소 빡빡한 일정이지만 알찬 여행이 될 듯했다.
  고창 읍성
고창 읍성에 도착하니 점심 시간이었다. 고창 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라 도민들이 유비 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으로 일명 모양성으로도 불린다. 이 성은 나주 진관의 입암 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진 기지로서 국난 극복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사적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은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50,172평으로 동서북문과 옹성 3개소, 치성 6개소, 성밖의 해자 등 방비 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
고창 읍성은 마을과 산을 함께 이어서 쌓은 성이었다. 우리들은 산 초입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펼쳤다. 추적추적 내린 비로 땅이 젖어 있어 개운치 않지만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다들 입을 모은다. 함께 간 사람들이 좋아서인지, 간간이 불어오는 산바람이 고마워서인지, 시장기가 돌아서인지 아무튼 국에 말아 준 밥을 한 그릇 뚝딱 먹어치웠다. 집에서는 시래기국이라면 손도 안 댈 녀석들이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잘 먹는다.
“시원한 무침회 많이 남았으니 더 드실 분 드세요!”
외치는 소리가 멎은 지 10여 분쯤 지났을 때 우리들은 고창 읍성 내 동헌에 도착해 있었다. 동헌에는 임금의 궐패가 모셔져 있어 초하룻날과 보름에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또 중앙에서 이곳 지방에 출장(?)오면 기거하는 숙소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더위 탓인지 동헌 객사의 넓은 마루가 쉬어 가라고 자꾸 유혹을 하는 착각에 빠진다. 뿌리치고 성곽을 둘러보기 위해 산등성이를 올랐다. 키 큰 노송들이 마치 성을 지키고 있는 양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몇 발 앞에서 자원 봉사자로 온 여학생 서너 명이 연로하신 시각 장애인을 양옆에서 모시고 간다.
“할아버지, 여기 약간 오르막이에요”
“어-어 돌 있어요, 옆으로, 쫌더 아 예 됐어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고 재잘거리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 학생들이 예쁘고 맑아 보여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교직에 계셨던 김 선생님은 80세가량이며 사모님은 70세가 넘으셨다. 늘 함께 다니시는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가끔 뵐 때마다 오래도록 뵙기를 바라고 있다. 사모님은 처음엔 좀 염려스러운 듯하시더니 이내 혼자 저만치 가신다. 성의 높은 곳에 이르니 흐리지만 멀리 고창 시내가 보인다. 잘 가꾸어진 옹성에서 사진 몇 장 찍고 판소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판소리 박물관
판소리 박물관에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판소리의 대부 신재효를 비롯하여 흥선 대원군이 궁으로 부른 진채선과 김소희 등 여러 명창을 기념하기 위한 곳으로, 신재효의 유품과 고창 지역의 명창, 판소리 자료 등 총 1480여 점의 유물 및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에서 우리를 안내하시는 분의 전라도 사투리와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범상치 않다 생각했는데 설명을 마친 후 ‘춘향가’ 중 ‘사랑가’ 한 소절을 가르쳐 주셨다. 부동 자세로 입만 뻥긋하며 따라하는 우리가 안타까운지 몸짓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며 우리들에게도 목을 상하로 움직이며 따라해 보라고 하신다. 허나 그 소리가 어찌 한 번 만에 된단 말인가?
소리 마당에서 판소리 광대들이 남긴 소리북을 두들겨 보기도 하고, 소리굴에서 목소리 크기도 테스트해 보고 밖으로 나왔다. 후텁지근한 날씨가 발걸음을 자꾸 늦춘다. 점심 때 먹은 배추 시래기국과 같은 느낌의 날씨이다.
고인돌 박물관과 고인돌군 지석묘
이어서 청동기인들이 남겨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을 둘러보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가다가 중간에 고인돌 전속 사진 모델로 나온다는 멋진 고인돌을 보기 위해 내렸다. 할머니 한 분이 사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폐가가 되어 있었다. 몹시 궁금해 하고 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만져 보고 확인하고 싶어 하시는 원장님을 모시고 풀숲을 헤치며 고인돌의 규모를 직접 손으로 만져도 보고 지팡이를 대어 길이와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해 드렸다. 역사 문화 기행을 다닐 때마다 나는 나의 입으로 하는 설명만큼 이분들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 가지라도 더 말로 표현하고 싶어진다.
고인돌 박물관에 들어서자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회상 및 고인돌 제작 과정도 재연되어 있었다. 고인돌 박물관답게 당시 생활상이 잘 드러나 보였다. 1층에서 입체 영화를 상영하기에 단체로 관람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외국 동화 애니메이션이었다! 나는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인돌 박물관과 이 영화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정말 생뚱 맞았다. 차라리 청동기 시대 사회상을 동화로 엮었다면 유물과 유적에 대해 더 생각하고 알 수 있을 텐데 좀 유감스러웠다.
박물관을 벗어나 산등성이의 고인돌 군을 보기 위해 레일 없는 기차를 탔다. 10분간 내려서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억세고 키 큰 잡초들이 우거져 근접하기 싫었다. 조금 더 정비를 해서 관람객들의 불편을 덜어 주었으면 싶었다.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있는 고인돌 떼무덤은 청동기 시대 족장의 가족묘였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강가에서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청동기인들은 비옥한 터전을 찾아 야산과 들판으로 옮겼으며, 이 곳 고창이 바로 그들이 터전을 이룬 최대의 곡창 지대로 경제적 부와 권력이 집중되지 않았을까?
  미당 서정주 문학관
선운리의 질마재 아래에는 폐교를 개조한 ‘미당 시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갈하고 아담하게 보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와 사진,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교실을 서로 연결한 전시실의 벽면에는 학창 시절 듣고 외웠던 ‘국화 옆에서’, ‘귀촉도’ 등이 빛바랜 액자 속에 갇혀 걸려 있다. 일제 강점기에 썼던 친일시와 친일 변명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서정주 선생의 천재적인 시적 표현력 뒤에는 늘 ‘친일’이라는 오명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전시실 안에서 관리인의 강의를 들었다. 생전의 미당 선생의 행적과 익히 알려진 시 낭송도 해 주셨다. 좀 아쉬운 것은 시 낭송을 너무 밋밋하게 하셔서 시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았다고 할까? 전시실 가운데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가 있어 멀리 선운리 길 끝자락으로 바다가 보인다지만 비가 와서 미끄러워 올라가지 못했다.
버스에 오르니 원장님께서 ‘국화 옆에서’ 시를 다 외웠다고 읊어 주신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리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고, 간밤엔 무서리가 내리고 내겐 잠도 오지 않던- 그런 인고의 시간이 지나서야 한 송이의 국화꽃이 필 수 있는 것이었다. 그윽한 국화 향기 맡을 수 없는 여름이지만, 오래전 친구들과 함께 엽서에 시를 적어 보냈던 추억의 향기는 새록새록 솟아오르고 있었다.
  해넘이 마을 (갯벌체험)
저녁 7시쯤 해넘이 마을에 도착했다. 회색빛 하늘 아래 희뿌연 바다가 가까운 듯 먼 듯 아스라이 보였다. 푸른 바다, 황금빛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면 우리들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바다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서해 바다 특유의 혼탁한 물빛을 뒤로 한 채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모텔을 개조하여 1층은 식당, 2, 3, 4층이 객실로 이용되었다. 우리는 각자 배정받은 숙소로 올라갔다. 우선 방에서 짐을 풀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쉬었다. 헌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밥 먹자는 말이 없다. 배가 고팠다. 알아보니 식당에서 연락을 늦게 받아 식사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점점 지쳐 가는 얼굴 표정들이다. 8시 30분이 지나서 1층 둥근 테이블에 8명씩 둘러앉아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숟가락이 들락날락, 쭈글쭈글한 표정들이 펴지고 있었다. 어른들은 고창의 슈퍼에서 샀던 복분자를 식사와 함께 마셨다. 식사가 끝날 때쯤 주인장께서 슈퍼에서 산 복분자보다 여기서 직접 담근 복분자가 제대로 된 맛이라며 찬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스테인레스 주전자를 들고 우리들에게 권하셨다. 이쯤은 되어야 고창 가서 복분자 마시고 왔다 하겠지. 단맛보다 쓴맛이 입안 가득 채워지는가 싶더니 넘어가는 골마다 열기가 느껴졌다. 독한 포도주 같기도 했다. 우리들은 복분자로 인해 웃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웃고, 그렇게 고창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밤 열 시가 넘어 바다에 물이 빠졌고, 우리들은 갯벌 체험을 하러 갔다. 호미 크기의 쇠스랑 같은 도구와 손전등, 작은 양동이를 들고 바다에서 달리는 자동차인 ‘사파리’에 올라탔다. 사파리에는 우리 팀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60여 명 탄 듯하다. 사파리가 서서히 바다를 향해 전진했다. 굵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잘하시는 김성수 선생님은 통기타로 알 수 없는 노래를 연주 하신다. 습한 해풍이 가슴까지 스며들었다. 바다로 얼마나 달렸을까? 뒤돌아보니 해변의 불빛이 아득하다. 옆을 봐도 앞을 봐도 칠흑 같은 어둠이 자욱하다. 경운기보다 더 시끄러운 사파리 엔진 소리와 사람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김성수 선생님의 통기타 소리가 묻혀 버린 지  한참 지났다. 대체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은근히 겁도 나고 무서웠다. 30분은 달린 듯하다.
드디어 갯벌에 내려섰다. 바닥이 촉촉했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안전 요원의 지시를 듣고 난 후 우리는 ‘범게’와 ‘금게’를 캐기 위해 몇 명씩 흩어졌다. 맨발바닥에 닿는 갯벌의 부드러움과 걸어도 걸어도 다 밟지 못할 넓은 갯벌이 좋고 신기해서 게를 캐려는 마음은 뒷전이었다. 문득 낮에 돌아본 고인돌 떼무덤이 생각났다. ‘고인돌은 무덤이니 인생의 마침표가 아닌가? 그러니 그 영혼들이 하늘에 닿았을 것이고, 내가 서 있는 이곳은 갯벌, 수많은 생명체가 꿈틀거리며 살고 있으니 자연의 절정인지라 물 끝에 닿아 있구나.’ 낮에 산등성이에서 훤히 드러난 고인돌과 밤에 갯벌 속에 숨겨진 게를 찾는 지금과 대비되어 야릇한 생각에 한참 젖어 있는데 옆에서 걷던 원장님께서
“이야, 여어(여기) 진짜 좋네, 축구해도 되겠네, 와아 축구하면 좋겠다.” 하시며 연거푸 갯벌의 감촉과 걸림돌 하나 없는 바닥의 매끈함에 탄복하신다. 순간 튈 때 마다 소리로 위치를 알려 주는 축구공이 있으면 좋을 텐데 싶었다.
휙 돌아보니 천지간 어둠뿐이다. 어둠의 막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뻑뻑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손전등으로 앞으로, 옆으로, 위로 비춰 보았으나 끝을 따라가지 못하고 몇 미터 앞에서 불빛이 어둠에 갇혀 버린다. 새삼 느꼈다, 어둡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이토록 무거운 것을 어깨에 걸치고도 가뿐한(?) 삶으로 승화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어 새삼 귀하게 보인다. 그리고 함께 어울릴 수 있음에 고맙고, 또 고마워할 것이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한 채 게가 들어가 있을 만한 말발굽 모양을 찾느라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게를 잡았노라는 행복한 신호음이 터지고 있었다. 우리 팀은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서서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데나 한 곳을 자리잡고 무작정 파 보기도 했지만 헛수고 예다. 이리저리 자꾸 걸으며 게가 숨어 있다는 말발굽 모양을 찾아 쇠스랑질해 보았지만 역시 ‘꽝’이었다. 할 수 없이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 원장님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어디를 파면 될지 좀 알려 주세요.”
“워메 아즉까정 한 마리도 못 잡았시유잉? 이쪽으로 함 와 보시요잉.”
우리는 손전등을 들고 얼른 뒤를 따라갔다. 못 보던 도구를 다른 안전 요원이 들고 왔다. 50cm가량의 커다란 끌개에 달린 굵은 줄을 허리에 묶어 뒷걸음치면 끌개가 10cm 정도 깊이의 땅을 고르게 파 주는 것이었다. 몇 걸음 떼자마자 커다란 게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땅을 파고 들어가는 놈을 얼른 낚았다. 손으로 잡다가 잘못하면 손가락이 잘라질 정도로 날카롭고 힘세다니 쇠스랑으로 얼른 들어 양동이에 담았다. ‘심봤다’ 하고 크게 외치고 싶었다. 원장님을 비롯하여 몇 분은 직접 끌어 보셨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끌개 덕에 게를 여러 마리 잡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리도 허리도 지쳐 감을 느낄 때 뭍으로 나가자는 신호가 왔다. 사파리에 앉아 인원 체크를 했다. 여러 번 확인한 후 만선의 기쁨을 안고 습한 해풍을 가르며 숙소에 도착했다. 밤 12시가 넘었다. 게를 한곳에 모았다. 모두 흙투성이가 된 옷과는 달리 표정은 대낮보다 밝다.
이대로 잠들면 어쩐지 억울할 것 같은지 몇 분들은 숙소 앞마당의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계신다. 노래와 술과 이야기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에(?)’ 시간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모여들기도 전에 오락가락하던 비가 굵은 빗줄기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컵라면을 들고 숙소로, 자리 잡은 어른들도 아쉽다는 표정으로 숙소로 향했다. 내일을 또 기약하며 .......
여유 있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물이 빠진 바다로 향했다. 비교적 맑은 날이다. 오전에 조개 캐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이다. 정말 넓고도 넓은 갯벌이다. 저 멀리 갯벌 끝에서 파도가 보인다. 어젯밤엔 어둠이 가득한 바다에서 게만 찾았는데 지금은 텅 비어 버린 듯한 바다에서 숱한 생물들의 꿈틀거림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너무나 활기차다. 그리고 신기했다. 살아 있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생동감 있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지 않나 싶다. 멈춘 듯, 웅크린 듯, 뒷걸음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캔 조개는 아니지만 점심으로 바지락조개를 듬뿍 넣은 칼국수를 먹었다. 어젯밤 떼거리로 몰려가 잡았던 찐 게도 함께. 모두들 어제보다 더 편해진 듯 이야기가 서로 오고간다.
  선운사 도솔암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서 선운사에 도착했다. 선운사 들어가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했다. 우거진 숲길 옆으로 콸콸 흐르는 계곡물이 무척 시원해 보인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 (577)에 검단 선사가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 조사와 합력하여 신라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당시 89 암자에 3,000 승려가 수도하는 대찰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선운사로 들어가기 전 먼저 도솔암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니 차에서 느껴지던 시원한 숲길은 온데간데없고 후텁지근함이 우리를 맞이한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도솔암에 들어서니 짙은 향내와 함께 기도 중인 듯 불경 외우는 소리가 들린다. 건너편 우뚝 솟은 봉우리는 나무보다 거대한 바위가 먼저 눈에 확 들어왔다. 고창엔 유난히도 큰 바위가 많아 고인돌이 많은 걸까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낼 것 같지 않은 바위를 건너다 보며 서울에서 오셨다는 신 선생님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신 선생님은 중고생인 두 자녀와 함께 오셨는데 가족끼리만 다니시길래 도솔암으로 오르기 전 고등 학생인 딸에게
“집에서 아버지 옆에 늘 있었으니 오늘은 여기 온 학생들하고 어울리며 친구도 좀 사귀고 할래? 어른들 봉사자들 많으니까 아버지도 어른들하고 이야기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땀이 난 얼굴로 웃으며 본다. 그래도 되겠냐는 듯이. 참 맑은 표정이다.
  신 선생님은 군대 하사관 복무  시절 지뢰 사고로 시력을 잃었으며, 제대 후 곧바로 점자 공부를 시작하고 이듬해 결혼하셨단다. 37년 동안 어둠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며 자신은 현실을 빨리 받아들였다고 하셨다. 빨리든 늦든 어느 누가 갑자기 닥쳐온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나 싶다.
도솔암 곁의 바위에 새긴 거대한 마애 불상의 파격적인 미소(이현동 선생님의 표현)가 일상에서 늘 쫓기는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 여유를 준다. 거울인 양 쳐다보며 ‘씨익’ 따라 웃어 보았다.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도솔암에서 내려오는 길에 잠시 계곡물에 발을 적셨다. 비가 와서인지 그다지 차가운 계곡물답지 않다. 그래도 계곡 옆에서 먹는 수박 맛은 좋았다.  
선운사는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워서인지 넓은 평지가 눈에 들어온다. 경내에 있는 만세루의 지붕 가운데 색깔이 다른 기와가 있는데 이는 궁궐과 관련된 증표라고 한다. 대웅전 뒤로 지금은 잎만 무성한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보인다. 꽃이 핀 절정의 시간은 일주일 정도이며, 그 때 보면 사찰 뒤로 꽃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룬다고 했다. 커다란 범종도 눈에 띄었다. 선운사의 6층 석탑은 창건 당시 9층탑으로 건립되었으나 유실, 개축되면서 6층탑으로 되었단다. 기단부에서 상륜부로 올라가면서 아무리 보아도 9층에서 6층으로 바뀐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개축할 때 잘 다듬었나 보다. 왜 홀수로 하지 않고 짝수층으로 했는지 궁금해진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후 4시 넘어서 대구로 출발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또 하나의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사행시’와 ‘역사 문화 퀴즈’이다. 이 두 가지는 그날에 답사한 곳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고 정리하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재미있는 시간이다. 마치 과거 시험을 치르는 듯한 분위기이다. 사행시 속에는 인생의 철학이 있고, 웃음이 있고, 재치가 보이고, 글재주가 보인다. 오늘의 시제는 ‘고창질마’이다. 고창의 질마재를 연상한 것이다.
지리산 휴게소를 지났다. 고창을 출발하면서부터 퀴즈에 대한 철저한(?) 복습과 사행시 짓느라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노력한 내 뒷좌석에 앉은 팀들에게 오늘의 노력상이 돌아갔다. 어떤 분은 사행시가 아닌 긴 산문으로 일상에서 벗어난 여유로움과 행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돌아가 바쁘게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마음은 글과 함께라고 했던가? 그 글 속에 너무나 잘 드러나 있어 충분히 공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문화원의 간사는 역시 ‘간사’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그 주인공들을 챙기는 몫은 간사라고나 할까? 대구에서 출발하면서부터 넌지시 던진 한마디!
“고창 가면 복분자, 풍천 장어는 맛 봐야 되는데.”
“풍천 장어 셀프로 파는 곳도 있다던데”
  이렇게 가볍게 던진 말을 간사는 못 사 준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사실 우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다. 하긴 고창의 3대 먹을거리가 풍천 장어, 복분자, 작설차라고 하니 들먹일 수밖에. 간사는 사행시에서 박간사 버전으로 함께 한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고, 장어를 못 사준 것을 미안해했다. 물론 간사님이 미안해할 일이 전혀 아니다. 우리 가는 길에 장어집이 안보인 장어집 탓이지만?!(하하). 그랬다.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답게 와 닿았다.
대구에 들어서니 불빛이 찬란하다. 아쉬움과 즐거움을 나누어 가지고 흩어진다. 별은 안 보여도 빛은 있었다.


▣ 역사 기행 - 답사 사행시

시제: 울진 성류

정희란
  울: 울퉁불퉁 성류굴 바위들에 머리가 부딪혀도
  진: 진수 성찬 차린 듯 만물상의 기기묘묘한 모습들이
  성: 성스러운 수억 년 세월의 조각품이라
  류: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네


이석규
  울: 울진 대표, 진주 대표, 성남 대표, 유성 대표가  
  진: 진주에 모여서 이들 도시 간의 친선 축구 대회 개최 문제 협의를 시작했는데
  성: 성남 대표는 성남에서 먼저 개최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류: 유성 대표는 유성에서 먼저 개최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오늘 이 시각까지 협의가 끝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시제: 고창 질마

한지예(동부고 1)
  고: 고생고생 오만 고생 다하고
  창: 창창했던 출발할 때 얼굴, 더위에
  질: 질려서 300년 폭삭 늙었지만
  마: 마음만은 날아갈 듯이 기뻐요

도애희
  고: 고인돌로 유명한 고창으로 1박 2일 여행가는 길
  창: 창밖으로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질: 질퍽한 갯벌에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 몰랐었네
  마: 마음은 아직 갯벌에 앉았는데 몸은 벌써 대구에 있네

노선나
  고: 고민도 많았고
  창: 창창한 꿈도 있었지만
  질: 질풍 노도의 시기에는
  마: 마음만은 깃털 같았었네

  시제: 계룡동춘

조경자
  계: 계룡산 마루를 떠도는 흰구름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고
  용: 용처럼 소용돌이 치는 듯 못생긴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있다.
  동: 동그랗게 빚으려 했건만  
  질: 질그릇은 모가 나고 말았다
  춘: 춘경추수는 천지의 이치이며 첫술에 배부를 수 없음은 불변의 진리임을 잊었던가

권중노
  계: 계룡산 굽이굽이 흘러가는 시냇물
  용: 용도산 산자락에서 내려다보니
  동: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것이
  춘: 춘삼월이나 동지 섣달이나 쉬지 않는 우리의 역사 기행과 같네

홍용점
  계: 계속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용: 용신의 기운 받은 동춘당
  동: 동춘당을 바라보니
  춘: 춘절에도 또 오고 싶다

박정희
  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용: 용필이 오빠의 가슴에 안겨
  동: 동동주 한 잔 걸치는
  춘: 춘몽을 꾸어 보았네

이석규
  계: 계모가 반드시 생모보다 덜 자애롭지 않은 것은
  용: 용모 준수한 자가 반드시 추한 자보다 더 정직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동: 동일한 잣대로 만인의 성품을 잴 수 없는 것은
  춘: 춘하추동을 옷 한 벌로 지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제: 해미 개심

김동현(월배초 6)
  해: 해를 바라보며
  미: 미소를 짓습니다
  개: 개구쟁이처럼 놀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심: 심심찮게 옛 생각이 살아납니다

김태자
  해: 해바라기처럼 해맑게 웃던
  미: 미소가 아름다운
  개: 개구쟁이 내 친구들
  심: 심신이 괴로울 때는 더욱 그리워집니다

권중노
  해: 해 아래에 별별 사람 다 있더라
  미: 미운 사람도 보았고 좋은 사람도 보았다
  개: 개과천선을 바랐던 미운 알암들
  심: 심보 고치기를 더는 기대는 않으니 남의 앞길 막지나 말아 다오

박진희
  해: 해 보고 싶은 걸 하고, 먹고 싶은 걸 먹고 나면
  미: 미련을 깨끗이 버려야 하는데
  개: 개골거리는 마음을 보니
  심: 심보를 잘 다스려야겠다

이경재
  해: 해가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미: 미워도 한세상 좋아도 한세상
  개: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심: 심심한데 우리 뽀뽀나 할까

이석규
  해: 해는 져서 사위가 어두워 오는데
  미: 미로 같았던 역정에 미련이 많이 남는 것은
  개: 개과를 좀더 일찍 하지 못한 것이라
  심: 심사 비창함을 금할 길 없네

    시제: 진해 군함

손보경
  진: 진득하게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해: 헤매 왔습니다, 21년 동안을
  군: 군고구마가 생각나는 이 겨울
  함: 함박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박미정(용산중 1)
  진: 진정하세요
  해: 해군 아저씨들
  군: 군대에서 열심히
  함: 함께 복무하다 보면 언젠가는 휴가를 받습니다

정이정
  진: 진취적인 기상으로  
  해: 해군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달성했던
  군: 군사들의 당부와 유훈이
  함: 함성이 되어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울립니다

박진희
  진: 진달래 피는 3월에 다시 만납시다
  해: 해가 바뀌어도 역사 기행은 계속 됩니다
  군: 군데군데 미흡한 부분은 보완할 테니 내년에도
  함: 함께 해 주세요

장애인의 장애극복기

늦게 시작한 공부가 나를 눈뜨게 했다.

박명애(55세, 여, 지체장애 1급)

  
  

나는 경남 진주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 평범한 집안의 4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귀여움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던 나는 첫돌이 다가올 무렵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러 외가에 가시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갔던 나는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는 외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머무르던 그 밤에 갑작스런 경기와 고열을 앓았고, 얼마 후 경기와 열은 멎었지만 두 다리는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나의 다리를 고쳐 보려고 백방으로 애를 써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시에는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그저 경기의 후유증 정도로만 알았던 것이 40여 년을 집안에만 갇혀 지내게 한 천형인 소아마비였다.
  멀쩡한 아이를 업고 갔다가 병신이 된 아이를 업고 돌아와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우리 집에서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이 전적으로 어머니의 부주의 탓으로 돌렸으니, 당시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내 병을 고쳐 보겠다고 남강을 건너 한의원으로 침을 맞히러 갈 때마다 어머니는 차라리 나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질까도 생각했지만 불구가 된 줄도 모르고 초롱초롱 맑은 눈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나를 보고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장애로 인한 나의 힘겨운 생활보다는 나의 장애로 인해 어머니가 겪었을 슬픔과 서러움에 더 가슴이 저린다.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눈물은 두 아이의 어미가 된 후에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그저 엉덩이를 밀고 방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좁은 창밖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나의 활동의 전부였고, 장애라는 것이 무엇인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래 아이들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돌도 되기 전에 나에게 닥친 장애는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좁은 세계 속에 가두어 놓고 말았다.
  막내 동생이 돌을 맞을 무렵 나에게도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지만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왜 학교에 갈 수 없는지도 알지 못했고,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그다지 하지 못했다. 다만  함께 놀던 또래 아이들이 모두 학교로 가고 나 혼자 집에 남게 되면서 친구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어린 동생들과 놀거나 어머니와 함께 보내거나 아니면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면서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며 친구들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야만 했었다. 온종일 친구를 기다리다가 그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들의 등에 업혀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친구들 등에 업혀 동네 나들이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에게 나를 맡기지 말고 어머니가 나를 업고 바깥 바람을 쏘이게 하라고 닦달하셨지만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어머니로서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친구들 등에 업혀 동네 구경을 하고 오는 날이면 어머니에게 크게 역정을 내셨다. 나는 나에게 꾸중을 하시거나 나더러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가슴 아팠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꾸중 듣는 것이 안쓰러워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좁은 방에 갇혀 고독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었던 시절, 어깨너머로 글을 익혀 친구들이 빌려다 주는 책을 읽거나 동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럴 때 어머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친절한 소식통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말벗이 되어 주었고 집 밖의 소식을 전해 주셨다.
  부모님이 왜 나를 업어서라도 학교에 데리고 가지 않았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내버려 두고 나를 업고 학교에 가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나를 업고 귀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진주 지역에는 특수 학교도 없었고, 일반 학교에는 내가 공부할 수 있는 특수 학급도 이용할 편의 시설도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으므로 부모님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우리 집은 대구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우리보다 5년 먼저 직장 관계로 오셔서 친척집에서 기거하고 계셨는데, 아버지가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이 모두 대구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진주에 있을 때는 어릴적 친구들도 있어서 가끔씩 동네 나들이도 할 수 있었지만 대구에 오고부터는 철저하게 격리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친구 하나 없는 대구에서의 나의 일과는 집안에서 창밖 세계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우리 집은 달성 공원 옆에 있었는데 얼마 동안은 그것이 공원인 줄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 대문 앞을 지나 공원 담장을 따라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저 집은 얼마나 크기에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출입하는 것일까 혼자서 궁금해 하기도 했다.
  대구에서의 나의 삶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밖에는 없다. 어머니는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면서 나를 돌보고 나와 함께 있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그 흔한 계모임에도 한 번 가지 못하시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개의치 말고 계모임도 가시고, 친구분들하고도 어울리시면서 어머니의 삶을 사셔야 한다고 하면서도 어머니가 잠시라도 안 계시면 불안하고 두려웠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오로지 어머니에게 의지하면서 좁은 집에 갇혀 지내면서도 그런 생활이 비정상적이라든지 그런 삶을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못했었다.  
  부모님은 동생들 공부시키느라 힘드시고 동생들 역시 공부하느라 힘드는데 나마저 나의 욕망을 위해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이러한 잘못된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나의 삶을 오랜 동안 좁은 세계 안에 가두어 놓은 것 같다.
  처녀 시절에는 텔레비전을 통해 탤런트들이 예쁜 옷을 입고 나오면 나도 예쁜 옷을 한 번 입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나는 옷을 사러 시장에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옷을 사다 주면 입고 동생들이 선물로 사다 주면 고맙게 받아 입어야만 했다. 엄마는 내가 몸이 불편하니까 함께 시장에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동생들은 자기들 보기에 좋은 옷을 사다 주면서 동생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에 스스로 만족해했을 뿐 나의 취향이나 관심 같은 것은 알아볼 생각을 하지를 못했다. 나도 욕구가 있었고 취향이 있었지만 내 생각과 마음을 표현할 줄을 몰랐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장애가 있으면 옷을 더 단정하게 입고 있어야 한다며 동생들에게는 안 사 주는 새 옷을 나에게는 사 주시곤 하셨는데, 나는 동생들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왜 장애가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옷을 정갈하게 입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우리 부모님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새삼 섭섭하게 느껴진다. 세상 구경도 내가 하고 싶으면 친구나 어머니 등에 업혀서라도 하는 것이고, 내가 하기 싫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준비되어 있더라도 하지 않는 것인데, 아버지는 자동차가 준비되고 나를 데리고 다닐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가까운 바깥 나들이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이처럼 나의 일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이나 동생들의 생각과 잣대로만 판단하고 결정하였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는 더욱더 소극적인 성격으로 굳어져 갔다. 우리 부모님이 바깥에도 좀 내보내고 용기와 의지를 북돋워 주었더라면 훨씬 더 일찍 장애를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자 나는 우리 집의 전화 교환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성격이 불 같아서 전화를 조금이라도 늦게 받으면 왜 빨리 받지 않느냐고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셨으므로 나는 이 일에도 착한 딸, 착실한 전화 교환원이 되려고 애썼다. 전화는 텔레비전과 함께 나의 새로운 친구가 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전화를 통해 가정에서의 나의 역할과 위치를 확인하면서 대구에서의 나의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정길, 박근형 같은 잘생긴 탤런트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주말의 명화 극장 등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그리고 한 달 또 한 달을 보내면서도 텔레비전 속의 세상은 나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텔레비전 속의 세상은 그저 내가 다다를 수 없는 상상 속의 이야기일 뿐 나의 삶에 한 줄기 바람도 되지 못했다. 해마다 제야에는 텔레비전 속의 사람들은 희망의 종소리를 듣고 동해로 해맞이를 떠난다고들 야단이었지만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텔레비전 속에서 많은 처녀 총각들이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기르는 행복한 가정생활도 그저 별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삶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서른 살이 되던 어느 날 남동생을 통해서 같은 종교를 가진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몇 달 동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결혼 이야기가 오갔고, 나는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결혼에 대한 꿈과 고민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장애를 가진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삶이 당장 신데렐라처럼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은 욕망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나는 매일 불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핑크빛 환상은 결코 아니었지만 이 사람이 아니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혼담이 나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으로 기대와 설렘으로 다가온 반면, 부모님은 나의 결혼을 반대했다. 부모님은 장애를 가진 딸을 시집보내려면 전셋집이라도 한 칸 마련해서 보내야 시집살이가 조금은 덜 고달플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당시 우리 집 형편으로서는 버젓하게 한 살림 마련해서 보내기 어려웠다. 남편 될 사람은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부모님들이 그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했고 세상을 몰랐기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이 못내 서운하기만 했다. 나의 장애와 결혼, 남편과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 등 결혼이 가져올 수 있는 많은 상황들에 대하여 보다 신중하게 생각할 줄도 몰랐고 그저 지금의 나의 삶을 한 번 바꾸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에 집착했지만 나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할 줄도 몰랐고, 다만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대로 추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만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지금 젊은 여성 장애인들이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좀더 자신 있게 나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혼을 한 몸이면서도 장애를 가진 여성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당당하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의 의지와 비전에 따라 당당하게 태도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장애인 부부가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주체자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장애인 야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장애와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이 크게 바뀌었지만 서른 살의 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또 다른 장애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장애가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장애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좁은 생각이었다. 1년 가까이 참 많이 아파하면서도 마침내 가족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했다.
  나는 결혼을 하면 남자와 여자가 그냥 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예식 준비 등 결혼의 절차는 만만치 않았다.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드레스를 입고 복잡한 결혼 절차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날로 커져 가는 걱정에 잠이 오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마치고 부산으로 신랑과 함께 2박 3일의 신혼여행을 갔다. 나와는 달리 신랑은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어서 내가 탄 휠체어를 밀면서 국제 시장 등을 씩씩하게 둘러보았다. 난생 처음 가족들과 떨어진 여행길이었다.
  신혼여행을 가기 전까지 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단 한 번밖에 하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차를 비롯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서 경주를 구경시켜 준 것이 유일한 여행 경험이었다. 나 스스로도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을 표현하지도 못하였고, 휠체어 하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 멀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혼여행 때는 수동식 휠체어를 신랑이 밀면서 짧은 거리를 다니기는 했지만 그 후에도 집밖을 나서는 일은 쉽게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10여년전 어느 장애인 단체가 주관한 지리산 여행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당시에는 고속 도로 휴게소에도 장애인용 화장실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주최 측에서도 지리산에 휠체어 사용 장애인을 위한 화장실을 준비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에 나는 종일 소변을 참아 가며 고통스러운 나들이를 했었다. 지금은 편의 시설법이나 활동 보조인 제도에 따라 많은 시설이 개선되었고, 도와주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설도 안 되어 있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해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준비 없이 시작된 나의 결혼 생활은, 삶을 바꾸어 보겠다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부모님은 신혼살림을 친정에서 시작하자고 했으나 몸이 불편하니까 결혼을 하고서도 친정에 그대로 산다고 하는 것만 같아서 아파트를 전세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하기로 했다. 둘만의 오붓한 생활에 대한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꿈은 며칠 만에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결혼 휴가를 끝내고 남편이 직장에 출근을 하던 날, 남편은 홀로 남은 나를 집안에 남겨 둔 채 밖에서 현관문을 잠그고 출근을 했다. 내가 집 안에서는 엉덩이를 밀고 여기저기를 다닐 수는 있었지만 현관문 손잡이 높이까지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문은 밖에서 잠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또다시 집 지키는 강아지 꼴이 되어 종일 라디오나 들으면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종일 집 안에 갇혀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나의 지난 생활을 바꾸어 보려던 열망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나의 손 높이에 맞추어 아파트 현관문 자물쇠 높이를 조절한다는 것도, 싱크대 높이를 맞춘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도 남편도 자신들이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의 생활 여건 개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성공적인 결혼 생활 영위에 회의적이었던 선배 여성 장애인들은 이런 처지를 보면서 몹시 안타까워했다. 경증 장애를 가지고 있던 그들은 중증 장애인인 나의 결혼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했었고, 나는 보란 듯이 잘 살아 보이겠다고 장담했지만, 나의 참담한 신혼 생활은 장애 여성의 결혼을 반대했던 그들의 우려가 현실화한 듯이 보였고, 나는 또다시 무력감에 빠지고 말았다. 휠체어 사용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두 팔의 힘이 부족하여 혼자서는 휠체어 바퀴를 굴리기 어렵기 때문에 집안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한 달 만에 나는 시어머니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시어머니는 편찮은 몸으로 혼자 살고 계셨는데, 나는 시어머니께 내가 며느리로서 모시고 살 자격은 없지만 몸이 불편한 딸이라 생각하시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고 부탁을 드렸고, 남편도 장남으로서 몸이 편찮은 시어머니를 홀로 기거하시게 하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는데, 나와 시어머니가 함께 살기를 원하자 우리는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우리와 5개월을 살다 돌아가셨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남편이 얼마간 외국에 나가 일을 하게 되자 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친정살이를 하는 동안 아기를 둘 낳았다. 아기를 낳게 되자 장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비애를 또다시 느껴야만 했다. 내가 낳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자괴감이 우울하게 만들었고, 친정어머니를 또다시 힘들게 한다는 생각에 죄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수술로 첫 아이를 분만한 지 일주일 만에 퇴원하자 어머니는 걸을 때까지는 당신 방에서 재워야 한다며 첫날부터 아기를 당신 방으로 데려 가셨다. 아이가 세 살이 되고부터 우리 방에서 자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를 키우고 보살피는 것은 어머니의 부담이었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집안 어른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둘째를 가지라고 권하게 마련인데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었고, 나 역시 둘째 아이에 대한 생각이 없고 대비도 전혀 하지 않은 상황에서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여성이라면 결혼하고 나서 당연히 아이를 가지고 또 첫 아이가 어느 정도 크게 되면 둘째 아이를 임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인데, 나와 가족들은 나의 둘째 아이 임신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임신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 기뻤고, 남편 역시 기뻐해 주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애 하나 키우기에도 힘들었는데 둘째를 가져서 어머니를 힘들게 한다고 수군거리며 나를 나무라는 눈치였다. 동네 사람들의 그런 말들이 당시에는 날카롭게 나의 가슴을 찔렀다. 장애를 가진 여성은 결혼도 출산도 나 자신의 선택과 결정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만 하는 일인가 싶어 더없이 우울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둘째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면 첫 아이가 아들이니 이번에는 딸이었으면 좋겠다든가, 첫 아이가 딸이니 둘째는 꼭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덕담을 해 주었을 텐데 장애 여성이 임신한 둘째 아이에 대해서는 도리어 날카로운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또다시 고생하실 어머니를 생각하고,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생각하면서 둘째 아이를 유산시키려고도 생각하였으나 혼자서는 병원에도 갈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둘째 아이의 임신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굳은 결심으로 아이를 낳았었는데,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손과 발이 되고, 때론 나의 친구가 되어 준 딸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동안의 나의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했을까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장애 여성이 결혼을 할 때 아이가 자라면 엄마를 돕고 의지가 될 것이라고 쉽게 말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과 말은 장애인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는 많은 상처와 부담이 된다. 장애인은 자신이 자식의 도움에 의존하여 생을 부지해 가야만 한다는 서글픈 현실에 대한 자괴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느끼는 부모 부양에 대한 부담감에 더하여 주변 사람들의 무언의 명령으로 인해 정신적 압박감이 시달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별 생각 없는 이런 말들이 장애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하여 비장애인들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기쁨도 컸지만 밤에 아이들이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라도 가야 할 경우에는 나 자신이 움직일 수 없어 어머니나 남편이 아이를 데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몇 시간 동안의 피 말리는 기다림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이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지 못하는 어미로서의 안타까움과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절감은 장애가 가져다 주는 그 어떤 고통보다도 크고 쓰라린 것이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미리 생각을 해서인지 엄마에게는 요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때 내가 느끼는 엄마로서의 미안함과 자괴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착하게 자라 주었지만 그 아이들 스스로 가슴 속에 억눌러야만 했을 엄마에 대한 이런저런 욕구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려 온다. 장애를 가진 엄마로 인해서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어린 시절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집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나를 지켜보았을 어머니의 심정이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생활 기록부나 가정 통신란에 부모 학력을 기재하는 공간을 접하게 될 때마다 나는 좀 망설여졌지만 결국은 엄마 학력란에 무학이라고 적어 넣곤 했다. 자녀의 생활 기록부에 부모의 학력을 거짓으로 기재한다고 해서 누가 조사를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만 학력을 고졸이나 대졸로 거짓으로 속여 놓았다가 나중에 아이 담임선생님이 엄마와 함께 해야 할 숙제라도 잘못 한 것을 알게 되면 고등학교나 대학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이런 것도 못 하느냐 하는 말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이들에게 나의 장애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듯이, 그 장애로 말미암아 내가 학교 문전에도 가 볼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으므로  용기를 내어 무학이라고 적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무학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 내가 적어 주는 그대로 생활 기록부를 학교에 가져가곤 했는데, 학년이 높아지면서 무학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자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친구들에게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담 선생님에게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전화를 걸어 나의 장애와 사정을 이야기하고 장애로 인해 아이에게 제대로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선생님들의 협조를 부탁드리고는 했지만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공부에 대한 열망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해져만 갔다.
  그러던 중 내 나이 마흔일곱이 되던 2000년의 어느 날 장애인 야간 학교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장애인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콜 택시를 알게 되었다.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을 억누를 수 없어 콜 택시에 전화를 걸어 1급 지체 장애인으로 몸이 좀 뚱뚱한 아줌마인데, 업어서 택시도 태워 주고 계단이 있는 장애인 야간 학교에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콜 번호 180번인 나를 업어 장애인 야간 학교까지 데려다 주신 몇 분의 택시 기사분들과 정성껏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를 패스하였고,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하고 있다. 여타의 과목들은 통과했는데, 영어와 수학, 과학 과목은 어려움이 많다. 주변의 사람들은 9년째 야간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나를 향해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 그 나이에 졸업장을 굳이 받아서 무얼 하겠느냐는 등 말이 많지만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동안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아이들을 향해 엄마의 진심어린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비록 늦은 나이에 하는 공부라 힘도 들고 속도도 나지 않지만 끝까지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게 되면 한국 방송 통신 대학에도 진학하고 싶다.
  야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너무나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은 화장실 문제를 비롯하여 개선해야 될 우리 사회의 환경과 장애인에 대한 편견 등 장애인 스스로가 해결했어야 할 일들에 대하여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비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들보다 먼저 생각하고 우리들의 의견을 모아 앞서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앞장서는 야간 학교 선생님들의 노력을 보면서 이제 우리들의 문제는 우리들 장애인 본인들이 앞서서 해결해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선생님들의 격려와 동료들과의 나눔을 통해 많은 용기도 얻었다.
  그동안은 집에 친구나 친척이라도 찾아오는 날이면 화장실이 휠체어를 사용하기 곤란하여 볼일을 보려면 문을 열어 놓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내 집 안에서조차 화장실 볼일을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억지로 참고 견뎌야만 했었던 우리들이 공공 건물의 화장실을 개조하라고 요구하고, 지하철 리프트가 절대적으로 위험하니 역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고 요구하는 등 우리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일에도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동안 나는 너무나 세상을 몰랐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지만 이제 조금씩 나 자신과 장애 여성으로서의 삶, 우리 사회의 모습과 현실에 눈을 떠 가면서 우리 앞에 직면한 장벽은 우리들 장애인 본인들이 헤쳐 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고, 더 아름다운 사회, 장애인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그날을 위해 일하고 있다. 나는 장애인 야간 학교를 통해 내 인생의 후반부를 새롭고도 활기차게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만난 장애 동료들과 함께 중증 장애인 활동 보조 제도의 도입과 장애인 권익 신장, 차별 금지 등을 위해 일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전동 휠체어 덕분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은행으로, 은행에서 관공서로 다니며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휠체어 사용자들이 만나는 도심 환경은 너무나 큰 벽으로 남아 있다. 아주 낮은 턱에도 휠체어가 올라갈 수 없어 막막하게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려야만 하는 일,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에서 위험한 리프트에 올라 도로를 건너거나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일, 지하철이 없는 지역에 가기 위해 몇 대 안 되는 저상 버스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일, 전동 휠체어를 실을 수 없는 일반 택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고층 건물의 회전문 등 우리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우리 사회의 장벽은 너무나 많지만, 우리 장애인들이 같이 힘을 모아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면 장벽 없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이 날로 굳세어진다.
  비 오는 날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우산을 받쳐 들고 집을 나서면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몸도 불편한 사람이 비도 오는데 어딜 그렇게 다니느냐고 한 마디씩 한다. 지금은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 일일이 대꾸하기도 힘을 들지만, 그리고 처음엔 그런 말들이 너무나 가슴을 찔러 와 가슴에 슬픔과 분노가 쌓이기도 했지만, 일반인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볼일이 있으면 우산을 쓰고라도 볼일을 보러 다니듯이 우리 장애인들도 볼일이 있으면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라도 볼일을 보러 가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앞으로 나는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과, 장애인의 삶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장벽들을 허물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소통하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다. 내가 너무 몰라서, 너무 힘이 부족해서 그저 집 안에서 좁은 창밖의 세계만 바라보며 보내야 했던 그 아팠던 시절을 우리 뒤에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장애인들은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활단상

덧씌운 안경
설보화

오랜만에 언니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재롱떠는 조카들의 장난기가 눈에 어른거리고 큰 조카 녀석의 생일날, 미처 챙기지 못한 선물도 줄 겸1년 만에 나서는 걸음이라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고, 버스 시간 놓칠까 봐 서둘러 현관문까지 열쇠로 찰칵 잠갔는데 ‘아차, 안경’ 하며 화장대에 올려놓았던 안경을 부리나케 챙겨 들다가 그만 떨어뜨렸다.
대리석 방바닥에 ‘따닥’ 유리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왼쪽 눈알 부분이 두 조각 나고 말았다.
며칠 전 거금을 주고 맞춘 유리알 안경, 여름이라 시원해 보이라고 연한 갈색을 넣기까지 했는데 어쩌나, 여분의 안경은 테두리 색이 변해서 서비스 보내고 없는데......
시간을 보니 제 시간에 도착하기 빠듯할 것 같았지만 서둘러 택시 타고 정류장에 도착하면 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착하니 버스가 출발하려고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포항행 버스인지 어쩐지 보지도 않고, 무조건 세우고선 유리창 앞에 눈을 가까이 갖다 댔다.
그제야 ‘포항행 무정차’를 확인.
헉헉거리며 운전사 아저씨께 미안과 감사를 동시에 쏟아내고 자리 찾아 앉아 한숨을 돌린다.
대구를 빠져나간 버스는 고속도로에 몸을 얹고 달린다. 바깥 풍경이 희미하다. 6월 중순이라 분명 햇살은 맑을 텐데 온통 흐릿하다.
파릇파릇 생기를 자랑하던 나뭇잎도 생기 없고, 선명하고 힘 있는 산이 흐릿하고 어깨 축 처진 것만 같다. 모양도 색도 크기도 정확하지가 않다.
안경이 없으니 온통 세상의 풍경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다. 게다가 난시가 있어서 사물은 두 개 세 개 겹쳐서 보이기까지 한다. 두 눈을 모아서 찡그리고 인상을 온통 쓰면 그제야 사물 겹치는 것은 조금 사라진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쓰던 안경을 줄곧 벗지 않고 지금까지 살았다. 벗는다고 아예 보이지 않는 시력은 아니지만 어쨌든 안경은 어느새 내 얼굴의 일부분이 되었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내 얼굴 같지가 않고 타인들도 이상하다며 굳이 쓰라고 할 정도다.
시력은 아무 상관없는 듯 얼굴이 이상하니까 쓰란다. 안경 때문에 얼굴형조차 변한 것 같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일이 흔치 않았다. 반에서 안경 낀 친구들이 드문드문했는데 요즘은 학년이 높을수록 안경 쓰는 친구들이 늘고, 안경 끼지 않은 친구들이 드문드문일 정도다.
내 수업을 받던 학생들 중에서 내가 눈에서 안경을 떼어놓기 무섭게 자기 눈으로 가져가서 쓰고는 ‘어울리냐고, 끼고 싶다’고 한다.
그리곤 텔레비전을 코 앞에서 보거나 전등을 꺼놓고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밤낮없이 컴퓨터의 열기에 눈을 노출시키고 심지어는 책을 볼 때도 엎드려서 보기 일쑤니 꼭 시력을 떨어뜨리는 연습을 하는 것만 같다.
그랬던 아이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들 안경잡이가 되었다.
어릴 때 놀림을 받던 친구가 있었다. 눈이 핑그르르 돌 정도의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일명 달팽이 안경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안경잡이라며 지날 때마다 놀림을 했다.
그 친구가 한창 라식 수술이 붐을 탈 때 수술을 했다. 하고 난 후 1주일을 두문불출하며 밤이며 전등을 끄고 낮에는 커튼을 쳐서 햇빛을 차단했다.
선글라스를 밤낮으로 끼고 다니며 낯선 모습을 만들기도 했으며 약 1년간 눈앞에 검은 실 같은 것이 지렁이처럼 기어 다닌다며 불편을 호소했지만 그래도 안경 안 끼고 다니는 게 어딘데 했었다.
안경을 끼기 시작하면서 커피숍에 앉아 있거나 거리 인파를 볼 때면 안경 낀 이들밖에는 안 보인다. 언젠가 어느 수필에서 본 구절 중 보여지는 것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라식 수술이 시작되면서 거리 인파를 보면 안경을 벗은 이들만 보인다.
내 안경을 버릇처럼 쓰고서 안경잡이가 된 아이들이 이제는 라식 수술이나 라섹 따위를 하고서 보란 듯이 내 앞에 나타나 눈 화장한 예쁜 눈을 보여 준다.
'선생님도 라식하세요' 하며 병원 홍보까지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끼기도 하지만 작은 눈을 감추고 싶거나 모가 난 얼굴형을 가리기 위해서 안경을 끼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는 포항 제철의 우람한 모습을 희미하게 보여 주고 시내로 접어든다. 온통 희미하다. 선명한 것이 하나도 없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언니 집으로 가는 도중에 북부 해수욕장의 푸른 파도를 기대했는데, 바다색이 희미하다 못해 회색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불편하다. 사물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볼 수 없어서 말이다.
결혼 후 언니는 포항 북부 해수욕장을 주변 풍경삼아 단독 주택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가 7년.
조카 녀석은 유치원 등교를 하고 없다. 유치원이래야 언니네 집 바로 옆 스머프의 집처럼 버섯 모양으로 꾸며 놓은 유치원.
조카 녀석은 그곳을 '사랑의 집' 이라 부른다.
안경 쓴 언니가 날 보더니 "안경 없네, 수술이라도 했냐" 한다. 그리고 이내 서두르란다. 오늘 '재롱둥이 그림 잔치'가 있으며 꼬맹이들이 야외로 그림 그리러 갔는데, 다 그린 후 부모님의 감상 시간이 있단다.
오늘따라 안경도 없는데! 하다가 아, 꼬맹이들 그림이지 대충 보는 시늉이나 하지 뭐 조카 녀석 실망하지 않게...
갖가지 색으로 속을 채운 군침 돌게 하는 김밥이 곰 얼굴 모양의 빨간색 도시락에 들어가고, 과자와 음료수, 물이 가방 속으로 들어앉고 준비 끝, 출발.
병아리 같은 아이들의 고사리 손놀림이 빠르다.
삼삼오오 풀밭에 둘러앉아 햇빛 잔뜩 받으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이지만 열심이다. 초록색 풀밭에 노오란 병아리들이 햇볕 쬐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각자 꼬맹이들의 그림이 풀밭 가장자리를 원 만들어 둘러싸고 이젤 위에 얹혀져 들쑥날쑥 세워져 있었다.
칼싸움하는 장면을 멋지게 그려 놓은 그림, 조그마한 로봇들이 싸우는 스타워즈, 예쁜 화관 쓴 공주님이 요술봉 들고 있는 그림 등, 아이들 그림다운 그림들이다.
원색을 사용한 유치원 병아리 원생들의 그림이 햇빛 조명을 받아 밝았고, 고 앙증맞은 고사리 손을 통한 그림 속 사물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병아리들과 한바탕 놀 것만 같았다.
장난기 발동된 내 감상은 갸웃갸웃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다가서기를 반복하며 한 장면 한 장면 대가의 그림을 보듯 하자 조카 녀석이 우스운지 히히 웃는다.
죽 둘러보다 내 발을 잡고 고갯짓 여러 번 하게 만드는 그림 한 점.
'눈을 감고 있는 남자 어른의 눈 위에 씌워진 안경!'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경이 한 개가 아닌 두 개가 씌워져 있다.
'눈 감고 있는 어른의 얼굴에 두 개의 안경이 씌워진 그림' 그린 아이의 이름이 아래 부분에 화가의 낙관처럼 찍혀 있다.
그림 감상이 끝나자마자 풀밭 한가운데 돗자리 여러 개 펴지고 중앙에는 각자 싸 온 도시락과 과자와 음료수가 놓여진다. 고사리 손에 들려진 젓가락들이 왔다 갔다 바삐 움직인다.
'감은 눈 위의 두 개의 안경' 저 그림은 아마도 요 병아리들 중 한 명이겠지!’
점심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제 그림을 이젤에서 내리기 시작하고, 부모님 도움을 받아 챙기는 아이, 선생님 도움 받아서 챙기는 아이들로 어느새 북새통이 된다.
혼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림을 챙기는 꼬맹이가 보인다. 그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손놀림이 빠르다. 어린 아이이지만 야무지게 그림을 돌돌 말아 원통에 넣고 뚜껑을 꼭 닫는다.
슬쩍 그 아이 옆으로 다가가 풀밭에 던져 둔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워 주려 하자 혼자 하겠다며 예의 바른 태도로
"고맙습니다" 한다.
"꼬마 화가님, 그림이 아줌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이 눈을 끌어당기는데, 혹시 그림 설명 부탁해도 될까요? 특히 안경 두 개에 대해서..."
주저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들거리는 쌍꺼풀 없는 까만 눈동자를 명랑하게 굴리며, 도톰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거침없다.
"우리 아빠에요"
그리고 곧장
"우리 아빠는요. 시각 장애인이에요. 안 보이신대요. 오늘같이 이렇게 밝은 햇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냥 깜깜한 밤 같대요."
손 위에 햇살을 받아 내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안경 두 개 씌운 이유는요, 두 개 씌우면 잘 보일 것 같아서요. 그런데 진짜 이유는요. 날 쳐다봐 달라고 그린 거에요"
하고서 저만치 캥거루 걸음하며 걸어간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데 순간 꼬맹이 얼굴에도 두 개의 안경이 씌워져 있다.

인사로 얻게 된 길동무
정희란(교사)

  한 소녀가 있습니다. 작고 여린 몸매에 지적 장애에 언어 장애를 공반한 소녀입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성격도 투박하여 타인과의 소통이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 소녀입니다. 보육원에서 자란 소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섬세하고 친밀한 감정의 교류를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배울 기회가 적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교실이 같은 층에 있어서 오고가며 우연히 그 소녀와 만났습니다. 교사와 눈이 마주쳐도 절대로 시선을 거두지 않는 당돌하고 되바라진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매력이 있는 소녀였습니다. 작고 여린 몸매이지만 학교에서는 육상 선수로서, 음악 줄넘기팀의 구성원으로서 강당에서 연습하고 운동장에서 달음박질을 하는 그 소녀는 그렇게 제 눈에 자주 띄게 되었고 하루하루 지나는 동안 제가 그 소녀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사를 하지 않는 그 소녀를 복도나 혹은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불러 주며 인사를 먼저 하였고, 인사를 하도록 지도하였습니다. 처음 그 소녀가 저에게 마지못해 인사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저의 인사 지도를 못내 따르기 싫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시선을 땅바닥에 던져 둔 채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웬 간섭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가끔 저를 살피던 아이...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교사의 지시이니 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몸짓으로 대충 고개를 까딱이는 제법 삐딱한 태도였습니다.
  제가 꾸준히 관심을 보이고 먼저 인사를 하고 억지로 인사를 시키기 시작한 지 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요. 점심 식사 후 교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마주치던 소녀는 제게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기특하고 반가워 “그래 ○○야, 네가 먼저 인사를 하니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 소녀는 제게로 몸을 던져 제 허리를 안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소녀는 제게 길동무가 되었습니다. 제가 퇴근할 때쯤이면 비슷한 시각에 그 소녀도 방과 후 교실을 마칩니다. 마치자마자 곧장 저의 교실로 다가와서 집에 같이 가자고 재촉합니다. 그 길동무와 함께하는 길은 학교 구관 현관에서부터 운동장 끝에 있는 주차장까지가 전부인데도 소녀도 저도 정말 즐겁습니다. 행여 제가 퇴근 시간이 다 되어도 미처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을 때도 절대로 먼저 지나쳐 가는 법 없이 제 교실 문 앞에 서서 집에 같이 갈 것을 재촉합니다. 출장 업무가 있어 먼저 퇴근을 하는 날이면 그 다음날 아침 등굣길에 제게 와서는 어제 어디에 갔는지 물어보고 자기가 교실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말을 하며 어리광을 부립니다.
  소녀와 저는 이렇게 친해지게 되어 거의 매일을 길동무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소녀는 태성이 당돌하고 무례한 아이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쳐 버렸더라면 다정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어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얼마간 제가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인사를 한 다음 곧 시들해져서 저 역시 인사를 하거나 말거나 하는 식의 오기로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지내 왔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제 학생이었기에, 우리 반 아이는 아니지만 제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 보아을 뿐인데 교사로서의 당연한 임무에 대한 보답치고는 너무나도 큰 보답을 받았으니 그것은 아름다운 길동무를 얻게 된 것이지요.
  먼저 인사를 하고 먼저 안부를 묻고 먼저 관심을 가지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스스로 다가가서 먼저 인사를 하기는 쑥스럽지만 누군가가 다가와서 해 주는 인사를 먼저 받았을 때 느꼈던 반가움과 고마움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인사를 자신이 먼저 할 때, 상대방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까, 혹은 인사를 받는 사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나 않을까 두려우십니까? 그저 마음속 한편에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과 긍정적인 호기심을 발동하여 용기를 내어 먼저 인사해 봅시다.
  옛말에 남을 위해 등불을 밝히면 내 앞이 밝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사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남에게 하는 인사가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고 결국은 내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저의 길동무는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그 소녀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교실을 나섭니다.

문화원 소식

  7월 10일  제76차 역사 기행은 ‘한국의 석회 동굴과 원자력 발전소를 찾아서’를 주제로
경북 울진의 봉평 신라비, 성류굴, 민물 고기 전시관, 원자력 발전소를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찾은 성류굴은 더위를 식힐 정도로 시원했고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을 직접 만져 보고 자연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으며 원자력 발전의 원리와 그 유용성을 현장에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던 원자력 발전소의 방문, 시원한 동해의 풍광과 영상이 겹쳐지는 기행이었습니다.

  8월 13일~14일  제77차 역사 기행은 문화 캠프와 겸하여
‘서해 갯벌 생태 체험’을 주제로 전북 고창의 고창 읍성, 고인돌 공원, 미당 서정주 문학관, 해넘이 마을, 선운사를 다녀왔습니다.
  고창 읍성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공원을 지나 야간의 사파리를 타고 갯벌로 나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범게며 조개를 직접 채취해 보고 바닷바람과 별빛을 만끽한 갯벌 체험은 한여름 밤의 잊을 수 없는 우리 문화원만의 캠프였습니다. 밤을 지새면서 더욱 가까워진 우리들, 내년 캠프를 기약하며 아쉬움 속에 작별을 하였습니다.

  8월 28일  젊은 성악가 김호중을 격려하기 위한 콘서트에 문화원 식구들이 많은 격려를 보낸 공연이었습니다. 김호중 화이팅! 수성 아트피아 / 김호중 4U(For You) 콘서트

  9월 9일~9월 28일  가을밤을 격조 높은 문화의 향기로 수놓은 문화 아카데미가 9월 9일 개강되어 6주에 걸쳐 성황리에 끝을 맺었습니다. 이번 강좌에는 김용락(시인), 배성혁(대구 국제 뮤지컬 페스티발 위원장), 이대희(대구 mbc라디오 골든 디스크 진행자), 주영위(대구 시립 국악단 상임 지휘자), 박연희(연극인), 작곡가 이상만씨 등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좋은 강좌를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2011년에도 수준 높은 문화 아카데미로 회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드릴 것을 다짐합니다.

  9월 11일  제78차 역사 기행은 ‘한국의 자기 문화 음미와 도자 마을을 찾아서’를 주제로 대전의 계룡산 도자기 마을, 계족 산성, 지질 박물관, 동춘당을 다녀왔습니다.  
  계룡산 자락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정성껏 빚은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도자기 체험이었습니다.

  10월 9일  제79차 역사 기행은 ‘알밤 줍기의 즐거움을 곁들인 사천 기행’을 주제로 경남 사천의 다솔사, 매향비, 우주 항공 박물관, 선진리 왜선을 다녀왔습니다. 다솔사 아랫마을에 펼쳐진 밤 숲에서 가시에 찔려 가며 알밤을 채취하는 즐거움과 군밤을 호호 불며 맛있게 먹던 가을날의 오후가 기행의 풍성함을 더해 준 추억이 되었습니다.

  11월 13일  제80차 역사 기행은 ‘한국의 고건축과 백제 문화를 찾아서’를 주제로 충남 예산과 서산의 고건축 박물관, 해미 읍성, 개심사를 다녀왔습니다.  
  고건축 박물관에서 여태까지 설명으로만 듣던 건축물의 구조를 모형을 직접 만져 봄으로써 우리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뜻깊은 기행이었습니다.

  11월 24일  수성 아트피아 / Jazz&story 백진우
  깊어 가는 가을밤에 회원들과 함께 재즈의 정수를 온몸으로 느껴 본 공연이었습니다.

  12월 11일  제81차 역사 기행은 ‘해군 기지와 군함을 찾아서’를 주제로 경남 창원, 진해의 해군 사관 학교 박물관, 진해 우체국, 해양 테마 파크, 진해 드림파크를 다녀왔습니다.
  해군 사관 학교 부두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실물 크기로 재현한 거북선에 승선하여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회상해 보고 우리 선조들의 배 만드는 기술에 탄복을 금치 못한 경인년의 대미를 장식한 기행이었습니다.

  12월 27일  한 해 동안 프로그램에 참여한 회원님과 자원 봉사자분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신년의 소망을 함께 빌며 뜻 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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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1년 3월 1일  
발행인․김현준  
기획․편집
편집․김창연
교열․이석규
디자인․박진희
발행처․사단법인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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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15년 봄호 (통권 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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